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은 좋고 싫음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호불호가 뚜렷한 사람은 셀 수 없이 많다지만 문제는 표현해야 성이 차는 성격을 지닌 것. 그에 딸려 오는 평가는 최고보다는 최저인 순간이 대부분이었다.
그 형은 오지랖이 너무 넓어. 아무개들이 떠든다. 큰 호응 없이 휴대폰 스크롤을 쓱 내리는데 동의를 바라는 칭얼거림이 온몸에 덕지덕지 붙는다. 설득이라는 말로 포장된 섣부른 강요는 얄팍한 논리로 만들어져있다. 넌 그렇게 생각 안 하냐? 새내기 때는 선배들한테 따박따박 대들었다가 16학번 단체로 집합 당했다잖아. 직접 목도하지 못한 주제에 소리가 크다. 이재현과 딱 반대인 이주연은 공허한 눈으로 고개를 한 번 까딱인다. 그래? 난 잘 모르겠던데. 그러면 또 주절주절. 허공에 떠도는 소음들에 넌더리가 난다. 본래 이주연이라는 사람은 타인의 소문에 동요하지 않으나 나서서 부정하지도 않는 사람인데. 아무래도 이재현을 닮아간다고 생각한다. 오지랖은 사방팔방 뻗치면서 본인에 관한 추문은 넓은 아량으로 무시하나 제 바운더리에 속한 인간들 문제는 꼭 자기 일처럼 나서고야 마는 그 성격을. 술자리서 저격당해 소주를 바가지 째로 마셔놓고는 술이 약한 동기의 잔은 꼬박 뺏어 마시는 형을.
너는 꼭 아프면 카톡을 씹더라.
24년 동안 감기 치레 한번 않던 몸에 부하가 걸린 듯 일주일 내리 누워있을 때 이주연 옆을 지킨 건 이재현이었다. 체온계를 냅다 입에 꽂고 다이소에서 사 온 쿨시트를 엉성하게 뜯어 여기저기 구겨진 채로 이마에 붙인 뒤 부엌에 들어가 식은 죽을 다시 끓이겠다고 하는데 인덕션 조작 방법을 몰라 기어코 아픈 사람을 일으키게 만드는…
야 가서 누워 있으라니까…
타는 듯 뜨거운 볼에 밭게 붙은 다른 볼의 온도가 낮다. 환장하도록 환상적이었다. 환자는 따뜻한 곳에 있어야 한다며 보일러를 한껏 올려놓은 집에 30분 간 있었으나 여전히 서늘했다. 저와 반대로 차가운 몸에 본능처럼 이끌려 죽부인처럼 꼭 끌어안고 있는데. 문득 이 얼음장 같은 몸에 죄책감이 아닌 뿌듯함을 느꼈을 때. 이주연은 살짝 절망했다.
좋아해달라고 한 적 없어요.
그냥 혼자 좋아하다가 접을 거야.
굳은 다짐에 금이 쩍하고 갈라졌다. 마침내 종말이었다
1.
항간에 떠도는 소문 일부를 인정한다. 이재현이 오지랖이 넓다느니, 부담스럽게 군다느니. 이주연이 차린 인간관계에 반해 이재현의 행동은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야 어디 가냐? 이를테면 조심성 없이 팔로 목을 끌어당기는 지금과 같은 행동. 선배의 말이 곧 법이오,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사체과가 아니었다면 은근슬쩍 몸을 비틀어 거리를 벌렸을 테지만 이주연은 실기 장학생이라는 타이틀을 따고 당당히 장학금을 받고 들어왔고 같은 체육특기생 출신 이재현과 뻔선뻔후가 되는 건 당연한 순례였으며 다른 사람도 아닌 뻔선에… 두 학번 위 선배에게 당당히 대드는 16학번의 지팡이 이재현을 밀어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주연은 재현과 달리 현실에 대한 순응도가 높은 편이었으므로 얌전히 "수업 들으러 가요." 답했다.
수업 끝나고는 뭐 하는데?
아무것도 없어요.
그럼 끝나고 영화 볼래?
그냥 거기서 말을 멈췄어도 이주연은 못 이긴 척 응했을 테다. 허나 이재현은 꼭 제 행동거지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한두 마디 더 붙이는 습관을 지녔고.
