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가을은 꽤 길게 느껴졌다. 저번 주 꺼내놓았던 롱패딩을 장롱 구석으로 다시 넣어뒀다. 헤집힌 털옷에서 먼지가 일었다. 의자 등받이 위로 빨아놓은 수건을 널었다. 가뜩이나 건조한 집안. 숨을 고르자 재채기가 났다.
티셔츠 위로 두꺼운 니트를 껴입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새 해가 짧아진 탓인지 새벽녘 기온이 뚝 떨어졌다. 몸이 절로 움츠려졌다. 어둑한 거리를 종종걸음 걸었다. 슬쩍 둘러본 갓길의 차창 가득 뿌옇다. 간밤에 누가 입김이라도 불어놓은 것처럼. 언젠가 주인 모를 차창에 손끝으로 새겨넣던 이름 떠올랐다. 제 이름도 아닌데.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주르륵 흘러내리던 물줄기.
한글 간판과 한식집이 넘쳐나는 도쿄 내 한인타운, 신주쿠 신오쿠보. 일본 한복판인데도 가끔은 사방에서 한국어만이 들리는 곳이다. 도쿄 어느 관광지가 안 그렇겠냐만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쉬운 객들과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고대하는 사람들은 억양이 다르다. 재현은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맨션에서 몇 블록만 더 가면 한밤의 고요함이 채 가시지 않은 거리는 사라진다. 밤새 붉을 밝힌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곳, 밤이 온 적 없는 것만 같은 시티의 초입이 보인다. 은은히 풍기는 밤공기의 잔해와 타바코 냄새. 멋으로 사는 사람들은 줄곧 밤이 아름답다고 말하곤 했다. 깨어 있기를 선택하여 밤에 사는 사람들의 위선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비로소 신주쿠의 새벽을 만들었다. 공기중엔 은은하게 휘발된 알코올 향이 흐른다. 재현은 술에 취한 사람들 틈으로 익숙하게 섞여 들어갔다.
오전 여섯 시에 불을 켜는 중고책방은 신주쿠 거리에서 제법 일찍 문을 여는 편이다. 까만 밤동안 어둠에 빨려들었던 책등이 이제 막 다시 제 색을 찾았다. 오하요고자이마스. 분주히 안내 팻말을 제자리에 비치하던 오픈 담당 직원이 인기척에 돌아보고는 습관처럼 인사했다. 재현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마 직원은 재현의 얼굴을 익힌 지 꽤 됐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마저 정리하는 직원을 지나 곧장 구석으로 향한 재현이 책장 앞에 멈춰 섰다. 망설이지 않고 얇은 책을 하나 집어 들었다. 코팅 하나 없는 얇아빠진 표지. 모서리가 닳고 긁힌 흔적이 두어 갈래 남은 손때 묻은 종이. 출판사 이름 하나 없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어로 쓰여진, 그 나라의 냄새가 묻은.
첫 장을 넘기니 번진 잉크 자욱 너머 눌러쓴 활자가 익숙한 모양이다. 손으로 그 위를 천천히 쓸어보았다. 차갑게 식은 종이를 훑는 손가락이 꼭 화상이라도 입을 것 같이 따끔거렸다.
주연에게.
손가락이 닿는 자리가 마치 축축하게 젖는 듯. 번진 잉크가 꼭 지금 막 물기에 흐려진 것 같다.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걸 보는 듯하다. 꼭 그때 그 나라 늦가을 새벽녘 차창처럼.
亂春 코하루
재효은-
익숙지 않은 발음을 혀에 담는 하이톤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진다. 아야네가 방금 수정화장을 마친 촉촉한 입술을 부러 도톰하게 오므렸다. 오물거리는 걸 가만 내려다보던 재현은 검지를 들어 그 입가에 가져갔다. 몇 번이나 덧칠한 립글로스가 손가락에 묻었다. 뜨끈하고, 축축하고, 끈적했다. 시원하고, 담백하고, 부드러운 걸 좋아하는 재현에겐 썩 유쾌하지 않은 감촉이었다. 내색하지 않고 손가락을 다시 제 입가로 가져갔다. 스물일곱의 관록이라 쳐도 원숙했다. 끈끈해진 손가락이 마른 입술에 쩍 달라붙었다.
“현. 재-현.”
“아- 좀 어렵네.”
어려워요? 그러면 마음대로 불러요. 아야네가 불러주는 거라면 다 좋아. 생긋 눈을 접어 웃는 재현의 이마에 녹은 화장이 허옇게 흘러내렸다. 신오쿠보 외곽 지하 공연장의 꿉꿉한 공기가 젖은 머리칼에 치덕치덕 달라붙어 있었다. 미남에게 푹 빠진 아야네의 안중엔 없는 것들이었다. 땀이 차 뜨끈한 손바닥으로 하얀 손가락을 꼭 붙잡으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꼭 이제 막 첫사랑을 시작한 소녀처럼. 어쩌면 그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만드는 것이 재현의 과업이었다.
“재횬쿤, 그러면 다음 공연은 언제야?”
“그건… 아야네 또 보러 와 줄 거예요?”
“당연하지! 횬쿤이 있다면 어디든!”
“기쁘네. 인스타그램 업로드 할 테니 기다려 줘요.”
“응응! 오늘 고마워.”
“내가 더요. 와 줘서 고맙습니다. 마지막은 무슨 포즈?”
“음, 하트 해 줘.”
그래요. 재현이 익숙하게 아야네의 옆에 자리잡았다. 이치 니 산. 맞닿은 손가락이 하트를 그렸다. 아야네의 목덜미에서 파우더리한 향수 냄새가 훅 끼쳤다. 순간 머리가 핑 돌았지만 눈을 한 번 부릅뜨고 말았다.
바이바이. 몇 번이나 손을 흔들었다. 다른 팬들과도 한참이나 사진을 찍은 뒤에야 무대 뒤로 이동했다. 투샷 체키 한 장에 천 엔이라고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든 돈값을 해야 단골을 유치하는 법이다. 내리 웃느라 뺨이 얼얼했다. 쏟아지는 러브러브 공세를 잔뜩 받았는데도 뒷공간으로 들어오면 힘이 죽 빠졌다. 꼭 방금의 일이 다 허상인 것 같았다.
허리를 옥죄는 코르셋을 벗어던졌다. 몇 번을 입어도 이 치렁치렁한 무대의상은 적응이 안 됐다. 모래주머니를 차고 있는 것 같았다. 가끔 무대 위에서 숨 막혀 쓰러지는 상상을 할 정도였다. 장기 터져 죽겠네. 혼자 중얼거렸지만 원망의 주체는 없었다. 이럴 걸 다 알면서도 ‘갤럭시프린스’ 라는 태곳적 네이밍을 자랑하는 팀에 합류한 것은 온전히 제 선택이었다.
처음 팀에 합류를 제안받은 건 여행차 오바나자와에 갔을 때였다. 고향인 요코하마에서 3년동안 보험회사를 다니며 번 돈을 모아 효도 여행 상품으로 기획한 것이었다. 삿포로만큼이나 눈이 많이 오는데다 온천으로 유명한 지역이라 겨울에 가는 게 묘미였다. 당연히 재현이 갔을 적도 눈 날리던 겨울이었다. 도쿄에서 네 시간 남짓 거리를 연착되는 열차 타고 여섯 시간이나 걸려 눈발 뚫고 갔다. 무슨 치기였는지 부모님까지 대동해서. 곱씹어보면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는 길 쌓인 여독을 풀고 뻗어버린 부모님을 두고 재현은 료칸을 나섰다. 아버지의 털모자를 푹 눌러쓰고 까만 코트를 입은 채로. 혼자 우동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일부러 찾아 걸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스웨이드 운동화의 앞코가 축축하게 젖었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들어간 식당엔 손님이 한 명 뿐이었다. 슬쩍 고개를 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정리하지 않은 거뭇한 수염에 장발. 눈 밑이 좀 퀭한, 애연가 타입. 트렌디함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일본에선 꾸준한 캐릭터라 스테디라고 할 법하다. 오다기리 조 스타일이네. 저도 모르게 그리 생각하곤 머쓱해 시선을 돌렸다.
가게는 마감 직전인 듯했다. 지금 식사 되나요? 묻자 주인아저씨가 나와 친절한 얼굴로 끄덕였다. 힐끗 돌아본 손님의 그릇이 거의 비어 있어서 괜히 눈치가 보였다. 그냥 나갈까 싶어 들어오던 발길을 멈췄다. 주인아저씨는 그런 재현을 눈치챘는지 손짓까지 하며 자리로 안내했다. 얼결에 바 테이블에 앉아 우동 한 그릇에 교자 하나를 시켰다. 홀로 남았던 남자가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는지 끼익- 하고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재현은 가게를 둘러보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종일 끓여 푹 우러난 가쓰오부시 육수의 냄새. 입맛이 확 돌았다.
그때 재현의 어깨에 투박한 손이 툭 올라왔다. 놀라 뒤도니 자리에서 일어난 오다기리 타입 남자가 다가와 곁에 서 있었다. 반질한 이마부터 턱끝까지, 재현의 얼굴을 훑는 눈매가 꽤 사나웠다.
일본인 맞죠?
그런데요?
혹시 무슨 일 해요?
에? 딱히…
연예계 쪽은 아니죠?
…왜요?
냅다 호구조사하더니 당황한 재현의 눈앞에 뭔 종이 쪼가리를 들이밀었다. 받아들고 보니 몇 번에 걸쳐 접힌, 꾸깃한 전단지였다. 은근히 종용하는 시선에 꾸역꾸역 펼쳐봤다. 상단 중앙 <갤럭시☆프린스>라고 쓰여진 화려한 폰트 아래 웬 왕자 코스튬을 입은 남자 넷의 사진이 있었다. 그 옆엔 커다랗게 인쇄된 큐알코드가 보였다.
전격 라이브! 2월 24일 신주쿠 신오쿠보 랭킹홀 지하 공연장.
천천히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이건… 재현이 의문 품은 얼굴로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는 사와무라 료. 그 팀의 매니저에요. 지하 아이돌 할 생각 있으면 연락 줘요. 왕자님 컨셉인데,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여기 인스타그램 디엠으로. 재현의 대답은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 그 말을 남겨두고 돌아섰다. 이거 캐스팅 맞나. 정말이지 막무가내였고… 와중에도 그걸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건 누군가에게 낭만을 잘못 배운 탓이라고 생각했다.
3년을 다닌 회사를 때려치고 아이돌을 하겠다고 도쿄에 상경할 만큼이나 지독한, 지긋지긋한 운명이라는 것.
그 얼어죽을 운명론 덕에 전단지를 돌리는 건 이제 재현의 몫이 됐다. 어제 저녁 내내 신주쿠 길거리를 떠돌던 것을 떠올렸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땐 바쁜 낯의 사람들을 붙들고 종이를 건네는 것보다 혀 깨무는 게 쉬웠다. 보부상들은 대체 어떻게 냅다 봇짐 들이미는 걸까. 그 깡다구가 실로 대단하다는 것을 체감했다. 회사에 다닐 때도 영업직이 아니었기에 모르는 사람에게 말 걸 일이 거의 없었다. 하필 사회성이 바닥을 치던 시기였다. 거절당하는 매 순간 무안함에 냅다 튀고 싶었다. 기껏 뻗은 손을 회수하는데 등신처럼 버벅거렸다.
그러다 몇십 분 뒤엔 머리를 비웠다. 빈공간을 뻘생각으로 채웠다. 예를 들면 떡볶이 만들기 시뮬레이션 같은. 그런 거나 떠올리면서 기계처럼 손만 움직였다. 그러다 선배인 키타 군에게 걸려 한 소리 들었다. 귀찮고 민망해도 열심히 홍보해야 해. 이런 모습까지도 사람들이 지하 아이돌에게 원하는 거니까.
참으로 웃기는 소리였다. 하지만 재현은 웃을 수 없었다. 제가 바로 그 지하돌이니까. 그렇군요. 마찬가지로 기계적인 대답과 함께 웃는 얼굴을 장착했다.
공연에 이어 체키회까지 마치고 축축하게 젖은 셔츠를 풀어내리는 재현의 뒤로 사와무라가 슬쩍 다가왔다. 숱 많은 눈썹을 치켜뜨며 재현의 팔을 쿡쿡 찔렀다. 오늘도 수고했어. 만족스런 웃음을 입가에 건 채였다.
“현. 라이브가 늘었네.”
“그냥 하는 거죠.”
“근데 재현- 이라는 이름 너무 어려워.”
요즘 한국 출신이 인기가 많다지만 그래도 재현은 사실 일본인인데 일본 이름을 쓸 생각 없어? 본명도 예쁘잖아. 사와무라가 그리 말하며 재현의 이름을 몇 번 더 불렀다. 아야네짱과 비슷한, 재효은-에 가까운 발음이었다.
“갤럭시프린스가 성공할까요?”
재현이 생뚱맞게 되물었다. 사와무라는 눈썹과 함께 어깨를 들썩였다. 지금도 나쁘지 않잖아? 오늘 카운트가 거의 백 명이었어. 만약에 재현의 사진이 인터넷에서 유명해지면… 하시모토 칸나처럼 스타가 될 수도 있고.
“오. 천년돌?”
“그 타이틀은 너무 늦었지.”
“왜요, 천년돌이면 천 살이어도 달 수 있는 타이틀 아니야?”
“무리.”
“에이. 진짜 가능성 없나?”
재현이 능청스러운 얼굴로 왼쪽 눈을 찡긋했다. 아이돌다운 윙크다. 아무튼 짬밥이라는 게 마냥 헛배불리는 것이 아니다. 사와무라는 고개를 설설 저으며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차키를 챙겼다. 며칠 전 새로 뽑은 토요타 캠리였다. 차도 사고, 살판 났다. 차 거래라 하면 중고로 내놓는 것밖에 못 봤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재현으로 살면서 차도 사고 집도 살 수 있을까. 우리 공연을 보러 와달라고 게릴라 콘서트 전단지를 돌리지 않고도 공연장 하나를 채울 수 있을까. 그런 상상을 하다 돌연 실소했다. 이제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그리도 증오했던 재현이란 이름에 대한 면죄부가 필요할 뿐이었다.
손에는 ‘ジェヒョン’ 이라고 쓰인 우치와가 들려 있었다.
한국에서 재현으로 살았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
때는 스물셋의 초봄. 한국에 온 지 만 4년을 채우는 해였다. 재일교포와 일본인의 혼혈로서 3할 정도 한국인이라 할 수 있는 재현은 안타깝게도 평생을 일본에서 살아왔다. 여기서 안타깝다고 함은, 한국에서 취업할 장래를 예견했더라면 미리 한국어 공부를 해뒀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어릴 적부터 듣고 말해왔던 덕에 회화는 가능했다. 발음도 제법 자연스러웠다. 다만 읽고 쓰는 것에 익숙해지기까지 4년이 걸렸다. 이제 겨우 좀 딜레이 없이 글자가 읽히나 싶었는데 떡하니 드라마 대본이 떨어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글로 된.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쾅-!
철제 의자가 콘크리트 바닥에 내던져지는 소리가 온 공간을 울렸다. 어둑한 굴 안에 먼지가 잔뜩 일었다. 끊어! 감독이 소리치며 손에 말아쥔 대본을 팽개쳤다. 소문엔 이혼 조정기간이라더니 아무래도 당한 쪽이지 싶다. 싸해진 분위기는 아이돌 출신 신인 배우가 전부 뒤집어썼다. 저 새끼 정신 차릴 때까지 촬영 접어. 뭉툭한 검지 끝이 우뚝한 인영을 가리킨다. 그 끝엔 길 잃은 꽃사슴마냥 촉촉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 있는 예쁜 남자 하나. 수십의 쏟아지는 눈알을 전부 받아내고 있다. 목덜미가 파랗게 질리도록.
수신료도 안 나올 웹드라마 하나에 이렇게까지 하다니. 명백한 화풀이었다. 현타도 좀 왔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재현이 누군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처음 소개하는 자리에서도 그냥 신인 배우라고 퉁 쳤으니 아마 찾아보지 않으면 아이돌인 것도 모를 터였다. 이거 찍어서 밥값이나 하려나. 이 수모를 감내할 가치가 있나. 재현은 현실적으로 머릴 굴렸다. 주연 배우의 스펙 하나, 망돌 출신. 둘, 연기경력 전무. 셋, 일본인. 나라도 투자금 회수할 판이다. 내용도 기승전결이 없었다. 이런 각본을 드라마로 제작한다니, 이해가 안 됐다. 차라리 30분짜리 독립영화로 찍는 게 나을 텐데. 이런 지지부진한 내용을 8부작이나 끈 작가가 대단했다. 청춘의 방황, 어지러운 봄, 난춘(亂春). 열여덟에 집에서 나와 거리를 전전하며 비행을 일삼는 소년 한별의 방황기를 전개 내내 보여준다. 결론은 청춘이니 아름답다, 뭐 그런. 전형적 가출 청소년 미화. 굳이 따지자면 주연 배우인 재현의 사연 있어 보이는 인상이 개연성이었다.
계속되는 감독의 꼬장에 멍한 얼굴의 재현이 꾸벅 고개 숙였다. 초연한 눈빛이 별 타격도 없어 보였다. 예전 같았으면 이제 막 자대배치 받은 이등병처럼 죄송합니다! 복창했을 걸. 이젠 그럴 기력도 의지도 없었다. 까라면 까자- 에서 까려면 까라지- 가 되기까지의 세월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저 꾸벅 목례하고 저를 향해 손 까딱이는 매니저 곁으로 미적미적 걸어갈 뿐이었다.
이재현, 너 임마 똑바로 안 해? 말로 해서 못 알아들을래?
…죄송함다.
뒤지기 싫으면 정신 차려라.
날아드는 욕지기에 재현은 뒷짐부터 졌다. 나름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손윗사람 앞에서 머리 숙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 망한 회사는 헐값에 깡패 출신들인지 모를 것들 하나씩 고용해서 정신교육대처럼 써먹곤 했다. 이제 막 스무 살 남짓의 젖살 붙은 남자애들한텐 이만한 천적이 없을 테니까. 정석에 가까운 열중쉬어에 군필 매니저는 내심 기꺼워했다. 아마 전역 전 말년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을 것이다. 대충 목소리만 높이면 알아서 조아리는 어린 남자애를 손 안에 두고 굴리는 재미를 못 놓는 무뢰배였다.
하지만 이럴 땐 무식하게 욕해주는 매니저에게 차라리 감사하다. 여기 모인 사람들 심정을 대변하는 신랄한 고성 덕분에 원망의 눈알들이 좀 누그러들었다. 정작 재현은 아무 감흥 없는 목소리로 매니저를 쳐다보며 말했다. 잠깐 바람 쐬고 올게요. 안된다 해도 나갈 생각이었으니 사실상 거의 통보였다.
어딜 가려고. 너 담배 피우냐?
아뇨.
딱 잘라 말했다. 뭔가 떠올랐는지 매니저의 눈매가 들썩인다. 그래? 그럼 난 나가서 한 대 할까. 그리 말하며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어째 따라붙을 기미였다. 따돌리고 싶은데.
저는 좀 걷고 싶어서요.
임마. 언제 다시 촬영 들어갈지 모르는데.
저 정신 차릴 때까지 촬영 접는다면서요.
