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밀웹진






 

1. 타마고미소라멘

 

 

 

그를 벌써 3년째 보고 있습니다. 어떤 해에는 한여름. 어떤 해에는 한겨울입니다. 오사카에 올 때마다 이곳에 들른다는 주연 상은 일본에 머무는 내내 저녁마다 온 적도 있고요. 일정이 바빠 한 번밖에 못 올 때도 있고는 합니다만, 음식을 주문하기 전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요즘은 어떤 메뉴가 제일 잘 나가냐 묻는 그의 단정한 일본어를 들을 때면 내심 서운했던 마음도 눈 녹듯 녹아내렸으니까요. 그는 제가 기다리는 가장 먼 단골인 셈입니다.

 

오랜만에 보지요? 마지막으로 본 게 작년 여름이었으니까……. 벌써 일 년이나 지났네요.

. 사실은 겨울에도 오고 싶었는데요. 일이 바빴습니다.

라멘은 추울 때 먹어야 더 맛있는데 말이에요.

여름에 먹어도 맛있는 걸요. 그리고 한국에는 ", , ,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한자로 된 사자성어인데 열은 열로 이긴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한국인들은 제일 더운 날 제일 뜨거운 음식을 먹습니다.

일리가 있네요. 날씨보다 더 뜨거운 음식을 먹으면 비교적 날이 시원하게 느껴지니까요.

, 그렇습니다.

 

주연 상은 간만에 보는 우리 가게 메뉴판이 반갑다는 듯 계속 뒤적거리다가 하나를 골랐습니다.

 

일단, 일본에 막 도착했으니까. 미소라멘부터 주문할게요. 미소 베이스는 역시 현지에서 먹어야.

, 일본의 미소라멘. 면은 기본으로?

.

알겠습니다.

! 그리고 반숙 계란도 같이 주세요.

, 반숙 계란 추가.

생맥주도 주문할 수 있으려나요. 시간이 너무 늦어서.

시간이 늦었으니 맥주를 먹어야죠.

감사합니다. 피곤해서 숙소에 가자마자 자야겠습니다.

 

팔팔 끓고 있는 육수를 휘젓고 면을 몰래 늘려 삶았습니다.

 

맥주 나왔습니다. 마침 다시마튀각이 있었네요.

원래는 땅콩이었는데. 업그레이드인가요?

멀리서 온 특별 고객인데 아무거나 드릴 순 없죠.

 

기분 좋게 웃은 주연 상은 "." 하는 소리와 함께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켰습니다. 그가 다시마튀각에 한눈판 사이 저는 메뉴를 재빨리 내놓기 위해 서둘렀습니다. 준비가 조금 느리더라도 항상 최고의 맛과 최선의 퀄리티를 보여야 하는 우리 라멘집이지만 그는 항상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손님이고, 오늘 가면 또 언제 올 지 모르기에 짧은 시간을 소중히 써야 합니다. 그릇에 담긴 음식은 아무리 배가 불러도 끝까지 다 비워내는 예의 바른 청년입니다. 그릇이 넘치도록 육수를 가득 부어주면 그것을 다 먹을 때까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숙주를 아주 높이 높이 쌓았습니다. 카운터석에 앉아 코앞에 있는데도 그릇이 무거워 옮기는데 국물이 넘칠 듯 넘실거렸습니다.

 

! 많아요!

공항에서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요?

평소 먹던 것보다 두 배는 많은데요…….

 

그리고 초반의 몇 입은, 가만히 기다려 보아야 합니다. 자주 오는 동네 고객들은 알아채지 못 할 저의 나태함이나 변심, 무력함 따위의 마이너스 상태가 1년 동안 제 국물을 맛보지 못 한 저 청결한 혀와 코 끝에는 아주 적나라하게 비칠 수 있으니까요. 부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기를 속으로 빌었습니다.

 

역시 최고입니다.

다행입니다.

오사카에서 제일. 아니, 아니. 일본에서 먹어 본 라멘 중에 제일 맛있어요. 유명하다는 라멘집은 꽤 많이 가 봤는데 말이죠. 어딜 가던 이 맛과 비교하게 되더라고요.

어떻던가요.

우우.

 

주연 상이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며 야유하는 시늉을 합니다. 저는 드디어 마음이 놓여 편하게 그의 앞에서 남은 재료를 손질했습니다.

 

이번엔 얼마나 머무시는 거죠?

오사카에는 내일까지예요. 모레에는 교토나 고베에 다녀올 예정입니다.

. 이번엔 본격적인 여행을 하시려나 봅니다.

그래도 짧은 휴가입니다. 고작 일주일이에요.

이런……. 한국 학교는 방학이 짧은 편이죠?

방학에도 학교를 나가니 실제 방학은 일주일 정도.

! 심해! 학구열이 높은 나라는 아무래도.

고등학교라서. 중학교는 더 길게 쉬어요. 교풍마다 다르겠지만 아마 일본이랑 비슷하겠죠.

 

주연 상은 한국의 일본어 교사입니다. 그래서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처음 그가 우리 식당에 왔을 때 백 퍼센트 외국인이란 걸 전혀 눈치채지 못 할 정도였어요. 방언을 쓰지 않길래 도쿄에서 온 사람이겠거니, 아니면 혼혈이라거나?

 

여전히 일어를 잘하시네요. 볼 때마다 놀라워요.

아닙니다. 최근에 회화를 잘 안 하다 보니까 발음도 안 좋아지고 단어도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그럴 리가. 대화에는 전혀 문제없는걸요.

생존 회화는 절대 잊어버릴 수 없으니까요. 화장실 어디 있나요? 이건 얼마죠? 교토행 신칸센 티켓은 어디서 구매합니까? 미소라멘 주세요.

, 라멘은 필수네요.

라멘은 필수입니다.

 

잘 익은 반숙 계란을 반 가르자마자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그의 앞에 스끼다시로 내어 준 튀각 접시가 비었습니다. 다시 가득 담아 주며 본격적인 근황을 묻기로 했습니다. 주연 상이 들려주는 한국 얘기는 언제나 재미있으니까요. 아무렇게나 지어 말해도 사실 상관없는걸요. 주연 상은 생맥주 한 잔을 더 주문했습니다. 기대되는 순간입니다.

 

1년 사이 특별한 일은 없었나요?

특별한 일이라면…….

아마, 로맨스라던가. 주연 상 나이에는 그게 가장 특별한 일이잖아요? 결혼은 아직?

전혀. 로맨스라면 자신 없는데요.

에이. 그럴 리가요.

정말이에요. 겉모습과는 달리 은근히 소심해서 말이죠.

하지만 주연 상은 엄청나게 잘생겼잖아요? 게다가 고교 선생님이라면 여자에게 인기가 많지 않나요?

하하. 예전이라면 인기 많았었겠지만 요즘엔……. 글쎄요. 일본과 마찬가지로 교사 급여가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

말도 안 돼.

하하.

 

그는 그냥 웃었습니다. 맥주는 첫 잔보다 천천히 비워집니다. 배부른지 젓가락질 속도도 느려졌어요.

 

면은 남고 육수만 비었네요. 더 드릴까요.

,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양하지 말고요.

 

깊게 우러난 육수를 한 국자 크게 뜨고 숙주도 듬뿍 얹었습니다.

 

한국에 연애 프로그램이 인기 많다고 하던데요. 일본 사람들도 좋아합니다.

맞아요. 요즘 제일 많이 올라오는 콘텐츠입니다. 혹시 보신 영상 있나요?

아니요. 대신 딸이 즐겨 봐서 저한테 말해주는데 사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현실적이지 않으니까요.

그 점이 많이 거슬린달까.

맞아요. 진짜 연애는 그렇게 극적이거나 드라마틱하지 않은걸요. 아무리 현실이 영화보다 더 한다고들 하지만요.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연애를 하죠?

일본이랑 비슷할 것 같은데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고백을 하고, 승낙하면 연애를 하고. 아니면 연애 프로그램처럼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인연이 될 수도 있고요. 다 똑같지 않겠어요?

역시 사랑이란. 만국 공통이군요.

, 그렇습니다. 간단하죠.

주변 여자들이 많이 고백하지 않나요?

에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좋아하고 있는 사람은 있어요.

! 동료 선생님?

아니요.

누구?

글쎄요. 짝사랑 중입니다.

에에?! 짝사랑?

.

 

제가 경악하자 주연 상이 작은 소리로 웃습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냐는 식이지만 주연 상의 사랑을 받는 여자도 마찬가지로 주연 상을 좋아할 게 뻔했으니까요. 이 짝사랑이 오래 지속되고 있는 거라면, 그는 바보짓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어떤 분입니까?

흐음……. 스토리가 긴데요.

완전 레디 상태입니다. 오늘은 손님도 별로 없는 날이라고요?

하하. 그런가요.

 

그는 긴 회상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젓가락을 손에 꼭 쥔 채 턱까지 괴었어요. 그러다가 웃긴 장면이 생각난 듯 혼자 꼬마처럼 웃었습니다. 새로 담은 육수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어요. 열을 열로 이기는 나라에서 온 남자의 귀가 진한 벚꽃색으로 물들었습니다. このなんて(이 더운 여름밤에, 벚꽃이라니.)

 

제가 사는 빌라에 자전거 도둑이 든 날이었어요.

 

 

*

 

 

벌써 석 달이 넘었지요. 올 초에 있었던 일이니까요. 학교에서 제공한 관사 계약이 끝나는 바람에 이사를 가게 됐습니다. 겨울에 휴가를 못 온 것도 이사 때문입니다. 이 가게 앞에 있는 멘션이랑 비슷하게 생긴 아파트였는데요. 시설은 노후되었지만 분위기가 아늑하고 주차장에 있는 항아리 진열장도 제법 근사해서요. 마음에 들었어요. 이웃은 대부분 오래 거주하고 있는 노인층이나 자녀가 있는 가정이었고요. 옆집에도 혼자 사는 독거노인이 계셨죠. 조용하고, 심심한 곳이라 금방 적응했습니다. 문제는 교통이었는데요. 학교까지 버스를 타고 가자니 대기가 길고, 걷자니 시간이 아까워서 자전거를 한 대 구매했어요. 아파트에는 자전거 보관소가 따로 있었거든요. 자물쇠로 잠그지 않아도 아무도 훔쳐 가지 않을 만큼 치안이 좋은 동네이니까요. 다들 자전거 한 대쯤은 가지고 있었죠. 사실 한국에서 절도는 흔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도 자전거를 훔쳐 가는 일은 간혹 벌어지곤 하거든요. 저도 처음에는 열심히 자물쇠를 잠그고 다녔는데요. 어느 순간부터 해이해져서는 잠그는 시늉만 하고 그냥 걸쳐만 놓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두 달쯤 잘 타고 다녔을까요. 제가 하루 택시를 타고 출근한 사이에 자전거를 도둑맞고 만 거예요. 휴일에는 근교로 자전거 여행도 가곤 했기 때문에 꽤 비싼 모델을 구매한 건데 말이죠.

 

당황했지만 낙담할 필요는 없었어요. 아시다시피, 한국은 온갖 곳에 카메라가 다 설치되어 있으니까요. 경찰을 불러 제 자전거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차량의 블랙박스를 확인했습니다. 범인은 바로 잡혔죠. 교복을 입은 학생이었습니다. 애초에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자전거를 훔쳤다는 것만으로도 도둑질이 익숙할 나이는 아닐 거라고 예상했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초보 도둑이었고, 다행스럽게도 제가 근무하는 학교는 아니었어요. 경찰은 아이가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따끔하게 혼을 내야 한다고 했지만, 저는 일을 최대한 조용히 마무리 짓고 빨리 제 자전거나 돌려 받고 싶었습니다. 학교 선생이 학생에게 범죄를 당했다는 게 소문나면요. 그 학교나 제 학교나 아주 곤란해질 게 분명하니까요.

 

사실 경찰서에서 만나는 것도 거리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학교에서 다른 학교 학생을 다른 학교 선생이 훈계하는 것도 주변에서 보면 이상해 보일 거란 말이죠. 아무쪼록 교사라면 언제나 학부모의 민원을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요? 아이는 작은 지구대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딜 둘러봐도 자전거는 보이지 않았어요. 저는 사과를 들으려고 온 게 아니라 자전거를 돌려받기 위해 온 것이기 때문에 몹시 당황했습니다. 제 자전거는 어디에 있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대답 없이 제 너머의 빈 벽만 쳐다보고 있었어요. 그곳에는 범죄 신고 포스터가 걸려 있었는데요. 아마 겁을 먹은 거라고 생각이 되어서 아이를 데리고 나와 주차장 가장자리의 느티나무 밑으로 갔습니다. 경찰관에게는 어린 아이가 실수한 것이니, 제가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했죠.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알고 있지? 그래도 여전히 대답은 없었어요. 하는 수 없이 아이의 부모님을 불러야 했습니다.

 

자전거만 받고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네가 계속 내 말을 무시하면 집에 알려야 해. 그래도 괜찮겠어?

 

역시 대답하지 않습니다. 저는 한숨을 쉬며 부모님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죠. 한참을 허공만 쳐다보고 있던 아이가 답했습니다.

 

없는데요.

부모님 연락처가?

부모님 없는데요.

 

말문이 막히지 않았겠습니까. 오히려 저를 더 미안하게 만들 작정이었던 걸까요. 하지만 갓 도둑질을 하다 걸린 어린 아이가 하는 말을 전부 다 믿을 수는 없으니까요. 일단 추궁했습니다.

 

학교에 전화해서 확인해 봐도 돼?

…….

최대한 너희 학교 친구들은 모르게 하려고 학교 밖에서 만난 건데. 계속 내가 너희 부장 선생님이랑 말이 오가면 의도하지 않아도 소문이 나. 주변에 다른 어른은 없어?

…….

?

…….

어쩔 수 없지. 담임 선생님 부를게, 그럼.

 

아이는 계속 묵묵부답이었고, 저는 하는 수 없이 연락처에서 그 학교 교무실 전화번호를 찾고 있었는데요. 마침 아이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습니다. 동시에 아이는 저를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긴장된 얼굴을 했어요. 전화를 안 받고 화면만 쳐다보고 있길래 저도 덩달아 읽어 버렸습니다. 아하. 그리고 곧바로 작은 트럭 한 대가 지구대로 들어왔습니다. 표정이 잔뜩 굳은 이가 트럭에서 제 자전거를 꺼냈고요. 저는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바로 알았죠. 저 사람이 이 아이의 보호자구나.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일을 하다 온 건지 회사 이름이 적힌 작업용 유니폼을 입고 있었어요. 키도 꽤 컸어요. 그는 현 쨩입니다. 저는 화가 잔뜩 난 상태로 지구대로 들어가려는 현 쨩을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저기요! 잠깐만요!

 

제 쪽으로 고개 돌린 현 짱은 저와 제 앞에 있는 아이를 번갈아 쳐다보았습니다. 아이를 볼 때 급격히 싸늘해지던 눈빛이 무서워서 떠올리고자 하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현 쨩은 저를 보고서 허리를 꾸벅 숙였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아마 경찰서에서 저보다 더 먼저 그를 불러냈나 봐요. 제가 한발 늦은 셈이죠. 제가 자전거를 받고 떠나가면 아이가 학교에서 혼나는 것보다 몇 배로 더 무섭게 혼날 거라는 게 안 봐도 뻔했습니다. 저는 아무도 시키지 않은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어요.

 

학생이 이미 충분히 사과했고, 저도 자전거를 바로 돌려 받을 수 있다면 아무 문제 없습니다. 원래 어릴 때 한 번씩 다 이런 장난치면서 크는 거잖아요? 다시는 안 그러면 되죠. 학생이 너무 미안해하는 바람에 제가 더 민망해지던 중이었어요.

 

사실 저도 제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저는 본능적으로 느꼈던 모양이에요. 현 쨩을 부끄럽게 만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요. 그 자비는 아이를 향한 것이기도 했고요. 현 쨩을 향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아끼던 자전거까지 도둑맞아 놓고 왜 굳이 그 두 사람을 두둔하냐고 한다면……. 아이가 훔친 자전거를 대신 들고 성큼성큼 걸어오던 화난 사람이……. 제 눈에는 정말 거대해 보였거든요. 어릴 적 제 아버지보다 무서웠습니다. . 잠깐 떠올렸는데도 긴장되네요. 하지만 나쁜 긴장감은 아닙니다. 아마 그때의 전율은 지금 그를 다시 본다고 해도 느껴지지 않을 거예요. 처음은 처음이라 특별한 거 아닌가요.