수희가 영화 보러 가자는데 나 공포 영화는 질색이라. 아무튼 보기로 한 거지? 내가 예매해놓는다. 끝나면 전화해.
네.
목적을 달성한 이재현이 서서히 멀어진다. 이재현의 잔상을 조금 더 바라보다 이내 하늘을 올려다봤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이럴 때마다 마음이 울었는데 이제는 뭐. 짝사랑 4년이면 이재현을 읽는다고. 저 말고도 아는 사람이 천지 삐까리인 양반이 구태여 주연과 거래한 까닭은 주연이 공포영화에 젬병이어서다. 군인 시절에도 여름휴가를 나오면 꼬박 저를 데리고 공포영화를 보러 갔으니까. 아무도 같이 안 봐준다는 건 언제나 핑계에 불과하겠지만 영문학과 수희와 애간장 태우는 카톡을 주고받는 건 사실일 테다. 대수롭지 않게 머리를 끼적이다 정문과 가장 가까운 인문관을 향해 짧은 한숨을 토했다. 자그마치 4년이다. 이재현 때문에 뱉은 헛숨의 길이가. 마구 난도질당해 무던해졌다지만 갈 곳 없는 마음은 언제나 한숨이 되어 허공에 흩뿌려진다.
2.
야구부도 아닌 양반을 동방에서 처음 봤다. 당시 야구부 주장이었던 사람의 사촌인 이재현은 이주연이 저보다 어리다는 사실을 듣기 무섭게 말을 놨다. 아 네가 주연이었구나. 사체과가 그리 대단하신 학과도 아닌데 멘토 역할 할 게 뭐 있냐고. 학교에서 길 잃을 때, 술 마시고 싶을 때. 두 가지 경우에만 호출을 허용한다는 카톡과 함께 사라진 제 뻔선은 보기보다 더 뻔뻔했다. 과방에서 보기 어려운 인간이 꼬박 동방에 들어와 소리 키고 쿠키런에 정신을 팔았다. 오가는 대화라고는 나 삼선에서 짜장 먹을 건데 너 뭐 먹을래. 정도? 체중 조절을 위해 도시락을 싸 왔다며 거절하면 질린 얼굴을 했다. 딱 그 정도의 사이였다.
야구 좋아하세요?
응 아니.
응이면 응이고 아니면 아닌 거지. 응, 아니는 뭐람. 따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습관처럼 고개를 설렁설렁 끄덕였다.
넌 좋아해?
네.
당연한 답을 들은 이재현은 이주연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거뒀다. 그래? 잘됐네. 오래 좋아해라.
야구에 관심 없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 이재현은 오직 동방에서만 살았다. 훈련장에 어슬렁거리거나 학교 대항전 경기를 직관하러 오거나 하지 않았다. 주장인 제형과 나누는 대화들 속에 야구 용어가 문장 내에 얽히고설켜 있는데도 잘 알아듣는 걸 보면 아예 문외한은 아닌 것 같은데. 참 이상한 사람이다. 그 이상한 사람이 오늘 경기는 보러오지 않았을까 확인하는 이주연 역시 동족임에 틀림없는데. 먼 산을 바라본답시고 관객석을 훑는 눈에 이상한 인간으로 규정 당한 세 글자가 눈에 띄는 일은 없었다.
공을 처음 잡았을 땐 떠오르는 라이징이었고, 라이징이라는 수식어를 고교 넘버원으로 바꾸는 데엔 긴 시간이 들지 않았다. 이주연하면 야구부, 야구 잘하는 애로 통용됐으니까. 그 때문에 약간의 오기가 생긴 걸까? 헐벗은 쿠키로 열심히 불구덩이를 질주 중인 이재현에게 냅다 티켓을 건넸다.
뭐냐?
야구장 티켓이요.
그니까 이걸 왜 주는데.
조별과제 여기서 해요.