재현의 말에 매니저의 미간에 선명한 주름이 졌다. 이것봐라 하는 얼굴이다. 바짝 예의차린 몸과 달리 뱉는 말이 은근 되바라졌다. 그렇게 욕먹고도 기가 안 죽는 게 보통내기가 아니다. 매니저는 다시 훈계 투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새꺄. 그걸 곧이곧대로 듣는 새끼가 어딨어. 니 군대에서 그러면 관심병사 된다.
저 군대 안 가는데요.
…그래 씨이팔. 니 잘났다.
눈은 냅다 내리깔고 한 마디 지지를 않는다. 어디 안 도망가요. 저기 물 앞에 앉아있다 올게요. 재현이 턱짓으로 둑 아래 도랑을 가리켰다. 다녀오고 나면 이 씬 한 시간 안에 끝낼게요. 영 못 미덥다는 얼굴의 매니저에게 쐐기를 박았다. 그리 말했는데도 의심의 눈이다. 진짜요. 잠깐만 앉아서 생각하다가 올게요. 정말로. 혼또. 몇 번이나 거듭하자 그제야 눈 부릅뜨며 으름장을 놓는다. 그럼 집합할 때 바로 튀어 와. 멀리 나가지 말고 전화하면 바로 받고.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무수한 시선을 무시하며 굴을 빠져나갔다. 한참이나 발길이 끊겨 무성히 자라난 풀숲을 헤치고 걸었다. 뒤를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주연 배우 스태프가 매니저 하나인지. 신세에 헛웃음이 났다.
웅성대는 촬영장 소음이 아득하게 멀어질 즈음 둑 아래로 옅게 흐르는 물줄기가 보였다. 망설임 없이 내려가 풀썩 주저앉았다. 대부분의 씬이 못 먹고, 못 자고,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난잡스러운 장면이라 옷이 더러워지는 걸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 편했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건너편 강둑에 무성한 나무 위로 간간이 새들이 날았다. 그걸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로 드러누웠다. 툭. 뒤통수가 땅에 떨어지며 짓눌린 풀내음이 훅 끼쳤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 가만히 누워 물 흐르는 소리나 듣고 있자니 그 사이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완연한 발자국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이윽고 멈췄을 때 천천히 눈을 떴다. 구름 몇 점 없는 하늘을 반쯤 가리고 저를 가만 내려다보는 낯선 얼굴이 왼쪽 시야에 가득이었다. 허리를 잔뜩 숙이고 손을 무릎에 짚은 채로.
…바로 촬영 들어간대요?
…….
다가온 남자는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고 재현을 빤히 쳐다봤다. 분명 스태프 같은데. 냅다 뻗어있는 게 민망해서 잠자코 일어나 앉았다. 바짝 다가왔던 얼굴이 그제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알았어요. 갈게요.
싸인해 줄래요?
에?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재현이 저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를 냈다. 예상치 못한 말에 시커매진 손으로 뒷덜미를 문질렀다. 당황할 때의 습관이었다. 명색이 연예인인데 싸인해 달라는 소리를 처음 들어봐서… 이런 상황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경험해본 선례가 없었다. 얼빠진 눈을 올려 바라보자 깊게 눌러쓴 캡모자 아래로 서글한 눈매가 방긋 접힌다. 크고 투박한 손으로 냅다 내미는 건 무언가 빼곡이 적힌 공책의 뒷면이었다.
팬이에요.
…….
코하루 씨.
얼마 만에 듣는 건지도 모를, 예쁘기 짝이 없는 이름을 나긋하게 불러주며.
한국에 처음 갔을 때는 열여덟. 한국 나이로는 그보다 더 많이 쳐줘서 친구들보다 빨리 성인이 됐다. 스무 살이 되는 1월 1일, 라인에는 성인이 되니 어떠냐는 메시지가 가득 쌓였지만 재현은 싱겁게도 해가 바뀌는 줄 모르고 볕 하나 안 드는 지하 연습실에서 먼지 잔뜩 마시며 어른이 됐다. 스무 살이 된 지 세 시간 만에 축축하게 젖은 손가락으로 액정 두드리며 답했다. 똑같지 뭐. 쟈지우유 푸딩 먹고싶다. 아 그리고 한국에서 쟈지우유라는 말 하면 안 된다. 웃음.
늦었으니 빨리 데뷔해야지. 첫 번째 회사 사장이 그리 말할 때 재현은 본인 몸만 한 가방을 짊어지고, 큰 눈 끔뻑이며 얼어붙어 있었다. 간만에 들은 한국어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정확히 알았다. 외출할 때마다 곱슬머리 손질하느라 한참이나 걸리는 재현을 두고 엄마는 항상 늦었으니 빨리 준비하라고 한국어로 말하곤 했으니까. 그럼 재현은 예열한 고데기 들고 뛰어다니며 안 늦어- 대꾸했다.
데뷔시켜준다는 말보다 늦었다는 말이 더 귀에 남았다. 내가 늦었나. 기가 좀 죽었다. 마음 같아선 평소처럼 안 늦었다고 대꾸라도 하고 싶었는데 혀가 굳어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차라리 그때 늦은 게 맞다고 호들갑 떨 걸 그랬나. 너무 늦어서 큰일 나게 생겼다고, 내년이면 연금 나올 판이라고 억지라도 부렸어야 했나. 데뷔가 몇 번이나 엎어지고 회사를 세 번째 옮기는 동안 2년이 지났다. 연습실 크기는 점점 작아졌고 숙소는 해 주는 게 다행인 정도였다.
사실 재현은 아이돌에 별 뜻 없었다. 하교하던 중 얼결에 캐스팅돼서 호기심에 한국까지 왔다. 엄마 고향에서 스타 되는 거 간지다. 뭐 그런 철없는 이상도 있었고. 무엇보다 언제 일본에 돌아가도 미성년이니까 겁나지 않았다. 한국에서 성인이 되어도 일본에 돌아가면 아직 고교생인걸. 마음속 보험을 항상 품고 있었다.
그 보험이 만기가 되고 나서야 데뷔를 해버렸다. 일본 나이로 스물이 되는 재현의 생일. 공교롭게도 9월 13일이 데뷔일이었다. 중소기획사에서 소소기획사로. 소소기획사에서 극소소기획사로. 회사 사무실은 열 몇 평짜리 구축 오피스텔 한 켠인데다 연습실은 그로부터 걸어서 삼십 분 거리인 지하 공용 연습실. 숙소는 열댓 번이나 뜯고 바른 벽지 안에 곰팡이 자욱 가득한 고지대 반지하 빌라. 그마저도 일본이 본가인 재현 때문에 겨우겨우 얻어준 터라 눈칫밥 은은하게 먹었다. 같이 데뷔한 멤버들은 당장이라도 짐 싸서 나가 본가로 들어가고 싶어했다.
그래도 재현은 즐거웠다. 아이돌이란 거 생각보다 욕심나는 일이라는 걸, 데뷔까지 하고 나서야 알았다. 어떻게 보면 재앙의 시작인 셈이다. 분명 아무 생각 없었는데 어느새 간절해져 버렸다. 아이돌로 성공하고 싶고, 멋있는 아이돌이 되고 싶어졌다. 모두의 시선을 끄는 스타가 되고팠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 정말로 반지하 창문을 열면 마주치는 것이 하수구 구멍인. 그런 곳에서 재현은 아이돌로 살았다. 음악방송은 앨범 하나당 한 개 방송사 오프닝에나 서면 다행인 아이돌로. 배곯지 않으려면 텅텅 비는 스케줄에 알바라도 뛰어야 했다.
이재현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한국인인 엄마가 지어 준, 한 번도 쓴 적 없는 한국 이름을 알바를 구하며 쓰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줄곧 불리었던 이름은 코하루. 본명이었고 예명이기도 했다. 남자 이름 치고 예뻐서 어릴 땐 콤플렉스였고, 예쁘게 크고 나선 잘어울린다 소리 깨나 들었다. 예명으로 그 이름을 쓴 게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기름 끓는 소리와 텁텁한 고추장 냄새 가득한 분식집에서는 그리 불릴 자신 없었으니까. 당연히 다른 이름을 생각했고 이재현이 딱 적당했다. 우리 엄마는 어떻게 성도 이 씨일까. 한국에서 세 걸음 건너 한 번씩 만나는 이 씨. 덤으로 아무도 되물을 일 없는, 한 번에 알아듣기 쉬운 무난하기 짝이 없는 이름. 재현.
카시와기 코하루와 이재현은 다른 사람이야. 카시와기 코하루는 아이돌로 성공할 거야. 스타가 될 거야. 그건 어린 나이의 꿈 같은 거였다. 장래희망과 꿈은 엄연히 달랐다. 재현에게 미라이가 아닌 유메 그 자체였다.
잠깐 별나라를 여행하다 눈뜨면 본가의 다다미방만 한 연습실로 출근하는 나날이었다.
중간에 접을 줄 알았던 드라마는 놀랍게도 마지막 촬영까지 마쳤다. 초 단편이라 대본이 끝까지 나와 있던 게 역할이 컸다. 투자금 모으는 덴 영 쓸모가 없는 재현은 PPL이라도 열심히 했다. 쾌변 기원 유산균 음료에 작위적인 줌인이 들어올 때마다 로고를 정면으로 돌렸다. 어떻게 광고가 들어왔나 싶었다.
비록 다 망한 드라마지만, 재현은 잘하고 싶었다. 재현의 인생 첫 작품이었다. 종일 대본을 끼고 살았다. 그러면서 주인공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가출청소년 조롱인가 싶었던 내용이 와닿았다. 이것도 스톡홀름 증후군의 일종일까 싶었다. 주인공이 저와 동일시되어 보였다. 집을 나와 낯선 거리를 전전하면서 하는 하루하루 모든 행위가 살아가기 위해서 하는 발악이라는 것. 돌아보면 제 모습이었다. 다만 그게 아름답다고 말하는 건 끝까지 이해되지 않았다. 솔직히 좀 추하고, 불쌍했다. 주인공을 이해하는 것과 감상은 별개였다.
떡볶이집 알바를 네 시간 하고, 진상을 세 명이나 만나고, 배달 주문이 두 건이나 잘못 가서 진땀을 뺀 뒤 카메라 앞에서도 내내 듣던 이름은 재현 씨. 재현에게 이재현이란 가난하고, 치열한 삶에 진이 빠져 기운이 없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고, 의지도 없이 꿈을 박탈당한 어린 청년이었다. 그래서 재현은, 드라마 난춘 속 세계에 이재현을 묻어두기로 했다. 너덜거리는 대본집을 품에 끼고, 새 대본집을 베개 아래에 넣어두면서 생각했다.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반지하 방구석 베개 아래가 전시장의 전부여도 오히려 좋다. 거기 이재현을 매장하겠다. 나중에 성공해서 돌아봤을 때, 그 꼴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술이랍시고 생활고를 길티플레져 삼는 위선 덩어리처럼.
문득 코하루- 하는 목소리가 들리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촬영장에서 재현을 그리 부르는 건 한 명뿐이었다. 일개 스태프 주제에 겁도 없이 성큼 다가와 말 붙이곤 하는 이주연. 선심쓰듯 초콜릿 하나 내밀며 하루, 울고 싶은 만큼 울어요. 하고 코칭까지 해 줬다. 잔잔한 목소리가 낯간지럽고, 좀 유난스러운 말투가 웃겼다. 정작 드라마 찍는 건 저인데 지가 대본을 읽는 것 같았다. 재현은 팔뚝을 몇 번 쓸다가 몸을 접어 끅끅 웃었다. 마주 웃는 주연을 대충 밀어 내보낸 뒤 기계처럼 외운 대사를 읊었다.
컷 싸인이 떨어진 후 재현의 얼굴은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나 언제 울었지… 멍청한 생각이나 하며 흙 묻은 소매로 얼굴 벅벅 문지르던 코하루, 신인배우 이재현. 퉁퉁 분 얼굴 정리해 줄 스타일리스트 하나 없는 연예인. 그런 재현의 얼굴을 닦아줄 갑티슈를 통째로 들고 다니던 맹한 얼굴의 이주연. 그 큰 손으로 휴지 끄트머리를 조심스럽게 잡고 눈가를 톡톡 두드리는 게 우스웠다. 다 벌게진 눈으로 와하하 웃었다.
마지막 촬영이 끝나고, 재현은 주연의 번호를 물었다. 그러자 주연은 진지한 얼굴로 연예인 번호를 알아도 되냐 했다. 그 말에 배 잡고 굴렀다. 주연, 여기서 나 연예인으로 보는 거 주연밖에 없어.
그 후에 주연이 일본 나이로 저랑 동갑, 한국 나이로 한 살 어리다는 걸 알았다. 대만 국적의, 재현과 같은 하프 코리안이었다. 한국인 아버지와 대만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영향으로 케이 드라마와 영화 조기교육을 수료한 덕에 자연스럽게 연출을 전공하며 한국으로 교환학생을 왔다 했다. 웹드라마 촬영 현장도 전공 때문에 현장 스태프 알바 뛰러 온 것이었다. 어쩐지 말투가 느끼하니 부자연스럽더니. 외국인이라 그랬다는 걸 알고 이해했다. 저도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멤버 전부가 웃음 터뜨리던 시절이 있었다.
막상 촬영 끝난 지 한참이 된 웹드라마는 소식이 없었다. 재현은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그거 하나 방영된다고 인생이 달라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잃은 것만 없으면 됐다. 푼돈이나마 계약서대로 출연료가 들어오면 이득이다. 정작 곤란해진 건 학부생 주연이었다. 뭐든 과제로 써먹으려면 실체가 있어야 하는데 방학 내내 노가다급으로 굴러먹었던 현장이 증발됐다니. 남은 건 현장 스태프 목걸이 정도였다. 이게 말이 되나. 노래하는 고라파덕처럼 양 측두엽에 손을 얹고 망연자실한 이주연. 미안하지만 재현은 그 꼴이 너무 웃겼다. 멀끔한 허우대가 바보처럼 척추를 말고 있는 모양이.
웃겨요? 헛숨 들이쉬는 소리를 들었는지 매섭게 돌아본 주연이 물었다. 숨죽일 생각도 없었거니와 주연에게 들키니 더 대놓고 웃을 수 있게 됐다. 원룸촌 빌라 맨 꼭대기인 주연의 5층 자취방에서 재현은 마치 저네 집 안방인 것처럼 담요를 꺼내 두른 채 뒹굴었다.
대학생 이주연은 학교를 열심히 다니는 편이었다. 매번 재현을 등지고 과제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한껏 펼친 공책엔 별 모양이 세 개나 들어간 무명 아이돌의 화려한 싸인이 있다. 강의를 듣다 멈춰 파파고를 켜고, 다시 강의를 재생하며 번역기를 돌리면 재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이 기계에서 술술 나온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거의 들을 일 없던 타국의 낯선 언어였다.
언제 끝나?
아직 멀었어.
심심해.
집에 안 가?
반쯤 돌아본 주연이 무심하게 물었다. 와, 서운하다. 주연, 내가 가면 좋아? 괜히 장난 걸며 발끝으로 등판을 쿡쿡 찌르면 의자가 빙글 돌아간다. 몸을 완전히 돌린 주연이 이불을 휙 들춰 재현의 얼굴에 던졌다.
아, 뭐 하는데!
하루, 나 지금 과제 해.
알아. 근데 오늘까지 아니잖아.
오늘 할 거야.
왜?
그냥.
주연은 묘한 고집이 있었다. 이게 맞다 생각하면 일단 우기고 보는 거나, 당장 해야겠다 마음먹으면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거나. 아무튼 등판만 내보인 채 과제에 열중인 것은 재현에겐 가차 없는 처사였다. 새벽까지 춤 연습하고 정오가 다 되어서야 일어나 보컬 연습을 한 시간 바짝 한 뒤 분식집 출근 전 짬 내 들른 입장으로선 더더욱.
그렇다면 관심을 끌어야겠지.
주연.
네.
나 타이완 가.
어… 어?
역시 반응한다. 타향살이하는 누구든 그리운 내 고향 간단 얘길 하면 눈이 번쩍 떠질걸. 꿈에라도 나와줬으면 하는 우리 집.
언제? 어디로요?
아마 가을.
그때 비 많이 오는데.
그게 또 분위기 있잖아.
비 오는 거 싫잖아.
괜찮아. 다 감성이지.
유일하게 통하는 언어인 한국어로 이어지는 대화의 토막이 짤막했다.
지금 봄이잖아요.
웅.
가을은 너무 멀다.
근데?
거짓말이지.
뭔 거짓말이야.
살짝 뜨끔했다.
비행기 예매했어요?
에? 아직이지.
거봐. 거짓말.
진짜거든. 아직 멀었는데 서두를 필요 없잖아.
아무튼.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볼게. 그러니까 지금 어디 가면 좋을 지 알려줘. 속 편히 씨익 웃어 보이자 주연이 한숨을 푹 내쉬곤 노트북을 닫았다. 알바 몇 시야? 반말로 물어오는 진 빠진 얼굴이 제법 귀여웠다.
학교에 챙겨가는 노트엔 코하루의 싸인. 가끔 집에는 아이돌 모드 오프한 이재현 군이. 어쩌다 보니 거의 매일을 코하루와 함께하고 있는 주연에게 너무 많은 것을 알려주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월드 클래스 아이돌에 대한 동경이라는 재앙을 품어버린 망돌 코하루는 하루 한 번 자기 전 약을 먹지 않으면 아무데도 나가지 못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사흘낮밤 뜬눈으로 지새우는 병이 있었다. 그나마 약을 먹으면 일곱 시간쯤 푸지게 자고 일어나 두어 시간 더 비몽사몽 한 뒤 밥을 챙겨 먹고, 연습하고, 나가 돌아다닐 정신이 들었다. 철저하게 비밀이었던 이러한 사안은 약 기운에 취해 새벽에 냅다 건 전화 때문에 주연에게 모조리 들키고 말았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없는데 통화 시간 삼십 분이 찍혀 있었다. 마침 저녁 약속을 잡은 터라 만나자마자 눈치 보며 물었다. 주연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나 전화로 무슨 말 했어…?
몰라요.
에?
표정만큼이나 싱거운 대답이었다.
계속 일본어로 말해서… 파파고 켰는데 너무 웅웅 말해서 인식도 안 됐어.
미안. 잠꼬대였나 봐.
약 먹어요?
나름 덤덤하게 말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거짓말 못 하는 건 타고난 천성이라 둘러대지도 못하고 입 다물었다. 덕분에 다 들켰다. 이래놓고 무슨 연기를 한다고. 생고생하며 찍었던 단편 웹드라마가 감감무소식인 이유가 있는 거다.
그래도 하나 알아들었다.
…어느 거?
푸딩? 푸딩 타베타이…….
아.
하. 그놈의 푸딩.
그래서 사 왔어요.
어?
푸딩. 어떤 거 좋아하는지 몰라서…….
어쩐지 가방이 묵직하더라니. 옆에 놓인 백팩에서 뭔가 한가득 든 봉투를 꺼내는 주연을 멍하니 바라봤다. 초코, 바닐라, 솔티드 캬라멜, 우유… 편의점에 보이는 건 전부 쓸어온 것 같았다. 약 먹는 걸 들키고 나발이고 그 광경에 웃음이 터졌다. 으하학- 늘어지게 웃으며 사진 잔뜩 찍어놓고 집에 가자마자 친구들에게 라인으로 사진 돌리며 자랑했다.
이게 바로 한국의 푸딩. 어떠냐.
약 올리는 이모티콘도 보냈다. 사실은 일본 푸딩이 더 맛있었는데, 그 말은 말았다. 대신 주연에게 그렇게 보내자 우는 이모티콘이 돌아왔다. 한 번 더 이불 위를 뒹굴며 웃었다.
