쥬밀웹진

 

지 않는 랑법

 

즈씨




 






 

 

 

새벽 3 30, 2구역 주택가에서 화재가 발생해 1명이 사망했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화염계 센티넬이 폭주한 것으로 추정하고 정확한 원인을 조사하고 있으나, 센터에서는 단순 방화라며 이와 같은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한편 센터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사라진 국내 유일의 멀티 센티넬, 이재현이 돌아왔다고.

 

-

 

전투용 수트를 입고 센터 복도를 걷는 건 오랜만이었다. 과거를 반추하는 주연의 걸음걸이는 한없이 차분했다. 소문의 진원지답게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웅웅 소음이 크게 울렸다. 아마 그가 내보내 달라며 악다구니를 쓰는 소리일 테다. 병실 문 앞을 지키던 형운이 주연의 등장에 반색을 표했다. 아 선배님, 왜 이제 오십니까. 호출한 지가 언젠데. 저보다 한참 어린 얼굴은 피곤함에 찌들어 있었다. 상태는 좀 어때. 힐끗 안을 가리키자 형운이 지친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전혀요. 이게 작전 뛰는 것보다 훨씬 힘듭니다.”

어디 선배 앞에서 이게. 새끼들이 빠져 가지고…”

선배님도 아시잖아요. 오늘도 퇴근은 글렀지 싶습니다.”

 

어린애의 투정을 듣고 있으니 조금 긴장이 풀렸다. 요즘 내가 너무 편하게 해줬지? 주연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형운의 어깨를 툭툭 쳤다. 여기 내가 맡을 테니까 가서 눈이나 붙여. 일순 형운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진짭니까? 두말하기 없깁니다. 말과 달리 다리는 벌써 문과 멀찌감치 떨어진 후였다. 맘 바뀌기 전에 뛰어가라 인마. 주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후다닥 달려가던 형운이 복도 모퉁이를 돌기 직전에 멈춰 섰다. 근데 선배님 혼자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 서린 음성에 주연이 옅게 웃었다. 너 내가 누군지 몰라?

 

그 말에 형운이 안심한 듯 다시 복도를 뛰쳐나갔다. 복도엔 오롯이 저 혼자다. 안은 아직 잠잠했다. 심호흡을 한 주연이 문 손잡이를 잡았다. 병실 문을 열자 소파에 널브러진 인영이 보였다. 난동을 피우느라 지쳐 쓰러진 모양새였다. 주연이 무릎을 낮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저예요.”

“…”

또 보네요. 그렇죠?”

 

재현이 헉헉거리며 가쁜 숨을 내쉬다, 주연과 눈이 마주치고는 욕설을 지껄였다. 저리 안 꺼져? 씨발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나 내보내 달라고. 익숙한 일인 듯 주연이 평온하게 대답했다

 

그럴 순 없죠. 언제 또 폭주할지도 모르는데.”

뭐 이 새끼야?”

잘 아실 텐데요. 재현씨한텐 여기가 더 안전하다는 거.”

 

센터에 갇힌 지 벌써 이 주째였다. 이곳에서 눈 떴을 때부터 재현도 제 미래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바깥세상에서 센터는 흔히제 발로 걸어나올 수 없는 곳으로 불렸다. 아마 평생 여기서 썩게 되겠지. 아니면 죽거나. 누구에겐 이곳이 동경의 대상일지도 모르나 재현에게는 지옥이었다. 꿈도 희망도 없이 무언가에 묶여 산다는 것이.

 

침묵 속에 대치가 이어졌다. 회오리치는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던 주연이 씩 웃었다. 어디 한번 해봐요. 하고 싶은 대로. 그게 재현의 화를 돋웠는지 그의 눈에 불꽃이 제대로 튀었다. 재빨리 몸을 일으킨 재현이 손에 닿는 것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안타깝게도 그것들은 모두 주연을 빗겨 나갔다. 일반인보다 반사신경이 뛰어난 덕분이었다. 벽에 맞아 산산조각이 난 조명과 각종 집기류의 잔해가 바닥에 어지러이 얽혔다

 

재현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주연이 작게 감탄했다. 역시 이재현은 다르네. 따로 운동한 것도 아닐 텐데 여전히 그는 빠르고 강했다. 체력 단련실에서 항상 1등을 기록하던 사람다웠다. 모든 걸 때려 부쉈음에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재현은 한참이나 씩씩댔다

 

못해. 못한다고.”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거 참 말 많네. 어차피 나 안 내보내 줄 거면 걍 담당자나 바꿔주면 안 되냐?”

왜요. 내가 싫어요?”

 

재현이 어처구니없단 얼굴로 빽 소리쳤다. 어 싫어. 진짜 존나 싫어. 너 같으면 좋겠냐? 코앞에서 자기가 싫단 소릴 해도 주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예상했단 듯 전혀 동요하지 않는 게 더 재현의 속을 끓였다

 

그니까 내가 왜 싫은데요. 상식적인 이유를 대봐요.”

존나 재수 없어서 싫어.”

그건 별로 상식적이지가 않은데요.”

야, 꼭 네가 맡아야 되냐 이거?”

네. 밑에 애들 시키기엔 가오가 떨어져서요. 저도 짬이라는 게 있거든요.”

 

처음 봤을 때부터 주연은 한결같은 태도를 고수했다. 전투용 수트는 에나멜처럼 광택이 나는 소재인지라 그가 움직일 때마다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났다. 주연은 어떤 상황에서도 동요 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숨을 내쉬었다. 판판한 근육이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했다. 재현이 어떤 말을 하든, 무슨 소동을 일으키든 상관없이. 볼까지 시뻘게진 채로 화를 내지르는 재현과는 딴판이었다. 고요한 바다 같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열이 났다

 

머지않아 재현은 주연의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다. 불같이 화를 내도 제게 말 한마디를 안 지는 게 싫었다. 철저히 무시하는데도 꼬박꼬박 인사하고 말을 붙이는 것도 그렇고.

 

나 싫어할 시간에 연습이나 해요. 괜히 힘 빼지 말고. 어차피 나한테 안 되면서 뭘 뻗대요, 뻗대길.”

이젠 싸가지도 밥 말아 먹었냐?”

이 정도 다정함이면 충고라고 해두죠.”

다정함이 다 얼어 뒤졌나 봐.”

한물갔어도 나  SS급 센티넬이었다니까. 이런 걸로 상처 하나 낼 수 있을 거 같아요? 능력을 써야지.”

 

뜯어 보면 하나같이 다 맞는 말이라서 더 싫었다. 열이 확 뻗친 재현이 소리를 질러댔다. 안 놀릴 테니까 한 번 해봐요. 해보지도 않고 싫다고만 하면 되나. 주연이 능글맞게 웃었다. 그나마 덜 부서진 휴지 케이스를 재현 앞에 턱 갖다 주면서 말이다. 아주 다정도 하시지. 비아냥거리자 주연이 친절하게 휴지 한 장을 뽑아 재현의 손에 쥐여주었다

 

정신 집중하고요.”

알겠으니까 좀 조용히 해.”

 

분명 예전엔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능력을 썼을 텐데. 이젠 아무리 용을 써도 들어먹질 않았다. 팔랑거리는 휴지는 촛불로도 쉽게 타버릴 만큼 얇디얇았다. 그래, 저것만 불태우면 된다. 눈이 아플 만큼 휴짓조각을 노려보느라 절로 재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정도면 무언가 생각날 때도 되지 않았나. 이상하리만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깜빡이지 못한 눈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이마를 찡그렸다가 눈을 감았다가 별 짓거리를 다 해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거봐. 안 되잖아.”

하기 싫은 건 아니고요?”

 

주연을 노려보던 재현이 하는 수 없이 재차 눈을 감았다. 신경을 한 곳에 모아보려고 애썼다. 어둠 속에서 불꽃이 이는 순간을 상상하며. 그러다 새빨간 불덩이가 재현을 감싸던 그날을 떠올렸다

 

제 폭주로 인해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유순한 미소를 짓던 은성은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놀란 얼굴이 생생했다. 바보 같은 새끼. 구은성은 마지막까지 재현을 걱정하고 있었다. 죽는 순간까지도.

 

이래서 내가 하기 싫댔잖아. 나 아무것도 못 한댔잖아. 누가 나보고 센티넬이래? 그거 다 잘못된 거야. 3년 동안 멀쩡하게 일반인으로 잘만 살았는데 누구더러 센티넬이래. 주저앉은 재현이 어깨를 떨었다. 손에 얼굴을 파묻고 도리질을 쳤다. 나 아냐, 내가 안 그랬어씨발 나는 그냥 일반인이라고 몇 번을 말해. 뒤에서 주연이 무어라 소리쳤다. 그러나 불안이 잠식된 귀엔 무엇도 들리지 않았다.

 

쨍그랑!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조명이 결국 바닥으로 추락했다. 가까스로 재현을 제 쪽으로 잡아당긴 주연이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재현이 다칠 뻔했다. 어지럽게 쌓여 있는 장애물을 간신히 피한 주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1인실을 날려버렸단 보고가 들어가면 센터장이 자길 가만 안 둘 텐데. 될 대로 되라며 재현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나 좀 봐요. 이제 괜찮으니까.”

안 괜찮아.”

이번엔 뭐가요.”

 

온몸을 웅크린 채 재현이 덜덜 떨었다. 내가 사람을 죽였어.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을내가, 내가 불을 냈다고

 

주연은 재현이 마음껏 흐느끼도록 내버려두었다. 사방으로 튄 유리조각에 스쳤는지 재현의 뺨에 옅은 핏자국이 맺혔다. 핏방울이 턱선을 타고 뚝뚝 흘렀다. 유리에 맺힌 핏방울이 새빨갰다. 지겹게도 본 색깔이다. 난장판이 된 병실은 폐허가 된 도시와 유사했다. 흩날리는 먼지, 모든 게 부서진 공간. 그리고 다친 사람들. 수트를 입고 있으니 피부로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현장에 투입될 때마다 몇 명이 죽어나갔던가. 셀 수 없는 숫자가 스쳐 지나갔다. 한층 잠긴 목소리로 주연이 입을 열었다.

 

난 열다섯에 여길 들어왔어요.”

자랑이야?”

그럼 내가 사람을 얼마나 죽여봤을 것 같아요?”

 

멍하니 주연을 응시하던 재현이 귀를 틀어막았다. 알고 싶지 않다. 차라리 농담이면 좋으련만 주연의 눈빛은 쓸데없이 진지했다. 아 어지러워. 머리가 팽팽 돌았다.

 

안 할 거야.”

못하는 거겠죠.”

그래, 나는 겁쟁이라서 못해. 알겠어? 무서워서 못 해먹겠다고.”

나약하게 굴지 마요. 또 애꿎은 사람 죽게 할 거예요?”

 

이 개새끼가 못하는 말이 없네. 단숨에 주연의 멱살을 움켜쥔 재현이 으르렁거렸다. 어지간히 화가 많이 났는지 눈빛이 붉었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올곧게 바라본 주연이 갑갑한 숨을 내쉬었다. 재현의 손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주연에게서 찬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살고 싶으면 해야 할 거예요. 가치가 없는 센티넬은 폐기되니까.”

또 잔소리.”

죽이는 게 아니라사는 거예요. 여기선 다 그렇게 살아요.”

“…”

그러니까 어떻게든 살아요. 이미 지난 거 붙들고 있지 말고.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잖아요.”

 

동공의 불빛이 점차 사그라졌다. 허탈한 마음으로 손에 든 힘을 뺐다. 사실 재현도 별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을 안다. 시한폭탄인 제 몸을 안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센터에 들어온 이상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다는 것을. 속이 절절 끓어서 몸이 엉망진창이었다

 

알아. 근데 나도 핑계 아니야. 진짜 기억이 하나도 안 나서 그래.”

 

휘청이는 어깨를 주연의 손이 감쌌다. 피부에 닿는 감촉이 너무나도 차가워서 재현은 약간 놀라고 말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몸을 가진 남자가 중얼거렸다. 체온과는 달리 따뜻한 목소리로.

 

그럼 계속 다시 해보죠, 뭐.”

얼마나?”

될 때까지요. 같이 해요, 내가 도와줄게요.”

 

재현은 한참 망설이다가 주연이 내민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리고 보니 주연의 몰골이 처참했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게 영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앞머리 위에 붙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자, 매사에 덤덤하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쑥스러워할 줄도 아네. 주연이 모른 척 콧잔등을 긁었다. 어울리지 않은 수줍음에 재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웃다가 문득 주연의 모습이 누군가와 닮았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싫었던 거구나. 복잡하던 감정에 씁쓸한 결론을 내렸다.

 

구은성이 생각나는 밤이었다. 늘 그랬듯이.

 

-

 

이재현은 3년 전, 단독 행동으로 작전에 무단 개입했으며 임무 중 행방불명되었다. 이는 정부에 반하는 단독 행동으로 원칙상 명령 불복종에 해당한다. 반역으로 판단되는 죄는 사살할 수 있으나, 폭주 후유증으로 해리성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바가 참작되어 재활 후 전투에 참여하는 것으로 대체한다…….