창업의 이해 교양 과제를 왜 야구장에서 하는데. 내가 구단을 설립할 위인도 아닌데. 얼굴에 딱 쓰여 있다. 황당무계한 동공을 애써 무시한 채 티켓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비록 주연이 코치에게 주연이 너 연애하면 우리 팀 사기 떨어지니까 인스타 팔로우 하는 헛짓거리는 삼가라는 얼토당토않은 경고까지 들어가며 받은 티켓은 빈자리로 보답 받았으나, 그다음 날 8회 초에서 이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3대0으로 개박살나고 있던 상황이었던지라 괜스레 모르는 척을 하게 됐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 표를 준 것 아니겠는가. 어제는 분명 폼이 좋았는데 오늘은 컨디션 난조로 다 무너졌는데 하필 오늘 오냐. 나중에 물으니 날짜를 착각했단다. 경기 잘 봤냐는 물음엔 지루해서 넷플릭스나 봤다고 하는데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팀 버스를 마다한 채 이재현과 경사진 오르막길을 걸었다.
야, 주연아.
네.
너 치는 것도 좀 잘 치냐?
진작 들은 잔소리와 똑같은 래퍼토리를 겪게 될 것을 직감한 채 자체적으로 노이즈 캔슬링을 하려던 찰나 이재현은 와다다 말을 쏟아냈다. 아니 아까 워킹데드 봤는데, 졸라 무섭더라. 별안간 대화 주제를 휙 바꾸곤 양팔을 위아래로 쓰다듬다 제 주소를 읊었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좀비가 나타나면 알지? 우리 집으로 튀어 와서 나 데려가야 돼. 난 살고 싶단 말이야. 피처럼 붉은 석양 아래서 대뜸 약지를 쭉 펼쳐 올렸다. 약속해, 나 아직도 졸라 무섭다. 어이없는 사고방식에 조소가 피식 새어나갔다. 뻔뻔하다 못해 엉터리에 제멋대로인 새끼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었다. 네, 연습할게요. 말뿐인 언약에 맑게 웃은 이재현이 실은 인천에서 알아주는 고교 야구팀 소속이었단 점, 손목 부상으로 야구를 관두었다는 점, 그래도 야구를 잃지 못해서 모교 야구팀 후배들 자세를 자주 봐주러 간다는 사실은 타인을 통해 들었다. 그날은 이재현과 제법 친해진 뒤였으며 이 영화 별로 안 무서우니까 같이 보자는 이재현에게 속아 컨저링을 형 손 하나에 매달려 눈 감고 2시간 내내 주님께 기도문을 올린 날이었다. 지하철 내내 저를 놀리던 이재현이 저를 집에 데려다주고는 간 곳이 한창 사귀던 여자 친구의 집이었다는 것도, 오른편에 앉은 제게 불편하게 왼손을 건네준 이유가 오른쪽 손목 부상으로 파스를 일 년 내리 달고 사느라 그런 것도, 그래서 파스를 붙이는 날이면 날마다 주위에서 선물 받은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 것도, 하필이면 그날 이주연이 선물해준 향수를 뿌린 건 우연이었으며 이주연은 충분히 이재현과 친해졌다고 여겼음에도 이재현의 여자 친구는 소개 받지 못하는 바운더리 외곽 사람인 걸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 타율이 오른 만큼 손에 박힌 굳은살을 괜히 뜯었다.
3.
무덤까지 앉고 들어갈 수 있는 비밀은 세상에 몇 없다. 세월이 직조할 수 있는 거라고는 눈가 주름과 비 오는 날이면 날마다 쑤시는 무릎 관절 정도다.
잘 참아온 마음이 불현듯 알코올과 함께 터져버렸다. 이재현을 잡고 꽤 추잡스레 울었던 것 같다. 답지 않게 술을 진탕 마신 날. 이제는 무던해진 것 같다 여긴 마음이. 실은 상처가 고여 돌멩이 하나 던져도 잠잠해 보일 만큼 깊이 파여 버린 거라고. 당시 이재현이 공을 들이던 썸녀가 주연이 3차를 달리던 술집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고. 이주연네 테이블에서 잔을 깨 손가락이 베였다. 해당 소식을 접한 이재현이 부리나케 후시딘과 방수 대일밴드를 사 왔다. 이주연이 가장 좋아하는 세팅 안 된 짜파게티 같은 머리 대신 좋아하는 여자 앞이라고 캡 모자 위에 후드 집업까지 눌러쓴 채로 걸어오는데 마음이 일렁였다. 차라리 못 알아봤으면 좋았을 텐데. 이주연은 귀신같이 이재현을 알아보고. 이재현도 이주연을 알아보고 도망친 이주연을 따라 나온 이재현 덕분에 댐이 터져 질질 짜고야 말았다. 분노를 표출하는 이재현, 세상 떠나가라 까마귀 같은 웃음소리를 내는 이재현,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 괜히 했다고 울상 짓는 이재현은 알지만. 애인 앞에서 쑥스럽다는 듯이 웃는 이재현은 초면이었으므로 내성이 없었다. 이주연이 선택할 길은 도망뿐이었다.