*
현관문을 열자 유리 공예품의 맑은 소리가 집을 울렸다. 현관에 걸어둔 후우링이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소리였다. 갤럭시프린스 재현의 열성팬으로, 한 달 알바비를 전부 재현에게 지출하는 토모에 양이 선물해 준 것이다. 교토에 놀러갔다가 사 왔다며 내밀던 손끝이 발갰다. 투명한 유리에 비친 불투명한 마음을 읽었다. 그런 걸 다 알고도 전부 받아주는 게 아이돌의 덕목이었다. 고마워요, 창문 옆에 꼭 걸어놓을게요. 그리 말하고 인스타에 사진까지 찍어 업로드했다. 그 다음부터 토모에 양의 선물공세가 시작됐다. 부담스러웠지만 받아주는 게 그녀를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이니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처음엔 창가에 달아놓고 여름 내리 창문을 열고 지내다가, 날이 추워지고 현관으로 옮겨 달았다. 그러니 후우링이 차임벨이 됐다. 문이 열릴 때면 울렸다.
맑은 소리를 뒤로하고 집을 나섰다. 역시 중고책방으로 향하는 새벽이었다. 매번 같은 책을 들었다가, 다시 꽂아놓기를 반복하는 재현을 수상하게 바라보는 알바생의 시선을 느낀 지는 꽤 됐다. 바보같은 일이라는 걸 알지만, 혹시라도 그 자리에 없을까 불안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사 왔지. 미련한 짓을 하고 있었다.
오하요고자이마스. 일정한 톤의 인사말이 이젠 들리지 않아도 떠오를 지경이다. 오늘이야말로 정말 사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익숙하게 구석의 책장으로 향했다. 위에서 두 번째 칸, 오른쪽에서 여섯 번째. 달달 외운 위치에 손이 갔다. 그 자리 그대로 지키고 있던 책을 집는 순간 손목이 잡혔다. 회색 털장갑을 낀 큰 손이었다. 닭모가지같은 재현의 손목이 힘없이 딸려갔다. 애매하게 빼낸 책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게 무슨,”
재현이 곧바로 몸을 비틀어 손목을 빼냈다. 찰나인데도 얼얼했다. 책이 갖고 싶으면 말을 할 것이지, 무식하게. 냅다 욕할 깡은 없어 눈을 치떴다. 저만한 키의 남자가 엉거주춤 길잃은 손을 들고 있었다. 나니가몬다이데스카? 뭐가 문제냐 물으니 답이 없다. 어쩌라는 건지. 재현은 떨어진 책을 주워들었다. 다 낡은 표지가 반쯤 떨어져 너덜거렸다. 그 덕에 첫 장이 눈에 드러났다. 주연에게. 바로 읽히는 한국어였다.
과격하게 재현을 붙들었던 남자는 책을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좀 이상한 사람인가 싶었다. 눌러쓴 모자와 숙인 고개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수상한 건 확실했다. 까만 모자에 까만 코트, 근데 청바지는 자루처럼 넓어 바닥을 질질 끌었다. 천 아래로 삐죽 튀어나온 신발 앞코가 반질했다.
신발 앞코.
재현은, 남자가 다시 움직이기도 전에 몸이 굳었다. 하얀 운동화 위로 어린애 장난처럼 휘갈긴 펜 자욱이 바래지도 않았다. 손에 힘이 빠졌다. 겨우 집어든 책을 다시 놓칠 뻔했다.
냅다 땅 파서 매장했던 세월이었다. 아이돌 코하루의 싸인. 펜촉이 그리는 경로가 눈꺼풀 안 결막에 타투로 남아도. 그리하여 눈 감을 때마다 아른거려도. 그 위로 흙 퍼와 덮었으니 다신 꺼내지 못할 거라 장담했던 게 떡하니 눈앞에 있었다. 저 매끈한 신발 앞코가 포크레인이다. 삽질 한 번에 겨우 자라난 까만 머리칼이 허연 탈색모로 질리는 듯했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한 움큼씩 부서지던 단백질 무덤. 굳은 재현을 두고 눈앞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 살 거야.”
“…….”
“내 거잖아, 하루.”
천천히 고개를 든다. 익숙한 눈매를 홉뜨며. 그리하여, 비로소, 스물셋 금발의 코하루가 스물일곱 이재현이 된 지금. 서울이 아닌 도쿄에서.
하루, 라고 불리었다.
재현은 본래 중국어를 무서워했다. 어릴 적 억양이 강한 중국 관광객들에게 둘러싸인 경험이 있어서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예쁘장한 외모의 재현을 귀여워하려던 거겠지만, 낯선 언어의 낯선 어른들 무리. 대여섯 살 먹은 아이의 기억엔 트라우마로 남기 충분했다. 그런 중국어를 한없이 듣고 싶게 만든 목소리였다. 특히나 걸리는 발음 없이 날아가듯 하루라고 불러줄 때. 다신 들을 수가 없어서 꿈에라도 나왔으면 하던 그 음성이 걸음마다 코하루의 키라키라 싸인을 매달고 눈앞에 있었다.
오하요고자이마스. 알바생의 명랑한 목소리가 작은 책방을 다 울렸다. 목각인형처럼 멈춘 코하루를 놀리듯이.
“…뭐야?”
“오랜만이다.”
“여기 어떻게….”
“우연히.”
“뭐?”
“라고 하면 너무 거짓말 같지?”
사실 여행 왔어. 아침 산책 나와서 걷다가 잠깐 쉬고 있었는데 이 알림이 오더라. 뭐가 그리 평온한지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휴대폰을 들어 재현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함께 토스 켜고 총 5824원 모았어요. 콧김뿜는 못생긴 돼지 캐릭터 밑에 정직하게 적힌 이름 こ*る.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이거 미친 거 아냐. 기가 막혔다.
“이게 뜨길래. 설마 싶어서 둘러봤지. 그러니까 하루가 보이더라.”
“구라.”
“안 믿으면 말고.”
“젯타이우소다.”
“책이나 줘. 내 건데.”
재현의 손에서 결국 책을 빼앗아간다. 이거 여기다가 판 거야? 그래놓고 다시 사려고 왔어? 누가 보면 하루 건 줄 알겠어. 장난투에도 대꾸할 맘이 들지 않았다. 그저 노려봤다. 비로소 주인을 찾은 책과 부끄러울만큼 훤히 드러난 자필의 주연에게. 누구 글씨인지 정성스럽기도 하다. 좀 덮어줬으면 좋겠는데. 차마 티는 못 내고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저렇게 평온할 수 있지. 어째서 이주연은 줄곧 이주연일까. 수도 없이 코하루와 이재현을 번갈아 살아가는 동안 열등감에 그게 싫었다. 언젠가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을 적, 멀쩡히 잠든 주연을 흔들어 깨우며 그런 적 있다. 너도 바카 닉네임 하나 만들어. 뭐가 좋을까… 뇌를 굴려 최대한 멍청한 이름을 짜냈다. 이주밥팅 해. 밥팅. 연습실에서 둘째가 막내를 타박하던 말이었다. 그게 무슨뜻이냐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밀이야. 넌 밥팅이니까 그런가보다 해. 그런 재현의 억지에도 주연은 순하게 고개 끄덕였다. 알겠어… 워싀 리주밥팅. 만족스러울 대답 꺼내놓곤 눈 감은 채 재현의 베개를 정리하고, 이불을 끌어다 덮어줬다. 누가 밥팅인지 알 길이 없었다.
사 년 만에 다시 만난 주연의 인상이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막 자다 깬 얼굴에 모자 하나 눌러썼는데도 학부생 티를 벗은 뺨이 옴폭했다. 남들이 보면 그저 잘났다 할 얼굴이었지만. 재현에게는 그게 좀 다르게 보였다.
“…야.”
“어?”
“살이 왜이리 빠졌어.”
“티 나?”
“엄청.”
하루 때문에 맘고생 좀 했어. 농담이랍시고 그런 말을 하며 웃는다. 면역 없는 장난이다. 재현의 인상이 한층 더 구겨졌다. 말을 돌렸다.
“그거… 진짜 살 거야?”
“그럼. 얼마나 찾았는데.”
“…찾았어?”
“어. 집을 세 번 뒤집었어.”
하루가 가지고 갔을 줄은 몰랐네. 외국에 팔기까지 했어. 얼마 받았어? 살림살이 좀 나아졌어?
이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는지. 주연의 한국어 실력이 그새 완전히 늘었다. 한참 일본에 사느라 퇴화한 자신과는 정반대였다. 큰 보폭으로 성큼 카운터에 가더니 망설임 없이 책을 산다. 저는 이걸 팔아놓고 몇 달 동안 서성이기만 했는데. 주인이라 이거지. 일말의 고민도 없는 모습이 괜히 얄미웠다. 주연이 내민 책을 살피던 알바생이 흘끗 재현의 눈치를 봤다. 매번 이 책이 팔렸나 안 팔렸나 감시하던 스토커를 앞에 두고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기분이 묘하겠지. 그런 사정까지 떠들 리 없지만 괜히 뜨끔했다. 찔리는 기분에 주연에게서 등을 돌렸다. 계산을 마친 주연은 서점을 한 바퀴 빙 둘러보더니 멀찍이 선 재현을 향해 성큼 다가왔다. 눈치 보는 기색도 없이 말을 붙여왔다.
“오백 엔이다. 공짜로 받았는데, 올랐네.”
“여기 팔린 게 더 놀라웠어.”
“만 엔은 받아야 하는데. 슬프네. 특히 앞장에 자필로 이렇게…”
“야, 조용히 해.”
“알았어, 알았어.”
장난 칠 마음이 드나. 능글맞기 짝이 없다. 재현은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그걸 가만 바라보던 주연이 물었다. 좀 걸을래? 시간 돼?
그리하여 막 동트기 시작한 신주쿠 아침 거리를 나란히 걸었다. 잠이 덜 깨서 그런지 몽롱한 게 꿈꾸는 기분이었다. 옆에 주연까지 있어서 더 그랬다. 배고프지 않냐고 묻는 통에 일찍 문 여는 라멘집까지 갔다. 돈코츠라멘과 쇼유라멘 하나씩 시켜 재현은 밥까지 말아먹었다. 그런 재현을 보고 주연이 물컵을 밀어줬다. 잘 먹네. 별 의도 없는 말임을 알았지만 부끄러웠다. 두어 입 일부러 남겼다. 계산은 재현이 했다. 관광객에게 밥 얻어먹을 마음은 없었다. 재현이 가져오지만 않았어도 지출할 일 없었을 도서 구매 비용에 대한 사죄이기도 했다.
밥까지 야무지게 먹고 나오는 길에 물었다.
“진짜 뭐 하러 왔냐고.”
“여행 왔다니까. 도쿄에 여행 오는 게 이상해?”
“아니, 이 넓은 데에서 이렇게 만나는 게 말이 돼?”
“운명을 믿는 사람의 럭키야.”
“도쟁이처럼 말하는 것도 똑같네.”
도쟁이라니, 하루. 주연이 피식 웃었다. 나중에 말해줄게. 지금은 재회한 지 얼마 안 돼서 어색하니까. 뻔뻔한 낯으로 그리 말했다. 재현은 뭐라 대꾸하려다 말았다. 물고 늘어지면 말릴 게 뻔했다.
“그럼 혼자 왔어?”
“음… 아니.”
“애인?”
“그랬으면 좋겠어?”
“내 알 바 아니지.”
심드렁하게 대꾸하곤 골목 어귀에서 멈춰서 코트 안주머니를 뒤졌다. 장초를 하나 빼물었다. 주연은 멍한 얼굴로 재현을 바라봤다. 하루, 담배 피워? 묻는 말에는 대충 고개 끄덕였다. 탓- 라이터 부싯돌에서 불꽃이 튀었다.
“많이 변했네.”
“뭐가.”
“코트 입는 것도 그렇고, 담배도 그렇고.”
“넌 변한 거 없어?”
“없어 보여?”
“아니.”
근데 별로 안 궁금해. 주연의 신발 앞코를 슬쩍 내려다본 재현이 뿌연 연기를 뱉었다. 쌀쌀한 아침 공기에 주연의 입에서도 김이 났다. 하늘로 뿌옇게 부유하는 각자의 숨.
“그래서. 일행은 어디 있는데?”
“몰라. 자고 있겠지.”
얼버무리는 게 거짓말인 것 같았다.
“두고 혼자 나왔어?”
“어. 잠이 안 오던데.”
“왜 잠이 안 와.”
예민한 주제였다. 저도 모르게 몸이 기울었다. 덜컥 얼굴을 구긴 재현이 아차 싶은 마음에 입술을 물었다. 오바했다. 걱정이든, 궁금증이든 주연에게 관심을 내보이기 싫었는데.
사실은 주연이 저를 궁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본 와서 지하 공연장 전전하며 싸구려 헤어 메이크업을 받고, 여자들에게 빌붙는 월수입 십만 엔 지하 아이돌인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래.”
“…그래.”
“하루.”
“어.”
아직도 약 먹어?
주연이 물었다. 재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설설 저었다. 거짓말인지 진짜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주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이제 대충 헤어질까. 재현의 말에 주연이 고개를 돌려 재현을 바라봤다. 담뱃재를 털고, 휴대용 재떨이에 지져 끄더니 다시 주머니에 챙겼다. 바닥에 담배 버리지 않는 것도 새삼 일본인다웠다. 하늘을 가만 올려다보는 옆얼굴을 가만 바라봤다. 이윽고 시선을 느낀 재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연을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이제 막 동이 튼 이른 아침. 사람들이 기상할 시간. 늦가을 영상 오 도쯤의 찬 공기. 구름 없이 말간 하늘. 신주쿠의 골목. 해를 가린 그림자. 이재현의 속눈썹. 이주연의 입매.
아마도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재현은 곧바로 시선을 피했다. 쟈네, 주연. 일본어로 인사했다. 등 돌려 걸었다. 몇 걸음 떼지 않아 어깨가 붙들렸다. 살 내린 뺨이 바람에 발갛게 얼어 있었다. 우리 다시 볼 수 있어? 주연이 물었다. 그런 주연을 한참이나 가만히 바라보다가,
우리 서로 키스하고 싶지 않으면 그때 볼까.
그리 말하며 재현이 웃었다. 실로 허탈한 웃음이었다. 주연이 속으로 삼키던 긴장감을 쉬이도 뱉어냈다. 더는 낯부끄러울 것도, 수줍을 것도 없다는 듯이. 감정에 닳고 닳아 초연해진 재현은 예전과 다른 사람이었다.
주연의 손등을 천천히 감싼 재현이 제 어깨에서 부드럽게 밀어냈다. 힘없이 떨어지는 손을 한번 꾹 쥐었다 놓았다. 다 들킨 마당에 숨길 것도 없다는 듯, 연민의 눈빛을 한 번 보내고는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재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연은 백 번이 넘도록 반복했던 회고를 다시 시작했다. 문득 신발 앞코를 내려다봤다.
별이 세 개나 들어간 유치한 아이돌 싸인.
숨기는 데 소질이 없던, 스물셋의 카시와기 코하루.
*
주연은 어릴 적부터 한국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한국 연예계 소식 찾아보는 게 취미였다. 그러다 코하루를 알게 됐다. 데뷔 2년차까지 재현이 입에 달고 살았던 코하루의 그룹명, 메가스톰. 메가스톰의 멤버 코하루라니. 통일성이나 컨셉이라곤 전무했다. 망돌이 망한 이유에 게재되어야 할 예시였다. 그런 메가스톰이 처음이자 마지막 고정이던 방송이 있었다. 뭔 망한 신인 아이돌을 모아두고 아무도 모르는 저들 노래 시키는 시청률 0.0003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주연은 그 불후의 망프로 <플라이 턴>의 애청자였다.
거기 나온 스물하나 코하루는 어렸다. 얼굴은 똑같은데 그야말로 어린 남자애였다. 맏형이라고 앉아서는 카메라랑 낯가리고. 인터뷰할 때면 동생들 옷자락을 붙들고. 언변이 좋지 않아서 비하인드캠 원샷 기회도 날리고. 사람 없는 거치형 카메라 앞에서는 한참 까불거리고. 그러다가 무대에 오르면 눈을 부릅뜨고 악으로 노래했다. 그게 인상에 남았는데, 그러고 나선 감감 무소식이었다. 굳이 찾아보기까지 할 정도는 아니라 그렇게 희미해졌다. 언젠가 다시 보게 되면 반가워할 기억 정도로.
주연이 재현을 다시 만난 건 스물둘의 겨울방학.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의 늦겨울과 초봄 사이였다. 과제에 도움이 될 알바 자리를 수소문하다 같은 대만 출신 선배 인맥으로 투입된 현장이었다. 주연 배우가 낯이 익더라니, 그때 그 코하루였다. 이름이 바로 생각나지 않아 떠올리기까지 한참 걸렸다. 생기 넘치던 뺨과 명랑함은 어디 가고 다 풀린 눈으로 앉아있는데, 꼭 다른 사람 같았다.
촬영 현장을 벗어나는 등을 따라간 건 충동이었다. 주연은 코하루가 궁금했다. 플라이 턴의 코하루가 진짜인지, 동태 눈깔이 진짜인지. 아니면 그때 그 코하루가 이렇게 변한 건지. 풀 위에 누워있는 코하루를 봤다. 주연의 기척에 감은 두 눈이 천천히 뜨였다. 유달리 예쁘장한 눈이 그대로였다. 무식하게 탈색한 빳빳한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마른 가을 억새 같았다. 필기하느라 들고다니던 노트를 내밀었다. 싸인을 해 달라 했다. 그러니 눈이 크게 뜨였다. 빛이 들어온 두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비로소 그때 티비에서 봤던 코하루였다.
삶이 사람 마음처럼 흘러가는 게 아니라지만 유독 고약한 인생이 있다. 그래도 재현은 최악은 아니라 했다. 회사에 진 빚을 갚을 때까지 묶일 일은 없을 것 같았으니까. 아마 그냥 놔주겠지. 놓고 싶지 않은 일말의 희망과, 끝을 고대하는 탈력감이 공존하는 끝에. 어떤 결과든 고문이었다. 그래서 회사가 멤버들을 소집할 때엔, 둘 중 어떤 것이 기다리려나 싶은 불안감이 들었다. 어떤 걸 마주해도 괴로울 건 마찬가지였다.
또 한 번 활동한단 소리를 들었을 땐 사장님이 집을 팔았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저번이 마지막이라더니 또 노래가 나왔단다. 절망적이게도 기대가 안 됐다. 얼마나 더 마이너스가 되려나 하는 심정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기획사 매니저하던 인맥이 닿았는지 방송사 세 개 음악방송까지 잡았다. 그 중 하나는 무려 세 번째 순서였다. 오프닝이 아니라. 당연히 케이블 방송사였지만 그런 거 따지기엔 컴백 무대를 행사장에서 한 전적도 있는 터라 감지덕지였다.
대기실은 재현의 팀보다 두어 달 선배인 다른 아이돌과 쓰게 됐다. 저번 앨범이 차트인까지 했다고 했나. 어쩌다 틱톡 음악으로 바이럴을 타서 떡상했다고 했다. 그래봤자 그룹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남이 만든 안무 입힌 수록곡 하나가 인생 업적인 팀이지만… 재현의 팀보단 훨씬 나은 사정이었다. 그래서인지 잔뜩 상기된 얼굴들이었다.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부럽지도 않아서 대충 소파 옆 바닥에 드러누워 눈을 붙였다. 생방 끝내고 내려와 마지막 전 출연진 엔딩을 위해 대기 중인 때였다.