 

폭주 이후 재현이 가장 처음 한 일은 수많은 서류에 서명하는 것이었다. 빛바랜 ID 카드에 담긴 얼굴은 분명 제 모습이 맞는데 도통 기억나는 게 없었다. 화염계 멀티 센티넬 이재현. 제 이름 옆에 붙은 낯선 글자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센티넬. 화염계. 멀티. 파이어 컨트롤무슨 말인지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각종 보안 조항에 사인부터 해야 했다. 수많은 서명란에 이재현 석 자를 빼곡히 적었다

 

멍하니 서명란에 사인하고 나서야 재현이 입을 뗐다. 저 올해로 몇 살인가요. 그때 재현은 처음으로 정확한 제 나이를 알게 됐다. 스물여덟...센티넬의 평균 수명을 웃도는 나이였다. 또 언제 폭주할지 몰라 재현의 곁엔 전투태세를 갖춘 요원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유난도 그런 유난이 없다며 재현이 코웃음 쳤다. 과거엔 몰라도 현재의 재현은 폭주 전까지 한 번도 능력을 써본 적이 없었으니까.

 

불길 속에서 은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끝으로 재현은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땐 손발이 침대 기둥에 묶인 채였다. 낯선 공간엔 수상한 사람들이 가득했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센터구나. 날고 기는 센티넬이 교대로 지키는 탓에 재현의 탈출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연인을 잃었다는 괴로움을 채 이겨내기도 전에 그들에게 한참이나 시달렸다. 며칠 동안 온몸에 각종 기계를 달고 검사를 하질 않나, 심리상담이라는 명목으로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대질 않나. 양옆에 요원이 붙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자신도 모르는 이재현의 과거에 대해. 좀처럼 기억나는 게 없어 멍청히 벽만 바라보게 됐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과거의 이재현은 멋대로 작전에 출동해 단독 행동을 저질렀다고 했다. 일이 잘못돼 전투기가 민간 구역으로 추락사했고, 재현은 능력 과부하로 폭주 직전까지 갔다. 일반 센티넬이었으면 가이딩 수치가 떨어져 즉사했을지 모르지만, 다행히 재현은 멀티였다. 자가 가이딩을 통해 간신히 목숨은 건졌으나 후유증으로 해리성 기억상실을 겪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머리를 가지고 길거리를 떠돌아다녔다. 제가 누군지, 몇 살인지, 어디서 살았는지조차 몰랐다. 그나마 아는 건 이름 하나. 찢어진 수트 안쪽에 새겨져 있는 이름이었다. 이재현.

 

괴이한 일들을 겪으니 평범하게 살 수가 없었다. 가진 건 몸뚱어리뿐이었고 다행히 체력이 좋았다. 뒷골목을 전전하며 닥치는 대로 일했다. 묵묵히 일한 덕에 재현을 눈여겨본 박사장을 통해 꽤 괜찮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가이딩 대체제를 만드는 불법 연구실이었다

 

가이드의 가이딩을 채취하고 이를 액체화하면 주사기에 투입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이곳 사람들은 그걸 앰플이라고 불렀다. 말이 가이딩 대체제지, 실제로 센티넬을 위한 약물은 아니었다. 센티넬이 아닌 일반인이 가이딩 대체제를 지속해서 맞을 경우 환각을 보거나 지나친 흥분 효과를 느끼는 등 큰 부작용이 뒤따랐다. 약에 중독되는 경우도 많았다. 신종 마약인 셈이었다.

 

그곳에서 재현은 구은성을 처음 만났다. 은성은 센터에 입소하지 않은 가이드였다. 발현 사실을 숨기고 살다가 발각돼 센터로 끌려갈 뻔했으나, 문턱에서 간신히 도망쳤다고 했다. 은성은 미로 같은 어둠의 거리를 헤집고 들어가 뿌리를 내렸다. 그는 가이딩 대체제의 연료였다. 나중엔 장사가 너무 잘 되자 은성의 힘으론 부족해 다른 약물을 배합해 팔기도 했다.

 

재현은 은성의 옆에서 온갖 심부름을 했다. 은성은 그다지 말이 많지 않았다. 기억을 잃은 탓에 낯선 이를 모두 경계했으나 유일하게 은성에게만은 마음을 열 수 있었다. 궁금할 만도 한데 자신에 대해 꼬치꼬치 묻지 않는 게 좋았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다부진 체형이라 은성은 제법 사나운 인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무서워했다. 단지 재현만이 공감하지 못할 뿐이었다. 은성은 재현 앞에서만 웃었으므로.

 

재현은 몸에 열이 많아 한겨울에도 반팔을 입고 다녔다. 땀에 젖은 앞머리가 곱슬거렸다. 체온이 높은 탓에 얼굴은 늘 붉었다. 이따금 재현의 볼을 쿡 찔러보던 은성이 감탄하곤 했다. 따끈해. 눈이 쌓이는 겨울에도 재현은 홀로 한여름이었다. 그땐 단순히 열이 많은 체질이라고만 여겼지, 불을 만들어낼 수 있다곤 생각하지 못했다.

 

3년 동안 무탈한 날들이 지나갔다. 그동안 재현은 사고 한 번 치지 않았다. 은성과 같은 집에서 눈을 뜨고 잠드는 나날이 이어졌다. 서로의 과거가 궁금하지 않을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다. 징조가 없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능력을 분출하지 못한 재현의 몸이 망가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재현의 몸에 차곡차곡 쌓인 불길은 기척도 없이 한순간에 뻥 터져버렸다. 순식간에 재현이 화마로 변했다. 그 위력에 주변의 모든 것이 불타 없어졌다.

 

왜 모든 행복한 순간은 바람처럼 사라질까. 병동에 갇혀 창문을 바라보던 재현이 한숨처럼 내뱉었다. 행복이 끝났으니 그만 죽고만 싶은데, 그마저도 못하는 운명이 참 가혹했다.

 

-

 

다음번의 만남에서 주연이 꺼낸 건 고작 성냥 한 개비였다. 재현이 눈썹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이게 뭔데.”

뭐겠어요. 불붙여봐요.”

방법 알려준다며? 내가 할 줄 알면 이러고 있겠어?”

머리는 까먹었어도 몸은 기억할 거예요.”

 

황당함에 소리치자 여유로운 답변이 돌아왔다. 그럼 이건 어때요. 주연이 성냥갑에서 다른 성냥 한 개비를 꺼내 쓱 그었다. 불꽃이 반짝 튀었다. 분수처럼 쏟아지는 불그스름한 빛깔. 주연이 재현에게 성냥불을 건넸다. 잘 봐요. 이제 좀 기억나요? 잠자코 일렁이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재현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불, 어둠, 뜨거움, 그리고

 

동시에 밀려드는 기억에 재현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화마가 연인을 덮쳤다. 불의 근원지는 다름아닌 자신. 놀란 얼굴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끔찍한 순간은 머릿속에서 도무지 잊히지 않았다. 가지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 잘못이야.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내가 잘못했어

 

눈 떠요.”

 

낮은 음성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성냥불은 꺼져 있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머뭇머뭇 재현의 볼에 닿았다. 볼을 쓰다듬던 손길이 아쉬운 듯 떨어졌다. 이걸로 닦아요. 주연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언제 울었는지 얼굴이 온통 축축했다

 

오늘 훈련은 이만 하죠.”

 

그 이후로 재현은 며칠 동안 성냥에 불을 붙이는 연습을 했다. 큰 성과는 없었다. 주연은 아쉬운 기색 없이,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가차 없이 훈련을 멈췄다. 영 진척 없는 훈련에 점차 재현도 주연의 눈치를 보았다. 불빛만 봐도 눈물을 뚝뚝 흘리던 재현은 어느 순간부터 울지 않게 됐다. 그렇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몸에 녹초가 되어 숙소에 돌아오면 끝없는 우울감이 재현을 집어삼켰다. 그렇다고 쉽게 죽을 수도 없다. 바이탈 수치가 낮아지면 팔에 찬 스마트 워치가 시끄럽게 울어댈 것이고, 곧바로 주연에게 상태가 공유될 테니까

 

쉬이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정처 없이 센터를 떠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발길이 센터장실 앞에 닿아 있었다. 자리를 피했어야 했는데, 새어나오는 불빛에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있어서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재현은 아직이야?”

제게 일임하셨던 거 아닙니까.”

언제까지 손 놓고 기다리란 말이야? 아직도 사사로운 감정이 남아있는 거라면 그만 정리해.”

그런 거 아닙니다.”

상부에서도 관심이 이만저만한 게 아냐. 내가 언제까지 막아줄 수 있을 것 같나.”

“...죄송합니다.”

그래, 자네라면 무슨 말인지 알 거라고 생각하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재현이 후다닥 빈방으로 숨었다. 혹여 들킬까 봐 주연의 걸음 소리가 복도 끝에서 사라질 때까지 입을 틀어막았다. 이 정도로 압력을 받으면서도 이주연은 끝까지 함구했다. 모든 걸 혼자 책임지겠다는 듯이. 그래서 재현도 알면서 모른척했다.

 

재현의 성과가 더뎌질수록 상부에서 주연을 호출하는 일이 늘었다. 어느 새부턴가 주연은 일이 있다는 핑계로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주연의 방문 앞에서 기다리는 날이 늘어났다. 사격 연습실, 전투 훈련실, 체력 단련실, 병동, 식당어딜 가도 이주연은 없었다. 능력 찾도록 도와준다더니. 이렇게 기약 없이 기다리는 거 별론데.

 

한참 만에 돌아온 주연은 피로한 얼굴이었다. 어디 갔다 왔냐고 물어도 묵묵부답이라 재현의 복장이 터질 뻔했다.

 

그냥 바람 좀 쐬고 왔어요.”

뭔 바람이길래 그렇게 오래 걸려.”

 

또 이주연을 찾아다니다 무작정 주연의 방문을 연 날. 의외로 주연은 방 안에 있었다. 그는 셔츠를 걷어 올린 팔뚝에 주삿바늘을 꽂고 있었다. 뜻밖의 등장에 재현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거기 서서 보고만 있을 거예요? 좀 들어오지?”

이게 뭔데. 너 약도 하냐?”

보면 몰라요? 이거 만들다 왔다면서.”

 

주연은 황당한 낯빛으로 앰플 통을 들어 보였다. 그제야 그것이 가이딩 대체제임을 알았다.

 

너 가이드 없어?”

은퇴한 센티넬한테 뭔 가이드예요.”

그래도가이드 없으면 어떻게 살아.”

됐어요. 어차피 상성률 맞는 사람도 없고.”

 

주삿바늘이 꽤 깊숙이 팔뚝을 뚫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불법적인 용도로만 봤지 원래의 용도로 사용하는 건 처음 봤다. 효과는 좀 있고? 보면 알잖아요. 주연과는 팀 워치를 쓰는 터라 서로의 가이딩 수치를 확인할 수 있다. 자가 가이딩이 가능한 재현은 항상 최고 수치를 기록했고 주연은 그에 못 미치는 수치를 맴돌곤 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수치가 낮게 떨어진 것은 처음 봤다. 간당간당 오십퍼센트 언저리에 달하는 주연의 가이딩 수치를 보고 심란해졌다. 15%로 떨어지면 폭주라고 하던데. 한참 후 워치를 재확인하자 수치가 고작 십퍼센트 정도 상승한 게 전부였다.

 

사기 아니냐? 원래 이렇게 조금 올라가?”

이거라도 해서 사는 거죠.”

 

상의를 벗은 구릿빛 몸엔 자잘한 생채기가 가득했다. 대부분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에 찔린 자국이었다. 특히 등에 난 커다란 흉터는 하나로 이어져 있어서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흔적을 보건대 아주 오래전부터 있던 상처 같았다. 센티넬이면 일반인보다 회복 능력이 빠를 텐데 이렇게 자국이 남은 걸 봐선 꽤 많은 공격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

 

너도 참 힘들게 산다…”

.”

야 왜 웃어? 걱정해준 건데도 웃네.”

꼭 세상 다 산 사람 같아서요.”

산전수전 다 겪긴 했지. 기억이 안 나긴 하지만.”

나이가 많긴 하죠. 센터에 있는 현역 중엔 재현씨가 최고령일 걸요.”

알면 노인공경 좀 해라.”

그래 봤자 한 살 차인데요 뭐.”

 

나 없는 새에 연습은 좀 했어요? 주연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몰라. 퉁명스런 재현의 대답에 주연이 웃다가 일순 얼굴을 굳혔다. 내일 같이 연습해요. 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이젠 진짜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요.

 

약속한 시간에 둘은 드넓은 전투 훈련실에서 만났다. 두 사람이 고글을 쓰고 전투 모드를 누르자마자 투명한 방어막이 훈련실을 감쌌다. 지금부터는 가상 현실이었다. 훈련의 룰은 아주 간단했다. 능력을 사용해 서로의 가상 격투기를 격추시키면 됐다. 조종석 스크린에 start 표시가 뜨자마자 주연이 핸들을 돌려 재현의 전투기를 향해 돌진했다

 

미친 거 아냐?”

얼마나 버틸 수 있어요?”

상식적으로 이걸 어떻게 버텨.”

버틸 수 있어야죠. 이재현이면.”

 

주연은 순식간에 대기 중의 수증기를 얼려 얼음 덩어리를 만들었다. 얼음을 만들고 날리는 모든 동작이 학습된 것처럼 재빨랐다. 어차피 전투기 날개가 얼면 공기의 압력차 때문에 자연스럽게 추락할 테지만 그 시간마저도 줄이고 싶은 것처럼 굴었다. 얼음 뭉치가 엄청난 속도로 재현의 전투기에 꽂혔다. 중심을 잃고 회전하던 전투기가 연기를 내뿜으며 추락했다. 재현이 어떻게 손 써보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스크린에 END 표시가 뜨자 주연이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이러면 안 돼. 머리를 마구 헤집던 주연이 결심한 듯이 방어막을 해제했다. 한 것도 없는데 재현은 벌써 땀범벅이었다.