나 잠시 담배 좀.
피우지 않는 담배를 핑계로 나온 게 화근이었다. 잠시 주연의 자리에 앉았다가 "형 근데 이주연 담배 피워요?" 창민의 물음에 호기심이 발동하여 주연을 따라 나온 재현은 가끔 그날을 탓하고는 했다.
야, 너 담배 죽어도 담배 안 피운다며.
잔뜩 골리는 말투가 점점 개미 기어가는 소리만큼 줄어들더니. 야, 너 울어? 금세 데시벨을 높였다. 타고난 오지랖 덕에 친구의 웬수를 아버지의 웬수 생각하듯 하는 이재현은 여기저기 잦은 다툼을 일으켰지만 단 한 번도 우는 사람을 달래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끌어안고 달래줬다. 세상에서 가장 빈번히 볼 수 있는 위로 장면은 대개 로맨스 영화에서 나오기 때문에. 등을 토닥여준다든지 어릴 적 웅변대회에 나간 실력을 뽐내 뒤집어지는 언변을 구한다든지 해야 했는데. 그저 주연의 머리통을 어설프게 쓰다듬었다.
야, 왜 우냐…
어깻죽지에 매달려 울던 주연의 얼굴은 떨어져 확인해보니 운 사람치고는 상당히 성난 표정이었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도 그렇고, 늘 고요했던 눈동자는 탁하게 젖어 들어 침을 꿀꺽 삼키게 됐다.
저 형 좋아해요.
한 번의 입맞춤은 강경한 제 태도를.
… 이런 행동을 서슴지 않을 만큼.
곧바로 다가와 짓이기듯이 씹어놓고 간 아랫입술에 느껴지는 얼얼함은 주연이 받은 마음의 상처의 천분의 일 정도로 전이되어 느껴졌지만. 상처를 주고자 한 사람은 없고 받은 사람만 눈을 형형하게 뜨고 노려보는데. 얼이 탄 이재현은 그제야 첫 헛숨을 토했다.
뭔… 시발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주연아.
늘 "야", "너"로 통용된 이름을 처음 들었다. 좋아하는 여자의 일터에서 버젓이 도둑키스를 당해 열이 올랐던 재현은 헛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재현은 제 바운더리에 속한 인물을 매우 중요시 여기는 타입으로 썸이 더 진행되어 여자 친구가 있는 남자친구의 신분이었다면 한 대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기어코 약간 튀어나온 앞니를 혀로 쓸었다가 얼굴에 주먹이 꽂혔지만 이주연은 태연했다.
야, 너 진짜 미쳤냐. 난 너한테 좋아해달라고 한 적 없어.
세상에서 가장 밉보일만한 대사가 뭔지 알고 하는 사람처럼 군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유기견 센터에 봉사 가는 주제에 인간에겐 한없이 냉혈한인 이재현. 이재현 싸가지는 알아줘야 돼. 그딴 소리에도 군말 않고 제 할 일을 마저 하는 이재현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이주연은 그의 태도가 일종의 자기방어에 지나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좋아해달라고 한 적 없어요.
그냥 혼자 좋아하다가 접을 거야.
보답 받지 못할 마음. 먼저 보답 따위 바라지 않는다. 선을 그어버린다. 이재현은 또다시 한숨 쉬었고 이주연은 한숨 쉬는 대신 이재현의 숨을 먹어버렸다. 세게 깨물어 피 맛이 느껴지는 부위를 찾아 핥고 또 핥았다. 나도 아프니까 형도 아팠으면 해. 초등학생만도 못한 어리숙함이었다.
4.