겨우 잠들려고 할 찰나였다. 고성에 눈을 뜬 재현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소리의 근원을 찾아 대기실을 둘러봤다. 복도까지 말소리가 다 울릴 대기실 입구 앞, 익숙한 의상을 걸친 재현의 팀 멤버 하나랑 상대 팀 멤버가 싸움이 붙은 듯했다. 잠에 취한 몸이 쉬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소파를 짚고 겨우 일어섰다.
오해라니까요?
이 씨발새꺄. 내가 본 게 있는데 뭔 오해야.
이딴 식으로 몰아세울 거면 뭐하러 물어봤는데요. 그리고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개새끼가. 내가 너보다 형이야.
처 망하고 나이까지 많은 게 뭐가 자랑인데 병신아.
뭐? 이 새끼가-
쾅- 철문에 머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들리는 순간 피가 싸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아 좆됐다. 일본 가야지. 속으론 분명 그런 체념을 했는데, 정신 차리니 엉겨 붙은 두 인영 앞이었다.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간 몸이 겨우 떨어진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고, 그보다 반응속도 느린 흥분한 주먹이 냅다 재현의 뺨을 갈겼다. 잔뜩 레이어링한 볼드한 반지의 장식이 얇게 덧칠한 화장과 여린 살을 긁는 감각이 생경했다.
하. 코노 쿠소야로. 반지도 안 빼고.
제게로 달려드는 스태프들의 놀란 목소리를 뒤로하고 벽을 짚었다. 덜 깬 몸이 휘청이며 눈앞이 핑글 돌았다. 아- 주연 보고싶어. 찰나에 그런 로맨틱해 빠진 생각이 들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음방은 짤렸다. 이미 송출된 생방을 제외하고는 엔딩이고 뭐고 당장 다음날 예정된 녹화까지 전부. 하필 상대 그룹이 인지도만 좀 떨어졌지 회사 자체는 규모가 있는 터라 메가스톰 정도 방송사에서 밀어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싸움의 당사자인 팀의 셋째 민진은 차 안에서 엉엉 울었다. 사장님이 중고로 구입한 카니발 한 대. 활동기에는 재현의 팀이 쓰고 평소에는 사장님 자차로 쓰는. 그 안에 장정 다섯이 몸을 구겨 넣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민진의 어깨가 흔들릴 때마다 차가 다 들썩였다.
코하루 혀엉- 죄송해요. 저 때문에…….
됐어. 피도 안 났어.
피만 안 나면 되나. 벌겋게 부은 입가에 선명한 생채기를 달고 재현은 몰골과 어울리지 않는 말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좀 따끔거리긴 했지만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애처럼 흐느끼는 셋째를 보니 오랜만에 좀 살아있는 것 같았다. 다 포기한 줄 알았더니 너도 아쉽긴 하구나. 그런 안도감이 들었다. 이 지긋지긋한 관심 구걸 각설이 딴따라짓을 저만 놓지 못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회사로 불려가선 당연히 혼났다. 싸움의 전말은 상대 그룹의 여자친구인 신인과 복도에서 마주친 셋째가 서로 피해 가려다 너덧 번을 같은 방향으로 몸을 틀었고, 그게 웃겨서 결국 웃음이 터진 뒤에 주머니에 있던 초콜릿 하나를 건네줬는데, 이걸 본 그 부정망상 환자가 냅다 내 여자친구랑 뭐 했냐며 시비를 걸었단 것이다. 민진의 구구절절한 상황설명을 듣고 나니 그놈이 미친놈이라는 결론이 났지만 어쨌든 피해를 떠안은 건 고스란히 재현네였으니 표면상 민진의 잘못이 되었다. 더군다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혼내는 소리는 한 귀로 들어가 반대 귀로 흘러나왔다. 영 집중이 되질 않았다. 그러는 와중 사장의 한 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네, 숙소에서 짐 빼.
…네?
처분할 거야. 집을 구하던가 알아서 해.
내리 뒷짐 진 채 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재현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다른 애들은 미동도 없었다. 횟가루 떨어지는, 구옥 가벽 세워 만든 고시촌보다 못한 집구석 나가란 소리 어쩌면 반가울지도 모른다. 놀라지도 않는다. 하루는 잠깐 남아. 그 목소리에 연민이 묻어났다. 자존심 상해 이가 뿌득 갈렸다. 둘만 남고 나서야 사장의 입이 떨어졌다. 쓸데없는 잔정은 또 있어서, 재현만 나쁘게 만들기 좋은 사람이었다.
사정은 알아.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게 있잖아.
알아요.
사실은 그 집 진작 나왔어야 할 집이야. 그거 유지할 돈도 없어 지금.
애들 달에 받는 용돈만 떼 모아도 그 집보다 너덧 평은 넓은 지상에 살 텐데. 재현은 다 부스러진 탈색모 끄트머리만 헤집었다. 다소 버릇없어 보였지만 별 소리 듣지 않았다. 알겠어요. 집은 알아서 구해볼게요. 맘에 들만한 말을 골랐다. 한참 침묵하던 사장은 나지막이 말했다. 많이 힘들면 안 구해도 돼. 돌아가고 싶으면 얘기해라.
그대로 문을 닫고 나와 때 이른 서릿발 내리는 길을 걸었다. 해답지 떡하니 놓여 있어도 끝까지 표지를 덮어두고 싶은 것. 백날이고 붙들고 앉아 문제가 안 풀린다 토로해도 지겹지 않은 것. 아직도 이런 미련이 자욱하다니. 지겨웠다. 머리가 축축하게 젖어들 때까지 길을 걸었다. 창백한 하늘로 발갛게 노을이 드리웠다. 문득 주머니를 헤집었다. 뜨끈한 핸드폰이 집혔다.
[형 얘기 끝나고 나오면 연락해여]
[하루형 우리집으로 들어갈래? 엄마한텐 말해놧어]
멤버들의 카톡 팝업이 배경화면을 다 가렸다. 대충 눈으로 훑고 하나씩 밀어 지웠다. 그제야 배경화면 한쪽이 보였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대충 손 휘젓는 자다 깬 얼굴 사진. 눈 밑에 애벌레 달고 있는 게 웃겨 억지로 들이밀었던 카메라. 그 뒤로 뽁뽁이 눌러 붙인 작은 창은 여름의 흔적이다. 태풍에 대비하라는 뉴스가 티비만 틀면 나왔던 지나간 한낮. 흐릿한 창 너머로 하늘이 무슨 색인지 가늠하며 낮을 지샜다.
재현은 그제야 해가 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주연. 투박하고도 다정한 글자가 화면에 커다랗게 떴다. 컬러링은 이문세의 소녀. 뜨끈한 액정과 손가락이 뺨에 닿았다. 순간 어깨를 들썩였다. 커다랗게 박힌 큐빅과 손가락을 감은 체인이 뺨을 스치던 감각이 전뇌를 움키는 듯했다. 그때 벼락맞은 것처럼 번쩍 떠올랐던 건, 잠에 불어 통통하게 오른 이 눈두덩이. 그걸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여보세요?
주연
응?
나 집에 가도 돼?
갑자기 뭘 물어.
새삼스럽단 투에 웃음기 섞여 있었다. 그 숨소리 듣자마자 몸에 힘이 확 풀렸다. 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제야 깨달았다. 이번에 가면… 안 나올 수도 있어. 들리지 않길 바라며 읊조렸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옆에 보이는 가로등을 붙들었다. 한 번에 짚지를 못해서 몇 번을 더듬었다. 바라본 손끝에 까만 먼지가 묻어났다. 그게 무슨 말이야? 평소엔 그렇게나 맥없는 혀끝으로 발음을 흘리면서. 주연이 핸드폰 너머 또렷한 발음으로 물어왔다. 국제 미아 되기 일보 직전의 날 찾아줄 현지 가이드처럼. 그러면 마음이 확 놓이고 만다. 까맣게 물든 손끝을 보고도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하얀 티셔츠에 아로새겨질 먼지 자욱이 처량하다. 그보다 더 불쌍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했다.
나 집이 없어. 갈 데가 없어 주연.
벗겨진 살 위에 검붉은 딱지가 앉았다. 흉지기 딱 좋았다. 주연은 은근 잔소리가 많은 타입이었다. 안 그렇게 생겨서 어디서 누구랑 싸웠냐 꼬치꼬치 캐물었다. 재현은 그게 좋았다. 그래서 범인을 말해주지 않고 애타는 주연의 얼굴을 구경했다. 다 관심 같았다.
얼굴의 흉터는 말끔히 나았지만 한국에서 더는 코하루로 살 수 없게 됐다.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 그럴 것이었다. 코하루를 잃어버린 재현은 의미가 없었다. 알바를 전부 그만두고 주연의 집에 틀어박혔다. 깨어 있는 동안 침대에 엎어져 내내 난춘의 대본집을 읽었다. 지겹지도 않은지 몇 번이나. 다 낡아 너덜거리던 표지가 결국 뜯어졌다. 테이프 줄까? 주연이 물으니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렇게 좋아? 다시 물었다. 그러니 한참 골몰하다 대답했다.
좋은 건 아니고. 자꾸 읽게 돼.
재밌나 보네.
재미없어.
딱 잘라 대답하더니 가방에 얼굴을 박고 뭘 끄집어냈다. 그것도 난춘의 대본집이었다. 다만 다 떨어져 너덜거리는 게 아니라 새 거였다. 이건 뭐야. 물으니 동문서답했다.
나중에 다 찢어지면 새 건 너 줄게.
나를 왜? 찢어지면 하루 걸 새 걸로 바꿔야지.
그땐 난 더 안 읽을 거야.
진짜?
응. 두 권째 갖고 다니고 싶진 않아. 다 잊어버릴 거야.
나는 이 내용 다 까먹을 거니까 니가 기억해야 돼. 책임감 지워 놓곤 개구지게 씨익 웃었다. 넝마가 된 대본집을 형광펜까지 그어가며 내리 읽어내려가던 코하루. 대사를 달달 외워가며 연기하던 코하루.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닳도록 붙들고 살던 걸 어떻게 다 까먹는단 거지. 말도 안 되는 말이다.
그건 곧, 잊고 싶다는 소리였다.
늦가을에 접어들며 해가 짧아졌다. 여섯 시가 넘어서야 청보랏빛 하늘이 밝아왔다. 낮밤이 바뀐 재현이 유일하게 외출하는 시간은 이제 막 동이 트기 시작하는 이른 새벽이었다. 도톰한 겉옷을 껴입고 현관문을 열면 주연이 산책 나가는 강아지처럼 따라붙었다. 잠기운 묻은 비몽사몽한 얼굴로 몸을 붙여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재현의 목덜미에 뜨끈한 얼굴을 묻었다. 축축한 숨결이 얇은 티셔츠 사이로 스몄다. 재현은 괜히 거울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침 삼킬 타이밍을 재는 것이 어려웠다.
원룸촌 골목을 내리 걸었다. 안 그래도 좁은 골목에 갓길마다 개구리 주차가 빼곡했다. 일교차가 커지며 밤을 지나는 동안 차가운 공기에 차창마다 김이 서려 뿌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슬방울에 가까웠다. 느릿하게 따라붙는 주연을 두고 재현은 걸음을 빨리했다. 교차로 코너에 애매하게 주차해놓은 차 앞에 멈춰 섰다. 우뚝 서서 고개를 빼고 주연을 돌아봤다. 반쯤 감은 눈으로 떼는 걸음걸이가 딱 이주연다웠다. 피곤하면 더 자라니까. 떠밀어도 극구 따라 나오고야 마는 고집이 보통이 아니다. 점점 가까워지는 퉁퉁 부은 얼굴을 바라보며 차 옆유리에 손을 댔다. 닿자마자 물줄기가 주륵 흘러내렸다. 그새 가까이 온 주연이 옆에 섰다.
뭐 해.
낙서.
남의 차잖아.
주차 이렇게 해 놨으니까 낙서 정도 당해도 돼.
그게 뭐야.
주연이 픽 웃었다. 부은 눈 밑이 젤리빈처럼 솟아올랐다.
어차피 해 뜨면 다 없어져.
그래서 무슨 낙서 할 건데.
범인 이름 쓰기.
흐흐. 장난기 가득한 웃음 흘리며 재현이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가느다란 손끝에 축축하게 물이 맺혔다.
이…
ㅈ…ㅜ
여…ㄴ
아이씨. 재현의 손끝을 따라 읽던 주연이 냅다 짜증냈다. 그 소리에 재현은 뒤로 넘어가며 웃었다. 그새 이주연이라는 글자에 물이 줄줄 흘러내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됐다. 완전범죄. 재현이 그리 말하며 몸을 돌려 주연을 바라봤다. 그게 뭔데? 묻는 말엔 일부러 답하지 않았다. 이재현한테 한국말 지면 안 되는데. 중얼거리는 소리에 웃음이 잔뜩 걸렸다. 양 뺨이 동그랗게 솟아올랐다. 가만 바라보던 주연이 재현의 후드 지퍼를 올렸다. 감기 걸려. 아직 한참 잠긴 목소리였다.
주연의 내리깐 눈두덩이를 바라보던 재현이 손을 들어 퉁퉁 부은 눈가를 쓸었다. 집에 가자. 화답하듯 말을 돌려줬다.
침 삼키는 타이밍을 자꾸만 잊어버렸다.
한 달이 다 되도록 매일같이 재현의 휴대폰엔 멤버들의 연락이 남았다. 그러나 한 번도 받지 않았다. 그저 부재중으로 띄워둘 뿐이었다. 고마워해야 하는 일임을 알았지만 연락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형 계속 연락 안 받으면 실종신고 할 거야. 민진이 엄포를 놓기에 그제야 답장했다. 하지마. 세 글자 돌려줬다. 그러니 매섭게 전화가 울렸다. 얘는 이렇게 내가 좋을까. 우울증에 불안장애에 약이나 먹는 외노자인데. 징징대는 핸드폰을 엎어두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받아봐.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처박았던 고개를 들었다. 줄곧 책만 들여다보고 있던 시험기간 대학생 이주연 씨가 몸을 틀어 재현을 쳐다봤다. 말마따나 어디 한참 아픈 사람처럼 방구석에 박혀 청승떠는 꼴이 어지간히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예민한 시기라 더 그랬다. 재현은 그런 주연에게 죄스러우면서도, 가소로웠다. 주연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직 돈을 벌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꿈의 발치를 겨우 건드리고 추락한 심정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재현은 그 말을 주의 깊게 들을 생각이 없었다.
싫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사장한테 연락 올 때까지.
연락은 온대?
몰라.
하. 한숨이 깊다. 그 소리에 재현은 괜히 서러워졌다. 이불을 뒤집어쓰자 이번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약을 안 먹어서 그런가. 감정 조절이 힘들었다.
그냥 나 무시하면 안 돼?
어떻게 무시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신경 쓰지 마.
눈에 보이는데 그게 가능해?
눈에 보이는 게 문제야?
방금 뒤집어쓴 이불을 홱 걷었다. 주연이 잔뜩 상한 얼굴을 구겼다. 며칠 밤샌 티가 났다. 찰나에 기가 죽었으나 자존심이 이겼다. 지기 싫어 바락댔다.
내가 병신같지?
그런 말 쓰지 마.
말해 봐. 나 패고 싶은 거 아냐?
자꾸 짜증 나게 하지 말고.
눈을 감은 주연이 버석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화를 참는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피로감에 찌든 모습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마주하는 순간… 재현은 좀 겁이 났다.
알겠어, 그럼.
뭐 해.
나갈게.
백 번 직면하다 한 번 고꾸라질 때 기회를 틈타 비집고 나오는 회피형 자아의 존재감이 유약해진 재현을 압도했다. 도망가고 싶어 선수를 쳤다.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꼭 미취학 조카를 돌보는 기분이겠지.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사람에게는 어리광 총량이라는 게 있는 걸까. 사실 난 너무 어릴 때 집을 나서는 바람에 어리광 총량을 다 채우지 못하고 데뷔해서… 하필 팀의 맏형이라 매번 참아만 오다가 이주연에게 해소하는 걸지 모른다고, 재현은 생각했다. 그렇게 반성하면서도 침대에서 내려오는 발길이 심술궂었다. 집 구석구석 널린 제 흔적을 쓸어 담는 손길에 짜증이 서려 있었다. 주연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 일련의 행위를 주시했다.
뭐 하는데.
짜증 난다며. 나간다고.
하루.
이제 하루 아니야. 재현이라고 해.
이재현.
말은 쓸데없이 잘 듣는다. 언제부턴지 존대도 때려치고. 둘의 언쟁이 이미 유치한 말장난으로 변질된 건 서로 깨닫지 못했다. 지가 요구해놓고 막상 이재현이라 불리니 빈정이 확 상한 재현은 지퍼를 채 잠그지도 않은 가방을 둘러맸다. 내가 여기 이러고 있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으면 나갈게. 솔직히 이거 민폐인 거 알아. 빨리 집 구해볼게. 미안하다. 미안한 건지 비꼬는 건지. 끝까지 물러서질 않는다. 쾅. 현관문이 닫히고 나서야 머리가 아팠다. 빌라 복도가 조용하다. 이주연은 따라 나올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당연히, 제 자취방에 뻔뻔하게 눌러앉은 히키코모리 식충이를 뭐가 좋다고 붙잡기나 하겠어. 제가 미친놈이고 이주연이 보살인 거 다 아는데.
사랑이라는 건 원래 시시비비를 따지고 드는 것으로 설명되지 않는 거였다. 합리성이 통하지 않는 무지막지한 감정. 내가 쓰레기일지언정 이해해줘- 따위의 정신 나간 요구를 하고 싶어지는.
이주연을 좋아하게 됐다. 어쩌면 깨달은 지 한참이 됐다.
대충 방값이 제일 싼 모텔에 짐을 풀었다. 서울이 서울인 만큼 싸다고 해봤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다른 데 지출을 줄이다 밥값을 아끼게 되는 금액이었다. 주말보다 평일이 더 긴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한국에서 방을 구하는 것, 당연히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룹은 이제 해체 수순을 밟을 것이고, 다시 시작하기에 재현은 너무 지쳤다. 무엇보다 마음이 많이 상했다. 만에 하나 해체하지 않는다 해도 이대로 세월이 흐르는 것 말고 나아지는 게 있을까. 당연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옳았다. 집이 있고, 가족이 있는 곳으로. 그러나 왜 선뜻 내키지 않는 것인지.
핸드폰을 들어 잔뜩 쌓인 메시지를 훑었다. 멤버들의 개인 톡엔 답장할 기운이 없어 단체 방에다 남겼다. 나 일본 갈 것 같아. 그러기 무섭게 숫자가 사라졌다. 다들 기다리고 있던 것인지. 얘네도 할 일 없나 보다. 답장에 일일이 대응할 기운이 없어 단톡에 퉁치기로 했다. 지금은 당장은 아니고 다시 연락할게. 그러고는 대충 다른 연락을 훑었다.