 

저는 아이를 매섭게 노려보는 현 쨩에게, 물론 그는 계속 저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지만요. 눈은 계속 자신의 동생을 보고 있었으니까요. 하하핫, 언과 행이 서로 합의가 안 된 모습이었죠. 어쨌든. 제 누그러진 반응을 보고 법적인 문제까지 갈 일은 없겠다고 느낀 것 같았어요. 현 쨩이 저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하자마자 말이에요. 그가 굉장히 곧고……. 마른 손가락으로 동생의 뒤통수를 세게 눌러 같이 고개 숙이자마자요. 급격히 민망해졌기 때문에 저도 덩달아 같이 고개 숙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최대한 안심할 수 있게 안 해도 될 말을 덧붙였어요. 아이를 향해서요.

 

앞으로 자전거 타고 싶으면 연락해. 말 안 하고 가져가는 건 나쁜 짓인데 허락 받고 가져가면 타고 싶은 만큼 실컷 탈 수 있잖아. 알겠지?

 

현 쨩의 동생은 그제야 저에게 사과했습니다. , 죄송합니다. 아마 현 쨩이 지켜보고 있어서겠죠.

 

……. 형님분도 학생 너무 혼내지 마세요. 제가 알아듣기 쉽게 잘 타일렀습니다. 꼭 연락해?

 

제 근무지 학교가 적힌 명함을 건넸어요. 현 쨩이 아닌 아이 쪽에 넘겼습니다. 어차피 가족이니까요. 제가 학교 선생이란 걸 알면 더 확실하게 안심할 수 있지 않겠어요? 역시 첫 만남이 꽤 강렬했네요. 평범했으면 이렇게 오래 임팩트 남을 수는 없었을 텐데요. 그날 이후로 저는 계속 현 쨩과 마주치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이유는 뻔한데 처음엔 저도 저 자신이 이해되지 않을 만큼 어려웠습니다. 이 뒷이야기는 조급 답답하기도 하고 못나기도 했습니다. 다음에 오면 이어서 또 들려드릴게요. 자리를 너무 오래 차지하고 있었네요. 언제 오냐고요? 내일까지는 여기에 있으니까. 당연히 내일 저녁에 오죠.

 

그럼, 잘 먹었습니다.

 

 

 

 

 

 

2. 소유라멘과 교자

 

 

주연 상은 오늘도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가게 미닫이문을 열었습니다. 낮에는 잠깐 비가 오더니 이후로 내내 맑았어요. 아니나 다를까 바싹 마른 우산을 들고 왔네요. 주연 상은 어제 앉았던 자리부터 확인합니다. 아차. 오늘은 그 자리에 손님이 있어요. 저는 그 손님과 두 자리 떨어진 곳에 그를 앉혔습니다. 카운터석의 정중앙인 셈이었죠. 오늘의 메인은 주연 상.

 

낮에는 어디 다녀오셨어요?

덴노지 동물원이요. . 무척 더웠습니다.

동물원? 보통 아이들이 가는 곳이긴 한데요.

. 남자 혼자 온 사람은 저 뿐이더라고요. 수업 자료로 쓸 일이 있지 않을까, 해서 사진 찍으러 갔는데 이른 시간이라 여유로웠습니다.

그래도 더웠지요?

. 땀을 너무 흘려서 중간에 옷을 사 입었습니다. 오사카 기념품이에요.

 

저는 그의 새 옷을 칭찬하며 앞선 손님의 교자를 그릇에 담았습니다. 맑은 소금 육수로 만든 시오라멘과 육즙이 풍부한 교자는 아주 잘 어울리는 조합이죠. 이 시간대에는 하이볼과 함께 교자를 곁들이는 고객이 자주 찾아옵니다.

 

튀김 냄새가 좋은데요.

주연 상은 아직 저희 교자를 드셔보신 적 없나요?

전혀요. 항상 라멘만 먹었습니다. 가라아게는 포장해간 적 있고요.

? 처음? 교자도 맛있어요. 사실 제일 인기 안주는 교자인데요.

좋아요. 오늘은 교자……. 랑 소유라멘으로 부탁합니다. ! 차슈도 같이요.

고기가 더블이네요. 괜찮으신가요?

. 하지만 여기 차슈는 꼭 먹어야 해요. 내일부터는 먹고 싶어도 못 먹는 걸요. 맥주랑 같이 먹으면 되니까 괜찮습니다.

, 맥주가 있으면 문제 없죠. 그럼 교자랑 소유라멘. 토핑은 차슈. 맥주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 오늘은 아사히로 주세요.

 

시원한 아사히 맥주 한 병과 얼음 컵을 가져다주며 물었습니다. 튀각이 다 떨어진 관계로 오늘은 아쉽게 땅콩.

 

내일은 어디로?

아침 일찍 교토에 가려고요. 아주 간만인데 기대됩니다.

교토도 좋지요. 날씨가 시원해지면 더 좋겠지만요.

그러게요. 방학에만 올 수 있으니 조금 힘든 건 감수해야죠.

 

사실 어제 그를 보내고 난 뒤에도 계속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내내 이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혹시나 오늘 놓치게 된다면 짧으면 반년, 길면 몇 년을 더 기다린 후에야 들을 수 있는걸요. 옆의 손님이 주연 상을 계속 힐끗거리길래 제가 대신 그를 소개했습니다.

 

한국에서 온 손님이에요.

. 일본어를 굉장히 잘하십니다.

 

주연 상은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한국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어요.

대단해! 그럼 교사인 건가?

, 그렇습니다.

언어를 두 개나 알다니 대단해. 나는 아는 한국어가 "감사한다." 이거 하나 뿐인데요. 발음이 이게 맞나요?

맞아요. "감사합니다." 정확한데요?

"감사. . 니다."

. "감사합니다."

뜻이 뭐더라.

감사합니다.

, 정확히 기억났어요.

 

손님은 주연 상에게 이것저것 소소한 질문을 했고, 저는 그사이 교자를 가장 맛있게 굽는 일에만 집중했습니다. 3년째 만나온 그에게 처음 선보일 메뉴가 남아있었다니. 오늘 이 고객이 교자를 주문하지 않았더라면 주연 상은 앞으로 최소 반년은 제 교자를 맛보지 못하는 거였잖아요? 제가 끝나지 않은 그의 이야기를 아쉬워하듯, 그도 미처 다 먹어 보지 못 한 제 요리를 아쉬워할 게 분명합니다. 기름에 튀겨지는 만두피 소리가 비처럼 바스락거려요. 물을 살짝 넣어 뚜껑을 덮고 증기를 쏘이면, 표면의 반죽은 쫄깃하게, 가장자리는 과자 같은 질감이 되지요. 그 안에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고기와 야채가 있고요. 하나의 음식에 수십 가지 식감이 존재할 수 있다니. 교자는 라멘과는 다른 매력입니다.

 

차슈가 엄청 커요!

 

오늘도 역시 무시무시한 점보 라멘을 대접했습니다.

 

이건 교자입니다.

한국에 있는 일식집에서 자주 시켜 먹어 보았는데 말이죠.

비교해 보시겠어요?

안 먹어 봐도 알지요. 비교를 하면 안 됩니다. 물론 그 요리사들도 일본인이었지만요.

 

교자를 한 입 베어 문 주연 상은 옆자리의 손님과 한국의 일식집에 대해 이야기하며 한참을 조곤조곤했습니다. 서로 모르는 손님들이 제 카운터를 마주 보고 앉아서 이렇게 빨리 친근해질 수 있다니요. 이것은 교자 속에 잔뜩 엉켜 있는 각종 속 재료의 힘입니다. 만두는 화합의 음식이죠. 잘 섞인 재료는 따로 먹을 때보다 훨씬 더 훌륭한 맛을 냅니다. 시너지. 저는 이런 교자의 날마다 식당 운영을 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맛이 어때요?

훌륭해요.

다행입니다.

진작 먹어볼 걸 그랬어요.

 

손님은 본인이 더 뿌듯한 표정을 하며 하이볼을 한 잔 더 주문합니다. 잔에 얼음을 따르며 주연 상에게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 말이에요. 손님께도 들려드리지 그래요?

어떤……. . 현 쨩?

. 현 쨩. 로맨스는 여럿이서 들어야 더 재미있죠.

 

현 쨩이 누구냐는 듯 저와 주연 상을 번갈아 쳐다보는 손님께 제가 이어 설명했습니다.

 

이렇게 멋진 청년이 한국에서 아주 열렬한 짝사랑을 하고 있다고 하네요.

! 말도 안 돼. 지금 당장 전화해서 고백해요. 무조건 받아 줄 겁니다.

제 말이 그 말이에요. 무려 여름 내내 혼자만 좋아하고 있다니까요?

젊은 남자가 참 답답하구먼!

 

주연 상은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제가 어제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현 쨩의 동생에게 자전거를 빌려주기로 했었죠.

그건 또 무슨 얘기야.

 

저는 간추린 이야기를 손님께 전했습니다. 손님의 두 눈이 즐거움으로 가득 차 반으로 꾹 접힙니다.

 

한국 드라마 같네. 항상 이렇게 첫 만남이 특별하더라고. 경찰서에서 처음 만난 여자라니. 드라마야.

그래서. 계속 진전이 있긴 한 건가요?

 

맥주를 새로 따라 한 모금 마신 주연이 젓가락으로 교자를 집으며 입을 열었습니다.

 

우회하는 방법이었지만요. 일단 현 쨩의 동생과 친해져야 했습니다. 현 쨩의 동생은요.

 

 

*

 

 

진 쨩입니다. 남자아이입니다만, 귀여우니까 진 쨩이네요. 알고 보니 현 쨩과 진 쨩은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건널목 빌라에 살고 있었어요. 우리는 이웃이었죠. 그 집은 테라스가 벽 밖으로 동그랗게 튀어나와 있는 예쁜 벽돌 빌라였는데요. 진 쨩은 아침마다 버스를 타러 길 건너 제 아파트 단지까지 와야 했습니다. 따지면 매일 아침 스치듯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우리 학교 교복이 아니라서 눈여겨 보지 않았던 것 같지만요. 이제 아는 사이가 되었으니 늘 진 쨩을 마주치는 건 당연했죠. 진 쨩은 항상 제가 자전거를 타고 빠르게 질주하는 뒷모습을 보고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제 자전거를 훔친 그날은, 진 쨩이 늦잠을 자서 지각을 할 뻔한 날이었죠.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는 진 쨩을 처음 보았을 때요. 제가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진 쨩!

 

안녕. 학교 가니?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던 진 쨩은 조금 늦게 저의 존재를 알아챘어요. 당황해서 인사부터 하는 모습이 전에 경찰서에서 본 모습이랑은 완전 상반되어서 저도 놀랐죠.

 

잘 가!

 

마침 버스가 왔고 저는 진 쨩과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퇴근길에 또 마주쳤죠. 저는 그때 기숙사 학생들 자율 학습 감독을 하느라 조금 늦게 퇴근을 했고요. 진 쨩은……. 뭐 하다가 그 시간에 온 건지는 모르겠네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아서요. 어쨌든 저는 또 진 쨩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진 쨩!

 

집에 가니?

. 안녕하세요.

 

저녁이 되어 똘망똘망해진 눈으로 제 인사에 답하는 진 쨩은 그제야 현 쨩과 하나도 닮지 않은 얼굴을 했어요. 입꼬리를 씰룩대면서 웃고 있었거든요.

 

저희 반에 쌤 아는 애 있어요.

누구?

말해도 모르실 걸요. 전에 축제 놀러 갔다가 봤대요. 잘생긴 쌤이라고 하니까 딱 알아 듣던데요.

. 그래? 고맙네.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가 있어도 좋게 봐주고.

그때 자전거 허락 없이 가져가서 죄송해요. 근데 정말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쌤 오기 전에 몰래 쓰고 돌려놓으려고 그랬어요. 근데 까먹고 학교에 두고 오는 바람에…….

그 말을 만나자마자 하지 그랬냐. 나는 딱히 화도 안 난 상태였는데.

왜냐하면 그때는. 그냥……. 쌤이 우리 형 부른 줄 알고 빡쳤었어요.

? 형이랑 사이가 안 좋아?

딱히 좋지도 안 좋지도 않아요. 그냥 중간? 시험 완전 망해서 전날에 형이 집 뒤집어엎었거든요…….

형이 무서우신가 보다. 어쩐지. 그날은 나도 무서웠어.

그냥 센 척 하는 거죠, .

 

저는 현 쨩의 얼굴이 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해졌습니다.

 

안 그래도 형이 아침에 안 깨우고 가서 지각한 건데……. 자전거 때문에 더 빡쳐서 전화로 죠랄하잖아요……. 지 때문에 지각한 건데, 왜 나한테 난리지.

. 예쁜 말. 네 지각이 왜 형 탓이냐? 네 탓이지.

…….

그래서. 급해서 내 자전거 들고 튄 거야?

진짜 잠깐 출석만 찍고 다시 중간에 나오려고 했어요……. 지각하면 벌금 내는데 한 번만 더 지각하면 쌤이 집에 전화한다고 했거든요. 그날은 저 빼박 죽는 날이에요.

 

지금 당장, 현 쨩은 어디에 있냐고 묻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명분은 없는걸요. 진 쨩이 저희 반 학생도 아니고 말이에요.

 

형은 집에 늦게 오시니?

매일 달라요. 오늘은 집에 일찍 왔을걸요. 새벽에 나갔으니까.

형이 애쓰시네. 매일 일하러 가랴, 너 뒷바라지 하랴. 형한테 잘해. 말대꾸하지 말고.

잘 하고 있어요. 돈 드는 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요. 돈 들까 봐 공부도 안 하는 건데.

안 하긴 뭘 안 해. 너 나쁜 사람 자전거 훔쳤으면 합의금 어마어마하게 물어 줬어야 해.

하지만 쌤은 안 그러셨잖아요.

고맙지?

. 근데 저 진짜 억울해요. 가져간 건 맞긴 한데 진짜 훔친 거 아니에요.

알았다고. 형 기다리신다. 들어가라.

. 안녕히 가세요.

맞다. 너 제2외국어 뭐야?

중국어요. 저희 반은 다 중국어인데.

그래. 잘 가라.

일본어 재밌어요?

하던 거나 마저 해. 잘 가!

 

저는 손으로 끌고 가던 자전거 위에 올라탔습니다. 어쩌다 보니 진 쨩을 집 앞까지 에스코트한 셈이 되었는데요. 사실 우연히 마주치진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거든요. 그때 본 트럭은 빌라 앞에 잘 세워져 있었습니다. 저 문이 세게 닫히면 어떤 데시벨까지 솟구치는지 정확히 기억하거든요. 완전 두근두근. 갑자기 민망해져서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창밖에서 진 쨩이 소리쳤어요. ! 그 자전거 얼마 있으면 살 수 있어요?! 저는 그저 손만 흔들었습니다. 현 쨩과 진 쨩은 2층에 살고 있었어요. 저는 6층인데요. 두 집 다 2의 배수 층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신기했습니다. . 별것이 다 신기하죠.

 

우리 형이 왜 쪽팔리게 쌤이랑 노닥거리냐고 겁나 뭐라 했어요.

 

아침부터 표정이 우울하던 진 쨩은 저에게 먼저 그의 얘기를 꺼냈습니다.

 

뭐가 쪽팔려?

제가 쌤 자전거 쌔비다 걸렸으니까 지는 좀 쪽팔리는가 보죠. 전 괜찮은데요. 쌤도 상관없잖아요.

. 다른 학교에 아는 애 생겨서 좋은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사건건 간섭이에요. 졸업하자마자 독립하려고요.

그래도 네 보호자야. 독립할 땐 하더라도 성인 될 때까지는 말 잘 들어.

, 싫어요.