 

실전처럼 해볼게요.”

“…뭘 한다고?”

지금부터 내가 적이라고 생각하고. 공격까진 안 해도 되니까 방어라도 해봐요.”

 

벙찐 재현을 뒤로하고, 주연은 묵묵히 전투화를 고쳐 신었다. 빙결계 센티넬인 주연의 전투화는 밑창에 작은 스케이트 날이 숨겨진 구조여서 전투 시 바꿔 사용할 수 있다. 주연이 가는 방향대로 길이 얼었다. 미끄러지듯 움직인 주연은 아직도 그 자리에 멈춰선 재현을 발견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거기 서 있을 거예요? 얼음 조각을 화살처럼 날리자 그제야 재현이 발을 뗐다.

 

도망이라도 가겠다는 심산으로 재현은 무작정 뛰었다. 뒤에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얼음 기둥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끝 부분이 뾰족한 것이 꼭 화살촉 같았다. 이대로 맞았다간 정말 뼈가 작살이 날지도 몰랐다. 쿵! 재현의 앞에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내려앉았다. 얼음에 부딪힌 재현이 욕설을 뇌까렸다. 찬 기운에 입김이 절로 나왔다

 

존나 춥네 진짜추워본 거 오랜만인데.”

거길 나가 봐요. 어서요.”

아 좀 기다려 봐. 나도 생각 중이니까”.

시간 없어요.”

 

사방이 얼음 탑으로 가로막혔다. 도대체 어떻게 빠져나가란 거지.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점점 더 재현을 감쌌다. 저 멀리서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곧 작전이 있을 거예요. 센터장이 재현씨를 노리고 있어요.”

알아.”

상부에선 어떻게든 투입시킬 거예요. 멀티니까. 이보다 더 큰 메리트가 없다고 좋아하겠죠.”

안 그래도 반정부군 돌발 행동 늘어났다고 센터 분위기가 뒤숭숭해.”

아는 사람이 그래요? 이대로 작전 투입되면 어떻게 하려고? 지금은 훈련이지만 실전은 달라요.”

안 되는데 그럼 어떡해.”

 

어지간히 답답한지 급기야 작은 얼음 조각이 재현의 얼굴 옆을 스쳐 지나갔다. 팔다리에 찬 얼음이 닿았다. 웬만한 사람보단 뜨거우나 단순히 체온으로만 단단한 얼음을 녹이기엔 역부족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온몸에 얼음이 마구 비벼졌다. 닿은 자국마다 피부가 어는 게 느껴졌다. 춥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그냥 이대로 굳어버리는 게 아닐까. 감각이 무뎌져서 그런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눈보라 속에서 주연이 절규하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눈을 감아버렸을지도 몰랐다.

 

바보같이 그렇게 죽을 거야? 이까짓 얼음 하나 못 없애서?”

 

목을 파고드는 송곳 같은 얼음에 피부가 이리저리 긁혔다. 아프네재현이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능력을 써, 이재현. 능력을 쓰라고!”

“…”

형 제발…”

 

목을 찔린 탓인지 물 먹인 솜처럼 온몸이 늘어졌다. 정신이 희미해지기 직전이었다. 어디선가 바람을 타고 얼음 부스러기가 흩날렸다. 이대로 그만하고 싶어. 눈을 감자 어둠이 찾아왔다. 이건 꿈일까 아님 저세상일까. 그토록 그리워하던 은성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울고 있었다. 재현아, 내 몫까지 살아남아야지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누군가와 비슷하기도 했다

 

왜 이럴 때마다 나타나는 거야. 얼마나 더 미안하라고. 뜨거운 슬픔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막힌 숨을 토해내며 재현이 헉헉거렸다. 포기하려는 순간 번번이 은성의 그림자가 아른거려서 눈앞이 희뿌옜다. 축 늘어진 몸에 차가운 공기가 파고들었다. 간만의 추위에 재현이 몸을 덜덜 떨었다. 우습게도 죽으려고 마음을 먹은 순간, 가장 따뜻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더위에 붉게 달아오른 제 얼굴을 보며 웃던 구은성. 그는 재현의 붉은 눈동자가 꼭 모닥불 같다고 했다

 

그래서 널 보고 있으면 따뜻해져.”

 

환청처럼 은성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원망이 섞이지 않은 투명한 음성에 재현은 속절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제 나 좀 그만 내버려 둬. 왜 맘대로 죽지도 못하게 해추위에 떨던 몸이 본능에 따라 손가락을 튀겨 붉은 불꽃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노력해도 안 되더니. 허탈하게 웃던 재현이 볼에 묻은 눈물을 닦아냈다. 발끝에서부터 몸이 서서히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방법은 몰랐지만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예전의 그 이재현처럼.

 

하는 수 없이 살아야겠다. 쉽게 죽지 못하는 걸로 죗값을 대신하는 수밖엔 없으니. 재현이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 나자, 순식간에 피부가 불타듯이 뜨거워졌다. 묵혀왔던 화를 쏟아내듯 재현의 앞에 화르륵 불길이 치솟았다. 재현을 촘촘히 둘러싼 얼음 탑이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

 

그 모습을 멀리서 쳐다보던 주연이 한숨처럼 내뱉었다

 

이재현 맞네.”

 

주연이 닿은 곳마다 아지랑이가 번졌다. 현역으로 뛰던 시절, 주연은 단 한 번도 재현을 이기지 못했다. 불과 얼음은 그런 것이다. 아무리 차갑고 강한 얼음일지라도 불 앞에선 한순간에 녹아 버렸다

 

떠났으면 잘 숨지. 어쩌자고 여길 다시 돌아왔어.”

 

무리하게 능력을 쓴 탓인지 주연의 걸음이 점차 허물어졌다. 아주 미묘한 차이였지만 한쪽 발걸음이 좀 더 느렸다. 체력이 떨어져서 숨이 턱턱 막혔다. 가뜩이나 최근에 센터장의 압력으로 계속 전투에 참여했던지라 타격이 더 컸다. 가이드 없이 오롯이 가이딩 대체제로만 연명하고 있으니 회복이 쉽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누가 무식하게 능력 써댔냐고, 네가 죽고 싶어 환장한 게 틀림없다고 최문영이 잔소리할 게 뻔했다. 은퇴한 주연의 복귀를 마지막까지 반대한 게 문영이었으니까. 주연이 센터에 입소했을 때부터 전담 닥터였던 문영은 주연이 돌발 행동을 할 때마다 일장연설을 하곤 했다. 가이딩 안 받을 거면 절대 무리하지 말라던 문영의 경고를 무시해서 그런지 온몸이 욱신거렸다. 센터장의 계획에 재현이 포함돼 있으니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재현을 둘러싼 파란 불빛을 눈에 담으며, 주연은 조금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재현과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친 탓이다. 이를테면 재현을 찾아 떠돌아다니던 시간들. 죽음의 문턱 앞에서 몇 번이고 이재현을 떠올렸다. 혹시나, 정말 만약에 재현이 살아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함부로 죽지도 못했다.

 

국내 유일의 멀티 센티넬로 촉망받던 이재현이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재현이 없어진 이후로 주연은 불을 쫓아다녔다. 화재가 발생하면 하던 일도 내팽개치고 미친놈처럼 달렸다. 불이 난 현장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한 줌의 재가 될 뿐이다. 주연은 무엇이라도 건지기 위해 잿더미를 뒤지고, 또 뒤졌다. 어떤 단서라도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재현의 DNA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사람들은 이재현이 죽었다고 했다. 주연만이 코웃음을 치며 믿지 않았다. 그가 아는 이재현은 가장 강한 사람이니까. 틀림없이 어디선가 잘살고 있을거야. 그 이후로 몇 년이 흐르고, 재현이 돌아오지 않는 새에 주연은 쓸쓸한 은퇴식을 치렀다. 가이드의 도움을 받지 않는 센티넬은 효용 가치가 떨어졌다.

 

기다리는 걸 포기하려던 그때 재현이 돌아왔다. 새벽에 울린 긴급 호출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신없이 뛰어온 센터에서 마주한 재현은 주연을 보고도 울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이재현이 아니다. 각종 검사 끝에 알게 된 재현의 병명은 해리성 기억상실증. 얼굴은 같은데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스물다섯까지의 기억이 몽땅 날아갔다. 능력이 발현돼서 센터에 입소했던 것도, 국내에서 제일 뛰어난 센티넬이었던 것도, 수도 없이 많은 전투에 나가서 승리했던 것도. 그리고 이주연의 존재조차도

 

우리 그냥, 살자…”

“…”

함부로 죽지 마. 그럼 난 어떡하냐.”

 

다 거짓말 같았다. 속삭이던 재현의 목소리가 이렇게나 생생한데. 아직 못 해준 말이 너무나도 많은데이렇게 다 잊을 거면 왜 나한테 잘해줬어. 좋아한다고 말하지도 말지.

 

며칠간 괴로워하던 주연은 마침내 현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끔찍했던 일은 모두 잊었을 테니까 차라리 다행이다. 처음 본 사람인 척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어느새 익숙해졌다. 떨어지는 조명을 피하기 위해 재현을 잡아당겼을 때, 그는 폭주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끌어안은 그의 품은 여전히 따뜻했다. 달라진 건 하나였다.

 

늘 자신을 향해 울던 사람이 다른 이름을 불렀다. 주연은 반쯤 슬펐고 또 반은 안도했다. 당신은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사랑받았구나. 내가 주지 못한 만큼 사랑을 받았겠구나. 아름다운 사랑을 했겠지. 더는 춥지도 외롭지도 않고 따뜻하게

 

다행이다. 날 원망하며 사는 것보단 그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야만 치밀어오르는 마음을 애써 누를 수 있었다. 그게 힘들 때면 센터에 복귀했던 첫날, 문영이 했던 말을 떠올리곤 했다

 

걔 지금 아무것도 기억 못 해. 그러니까 굳이 들쑤셔서 헤집어놓지 마. 쟤가 누구 때문에 저렇게 됐는지 잊은 건 아니지?”

“...나도 알아요. 나만 잊으면 된다는 거.”

 

말은 모질게 해도 누구보다 주연을 생각한 목소리여서 더 슬펐다. 주연이 쓸쓸하게 되뇌었다. 근데 사람 욕심이란 게 왜 그럴까요.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자꾸 기대하게 돼. 재현을 보고 있으니 예전 일이 생각나서, 조금만 더 있으면 날 기억할 것 같아서. 예전처럼 다시 날 좋아한다고 할까 봐. 그 모든 핑계 때문에 염치도 없이 미래를 꿈꿨다. 이제 이재현의 마음엔 내가 비집고 들어갈 만한 공간이 없는 걸 알면서도

 

곧 달콤한 꿈에서 벗어날 시간이다. 어쩌면 머지않아 재현과 작별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재현이 능력을 찾았으니 제 할 일은 이걸로 끝이겠지. 혹은 죽거나. 은퇴한 센티넬의 운명은 대개 그런 것이니까.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가늠하며 재현의 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

 

재현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센터에 입소했다. 보통 센티넬 발현이 열일곱 정도인 것을 고려했을 때 다소 늦은 편이었다. 입소와 동시에 온갖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국내 최초, 유일무이, 대체 불가 등등. 재현의 등급인 S급보다 높은 등급은 있어도 멀티를 능가하는 능력은 없었다

 

센티넬과 가이드는 필수불가결한 관계였다. 가이드는 센티넬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센티넬은 그렇지 못했다. 가이딩 수치가 떨어지면 폭주하고, 결국 죽게 되니까. 그러나 재현은 멀티였다. 센티넬이면서 동시에 가이드인 희귀 능력이라 국내에서도 멀티는 재현이 유일했다. 아무리 멀티라도 가이드와 센티넬 등급이 상이하면 별도의 가이드가 필요하다던데, 재현은 둘 다 S급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재현은 자연계 중에서도 공격에 최적화된 불 속성 센티넬이었다. 첫 사격 연습과 체력 단련에서 재현은 기존 기록을 갈아치웠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들어왔으나 간극을 좁히는 건 순식간이었다. 재현이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들리는 소리엔 늘 이주연이라는 이름이 끼어있었다. 그 이름을 너무 많이 듣다 보니 누군지 절로 궁금해졌다. 듣자하니 센터에서 꽤 유명인사인 듯했다.

 

어 내 기록 깨졌네.”

 

시끄러운 소음을 뚫고 어떤 남자가 사격 연습실로 걸어들어왔다. 눈을 가늘게 뜨고 스크린 속 기록을 살펴보던 주연이 다른 사람에게 물었다. 이재현이 누구야? 못 보던 이름인데. 다른 센티넬들이 웅성거렸다. 그 사이에는 재현을 가리키는 손짓도 포함돼 있었다.

 

재현을 발견한 주연이 설렁설렁 다가왔다. 보폭은 큰데 걸음이 느렸다. 말로만 듣던 얼굴을 처음 마주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주연은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가 재현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쪽이 이재현이에요?”

어, 난데.”

아직 출전하기 전이죠? 담에 같이 해요.”

 

왜? 재현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주연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희 팀 한 명 비거든요. 기록 깨진 게 첨이기도 하고. 좀 궁금해서요곧 작전 있으니까 그때 봬요. 재현이 답하기도 전에 주연은 제 할 말만 하고 사라졌다. 쟤 도대체 뭐지? 아리송한 얼굴로 서 있는데 주변에서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주연 쟤 웬만하면 자기 팀에 안 껴주더니 웬일이래. 그 말을 듣자 한층 더 궁금증이 일었다

 

주연의 말처럼, 며칠 뒤 재현은 첫 출전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주연은 센터에서 가장 높은 등급인 SS급 센티넬이었다. 재현과는 상극인 아이스 컨트롤 센티넬로, 반정부군의 무기를 얼려 병력을 무력화하는 역할을 했다. 한껏 그을린 피부인데 빙결 속성이라니 좀 의외였다.