한국에 온 이래로 고립되어 내내 연습실만 전전하다 겨우 데뷔하고 나서도 친구 하나 제대로 사귀지 못한 처참한 인간관계였다. 연락이 올 데가 많을 리 없었다. 카톡창을 몇 번 내리자 멤버들이나 연습생일 적 인연이 아닌 다른 인맥이 눈에 들어왔다. 희윤. 알바 하던 분식집 건물주였다. 재현보다 열댓 살은 거뜬히 많았다. 둘은 건물주와 임차인이 픽한 알바생 관계 외에 만난 전적이 있었다. 건물 관리차 업장에 들렀을 때 한눈에 서로를 알아봤다. 눈이 마주치고 그대로 굳은 재현에게 다가와 너, 아이돌 하는 애 맞지. 속삭였다. 그 소리가 재현에겐 시한부 선고처럼 들렸다. 여기서만큼은 코하루임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재현이 ‘리스트’에 있다고 했다. 그게 무언지 물으니 장황한 설명이 이어졌다. 희윤이 가지고 있는 건물은 여섯 채. 그중 한 개는 재개발지에 스타벅스까지 들어와 부동산으로도 먹고 살기 충분했으나 본업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의 직업은 기업 사모였다. 젊을 적 경제학 교수까지 했던 열다섯 연상 남편의 상품이 해외 계약 건을 따낸 뒤 2차 산업계에서 유망한 종목이 됐다. 그 덕에 주가가 폭등했다. 졸지에 돈방석에 앉았다. 여생을 즐기는 것 외엔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재미를 붙인 게 스폰서 생활이었다. 무명 배우, 아이돌, 모델. 가릴 것 없이 맘에 들면 만나봤다. 연세 많은 남편은 외화에 맛 들려 국내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난 한국이 좋아서, 여보. 태생이 조신하여 외국 땅 밟으면 황송한 척했지만 그녀는 남편 눈 밖을 나도는 게 좋았다. 남편도 외국에서 어련히 즐기고 있으려니 피차일반이었다. 그 ‘리스트’에 재현이 있었다. 메가스톰의 비주얼 멤버. 미성의 보컬에 선이 고운 편. 일본 출생. 본명 카시와기 코하루. 꽃보다 남자 일본판을 보고 오구리 슌에게 푹 빠졌던 희윤의 흥미를 끌기 딱 좋았다.
희윤은 재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재현이 데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명했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재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외국인이었다. 사장의 권유에 자리에 나갔으나 사전 설명이 충분치 않았다. 그녀에게 목석같은 어린 재현은 나가리였다. 술 따를 줄이나 알지, 치대는 건 못하던 어린 남자애. 술자리 예절을 잘못 배웠을 뿐인데, 잔이 비면 무조건 채우는 게 나중엔 꼭 저를 맥이려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흥미 생길 리 없었다. 케이블 방송사에서 런칭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고정이나 잡아줬다. 이후로 연락하지 않았고, 소속사 사장이 더 강요하지 않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게 그런 기회였다는 걸, 재현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깨달았다.
우습게도 분식집에서 만난 뒤에 종종 연락을 했다. 가끔 식사를 같이하기도 했다. 재현이 먼저 했을 리 없고, 희윤이 선심쓰듯 안부를 물어왔다. 가끔 흥밋거리가 소진될 때 생각나는 소재인 듯했다.
희윤은 장성한 재현을 꽤 맘에 들어했다. 적어도 눈치라는 게 있으면 알았다. 건물주씩이나 되면서 본인 건물 가게에 자꾸 찾아오는 눈치 밥말아먹은 행위를 일삼는 것부터 그랬다. 취미가 제과제빵이라며 매번 쿠키 머핀 따위를 가게에 돌리곤 했는데, 재현에게 전해줄 때만 묘하게 건네는 눈빛이 확 들어왔다. 그게 대여섯번 쯤 반복될 때였나. 이미 개인적으로 연락은 꾸준히 받고 있었고, 빈말을 가장하면서 밥이나 한 끼 먹자는 시그널도 흘렸을 즈음. 비교적 여유로운 오픈 시간대에 알바생들끼리 모여 스몰토크 나누던 중이었다. 전날 희윤이 전해준 버터쿠키를 까먹으면서였다. 재현보다 두 살 많은 영현이 말했다. 건물주 언니, 전에는 이렇게까지 자주 오진 않았는데. 누구 주고 싶어서 그러나 몰라. 그러곤 재현을 향한 웃음기 섞인 은근한 시선. 별 내색 안했지만 그때 확신했다. 나 주려고 그러는 거구나. 뭐, 아직도 나랑 자고 싶은가. 차마 입 밖으로 못 꺼낼 생각을 했다. 달달한 쿠키를 콰득 씹으며.
무슨 생각이었는지, 이주연에게 데인 치기인지. 희윤에게 연락을 했다. 어디세요? 만날래요? 지나치게 뜬금없고 예의도 없는 번개 제의였다. 그럼에도 희윤은 채 이십 분이 안 되어 답장을 남겼다. 갑자기? 뭔 일인데ㅋㅋ. 구태여 설명할 의욕도 나지 않아 다짜고짜 모텔 주소를 링크 찍어 보냈다. 곧장 전화가 왔다. 받으면 욕먹으려나. 좋아하려나. 잠시 고민하다 귀에 가져갔다. 여보세요…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힘없이 새어나갔다.
코하루?
네… 죄송합니다.
지금 가면 돼?
네? 아니, 아뇨, 죄송해요.
아니, 갈게. 호수 보내.
희윤은 굽히질 않았다. 연신 사과하는데도 대쪽같았다. 이렇게까지 고집이 있는 편인지는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텔방 초인종이 울렸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 뿌리가 자라난 탈색모 위로 후드를 뒤집어쓴 채 문을 열었다. 화장기 있는 얼굴에 잔뜩 꾸민 옷. 밖에 있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지냈길래 꼴이 그래.
…일이 없었어요.
갑자기 모텔 주소를 보내질 않나.
죄송해요. 연락 보실 줄 모르고…
그럼 애초에 그런 짓을 왜 해?
…죄송합니다.
희윤이 퀭한 안색의 재현을 훑어보곤 헛웃음 지었다. 뭐가 그리 죄송해. 죄지었어? 이제 와 발 빼려고? 단정 짓듯 말했다. 재현은 그제야 등골이 서늘했다. 좀 후회됐다. 지금 어쩌자고 이런 짓을 했지. 이제 와 발 빼겠다고 말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온 희윤이 재현의 후드를 벗기고 뺨을 쓸었다.
예쁜 얼굴이 다 상했네.
…별로죠.
아니. 그래도 내켜.
그러더니 털썩, 침대 위로 재현을 끌어 앉혔다. 냅다 무릎 위에 올라타더니 혀가 섞였다. 얼굴을 붙잡힌 채 입을 벌렸다. 말캉하고 축축한 혀가 입안을 헤집었다. 텁텁한 화장품 맛이 났다. 심장은 막 뛰는데 하나도 흥분이 되질 않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나 더 이어지나 싶던 키스가 금세 끝났다. 인중까지 번진 립스틱을 대충 문질러 닦으며 희윤이 물었다. 하기 싫지. 재현은 거짓말에 소질이 없다. 시선을 피하자 희윤이 천천히 일어섰다. 재현의 벌건 입술을 바라보면서였다.
너랑 너무 친해졌다.
…네?
불러놓고 까는데 화가 안 나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는 재현이 눈을 깔았다.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낸 희윤이 천천히 다가와 재현의 얼굴을 붙잡곤 입술을 문질러 닦았다. 시뻘건 화장품이 묻어났다.
사모님, 죄송해요.
그렇게 부르지 말아줄래?
…죄송해요, 누나.
죄송하면 지금이라도 맘 바꿀래?
…하라면 할게요.
키스해봤으니까 됐어.
거울 앞으로 향한 희윤이 립스틱을 꺼내 입술 위로 덧발랐다. 번지고 삐져나온 걸 정리하며 화장을 고쳤다. 애초에 나한테 스폰받아 뜰 생각도 없지, 너. 재현은 그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희윤이 뒤돌아 재현을 마주하고 다시 물었다.
왜 갑자기 날 부를 생각을 했어?
그냥 생각이 나서요.
오려면 니가 와야지. 진짜 웃겨.
…다음엔 제가 갈게요.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다음이 없을 것 같은데.
…….
너네 망했어?
…그런 것 같은데요.
재현이 담백하게 대꾸했다. 희윤이 저런, 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별로 안타까워하는 것 같진 않아 보였다. 그럼 집 필요해? 돈으로 줘? 손에 차키를 걸고 돌리며 희윤이 물었다. 주렁주렁 걸린 키링이 짤랑대는 소리를 냈다.
아뇨. 그런 거 아니고… 진짜 잠깐 미쳤었나 봐요.
별로 혹하지도 않네.
…진짜 그런 생각으로 연락한 거 아니에요.
그럼, 사람이 필요해?
…….
너, 내가 너 맘에 들어하는 거 알고 있었지? 그래서 불렀지?
확신한다는 투였다. 지금 누울 자리 보고 비비는 거잖아, 너. 혼자 이 그지같은 방에서 쪽박 차니까 외로워 죽겠지? 희윤이 어려운 말을 술술 늘어놓았다. 그런데도 재현은 전부 알아들었다. 객관화를 피해왔던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는 기분이었다. 괴로웠고, 허망했다. 우울증에 불안장애에 애정결핍까지. 희윤이 고개 떨군 재현의 머리칼에 손을 얹었다.
너 좋아할 사람 많아. 사람들이 아직 몰라서 그래.
…감사합니다.
빈말 아니고, 나 안목 되게 좋아. 어디 갑자기 꽂았을 때 사람들이 의아해할 애들은 안 골라.
…네.
불쌍하게 이러고 있지 말고 집 들어가. 숙소 이런 거 없어?
들어갈게요.
푸석한 머리칼을 몇 번 쓸어내리던 희윤이 나갈 채비를 했다. 근데 진짜 미안해할 거 없어. 지금도 다른 애 만나러 가는 길이었으니까 걔한테나 미안해 해. 그런 말이나 툭툭 던지며 부츠에 발을 끼워 넣었다. 문고리를 잡고 돌리기 직전 슬쩍 돌아보더니 마지막으로 일남콤다운 대사를 날렸다.
너 일본 사람인 거 이제 티 하나도 안 나, 코하루. 다음엔 좀 더 일본인처럼 굴어. 알겠지?
철컥, 문고리가 돌아가며 희윤이 열린 문틈으로 빠져나갔다. 재현이 헛숨을 뱉었다. 이게 무슨 페티쉬 전시지. 이내 몸에 힘을 풀자 뒤로 벌러덩 넘어갔다. 싸구려 매트리스에서 요란스럽게도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다시 모텔방 안에 홀로 남겨졌다.
코하루. 그 이름을 듣자마자 정신이 들었다. 이런 변덕과 요동치는 충동도 닳아빠진 마음의 증거일까. 이제야 이주연한테 미안했다. 재현이 청승떠는 동안 한 통의 전화도, 문자도 없던 이유. 이주연이 싸이코패스거나, 재현에게 완전히 질려서 그런 게 아니다. 이기적으로 구느라 흘려들었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나 오늘 두 시에 시험 있어.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내리 책상에 앉아 공부에 열중이던 뒤통수. 시간을 확인했다. 두 시 오 분. 주연의 학교까지는 지하철 타고 삼십 분, 도보로 십오 분. 벌떡 몸을 일으켰다. 냅다 문을 열고 튀어 나갔다.
호텔 문을 나서서야 비가 오고 있는 걸 알았다. 맞은편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예고 없이 내린 비여서 그런지 몇천 원짜리 비닐 우산은 전부 팔리고, 웬 캐릭터가 그려진 이만 원짜리 분홍색 삼단 우산 뿐이었다. 냅다 그걸 집어 들었다. 평소라면 아무리 급해도 고개 젓고 나올 것이었으나,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분홍 우산을 손에 들고 정작 쓰지도 않은 채 뛰었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채. 지하철역까지 내리 달렸다.
사당역에서 신촌역까지 이리도 먼 줄 몰랐다. 마음이 조급했다. 지상으로 올라오자 그새 빗발이 더 거세졌다. 그걸 그대로 맞으면서 그제야 우산 포장을 뜯었다. 이미 축축하게 젖은 머리칼 위로 우산을 썼다. 두어 번인가 따라와 본 기억을 되짚어 예술관 앞으로 갔다. 여기서 시험을 보는 게 맞는지 확실치도 않았는데 냅다 기다렸다. 밑단 다 젖은 추리닝 바지에 척척하게 물 고인 슬리퍼와 맨발 조합으로. 민들레 홀씨처럼 흩날리던 다 상한 금발은 비 맞아 뻣뻣한 게 빗자루를 씌운 것 같이 생겨서는. 뿌리는 까맣게 올라와 뭔 갓파 같기도 한 몰골이었다. 추레하기로는 못지않은 시험 기간 학생들도 한 번씩 흘끗거리고 지나갈 정도로.
한두 명씩 건물을 나서는 빈도가 잦아질 즈음, 저 안쪽에서 널어놓은 빨래처럼 흐느적대는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소리 내어 부를 자신은 없어서 걸음을 뗐다. 그 앞에 서서 길을 가로막았다. 시커먼 낯빛에 퀭한 눈동자가 그제야 재현을 마주했다. 혼이 빠진 얼굴이 놀라는 기색도 없이 가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미처 접지도 못한 분홍색 우산을, 비도 들어오지 않는 건물 안에서 냅다 씌웠다. 비가 와서. 되도 않는 핑계를 댔다. 마음이 급한 탓이었다.
주연은 아무 말도 없이 우산을 가져가 들더니 건물을 나섰다. 나란히 분홍색 우산을 쓰고 걸었다. 종강 시즌에다 날씨 탓인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예술관 뒤로 돌아 중문으로 빠져나가는 길엔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우산에 부딪히는 빗소리만이 울렸다. 주연의 왼쪽 어깨가 함빡 젖어갔다.
미안해, 주연. 이윽고 재현이 침묵을 깼다. 한참이나 다물고 있던 입에서 쩍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주연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집에 들어올 거야?
그제야 주연의 눈빛이 읽혔다. 귀찮음이 아니었다. 걱정과 연민. 불안함과 안타까움. 시험 기간 내내 며칠이나 밤새우면서도 싱글 침대의 반절을 차지하고 누운 이재현에게 단 한 번도 짜증 내지 않았던 이주연. 집에 들어올 때면 잘 있었어? 인사 건네던 이주연. 당연해서 깨닫지 못했던 것들. 불퉁하게 던지는 모든 말이 밥 좀 먹어라, 밖 좀 나가라, 멤버들 좀 만나라, 같은 것들이었다. 전부 재현을 향한 염려들.
문득 먹지도 않은 약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도핑한 것처럼 자신감이 생겼다. 비로소 일본으로 도피할 수 있을 것 같은.
주연아.
응.
순순히 대답하는 목소리에 확신이 들었다. 고개를 틀면서 주연의 뺨을 감싸 돌렸다. 힘없이 딸려오는 얼굴이 영문 모르고 눈을 키웠다. 재현이 그대로 입을 맞췄다. 놀라 벌어진 입술 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희윤이 했던 것처럼. 턱을 살짝 틀어 맞물었다. 입술을 살살 빨았다. 요령 없는 키스에 꼭 맞아든 입술이 젖어갔다. 우산을 쥔 주연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텁텁한 화장품 맛이 아닌, 잠을 쫓으려 깨물었을 화한 목캔디 향이 났다.
짧게 물었던 입술을 놓았다. 꼭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뜬 재현이 몸을 물렀다. 희윤을 이해했다. 키스해봤으니 됐어. 새침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절로 웃음이 샜다. 냅다 키스 당한 눈앞의 누가 보면 정말이지, 미친놈이라 생각할지도 몰랐다.
키스시타카라모오이이.
키스해봤으니 됐어. 입 밖으로 내어봤다. 주연은 어떻게 나오려나, 한 대 때리려나. 욕하려나. 아니면 헛웃음 짓고 두고 가려나. 꼴려서 다시 키스하려나. 앞으로의 이재현처럼, 도망가려나.
그러나 이주연의 호는 예외. 그 모든 예상의 밖에 있다. 아무 표정도 없이 휴대폰을 꺼내 들더니 한참을 만졌다. 앞에 선 재현에겐 아무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내일 두 시? 두 시… 뭔가 확인하는 것처럼. 그러더니 재현을 바라보곤,
코하루.
이름을 불렀다. 한 발짝 더 다가오며.
대만으로 가자.
웅크리듯 주연과 재현을 품은 우산 안으로 주연의 목소리가 부딪혀 울렸다. 숨소리 사이에 빗소리가 섞였다. 마음이 급해 코가 맞부딪혔다. 방금까지 물렸던 입술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대답을 들으면 다 놓고 도망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애초에 다 니 착각이라는 듯 옭아맨 입술 끝에 짠기가 돌았다.
주연의 옷자락을 붙잡은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맘만 같아선, 대만에서 살다 죽어도 되냐고 묻고 싶었다.
*
시부야의 밤은 소란스럽다. 교차로를 건너는 인파가 사방에서 엉겨들었다. 재현은 시부야 스크램블 앞 츠타야 스타벅스를 등지고 서서 지하도로 들어가는 인파에게 손을 내밀었다. 공연 홍보용 전단지를 돌리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은 관심 없이 지나쳤다. 평소 같으면 괘념치 않았을 것을, 재현은 답지 않게 끝까지 따라붙어 종이를 내밀었다. 삐라 뿌리는 삐끼같은 모양새였다. 강매당하듯 전단지를 떠안은 사람들은 인상을 팍 찌푸리다 재현과 눈이 마주치곤 한 번 흘기고 말았다. 코스튬을 빼입은 잘 빠진 남자의 얼굴이 허옇게 질려 있었다.
재현은 며칠 내내 그 꼴이었다. 사와무라가 나서서 공연에 서도 되겠냐 물을 정도였다. 이재현 혼자 체키회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얼만데. 됐다고 손을 내저었다. 소파에 길게 몸을 누인 채였다. 이주연 생각만 관둬도 두통이 가실 텐데. 시부야 어딘가에 주연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골이 지끈했다. 먹는 족족 얹혔다.
알바비를 받았다는 아야네가 재현의 체키 삼십 장을 샀다. 꼼짝없이 붙어서 사진 서른 장을 찍어줘야 했다. 안 그래도 오전 내내 전날 먹은 걸 게워낸 상태였다. 반쯤 찍다가 졸도할 것 같았다. 재현이 허연 손끝으로 제 허리춤을 꼭 안은 아야네의 손을 쥐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덜덜 떨렸다.
“아야네, 정말 미안한데 나머지는 다음으로 미루면 안 될까.”
“에- 어째서 재현? 어디 아파?”
“응. 조금 체했나. 미안. 지금 찍으면 최상의 모습으로 찍어줄 수 없을 것 같아서.”
“아냐아냐, 괜찮아.”
아야네가 손을 내저으며 재현의 안색을 살폈다. 핏기 가신 얼굴에 그새 살이 내려 뺨이 패였다.
그럼 재현, 사진 안 찍어줘도 되니까 나랑 데이트 할래?
아야네가 재현과 맞잡은 손에 힘을 주고 물었다. 아, 이건 좀 곤란한데. 재현이 맞은편에 선 사와무라를 바라봤다. 마찬가지로 난감하단 얼굴이었다. 이건 짬 먹은 재현이 알아서 쳐내야 했다. 눈썹을 최대치로 끌어내렸다. 정말 미안, 그건 지금 약속할 수 없어. 대신 유비키스 해 줄까.