 

진 쨩은 잔뜩 토라진 채 버스에 올랐습니다. 저도 갈 길이 바빴기 때문에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한 달 좀 넘게 진 쨩과 마주칠 일이 없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버스 정류장에는 진 쨩을 제외한 모두가 그대로였어요. 처음엔 지각인가,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저도 바빠지면서 진 쨩과 현 짱이 머리에서 잠깐 잊혔었죠. 그러다가 우연히 진 쨩의 학교 앞을 지나가게 되고, 다시 생각이 난 거예요. 아주 많이요. 사실 잊혔었다기보단 미뤄졌다는 게 맞는데요. 여태 있었던 일들이 전부 다 뒤죽박죽 섞여서는 머리로 마구 밀려 들어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일부러 일찍 나와 진 쨩을 기다려 보았습니다. 지각을 피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대의 버스가 지나가고, 저는 역시 연락을 해 보기로 했어요. 그러나 제가 아는 번호는 경찰서에서 얻은 현 쨩의 번호가 전부였거든요. 웃기게도 진 쨩의 번호는 저장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진 쨩이 좋은 핑계가 되어 주었다고 보아도 됩니다. 저는 토요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현 쨩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번에 재진이와 느티나무 밑에서 뵈었던 이주연이라고 합니다. 휴일에 정말 죄송하지만, 근래 등굣길에 재진이가 보이지 않아서 걱정되어 연락드립니다. 재진이는 잘 있나요?

 

한 자 한 자 공들여 쓴 편지와도 같았죠. 이 짧은 문자를 작성하는 동안 어찌나 긴장되던지 전송하고 나니 손바닥에 땀이 고여 있더라고요. 답장은 몇 분간 오지 않다가, 바로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 받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저 재진이 형입니다. 답장을 하려고 했는데 제가 운전 중이라서 자꾸 오타가 나더라고요. 주무시는데 깨운 거 아니겠죠?

.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원래 일찍 일어납니다. 상관없습니다. 말씀하세요.

우선 그날 일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정말 죄송했어요. 안 그래도 제가 먼저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동생이 명함을 잊어버리는 바람에요. 혹시 몰라 경찰서에도 다시 찾아가 봤는데 알려줄 수는 없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다른 의도로 찾는 줄 알았는지 어쨌는지…….

 

너무 활짝 웃는 바람에 볼이 아플 지경이었습니다. 현 쨩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시간이 아주 느리게 갔다가 전력 질주를 했다가. 하늘로 붕 뜨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어요. 사실 진 쨩의 안부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죠. 현 쨩의 목소리가 이렇게 건강하고 또렷하다면 그의 가족도 잘 지내고 있지 않겠어요?

 

재진이는 잘 있고요. 요즘 학원 다녀서 늦게 들어가고 있어요. 아침에는 지각을 자주 한다고 해서 제가 아예 일찌감치 차 태워 보내는데 그래서 아마 못 보신 것 같네요. 여러모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그럽게 용서해 주신 것도 감사하고요.

재진이가 나쁜 마음 먹고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요, . 어쨌든 지각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자전거 잠깐 쓴 건데 좀 기다려 보지도 않고 바로 신고한 저도 잘한 거 없습니다.

아니, 도난을 당했으면 당연히 신고하셔야죠…….

 

순간 아주 창피해졌지만 어쩌겠어요. 이미 바보 중의 바보로 찍혔을 텐데요.

 

재진이 번호 알려주실 수 있나요?

, 그럼요. 조금 이따 바로 보내드릴게요.

그리고, ……. 재진이 형님분 성함도……. 알 수 있을까요.

! 이재현입니다. , 현이요.

감사합니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 저희 이웃이잖아요.

선생님도 필요하실진 모르겠지만 짐 옮길 일 있으면 아무 때나 연락 주세요. 저 지게차 하거든요.

! 개 멋, 아니. 멋있으십니다. 지게차라니.

하하. 개 멋있진 않아요.

연락드릴게요, …….

. 들어가세요. 감사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아파트라도 들어서 옮겨달라고 하고 싶었습니다. 학교 구석에 있는 오래된 창고의 짐을 모두 비워야 한다면서 출장 지게차를 부르고 싶었다고요. 하지만 인사치레로 한 말을 넙죽 받아 버린다면 정말 눈치가 없는 거죠. 이런 뉘앙스라면 보통 빈말일 가능성이 높은데 말이에요.

 

제가 그의 지게차를 예약할 일은 없겠지만요. , 만날 수 있는 좋은 구실 하나가 생겼습니다. 바로 떠오른 아이디어는 아니었어요. 같이 일하는 교사의 가족이 막걸리 공장을 운영했는데요. 이전에 명절 선물로 다들 그 브랜드의 막걸리를 구매해 주었거든요. 아는 사람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아 주는 게 한국의 정이니까요. 어쨌든 그 보답으로 아직 발매 전인 신제품 막걸리 선물 세트를 한 박스씩이나 준 거예요. 비매품이니까 따지면 뇌물도 아닌 거죠? 전체 다 합해서 한 박스가 아니라 한 명당 한 박스였어요. 그 안에는 12병의 막걸리가 빼곡하게 쌓여 있었고 한두 병이면 모를까 이렇게 부피가 큰 술병은 보관할 곳도 딱히……. 감사하긴 했지만 곤란합니다. 하루에 세 병씩 자전거에 싣고 옮기다가요. 아주 간만에 진 쨩을 마주쳤습니다. 정말. 정말로 반가웠어요. 진 쨩!

 

. . 안녕하세요.

이야. 재진이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저 요즘 학원 다녀요.

그래. 너희 형한테 들었어. 시험 망해서 혼났다더니 결국 끌려가서 공부하는구나.

, 맞다. 둘이 전화했댔죠.

형이 말해줬어?

. 쌤이 저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걱정했다면서요.

그래. 한동안 얼굴 안 보일 거면 연락이라도 해 주지 그랬어.

! 저 쌤이 준 번호 잃어버렸어요. 그거 명함이요.

괜찮아. 난 네 번호 아니까. 너희 형이 알려 주셨어.

. 근데 그거 술이에요?

?

 

잊고 있었는데 자전거에 큰 막걸리가 세 병이나 올라와 있습니다. 좋은 아이디어. 재회의 순간이 온다면 이제 곧이겠거니 생각했죠.

 

. 마침 잘됐다. 형 가져다드려. 선물 받은 건데 너무 많아.

괜찮아요. 형 부담스럽다고 밖에서 뭐 받아 오는 거 싫어해요.

에이. 내가 주는 건 괜찮아. 가져다드려. 아직 마트에서 파는 거 아니라고 그래. 출시 전이야.

그럼 한정판인 거 아니에요? 대박. 진짜 가져가도 돼요?

당연하지. , 근데 너 미성년자가 술병 들고 길거리 돌아다니면. 아니야, 안 되겠다.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게 낫지.

집이 코앞인데요. 줬다 뺐는 거 없어요, !

아니야, 아니야. 뺏을 생각은 없고. 집까지 옮겨다 줄게.

진짜 괜찮은데요! 저 못 믿으시냐고요.

우리 어디서 맨 처음 만났는지 잊었어? 네가 중간에 한 병 빼 먹어도 내가 확인할 길이 없잖아. 가자.

, 진짜……. 알겠어요.

 

저는 싱글벙글 앞장 섰습니다. 정작 그 집에 살고 있는 진 쨩은 씩씩대면서 제 뒤를 따라오고 있었지만요. 그 근래 현 쨩과의 사이도 나쁘지 않은 듯 딱히 머뭇거리는 기색은 없었습니다. 계단을 오를 때도 진 쨩을 앞서 걷다가 여기가 제집이 아니란 사실에 순간 어색해졌어요. 먼저 가. 왠지 진 쨩이 절 비웃는 것 같았지만 그건 다 제가 순수하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도어락이 열리고 진 쨩이 집으로 들어갑니다.

 

! 쌤이 줄 거 있대!

 

무슨 말인가 싶어 방에서 나온 현 쨩은 현관 밖에 엉거주춤 서 있는 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알아보진 못 한 것처럼 갸우뚱하는 시간이 2초 정도 있었는데요. 제가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숙이니까 그제야 숨을 크게 들이마셨어요.

 

, .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쩐 일이세요.

. 길에서 재진이 만났는데 나눠 먹으면 좋겠길래요. 근데 또 학생한테 맡기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고. 별 건 아니고요. 이거 막걸린데요. 지인네 공장 거거든요.

? 어쩌다 막걸리를 이렇게 많이…….

신제품이라니까 드셔 보세요. 늦은 시간에 실례 많았습니다. ! 재진이가 손대나 안 대나 감시 잘해 주세요. 그럼 들어가 볼게요. 쉬세요!

, 잠깐, ! 선생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현 쨩은 순식간에 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제 뒤통수에 대고 인사를 했어요. 짧은 계단을 타고 메아리가 치는 듯했죠. 화가 나지 않은 현 쨩은 처음 보는 거였어요.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데 세어 보니 저 날이 겨우 두 번째 만나는 날이었더라고요? 예뻤냐고요? 당연하죠……. 게다가 집에 있는 모습은 청순 스타일이었달까……. 분명 강한 인상이라고 기억했는데 의외였습니다. 생각보다 더 긴장됐었어요. 그때부터 저의 열렬한 짝사랑이 시작되었던 거예요. 그 뒤로는 어떻게 됐을지 대충 예상이 가시죠? 막걸리라는 술은 혼자 먹을 때보다 둘이 먹을 때 더 맛있는 술이랍니다. 탁주라서 점도가 있기 때문에 한 잔만 마셔도 배가 부르거든요. 만취할 때까지 대화를 해서 소화를 빨리빨리 시켜줘야 하는 술이라고요. 저에겐 하필 12병의 막걸리가 있었고요. 사람이 사람과 가까워지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2. 12병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는지는 다음에 일본에 오면 또 얘기해 드릴게요. 그때는 이보다 진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현 쨩의 눈에 저는 교사치고 조금은 한량 같은 이웃 주민일 테니까요. 사실 그런 이미지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절 귀여워하는 것 같거든요. 참고로, 현 쨩은 저보다 나이가 한 살 위입니다. 연상이죠. , 손님 들어오시려는 것 같은데요. 센터를 비워드릴게요. 다음에는 추운 날에 뵈어요.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3. 네기규동

 

 

 

런치 타임에는 덮밥 메뉴가 추가됩니다. 처음엔 라멘만 조리하던 저의 식당도 손님들의 요구사항에 따라 하나둘 변화하더니 이제는 시간에 따라 메뉴판이 바뀐답니다. 사실 덮밥은 토핑을 조리하는 데에만 해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서 하지 않으려고 했었는데요. 담백한 국물의 라멘과 달콤 짭조름한 소스가 올라간 고기덮밥을 함께 먹는 게 잎이 떨어질 때쯤 되면 잘 어울린다고 해서 말이죠. 결국 밥을 짓게 되었네요. 대신 딱 점심에만 판매. 브레이크 타임이 지나면 덮밥 재료는 모두 냉장고로 들어가고 그 자리를 튀김 재료가 대신합니다. 해가 지면 튀긴 고기나 야채와 함께 술을 마셔야 하니까요. 오늘은 손님이 많습니다. 외국인들도 가게에 찾아왔어요. 이런……. 역시 메뉴가 많으니 직원을 고용해야 하는 걸까요. 도죠! 이랏샤이마세!

 

! 주연 상!

 

거짓말! 정말 거짓말처럼 주연 상입니다!

 

아직 겨울이 오려면 멀었는데요?!

하하. 오랜만입니다.

게다가 낮이라고요?

체크인한 뒤 갈 곳을 정해두지 않아서 일찍 왔습니다. 손님이 많네요.

. 역시 주말이라 바쁘네요! 영문은 모르겠지만, 여기 앉으세요.

 

주연 상을 카운터석으로 안내했습니다. 자주 즐겨 앉던 자리였죠.

 

장사가 잘되니 제가 다 뿌듯합니다.

여기가 난바라던가. 우메다라던가. 여행객이 많은 곳도 아닌데 말이죠. 손님들이 어떻게 알고 오는지 모르겠습니다.

구글이 중요하죠. 한국이라면 네이버랄까. 별점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여기는 카카오페이까지 되니까.

역시. 리뷰가 중요한 거네요.

저도 자주 남기고 있습니다. 강력 추천하고 있다고요.

주연 상 덕분에 이렇게 한국 손님이 많아진 거군요! , 오늘도 맛있는 음식을 드려야 할 텐데 말이죠.

역시 공항에서 바로 오는 길입니다. 근데 덮밥이 있네요? 추가된 건가요?

아니요. 심야에만 오셔서 모르셨겠지만 낮에는 덮밥도 팔고 있습니다. 점심 식사로 간단해서 좋죠.

그렇다면……. .

규동 추천합니다. 고기 양념이 맛있어요.

그럼, 부탁드립니다. 미소라멘도 기본으로 주시고요. 밥이 있으니까 면은 조금만 주셔도 됩니다.

. 미소라멘 추가요. 역시 주연 상은 육수가 없으면 안 되는 건가요.

어쨌든 한국에서 왔으니까요. 취향이 쉽게 변하진 않네요.

 

모락모락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밥을 움푹한 그릇에 담고, 달콤한 양념에 절인 불고기를 그득 얹었습니다. 밥만으로도 포만감이 들 수 있으니 오늘 라멘은 정말 기본 사이즈가 되겠군요. 살짝 삶아 아삭한 식감이 살아있는 숙주를 준비하고, 뜨끈한 밥과 고기 위에 쯔유로 만든 짭조름한 소스를 살짝 둘러 줍니다. 한국에는 비벼 먹는 문화가 있어서 한 그릇에 모든 재료가 얹어 나오는 규동도 비벼 먹는 음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규동은 쌀밥과 토핑을 한 수저에 함께 떠서 섞지 않고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씹는 맛과 느끼함을 잡아 줄 파를 반숙 계란처럼 동그랗게 쌓아 올리면, 우리 집 대표 런치 메뉴인 네기규동이 완성됩니다. 주연 상이 규동 사진을 찍는 동안 저는 재빨리 면을 건져 올려 고소한 미소 육수에 담가야겠네요.

 

파가 많이 올라가네요.

. 네기규동입니다. 그냥 계란을 푸는 것보다 파를 넣는 것이 씹을 때 더 재밌으니까요.

파를 좋아해서 마음에 듭니다. 한국 음식에도 파가 많이 쓰이거든요.

 

주연 상은 제가 따로 알려주지 않아도 규동을 비비지 않고 케이크처럼 한 술에 가득 떴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입에 넣자마자 우는 표정을 지어 주니 전 정말 기쁜걸요.

 

미소 라멘입니다. 최근 김 거래처를 새로 바꿨어요. 국물 맛을 헤치지 않도록 최대한 가벼운 김으로.

내내 이 미소라멘이 그리웠다고요.

하하.

 

곧 브레이크 타임이 다가오기 때문에 저는 식사를 마친 손님들의 그릇을 수거하기 위해 잠시 카운터를 비우고 홀 테이블을 돌아다녔어요. 주연 상이 들어왔을 때보다 한산해진 가게 안이 금세 이곳을 심야식당으로 만들어 버리는걸요. 밤에 나누는 손님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거운데 말이에요. 주연 상의 안부도 궁금했고 말이에요. 주연 상이 식사에 집중하는 동안 모든 테이블이 정리되었습니다. 저는 가게 출입문에 브레이크 타임 피켓을 세우고, 앞치마를 고쳐 맸습니다.

 

. 브레이크 타임이 있었나요?

. 저녁에는 튀김 메뉴가 있으니 또 준비해야지요.

저도 빨리 일어나야겠네요.

아니요. 이제야 잠깐 쉬는 시간이 되었으니 주연 상도 편하게 식사하세요.

감사합니다. 특권층이 된 기분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학교에서 해고당하고 만 건가요?

하하하. 다행히도 아직 해고는 당하지 않았네요.

그럼 어째서?

가을에 공휴일이 이틀이나 있는데요. 운 좋게 이번 화요일이 한글 창제 기념일입니다. 그날은 학교도 휴교를 하기 때문에 모든 선생님과 직장인이 출근하지 않습니다. 주말을 끼고 하루건너 생긴 휴일을 징검다리 휴일이라고 해요. 토요일과 일요일 그리고 화요일이 쉬는 날이니까 월요일이 휴식에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정부나 각 학교에서 재량으로 임시 휴무일을 지정해주기도 합니다. 이번엔 운이 좋게 학교에서 휴일을 제공했네요.

! 당당한 휴가였군요! 주연 상은 다른 도시는 가지 않는 건가요? 항상 오사카에만 오는 것 같아서요.