 

처음인데 긴장 안 돼요?”

뭐 조금.”

인사해요. 여기는 우리 팀.”

 

주연을 필두로 모여 있던 대여섯 명의 센티넬이 재현을 향해 한마디씩 건넸다. 얘가 우리 팀 리더야. 염력을 쓰는 강철이 주연을 가리켰다. 얘 열다섯에 발현해서 지금 4년째거든. 이래 봬도 얘가 제일 짬 높아. 멋쩍은지 주연은 빨리 출발하자며 괜히 팀원들을 닦달했다. 주연의 말에 각자 전투기에 올라탔다. 이미 서부 쪽에서는 선발대가 반정부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귀에 꽂힌 무전기에서 주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훈련했던 거랑 비슷해요. 어차피 알아서 잘할 것 같지만요. 적이 보이자마자 주연이 대기 중의 수증기를 얼려 전투기의 시야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날개가 얼어버린 전투기가 동력을 잃고 추락했다. 전투기가 순식간에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됐다. 떨어지는 전투기를 강철이 염력으로 들어 올렸다. 날아오는 전투기 무리에 얼음덩이가 된 전투기를 날려 꽂았다. 두 사람의 호흡이 잘 맞은 덕분인지 짧은 시간에 여러 대의 전투기를 격추시킬 수 있었다.

 

선두에 선 주연이 전투기를 공격하면 뒤에서 마저 처리하는 식이었다. 바쁘게 공격하는 와중에도 주연은 수시로 팀 대형을 살폈다. 대형 흐트러지지 않게 유지하자고요. 무전기에서 연신 주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눈이 뒤통수에 달렸나. 재현이 재빨리 핸들을 틀어 방향을 고쳐잡았다

 

형 세시 방향에 전투기요.”

“…내가 처리해?”

제 기록도 깼는데 이걸 못하겠어요. 어디 실력 한 번 보죠.”

 

주연의 말을 듣고 보니 맞은 편에 전투기가 무서운 기세로 따라오고 있었다. 덩달아 재현이 전투기 속도를 올렸다. 재현이 스쳐 지나간 곳에 폭발음이 이어졌다. 엔진이 터진 전투기가 서로 충돌해 폭발했다. 깔끔하게 처리한 재현의 솜씨에 주연이 혀를 내둘렀다. 거봐요, 알아서 잘할 것 같더라니까.

 

주연의 팀이 우세하는 상황이었지만 위기는 늘 방심했을 때 찾아왔다. 잠깐 대형이 흐트러진 틈을 노리고 반정부군이 공격을 퍼부었다. 그 틈에 맨 뒤쪽 전투기가 격추당했다. 염력을 쓰는 강철이 탄 전투기였다. 주연의 전투기가 곧바로 하강해 따라붙었으나, 낌새를 눈치채고 반정부군 전투기가 우르르 달라붙는 탓에 공격하기가 어려웠다. 전투기 수를 가늠하던 주연이 짧은 신음을 내쉬었다.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추락하는 강철의 전투기엔 여러 대가 인접해 있었다

 

무전기에 급박한 목소리가 섞였다. 잠깐 조용히 해봐. 주연의 말에 정적이 일었다. 팀의 리더는 누구보다 상황 판단이 빨라야 하고, 모두가 주저할 때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어두운 목소리로 주연이 입을 열었다. 현 시간부로 후퇴하겠습니다. 대형 유지하고 움직일 수 있도록.

 

혼란 속에서 하나둘 주연의 명령을 따라 이동했다. 핸들을 돌려 비행한 방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갑자기 전투기 한 대가 빠른 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주연이 다급하게 무전기에 소리쳤다. 내 말 못 들었어요? 멋대로 움직여놓고 재현은 묵묵부답이었다. 대형의 후방으로 빠진 주연이 재현의 전투기 뒤를 쫓았다

 

당장 후퇴해요. 핸들 돌려, 돌리라고요!”

“…아직 구할 수 있잖아.”

늦었어요.”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그럼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그걸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으라고? 아직 안 늦었어. 충분히 구할 수 있다고.”

 

고막을 타고 재현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재현의 전투기를 향해 미친 듯이 반정부군 전투기가 달려들기 시작했다. 반정부군에 폭환사가 있는지 재현의 전투기를 향해 폭탄이 쏟아졌다. 쾅! 연신 폭발음이 들렸다. 하늘에서 벌건 불빛이 폭죽처럼 반짝였다. 주연이 얼음 장벽을 만들어 방어했지만 쉽지 않았다. 공격에 시달리는 사이 강철의 전투기는 이미 폭발한 후였다.

 

끝났으니까 그만하고 돌아와요.”

“…”

명령 들어, 이재현. 후퇴하라고!”

 

강철의 전투기가 불빛이 되어 사라졌다. 허무하게 그 광경을 쳐다보던 재현이 망설이다 눈을 꾹 감고 급하게 핸들을 꺾었다. 고작 아까 잠깐 말 걸었던 게 전부인데, 방금 전까지 살아있던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죽는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멀리까지 따라온 전투기를 쫓아내느라 다들 녹초가 되어 돌아왔다. 전투기에서 내린 사람들의 얼굴이 탑승 전과 달리 어두웠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굳은 얼굴로 주연이 중얼거렸다

 

잠깐 나 좀 봐요.”

 

재현이 혼자 남기를 기다렸다는 듯 주연이 다가왔다. 멋대로 팔목을 잡은 게 불쾌해 뿌리치자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요? 아니면 이게 쉬워 보여요?”

너야말로 팀 리더라면서 너무 책임감 없는 거 아니야? 사람 목숨이 장난이야? 어떻게든 살리려고 해야지.”

리더가 괜히 있는 줄 알아요? 단독 행동하지 말라고 있는 거야. 이렇게 개인행동 하다간 팀 전체가 잘못될 수 있으니까!”

 

차분하던 주연도 재현의 도발에 점차 억양이 높아졌다. 한마디도 지지 않고 재현이 쏘아붙였다. 그걸 그냥 냅둬? 사람이 죽잖아

 

이 일을 너무 오래 해서 그런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참 오랜만에 봤다. 그렇게 대꾸하니 할 말이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재현의 붉은 눈동자를 몇 번 쳐다본 게 다였다. 결국 주연은 대답하지 못하고 재현을 지나쳐 왔다. 간만에 능력을 너무 많이 썼더니 피곤했다. 이 정도 연차에 아직까지 페어 가이드를 못 구한 센티넬은 저뿐이었다. 특히 주연은 남보다 등급이 높은 탓에 항상 가이딩 수치가 불안정했다. 공용 가이드실에 갈까 하다가, 상성률이 낮아 역한 가이딩을 받았던 게 기억나 그만뒀다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주연이 강철의 이름을 몇 번 불렀다. 원래 전투 마치면 강철과 함께 밥 먹으러 가곤 했는데. 귓가에 자꾸 재현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한편 재현은 분이 풀리지 않아 곧장 사격 연습실에 처박혀 총질을 해댔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니 주연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지만 나무 심지처럼 꼿꼿한 모습에 성질이 뻗쳤다.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먹을 줄도 알아야지. 아이스 컨트롤이라더니 냉혈한이야 뭐야몸에서 열이 빠져나가질 않아 사격 연습도 모자라 체력 단련까지 하게 될 판이었다. 그러나 재현이 체력 단련실에 도착했을 땐 이미 누군가가 사용 중이었다. 자세히 보니 주연이었다. 주연은 곧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가상 전투기를 몰았다. 그런데 평소에 연습할 때랑은 뭔가 달랐다. 주연은 가상의 적이 공격하는 걸 그대로 맞고 있었다. 방어할 수 있음에도 가만히 놔두면서

 

훈련이래도 데미지가 없는 건 아니어서 꽤 아플 텐데. 천천히 다가간 재현이 전투 모드를 해제했다. 가이딩 수치가 부족한지 주연이 연신 헐떡였다. 팀 워치로 주연의 상태를 확인한 재현이 얼굴을 굳혔다. 정상 수치면 워치에 초록색으로 뜨고 경고 단계는 주황색, 위험은 빨간색으로 표시된다. 주연의 수치는 주황색이었다

 

전투에서 한차례 능력을 쓴 뒤라 과부하가 걸린 듯했다. 정신 차려. 너 그러다 골로 간다. 주연을 일으키려 팔을 붙잡자 차가운 피부가 살갗에 닿았다. 가이딩 받으러 가자고 실랑이하다 둘 다 힘이 빠져서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피곤한 얼굴을 쓸어올리며 재현이 잔소리했다.

 

네 몸인데 왤케 미련하게 굴어. 맞는 게 취미는 아닐 테고.”

그냥, 아까 형 말 듣고 생각을 해보니까요.”

 

강철이 형도 이렇게 아팠겠다 싶어서말하다 주연이 뒷말을 삼켰다. 목소리에 울음이 먹혀들어가는 걸 보고 재현도 더는 묻지 않았다. 얼음장 같은 손 위에 뜨거운 손바닥을 맞대 토닥였다. 생각해보니 어른처럼 굴지만 얘도 고작 열아홉 어린애였다

 

-

 

주연의 옆방이 이사 준비로 시끄러웠다. 꽤 오랫동안 강철의 방이었던 그곳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 짐가방을 멘 재현을 본 주연이 적잖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센티넬 숙소에 자리가 없어 임시 숙소에 머물던 재현이 새로 배정받은 게 바로 여기였다. 무슨 이런 우연이 있나며 재현이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괜히 남의 방을 뺏은 것 같아 심란했다. 우울해하는 게 보였는지 주연이 급하게 재현을 불러세웠다

 

투룸이라 딱히 볼 데도 없건만 주연은 고집스레 숙소를 소개해주겠다고 성화였다. 옆방은 아직 엉망이라 하는 수 없이 주연의 집들이에 참여하게 됐다. 조심스레 들어간 방안은 반짝이는 각종 조명 덕에 눈이 부셨다. 썰렁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잡다한 소품이 가득해 따뜻한 분위기의 방이었다. 햇빛처럼 빛나는 노란색 전구, 거실 소파에 쌓인 쿠션과 담요들 같은방을 소개해주던 주연이 못마땅한 목소리로 벽면 한쪽을 가리켰다

 

근데 여긴 보안 때문에 바깥 창문이 없어요.”

어둡고 좋네.”

어두운 거 좋아해요? 난 밝은 게 좋은데.”

그래야 잠이 잘 와.”

 

하긴 형은 어둠 속에서도 밝으니까. 붉게 빛나는 재현의 눈동자를 가리키며 주연이 농담을 던졌다. 그래도 창문 없는 건 좀 별로예요. 갇힌 거 같거든요. 뭐 반쯤은 사실이지만. 자조적인 웃음을 띤 얼굴이 쓸쓸했다

 

호출을 받은 재현이 먼저 자리를 떴다. 짐이 별로 없는 편인데도 청소하고 정리하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끝났어요? 옆방에서 주연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주연은 이사를 끝낸 재현을 불러내 함께 짜장 라면을 먹었다. 딱히 이삿짐이랄 것도 없는데 이사 구색은 갖춰야 한다나 뭐라나. 밖에서 봤을 땐 몰랐는데 사적인 공간에 들어오니 주연은 영락없이 어린애였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며 콜라 캔을 부딪혀오는 걸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주연은 제법 성실했다. 재현이 관찰한 주연의 모습은 그랬다. 보통은 작전에 투입돼 온종일 적진에서 구르거나, 휴일이면 훈련실에 처박혀 연습했다

 

넌 도대체 언제 쉬냐.”

 

일밖에 모르는 지독한 스케줄에 재현이 혀를 내둘렀다. 주연은 평생을 이렇게 살았다는 듯이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쉬는 거요? 아마 죽은 다음에?”

 

이런 시답잖은 농담을 칠 정도로 주연과 조금 가까운 사이가 됐다. 그래서 다 안다고 자만했다. 주연이 사격 연습 중에 갑자기 쓰러지기 전까지는. 놀란 재현이 병동으로 달려갔지만 주연은 깨어나지 않았다. 사람 놀라게 해놓고 정작 주연의 얼굴은 자는 사람처럼 평온했다. 다음날도 상태는 같았다. 답답한 마음에 주연의 전담 닥터인 문영을 찾아갔다. 서류를 보던 문영은 재현을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왜? 이주연 때문에?”

어떻게 아셨어요?”

요즘 둘이 붙어 다닌다며. 여기 소문이 얼마나 빠른데.”

걔 언제 깨어나요?”

글쎄…”

 

무책임한 답변에 발끈하려던 찰나 문영이 입을 열었다.

 

이 정도 추세면 한 일주일? 걔 페어 가이드가 없어서 회복이 더뎌.”

아 네…”

너무 걱정하지 마. 그냥 쉬는 거야. 쟤도 쉴 때 됐지.”

 

하여간 SS급이라고 센터장이 얼마나 부려 먹는지 원. 빨간 입술이 못마땅한 목소리를 냈다. 그리곤 다시 정신없이 서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바빠 보여서 돌아가려던 찰나, 문득 든 생각에 재현이 걸음을 멈췄다. 혹시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나요? 문영이 그제야 재현과 눈을 맞췄다. 왜 전담 닥터가 있겠니.

 

걔 너무 무리하지 않게 도와줘. 가이딩도 제대로 못 받고 나가는 거라 자칫하면 바로 폭주야.”