한 달 내리 이주연을 피해 다닌 보람 없이 과방에서 마주쳤다. 이재현은 야구부 동방에만 기생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과방에 빈대처럼 붙어있는 후배들이 이주연네 무리일 줄 꿈에도 몰랐다. 그동안 마주치지 않은 건 이주연의 사정을 진작 파악한 친구들의 지리는 스케줄 조정 능력 덕분이지. 이재현에게 뜻하지 않은 운이 작용해서가 아니었다는 걸 참 늦게 깨우쳤다. 썸녀와의 썸은 진작 깨졌다. 키스 사건 이후 이주연을 오랜만에 마주한 이재현은 이건 아니지 않냐며 성을 내기도 했으며 카톡을 모조리 씹고 잠수를 타다 말고는 태연하게 나타나 학식 먹자며 이주연을 휘둘렀고 종국에는 이주연의 자취방 천장을 보고도 배를 긁으며 라면 몇 개 처먹을 거냐고 묻는 지경에 이르렀다. 현실 도피와 순응을 잽싸게 이룬 것이다. 섹스는… 한 번 더 고여 있던 댐이 터져 일어난 불상사였다. 이번엔 세대 쳐 맞고 손절 당하나 싶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러 불상사가 겹쳐 둘은 몸을 자주 맞췄다. 전부 알코올이 동반된 불장난이었으나 이제는 다섯 번을 만나면 네 번은 몸을 섞었다.
웃긴 건 어느 쪽에서도 관계를 정정하지 않았단 점. 이재현이 공익으로 입대를 하고, 이주연이 머리를 밀고 이등병의 편지를 불렀을 때도. 야, 저 형 뭐냐? 군대 동기의 물음에 "그냥 아는 형." 신속하고 애매한 답을 내뱉은 건 운명의 한 수순과도 같았다.
5.
이주연의 훈련이 끝난 날이면 이재현은 가끔 글러브를 끼고 와 함께 캐치볼을 나눴다. 여러 개의 실밥으로 이루어진 작고 단단한 공. 실력 좋은 포수였다는 것이 헛소문은 아닌 듯 공에 실린 무게가 꽤 묵직했다. 그래서인지 꼭 다음날엔 파스를 손목에 휘감았지만.
형 너무 아파하니까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런 말을 뱉었을 때 잠시 마주친 이재현의 심연 덕분에 그만둘 수 없었다. 캐치볼을 한 날엔 꼭 몸을 붙여왔고 굳이 뒤로 돌겠다는 걸 애 먹어가며 얼굴 보고 하고 싶다는 변명 아닌 변명으로 이재현 옆에 붙어있었다. 손목도 안 좋은데 뭣 하러 무리하나 싶어서. 아침 상다리엔 꼭 국물이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이재현은 그 덩치를 하고서도 이주연의 보호를 받는 게 언짢은 듯 쉬이 이주연의 마음을 들췄다.
야, 너 아직 나 좋아하냐?
시도 때도 없이 빈정 상하면 물었다. 수줍은 얼굴로 주억이기엔 너무 멀리 왔다. 자주 답을 안 했고 마지막엔.
네.
한 템포 쉬더니.
이제 접을 거지만.
문장을 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는데 설렁탕에 기분이 땅에 처박힌 만큼 고개를 내리느라 이재현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아 그래.
최대한 덤덤한 척 내뱉는답시고 숨을 참느라 시뻘게진 얼굴은 확인하지 못했다.
6.
너 이주연 알아?
걔가 누군데.
이번 신예인데 드래프트에서 프로구단이 높은 값에 사 갔데. 걔들 원래 돈 안 쓰잖아.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새끼들이 거금을 썼다고. 얼마나 비싸게 팔릴지 감도 안 온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하나도 안 궁금한 정보를 주입 당해버렸다. 제아무리 은퇴한 자기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했지만 제형은 자주 야구를 주제로 떠들었다. 요 근래에는 누가 잘 나간다더라. 그래도 너만은 못하지. 안 그래도 아는 코치님이 너 소식 묻는데… 다시 야구할 생각은 없어? 변화구를 넣어봤자 도착점은 한곳으로 귀결됐다. 배트를 잡긴 커녕. 손목이 쑤시는 탓에 정자세로 누워 쿠키런을 하는 것조차 힘이 드는데 무슨 공을 던지겠다고. 아흔 네 번째 권유에 재현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형이나 야구 많이 해라. 그랬다.