관광은 이제 할 만큼 했고. 보통 쇼핑 때문에 오는데 저번에 점 찍어둔 옷을 고민만 하다가 못 사고 왔으면 결국 다시 오게 됩니다. 그 옷이 없어졌어도 또 다른 옷이 눈에 들어오게 되니까요. 무한굴레이죠. 라멘이 그리운 것도 그 이유고요.

영광입니다.

진심인걸요.

 

쌓인 그릇이 일감으로 느껴진다기보다는 그저 손장난 같습니다. 가사를 미처 못 외운 노래나 흥얼거리며 무료한 오픈 준비를 하고 있다 보면 졸음이 마구 쏟아지곤 했었는데, 주연 상이 제 피로를 깨워 줄 만큼 재미있는 얘기를 해 준다면……. 오늘은 온종일 울트라 에너자이저가 될지도요.

 

몇 달이 지났으니 그 사이에 분명히 즐거운 일이 있었겠죠?

일상이야 항상 똑같죠. 하루하루 즐겁게 살려고 노력 중입니다.

주연 상이 저번에 알려준 막걸리가 궁금해서 마트에서 사 먹었어요. 확실히 사케보다는 진한 맛이 있더라고요. 사케가 깔끔하다면 막걸리는 무겁달까. 빨리 취하는 느낌이었습니다. 탄산이 많이 느껴졌기 때문에 국물 요리보다는 튀김이나 고기구이와 어울리는 맛이었어요.

! 막걸리를 기억하고 계셨군요!

애초에 많이 들어봤는데 시도는 덕분에 처음입니다.

다음엔 소주도 드셔 보세요. 과일 향을 첨가한 소주가 인기인데 일본에도 많이 보이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자몽이나 레몬을 추천합니다.

자몽과 레몬이라니! 기대됩니다.

수출을 계속하고 있는 거 보면 일본에서도 인기가 있는 걸지도.

한국 소주는 항상 인기 있죠. 특히 병의 색이 대부분 청색이라 보기에도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주연 상은 잠시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메시지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감히 예상해버리고 싶었죠.

 

현 쨩과의 사이는 여전한가요?

그럼요. 현 쨩은 불쌍하게도 월요일에 일을 해요. 저를 아주 부러워하고 있답니다.

! 드디어 성공했군요!

……. 그저 현상 유지입니다.

! 어째서? 그러면 안 돼요!

맞습니다. 가장 친한 이웃인 상태로는 역시 좀 아쉽달까…….

로맨스는 전혀?

글쎄요. 제 마음은 이미 눈치채고 있을 거예요.

 

주연 상은 빈 규동 그릇에 남은 파로 하트를 그렸습니다.

 

사실 혼자 오기 싫었어요. 현 쨩이 벌써 보고 싶어요.

 

*

 

처음 먹을 것을 나눈 선의는 또 다른 선의로 이어졌습니다. 저의 순발력 있던 작전이 통했던 거죠. 제가 알게 된 현 쨩은 분명 무섭기도 하지만, 빚지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았고, .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성실한 사람은 보통 책임감이 있잖아요? 열심히 살고 있는 현 쨩도 책임감 있고,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 판단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전 동료 선생님들을 따라 농구 동호회를 구경 갔다가 늦게 귀가하고 있었고, 진 쨩은 학원에 갔다가 오는 길이었는데요. 항상 마주치던 그 길에서 만났습니다. 진 쨩이 저를 먼저 발견하고 인사를 했어요.

 

!

! 집에 가니?

. . 형이 고맙대요, 막걸리.

. 고맙긴, . 근데 너 진짜 형 몰래 당근에 올린 거 아니지?

. 쌤네 학교엔 양심 없는 애들 많나 봐요?

당연히 많지. 뻔뻔스럽기 그지없어.

사실 저희도 많긴 한데 전 아니에요.

알겠어. 믿어 줄게.

, 맞다! 형이 육전 사 온다고 집에 놀러 오래요.

집에?

. 선물 받은 걸 어떻게 혼자 쏠랑 먹어 버리냐고 쌤 불러야겠대요. 그리고 막걸리는 혼자 먹으면 맛없다던데요.

언제 갈까! 육전 좋아!

 

. 애 앞에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잔뜩 흥분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가요? 진 쨩은 제 학생도 아닌데요? 따지면 평범한 이웃이라고요. 단지 나이가 어릴 뿐이죠. 가족이나 친구가 하나도 없는 낯선 동네에 살면서 이웃에게 초대 받았으면 당연히 가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초대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잖아요.

 

몰라요? 형 일찍 오는 날?

일찍 오면 언젠데?

세 시? 근데 이것저것하고 6시나 되어야 들어와요. 바쁜 건 아니고 바쁜 척하는 거예요.

너는 매번 이 시간에 오나.

. 제가 없으면 좀 어색?

아니. 어른들 술 먹는데 미자는 알아서 빠져 줬으면 해서.

! 그런 게 어딨냐고요! 저 아니었으면 서로 알지도 못했을 거면서!

. 완전 잘했어. 하필 내 자전거여서 얼마나 다행인 줄 몰라.

뒤끝 쩔어요, …….

나 원래 좀 나빴어. 일본어 쌤이잖아.

 

진 쨩은 큐피트답게 알아서 저를 도왔어요. 옆 학교 선생과 친해졌다는 뿌듯함도 있었을 거고 이젠 완전히 용서받았다는 안도감도 함께 했을 테지만 현 쨩에게 동네 친구가 생기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아주 순수한 느낌이라기보다는 친구 좀 사귀고, 놀러 다녀라. 나 게임 하고 싶으니까 집 좀 비워 주라, 하는 의도가 다분했죠. 롤이라는 게임에 미쳐있었거든요. 그렇게 저는 정말 현 쨩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진 쨩의 장난기는 현 쨩을 보고 배운 거였어요. 네 번째 들은 목소리에선 웃음이 잔뜩 끼어있었거든요. 그저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이 말이에요. 저는 혹시 몰라서 맥주와 소주도 사서 들고 갔습니다. 막걸리를 먹으면 두통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서요. 섬세하게 행동했죠.

 

형이라도 불러도 되죠.

, 그럼요. 혹시 선생님 나이가…….

믿기 힘드시겠지만 제가 한 살 아래입니다, .

 

처음부터 무척 친한 척했어요. 제가 쉬운 사람이 되니 현 쨩도 마음을 열었죠. 물론 최소한의 노력은 필요했습니다. 저는 워낙 처음 만난 사람과도 곧잘 대화를 잘하고, 아무하고나 친해지는 걸 좋아하니까 이런 시도가 힘들진 않았는데요. 처음 현 쨩은 저에게 존댓말이 아닌 반말을 쓰는 걸……. 그러니까, 주연 상이 아니라 주연이라고 부르는 걸 주저했어요. 제가 아직 어려웠던 모양이에요.

 

, 그래도 선생님이신데…….

전 재진이 담임이 누군지도 모르는데요. 그 학교에 아는 선생님도 별로 없어요.

게다가 재진이가 큰 잘못도 했고요…….

그게 형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저는 제 소중한 막걸리도 형한테 바로 나눠 주고, 오늘은 집에도 놀러 왔는데요?

그건 그렇죠.

전부터 진짜 궁금했는데요. 현장 얘기해 주세요. 건설 쪽에 완전 무지해서요. 요즘은 어디 쪽에서 근무하시는 거예요?

, 그 동사무소 앞에 체육관 짓고 있는 거 아세요? 올가을에 완공된다고 하는 거요.

우와! 알죠!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계셨네요? 우리 학교에서 바로 보여요, 거기.

시청에서 급하게 예산 털겠다고 짓는 거라 안에 부속 시설 엄청 많을걸요. 앞에 도로도 새로 깔았잖아요.

그건 좀 쓸데없긴 하던데.

 

전문직 종사자의 특징이라면 역시, 날카롭고 깊은 세계가 있다는 거겠죠. 조금은 답답할지라도 남들이 모르는 면적을 혼자 빠삭하게 외우고 있을 테니까요. 저 같은 교사는 전 국민이 살면서 한 번쯤은 다 만나 보았으니 하는 일이 오픈되어 있지만, 특정 작업을 요하는 직업군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누군가 일부러 캐묻지 않는 이상 그들은 영원히 자신의 말을 이해할 가성비 좋은 사람을 찾아 헤매게 될 거예요. 운 좋게 찾는다면 편할 수 있겠지만 결국 외로워지겠죠. 가성비 좋은 사람이라 봤자 동종업자뿐이니까요. 동료이자, 라이벌인 셈입니다. 현 쨩은 제가 알아 듣지 못 할까 봐 외국어를 설명하듯 아주 차근차근 이해하기 쉽게 일화를 풀었어요. 전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한마디도 잊기 싫어서 술을 최대한 천천히 마셨습니다. 그리고 가성비 좋은 말 상대가 되기 위해 모든 사연을 복습했어요. 중간에 놓친 게 있으면 다시 물어 봐서 머릿속에서 알아서 매듭을 지었고요. 말도 안 될 정도로 갑갑한 사연을 듣고 난 뒤에는 만약 나라면,으로 시작되는 상상의 나래를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중간중간 밸런스 게임을 던져 주면 아주 심각하게 괴로워 하면서 좋아했죠. 자신은 한 번도 이런 생각까지는 해 본 적 없다면서…….

 

. 너 진짜 똑똑하다. 역시 선생은 다르구나.

 

정신 차리니 우리는 친구가 되어 있었어요. 그날이 첫 만남은 아니었지만 현 쨩이 가지는 저의 첫인상은 아마 그쯤 생겼을 거예요. 호감의 이미지가 확실했기 때문에 기뻤습니다.

 

. 나 올해 담임도 아니라서 안 바빠.

 

테이블엔 막걸리도 있고 소주도 있었어요. 술 덕에 배가 불러서 육전은 반도 채 먹지 못했지만 현 쨩은 이미 눈이 반쯤 감기고 있었고요.

 

여기 오고 아직 아는 사람도 한 명도 없어. 선생님들도 너무 고였잖아. 같이 있으면 나만 겉돌아. 이게 맞나 싶어. 적어도 저녁에 할 일 없을 때 불러내서 같이 술 먹을 사람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불러! 바로 앞에 사는데 이제 그냥 형한테 전화해!

이거 진짜지. 나 진짜로 전화한다.

, 당연하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하고. 형이 사 줄 테니까.

, 형님! 왜 또 충성을 다 하게 만들어!

 

진 쨩이 깨워서 눈을 떴습니다.

 

. 뭐 해요?

몇 시야…….

11신데요.

너 집에 안 가?

여기 저희 집인데요. 쌤 집에 안 가세요?

여기나 저기나 엎어지면 코 닿는데 좀 봐주라.

……. 이 술쟁이들. 몇 병을 마신 거야.

 

현 쨩보다 덜 먹은 저는 진 쨩의 구시렁대는 소리에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습니다.

 

형은?

방에 기어들어 간 것 같은데요.

……. 치워야지.

 

비틀비틀 일어나서 잔뜩 어질러진 식탁으로 가자 남은 육전을 입에 쑤셔 넣던 진 쨩이 저를 말렸습니다.

 

, 괜찮아요. 안 치워도 돼요. 내일 형이 치워요.

. 니네 형 피곤해. 네가 대신 치워 줄 수는 없는 거지?

형도 제가 먹은 밥그릇 절대 설거지 안 하는데요. 지도 당해 봐야 돼요.

형제가 서로 얄짤없네…….

 

무슨 정신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쓰레기봉투까지 챙겨서 나왔습니다. 피곤했지만 일어나야 했어요. 아침이 되면 이보다 더 추해질 텐데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죠. 집에 돌아가는 길의 기억은 없습니다. 그저 눈 뜨니 토요일 아침이었고, 비가 오는 바람에 공사가 취소된 현 쨩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어요. 다음에 또 놀러 오라고요. 잔뜩 릴랙스 된 채 이불에 파묻혀 저를 위한 메시지를 적었을 현 쨩을 상상하면 몹시 감동적입니다.

 

게다가 현 짱에게 맹세하지 않았겠습니까? 충성을 다 하겠다고요. "남아일언 중천금." 남자가 한번 말을 뱉었으면 지켜야죠. 또 놀러 오라고 해서 또 놀러 갔습니다. 막걸리 12병을 다 비우고 나서도 놀러 갔고, 현 쨩과 진 쨩 둘 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가기도 했어요. 밤새 전쟁영화를 보며 수다를 떠느라 다음 날 눈을 뜨면 목이 다 쉬어 있을 정도였습니다. 로맨스도 아니었어요. 공포도 아니었지요. 전쟁 영화였던 이유라면요. 일단 진 쨩의 세계사 공부에 도움이 되어야 했고요. 둘째로는 복무했던 부대 일화를 풀기 위한 알맞은 분위기가 자동으로 조성되었으니까요. 평소에는 머지않은 미래에 입대할 진 쨩이 질색을 하는 바람에 군대 얘기는 절대 할 수 없었다고 했는데요. 운명처럼 저와 육군 병과가 같았기 때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 수 있었습니다. 현 쨩은 즐거워했죠. 저는 즐겁다 못 해 꿈을 꾸는 것 같았고요. 제 말끝마다 박장대소하는 현 쨩의 얼굴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모릅니다. 힘들게 일하고 온 날에는 항상 기진맥진한 상태로 만나곤 했는데 저와 시간을 보내면 에너지가 올라가는 게 제 눈에도 보였어요. 저 자신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이런 감격을 느끼게 해 준 현 쨩을 어떻게 더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24시간 붙어 있어도 모자랄 만큼 현 쨩은 너무도, 확실하게 저의 필수가 되어 버렸는걸요.

 

한국의 더위라면 아마, 오사카의 여름과 비슷합니다. 햇살은 아주 뜨겁고 다습한 날씨가 계속 이어집니다. 태풍이 오면 사람이 다치기도 하고요. 건물 유리창이 박살 나기도 합니다. 건설 중인 미완공 건물이라면 아직 완벽한 상태가 아니니 재해를 더욱 열심히 대비해야 하죠. 고등학교는 여름 방학이 짧습니다. 저번에 알려드렸듯이요. 거짓말이 아니라, 3학년 같은 경우에는 정말 방학이 일주일입니다. 진 쨩은 2학년이어서 조금 더 쉴 수 있고요. 저는 외국어 점수로 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을 위해 고3처럼 일을 했죠. 비가 내내 오다가 며칠 정도 맑은 날이 있었습니다. 뉴스에서는 쓰나미와 태풍을 대비해야 한다는 소식이 연이어 들렸고요. 현 쨩은 그사이 공사 자재들이 날아가거나 망가지지 않게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게차는 유리창 없이 사방이 뚫려있는 모양이라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아주 더워요. 탈진이 올 정도로 더워서 소금 조각과 물을 수시로 섭취해야 할 정도입니다. 저는 계속 교무실 창밖을 확인했어요. 바로 앞에 보이는 저 체육관에서 익어가고 있을 현 쨩이 걱정됐죠. 무슨 정신으로 수업을 마쳤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장 해가 높게 뜬 정오가 되었고, 제 업무는 사실상 그쯤에 끝납니다. 곧바로 시원한 커피와 얼음팩을 사서는 공사장으로 향했습니다. 인부가 많아 현 쨩을 찾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주변에 물어보니 바로 알려주더라고요. 말 없이 나타난 저를 보고 현 쨩은 아주 반가워했습니다. 가져온 게 고작 커피라 미안해질 정도로요. 에어컨을 통째로 들어서 가져왔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학교에 있을 시간 아니야?

내 수업은 다 끝나서 상관없어. 엄청 덥지.

오지 마. 나 땀 냄새나.

괜찮아.

 

닦아도 닦아도 계속 흐르는 땀을 부채질로 식혀 주며 대체 언제 쉴 수 있냐 물었습니다. 마침 밥 먹을 시간이 다 되어 다행이었죠. 냉방이 아주 잘 되는 식당에 둘러앉아 다 같이 밥을 먹었는데요. 저는 얼떨결에 그들과 합석하게 되었습니다. 다들 처음 보는 저를 흘긋거리자 현 쨩이 저를 소개했습니다.

 

제 동생이에요.

동생이 있었어?! . 전에 학교 다니는 동생 있다고 했었지.

. 수업 일찍 끝나서 저 보러 왔대요.

 

정말 진 쨩의 동생이라도 된 것처럼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이렇게 멋진 사람이 내 형제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었어요.