조심할게요.”

그래도 둘 중에 한 명이라도 멀쩡하니까 마음이 놓이네.”

 

무뚝뚝한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 문영이 긴 머리를 쓸어넘기며 당부했다. 너도 무리하지 마. 무슨 일 생기면 나 찾아오고

 

문영의 말처럼 주연은 일주일 만에 깨어났다. 주연은 제가 쓰러졌다는 걸 듣고도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주변에 물어보니 연례행사 같은 일이라고 했다. 저렇게라도 쉬는 거라고. 적당히 쉴 줄도 알아야지 하여튼 무식하기 짝이 없었다. 바보 같은 짓이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재현은 어쩐지 마음이 쓰여서, 자꾸 주연에게 시선이 돌아갔다

 

재현이 출전한 이후로 두 사람은 몇 번이나 함께 투입돼 작전을 마쳤다. 첫 전투의 실패가 뇌리에 박힌 모양인지 재현도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주연의 지시에도 잘 따랐고 돌발 행동을 보이지도 않았다.

 

요즘 무슨 일 있어요?”

왜 뭐가.”

아니 말을 너무 잘 듣길래.”

네가 팀 리더라며. 한번 명령에 따라 보려고.”

형이요?”

여기 조직이잖아. 리더가 까라면 까야지.”

 

장난스레 웃어 보이자 주연도 따라 웃었다. 밥 먹으러 가자는 주연의 성화에 그 뒤를 쫓았다. 전투는 고됐고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소소한 일상이 있기에 그래도 제법 사는 것 같았다. 밥 먹고 주연과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도, 휴일에 함께 농구하는 것도. 이럴 땐 평범한 사람처럼 살고 있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에서 호출이 울릴 때만 빼고는

 

주연이 쓰러진 이후로는 틈날 때마다 팀 워치로 주연의 상태를 확인했다. 얼굴은 멀쩡해 보여도 가이딩 수치가 주황색일 때가 많았다. 처음엔 전혀 몰랐는데, 거의 매일을 같이 생활하다 보니 컨디션이 불안정할 때가 대충 가늠이 됐다. 몸이 축나는 건 본인일 텐데도 공용 가이드실에 가라고 재현이 닦달해야 마지못해 걸음을 뗐다. 가기 싫다고 투정부리면서

 

도대체 왜 가기 싫은데. 또 쓰러져야 정신 차릴래.”

형은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별도의 가이딩이 필요없는 재현이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걍 맨몸으로 버티게? 너 바보냐? 그게 더 미련한 거야.”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행위가 싫어요.”

?”

내 의지랑 상관없이 가이딩 수치는 올라가는데불쾌하고 찝찝해요. 거기 갔다 오면.”

 

센티넬치곤 필요 이상으로 낭만적인 존재였다. 황당한 기색의 재현이 재촉하자 주연이 크게 한숨을 내쉬고 숙소 밖을 나섰다. 그때는 단순히 주연이 이상한 데서 고집을 부린다고만 생각했다. 진실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 자리 채워달라며 불려 간 신입 교육에서 발견되었다. 입소할 때 한 귀로 듣고 흘렸던 가이드 이론 속에.

 

가이딩은 방사형과 접촉형으로 나뉘며, 일반적으로는 신체적 접촉을 바탕으로 가이딩한다. 방사형보다 접촉형의 가이딩 효과가 월등히 좋기 때문이다. 스킨쉽의 강도가 높을수록 가이딩 수치는 빠르게 올라간다. 다만 가이드와 센티넬의 상성률이 낮을 경우, 가이딩 효과는 매우 떨어질 수 있다. 가이딩은 서로의 감정이나 상태의 영향을 받기에 가이드와 상성률이 아주 낮거나, 가이딩을 거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센티넬에게 구역감, 식은땀, 어지러움 등의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후에 듣기론 주연이 계속 가이딩을 거부하는 바람에, 공용 가이드실에 묶인 채로 가이딩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진실을 알게 되자 차마 주연에게 가이딩 받으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주연은 대개 가이딩 대체제로 버티고, 그걸로도 부족하면 방사형 가이딩을 받았다. 그리고 그마저도 듣지 않으면

 

나 몸이 너무 안 좋아요.”

 

선발조로 작전에 투입됐던 주연이 재현과 교대하며 중얼거렸다. 얼어붙은 주연의 얼굴이 곧 죽을 것처럼 창백했다. 그 앞선 것들로도 회복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뒷말을 삼킨 채 주연이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찼다. 얼굴이 너무 희게 질려 있어서 당장에라도 쓰러질까 봐 두려웠다. 재현이 천천히 손을 뻗어 주연의 볼을 쓰다듬었다

 

고생 많았어.”

따뜻하다…”

 

전해지는 온기에 주연이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머뭇거리던 재현이 목멘 목소리로 속삭였다. 잘 갔다 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겨우 끄집어낸 말이 형편없었다

 

아마 오늘은 못 들어갈 거예요.”

“...”

만약에, 혹시 제가 없으면 다음 팀 리더는 형이에요. 그거 말해주려고요.”

 

지나치게 담담한 말투였다. 주연의 눈빛이 너무 평온해서, 재현은 본인이 잘못 들은 거라고 착각할 뻔했다. 상태가 심각하단 말을 누가 이렇게 해. 속에서 화가 끓어서 몸이 또 뜨거워졌다

 

야, 누가 그딴 거 하고 싶대? 나는 안 해. 네가 직접 하면 되잖아.”

말했잖아요. 만약, 만약에요.”

난 그런 거 생각 안 한다고. 그러니까 얼른 돌아오란 말이야.”

 

주연은 묻는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고 빙긋 웃기만 했다. 교대하며 재현을 지나쳐가던 주연이 몇 걸음 가다 말고 되돌아왔다. 그리곤 재현이 채 쳐다보기도 전에 말을 덧붙이고 사라졌다

 

금방 좋아질게요.”

 

예고한 대로 그날 주연은 숙소에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바로 전투에 끌려간 탓에 며칠이 흘렀는지도 셀 수 없을 만큼 바쁜 시간을 보냈다. 재현의 마음 한구석에서 매일 불안함이 자라났다. 드디어 복귀하라는 호출을 받고 센터로 돌아오던 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번이고 조급하게 밖을 쳐다보았다. 비행장에 있는 낯익은 얼굴들을 훑다가 한 곳에 시선이 멈췄다.

 

약속했던 거 지켰어요.”

다행이네. 내가 리더 되면 끔찍할 뻔했는데.”

 

다행히 주연은 멀쩡한 모습으로 재현을 반겼다. 이렇게 회복되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는 묻지 않았다. 주연의 이마에 제 손을 얹었다. 어 아직 안 나았나 본데? 열이 있네. 주연의 몸이 얼음장같이 차다는 것을 알면서도 재현은 실없는 농담을 했다. 그렇게라도 웃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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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응된 줄만 알았던 훈련은 날이 갈수록 어려웠고, 전투는 출전할수록 고됐다. 가장 큰 문제는 체력이 아니라 다른 거였다. 이를테면 죄책감, 양심 같은

 

전투기가 진입 불가한 구역이라 맨몸으로 싸웠던 날이었다. 눈앞에서 온갖 것들이 날아다니고, 불꽃 놀이하듯 불이 펑펑 터졌다. 전투기를 탈 수 없으니 가동 범위가 좁아 일대일로 싸워야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눈앞에서 적을 처리하는 것은 훈련 때보다 더 불쾌했다.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리고 피가 튀었다.

 

재현은 처음으로 제 능력이 화염계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불은 모든 것을 순식간에 태워버리니까. 도덕심 때문에 흔들리기 전에, 푸른 불꽃이 빠르게 번져 주변을 태워버렸다. 그럼에도 귓가에는 비명이 맴돌았다. 이날의 전투는 정부군의 승리로 끝났다

 

센터로 돌아오자마자 재현은 공용 샤워장을 찾았다. 잿가루와 피가 엉겨 붙었는지 피부가 끈적했다. 찝찝한 마음에 전투용 수트를 입은 채로 샤워기를 틀었다. 비누 거품을 묻혀 수트와 온몸을 구석구석 씻었다. 이물질이 다 지워졌건만 재현은 멈추지 않고 계속 거품을 냈다. 물을 한참 맞고 있었더니 온몸이 젖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샤워기에서 끝도 없이 물줄기가 쏟아졌다.

 

다른 전투에 갔다 돌아온 주연이 급하게 샤워장 문을 열었다. 센터에 들어오자마자 재현을 찾은 모양이었다. 샤워장은 수증기로 희뿌옜다. 한참 만에 주연은 샤워장 구석에 주저앉아 물을 맞고 있는 재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왜 이러고 있어요.”

피가, 피가 안 씻겨…”

 

재현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기계처럼 계속 거품을 문질러 팔을 닦으면서. 이미 수트에 묻은 얼룩은 지워진 지 오래였다. 이제 없어요. 그만 해요보다 못한 주연이 비누를 뺏었다. 거품이 물줄기에 씻겨 나갔다. 그걸 쳐다보는 재현의 눈엔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물에 젖었다가 마르길 반복해서 그런지 재현의 몸이 급격히 온기를 잃었다. 뜨거워서 붉게 달아오르던 얼굴이 답지 않게 차분했다. 이상 징후를 눈치챈 주연이 재현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재현의 체온이 훨씬 높아야 정상인데 평소보다 미적지근했다. 그만 나가요. 감기 걸리겠어요. 재현의 손을 이끌자 푹 젖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오늘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엄청 많이.”

“…”

별로 놀랍지도 않은 일인데 왜 오늘은 그게 힘들지.”

 

아무렇지 않게 넘겨 버려야 하는데. 괴로운 얼굴로 재현이 중얼거렸다

 

반정부군이랑 싸우는데 코앞에서 걔넬 보니까걔네가 막, 당장 죽여도 시원찮을 그런 새끼들이 아니고. 그냥그냥 사람인 거 있지.”

 

걔네도 뭐, 위에서 시키니까 그러고 있겠지. 우리처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운지 재현이 눈썹을 잔뜩 일그러트렸다

 

생각하니까 막 손이 떨리데. 근데 더 웃긴 게 뭔지 아냐.”

글쎄요.”

그 와중에 내가 안 죽으려고 불을 질러버렸어.”

 

마지막 말을 내뱉자마자, 재현이 우는 것 같은 얼굴로 몸을 덜덜 떨었다. 재현의 눈물인지 물인지 모를 것들이 바닥에 축축하게 젖어들어 갔다

 

작전이었잖아요.”

.”

그러라고 형 투입된 거고요.”

.”

 

나도 알아. 아는데 그래. 원래 이렇게 아프고 괴로운 거야? 헐떡이는 재현의 말에 주연이 잠시 머뭇거렸다. 열다섯부터 이 과정을 수없이 반복했다고 말해도 될지 생각하면서. 고심 끝에 주연이 다른 말을 꺼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전쟁에선 누굴 죽이는 게 아니고사는 거라고.”

“...”

이것도 합리화인 거 아는데요. 어쩌겠어요, 여기선 이래야 사는데.”

 

지그시 감은 재현의 긴 속눈썹에 물방울이 맺혔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주연이 재현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큰 손바닥이 재현의 어깨를 감싸고 천천히 토닥였다. 괜찮다고 말하는 듯이.

 

형만 그러는 거 아니에요. 저도 그래요.”

 

우울함을 감춘 주연이 잔잔한 미소로 회답했다. 주연이야말로 전쟁에 회의감을 느끼던 차였다.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전투에 나갈 때마다 마음이 복잡했다. 제 품을 파고드는 인영을 더 세게 껴안는 것으로 마음을 환기하려 노력했다. 사는 게 왜 이렇게 고달픈 걸까. 그럼에도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만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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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새에 재현의 동료는 수도 없이 바뀌었다. 이곳에서 죽음은 비일비재했다. 다들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불안감에 떨어야 했다.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그랬다. 센티넬의 평균 수명은 스물다섯 정도였다

 

너도 불안해?”

아뇨.”

 

주연은 아주 평온하게 말했다. 이 정도면 오래 살았죠. 너무 오래 살아서 지겨워. 주연의 나이는 고작 스물둘. 그때 그걸 농담으로 여기지 말았어야 했는데. 들쭉날쭉한 가이딩 수치에 주연의 컨디션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작전 중일 때가 아니면 부드럽게 풀어지던 얼굴은 언제부턴가 굳어서 펴지질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연에게 슬럼프까지 찾아왔다. 남들이 보기엔 평소와 똑같을 테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주연과 호흡을 맞춘 재현만이 미묘한 변화를 눈치챘다. 무전기 너머로 들려온 주연의 호흡이 예전보다 밭았다. 흔들림 없이 비행하던 주연의 전투기가 조금씩 궤도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요즘 왜 그래, 피곤해?”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저도 이제 힘이 좀 부치네요.”

 

눈가를 쓱 매만지던 주연의 얼굴은 지쳐 있었다. 그래도 애써 씩씩하게 말하던 목소리가 아직 맑아서, 좀 쉬게 놔두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놔두면 알아서 치유될 피곤함이라고만 여겼다. 사고는 늘 예기치 못한 곳에서 발생했다.