재현의 말에 아야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꼭 겨울 노천탕에 푹 담갔다 뺀 것처럼. 잘 빚은 피규어이자 트로피로 얼굴과 몸 팔아 먹고사는 지하돌이지만, 갤럭시프린스는 체키에 돈 수백을 들이부어도 어느 선 이상의 스킨쉽은 비허용이었다. 이를테면 재현이 말한, 손가락을 사이에 두고 입맞추는 유비키스 같은. 아야네가 상기된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재현이 힘겹게 웃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찍고 바이바이 할까.
아야네의 얼굴을 감싸고 끈적한 입술에 엄지손가락을 댔다. 점점 가까워지는데도 눈 감을 생각도 않는다. 깡이 대단하네. 재현은 제 엄지손톱에 입술을 눌러 붙이며 눈을 감았다. 놀란 아야네의 손이 덥썩 재현의 손등을 붙잡았다. 뜨끈한 콧바람이 손가락을 쓸었다. 독한 향수 냄새에 얹힌 속이 들썩였다. 숨을 참았다. 사와무라가 냉큼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들었다. 찰칵 소리가 나고 천천히 몸을 물리며 숨을 들이쉬었다.
벌건 얼굴에 대고 몇 번이나 인사했다. 잘 가, 다음에 봐. 미안, 아야네. 그러거나 말거나 아야네는 신난 얼굴이었다. 사와무라가 창백한 재현에게 다가와 물었다.
“괜찮아?”
“응… 나 오늘은 퇴근해도 될까?”
“어. 아야네 씨가 마지막이니까. 들어가 봐. 몸 안 좋으면 연락하고.”
대답할 힘도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옷을 갈아입고 공연장을 나섰다. 한기에 절로 몸이 움츠려졌다. 팔짱을 낀 채 숨을 뱉으니 허연 입김이 흩어졌다.
술집들이 늘어선 거리를 지났다. 이제 막 마감 정리하는 이자카야 안에서 노래가 흘렀다. 재현이 잠시 걸음을 멈춰 섰다. 가만 노래를 듣고 있었다. 가사를 따라 곱씹으며 중얼거리다 핸드폰을 들었다. 인스타그램 디엠이 쏟아지고 있었다. 뭐지, 대충 알림을 훑으니 아야네가 저를 태그한 게 시작이었다. 누르니 스토리가 뜬다. 제가 아야네의 뺨을 붙들고 키스하는 폴라로이드. 실제로 입술이 맞닿은 건 아니라지만. 그 이후로 수십 개의 메시지가 왔다. 뜨끈해진 기계를 차게 언 손으로 붙들었다. 배터리가 십 퍼센트 남아있었다. 알림을 꺼버렸다. 그대로 머리가 핑 돌았다. 당장이라도 고꾸라질 것처럼 다리가 풀렸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길에 주저앉았다.
솔직해지는 게 어려워. 그건 누구보다 큰 내 무기였는데. 재현은 처음으로 두려워졌다. 이재현도 코하루도 내가 아니야. 나는 나를 얼마나 잃어버린 거지. 어쩌면 일본에서 아이돌로 사는 것도 진정 원하는 게 아닐지도. 재현이라는 이름을 썼던 것도, 그 이름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그 시간이 그리웠다. 가난하고, 치열한 삶에 진이 빠져 기운이 없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고, 의지도 없이 꿈을 박탈당한 어린 청년이던
이재현으로, 이주연과 부대꼈던 날들.
신오쿠보 서점에서 주연과 만난 그 잠깐 동안 고민했다. 미친놈처럼 주연을 따라가고 싶었다. 걔가 지금 어디서 뭘 하든, 누구랑 도쿄에 왔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면 어련히 취객이라 생각하고 지나칠 테다.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드문드문 새벽 거리를 걷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가, 금세 멀어졌다. 아득한 소리를 좇으며 숨을 골랐다. 이번엔 둔탁한 운동화 소리. 아마 좀 무거운 덩크나 조던. 대충 추측했다. 점점 가까워지던 발소리가 그대로 재현의 앞에 멈췄다. 그대로 고요했다. 들리는 건 이자카야의 노래소리뿐. 천천히 눈을 떴다.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놀랍지 않지. 난 언제까지 이게 당연한 운명이라고 생각할까. 낭만도, 사상도 전부 옮는다면 옮기는 쪽과 옮는 쪽은 어디일까. 아무래도 삼투압일까. 마음의 농도가 더 큰 사람에게 옮겨오는 거다. 그러니까, 이주연의 낭만이 다 옮아버린 탓이다. 이 넓은 땅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각본처럼 말도 안 되는 순간들이 그저 감동스럽기만 한 것은.
갈색 점퍼를 입고 선 주연이 재현을 내려다봤다. 꼭 언젠가 본 적 있던 구도였다.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예뻐. 습관처럼 품평했다. 그래봤자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내내 칭찬뿐이었다.
“안녕.”
“벌써 만날 때가 됐나.”
“…오늘 코하루같네.”
주연이 화장기 어린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스워? 재현이 자조적으로 물었다.
“아니.”
“…….”
“예뻐.”
대답에 픽 웃음이 터졌다. 우리 다시 만나기로 한 조건 잊었나.
“뭐 하고 왔어?”
“궁금해?”
“어.”
“알려주기 싫어.”
애처럼 굴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이주연 앞에서 이렇게 무방비해지는 건 저도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프니까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댔다. 사람이 가장 유약해지는 순간. 이렇게 솔직하게 굴 수 있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비참했다.
“무대했어?”
“어?”
“공연 있었잖아. 오늘.”
잘못 들었나. 예상치 못했던 말이다. 낮게 가라앉은 눈이 재현을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늦은 밤거리는 고요했다. 헛것이 들렸을 리 없다. 숨이 턱 막혔다. 눈앞이 핑 돌았다.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솔직하게 구는 것과는 별개로 지하아이돌로 사는 건 들키고 싶지 않았다. 직접 전단지까지 돌려가며 고작 몇십 명 앞에서 춤추고 사진을 팔아 먹고 산다는 걸. 눈 아래 펄이 가득한 몰골로 당황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만.
원래 어떠한 감정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부릴 자존심이 남은 이상 합리성이 통하지 않는 무지막지한 감정이라는 걸, 수없이 겪어 알고 있었다.
“내가 뭐 하는지 알고 있어?”
“몰랐으면 좋겠지.”
“지금 놀려?”
“아니까 찾아온 거야.”
“…뭘.”
주연이 재현 앞에 쭈그려 앉았다. 눈높이가 같아졌다. 왁스를 발라 넘긴 앞머리가 세팅된 지 한참인지 가라앉아 있었다. 옅게 남아있는 화장기가 눈가에 선명했다. 그런 주연을 외면하고 싶었다. 낯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모른척하고 싶었다.
“토스 보고 찾았다는 거 거짓말이야. 말도 안 되지. 어떻게 그걸로 찾겠어.”
“…….”
“갤럭시프린스 말고 개인 인스타는 안 해?”
“…너,”
“몇 년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다가, 겨우 찾은 근황이 다섯이 같이 쓰는 계정이라니 좀 너무하잖아.”
“다 알고 있네.”
“그러니까 좀 스토커같아도 나한테 뭐라고 하면 안돼.”
왜 안 지웠어 어플. 위치 어플 깔았던 거. 계속 하루가 어디 있는지 뜨잖아. 한국이랑 멀어서 제대로 나오지도 않고, 몇 년 동안 도쿄 어딘가에서 바뀌지도 않았어. 몇 년 동안 쳐다보면서 고문 당하는 것 같았어. 일본에 와서 그 어플 켤 생각밖에 안 들었어. 나보고 와 달라고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면 나한테 못 할 짓 한 거야.
주연이 속사포처럼 읊었다. 둑이 터진 댐처럼. 재현은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다 벌떡 일어났다. 그대로 앉아있는 주연을 내려보며 말했다.
“귀찮아서 안 지웠어.”
“…뭐?”
“그래서, 어떡하라고? 지금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한국으로 돌아와. 나랑 같이 작품 해.”
“…미쳤구나.”
“하루를 데려갈 수 있으니까 찾아온 거야. 약속 지킬 수 있으니까.”
주연도 따라 일어섰다. 다시 눈높이가 맞았다.
“내가 그럼 감사합니다, 하고 따라가야 해?”
“이재현.”
“니가 아무리 잘나도 변하는 건 없어.”
“뭐가 변하는데. 지금도 무대에 서잖아.”
“진심으로 똑같은 무대라고 생각해?”
“…….”
주연의 가슴팍을 훑었다. 선명한 생로랑 마크.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줬다.
“내가 불쌍해? 니가 날 구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런 거 아냐.”
“아니? 그런 거 맞아. 착각하지 마.”
다시는 찾아오지 마. 집에 갈 거야.
재현이 등 돌려 걸었다. 배가 찢어지듯 아팠다. 주연이 따라붙는 소리가 들려 몸을 곧게 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걸었다. 눈을 부릅뜬 채였다.
“데려다주게 해 줘.”
“따라오면 집 안 들어가.”
“…나보곤 키스할 생각 안 들면 만나자면서.”
“…뭐?”
“다른 사람이랑 키스하는 건 그렇게 쉬워?”
무슨… 재현이 벙진 얼굴로 주연을 바라봤다. 눈시울이 벌게진 채 씩씩거리는 게 잔뜩 분한 듯했다. 키스라니 그게 뭔 소리야, 생각하다 문득 떠올랐다. 인스타 스토리 봤구나. 계정 관리자가 재현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 아마 갤럭시프린스 계정이 태그된 아야네의 스토리를 리포스팅했을 것이다. 이걸 해명해야 하나. 무슨 사이라고. 재현이 아무 말 없으니 주연이 숨을 골랐다. …이건 못 들은 걸로 하고, 잠깐만 기다려 줘. 안 따라갈게.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하더니 등돌려 급히 뛰어갔다. 그 간절한 목소리를 외면하지 못하고 길가에 멈췄다. 지금 뭐 하는 거지. 헛웃음이 나왔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그대로 서서 오 분 정도 기다렸나. 멀리서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일부러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연은 아스팔트 바닥에 시선을 처박은 재현의 손에 봉투 손잡이를 쥐여줬다. 맘 같아서는 가져가라고 윽박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래야 맞는 거겠지만… 얌전히 기다린 것부터가 이미 글렀다. 손에 들린 걸 바라보지도 않고 주연을 흘겼다. 오늘은 갈게. 다시 올게. 굽힐 생각 없단 얼굴을 한 주연이 멀어졌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주연이 아야네와의 사진을 보고 반응하는 것에 안심했다. 비참하고, 비통했다. 주연은 토스 알림을 보고 찾았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라 했다. 그러나 사실, 재현은 그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믿었어. 우리의 운명이 지나치게 낭만적인 탓이란 생각에 취해 있었어. 예전 같았으면 말도 안 된다고 너처럼 말했을 걸, 정말이지, 니 각본 속으로 들어온 캐릭터처럼 스스로 사고하는 걸 잊고 그저 그런 줄로만 알았어.
주연이 한국에서 신인 감독으로 성공한 걸 알고 있었다. 매일 소식을 찾아봤다. 불가항력의 일이었다. 감독 연출 배우 셋 다 맡은 데뷔작이 독립영화제에서 수상한 뒤 상업 영화도 작업하며 동시에 배우로도 활동한다 했다. 아까 마주했던 화장기 묻은 눈가를 떠올렸다. 아마 일본에 온 것도 촬영이 있어서였겠지. 그런 주연을 따라가는 건 명백한 기생이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현관에 앉아 주연이 준 봉투를 열어봤다. 소화제와 해열제, 기침 감기약.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어디 드럭스토어에서 잔뜩 쓸어온 것 같은 약들.
그리고, 씨디 하나와 급하게 휘갈겨 쓴듯한 쪽지 한 장. 천천히 펼쳐 읽어봤다. おやすみなさい。일본어로 휘갈겨 쓴 주연의 글자. 각막에 아로새기는 듯하다. 분명 연습한 말이겠지. 잘자. 이게 내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일까. 재현은 일본에 와서 단 한 번도 수면제를 먹지 않았다. 그걸 알게 되면 주연은 안심할까. 다음으로 아무 프린팅 없이 하얀 씨디와, 투명한 씨디 케이스에 매직으로 적힌 글자를 읽었다. 같은 글씨체였다.
<暖春>
모를 수가 없는 글자였다. 난춘. 재현의 첫 드라마와 똑같은 발음을 제목으로 한 주연의 첫 작품. 재현이 못해도 수백 번은 돌려봤을 삼십 분짜리 단편영화.
처음엔 제목을 보고는 장난하나 싶었다. 주연이 모를 리 없으니 노린 게 분명했다. 재현이 찍었던 난춘은 어지러울 난(亂) 을 썼고, 주연의 난춘은 온난할 난(暖)을 썼다. 그래서 더 열이 뻗쳤다. 명백하게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얼마나 잘 찍었나 두고 보자는 마음으로 틀었다. 그게 한 번이 되고 두 번이 되고… 끝내는 습관이 됐다.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틀어놓고 이불을 끌어 덮은 채 재생했다. 다시 듣고픈 목소리가 있으면 스무 번씩 반복하고, 특히 좋은 얼굴이 있으면 멈춰놓고 감상하고. 엔딩 크레딧에 영화 제목이 오를 때 너의 봄은 따뜻하구나, 알게 되어서 안도했던 지난 밤들. 눈 뜨면 아침이었다. 그제야 재현은 제가 아직도 어지러운 시절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구석에 밀어놓은 대본집을 팔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데려갈 수 있다고, 약속을 지킬 수 있다고 단언하던 음성이 단단했다. 일본도, 한국도 아닌. 알아듣는 말 하나 없는 낯선 도시에서 의지할 군데가 이주연밖에 없었을 그때. 감히 겁도 없이 새끼손가락 얽어 걸었던 게 떠올랐다. 아무것도 없을 적 아무것도 없으니까 할 수 있던 얘기였다. 그걸 기억할 줄은 몰랐는데.
현관문에 매달린 후우링이 잔잔히 흔들리며 달랑달랑 울렸다.
아까 이자카야에서 줄곧 흘러나왔던 노래가 계속해서 맴돌았다. 지금도 귓가에 재생되는 듯.
그 종을 울려줘 이 사랑의 소리를 들려줘 좀 더 좀 더 사랑해줘 목숨을 넘기 전까지……
*
6월의 타이베이는 더웠다. 한 달 내내 우기라는데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그쳤다. 운이 좋았다. 오전까지는 한참 쏟아졌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땅이 축축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인 물이 찰박이며 튀었다. 종아리에 흙탕물 자욱이 남았다.
주연을 따라 호텔에 도착한 재현은 짐도 안 풀고 늘어졌다. 오랜만에 장거리 이동이라 체력을 다 썼다. 잠이 오질 않아 새벽 내내 짐을 싸고 뜬눈으로 나온 탓이다. 침대에 모로 누워 캐리어를 여는 주연의 등판을 바라봤다. 잠들지 않으려고 눈을 끔뻑였다. 이동 내내 충전기 타령이었던 재현에게 선을 찾아 내미는 주연의 얼굴이 점점 흐릿하게 보였다. 받아들려고 했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다시 눈 뜨니 날이 바뀌어 있었다. 재현이 잠든 새 주연이 충전해 놓은 핸드폰이 손에 집혔다. 시간을 보니 정오가 훌쩍 지나 있었다. 몇 시간을 잔 거지. 간만에 머릿속이 개운했으니 됐다. 계산을 멈췄다.
암막 커튼 틈새로 햇빛이 한 줄기 새어 들어왔다. 어둑한 시야로 맞은편 침대에 잠들어 있는 주연이 옅게 비쳤다.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주연이 뒤척였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과 졸음 묻은 눈이 마주쳤다. 주연은 깨닫지 못한 듯했다. 재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푹 잠긴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잠들어서 미안.
…일어났어?
한참 됐다는 말은 삼켰다.
몇 시에 잤어?
자다 깼다가… 해 뜨고 커튼 치고 다시 잤어.
밥은 먹었어?
안 일어나길래 혼자 나갔다 왔지.
잘했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대강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꼬박 세나절만에 숙소를 나섰다. 근처 식당에서 우육면을 먹었다. 재현은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다. 맵고 느끼한 게 별로 취향은 아니었다. 그래도 식당 통창으로 돌아보는 대만의 찌는 더위와 은근 잘 어울려서 좋았다. 후식으로 망고 빙수까지 먹었다. 짠 거 다음엔 단 거지. 후숙된 망고 과육이 입에서 살살 녹았다. 망고가 대만 과일이야? 그런 헛소리나 했다. 맛있다는 뜻이었다. 주연이 재현 앞으로 그릇을 밀어주며 웃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단수이까지 가는 전철을 탔다. 벌써 해가 지려는지 하늘이 한층 가라앉아 있었다. 아는 한자 모르는 한자 뒤섞인 간판이 차창 너머로 스쳐 지나갔다. 모르는 게 대부분이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너 저거 읽을 수 있어? 주연에게 물으니 뭐 이런 질문을 하냐는 듯 째진 눈을 했다. 찐즈팅츠어. 친절하게 읽어주길래 무슨 뜻이냐 물었다. 주차 금지랜다. 즈 발음이나 모음을 끄는 소리가 평소 주연의 한국어 말투랑 똑같았다. 억양이 너 말투랑 잘 어울린다. 그리 말하니 고맙다고 했다. 뭐가 고마워. 순순한 게 웃겨서 또 웃었다.
단수이에 내린 뒤 유바이크를 대여했다. 석양으로 유명하다는 워런 마터우까지 자전거를 타고 내리 달렸다. 방파제 옆길을 한참 달리다가 밀크티 가게가 보여 멈춰섰다. 두 잔에 40달러였다. 이거 왜 이렇게 싸? 이거 가짜 밀크티 아니야? 물으니 주연이 대만은 가짜 안 만든단다. 발끈하는 게 재밌어서 괜히 더 놀리고 싶었다.
워런 마터우에 도착해서 유바이크 정거장에 자전거를 반납했다. 그새 해가 지고 있었다. 다리를 따라 좀 걷다가 노을 진 강가에 냅다 주저앉았다. 주연이 그 옆에 따라 앉아 몸을 붙여왔다. 날씨는 꿉꿉했는데 맞닿는 살결이 싫지 않았다. 요트가 물 위로 그리는 길을 따라 눈을 굴렸다. 어둑해지는 다리 위로 가로등이 은은하게 불을 밝혔다. 습하고 더운 바람이 살살 불어와 머리칼을 쓸었다. 등 뒤로 사람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가 배경음처럼 깔렸다. 그 사이로 주연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렸다.
하루는, 한국어에 백 퍼센트를 담을 수 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또 뜬금없는 소리. 주연을 돌아봤다. 결 좋은 머리칼이 바닷바람에 헝클어져 있었다. 손을 들어 엉망인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손길을 받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뜨는 앳된 얼굴. 새삼스럽게 손끝이 떨렸다. 심장이 한 번 펌프질할 때 분출되는 혈액이, 손끝까지도 간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하루는 일본 사람이니까, 한국어는 외국어잖아. 그러면 한국어로 말할 때 모든 마음을 다 담을 수 있어?
주연이 물었다. 뭐가 궁금한 거지. 한국어가 어렵다는 건가. 대답을 고르고 있으니 주연이 마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렇지 않아. 대만 말을 그대로 한국어로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전하지 못해. 하루는 안 그래? 주연다운 고민이었다. 재현은 어깨를 들썩였다.
말을 다 전하고 싶어?
응. 답답하잖아.
그럼 그냥 다 해. 타이완 말로.
하루가 못 알아듣잖아.
번역기 돌리면 되지.
아이, 그럴 거면 대화를 안 하지.