 

어디 학교 다녀? 우리 아들은 2학년인데.

. 저 주재고요.

같은 학교네! 윤성이 알아? 김윤성?

알죠. 윤성이. 걔 제2외국어가 저랑 같거든요.

! 그래?! 윤성이는 공부 열심히 하고 있나?

흐음……. 글쎄요……. 오늘은 보충 결석했던데…….

 

여기서 학부모를 만날 줄이야. 진땀 났지만 현 쨩이 즐거워하니 됐다 싶습니다. 저는 제가 아는 윤성 군의 학교 생활을 전부 얘기해 주며 그의 환심을 샀습니다. 마찬가지로 주재고에 자녀가 있는 학부모들이 이 애는 아느냐, 저 애는 아느냐, 묻는데 듣는 족족 아는 이름들이라서요. 질문을 하면 답을 다 해 줬습니다. 사실 거짓말 한 건 하나도 없거든요. 저도 주재고에 다니고 있고요. 학생들과 친구처럼 지내기 때문에 대체 그들이 무슨 정신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아까운 점심시간이 학부모 상담으로 가득 찼지만 이로써 저는 입장 프리 티켓을 얻은 셈이니까요. 심심할 때마다 학교를 탈출해서 현 쨩을 보러 갔습니다. 현 쨩이 몰래 지게차 운전도 하게 해 줬어요. 사진도 많이 찍었는데 보여드릴게요. ……. 여깄다. 어때요. 날씨 엄청 더워 보이죠? 10월이 와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중간에 트러블이 생겨서 올겨울까지는 공사가 지속될 거라고 하던데……. 체육관이 완공되면 현 쨩도 마음 놓고 놀러 다닐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같이 오자고 했어요. 오사카라면 안 가 본 곳이 없을 정도로 빠삭하니까요. 완벽히 에스코트할 수 있습니다. 현 쨩이 돈키호테를 검색하는 바람에 오늘 제 일정은 심부름입니다. . 너무 무리해서 많이 사버릴까 봐 걱정이에요. 욕심부리면 화를 낼 수도 있을 텐데요.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떠나기 전 다시 올 수 있다면 꼭 들를게요.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4. 츠라이돈코츠라멘

 

 

 

주방의 빈 벽에 올해의 소망을 적어 걸었습니다. 무려 붓글씨 장인에게 의뢰한 액자라고요? 축원의 내용이란 이렇습니다. 절대 지치지 않게 해 주세요. 새롭게 반짝이는 글씨를 큰소리로 따라 읽으며 오후 장사를 준비해 봅니다. 돼지 뼈 국물이 아주 깊고 진하게 우러나고 있어요. 마그마처럼 끈적이게 끓어오르는 저 뿌연 국물에 저의 모든 비법이 다 들어 있습니다. 제 아버지의 레시피이기도 하고요. 할아버지의 레시피이기도 하죠. 오늘은 이른 아침 재료 손질을 하는데 오카야마현에 사는 남동생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 라멘? 하지만 탓 쨩! 식당은 절대 무리라고 하지 않았어?

어렸을 때부터 보고 배운 게 있으니 의외로 실력이 있을 수도 있잖아? 사업 밑천은 모아두었다고.

다니던 회사는?

평생 다닐 생각도 없었는걸.

설마 그만둔 거야?

최선을 다했는데도 해고당했다고.

다른 회사에 지원해 보는 건 했어?

이미 탈락했어. 그래도 괜찮아. 새해부터는 변화하기로 했으니까, 나 이제 맛집 오너가 되고 싶어.

쉽지 않을 텐데…….

누나는 실력이 좋잖아! 배울 수 있게 해 줘.

 

눈앞이 막막했습니다. 제가 아는 남동생은 시작이 열정적이다가도 갈수록 힘이 사라지곤 했으니까요. 끈기의 문제랄까요. 끝이 좋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가족이니까 응원해야 합니다. 라멘을 배우고 싶다고 하면 제가 아는 걸 전부 알려줄 수 있지만 성실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걱정이 됩니다. 남동생은 이번 주말에 온다고 했습니다. 손님이 몰리는 시간에 아르바이트를 시켜 보면서 식당 운영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직접 경험하게 해 주어야겠어요.

 

주말이 되고 저는 평소보다 일찍 가게로 출근했습니다. 웬일로 동생은 약속 시간을 지켰더군요. 저와 동시에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탓 쨩에게 점심 손님을 위한 고기 양념과 야채 손질을 가르쳤습니다. 아무래도 초보자는 스킬이 없어서 시간이 배로 쓰이니까요. 일찍 나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아스파라거스를 일정한 크기로 자르는 단순한 작업도 남동생은 꽤 오래 버벅거렸거든요. 아스파라거스 튀김은 별미라, 손님에게 꽤 인기가 좋은데 말이죠. 넉넉히 준비해야 합니다.

 

칼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서 불은 쓸 수 있겠어? 닭과 돼지는 생고기인 채로 손질해야 한다고. 뼈와 살을 모두 분리해야 해. 적어도 오십 인분이 나올 수 있도록 매일 매일. 그리고 그걸 적당한 불 세기로 몇 시간을 끓여내.

진짜? 어렵네. 하지만 인기가 많아지면 직원을 고용하면 되니까 상관없어. 애초에 손질된 고기를 사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럼 비용이 더 많이 드니까! 그 돈으로 더 질 좋은 고기를 사는 게 옳은 방법이지!

판매 가격을 올리면 돼.

라멘이 비싸면 그게 라멘이야? 비싼 라멘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

 

그래도 아쉬운 쪽은 남동생이니까요. 제가 시키는 일은 군말 없이 했습니다. 어렵지 않은 레벨만 시키니까 큰 실수는 하지 않았죠. 놀랍게도, 오늘 해야 할 영업 준비는 무사히 마치게 되었습니다. 정시에 가게를 오픈했어요. 조금 늦어지는 것도 각오했는데 말이죠. 이후에는 손님이 몰아쳐서 남동생은 계속 홀에서 서빙을 하거나 그릇을 수거해 설거지를 해야 했습니다. 본인이 직접 면을 삶아 보겠다 했지만 저도 수개월을 실패만 하다가 겨우 감을 잡은걸요. 기껏 좋은 평을 얻게 되었는데 이 자식이 망쳐 버린다면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거예요.

 

오늘은 시키는 거나 열심히 하라고!

, , 스승님.

 

비아냥거리는 동생이지만 설거지는 아주 빠른 속도로 완료하네요. 어쩌면 소질은 이쪽에 있는 것일지도? 확실히 아르바이트생이 생기니 전 요리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아요.

 

, 아까 네가 손질한 아스파라거스야.

! 잘 먹겠습니다!

 

쉬는 시간에 아스파라거스 튀김을 시식하게 해 주었습니다. 우마!

 

엄청 맛있어! 그냥 튀기기만 했을 뿐인데도!

다른 식당 거보다 맛있지?

야채는 즐기지 않아서 많이 안 먹어 봤어.

같이 만든 건데 잘 몰라도 이게 최고라고 해야지!

최고야.

지금은 제철이 아니라 최상의 맛은 아니지만 그래도 꾸준히 팔리니까 매일 준비하고 있어.

이 정도는 내가 할 수 있지 않아?

. 타이머만 잘 지키면 돼. 가라아게는 속이 덜 익으면 문제니까 내가 튀길게. 야채 종류는 오늘 네가 담당해.

좋아! 자신 있어!

 

의욕만 앞선 건 아닌지 의심이 되어서 몇 번 연습을 시켰습니다. 미리 만들어 둔 튀김 반죽에 손질한 야채를 담갔다가 기름에 넣기만 하면 되는 거라서요. 주방을 조금 지저분하게 만드는 것 빼고는 양호했습니다.

 

정리는 항상 깨끗하게. 카운터석에 앉아 있는 손님은 이 조리대를 보면서 식사를 하니까.

알겠습니다.

더러운 접시나 도구는 싱크대에서 바로 씻도록 해.

알겠습니다!

너는 호응을 잘하는 편이라 어쩌면 저녁 장사가 더 잘 맞을 수도 있겠다. 보통 혼자 오는 손님이 많아. 술을 시키고 카운터에석 앉아 대화를 하는 일도 많고. 일만 손에 익으면 충분히 재밌게 할 수 있을 거야.

그래서 심야에도 장사를 하는 거야?

단골은 저녁에 생기는 법이니까. 언젠가 이 손님을 또다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요리하는 동안에도 즐겁지.

 

미닫이문이 열렸습니다. 도죠! 이랏샤이마세! 저를 따라 손님을 환영하는 남동생이 제법 귀여워 보이기도 하고요. 아직 첫날이지만 이 정도 에너지라면 꾸준히 기대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매운 라멘은 어떻게 만드는 거야? 냄비엔 전부 하얀 국물뿐인데.

양념을 추가하면 돼. 토핑처럼 얹어주면 손님들이 섞어서 먹거나 하지.

 

우리 가게에 와서 매운 라멘만 찾는 손님들이 있습니다. 고추기름과 파, 마늘을 섞은 양념이 한 스푼 올라가기 때문에 특유의 맛에 중독된 사람이라면 다시 안 먹어 볼 수가 없죠. 생맥주와 잘 어울리기도 하고요.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고 들어온 손님들은 홀 테이블에 앉아 간단한 튀김과 하이볼을 시켰어요. 남동생은 튀김부터 서빙까지 완벽하게 해냈죠.

 

훌륭한데? 이제 야채 모둠 튀김 정도는 믿고 맡겨 볼게.

실망시키지 않을게.

 

까만 코트를 입은 키 큰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도죠!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주방으로 고개 돌린 그는 제가 아주 잘 알고 있는 단골이었어요.

 

! 주연 상!

 

저는 주방 밖으로 나가 그를 반겼습니다.

 

안 그래도 슬슬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는데요!

! 드디어 방학입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주연 상의 전용석에 안내하자 남동생이 눈짓으로 저에게 질문합니다. 귀한 손님?

 

탓 쨩! 인사해. 한국에서 온 주연 상이야. 휴가 때마다 우리 집에 오셔. 맞죠, 주연 상?

. 드디어 직원이 생겼나 봐요. 매번 혼자 바쁘게 일하셨는데요. 일손이 늘어 다행입니다.

정식 고용은 아니지만 제 남동생이에요. 멋대로 가게에 끼어들었네요.

! 남동생!

 

주연 상이 신사답게 손을 건네자 제 동생도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밉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요시다 와타루입니다. 일본어를 굉장히 잘하시는걸요?

. 일어 교사입니다.

역시!

요시다 상은 누님을 도우러 온 건가요?

라멘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아직 첫날이지만요.

. 좋은 선생님을 만났네요.

흐음. 잔소리가 조금 있긴 한데 실력은 확실한 것 같으니까요.

원래 가족은 가족에게 더 냉정한 법입니다.

, 그렇습니다.

 

다행히 동생이 활발한 편이라 간만에 온 주연 상이 불편해할 일은 없겠어요. 주연 상은 일단 사케를 시켰습니다.

 

. 오늘은 사케를 드시려고요? 맥주를 좋아하시는 줄 알았어요.

. 맥주도 좋지만 날이 추워서 열을 내야겠어요.

맞아요. 많이 추워졌어요. 크리스마스에도 내리지 않던 눈이 올 정도면 오사카도 많이 추워졌죠. 역시 이상기후인 걸까.

 

사케를 내온 남동생이 오늘 유독 근사한 주연 상에게 칭찬을 합니다. 코트가 굉장히 잘 어울려요.

 

감사합니다. 일본에 온 김에.

설마, 오자마자 쇼핑부터?

한국에서 더 두꺼운 외투를 입고 왔는데 여긴 그 정도로 춥지는 않아서요. 어쩔 수 없지 않나요? 하필 처음 들어간 가게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바로 발견하는 건 정말 운이 좋아야지만 가능하다고요. 오늘은 운이 좋았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까 자신을 위해 쇼핑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 그렇습니다.

 

주연 상은 물도 마시지 않고 사케부터 한 잔 따라 입에 머금었어요. 어쩐지 울적해 보인다면 제 착각일까요. 새로 산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건 그는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주문을 했습니다.

 

오랜만에 매운 라멘을 먹어 볼까요.

겨울마다 드셨으니 추천합니다.

매운 돈코츠라멘 주세요. 반숙 계란도 부탁드립니다.

! 금방 해 드리겠습니다.

 

돼지 뼈와 살코기로 오래 우려낸 돈코츠 육수를 그의 몸이 충분히 녹을 수 있도록 가득 담았습니다. 얇은 면은 위장에 부담이 가지 않게 최대한 부드럽게 삶았어요. 기본 면보다 조금 얇은 면을 쓰면 매콤한 고추기름의 풍미를 더 깊게 느낄 수 있죠. 우울한 기분도 금세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즐겁고 자극적인 맛입니다.

 

잘 먹겠습니다.

육수가 부족하면 말씀하세요.

술이 부족할 순 있어요.

! 그것도 꼭 알려주시고요.

 

주연 상은 특유의 아이 같은 웃음을 지었습니다. 아이들 틈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계속 나이 들지 않는 걸까요. 벌써 4년째입니다. 그는 처음 이 가게에 왔을 때 보았던 모습 그대로 하나도 변한 것 없이 추억만 늘려왔어요. 주연 상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체육관의 공사가 마무리되면, 현 쨩을 데리고 오겠다고 말했던 걸 기억해요. 간혹 주연 상과 주연 상이 이야기해 준 현 쨩이 떠오르는 날이면 그들이 왔을 때 어떤 메뉴를 추천해 주어야 할까, 하고 혼자 고민한 적도 있었는데요. 꼭 둘이 오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항상 같은 자리에서 저의 가장 먼 단골을 기다리고 있고, 그가 어떤 해, 어떤 계절에 방문을 해도 굉장히 반가울 테니까요.

 

맛있습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사실 조금 울적해 보였달까.

맞습니다. 이번 휴가는 유독 쓸쓸합니다.

그동안 별일은 없었고요?

……. 개인적으로 성장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번 부러진 뼈는 더 단단하게 붙는다고 하니까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위로의 의미로 제 간식 상자에 있는 초콜릿을 꺼내 주연 상에게 건넸습니다. 매운 음식을 먹은 후에 디저트로 초콜릿만큼 반가운 건 없죠. 주연 상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듯 두 눈을 활짝 접었어요.

 

현 쨩에게 거절당했습니다. 덕분에 달콤씁쓸한 겨울이에요.

 

 

*

 

 

체육관 공사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완공 예정일보다 훨씬 늘어지고 있어요. 현 쨩은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어서 좋다고 했지만 어쨌든 쉬지 않고 일을 하는 거니까요. 면역력이 떨어졌는지 감기를 달고 산 지 꽤 되었습니다. 두 달째 기침하고 있어요. 저는 한 번 옮고, 싹 낫기까지 하는 동안에요. 혹시 폐렴에 걸린 건 아닌지 걱정돼서 같이 병원에 가서 검사도 받았는데요. 단순한 목감기 후유증이었습니다. 차고 건조한 곳에서 오랜 시간 일하니 기관지가 많이 약해졌다고 하네요. 목에 좋은 차를 많이 모아두는 중입니다. 별로 좋아하는 기색은 아닌데 제가 해 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에요. 대신 기침할 수 있다면 훨씬 좋을 텐데요.

 

연말은 정말 바빴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낡은 아파트가 문제였죠. 이곳보다 훨씬 북위도에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겨울이 되면 많이 춥습니다. 매일 도로 제설 작업을 해야 할 정도로 눈도 많이 내렸고요. 여기는 아니었겠지만 덕분에 저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보냈답니다. 하하. 어쨌든……. 수도가 어는 바람에 아파트 수도관이 터져버린 거예요. 하필이면 그 터진 위치가 우리 집을 정확히 지나가고 있었고요. 대공사를 해야 했죠. 이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참……. 세를 들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집주인이 어쩔 수 없이 저를 다른 집에 머물 수 있게 해 주었는데요. 바로 옆 동이어서 중요한 짐을 옮기는 건 문제가 없는데 저는 한창 학기 중이었단 말이죠. 천장을 열어보니 수도관 상태가 생각보다 더 안 좋댔어요. 공사 기간도 오래 걸린다고 하고. 임시 거처랍시고 들어간 곳은 공실인 채로 오래 방치되어서 이 또한 정비가 많이 필요했는 걸요. 집주인이 청소는 해줬지만 사람 없던 집이라 그런지 입구에만 들어서도 무섭더라고요. 아니나 다를까 악몽을 연달아 꾸기도 했습니다.