 

날아오는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주연의 전투기가 그대로 추락했다. 재현이 다급하게 전투기를 하강해 적진의 접근을 막고, 방어막을 칠 수 있는 팀원이 최소한의 방어를 했다. 무전기에 대고 쉴 새 없이 말했다. 주연아, 주연아. 정신 차려야 해. 이대로 눈 감으면 안 돼. 큰 불길을 뒤로하고, 추락한 전투기를 향해 달려갔다. 뛰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큰 전투기가 형상을 알 수 없을 만큼 아작이 났다. 이대로 죽은 건 아니지. 조바심이 나서 다리가 풀리려고 했다. 다행히 주연은 추락하기 직전에 정신을 차렸다. 얼음길을 만들었고, 후방에서 지원 나온 전투기에 얼음 계단을 만들어 재현과 함께 올라탔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재현은 돌아오는 내내 말이 없었다

 

센터로 복귀하자마자 주연은 센터장 호출을 받고 오랜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재현은 숙소에서 하염없이 주연을 기다렸다. 그러다 어스름한 새벽녘, 인기척이 들리자마자 옆방으로 뛰어갔다. 주연은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눈빛이 공허했다.

 

많이 깨졌냐.”

근신 한 달요. 이참에 좀 쉬려고요.”

그래, 너 쉴 때 됐어.”

 

힘없이 주연이 웃어 보였다. 웃는 것마저 힘에 부친 것 같았다.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던 재현이 어렵게 입을 뗐다. 아까 왜 그랬어? 묻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은 물어야만 했다

 

너 요즘 왜 그래. 무슨 일 있는 거 맞지.”

 

그동안 묻지 않아서 악화시켰던 말들을 꺼냈다. 더는 아까 같은 일을 만들 순 없었다.

 

내가 너랑 일한 게 몇 년인데 몰라야겠냐.”

아까 잠깐…”

 

한 템포 쉰 주연이 천천히 재현과 시선을 맞췄다. 누구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죽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핸들을 놓쳤어.”

“...”

그게 다예요. 형이 오길래 말았어. 형은 눈앞에서 누구 죽는 거 못 보는 사람이잖아요.”

 

강철이 죽었을 때를 떠올리듯 씁쓸한 목소리였다

 

형이 위험하면 안 되니까. 그냥 그래서그때 정신이 들었어요.”

잘했어.”

요즘 악몽을 많이 꿔요. 예전 동료들이 자꾸 꿈에 나와. 강철이 형도 그렇고. 내가 너무 많이 못 구했어요. 내가 더 뛰어났으면 구했을 수도 있는데한 번만 더 노력해볼걸.”

 

네 잘못 아니라니까. 눈시울이 뜨거워져 재현은 고개를 약간 숙였다. 늘 아무렇지 않은 척해서 담담한 줄 알았는데 실은 다 신경 쓰고 있었구나. 품에 담아두고 사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인데.

 

알아요, 요즘 좀 지쳤어요.”

.”

 

말하면서 주연 역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주연이 쓰게 웃었다. 나 좀 힘든가 봐. 자꾸 눈물이 나네

 

우리 그냥, 살자…”

 

재현의 손이 차가운 살갗에 닿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주연의 몸을 빈틈없이 끌어안았다. 사는 데 별다른 이유 붙이지 말고, 그저 이렇게지금처럼만 살자고.

 

함부로 죽지 마. 그럼 난 어떡하냐.”

“...”

너 없으면 난 어디서 친구 구하라고. 여기서 친구 만들기 힘든데.”

 

이날을 계기로 두 사람은 센터 밖으로 나가서 살게 됐다. 주연의 슬럼프를 핑계 삼아 센터와 밀접한 1구역 주택가에 숙소를 얻었다. 정부군이 주둔한 지역은 센터가 있는 민간인 주거단지인 1구역, 빈민가가 모여있는 2구역, 상업시설이 있는 3구역으로 이뤄졌다. 민간인은 공격하지 않기로 반정부군과 협약한 중립 구역이었다. 4구역부터는 반정부군과 전투가 이어졌다. 그곳은 매일이 전쟁터였다.

 

숙소는 원룸치곤 훨씬 큰 공간이었지만 싱글 침대 두 개를 놓으니 꽉 찼다. 새 보금자리엔 작지만 창문도 있었다. 주연은 한 달 동안 휴가 아닌 휴가를 받은 만큼, 간만에 얻는 자유시간을 제대로 만끽했다

 

재현이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면 주연은 보통 침대에 걸터누워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씻고 머리를 말리면서 주연에게 물었다. 물기에 젖어 곱슬거리는 머리를 쳐다보며 주연이 작게 웃었다


오늘은 뭐 했어.”

오늘은요…”

 

느릿하게 읊어대는 일과는 늘 비슷했다. 집 앞 서점에 가서 책을 읽다 오거나, 라디오로 클래식을 듣거나. 그것도 아니면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거나. 밖에 뭐가 있길래 그렇게 쳐다봐. 물어봐도 주연은 두루뭉술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햇볕이 따뜻해서요. 아니면 날이 밝아서요

 

날이 어둑해지면 냉동 볶음밥을 데워 먹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채소와 과일 같은 신선식품은 찾기 힘들어졌다. 식료품점에는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통조림과 냉동식품만 즐비할 뿐이었다. 메뉴는 거의 똑같았지만 두 사람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재현은 냉동 치킨너겟 정도로도 만족했고 주연은 아무거나 잘 먹었다

 

고작 센터 밖으로 벗어난 것일 뿐인데도, 이 정도면 꽤 사람답게 산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계속 주연을 괴롭히던 가이딩 문제도 얼추 해결되는 듯했다. 몇 년이나 페어를 찾지 못해 고생하던 주연이 드디어 상성률 높은 가이드와 매칭에 성공했다. 죽기보다 싫다는 공용 가이드실을 전전하던 시절을 탈피해서 그런지 주연의 컨디션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페어 가이드인 정윤도 SS급인데다 상성률이 높아서 그런지, 방사형 가이딩만으로도 수치를 높일 정도였다. 팀 워치로 확인한 주연의 가이딩 수치가 초록색이었다. 실로 얼마 만에 보는 초록색인지. 재현은 제가 잘못 본 게 아닌지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기도 했다.

 

사람의 마음은 왜 이렇게 간사할까. 좀처럼 가이딩 수치가 오르지 않아 걱정일 때보단 나았지만, 가이드인 정윤과 하하 호호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짜증이 났다. 근본적인 원인을 좇다 보니 주변 센티넬은 모두 가이드가 있다는 데 이르렀다. 가이딩이 필요 없는 건 재현만이 유일했다. 전투가 끝나면 다른 센티넬들은 가이딩을 받으러 가기 바빴다. 전투가 길어질 때면 비행장에서 기다리는 페어 가이드에게 달려가 입 맞추는 광경을 보기도 했다. 그동안은 주연의 페어가 없어 같이 돌아오곤 했지만 이젠 꼼짝없이 혼자일 테였다.

 

센터장은 주연이 페어 가이드를 찾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온갖 전투에 그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재현도 함께 나가는 일이 많았지만, 주연은 거의 모든 전투에 출전했다. 출전 목록에는 항상 주연의 이름에 상위에 올라가 있었다. 최근 반정부군과의 전투에서 연달아 승리하며 분위기가 좋은 상태였다. 아예 쐐기를 박겠다는 듯이 끝없는 선제공격과 기습이 이어졌다. 주연이 선두에 서는 건 당연했다. 센터에서 가장 경력이 많은 센티넬이었고, 경험으론 아무도 주연을 이길 수가 없었다.

 

점차 숙소에서 주연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자연스럽게 재현은 혼자가 되었다. 왜 이렇게 심심하지. 그동안 주연 말고 친구를 만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가, 어차피 주연을 제외하고는 계속 바뀌던 동료들을 생각하곤 관두었다. 쉬는 날이면 방안에만 처박혀 있기 일쑤였다. 근래 중 가장 무료한 날들이었다

 

하릴없이 센터를 돌아다니다 문영을 만났다. 커피나 한잔하자는 말에 어색하게 문영의 방에 마주앉았다. 요즘 어때. 평이한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그러다 문영이 창밖으로 힐끗 고개를 가리키며 물었다. 둘이 무슨 사이야? 말들이 많던데. 생각보다 전투가 빨리 끝났는지, 때마침 복도에서 주연이 지나고 있었다.

 

우정이야, 사랑이야?”

그런 게 중요한가요.”

 

페어 가이드와 센티넬조차도 꼭 사랑만으로 엮여 있는 건 아닌데. 실제로 연인 사이인 관계도 있지만 대개는 비즈니스 파트너였고, 서로 다른 애인이 있기도 했다. 혹은 센티넬끼리 연인이 되거나. 그러나 재현은 거기까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문영이 애매한 얼굴로 답했다. 아마 곧 중요하게 될걸. 생각 바뀌면 다시 찾아와.

 

그리고 곧 재현은 그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됐다. 파죽지세로 연승을 거두던 정부군이 기습 공격을 받고 긴급 후퇴하던 날이었다. 호출을 받고 달려간 센터에서 어두운 표정의 동료들을 마주했다. 피해의 규모가 컸던지라 다들 피부가 찢기고 상처 입은 흔적이 가득했다. 처참한 흔적 가운데서 주연을 찾았다. 복도를 헤집고 다니다가 핏물을 뒤집어쓴 주연을 마주했다

 

괜찮아?”

보기엔 이래도 약간 다친 거예요.”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새어나오는데도 앓는 소리 한번을 안 했다. 한결같이 미련한 자식. 재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정윤에게 호출을 넣었다. 없던 힘까지 끌어모아 페어 가이딩실까지 주연을 부축했다. 복도 끝에서 정윤이 뛰어왔다. 야 빨리 와. 얘 이러다 쓰러지겠어. 헉헉대던 정윤이 급하게 주연의 손을 붙잡았다

 

여태껏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이 한순간에 서운해지는 것은 찰나였다. 주연의 가이딩 수치가, 아무리 가이딩 대체제를 맞아도 쉽게 오르지 않던 것이 급변했다. 정윤이 고작 주연의 손 한번 붙잡은 걸로 말이다. 체감하지 못했던 것을 눈앞에서 확인하니 기분이 묘했다. 재현이 팀 워치와 주연을 번갈아 봤다. 두 사람을 페어 가이딩 실에 밀어 넣고 재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이상하게 기분이 축 가라앉았다. 불쾌한 우울함이 재현을 집어삼켰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밤늦게 주연이 들어왔으나 재현은 몸을 옆으로 돌려 자는 척했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자세를 바꾸자 제 쪽으로 자는 주연과 마주했다. 창문 새로 달빛이 번져, 잠든 주연의 얼굴에 닿았다

 

재현은 저도 모르게 주연의 손등에 제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팀 워치를 확인했다. 당연히 가이딩 수치는 오르지 않았다. 재현의 가이딩은 본인에게만 해당하는 정도니까. 아는데도 결과가 이해되지 않았다. 차가운 피부에 뜨거운 손이 닿았으니 온기가 생기기 마련인데, 왜 가이딩이 안 될까. 왜 나는 얘한테 도움이 안 될까. 내가 이주연이랑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

 

복잡한 머리를 끌어안고 다시 문영을 찾았다. 우정인지 사랑인지 그게 왜 중요한데요. 문영이 뿔테 안경 너머로 재현을 쳐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너무 붙어 다닌다 했다.

 

쟤 열다섯에 여기 들어왔어. 근데 이주연이랑 같이 들어온 기수들 지금은 다 어떻게 됐는 줄 아니?”

아뇨.”

살아남은 게 쟤 혼자야. 제일 어렸는데도 말이지. 그래서 물어본 거야. 만약에 네가 내일 죽으면, 너 걔한테 고백할래?”

“...글쎄요.”

 

하기 쉽지 않을걸. 그 말인즉슨 이주연도 너한테 그럴 거라는 뜻이야. 예상하고는 있으라고.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게 센티넬이잖아. 문영의 말을 듣고 터덜터덜 센터 밖을 나왔다. 동료들이 떠나는 건 익숙했다. 그 안에 주연이 있어도 난 괜찮을 수 있을까. 쓸데없는 가정을 하며 시간을 때웠다. 자라나는 마음을 무시하기엔 제게 주연이 너무 큰 의미가 돼 버렸다. 여태껏 우정이라고 믿어왔던 순간마저 의심스러울 정도로.

 

-

 

주연이 탄 전투기가 공격을 맞고 땅에 떨어졌다. 재현을 서포트하다가 순식간에 생긴 일이었다. 의식을 잃은 주연이 급하게 병동으로 이송됐다. 이번 전투에서 주연과 재현을 포함한 S급 센티넬이 대거 부상을 당하거나 의식불명 됐다. 반정부군 쪽에서 정신계 센티넬을 영입한 모양인지 작전에 교란이 생겨 피해가 더 컸다.

 

 SS급 센티넬의 부상에 센터가 비상에 걸렸다. 호출받은 정윤이 주연의 곁에 붙었다. 주연의 가이딩 수치가 주황색에서 연신 깜빡거렸다. 언제라도 빨간색으로 바뀔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 재현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저를 보호하려다 다친 일이라 더 마음이 쓰였다. 정윤의 가이딩에도 좀처럼 차도가 없는지 주연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주연을 계속 보고 있자니 우울한 생각만 들 것 같아서 병실을 나왔다. 문 앞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정윤이 뒤쫓아 나왔다. 정윤도 가이딩 능력을 많이 써서 그런지 피곤해 보였다

 

상태는 아직 그대로야?”

네, 죄송해요.”

네가 뭘 죄송하냐. 그게 네 잘못도 아닌데.”

 

애써 웃어 보였는데 정윤이 되려 우울해해서 재현도 힘이 쭉 빠졌다. 형 좋아하는 거 알아요. 정윤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죄송하다고 하는 거야? 낮게 웃던 재현이 고백하듯 말했다

 

솔직히 너 미워했었어.”