야구에 제 인생을 쏟았다. 보답 받지 못한 이들이 많은 판에서 이재현은 야구에게 보답 받았다. 경기 흐름을 읽는데 타고난 재능이 있어 자연스레 포수를 맡게 됐다. 그토록 사랑하던 공을 자주 만지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를 주도한다는 것이 포수의 매력이라 그런지 잔뜩 빠져서는 더 이상 못 던지겠다는 새끼들 잡아다가 밤늦게까지 연습을 했다. 드래프트가 있기 직전 시즌에 배트로 손목을 가격 당하는 부상을 당했다. 포수라면 자주 공에 맞고 드물게는 배트에 맞기도 해 별 생각 않고 있었는데 다시는 공을 쥐지 못할 거라는 판정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운이 좋다는 말과 운이 없었다는 말을 동시에 했다. 배트에 맞아 손목이 부러진 건 운이 없었지만 손목이 깔끔하게 부러진 편이라 붙는 데는 지장이 없을 거랬다. 하필 신경이 잔뜩 포진한 부위라 뼛가루가 연골을 찢어놨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경우는 아니라 운이 좋았다고.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라 숨을 참았다. 그렇게라도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태어나 공을 잡고 배트를 잡은 것 말고는 뛰어난 구석이 하나도 없었던 이재현은 야구부에서 구르던 짬밥으로 체대 입시를 강행했다. 군기 잡겠다는 사유 하나로 무수한 폭력이 인정되는 판에서도 곧잘 이의를 제기하던 이재현은 대학에 가고 나서도 그랬다. 연대 책임은 불합리하다며 다섯 시간 동안 홀로 체육관에 엎드려 징계를 받았다. 손목이 부러지다 못해 이대로 사라지는 게 나을 것처럼 아팠지만 신념을 져버리는 것보다야 손목을 잃는 게 나았다. 잃은 신념은 손목 부상과 함께 보내줘야만 했던 신념 하나면 충분했다.
어쩌다가 이주연의 경기를 보게 됐다. 뻔선뻔후인지 뭔지. 고리타분한 대학 이벤트를 이행하겠답시고 이주연을 기다리는 동안 쿠키런을 하다 지긋지긋해져 바람을 쐬던 찰나였다. 귓가를 스쳐 지나간 바람은 이재현이 가장 그리워하던 여름밤 바람이었다. 그곳에서 운동장을 뛰던 이주연에게서 어쩌면 이재현 자신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맨날 뺑뺑이 돌고는 했는데 저 지랄은 프로 구단 들어가기 직전인 애도 하네. 이제 더는 대학 야구팀에 머물러있지 않아도 되는 걸. 우정이랍시고 버티고 있는 미련함이 누구와 똑 닮았다. 이주연은 모르겠으나. 이재현은 자주 생각했다. 너와 나는 좀 닮았을지도 모른다고.
이재현은 자신의 손목에 대해 떠벌리고 다니지 않았다. 동정은 휘발성이 강한 대신 그만큼 강한 죄책감을 들고 오기에 부상 사실을 아는 건 고등학교 동창, 사촌인 제형이 형, 부모님 그리고 이주연 정도였다. 어디서 들었는지 추궁해도 시종일관 모르쇠. 학식을 같이 먹으면 꼭 제 식판과 재현의 식판을 겹쳐 들고 나갔다. 키나 덩치나 거기서 거기인 애가 무심코 저지른 값싼 동정이라 생각했다. 저러다 말 거라고.
병원에서 처방해준 손목 보호대는 쓸데없이 무겁고 살을 짓눌려 잘 안 했다. 딱히 손목 보호대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은 적이 없는데 이주연은 어디서 주워 왔을지 모를 손목 보호대를 주며 이렇게 말했다. 차고 다녀요. 비싼 거래요. 저를 위한 생색임을 모를 리가. 그냥 차고 다니라고 하면 안 차고 다닐 게 뻔해 수작질이었다. 그게 귀여워서 몇 번 차고 다닌 게 편해지는 바람에 종종 손목이 아프면 보호대를 찾았고, 이주연도 함께 찾는 날이 늘어갔다.