 

현 쨩에게는 머물 곳이 생겼기 때문에 큰 불편함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하루걸러 하루 만나는 사이에 서로의 집을 오가지 않는 것도 무리였습니다. 현 쨩은 제 임시 거처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겠다며 찾아오고 말았어요. 흉가 같은 모습에 소리를 크게 질렀죠.

 

우리 집 들어와! 진작 오라고 그랬잖아!

어떻게 그래. 재진이 이제 고삼인데.

어차피 방학하자마자 기숙학원 보내려고 했어. 수리 끝날 때까지 들어와 살아. 어차피 나도 집에 잘 없고.

참나. 형이 왜 집에 없었겠어. 맨날 내가 불러내니까 없었던 거지.

돈 굳고 좋네, 그럼! 앞으로는 우리 집에서 놀아, 그냥!

 

. 거절하기엔 너무 달콤한 제안이었고 구미가 당겼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드는 거예요. 이 사람은 경계라는 것도 없나? 저는 분명 진 쨩이 이미 제 마음을 눈치채고 있는 줄 알았거든요. 약간, 실망스럽기도 했죠. 상상조차 못 하니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구나 싶어서요. 그래도 선택권이 없었기 때문에 공사가 끝날 때까지 현 쨩의 집에 가 있기로 했어요. 방학까지는 며칠이 남았기 때문에 현 쨩, 진 쨩과 함께 살았죠. 잠깐 머무르는 것뿐이어도 월세를 내겠다고 했으니 따지면 제집이기도 했거든요. 저는 마음 놓고 현 쨩의 집에서 요리도 하고 현 쨩의 컴퓨터로 게임도 하면서 나름 즐겁게 지냈습니다. 집에 늦게 귀가하는 진 쨩은 우리끼리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굉장히 못마땅해했지만 제가 진 쨩에게 자전거 자유이용권을 주었기 때문에 불만이 있어도 꾹 참았어요. 원래도 탐을 내던 자전거였기 때문에 크리스마스에 아예 선물했습니다. 이제 삼 학년이니까 온갖 방법으로 격려해야 하는걸요.

 

진 쨩은 방학식 다음 날부터 정말로 기숙 학원에 들어갔습니다. 기숙 학원은 명칭에 비해 정말 재미 없는 곳인데요. 모든 전자기기를 압수당하고 아침 8시부터 밤 9시까지 대학 입시를 위한 공부만 합니다. 굉장히 답답하고 지루할 수 있지만 바로 옆에 열렬히 공부에 매진하는 경쟁자들을 보면 자극을 받게 되니까요. 어쩔 수 없이 성적이 늘어서 오기는 하는 사교육 기관이죠. 한국 수험생들은 꽤 많이 이런 유형의 학원에 다닙니다. 그만큼 비싸서 모두가 다닐 수는 없는데 현 쨩은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니까 이 정도 부양도 가능해요. 정말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 쨩의 빈자리를 느낄 틈도 없었어요. 밤새 술 마시며 떠들 수도 없었죠. 둘 다 겨울 감기에 걸려 약을 나눠 먹고 끙끙 앓았습니다. 아파도 일은 해야 했기 때문에 출근을 했는데요. 저는 학교 수업 시간에 맞춰서 가면 되지만 현 쨩은 새벽에 출근하는 날도 잦단 말이죠. 겨울엔 해가 늦게 뜨니까 아주 깜깜하고 추울 때 집 밖을 나섭니다. 아마 감기가 오래가는 이유도 이 때문인 것 같아요. 공사만 제날짜에 끝났어도 지금쯤 제 옆에 앉아서 미소라멘을 먹고 있을 텐데 말이죠. 비교적 따듯한 곳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제가 먼저 건강해졌습니다.

 

이재진 집에 없어서 다행이다……. 백 퍼 감기 옮아서 그 핑계로 학교 빠질 텐데 걘 멸균 상태로 떠났네.

그러니까. 거긴 전염병도 못 들어갈걸.

 

현 쨩은 천식 환자처럼 거친 기침을 했어요.

 

진짜 목에서 피 나는 거 아니야?

목 아파…….

 

마트에서 산 꿀단지에서 꿀을 한 스푼 크게 떠 차를 탔어요. 차 마시는 데에 흥미 없던 사람도 아프니까 몸에 좋다는 건 다 입에 넣더라고요.

 

내일 일 하루 쉬면 안 돼?

이번 주는 대근할 사람 없어서 안 돼.

그래도 이렇게 아픈데 야외에서 일을 어떻게 해. 내일 영하 12도래.

견뎌낸다……. 그까짓 거…….

 

영하 12도를 기합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웃기려고 한 말인 걸 알아서 그냥 웃었습니다. 제가 웃으면 현 쨩도 따라 웃으니까요. 물론 웃다가 기침이 다시 시작되면 저는 끔찍한 기분이 되지만요.

 

이번 연휴에 놀러 안 가?

연휴?

설에. 너 일본 자주 가잖아. 이번에도 가야지.

 

명절이 겨우 이 주 남았는데 참 일찍도 물어보지요?

 

에이. 비쌀 때 가서 뭐 해.

내 눈치 보지 말고 그냥 다녀오지?

아니, 진짜로. 그때 되면 항공편 비싸.

벌어서 어디다 써? 아끼다 똥 된다.

그럼 둘이 갈래? 재진이도 없는데.

난 성묘 가야지.

성묘 같이 가자.

부모님은 안 뵈러 가?

새해에 미리 뵀으니까 괜찮아.

 

현 쨩은 잠시 고민하다가 기침을 했어요. 덮고 있던 이불이 들썩거릴 정도로 큰기침이었습니다.

 

안 되겠다. 병원 가자.

아니야. 목이 그냥 간지러워서 그래.

아무래도 이 약이 안 듣는 것 같아. 병원 옮기는 게 낫겠어.

감기에 약이 어딨냐. 그냥 기다리면 낫는 거지.

 

나는 약 먹고 나았는데 무슨 소리람. 저는 아픈 사람 옆에 두고 웹툰이나 보면서 약 올렸습니다. 진짜 약 올랐는지 현 쨩은 벌떡 일어나 컴퓨터 전원을 켰고요. 환자가 게임이라니. 하지만 관전은 재밌기 때문에 저도 합세했죠. 계속되는 패배에 오기가 생긴 현 쨩은 이길 때까지 해야겠다며 헤드셋까지 썼고 저는 잠시 소외됐습니다. 현 쨩이 승부욕에 불타 자신만의 방에 들어가는 걸 목격한 건 한두 번이 아니라서요. 처음엔 서운했지만 이것도 곧 익숙해지더라고요. 결국 승리와 함께 게임창을 닫은 현 쨩이 헤드셋을 벗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같이 가자, 그럼.

성묘?

.

어떤 거 준비해 가면 돼?

그냥 전날 마트에서 살 것만 사서 올라가면 돼.

전은 안 부쳐?

나한테 전까지 기대하진 않을걸.

우리끼리는 부쳐 먹자.

네가 하면.

내가 할게.

그래.

 

현 쨩은 다 쉰 목소리로 저를 또다시 어디론가 초대해 주었습니다. 마냥 신날 수 없는 장소라지만 우리가 조금씩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현 쨩이 직접 인정해준 셈이니까요. 저는 그의 허락에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절대 변심하지 않는 것. 제가 자신 있게 책임질 수 있는 건 이뿐이지만 진심으로 자신 있었어요. 현 쨩의 가족이 진 쨩만 남게 된 데에는 멀지 않은 과거에 있었던 한 사건 때문인데요. 저는 이를 여러 번 들어 아주 잘 알고 있지만 굳이 제 입으로 꺼내지는 않겠습니다.

 

그곳은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한 번도 안 가 본 지역의 묘지공원이었습니다. 명절을 맞이해 삼삼오오 모여든 가족 단위의 인파가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짐을 한 아름 들어 옮기고 있었어요. 혼자 온 사람도 있었고, 대가족이 모여든 사람도 있었죠. 유명한 사람의 묘를 찾아온 이들은 버스까지 렌트해서 온 것 같았는데 모두 같은 옷을 입고 있어서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도 진지하거나 침착한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어요. 눈이 가득 쌓인 아름다운 동산으로 산책을 온 것 같았죠. 공원 입구에는 묘의 주인에게 선물하는 조화를 잔뜩 팔고 있었고요. 딱히 꽃을 사 본 적 없다던 현 쨩을 대신해서 제가 가장 크고 멋진 꽃을 준비했습니다. 어찌나 많이 들고 갔으면 주변에 함께 공원으로 들어가던 사람들이 다 저만 쳐다 볼 정도였어요. 하하. 현 쨩은 부끄럽다고 저와 멀리 떨어져서 걸었습니다. 눈이……. 눈이 아주 많이 왔어요. 전날에도 그랬고 그 순간에도 계속 눈은 내리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하나도 춥지 않다니 정말 신기한 날이었죠. 만약에 영혼이 있다면, 그 영혼에도 온기는 있을 것 같았어요. 고작 사람의 존재만으로 이렇게 한겨울이 훈훈해질 수는 없거든요. 몇 세대를 거쳐 온 가족들이 사랑한 수많은 영혼들이 여기 머무르며 가족과 재회할 이 겨울만을 기다리고 있던 게 분명합니다. 보고 싶었어. 귀가 아닌 마음으로 모든 말이 들렸어요.

 

가파르지 않은 계단을 한참 오르고, 현 쨩의 가족묘를 찾았습니다.

 

엄빠. 나 왔어.

 

저도 성묘를 해 본 적 있지만 납골당이 아닌 묘지에 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꽃 보관대에 평생 세어도 다 못 셀 법한 꽃을 꽂아 두었습니다. 옆자리 묘에 찾아온 가족이 친절하게 우리 자리까지 눈을 치워 줬어요. 상실과 재회를 수없이 많이 경험해 본 이들은 친절합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 많습니다. 덕분에 미리 사 온 과일과 황태와 술을 단정히 올릴 수 있었어요.

 

이제 절할까?

너도 할래? .

 

익숙하게 허리를 접어 엎드리는 현 쨩의 옆에서 저는 마음 대 마음으로 사랑과 응원을 전했습니다. 챙겨 온 작은 돗자리 위에 현 쨩이 털썩 주저앉았어요. 저도 따라 했습니다. 묘를 보는 방향이 아니라 그 반대의 내리막을 보는 방향에 앉았죠. 저지대의 모습이 한눈에 들여다보였습니다. 어제까진 분명 삭막했을 동산에 오랜 시간 시들지 않을 조화 꽃이 만개했습니다. 어떤 꽃은 장미였고, 어떤 꽃은 목련이었습니다. 개나리도 있었고요. 진달래나 민들레도 있었어요.

 

…….

 

저도 모르게 감탄을 했습니다. 현 쨩은 살짝 미소 지었어요.

 

근데 나. 한 번도 운 적 없다?

…….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진짜?

.

. 재진이가 볼까 봐? 장남의 무게 좀 내려놓고 살아도 돼, .

딱히 그딴 무게는 못 느껴 봤는데 뭔가 분해서.

왜 분했어.

분하잖아……. 늦둥이를 낳았으면 내가 걔 귀여워 해 줄 시간은 줬어야지.

왜 이래……. 충분히 귀여워 하고 있어…….

귀엽긴 개뿔이. 바로 징그러워지던데. 키가 그렇게 빨리 크냐. 어질어질하더라고.

 

현 쨩의 얼굴에는 다행히. 이걸 다행이라고 말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다행히 슬픔이나 그리움 따위의 축축한 표정은 없었고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한 점 없기에 떳떳하고, 자신이 뿌듯한. 그런 어른만 있더라고요.

 

형은 진짜 멋있어.

……. 고맙다.

장난 아니고 진짜야.

알아, 인마. 너도 멋있어. 한 번 꽂히면 직진하는 점이 특히.

꽂혔는데 어떻게 직진을 안 해?

. 그렇게 외길 인생 사는 점이 특히. 넌 모르겠지만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직진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

 

현 쨩은 다리를 쭉 뻗고 앉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막 올라오기 시작하는 성묘객을 여유로운 눈으로 지켜보았습니다.

 

안 돼…….

…….

 

안 된다고 하면 안 할 거지만요. 뭐가 안 되는 건지는 알아야 하잖아요. 하지만 현 쨩이 알려주지 않아도 저는 긴장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무 설명 없이 안 돼, 라고 말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싹해졌어요. 사뿐하게 어깨에 내려앉는 작은 눈송이가 날카롭고 아팠죠.

 

뭐가 안 돼.

너 나 좋아하잖아.

 

안부를 묻듯 가벼운 어조였습니다. 바지에 묻은 지푸라기를 털어내면서요. 정말 태연한 태도로 저를 구석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안 돼?

안 되지.

사람이 매력이 없던가, 그럼.

내 탓인가?

이제 와서 그만두는 건 못 해. 형도 그냥 대충 견뎌.

 

제 주특기잖아요? 남들은 모르고 산다는 직진을, 때와 장소 가리지 않고 해낸다는 거요. 아마 현 쨩은 제법 뻔뻔하게 보는 듯한 그런 저의 일부 말이에요.

 

그래도 노력은 해 봐. 왠지 각이 서서 그래.

무슨 각.

그런 게 있어. 그냥, 너한테 점점 의지하는 것 같아서 싫어.

무슨 소리야. 그 반대지.

아니야. 여기 오니까 확실해졌어.

…….

아까 절 하는데……. 진짜 오랜만에 좀……. 울컥하더라고.

…….

 

현 쨩이 인정하는 순간 현 쨩 몸에 갇혀 있던 눈물들이 조용히 흘러나왔습니다. 소리 없는 울음이었습니다. 중간에 섞인 기침이 젖어 있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그가 우는 줄 모를 정도였어요.

 

세상을 살다 보면 슬픈 일이 얼마나 많고, 힘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앞으로는 또 얼마나 많을 건데.

…….

그때마다 매번 이렇게 울 수는 없잖아. 나이는 먹을 대로 먹어 놓고, 남자가 쪽팔리게…….

 

현 쨩의 어깨를 감싸고 같이 울었습니다. 그동안 있는지도 몰랐던 괴로움과 슬픔은 고백하고 싶은 사람이 등장하고 나서야 정체를 드러내는걸요. 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현 쨩은 저에게 안 된다고 했지만 사실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제게 대신 들려준 걸 거예요. 이렇게 화기애애한 명절이라니. 등 뒤에는 현 쨩의 가족을 앉혀 두고요.

 

. 사실 나는 울보야.

너는 그래도 돼.

나 사실 눈물 셀카도 자주 찍어.

참나.

 

울다가 웃는 현 쨩을 안고 계속 고백했어요.

 

나는 울 때도 잘생겼거든. 원래 잘생긴 애들은 울 때도 잘생겼어. 빡쳐도 잘생겼고.

알긴 아네.

그러니까 형도 막 울어도 돼. 아무도 흉 안 봐. 형도 눈물 셀피 찍어 봐. 카메라만 켜면 눈물 쏙 들어가서 짜증 날 때도 있긴 한데 해 봐.

, 진짜. 너 때문에 못 살겠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실제로 보여주는 게 더 좋은 거 맞겠죠? 현 쨩 말대로, 살다 보면 이보다 더 슬픈 일도 있을 거고 힘든 일도 있을 거야. 그러면 눈물을 참을 수 없어질 거야. 울게 될 거야. 울 수 있어. 하지만 오래 울게 두지는 않을게. 나는 현 쨩이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웃긴 사람이니까. 저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거거든요.