저도 알아요. 표정에서 다 드러났어요.”

이미 안다고? 나름 숨긴다고 한 건데.”

이해해요. 저도 주연이 형 좋아했었거든요, 잠깐.”

 

왜 그랬대, 차라리 나를 좋아하지 그랬어. 정윤의 커피를 한잔 뽑아주면서 재현이 농담을 던졌다. 따뜻한 커피를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걸로 그동안 미워한 값 대신한 거다

 

잘 지키고 있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호출하고.”

형 또 작전 나가요?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러게. 인생이 참 피곤하다.”

센터장님도 진짜 한결같네요.”

“SS급 센티넬이 앓아누웠으면 최소한 걱정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열다섯 살때부터 일한 애가 지금 죽네사네 하는데.”

피도 눈물도 없는 분이잖아요.”

이럴 때 보면 누가 적인지도 모르겠다. 저것도 같은 편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부상을 입은 주연 대신 재현이 선두에 서는 일이 늘어나고 있었다. 잠도 못 자고 작전에 투입되는 일이 대다수였다. 없는 짬을 내서 주연을 보러 병동에 왔다가, 다시 전투에 나가는 일이 반복됐다

 

정윤의 앞에서는 멀쩡한 척했지만 실은 화가 끓어서 좀처럼 버티기가 힘들었다. 전투에서 뭐라도 때려 부수고, 불로 태워야만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정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연의 상태는 더 나쁜 쪽으로 치달았다

 

긴 전투에서 돌아온 날, 정윤이 울면서 제게 달려왔을 때 직감했다. 펑펑 우는 목소리엔 가망이 없다는 말이 되돌아왔다. 무언가에 머리를 세게 맞은 듯 얼얼했다. 그럴 리가 없다며 병동에 뛰어들어갔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붙잡고 따지다가, 미친 사람처럼 울다가, 이주연 살려내라고 화를 냈다

 

재현의 얼굴이 붉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분출하지 못하고 쌓인 열 때문에 이마가 지끈거렸다. 혹시나 하는 희망에 문영을 찾았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현실을 인정할 수 있었다. 무뚝뚝한 문영이 눈시울을 붉힌 모습은 처음 봤다

 

센터의 모두가 주연의 소식에 슬퍼했다. 단 한 명, 센터장만을 제외하고는. 센터장은 바로 재현을 호출해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그 자리에서 재현은 주연 대신 팀 리더가 되었다. 누구든지 그 자리를 대체하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쉬운 결정이었다. 센티넬들을 사람이 아니라 부품 취급하는 건 여전했다. 주연은 무엇을 위해 평생을 여기에 바쳤을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 청춘이며 목숨을 내걸었을까. 여기 사람들은 필요가 없어지자마자 그를 내다 버렸는데.

 

재현의 안에서 넘실거리던 분노가 슬금슬금 한계치를 벗어나고 있었다. 개소리를 오래 듣고 있으려니 피곤했다. 다 알겠으니까 당장은 전투에 참전할 수 없다고 못을 박고 다시 주연의 병실을 찾았다.

 

여전히 주연은 창백했다. 고요히 주연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재현은 주연을 한참 쳐다보다 볼을 쿡 찔러보기도 하고, 손을 잡아보기도 했다. 잠든 것만 같은데 목숨이 위태롭다니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내가 너 가이딩할 수 있었다면 좀 효과가 있었을까의미없는 가정도 해봤다. 그렇게 울다가, 또 울다가. 펑펑 울다가 깨달았다

 

나는 너에게 유일함이 되고 싶었던 거구나.

그만큼 네가 소중해서.

 

오랜 시간 동안 함께여서 네 옆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너를 살리는 것도, 함께하는 것도 다 나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가이드인 정윤의 자리가 내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너무 늦었다. 우정일 거라고 굳게 믿어온 마음이 사실은 사랑이었음을 말하기엔, 이제 주연에게 전할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주연의 옆에 있다가, 정윤과 교대하며 자리를 지켰다. 정윤은 자세히 말하진 않았지만 본인의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주연은 점점 더 죽어갔다. 그것과 반비례하여 재현의 출전일은 다가왔다

 

여느 날처럼 주연의 병실을 찾았다. 좀처럼 입이 떼지지 않는 듯, 몇 번이나 망설이던 재현이 이내 마음을 먹고 다짐했다. 앞으로 다시는 못할 수도 있으니까.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도록 웃으면서.

 

내일 죽는대도 난 고백할래.”

 

“…좋아해.”

 

그러니까 넌 살아남아.”

 

차가운 손을 맞잡으며 제 마음을 전했다. 언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자각하기 훨씬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것 같다고

 

처음 센터에 들어왔을 때 주연은 열아홉이었다. 어른스러운 척해도 풋풋한 얼굴이, 모두가 잠든 뒤 허물어졌던 표정이 생각나서 눈가가 시큰해졌다. 같이 살아남자고 했잖아.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 미워서, 참으려 해도 눈물이 새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음이 약해질까 봐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재현은 병실을 나섰다. 그리곤 정윤을 따로 불렀다.

 

어떤 짓을 해서라도 이주연을 살려줘.”

…”

뭐든 해. 걔를 살릴 수만 있다면. 부탁이야.”

 

정윤에게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었다. 속상하지만 그런 건 재현이 할 수 없는 범주니까. 형 왜 떠날 사람처럼 말해요. 정윤이 울먹이며 재현의 팔을 붙잡았다. 돌아와서 두 눈으로 직접 봐요. 형 살려놓을 테니까. 그런 정윤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재현이 지친 표정으로 답했다. 만약이라는 말 진짜 싫어하는데, 이번에는 자꾸 만약을 생각하게 돼. 그것도 아주 생각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만약. 눈가를 벅벅 닦은 재현이 잠긴 목소리로 잘 부탁한다는 말만 남긴 채 떠났다.

 

이후 재현이 출전한 전투에서 그는 돌발 공격을 한 후, 알 수 없는 궤도로 이탈했다

 

불행하게도 재현의 행방불명이 센터에 전해진 날, 주연은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재현은 모르겠지만 마지막 말을 남길 때 주연의 의식은 깨어있는 상태였다. 재현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주연이 아슬아슬한 가이딩 수치를 이기지 못하고 폭주 직전까지 갔다. 가이딩을 극구 거부하는 터라 처치가 늦었고 그것으로 왼쪽 다리에 문제가 생겼다.

 

이후로 주연은 가이딩을 받지 않았다. 센티넬의 효용 가치가 떨어진 그는 은퇴식을 치렀다. 은퇴한 후 조용히 살던 주연은 어느 새벽, 다급한 호출을 받고 센터로 복귀했다. 그곳에서 그토록 찾던 이재현을 다시 만났다.

 

-

 

왜 거짓말했어요?”

내가 뭘.”

능력, 쓸 수 있잖아.”

 

주연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닦달했다. 잠시 침묵하던 재현 앞에 작은 불길이 솟았다. 불길이 점점 큰 화마로 번졌다. 뭐하자는 거예요? 주연이 재빨리 얼음을 만들어내 불길을 제지했다.

 

거짓말 아닌데. 쓸 수 있게 된 건 5분도 안 됐어.”

센터장님이 참 좋아할 만한 소식이네요.”

근데 보다시피 조절이 잘 안 돼. 속에 화가 많은가 봐. 조금만 꺼내야 하는데 그게 어려워.”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았던 능력도 한번 쓰고 나니 두 번은 쉬웠다. 연습은 이전보다 훨씬 순조롭게 진행됐다. 능력을 어떻게 조절하는지만 배우면 되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성냥 한 개비에 불을 붙이는 것부터, 그다음은 휴지 한 장. 볏짚 한 단. 장작 한 개비. 점점 범위를 넓혀가며 불붙이는 연습을 했다. 하나를 하고 나면 재현은 다음 단계를 물었다. 그리고 결국 훈련실을 집어삼킬 만큼 큰 불덩이를 만들어내고 나서야 질문하기를 관뒀다

 

그 다음 만남에서 주연은 연습을 쉬자고 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건 처음이라 재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뜰라나.”

오늘이 마지막이어서요.”

 

주연이 빙긋 웃었다. 갑자기 왜? 말도 없이. 그토록 싫어하던 수업을 끝낸다는데도 어쩐지 재현은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재현씨 능력 찾았잖아요. 더 할 필요가 없죠.”

알잖아, 나 아직 완벽하지 않은 거.”

그 정도면 충분해요. 원래 잘하던 사람이니까.”

 

재현의 투덜거림을 뒤로 한 채, 주연은 조곤조곤 작전 투입 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위험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어떤 점을 조심해야 하는지. 전투기를 몰 때 특이사항은 없는지. 한참 설명을 듣던 재현이 툭 물음을 던졌다.

 

꼭 어디 떠날 사람처럼 얘기하네.”

 

무감하려 애쓰던 주연의 동공이 조금 흔들렸다. 마지막을 말하는 건 언제나 힘겨웠다.

 

마지막이에요. 나는 이제 떠나니까.”

가서 안 와?”

그러려고 은퇴한 거죠.”

 

부럽다, 나도 은퇴하고 싶은데. 내막을 모르는 재현이 입을 삐죽였다. 언제 은퇴할 수 있어? 주연이 애매하게 답했다. 아마 필요가 없거나, 다른 이유로 필요하거나 할 때요.

 

센터에서는 아마 재현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주연을 붙잡고 늘어졌던 걸 생각하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주연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가이딩을 관뒀고, 모두가 말림에도 불구하고 가이딩 대체제로만 연명했다. 전투에 참전하고 오면 가이딩 수치가 떨어지는데 그걸 어떻게 회복할 거냐고 잦은 질책을 들었다. 주연은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이제 주연이 알 바 아니었다.

 

깨어난 후 정윤에게서 그간 센터에 있었던 일과 재현의 당부를 전해 들었다. 센터장의 행보는 예상 가능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정말 신물이 났다. 매 전투에 최선을 다하던 주연의 다짐이 조금씩 깨어졌다. 목표가 없으니 사는 게 시들했다. 재현을 기다리는 것만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폭주했을 만큼, 주연은 모든 것에 이골이 났다

 

왼쪽 다리에는 폭주 직전의 후유증이 남아 있다. 부단히 재활 치료를 한 덕에 평소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지만, 컨디션이 나쁘면 왼쪽 다리를 살짝 절뚝이곤 했다. 이렇게 사는 게 과연 사는 걸까. 매일 밤 누우면 천장에 재현의 얼굴이 보였다. 나이가 들었는지 고장 난 몸은 말썽이었고 하루가 지날수록 나빠졌다.

 

사는 게 지루해서, 욕먹을 것을 감수하고 은퇴 의지를 밝혔다. 보통 센티넬이 은퇴하는 일은 잘 없다. 대개는 죽어야 끝나니까. 그러나 주연은 센티넬치고 너무 오래 살았다. 당연히 처음부터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한참을 실랑이하던 센터장과 계약을 하나 하고 나서야 센터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은퇴 후 1회에 한해, 센터의 호출 시 주요 전투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출전해야 한다고. 죽는 것마저 전쟁터에서 능력 다 쓰고 죽으라니. 그것도 참 센터다운 생각이라고 여겼다.

 

재현은 계약에 적히지 않은 예외였다. 재현을 보는 시간만이 유예 기간처럼 느껴졌다. 그동안의 나날은 재현을 보기 위한 기다림이었으리라. 재현의 생존을 위해 능력을 찾길 바랐는데, 막상 능력을 찾고 보니 못내 아쉬웠다. 이제 자신의 효용 가치는 정말로 끝인 셈이다. 아마 곧 출전 명령이 떨어지겠지

 

주연은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약했다. 재현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서 이미 끝을 경험했으니까. 그리고 이번엔 정말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재현의 얼굴을 더 많이 보다 오는 건데. 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뒤로하고 주연이 센터를 벗어났다

 

-

 

결전의 날이 밝았다. 재현은 심호흡하며 전투기에 올랐다. 이젠 방법을 알려줄 주연도 없으니 오롯이 혼자 깨우쳐야 했다. 조종석 스크린에 뜬 하강 표시에 의아해하던 찰나 무전기를 통해 리더인 서빈의 말이 들렸다. 알 수 없는 방해 물질 때문에 예상한 지점보다 훨씬 앞당겨 하강한다고

 

순간 안개라도 낀 듯 차창 너머가 뿌옇게 번져 시야 확보가 불가했다. 우왕좌왕하는 새에 폭탄이 날아들었다. 빙글빙글 곡예라도 하듯 전투기를 몰았다. 핸들이 목숨줄이라도 되는 양 몸을 바짝 붙였더니 어지러웠다. 하강한 지점부터는 전투기가 진입할 수 없는 구간이었다. 기억을 잃은 재현은 거의 첫 출전이나 다름없는데, 처음부터 예기치 못한 변수가 끊이질 않았다. 조금만 방심하면 목숨을 잃기에 신중해야 했다

 

폐허가 된 5구역은 아스팔트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폭발음이 수차례 들렸다. 부서진 건물 안에 몸을 숨긴 재현이 숨을 크게 내쉬고 불씨를 만들어냈다. 재현이 불을 만들어내면 다른 팀원이 염력으로 불을 띄워 적진에 날렸다. 반정부군에서도 단단히 대비한 모양인지 불을 던지기가 무섭게 폭탄이 이쪽으로 떨어졌다. 염력계 센티넬이 한 명인 탓에 공격보다는 수비에 힘이 쏠렸다

 

폭탄을 막는 사이 재현은 미로 같은 골목을 빠져나가 적진에 뛰어들었다. 연신 폭발음에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반정부군이 먼저 주둔하고 있어서인지 그들은 이곳 지리에 빠삭했다. 적은 지겹게도 달라붙었다. 재현이 지나는 곳마다 빠른 속도로 불꽃이 튀어 올랐다. 스쳐 지나는 곳마다 불바다였다. 그렇게 수많은 적을 처리했음에도 막다른 곳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

 

헉헉. 혼자 다 처리하기 힘든 숫자에 힘이 빠졌다. 게다가 상대편에 윈드 컨트롤 센티넬이라도 있는지, 재현이 불길을 내기가 무섭게 반대 방향으로 바람을 밀어 위협하곤 했다. 불이 제 쪽으로 되돌아왔다. 자칫하면 팀원들이 잘못될 수 있는 상황이라 능력을 쓰기도 겁났다. 거센 바람에 건물들이 맥을 못 추리고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제대로 피하지 못한 콘크리트 잔해가 온몸에 묻었다.