주연이 고개를 저어가며 웃었다.
인터넷에서 봤어. 아이시떼루가 일본에서 큰 의미야?
응. 보통 다이스키라고 하지. 아이시떼루는 자주 안 써.
좀 더 진지한 말인가?
응. 가볍게 쓰지 않으니까.
그렇구나. 근데 나는 그 느낌을 몰라.
나는 아무한테나 백 번 아이시떼루라고 말해도 부끄럽지 않단 말이야. 근데 하루한테는 큰 의미로 들리겠지. 반대로 내가 워아이니 라고 말하면 하루는 별로 느낌이 없을 거잖아. 내 마음을 그대로 전할 수 없는 거야.
주연의 말을 가만 듣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 뒤로 여러 나라의 언어가 섞여 들렸다.
그래서 말 안 했어?
어?
질문을 던지니 영문 모르는 얼굴로 되묻는다. 뺨을 쥔 손에 힘을 줘 문질렀다.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 안 했잖아.
하루도 안 했잖아.
그게 중요해? 난 키스했잖아.
그래, 좋아해. 다이스키. 근데 워아이니인지는 잘 모르겠어서 신중했어.
부담 갖지 마. 나한테도 넌 아직 아이시떼루 아니고 다이스키야.
그래도 좋아하는 거잖아.
응.
누가 더 좋아하는지 기싸움하는 미취학 수준의 대화가 오갔다. 와중에도 자존심 세우는 게 웃겨서 주연이 픽 웃었다. 이전에 했던 연애는 봐주기에 급급했는데, 왜 재현과의 관계에선 이렇게나 지기가 싫지. 자꾸만 끝도 없이 유치해졌다. 재현의 맘에 안 드는 점을 뜯어고쳐서 개조하고 싶었다. 그렇게 입맛에 맞게 길들여 평생을 데리고 살고 싶었다. 안 맞으니 포기하자, 하는 결말이 당연했던 지난 수순을 밟기가 싫었다. 그래서 빈말이 나오질 않았다.
재현은 웃음이 터진 동그란 뺨을 가만 바라보다가 문득 물었다. 너, 왜 내가 키스했을 때 대만에 오자고 했어? 그 질문에 주연이 재현을 돌아봤다. 얼굴에 발간 석양이 물들었다.
말이 백 퍼센트라면 우리는 좀 이상한 대화를 한 거야. 키스한 다음에 대만에 가자고 하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갑자기?
…그런가?
좋아한다거나, 사귄다거나, 그런 얘기 하나도 안 했잖아.
원래 대만에선 그런 말 잘 안 해.
재현이 주연의 뺨을 쓸었다. 기대오며 눈을 감는다. 부드럽고, 조금 튼 살결이 손바닥에 감겼다. 고양이처럼 부벼오는 얼굴을 가만 바라봤다.
그래도 나는 대만에 가자는 말이 그렇게 들렸어.
재현의 목소리에 주연이 천천히 눈을 떴다. 등 뒤로 지고 있는 석양과 눈이 마주쳤다. 그걸 담은 두 눈동자가 윤슬처럼 흔들렸다.
재현이 천천히 손을 내렸다. 온기가 사라진 뺨이 허전해 주연이 몇 번 고개를 기울였다. 바람이 유독 차갑게 와닿았다. 시선을 강으로 돌린 재현이 눈을 두어 번 끔뻑였다. 속눈썹 그림자가 길게 졌다. 해가 비치지 않은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 또한 충분한 대답이었다.
해가 지고 야시장에 들러 우유 튀김을 사 먹었다. 입안에 넣자마자 부스러지는 튀김옷 사이로 달큰하고 몽글한 게 퍼져 나왔다. 달아. 재현이 웅얼거리며 주연에게 꼬치를 내밀었다. 받아먹으려다 꼬치 끝에 뺨을 찔렸다. 아. 얼굴을 감싸는 주연을 보고 재현이 목을 젖혀가며 웃었다. 웃겨? 주연이 재현의 허리춤을 간질였다. 몸을 비틀며 두어 걸음 뒤로 물렀다. 쉬 아이런 마? 한참 애들처럼 장난치는 걸 바라보던 튀김 가게 주인이 주연에게 물었다. 음. 주연이 대답하지 않고 한참 고민하다 슬쩍 재현을 돌아봤다. 웃음기 덜 가신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왜? 뭔데? 슬쩍 붙어오는 온기가 전해졌다. 와중에도 못 먹은 우유 튀김을 입에 넣어줬다. 그걸 받아먹으며 대답했다. 춘티엔. 입 안에 달달한 게 가득 찼다.
무슨 말 했어?
우리보고 부부냐고 그랬어.
에? 거짓말.
대만은 동성결혼 되거든.
너 일부러 나 데려왔지.
어떻게 알았지.
주연이 튀김을 마저 삼키며 웃었다. 후드 안으로 잔뜩 곱슬진 재현의 머리칼을 헝클였다. 아, 하지 마. 뱃가죽을 툭 치는 손에 힘이 하나도 실려있지 않았다. 곧이어 어깨에 매달리며 물어왔다. 그래서 뭐라 했어?
원수.
맞는 말 했네.
나 졸업 못 하면 다 하루 때문이야.
남 탓하지 마.
양심이 없네.
그렇게 또 한참을 투닥였다. 돌아올 적엔 버스를 탔다. 주연이 어깨에 기대 잠들었다. 잠든 얼굴을 한참 구경했다. 가지런한 속눈썹, 뾰족한 코끝, 올라간 입꼬리. 작은 점과 솜털까지. 이 모습을 그대로 담아 평생 꺼내보고 싶었다. 휴대폰을 꺼내 찍었다. 결과물을 확인한 뒤 삭제 버튼을 눌렀다. 평면의 화면에는 주연의 숨결이 하나도 담기질 않았다.
시먼딩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렸다. 한국의 서울이나 일본의 도쿄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왁자한 사람들 틈으로 한참 걸었다. 야시장에서 배 불린 터라 밥 생각이 없었다. 건물을 돌아보다 문득 신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재현이 주연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엉거주춤 끌려 들어간 주연이 영문 모르는 얼굴로 재현을 올려봤다. 신발 사게? 물으니 덤덤한 얼굴로 고갯짓했다. 골라. 어지간히 쿨했다.
갑자기?
어. 원수가 이제 화해하잔 마음으로 사줄게.
농담이었는데.
난 진짜 원수라고 생각했는데.
와.
그래도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어.
이거 어때? 잘 어울리겠다. 신발을 돌아보는 폼이 진지했다. 주연이 그 옆모습을 바라보다 어깨에 손을 둘렀다. 그럼 이거 할게. 고민도 없이 짚었다. 흔해빠진 하얀 에어포스였다. 이걸로 되겠어? 물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몇 분 만에 신발을 골랐다. 신고 왔던 신발을 쇼핑백에 넣고 포스로 갈아신었다. 안 그래도 하얀 신발이 조명을 반사해 빛났다. 영락없는 새 신발이었다.
한참 길을 걷다 눈에 띄는 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스팔트 바닥 위 가득 무지개색이 칠해져 있었다. 아마 유명한 포토 스팟이라 했던 것 같다. 색색마다 쓰여진 알파벳은 타이베이라 적혀 있었다. 그 앞에선 남자 둘이 기념 촬영 중이었다. 누가 봐도 게이 커플이었다. 동성결혼 합법이라더니… 멍하니 바라보고 선 재현에게 주연이 물었다. 우리도 찍을래? 그러자 미간을 살짝 구기며 고개 저었다. 싫어. 지체 없는 대답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마주보고 섰다. 숙소로 갈까, 물으려는 주연의 앞에 냅다 쭈그려 앉았다. 영문 모르고 모자 뒤집어쓴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뭐 해? 물으니 담백한 표정으로 고갤 들었다. 어디서 났는지 펜을 꺼내더니 입으로 뚜껑을 따 물었다. 아마 호텔에서 빌린 펜일 것이다. 사잉 해도 대요? 어눌한 발음으로 물어왔다. 주연의 얼굴이 당황을 지우지 못하고 굳었다. 재현의 행동이 답지 않아 낯설기까지 했다. 꼭 다른 사람 같았다. 연예인이면서 주목받는 건 즐기지 않던 코하루와는.
계획 없이 도피처럼 온 나라. 습한 공기에 가득한 이국의 향취.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 오늘 이후 다시는 보지 못할 사람들. 하고 싶은 걸 해도 이상하지 않을 사이. 아마 모든 게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평소라면 절대 안 할 행동을 해도 납득이 되는 것은 꿈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주연은 기꺼이 동참한다.
누구세요?
코하루에요.
저는 이재현 씨 팬인데요.
이재현은 바보예요. 코하루 짱.
곱게 뻗은 손가락이 망설임도 없이 펜을 놀렸다. 신발 앞코에 펜이 그리는 획이 발가락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별이 세 개 그려진 키라키라 코하루의 싸인. 누구인지는 몰라도 어련히 유명인이겠거니 할 모양새였다. 눈을 내리깔고 집중한 재현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기다란 속눈썹이 잔잔하게 떨렸다. 도시 한가운데 주저앉아 조명을 끌어안은 몸이 어쩐지 작아 보였다.
주연이 손을 내밀자 펜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재현이 맞잡았다. 그대로 당기는가 싶던 주연이 냅다 주저앉았다. 팔에 힘을 주고 있던 재현만 뒤로 나동그라졌다. 엉덩방아를 찧은 채 버럭 소리쳤다. 아 뭐 하는데! 주연이 그 심통난 이마에 제 이마를 맞붙였다. 코가 맞닿았다. 재현의 눈앞에 반질한 얼굴이 가득 찼다. 절로 입이 합 다물렸다. 재현만 들을 수 있도록 속삭이는 숨결이 입술을 간질였다. 숙소로 가자. 물음이 아닌 통보였다. 재현이 콧잔등을 들썩이며 개구지게 웃었다. 말 한 마디 없이도 대답하는 법을 알았다.
호텔에 들어왔다. 별다른 말 없이 동시에 얼굴을 끌어당겼다. 그대로 침대 위를 뒹굴었다. 이럴 거면 뭐하러 더블 베드로 예약했지. 고민하다 체면 차리는 쪽을 선택했을 이주연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닿아오는 맨살이 따뜻했다. 그보다 따뜻한 안쪽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어려웠다. 코로 숨을 쉴 수 없어서 입을 열고 헐떡였다. 그마저도 인내심 없는 입술에 몇 번이나 가로막혔다. 그래도 자꾸 웃음이 샜다. 바보 같았다. 너무 제 취향인데. 우리 또 볼 수 있을까요? 숨을 고르던 주연이 매끈한 재현의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저한테 뭘 해 주실 건데요? 재현이 맞장구치며 몸을 뒤집어 주연의 위로 올라탔다. 묵직한 몸이 내리누르는 압박감이 숨막힐 만큼 기뻤다.
코하루 씨를 캐스팅할게요.
주연 배우로 써 주시나요?
당연하죠. 약속할게요.
마주본 채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잇새로 웃음이 부서졌다. 그대로 나머지 손가락도 마저 얽었다. 두 손이 꼭 맞물렸다. 내 싸인 신발, 당근에 팔면 안 돼요.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주연이 눈을 감고 웃었다. 진짜 나중에 성공하면, 형을 작품으로 쓸게. 약속할게. 재현은 대답 없이 주연을 몸을 끌어안았다. 이대로 부둥켜안고 창밖에 맨몸을 내던져도 침대 위일 것만 같았다. 정말 꿈인가 싶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 재현은 다시 알바를 시작했다. 배달 알바였는데, 보통 뚜벅이거나 가끔 자전거를 탔다. 밖을 좀 나가서 돌아다니라는 주연의 의견을 수용한 결과였다. 오토바이는 극구 반대로 안 됐다. 처음엔 답답했는데 하다 보니 산책하는 기분이라 나름 좋았다. 멀리까지 나갈 일도 없고. 저녁쯤엔 지쳐서 뻗어 잠들었다. 나름 바른 생활까지 하게 됐다.
재현이 밤 열 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들어온 날이었다. 보통 해가 지기 전에 들어오곤 하는데 웬일인지 꽤 오랫동안 밖을 돌았다. 뭐 하고 왔냐는 주연의 질문에 상기된 얼굴로 돌아봤다. 오랜만에 얼굴에 발그란 혈색이 돌았다. 술 마셨구나. 들뜬 게 눈에 보여서 주연도 웃음이 났다. 귀여워. 생각하며 침대에 어깨를 밀어 앉혔다. 떠밀리는 줄도 모르고 순순히 엉덩이를 붙였다. 주연을 보는 눈이 반짝였다.
오늘 혼자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가게도 구경했어.
뭐 먹었는데?
저기 역 앞에 라멘집 새로 생긴 데.
한국 라멘도 맛있어?
일본보다 맛있던데?
에이.
비슷해. 이건 진짜.
우리 집 앞에 귀여운 가게 진짜 많은 거 알아? 컵이랑, 촛불? 그리고 공책도 많아. 돈 많이 벌어서 다 사고 싶어. 조잘거리는 입술이 달싹이는 걸 바라보던 주연이 고개를 숙여 한 번 꾹 눌러 붙였다. 쪽 소리와 함께 맥주 냄새가 났다. 재현은 뽀뽀하건 말건 떠들기에 여념 없었다. 참새같아. 속으로 감상한 주연이 재현의 티셔츠 밑단을 들어 올렸다. 옷을 벗기거나 말거나 순순히 만세한 재현이 반라가 되고 나서 벌떡 일어났다. 현관 앞에 아무렇게나 팽개친 가방을 들고 왔다. 뒤적이더니 손을 뻗어 주연의 책상에서 볼펜 하나를 가져갔다. 그대로 침대에 엎어져선 방 모서리에 얼굴을 박고 끄적이다가 주연에게 책 하나를 내밀었다. 표지에 정직한 두 글자가 또렷했다.
<亂春>
난춘의 대본집이었다. 주연에게 준다던 새 것. 앞장을 펼치니 투박한 손글씨가 보였다.
주연에게.
인심 쓴 하사품이었다.
주는 거야?
응.
원래 거 다 찢어졌어?
아니. 그냥 버렸어.
왜? 찢어질때까지 보고 관둔다며.
음, 지금이면 버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어?
재현이 뜻 모를 소리와 함께 씨익 웃었다. 이럴 때면 꼭 천진한 아이처럼 보였다.
이제 다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거기 나오는 이재현.
술기운 섞여 뭉근히 읊조리는 그 말이 꼭 고백 같았다.
주연의 성적이 나왔다. 재현 때문에 졸업을 못 할 거라고 징징댔던 건 다 엄살이었다. 물론 기말 마지막 시험 날 한바탕 하는 덕에 그 과목이 예상보다 낮은 성적을 받긴 했지만. 졸업에 지장이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대만 여행이 대가라면 만족스러웠다. 뒤늦게 주연이 대만에 왔었단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은 내내 타박했다. 친구랑 같이 있어서 그랬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다음에 꼭 집에 들르겠다는 약속을 몇 번이나 받아내고서야 전화가 끊겼다.
주연은 방학 동안 다시 현장 알바를 나갔다. 재현의 웹드라마가 증발되다시피 했으니 다른 스펙이 필요했다. 그런 것 치고 보통은 장비를 옮기거나 세트를 정비하는 일이 대부분이었지만 일단 현장에서 뛰는 것에 의의를 뒀다. 유난히 힘쓰는 일이 많았던 날 새벽, 기절하듯 곯아떨어진 주연을 재현이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기 싫어 이불을 뒤집어썼다. 왜애… 와중에도 대답은 착실하게 했다. 어느새 벌떡 일어나 앉은 재현이 이불을 슬쩍 걷으며 말했다. 너 과제, 하나 해결했다. 영문 모를 소리였다. 겨우 뜬 눈으로 휴대폰에 들어갈 듯 얼굴을 박고 있는 재현이 보였다. 무슨 일인데. 찌뿌둥한 어깨를 비틀며 물으니 냅다 화면을 들이밀었다. 눈부셔 인상을 찌푸리는 통에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대신 멍한 목소리가 담백하게 읊었다.
웹드라마, 올라왔대. 일주일 됐는데 조회 수가 백만이래.
이불을 걷고 벌떡 일어났다. 잠이 홀랑 달아났다.
일약 스타가 된 재현은 갑자기 몰아치는 스케줄과 인터뷰, 광고에 정신이 없었다. 흐지부지 연락이 끊겼을 뿐 계약 만료가 되지 않은 탓에 회사에 다시 불려갔다. 사장의 말을 듣자 하니, 희윤이 제작사 측에 거액을 후원한 것 같다고 했다. 이게 키스 한 번 값이라면 재현의 입술은 얼마인 걸까. 재현은 그녀가 과하게 선심 썼다는 걸 알았다. 너 그동안에, 사모님 만났니? 확신을 갖고 묻는 사장의 말엔 부정했다. 그런 거 아니고 알바 하던 가게 건물주여서 몇 번 인사했어요. 전부 밝히진 않았지만 거짓말도 아니었다. 다만 사장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제대로 인사도 못 한 채 주연의 집에서 나와 숙소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만난 멤버들이 눈물을 글썽였다. 주인공인 재현은 얼떨떨했다. 막연하게 상상하던 건 맞는데, 하나도 와닿지가 않았다. 코하루가 아닌 재현으로 드라마를 찍은 탓에 예명까지 바꾸었다. 그토록 코하루로 성공하고 싶었는데, 재현이라는 이름으로 스타가 됐다. 열심히 살았던 과거 행적까지 전부 알고리즘에 떴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런 우중충한 드라마가 정말 뜰 줄이야. 어떻게 알고리즘에 엮인다고 해도, 혹평만 받고 망할 줄 알았는데. 매화 재현의 연기를 칭찬하는 댓글이 가득이었다. 여기 주연 배우는 처음 보는데 연기가 아니라 진짜 한별이 그 자체 같네요. 천천히 읽어내리다 괜히 부끄러워 이불을 덮어썼다. 마침 희윤에게 메시지가 왔다. 거봐. 될 만한 것만 골라 한댔지. 그에 답장으로 무어라 보낼지 한참 생각했다. 왜 그러셨어요? 그날 아무것도 안 했잖아요. 따져 물을 건 많았지만 굳이 할 필요 없는 말이었다. 감사합니다. 다섯 글자 적어 보냈다.
드라마 마지막화가 업로드 된 날, 어느 유튜브 계정으로 영상이 하나 올라왔다. 이재현 실체. 자극적이기 짝이 없는 제목이었다. 영상을 재생하면 부스럭대며 카메라가 흔들린다. 음악방송 대기실로 보이는 곳, 구석에서 몰래 찍은 듯한 앵글이었다. 이내 화면 속엔 바닥만 내리 나오고, 오디오에서 남자들의 고성이 울려 퍼진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들리진 않았지만 싸움의 현장인 듯했다. 내내 초점을 바닥에 두고 있던 카메라가 1분이 지날 무렵 부스럭대더니 싸움의 주인공들을 선명히 담았다. 재현이 거칠게 달려가는 모습. 그리고 또 잠시 암전이더니, 뒤로 밀려 나가는 다른 그룹 멤버가 보였다. 반대편엔 꼿꼿하게 서 있는 재현의 다리만 담겼다.