 

돌아오는 길에는 명절 연휴 중 하루 외박을 허가 받은 진 쨩을 데리러 갔습니다. 못 본 사이 살이 조금 올라서 훨씬 귀여워졌어요. 남의 눈에도 귀여운데 핏줄 눈에는 오죽하겠어요? 현 쨩은 좋은 일만 겪고 산 사람처럼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진 쨩의 얼굴이 구겨지든 말든 상관없이 놀리고 웃었어요. 생존자들의 재회를 축하하며 저는 수리가 끝난 제 원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간만에 들어간 집은 서늘했지만 익숙하고 아늑했어요. 저는 지어진 지 너무 오래된 나머지 수도관이 동파하기도 하는 낡은 아파트에게도 이렇게나 의지하는데요. 역시 멋진 남자가 되는 길은 구불구불 험난한가 봅니다. 계속 어울리고 싶으니 저도 강해져야겠지요. 비교적 약한 제가 곁에 계속 있어서 감기가 낫지 않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언제나 그랬듯 이곳에 왔습니다. 차라리 잘 됐어요. 현 쨩이 고배에서만 파는 센베를 굉장히 맛있게 먹었었거든요. 사 가면 좋아할 겁니다. 요시다 남매분들도 드셔 보셨으면 좋겠네요. 넉넉히 사서 공항에 가기 전에 잠깐 들르겠습니다. 제가 빼앗아 먹은 초콜릿도 갚을 겸요. 오늘은 사케에서도 단 맛이 나네요. 기분이 한결 좋아졌어요. 잘 먹었습니다. 다시 활짝 웃으시고, 손님 주문 받으세요. 아까부터 만취한 저쪽 테이블에서 아스파라거스 튀김 좀 더 달라고 난리입니다.

 

 

 

5. 미소라멘과 히야시소바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줄줄 나는 더운 날씨입니다. 마트에서 계란을 주문하고 온 남동생이 잔뜩 붉어진 얼굴로 주방에 들어옵니다.

 

도로가 지글지글 끓고 있어.

정말 더웠나 보네.

찬물로 세수하고 올게.

 

에어컨 아래에 있으면 밖이 얼마나 더운지 알 수 없지만 육수가 끓는 주방의 온도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요. 여름이란 언제나 지독합니다. 시원한 음식이 절실한 날씨랄까요. 오늘은 어제보다 더 덥기 때문에 점심시간에는 냉우동이나 소바가 많이 팔렸습니다. , , , . 역시 뜨거운 라멘으로 여름을 이기려는 손님들도 계셨고요.

 

닭고기에 밑간할 차례지?

맞아.

내가 할게.

그럴래? 나는 그럼 맥주 창고를 비우고 있을게. 내일 물류가 들어오니까.

좋아.

 

남동생은 잘 버텨주고 있습니다. 이번엔 정말 진지한 태도로 라멘을 공부하고 있어요. 연초에 짧은 기간만 견습생으로 둘 계획이었는데 아직까지도 출퇴근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업을 한다더니 아예 눌러앉을 생각인 것 같아요. 하지만 그간 가르쳐 둔 게 이제야 쓸모 있어지고 있는걸요. 남동생이 저와 더 일하고 싶다고 한다면 환영입니다. 서빙과 설거지는 저보다 한 수 위인 것 같거든요. 손님 응대도 꽤 잘 하는 편이고요.

 

남동생은 마트에서 계란을 주문하는 김에 도시락도 사 왔습니다. 손님보다 이른 저녁을 먹어야 하니까 브레이크 타임에 모든 걸 해결해야 하죠. 오늘의 메뉴는 카레카츠. 우리 가게에서는 카레를 끓이지 않기 때문에 언제 보아도 반갑습니다. 향긋하고 살짝 매콤한 카레 맛이 좋아서 남동생도 저도 도시락을 깨끗이 비웠습니다.

 

우리 가게 닭튀김 위에 뿌려도 맛있을 것 같은 카레였어.

소스 자체로 충분히 자극적이니까. 다리 살과 잘 어울리겠네.

 

재빨리 테이블을 치우고, 다시 영업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에어컨은 시원하고, 식혀둔 육수 향은 달콤하고, 주방은 반짝반짝합니다. 어제는 간판에 붙어 있던 거미줄이나 날벌레 잔해도 모두 청소했다고요? 아니나 다를까 퇴근길에 이곳을 들른 직장인 손님들이 테이블을 꽉 채웁니다. 정신없이 면을 삶고 육수를 끓이고 토핑을 준비하는 동안, 남동생은 맥주를 따르고 하이볼을 제조하고 튀김기에서 가라아게를 건지고 있네요.

 

이제 너 없으면 저녁 장사는 힘들어질 것 같아.

내가 없었을 땐 대체 어떻게 일을 한 거야?

그땐 이렇게 손님이 많지 않았다고.

역시. 누나도 내 덕을 보고 있어.

맞아. 잘 부탁해, 탓 쨩. 서빙도.

 

남동생에게 돈코츠라멘 두 그릇을 넘겼습니다. 어느 손님의 것이라고 알려주지 않아도 정확한 자리를 척척 찾아내니 적어도 아르바이트생으로서의 역할로는 최상급입니다.

 

9시가 넘어가자 간간이 혼자 오는 손님을 제외하면 홀 테이블은 공석입니다. 드디어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겼죠. 뻐근한 손목을 마사지하며 되뇌었습니다. 아직은 지치면 안 돼. 주방에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아서 뻣뻣하게 굳은 허리와 다리를 두드렸습니다. 그러다가 잠깐 고개 들어 거울 속 저 자신과 마주쳤죠. 묶은 머리가 헝클어진 것 같아 모자를 벗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놀라버렸네요. 흰 머리가 늘었습니다. 미용실에 갈 시간이 없어서 염색을 미뤘더니 어느새 몸이 빠르게 늙고 있었나 봐요.

 

탓 쨩. 이거 봐. 흰 머리가 이렇게 많아.

어디 봐.

 

남동생은 원숭이처럼 제 머리를 구석구석 헤집습니다.

 

그러게. 언제 이렇게 할머니가 된 거야?

아직 할머니는 아니지!

나처럼 탈색을 하는 건?

나랑은 어울리지 않아.

어차피 모자를 써서 안 보이잖아. 상관없어.

그래도 탈색은 별로.

아니. 흰 머리말이야. 일할 때는 모자를 쓰고 내내 웃고 있으니까. 어릴 때 누나랑 똑같아.

고맙다.

자연스러운 편이 보기 좋다고.

 

머리를 깔끔히 묶고 다시 모자를 썼습니다. 제 앞서가는 세월은 이제 저와 남동생만 아는 비밀이 됩니다. 흰머리가 느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보고 듣고 배운 것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머리가 검을 때보다, 머리가 하얗게 될수록 늘어나는 손님들처럼요. 검은 머리를 잃어가는 중이 아니라 흰 머리를 얻어가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모든 게 무섭지 않을 것 같습니다. 관절은 아파도 의지는 절대로 지치지 않아요. 아직은 있는 힘껏 반겨주고 싶은 손님이 너무너무 많은 걸요. 미닫이문을 열고 저보다 더 기쁜 얼굴로 들어오는 손님께, 세상에서 가장 시원한 자리를 안내하고 싶습니다. 주연 상! 이랏샤이마세!

 

잘 지내셨어요? ? 요시다 상! 또 만났네요.

 

남동생도 주연 상을 알아보고 반가워 합니다. 그런데 주연 상은 혼자가 아니었어요. 아마 현 쨩도 아니었죠. 그는 주연 상처럼 멀끔한 청년입니다. 곰방와. 저와 남동생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고요. 일행이 있으니 테이블로 가려나 했지만 주연 상은 일행과 나란히 앉는 것을 택했습니다. 저야, 완전 환영입니다.

 

메뉴는 천천히 고를게요.

얼마든지요.

 

"이분이 그 사장님. 인상 완전 좋으시지."

"그러게. 딱 봐도 장인 같다."

 

주연 상, 역시 한국인이었네요.

. 저 한국인입니다.

이제야 완벽히 믿을 수 있어요. 일행은 친구인가?

. . 자칫했으면 못 올 뻔했어요! 워낙 휴가 일정이 늦게 나와서 말이죠.

오늘 두 분이 뭐 했는지 제가 맞혀 볼게요.

 

우리가 하는 말을 전혀 못 알아듣는 손님은 토끼처럼 코만 킁킁대고 있어요. 귀여워라!

 

, 맞혀 보세요. "우리 오늘 어디 갔다 왔는지 맞혀 보신대."

"백 미터 밖에서 봐도 유니버셜 아니야?"

 

유니버셜 스튜디오! 제가 먼저 말하려 했는데요. 아쉽네.

닌텐도 월드. 미쳤어요. . 미쳤어요.

굉장하죠. 아주 리얼하잖아요.

……. ……. 감동적이던데요. 너무 리얼해서.

놀이기구도 탔나요?

겨우 하나 탔는데 바로 지쳐버렸습니다. 날씨가 너무 더웠어요. 기념품 가게만 계속 돌아다녔어요.

역시. 저 스누피 쇼핑백이 힌트였습니다.

! ". 그 안에 뭐 있지?"

"과자랑 뽑기."

 

주연 상은 일행을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분도 현?

. 형이 한국어로 "."입니다.

. 그렇군요. 발음이 비슷해서 현 쨩이 떠올라버렸어요. 현 쨩은 잘 지내나요?

하하. 잘 지냅니다.

진전은 있는 편?

……. 보시다시피.

 

주연 상은 어깨를 으쓱이며 형을 가리킵니다. .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형과 함께 닌텐도 월드에서 충분히 즐겁게 놀았다면 그 또한 주연 쨩에게 최고의 파트너였을 테니까요. 모름지기 친구가 최고입니다.

 

"아까 소바 먹고 싶다고 했지."

"막상 들어오니까 라멘도 괜찮을 듯. 에어컨 개 빵빵하다."

"그럼 내가 소바 시킬 테니까 형이 뺏어 먹어."

"라멘 뭐가 맛있어?"

"미소라멘 먹어. 위에 고기도 올라가고 반숙도 올라가고 숙주랑 파랑."

"그래!"

주문할게요. 히야시소바랑 타마고미소라멘이요. "하이볼 먹을래, 맥주 먹을래?"

"맥주."

맥주도 두 잔 주세요. 먹고 더 시킬 거니까 각오하세요.

. 단단히 각오하겠습니다.

하하.

, 긴장돼! 형이 좋아해야 할 텐데!

무조건 좋아합니다. 제가 열심히 훈련했거든요. 이제 음식 취향이 저와 비슷해졌습니다.

"뭐라고 한 거야?"

"형 입맛에 맞아야 할 텐데 긴장되신대."

". 감동이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최고. 최고.

하하. 일본어 잘하시네요! 감사합니다.

 

생맥주와 함께 나온 와사비마메를 집어 먹으며, 두 사람은 화기애애합니다. 마치 고교생처럼 장난스럽게 웃는 주연 상의 모습이 신기하고 낯설어요. 성숙하다고만 생각했는데요. 그도 역시 청춘이었습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울까.

 

". 잠깐, 잠깐. 형 거는 내가 대신 깔게."

"그럴래?"

". 보지 말아 봐."

 

뽑기를 확인하는 중이었네요. 동그란 캡슐 안에 담긴 피규어는 비닐에 꽁꽁 싸인 채 실루엣만 보이고 있어요. !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제 눈에도 저 캐릭터는……. ! 축하해 주어야겠네요!

 

주연 상은 손바닥 위에 피규어를 올리고 형의 어깨를 두드렸어요. 고개 돌려 피규어의 뒷모습을 확인한 형은 아주 기뻐합니다.

 

"미친, 한 방에 피카츄?"

 

손바닥 위에 놓인 피규어를 덥석 쥐어 앞모습을 확인하자 피카츄가 아닙니다. 웃음이 절로 나오는 모습입니다.

 

"가 되어버린 메타몽."

"메타몽 말고 리자몽 내놔."

"없어. 나왔으니까 가져. 내일 가챠샵 가서 제대로 뽑아."

", 그래도 메타몽은 선 넘었지. 김이 팍 샘."

"바보 같이 생겼어. 카와이이이."

"너처럼 웃어. 흐물렁."

"내가 언제 흐물렁했어."

"흐물러엉. 맨날 이러고 있잖아."

"잠만보 닮았다는 말은 들어 봤는데."

"웅이가 아니라?"

"웅이는 형한테만."

"백 퍼 웅이인데……."

 

. 이렇게 실망하다니. 메타몽이라면 날계란처럼 포잉! 거리면서 무궁무진한 변신술을 뽐내는 초특급 메인 캐릭터인데요? 역시 남자애들이란……. 멋있게 짠! ! ! 하는 것만 좋아하고 말이죠. 계란도 노른자까지 푹 익혀 버릴까 보다.

 

제가 미소라멘을 만드는 동안 남동생은 소바를 준비합니다. 가다랑어 육수로 만든 쯔유는 따듯한 요리에 넣어도 맛있는 조미료이지만 물에 적당히 희석해서 차가운 육수로 만들어 먹어도 맛있습니다. 맛있는 쯔유만 만들어 놓는다면 이후의 제조법은 간단해서요. 메밀면을 대신해 우동이나 소면도 같은 육수에 담가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땐 히야시우동, 히야시소면이 되지요.

 

차가운 메밀국수라는 뜻의 히야시소바는 당연히 차갑게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우면 안 된다는 게 제 히야시소바의 규칙입니다. 그렇게 되면 촌스럽고 맛이 없어요. 육수는 절대 얼음이 얼지 않는 온도에서 보관하다가, 손님께 내기 전 상온에 두고 육수가 적당히 시원해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리고 접시에 예쁘게 옮겨 담아 간 무와 와사비를 얹어 손님께 드리죠. 저는 당연히 미소라멘을 주연 상이, 히야시소바는 주연 상의 형이 주문한 건 줄 알았는데요. 그 반대였는지 그릇의 위치가 바뀝니다.

 

", 개 맛있겠다."

잘 먹겠습니다! "맛있어. 빨리 먹어 봐."

 

저는 긴장한 채로 조리대를 정리했어요. 제발 맛있어야 할 텐데요! 제 국수에는 항상 자신이 있지만 일본어를 할 줄 모르는 외국인 손님은 대체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미처 알지 못한다고요? 형이 국물을 몇 입 연달아 맛을 봅니다.

 

"……. 개 맛있다."

"어제 먹은 거랑 또 다르지."

"그건 엄청 짰는데 여긴 딱 맛있어."

거 봐요. 맛있다고 하잖아요.

다행이다! 맛있게 드세요!

 

혼자가 아닌 그들을 방해하면 안 되겠습니다. 아주 반갑기 때문에 여기 있는 동안 아주 행복한 시간만 보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살짝 어질러진 조리대를 조용히 정리하며 테이블 손님의 주문을 받고 온 남동생을 주방으로 불렀습니다.

 

라멘?

. 돈코츠. 차슈 추가하셨어. 맥주 내갈게.

서빙 내가 할게. 네가 면 삶고 라멘 준비해 줘.

? 진짜?

그래. 1인분이니까. 육수 너무 오래 끓지 않게 주의하고.

알겠습니다.

 

저희의 대화를 들은 주연 상이 기뻐하며 말합니다.

 

요시다 상. 드디어 합격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 아주 예전부터 자신 있었는데 절대 팔지 못하게 하더니!

이제 차차 창업을 준비하시려나요.

……. 글쎄요. 처음엔 그랬는데 말이죠. 가족이 물려 준 가게에서 가족과 함께 일하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라서요.

맞아요. 보기에 좋습니다. 가게 분위기도 더 화목해졌습니다.

 

남동생을 북돋아 준 주연 상은 남동생에게 가장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는 메뉴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남동생은 자신이 종일 손질한 야채를 떠올립니다. 손님으로부터 추가 주문이 처음 들어오던 날, 감격의 눈물까지 흘리게 했던 그 소중한 야채들을요.

 

모둠 야채 튀김입니다. 술안주로 베스트입니다.

저희도 먹어 보고 싶습니다.

. 기대하세요.

 

잔이 비기 무섭게 맥주를 주문하고, 또 주문하던 한국의 두 청년은 얼굴에 벚꽃을 피우고 계절을 혼동합니다. 여기가 여름이야, 겨울이야. 아니면 봄이야, 밤이야. 현지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언어로 뭐가 그리 심각한지 인상도 써 보고요. 어깨를 두드리기도 하고요. 사진첩을 구경하기도 하고 누군가와 영상 통화도 하다가요. 남동생이 완성한 야채 튀김을 보고서는 바로 전화를 끊고 음식에 집중했죠.

 

"아스파라거스 먹어 본 적 있어?"

"아니. 기분 나쁘게 생겨서."

"이건 맛있다?"

"튀긴 건 다 맛있겠지."