 

첫 출전부터 너무 빡세네…”

 

안전한 곳을 찾아 몸을 잠깐 숨겼다. 흙먼지가 폴폴 피어오르는 바닥에 누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수없이 귀로 듣고, 눈으로 봤던 작전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다. 막상 실전에선 그런 게 다 무용지물이 돼 버렸다. 잊고 있던 무전기를 호출했다. 아이씨. 교신을 차단했는지 신호가 먹통이었다. 건물 밖으로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리고, 뿌연 공기가 눈앞을 가로막았다. 매캐하고 탁한 공기에 연신 기침이 터져 나왔다.

 

바깥 상황은 소란스러운데 재현의 머리는 백지장이었다. 주연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자연스레 그 생각부터 났다.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능력을 발휘하느라 무리했는지 급격히 피로했다. 그냥 쉬고 싶다. 그러려면 얼른 돌아가야겠지. 몸을 일으키는 찰나, 거대한 폭발음에 웅크리고 구석진 곳에 숨었다.

 

기껏 살려놓은 전기를 반정부군에서 모두 끊은 모양인지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졌다. 그 순간 무전기에서 지지직하는 소리가 들렸다. 재현이 형 지금 나와요. 여기 지원 필요해요. 팀원인 병욱의 목소리였다. 알겠다며 대충 대꾸하고 나오자 때마침 병욱과 마주했다. 다 저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재촉하는 목소리에 그 뒤를 따라나섰다.

 

골목은 좁고 어두웠다. 게다가 아스팔트인데 왜 이렇게 바닥이 푹푹 꺼지는지. 기묘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걸었다. 다른 사람들은 무사해? 그렇다며 건성으로 대꾸하는 병욱을 바라보고 있는데 뭔가 이상했다. 왜 이렇게 오랫동안 가지. 순간 주연이 전투에 나가기 전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엇도 믿으면 안 돼요. 계속 의심하고 또 의심하세요.”

같은 팀도 믿지 마?”

그게 진짜가 아닐 수도 있어요.”

 

생각해보니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내가 여깄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멈춘 무전이 갑자기 작동하고, 지원이 필요하다면서 병욱은 그저 계속 걷고 있다. 심지어 이곳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처럼. 각자 싸워도 모자랄 판에 팀원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못 미더웠다. 병욱을 따라 걷던 재현이 더 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주연이는 왜 안 왔어?”

아. 주연이는 이따 올 거예요.”

 

그렇구나. 곰곰이 생각하던 재현이 손가락을 튀겨 작은 불씨를 만들어냈다. 다행히도 제가 던진 미끼를 물었다.

 

근데 주연이가 너보다 형 아니었나? 언제 봤다고 주연이지.”

모르셨나 봐요. 저랑 친해서 말 놓기로 했는데.”

그래? 근데 걘 은퇴해서 여기 올 일이 없는데.”

 

병욱의 몸을 돌려세우며 물었다. 너 병욱이 아니지? 누구야 너. 불꽃에 병욱의 얼굴이 비쳤다. 흐흐흐흐. 병욱의 얼굴을 한 가면이 교활하게 웃었다. 정체를 들키자 귀신 소리처럼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팀원이라고 믿던 환영이 재현의 곁을 빙빙 맴돌았다. 당장 저리 안 꺼져? 불꽃이 크게 번졌다 사라졌다. 주연이 말한 환각이 이런 거구나.

 

온갖 이상한 것들이 어둠 속에서 활개를 쳤다. 개중에는 그럴듯한 진짜도 포함돼 있어서, 어디까지가 허상인지 분별하기 어려웠다. 커다란 불덩이 옆에 구은성이 있었다. 재현이 기억하는 은성의 모습과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았다.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재현아, 하고 한 템포 쉬던 것도. 곤란할 때 미간을 조금 찌푸리는 것도. 그래서 은성은 죽었다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몇 발자국 가까이 다가갔다

 

은성의 형상을 한, 은성과 똑같은 것이 살아있다. 이렇게라도 보게 돼서 다행이다. 바보같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불덩이가 그 형상에 조금씩 가까워졌다. 나 좀 살려줘 재현아. 하필 빌어먹게도 또 불이다. 이번에도 불에 잡아먹히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불길 속으로 다가가던 재현이 무언가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에 걸음을 멈췄다

 

주연이 귀에서 계속 속삭이는 것 같았다. 계속 의심해야 해요. 그게 진짠지 아닌지.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았다. 구은성이다.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도 구은성이다. 불꽃에 비치는 얼굴을 들여다봤다. 어둠에서 빛으로 바뀌는 그 순간, 은성의 형상이 잠깐 허물어졌다. 이번엔 구은성이 아니다.

 

나도 알아. 저게 가짜라는 것 정도는.”

 

재현이 착잡한 표정으로 구은성을 등지고 돌아섰다. 피로한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눈앞에 계속 이상한 것들이 돌아다녔다. 아직도 환각이 안 끝났나. 이곳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다. 아무리 멀티라지만 짧은 시간에 능력을 과도하게 썼더니 힘이 부족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주연과 더 연습했어야 하는 건데. 다 지난 후회를 했다

 

아수라장이 된 도시를 채우는 건 정체를 알 수 없는 형상과 비명, 퀴퀴한 냄새뿐이었다. 쓸모도 없는 무전기를 짜증스럽게 내던졌다. 왔던 길로 돌아가야겠다. 걷다가 몸에 힘이 풀려 부서진 건물 계단에 주저앉았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생이 뭐 이러냐. 예전의 이재현은 어떻게 이런 삶을 살았지. 재현이 끔찍한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못해.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쉬지도 못하고 능력을 쓴 탓에 가이딩 수치가 바닥났다. 그래서인지 숨 쉬는 것부터 힘겨웠다. 재현은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있다가 무심코 속마음을 내뱉었다

 

그만두고 싶어.”

 

뭘 위해 사는 건지 모르겠어. 더는 날 기다려줄 사람도 없는 곳으로 돌아가기 싫어. 아마 센터로 복귀하면 재현이 능력을 쓰지 못하게 될 때까지, 결국은 죽을 때까지 이 생활을 반복하게 될 테였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반정부군이랑 뭐 때문에 싸우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곱씹다보니 분했다. 능력을 갖게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원해서 이렇게 태어난 것도 아닌데 모두 재현더러 감당하라고 한다. 센터에선 재현을 유일무이하고 특별한 존재라고 떠받았을지 모르나 자신이 원한 건 이런 삶이 아니었다. 적어도 다짜고짜 센터에 처넣고서 전쟁터로 내보내는 삶은 원하지 않았다.  

 

삶에 의지가 없으니 가이딩 수치가 높아지지 않는 건 당연했다. 가이딩 효과는 센티넬의 감정과 상태에 영향을 받으니까. 정신이 점차 아득해졌다. 재현이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재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불덩이가 되었다. 몸이 뜨거운 것을 넘어 아프기까지 했다. 굴러떨어진 워치에서 주황색이 떴다. 꼭 재현의 불꽃 같은 주황색이 깜빡깜빡. 가이딩 수치가 주황과 빨간색의 경계에서 수도 없이 깜빡였다. 재현이 기억하기로 빨간색은 폭주다.

 

넘실거리는 불길 속에서 재현은 또다시 이상한 환영을 보았다. 아니, 그것은 환영이라기보단 어떤 기억 같았다. 그 장면들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뜻밖에도 주연의 얼굴이었다. 앳된 얼굴의 주연이 재현에게 다가섰다. 그다음 장면은 주연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는 이재현. 샤워실에서 울던 재현을 끌어안던 주연. 쓰러진 주연을 들쳐메고 병동까지 달리던 재현. 다음, 그리고 다음 장면도 모두 등장인물은 같았다. 어리숙한 두 사람의 모습이 눈앞을 꽉 채웠다

 

처음엔 허상이라고 여겼다. 재현이 기억하는 장면은 하나도 없으니까. 그러나 그 기억들의 클라이맥스에 다다를수록 환영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장면이 끝날 때쯤에 재현의 전투기가 추락하고, 이것과 같은 폭발이 있었으며재현이 기억하는 유일한 인물인 구은성이 등장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기억이 한순간에 소용돌이쳤다. 과거의 재현은 폭주 후유증으로 해리성 기억상실을 겪었다고 했는데, 이걸 다 기억하면 그땐 죽는 걸까 생각했다. 불덩이가 주변을 집어삼키고 점차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번진 불이 삽시간에 모든 걸 태워버렸다

 

구은성은 봤으니까, 마지막으로 이주연 한 번 봤으면 좋았을 텐데.”

 

재현을 둘러싼 불길이 회오리쳤다. 한번 폭주한 능력을 좀처럼 막을 수가 없다. 결국 마지막까지 불 때문에 죽네. 정말 죽는다고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점차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지독하게 피곤한 인생이었다. 다음이 없기를 바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쉬고 싶었다.

 

고요히 죽음을 맞이하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정신이 들었다. 볼에 닿는 공기가 싸늘했다. 분명 자신은 화염 속에 갇혀 있었는데, 눈을 떠보니 불은 사그라지고 있었다. 이제 고작 재현의 발치에만 닿을 정도로 불씨가 줄었다

 

…”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재현을 중심으로 얼음 탑이 빼곡히 쌓여 있었으니까. 불 앞에선 한낱 아지랑이가 되어버리는 얼음을 생각하면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어떻게 했어.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주연이 불길 앞으로 다가섰다

 

나 혼자론 안 될 거 같아서 후배 힘 좀 빌렸어요. 워터 컨트롤하는 친구여서.”

주연아.”

 

다시 만나게 된 이후론 좀처럼 들을 일 없는 호칭이었다. 의아하게 쳐다보던 주연의 동공이 점차 커졌다

 

나 다 기억났어.”

“...”

내가 너무 늦게 왔지.”

 

남아있는 불길을 모두 거둔 재현이 주연을 똑바로 응시했다. 흔들림 없는 시선이 마주했다. 지겹게도 봤던 얼굴인데 내막을 알고 나니 달리 보였다. 예전보다 나이를 먹은 주연의 얼굴엔 사라지지 않는 자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가이딩을 받지 않아 회복이 더디다는 말이 기억났다. 다리는 어쩌다 그렇게 됐어. 떨리는 음성으로 재현이 사실을 물었다. 주연이 애써 왼쪽 다리를 숨기려 했지만 이미 재현에게 다 들킨 후였다. 그냥, 폭주 후유증이래요

 

왜 다치고 그래.”

 

그제야 묘하게 한쪽 걸음이 느렸던 게 이해가 됐다. 내 몫까지 살아남으라고 했잖아. 미안함에 재현이 괜한 투정을 부렸다. 쉰 목소리가 갈라져 뚝뚝 끊겼다. 불이 꺼진 도시엔 눈보라가 일었다. 주연이 말할 때마다 입김이 번졌다. 그래서 왔어요. 생각해보니까 아직 이 말을 못했더라고.

 

좋아해요.”

 

그토록 듣고 싶은 말이었는데 왜 이렇게 슬픈 거지. 곧 죽을 때가 됐나. 울컥 감정이 차올라 눈가를 닦았다. 이미 눈물이 핑 돌아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죽기 전에 고백 안 해요. 그러니까 이 말은…”

“...”

오늘 우리가 여기서 죽지 않는다는 거야.”

 

주연이 재현의 볼을 매만졌다. 그의 손은 변함없이 차가웠다. 재현은 제 손목에 주연의 손을 갖다 댔다.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쿵쿵 규칙적으로 뛰는 맥박을 느끼며 안도했다. 혹시 이것도 허상일까 봐.

 

살아서 돌아가요 우리.”

.”

별다른 이유 붙이지 말고, 그냥 살아가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래, 그러자.”

 

돌아가면 그때처럼 살자. 낮에는 네가 좋아하는 산책을 하고, 오래된 맥주를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하던 그날처럼. 콩 통조림과 옥수수캔 중에서 실랑이하다가 결국 내가 좋아하는 옥수수캔만 사오는 나날. 재미없는 영화를 보다가 낮잠을 자는 그런 날. 그땐 네가 원하는 대로, 창문이 큰 집에서 살자.

 

재현의 대답에 주연이 빙긋 웃었다. 좋아요. 오래도록 꿈꿔왔던 순간이었다. 한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이 재현과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서로 다른 체온이 엉켰다. 불과 얼음은 그런 것이다. 아무리 차가워도 얼음은 불을 얼릴 수 없고, 아무리 뜨거워도 불은 얼음을 불태울 수 없다. 기억을 떠올리며 미지근한 온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유일한 것이라고.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