상대 그룹 멤버가 재현을 친 반동으로 밀려났다는 사실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서 있는 재현이 얼굴을 감싸 쥐고 있다는 사실도. 묘하게 짜깁기된 영상은 꼭 재현이 상대 그룹을 폭행한 듯한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그 그룹은 이미 대세 반열에 자리매김했다. 팬덤의 크기나 여론몰이가 상대가 되질 않았다. 해당 방송 이후로 재현의 그룹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도 재현이 가해자라는 주장에 보탬이 됐다.
여기저기 거짓 폭로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평생 일본에서 살아온 재현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화룡점정으로 재현이 스폰 덕분에 떴다는 글이 올라왔다. 아마 드라마 제작사 전 관계자인 듯했다. 자기는 퇴사했다며 진작 찍어둔 사원증까지 인증한 덕에 그 글은 기정사실화됐다. 어쩐지 너무 갑자기 떴더라. 더럽다. 순식간에 재현의 웹드라마 댓글창이 악플로 도배되었다. 해명할 기운도 나지 않았다. 그래. 내가 무슨 성공을 하겠어. 역시 재현이라는 이름은 쓰면 안 되는 거였나. 비관하는 마음만 커졌다.
감당할 수 없었고,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일본으로 돌아가겠다 통보하고 도망가듯 짐을 쌌다. 숙소까지 찾아와 재현을 말리던 사장에게 연신 죄송하다고 했다.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았다. 현실이 너무 버거워서 다른 생각이 안 들었다. 이 나라에 누가 나를 기다리고 위해주고 있을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짐을 다 싸고 여권을 챙기면서야 떠올랐다. 내가 자기 작품의 주인공이랬던 사람. 이런 얘기를 쓰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 텐데. 새벽 세 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냅다 집으로 찾아갔다. 연락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휴대폰은 꺼 놓은 지 오래였다.
버젓이 알고 있는 비밀번호를 누르는 대신 초인종을 눌렀다. 뭔가 넘어지는 듯 쿵 소리가 현관문 너머로 들리더니 이내 쾅쾅거리는 발소리가 다가왔다. 누구세요 한 마디도 없이 벌컥 문이 열렸다. 잠 한 숨 자지 않은 듯 벌겋게 충혈된 눈동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부릅뜬 눈이 재현을 노려보다가, 이내 힘이 풀렸다. 손에도 힘이 풀린 듯 현관문 손잡이에서 미끄러졌다. …들어와. 세 음절에 순순히 발을 들여놓았다. 그토록 익숙하던 방 안에 잔뜩 경직된 몸이 들어앉았다. 찾아와놓고 입을 열 생각을 않았다. 겁에 질린 얼굴이 주연의 정신을 갉아먹는 것 같았다. 시선을 재현의 턱 끝에 두고 겨우 먼저 운을 뗐다.
…왜 이제 와.
올 수가 없었어.
지금은, 올 수 있어서 온 거야?
와야 되니까 왔어.
…왜냐고 안 물어보고 싶은데.
굼뜨기만 해 보이는 주연은 이런 쪽에선 눈치가 빨랐다. 일교차가 아무리 커졌다고 해도 아직은 여름의 끝물인 늦여름 새벽에, 두꺼운 점퍼와 양말까지 꼭꼭 챙겨 신고 냅다 찾아온 재현. 불길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아니, 안 해.
나 일본으로 돌아가.
뭐 하자는 거야?
이제 그만할래.
나랑은, 나랑도 그만하고 싶어?
재현이 시선을 틀어 허공을 내려다봤다.
…그만하고 싶어.
몇 달 새 바짝 야윈 뺨. 퀭한 눈동자. 웃을 때마다 사랑스럽게 접히던 눈가의 살집은 내린 지 오래였다. 만나기만 해 보라고 벼르고 있던 주연의 마음은 재현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무너졌다. 당장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벼랑 끝 야윈 뒷모습에 차마 손을 댈 수 없었다.
그거 도망가는 거야.
도망가는 거 맞아.
…코하루.
고마웠어. 정말로, 미안해. 연락 안 해서.
못 한 거잖아.
아니야. 할 수도 있었겠지. 내가 부족해서 그래.
니 탓 하지 마, 제발…….
알겠어.
알겠어, 주연아. 너무 순순히도 주연의 말에 고개 끄덕인다. 옅게 웃어 보인다. 주연이 고개를 떨궜다. 눈도 마주칠 수 없었다. 이럴 때 화내야지. 내 말을 언제 이렇게 잘 들었다고. 억지로 웃는 건 내 앞에서 안 했잖아. 애처럼 따지고 싶었다. 그럼에도 고집부리지 못했던 것은, 재현이 답지않게 어른처럼 굴까 봐. 그러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온통 거짓인 이재현. 트집잡을 구석을 남겨두지 않는 이재현. 꼭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날 재현을 떠나보낸 뒤 대본집이 사라진 걸 알았다. 그게 꼭 마치, 더 이상 날 감당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주연이 독립영화 난춘의 각본을 쓰기 열흘 전 일이었다.
*
갤럭시프린스의 게릴라 공연이 시부야 공원 야외 광장에서 열렸다. 재현은 길게 내려와 펄럭이는 셔츠 자락을 추스르며 무대를 내려갔다. 티켓을 사지 않고도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버스킹과 비슷한 자리였다. 근처를 오가던 사람들이 호기심에 몰려들었다.
이럴 때면 재현은 잠시라도 춤추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잠깐 쉬는 시간이 생기면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관광지인 도쿄 한복판에 몇 걸음 걸러 마주치는 한국인 중에, 날 알아보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어쩌지. 손가락질하고 돌을 던지고, 한국에 돌아가 해저 쓰레기장에 내던져진 재현의 거짓 가십에 낚싯줄 걸어 끌어올리면 어쩌지.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다. 과호흡이 오려는 걸 애써 가다듬었다. 마지막 한 곡이 남은 때였다.
휘청이는 몸을 겨우 가누며 의자에 앉았다. 잠시 호흡을 고르고 있는데 덥썩 손목이 붙들렸다. 무식한 악력에 고개를 들었다. 앞머리 반절은 땀에 젖은 주연이 숨을 몰아쉬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축축한 손바닥 탓에 손이 미끄러졌다. 몇 번이나 고쳐 잡았다. 잘 나지도 않는 땀이 흥건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건지. 놀라울 만큼 약해지는 순간에만 나타나는 게 운명의 장난질 같았다. 지가 백마 탄 왕자라도 되나. 프린스는 나인데.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뭔데.”
“할 얘기 있어.”
“지금? 미쳤냐?”
“아니. 기다릴 거야. 끝나고 도망가지 말고 나 봐.”
“내가 언제 도망간대?”
“어. 그거 하루 특기잖아.”
오늘 도망가면, 공연 때 가서 하루의 체키 백 장 살 거야. 나랑 사진 백 장 찍고 싶지 않으면 말 들어.
막무가내인 게 어릴 적이랑 똑같다. 재현은 주연의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봤다. 왜 그런 얼굴을 하지. 주연에게서 제 얼굴을 겹쳐 보았다. 방금까지 무대 위에서 벌벌 떨며 노래하던, 트라우마에 잠식된 그 약해빠진 얼굴. 제가 받았던 손가락질이 꿈에 나올 때마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잊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처럼, 이주연도 내가 도망갈 것 같을 때마다 날 찾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걸까. 불쌍하다. 우리는 왜 이렇게 불쌍하지. 나는 그럴만한 이유라도 있지, 너는 왜. 진짜 나 같은 거 하나 때문에 이렇게 됐나. 잔정과 연민은 동의어. 재현은 뭉그러진 마음이 다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알겠어. 안 도망갈게.”
“…진짜지.”
“어. 원래 도망가야 되는 거 아는데.”
“…….”
“나 바보잖아. 그래서 아직도 이렇게 살잖아. 너도 보일 거 아냐.”
“멋있어.”
“됐어. 안 통해.”
“…진짠데.”
멤버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사와무라가 제지하지 않는 걸 보니 진작 주연과 얘기를 끝낸 듯했다. 멤버들만 당황한 낯으로 사와무라와 재현을 번갈아 바라봤다. 재현이 반대편 손으로 제 손목을 쥔 주연의 손등을 잡아냈다. 나 무대 설 거야. 보고 있어. 보고 실컷 비웃어. 재현이 잡힌 손목을 빼냈다. 주연의 손아귀 힘이 맥없이 풀렸다. 문득 재현은 저만큼이나 주연이 안쓰러웠다. 그렇게 성공하고도 내가 아쉬웠나. 도쿄에서 날 찾아다닐 정도로.
한 집에서 부대꼈을 적 장난으로 깔았던 위치 추적 어플의 존재를 잊었을 리 없다. 핸드폰을 바꾸면서 계속 갱신했으니까. 솔직해지는 법을 잊었던 재현이 문득 고해했다. 독백이었다. 사실은, 이주연이 날 구하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고향에 돌아와서도 내내 미아가 된 기분이었어. 무인도에서 연기를 피우고 구조요청을 하는 조난자처럼 미약하게 남겨둔 SOS였어. 인정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다녀올게.”
주연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스물한 살 코하루는 어떤 마음으로 무대를 올랐었지. 어렴풋이 기억이 날 것도 같았다. 어떤 것도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던 그때.
재현이 무대를 마치고, 정리하고, 동료들과 인사를 나눈 뒤 사와무라에게 양해를 구하고, 따로 집으로 향해 화장을 지우고, 다시 나와서 약속 장소인 공원까지 나오기를 주연은 내리 기다렸다. 장장 서너 시간 동안 일정 없는 한량처럼 내리 재현의 꽁무니를 쫓았다. 그마저도 시험이라면 거뜬히 통과할 자신이 있었다. 저를 찾는 전화는 죄다 거절했다. 무슨 내용일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벤치에 걸터앉은 재현은 불붙이지 않은 장초 끝을 입에 물고 짓이기고 있었다. 이미 반절은 축축하게 젖어 자꾸 푹푹 꺾였다. 별로 피우고 싶지도 않아 보였다. 긴장을 달래려는 하나의 장치로 보였다. 가라앉은 눈에선 일말의 긴장감도 보이지 않았지만. 주연은 이것 또한 세월이 쌓은 연력인가 싶었다. 화장을 지운 재현의 맨 얼굴이 가로등 불빛에 말갛게 비쳤다. 어떻게 이렇게 그대로지. 주책 같은 감상을 넣어둔 주연이 목을 가다듬을 동안 재현이 먼저 물었다.
“할 말이 뭔데.”
“일찍 물어보네.”
“급한 사람이 먼저 말했어야지.”
고개를 틀어 주연을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곤 픽 웃었다. 입가에 옅게 주름이 패였다. 젖살이 빠지며 새겨진 선 중 하나였다.
“내가 먼저 말 꺼냈으면 별로 안 듣고 싶었을걸.”
“되게 아는 척하네.”
“실제로 잘 아니까.”
재현이 꼭 서너 시간 동안 주연을 방치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시간 동안 들을 준비를 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전에 했던 말, 진심이야.”
“뭐가.”
“하루를 데려가겠다는 거. 같이 작품 하자는 거.”
“누구 맘대로 날 데려가.”
“가게 된다면 하루 맘이겠지.”
“말장난해?”
재현이 미간을 좁혔다. 짐짓 넘어가지 않으려는 방어막이다. 주연은 그 수가 읽혔다. 그저 마주 웃었다. 아쉽지 않은 사람처럼.
“가고 싶어질 거니까.”
“자신감 넘치는 건 변하질 않았네.”
“딱히?”
어깨를 으쓱한 주연이 돌연 일어서더니 나란히 앉아있던 재현의 앞에 와 섰다. 자신 없으니까 이러는 거야. 영문 모르는 얼굴로 주연을 바라보던 재현의 얼굴이 이내 당황에 질렸다. 주연이 냅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야, 뭐 하는 거야. 재현이 뒤로 몸을 물렀지만 나무 벤치에 등을 기댄 모양새일 뿐이다.
“부탁할게. 제발 나랑 작품 해 줘.”
“야, 빨리 일어나. 이주연!”
재현이 황급히 주연의 어깨를 붙들어 당겼다. 끌려 올라올 리 없었다. 다리로 떡 버티고 있어 역부족이었다. 재현이 몇 번이고 낑낑대며 옷자락을 끌어 올렸다.
도우카오네가이시마스. 슈진코니낫테구다사이.
제발 부탁이에요. 주인공이 되어 줘. 주연에게서 제법 자연스러운 억양의 일본어가 새어 나왔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손아귀에 힘이 빠졌다. 멍하니 주저앉아 주연을 내려다봤다. 천천히 주연의 고개가 들리고, 눈이 마주쳤다.
“…일본어는 언제 공부했어.”
“자신 없어서 뭐라도 하려고. 하루는 필요 없다 하겠지만.”
“…난 주인공 못 해.”
“내가 만들어 줄 거야.”
“기억 안 나? 나 한국에서 쫓겨났어.”
“도망간 거지.”
“아무튼, 어떻게 다시 가.”
“그럼 다른 데로 갈까?”
“그런 말이 아니잖아.”
질린 얼굴의 재현을 바라보던 주연이 담담히 말했다. 줄 게 있어. 내리 메고 있던 크로스백에서 얇은 책을 한 권 하나 꺼냈다. 그대로 재현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걸 눈앞으로 들어 올려 글자를 읽어내린 재현이 다시 주연을 바라봤다. 벌겋게 실핏줄 터진 눈가와 입술이 달싹였다. 이거 뭔데? 뻔히 알면서도 물었다.
暖春. 주연의 첫 작품 각본집이었다.
재현의 수면제. 때로는 각성제. 꼬박 지새우는 밤동안의 동거자. 간혹 터져 나오는 밑바닥 푸념을 들어주는 말동무. 후회와 원망을 질척하게 발라놓은 화풀이 대상. 갈 곳 없는 사랑을 쏟아부었던 반려자.
“하루는 일본어로 봄이라는 뜻이지.”
“…….”
“나한테 봄은 늘 따뜻했어.”
“…….”
“한 번도 어지러운 적 없었어.”
그러나, 반쪽짜리 작품. 주인공이 부재한 이야기. 한 번도 재현이 나오지 않지만, 재현이 주인공인 주연의 봄.
이걸 완성하려고 봄을 네 번이나 그냥 보냈어. 하루가 있어야 해. 주연이 재현의 손을 쥔 채 각본집 첫 장을 넘겼다. 정갈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재현에게.
“난춘을 새로 쓸 거야. 완성 시켜서 세상에 보여줄 거야.”
“…….”
“할 수 있지, 코하루.”
할 수 있냐고 물었다. 재현의 첫 작품이었던 봄을 지우고, 새로 봄을 쓸 수 있겠냐는 소리로 들렸다. 재현은 아직 머물러 있었다. 어지럽고 황망했던 그 시절에. 벗어나지 못해서 매일 밤 주연의 이상을 돌려보며 꿈에 젖었다. 해리포터를 보고 호그와트에 가서 움직이는 계단을 뛰어넘는 상상을 했던 어린 시절처럼. 기차를 타고 널따란 초원을 지날 때 날개 달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찾았던 기억처럼. 그저 판타지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속았다 깨는 순간이 얼마나 참혹한지 다 알면서도.
속고 싶어졌다. 그럼, 평생 거기서 안 나오면 되잖아. 그냥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주연은 저 봄 안에 날 평생 잡아두겠구나.
“…싸인해 줘.”
어? 재현의 말에 주연이 멍하니 되물었다. 영문 모르고 동그랗게 치켜뜨는 눈이 우스워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계약서 써야지. 덤덤하게 대꾸한 재현이 찬바람에 코를 훌쩍이며 주머니에서 펜을 꺼냈다. 그 언젠가 누군가에게 처음 싸인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뒤로 습관처럼 가지고 다니는 펜이었다. 신은 지 좀 되어 얼룩진 운동화 앞코를 내밀었다. 이주연 감독님, 싸인해 달라고요.
얼결에 펜을 받아든 주연이 몇 초간 재현을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이 민망해 검지로 이마를 슬쩍 떠밀었다. 싫음 말고. 주연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재현의 발목을 천천히 쥐고 앞코에 펜을 가져갔다. 얇은 뼈대가 손바닥 가득 잡혔다. 빠듯하도록 충만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자꾸 웃음이 났다. 뭐가 웃겨. 재현의 타박에도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농구 슛 뛰는 로고 새겨진 빨간 조던에 웬 신인 영화감독 싸인이 새겨진 꼴이 구렸다. 웬 꼴값을. 낭만 미쳤네. 생각하면서도 재현은 자꾸만 웃음이 났다. 이주연의 오글거리는 영화에 주인공으로 손색 없었다.
“배우 님은 싸인 안 해요?”
“…이미 했잖아요.”
재현이 손가락을 들어 주연의 운동화를 가리켰다. 신지도 않았는지 아직 반짝거리는 하얀 에어포스 앞코. 별 세 개 짜리 코하루의 싸인. 나란히 서로의 싸인을 달고 있는 게 기가 막힌 광경이었다. 이거야말로 대박 토나오는 멜로 영화인데. 재현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 얼굴을 가만 올려다보던 주연이 문득 고개를 빼어 입을 맞췄다. 놀란 재현이 반사적으로 어깨를 떠밀며 빽 소리 질렀다.
“뭐 하냐, 지금?”
“키스하고 싶지 않으면 만나자고? 그게 말이 돼?”
“허, 참 나.”
재현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발칙하게 굴어놓고는 손 타는 고양이처럼 얌전하게 웃은 주연이 일어섰다. 그래놓고는 그새 다리에 쥐가 났는지 인상을 찌푸린 채 한쪽 허벅지를 붙들고 비틀댔다. 그 꼴을 본 재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가지가지… 고개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뚝이는 주연의 손을 붙들었다.
“…우리 집 요 앞인데.”
“아야… 어?”
“갈래?”
괜히 시선을 피하며 손톱으로 주연의 손가락 마디를 간질였다. 저녁 바람에 재현의 까만 머리칼이 흩날렸다.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도 폈을 곱슬모. 다 숨기기엔 역부족인지 세수할 적 젖었을 구레나룻이 구불거렸다. 주연이 힘 빠진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툭 튀어나온 뼈마디를 꾹꾹 눌렀다. 내맡긴 손이 아무렇게나 팔랑거렸다. 그림자 아래에서도 칠한 것처럼 벌게진 귓불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시떼루-”
“…어?”
“라고 한 거지, 지금?”
재현이 돌아봤다. 이번엔 주연이 시선을 피했다. 귀가 빨갛게 익어 있었다. 언제는 아이시떼루라고 백 번 말해도 아무 감정 없다며… 어린 주연이 허세 부리던 게 생각나 웃음이 났다. 내리 손에 들고 있던 장초를 아까운 줄도 모르고 떨어뜨렸다. 그래봤자 이미 처참히 꺾인 참이었다. 담뱃잎 냄새 밴 손으로 뜨거운 뺨을 쥐었다. 별로 힘들이지 않았는데 고개가 돌아왔다. 숨을 한 모금 삼켰다. 독한 양주를 스트레이트로 넘기는 것처럼. 문득 아득한 곳에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공원을 지나는 여고생 무리가 왁자하게 떠드는 음성 사이로 어울리지 않는 감미로운 노래가 흘렀다. 마지막 키스는 담배 맛이 났어. 씁쓸하면서도 아련한 향기… 그러나 이건 마지막도, 담배 맛도 아니다.
이제는 대답하지 않아도 대답이 된다는 걸 알아. 재현이 몸을 기울였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코끝이 폭신한 뺨에 눌렸다.
맑게 갠 시부야 밤하늘 아래서 서울의 비 냄새가 났다.
봄비였다.
暖春 코하루,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