겨울이면 손 시리다 장갑을 사주고, 땀이 난다 안 차고 다니면 은근슬쩍 제 패딩 안으로 손을 넣었다. 이주연 패딩에 넣으면 손목이 꺾이니까 꼭 이재현의 패딩에 넣었다. 얕은 깊이에 커다란 이주연의 손이 튀어나와 하나도 안 따뜻해 보이는데도 걔는 자주 그랬다. 봄이면 함께 캐치볼을 하고 여름엔 조용히 여름용 보호대로 교체해주고 가서. 그럴 때마다 너 아직 나 좋아하냐 물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긍정해주는 얼굴이. 처음 입맞춤 당했을 때는 죽도록 패고 싶었는데. 이젠 종종 먼저 입을 맞추기도 하며 살짝 물면 속도를 낮춰달라는 암묵적인 사인이 되어 시종일관 떡칠 때마다 물게 만들어놓곤…
이상한 버릇을 들여놓고 너는 가겠다고. 날 안 좋아하겠다고. 난 이제 막 네가 좋아졌을 지도 모르는데. 너는 또 날 7년 전으로 되돌리고.
울분이 삭혀지지 않아 잔뜩 술을 먹고는 네 번호를 차단했다. 야구도 너도 보답해줄 것처럼 굴더니 결국 나를 버리는구나. 야구에게 버림받은 날 이후로 오랜만에 서럽게 울었다. 버려지는 것에는 도무지 면역이 생기지 않았다.
7.
1년 계약해둔 자취방을 복학한 친구에게 양도하고 제형의 집에 들어갔다. 제형은 졸업한 지 올해로 2년이지만 여전히 대학가 근처에 살았다. 게다가 정문이 아닌 후문 근처라 이주연과 마주칠 확률도 적었다. 학교 간판이 체대인 덕에 체대생들이 쓰는 건물은 죄다 정문에 자리 잡고 있어 후문은 이공계 인간들 천지였다. 자꾸 이주연 카톡 차단을 풀었다가 다시 차단했다가 번복하기에 아예 꺼두고 총질에 집중했다. 군대에서 총질을 하지 않아 그런지 아는 총이라고는 배그에 나오는 게 전부였지만 그에 한정해서는 누구보다 총잘알, 배그잘알이었다. 졸업이 머지않아 고작 5학점을 신청한 개백수와 다름없는 재현을 향해 제형은 가끔 위아래로 걔를 훑다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 애가 어쩌다 저리 됐을꼬… 제가 키운 것도 아닌데 옛날부터 유난을 떤다.
휴대폰을 꺼둔 채로 사니 주연은 물론 동기들과도 연락이 잘 안됐다. 무슨 일 있냐는 동기들의 물음에 머스마들끼리 뭔 연락이냐고 바빠서 못 봤다고 말을 돌렸다. 그러면서 학식은 죽어도 안 먹으려고 하는데 눈치 챌 새끼들은 진작 눈치 채고도 남았다. 니들이랑 아깝게 왜 바깥 음식을 먹어야 하냐며 성내던 새끼가 엽떡 조지러 가자하질 않나. 보다 못한 상연이 재현을 불러냈다.
재현아 너 진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네, 형. 제가 무슨 일 있을 일이 뭐가 있어요.
그래… 그럼 됐는데 너도 그렇고 주연이도 그렇고 요새 몰골이 말이 아니라 마음이 쓰여.
주연이? 이주연 왜요? 모르겠어, 걔도 괜찮다고는 하는데 이번 주 내내 훈련도 못 갔대. 너 주연이랑 친했잖아. 몰랐어? 알았을 리가… 심장이 덜컹거리는 듯했다. 한창 시즌 준비할 새끼가 몸은 왜 아픈지. 이제 마음도 접었다면서 사랑이 망했으면 공이라도 잘 던져야지. 더플 백을 고쳐 매고 뒤를 돌아섰다. 형 저 몸이 안 좋아서 가볼게요. 나중에 연락할게요!
8.
야, 너 요새 타율 많이 늘었더라.
네. 연습 많이 했어요. 형이 지켜달라고 했으니까…
9.