 

튀겨도 아삭한 연근도, 속이 촉촉한 가지도, 단맛이 나는 당근도, 연필처럼 생겼지만 반죽을 입어 예뻐 보이는 아스파라거스도, 모두가 사랑하는 감자도, 부드러운 양파도, 다 같이 한 접시에 놓여 하나의 메뉴가 되었는걸요. 이렇게 한 식구처럼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우리 탓 쨩은 밤낮 없이 튀김기 앞에서 연습, 또 연습했습니다.

 

역시 요리 솜씨는 가풍이군요.

몰랐는데 그렇더군요.

동생이 자랑스러우시겠어요.

사실 언제나 그랬습니다. 우리 육 남매의 막내이니까 뭘 해도 굉장한걸요.

두 분 보기 좋아요. 진 쨩이 생각나네요. 약 오를까 봐 비밀로 하고 왔는데요.

아직 수험생이죠?

. 이번 방학도 기숙 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힘내라고 전해 주세요.

. 감사합니다.

"뭐라셔."

"재진이한테 공부 화이팅하라고 전해 달래."

"이재진? 어떻게 알고?"

"내가 전에 와서 재진이 썰 풀었었어."

"자전거?"

"."

"너 여기 진짜 단골인가 보다."

"올 때마다 들렀다니까?"

"그래도. 이렇게 잘 기억하기 쉽지 않아."

"사장님이 좋은 분이라서 그래."

"골목식당 사장들이 여기 와 봐야 되는데. 손님 응대의 정석 아니냐고."

"그러게."

 

뭐가 그렇게 또 재밌는 걸까요. 저는 뜻도 모르고 따라 웃게 되잖아요. 접시가 거의 비고, 이제는 더 못 먹겠다며 그들이 일어설 때까지. 해 주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는데 틈이 없어 끼어들 수가 없었잖아요.

 

이건 요시다 남매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 선물?

 

주연 상은 묵직한 쇼핑백을 내밀었어요.

 

한국에서 가져오느라 캐리어가 꽉 찼었어요. 내용물이 뭐냐면, 한정판 막걸리입니다. 아직은 지역에서만 판매되고 있는 작은 공장이니까요. 적어도 오사카에서는 한정판입니다. 밤과 옥수수가 들어간 단 막걸리예요.

주연 상! 정말 고마워요!

많이 들었고, 캔으로 되어 있으니 맥주 대신 드세요.

정말 고마워요!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항상 감사했어요. 오사카는 항상 이 가게 때문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눈물 날 것 같아!

 

저는 주연 상의 서프라이즈에 정말 눈물이 났어요. 앞치마로 얼굴을 훔치고 있으니 주연 상이 아들처럼 저를 안아 토닥여 줍니다.

 

영양제도 같이 넣었으니까 챙겨 드시고요. 항상 건강하세요.

. 지치지 않을게요.

. 지치지 마시고 건강하세요.

 

주연 상과 형이 가게를 벗어나고 나서야 꼭 해 주고 싶던 말이 생각났어요. 다행히 아직 골목을 벗어나지 않아서 제 목소리가 들리도록 크게 소리쳤습니다.

 

주연 군!

 

형이 주연 상의 어깨를 치며 저를 가리킵니다.

 

주연 군은 이미 충분히 사랑받고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지치지 말아요!

 

주연 상이 팔을 뻗어 크게 손을 휘젓습니다. 미코 상! 안녕! 저도 손을 크게 흔들었어요. 주연 군! 안녕!

 

제 친구는 형과 어깨동무한 채 올 때보다 가벼운 양손을 하고서 멀어집니다. 작아졌습니다. 지구가 둥그니까 사라진 게 아니에요. 석양처럼 저물었죠. 언젠가 뜰 태양처럼 별 하나를 붙잡고 오사카의 주택가 그림자 사이로 들어갔습니다. 개운한 밤공기가 맛있습니다. 크게 들이마시고 아직 영업이 한창인 <당신이 좋아하는 라멘> 간판을 올려다보았습니다. ! 또 거미줄이! 내일도 남동생을 시켜 청소해야겠네요.

 

이거 봐. 편지도 있어.

 

벌써 선물상자를 풀어헤친 남동생이 멋진 디자인의 캔을 카운터에 진열하고 있습니다. 아주 글로벌한 라멘 가게가 되었습니다.

 

편지?

. 읽어 봐.

 

저는 주방 구석에 앉아 단정한 편지 봉투를 뜯었어요. 친애하는 미코 상에게. 이럴 수가. 일본어 교사는 일본어를 일본 사람보다 정갈하게 쓰나 봐요. 저도 모르는 한자가 나오면 어떡하죠? 조마조마합니다만 다음 줄에서 웃음이 터집니다.

 

 

당신은 라멘의 신입니다.

 

 

*

 

 

일본 여행을 앞둔 학교 선생님들께 오사카에 가면 미코 상의 라멘 가게에 가야 한다고 이야기해 두었습니다. 혹시나 머리가 많이 벗겨진 한국 아저씨들이 가게에 온다면, 교자를 꼭 파세요. 저는 모든 메뉴가 다 맛있다고 할 수밖에 없어서 만두를 좋아하는 아저씨들에게 교자를 추천해준다는 걸 잊어버렸습니다.

 

현 쨩은 여전히 저의 가장 친한 이웃입니다. 이젠 슬프거나 아쉽지 않아요. 저는 현 짱을 괴롭히지 않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요. 자신이 저에게 의지하는 게 싫어서 저를 좋아할 수 없다던 현 쨩은 그 누구보다도 열렬히 저를 아끼며 좋아하고 있습니다. 몇 달 전 체육관이 완공됐고 우리는 스케이트보드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동호회가 생겨서 신입회원을 모집하더라고요. 보드는 회장의 소장품을 대여해서 쓰고 있지만 우리는 꽤 열정적인 회원이라서요. 오사카에서 눈여겨 본 보드 샵이 있기에 함께 구경하고 쇼핑하기로 했습니다. 현 쨩은 저와 여행 오는 걸 주저했지만 저를 좋아하니까요. 남동생으로서 좋아하는 거라도 그건 그거 나름대로 재밌는걸요. 사실 유니버셜 스튜디오에 가기로 했는데요. 저도 처음입니다. 아껴두고 있었어요. 제일 즐겁게 놀 수 있는 일행과 가려고요. 재미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한동안 오사카에 갈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요.

 

, 그렇습니다. 이번 여행을 끝으로 오사카는 잠시 브레이크 타임입니다. 올해는 담임을 맡아서 더 정신 없었는데요. 짧은 방학마다 혼자 훌쩍 떠나는 걸 좋아했지만 이젠 휴가를 같이 보내고 싶은 사람이 생겼으니까요. 잘 모르고, 어색한 장소에 가서 첫 추억을 많이 남겨 보고 싶습니다. 일본에도 안 가 본 곳이 정말 많아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는 삿포로도 궁금하고, 요코하마 차이나타운도 궁금합니다. 방학 전체의 긴 일정으로 더 먼 곳을 여행하고 싶기도 하고요. 아니면 내내 현 쨩 집에 머물며 힘껏 게을러지고 싶습니다. 진 쨩이 대학에 가고 나면 현 쨩은 적적해질 테니까요. 그때가 되면 저에게 의지하고 싶어질 거란 말이죠.

 

언젠가 제가 다시 오사카에 놀러 오는 날이 되면, 또 들를게요. 그때도 라멘집이 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편지는 작별 인사가 아닌데, 정말 그렇게 쓰인다면 저는 미코 상보다 늦게 슬퍼지게 되니까요. 저는 항상 그날을 기대하며 살 거예요. 미코 상. 정말 실례지만, 저를 기다려 주세요. 주방에 적힌 축원을 보았습니다. 저는 늘 주방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으니까요. 힘든 일은 요시다 상에게 다 맡겨 버리고 쉬운 일만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지치지 마세요. 미코 상의 라멘을 모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고 싶을 거예요. 4년간의 휴가를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 또 만나요.

 

당신의 라멘만 좋아하는 주연.

 

 

*

 

 

긴 대나무나 잠자리채로 간판 위를 청소하던 남동생은 어디서 좋은 팁을 얻어 와서는, 사다리가 어디 있냐고 물었습니다. 직접 손으로 치울 작정인가 싶어서 말렸는데요. 아주 당당한 얼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스터리 상자를 열었습니다. 범상치 않은 크기의 토치가 나왔어요.

 

?! 불로 지지려고?

이것만큼 확실한 게 없다고 했어. 완벽하게 해내 볼게.

그렇지만 위험한걸! 사다리가 튼튼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게!

밑에서 흔들리지 않게 꽉 잡아 줘. 그리고 설마 떨어져도 낮아서 죽지는 않을 거야.

네가 다치면 일은 누가 해!

 

저는 어느새 사다리 꼭대기 위로 올라간 탓 쨩에게 소리쳤습니다. 무서운 줄 모르고 토치 가스 밸브를 열려는 모습이 정말 소름 돋았어요. 차마 제대로 볼 수 없어 사다리 밑동을 꼭 붙들고 고개를 숙였어요. 정수리 위에서 불이 발사되는 소리가 들립니다.

 

조심해!

금방 끝나!

 

어느새 집중한 탓 쨩은 불의 세기를 늘렸다가 줄였다가 하며 위험천만한 청소를 계속했어요. 금세 끝내겠다더니 예상외로 쉽지 않은 듯 꽤 긴 시간이 흘렀죠.

 

이제 그만 내려와. 나머지는 빗자루로 대충 훑어내면 된다고.

고개 들어서 봐 봐. 그냥 대충 쓸어 없앨 때보다 훨씬 깨끗해졌지?

 

그럼 뭐 해요. 아래까지 탄내가 슬슬 풍기는 게 자칫하면 불이 날 뻔했다고요.

 

오늘이 마지막이야! 다음부터 토치는 절대 안 돼! 이렇게 큰 건 대체 어떻게 구한 거야? 살상 무기처럼 생겼다고!

길 건너 꼬칫집 시마 군이 알려 줬어. 그 가게는 항상 꼬치구이용 토치를 들고 올라가서 간판 청소를 한대.

시마 군도 제정신은 아니야! 고기 굽던 걸로 벌레를 구워?

어느 쪽이든 단백질인 건 똑같은 걸?

조용히 해!

 

꼬치집 주인인 시마 군의 엄마, 미츠다 상도 이를 알고 있을까요? 알고 나면 무척 혼날 텐데요. 성큼성큼 사다리를 밟고 내려온 남동생이 아주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곧 심각해집니다.

 

반갑진 않지만 아무래도. 벌레가 전부 사라진다면 곤란하겠지?

그렇지.

언젠가 인류의 미래 식량이 될 거니까.

? 그런 이유였던 거냐고.

 

실없는 말에 바람 빠지는 웃음이 났습니다. 밖에 오래 서 있으니 쌀쌀하군요. 긴장이 풀리니 주변의 풍경이 뒤늦게 눈에 들어옵니다. 낙엽이 지고 있어요. 하나도 춥지 않은 가을이었지만 이 또한 깊어지고 있네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무척이나 높고 청아합니다.

 

그때 그 한국인 손님 말이야. 술 선물을 해 주고 갔던.

. 주연 상?

맞아, 주연 상. 그런 손님이 더 많았으면 좋겠는데.

? 주연 상도 자주 왔지만 더 자주 오는 손님들도 있잖아.

술주정 말고 이야기를 해 주는 손님 말이야. 카운터석을 좋아하는 손님들은 주로 푸념을 하니까 귀가 아프다고.

그만큼 힘든 하루를 보내고 있어서 그런 거야. 푸념도 감사하다고 생각해야 해. 힘들 때마다 우리 라멘을 떠올려 주니 얼마나 영광이니.

별점 5점짜리 라멘 가게 사장은 역시 다르군. 대인배야.

경기가 많이 안 좋으니까. 여행객을 제외한 이 근처 손님이라면 항상 웃기만 할 수는 없어.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남동생은 저와 함께 일하고 난 뒤로 정기 휴일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쉰 적이 없어요. 본래라면 한 달에도 몇 번씩, 놀러 갈 때가 되었다면서 도쿄행 티켓을 구매했을 텐데요. 저에게 용돈을 받아서 말이죠!

 

더 추워지면 손님 많아져. 그 전에 너도 휴가를 가는 게 어때?

우리 가게에는 장기 휴무일이 없잖아.

나는 가게를 지켜야지. 너 혼자 다녀오라는 말이야.

아직은 쉴 때가 아닌걸. 나도 그 정도는 안다고.

대체 뭘 알고 있다는 걸까나.

실력이 많이 부족하잖아. 똑같은 레시피에 똑같은 시간을 들여서 만들어도 육수 맛이 누나 것과 항상 달라. 심지어 내가 만든 육수끼리도 맛이 서로 달라. 어제 것과 오늘 것을 비교하면 말이야.

나는 벌써 17년 째 같은 일만 하고 있으니까.

나는 아직 1년도 안 했어.

 

생각보다 너무 신입인걸요. 그러고 보니 저도 참 오래되었네요. 똑같은 일을 17년이나 꾸준히 해냈어요. 딸을 낳고 나서야 뒤늦게 배우기 시작한 라멘은 아이가 초교에 입학한 이후 완벽히 제 것이 되었습니다. 과로하신 아버지가 암으로 일찍 돌아가시게 되는 바람에요. 우여곡절이 많았죠. 초반에는 아버지가 기껏 일구어 놓은 라멘 맛과 가게 단골들을 전부 다 떠나보냈어요. 저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계속 찾아 와 주던 감사한 손님들도 점차 발길을 끊고 다른 맛집으로 갔죠. 그저 미안할 뿐입니다. 제가 조금 더 빨리 깨우쳤더라면 그들까지도 제 아버지를 그리워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요.

 

아버지 라멘 맛 기억해?

당연하지.

아무래도 많이 다른 편이지?

꽤 비슷한 면도 있지만 확실히 달라.

난 내 육수를 매일 맛보다 보니까 이제 아버지 라멘 맛이 기억이 안 나.

근데 나는 누나 거가 훨씬 맛있어. 아버지에겐 비밀이지만.

. 거짓말!

진짜야. 누나 거는 조금 더 퓨전이랄까. 일본인도 외국인도 다 좋아하는 맛이잖아.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어.

솔직히 플레이팅 솜씨와 정리 정돈은 누나가 앞서고 있다고. 퍼포먼스 면에서는 아버지를 따라갈 순 없겠지만. 아버지는 자꾸 라멘으로 공연을 하려고 해서 재밌었어. 그래도 난 누나 라멘이 좋아.

. 감동이야, 탓 쨩.

날 해고할까 봐 아부 떠는 건 아니야.

그런 거여도 상관없어. 정말 힘이 나 버렸으니까.

 

 

시원한 기지개를 켜면서 다시 가게로 돌아왔습니다. 탓 쨩과 제가 깨끗하게 정리한 홀이 한 시간 뒤면 손님으로 북적북적 해질 거예요. 감사합니다, 여러분. 저에게 주문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 아주 마음에 드는 팬을 구매한 김에 주방의 조리도구를 전부 교체했는데요. 손에 익은 도구가 아니라 조금 걱정했지만 역시 최신 기술로 만든 팬은 손목에 무리가 덜 간달까요. 지치지 않고 오래오래 장사하기 위한 투자였습니다. 손잡이 색이 알록달록 모두 다른 게 볼 때마다 기분전환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웃는 것이지 억지로 웃는 게 아니에요. 그런 시절은 다 지났고 여기가 제 일상이죠. 내년부터는 탓 쨩을 비롯한 가족을 위해서라도 휴가 기간을 만들어야겠어요. 이미 다 자라버린 딸이 저와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다고 칭얼거려서요. 다 컸지만, 제 앞에선 아직 아가 짓을 하는 딸이랍니다. 한적한 료칸이나 가서 쉬면 좋을 텐데 서울에 가자고 난리예요. 서울에도 닭 육수로 만든 맛있는 국수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구미가 동하는 편이니까, 넌지시 말을 꺼내 보도록 해 볼게요. 그리고 다음에 제 가장 먼 단골이 가게에 찾아오면, 저도 저의 한국 추억을 이야기하며 그를 즐겁게 해 줘야겠어요. 그러니까 또 오세요. 혹시 흰 머리가 몇 가닥 자랐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저도 위생모를 벗고 새하얀 머리를 보이며 환하게 반겨줄 테니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