2주간 꺼둔 탓에 방전되어 충전하는데 30분을 썼다. 1분에 한 번씩 전원 버튼을 누르다 드디어 화면에 불이 들어오고 나선 곧바로 부재중 목록이 잠금 화면에 쏟아져 내렸다. 드문드문 보이는 여사님, 누나, 몇몇 동기들을 제외하고는 온통 이주연이었다.
형 애나벨 개봉했대요.
보러 갈래요?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요?
형 어디 아파요?
이재현
재현이 형
수희랑 만나기로 한 거예요?
그래서 저 피하는 거면 연락해줘요
부탁할게
형
재현이 형
형
형 나 아픈 것 같아
이틀 전 카톡을 마지막으로 연락이 없다. 어제 한 번, 오늘 아침에 한 번 부재중이 와있긴 했지만. 상연의 증언도 그렇고 꼭 아프면 휴대폰 볼 생각을 못하는 게 이주연이다. 덩치는 저만해서는 쉽게 골골대는데 티를 안내서 사람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그래도 형은 알아주잖아…
몸이 아프다는 면죄부로 대뜸 말을 놓고는 웃어 보이는 애를 제 쪽에서 버린 것 같아서. 나도 너 따위 신경 안 쓸 거라는 다짐이 무색하게 뜀박질에 속력을 더했다. 부러진 게 다리가 아니라 손목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주연이 어미 고양이 찾듯이 저를 따라다니던 시절에 자취방을 옮겼던 탓에 비밀번호는 진작 0913이었다. 형도 1234 같은 거 하지 말고 0115로 바꾸는 거 어떻겠냐고 할 땐 됐다고 콧방귀를 뀌었는데. 너한테 들키는 게 쪽팔려서 자취방 비번은 여전히 1234지만 대신 휴대폰 비밀번호를 바꿨어. 약국에 들려 세상에 납품된 감기약이란 감기약은 모조리 사재기했다. 폐부가 찢어질 정도로 달리니 어느새 문 앞. 무의식적으로 0913을 눌렀다. 이제 도어락 뚜껑을 아래로 내리기만 하면 되는데. 틀렸다는 소음이 날까 두려워 도어락 빛이 다할 때까지 우두커니 기다렸다. 이주연이 걱정되는 것과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주연을 대면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지만… 몇십 분째 바깥을 서성였다.
10.
네? 재현이 이제 여기 안 살아요. 혹시 연락 안 받으셨어요?
바꾸라 바꾸라 잔소리를 해도 바뀌지 않던 1234가 통하지 않기에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0115를 입력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문 앞에 버려졌다. 그럼 그렇지. 피식 헛웃음이 샌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어디에 가면 이재현이 있을까. 괜히 신발 앞코를 땅바닥에 갈던 중 처음 보는 남자가 재현의 집에서 나왔다. 이재현의 지인이라기엔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 이재현… 씨 집 아닌가요? 물으니 자초지종 설명하는 얼굴은 제가 더 당황스럽다는 얼굴이라 빠르게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벗어났다.
이재현이 잠적하였다. 그것도 2주를. 3일 째까지는 사정이 있겠지 싶었고, 일주일째 되는 날엔 혹시 어디 크게 다친 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 선배들한테 문자를 돌렸다. 오전 내내 자기들도 모른다는 답신만 받다 오후가 되어서야 영훈에게서 오늘 재현이 수업에 나왔으며 밥도 같이 먹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왜 연락을 안 보지. 타인의 입을 빌려 추궁을 부탁하고 싶었으나 이주연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었다. 이주연은 이재현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으므로. 그래서 무작정 이재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에 공포영화 보기로 했다던 여자애랑 잘 돼서 그런 건지. 아님 다른 일이 있는 건지. 더 이상 나랑 지지부진한 관계를 유지하기 싫다고 어플 깔았다가 잘못 걸린 남자한테 다시 봉변이라도 당한 건 아닌지. 영훈은 재현이 잘 지낸다며 걱정 말라 타일렀지만 불안감을 해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열흘 째 되는 날엔 이쪽이 심한 감기를 앓기 시작했다. 정문 앞 벤치에 앉아 종일 이재현을 기다린다고 찬바람을 오래 쐐서 그런지. 코치님께 호되게 깨진 것보다 이재현이 보고 싶었다. 너는 아프면 말 좀 해. 나만 눈치채준다고 이런 거. 꼭 그렇게 말했으면서 필요할 때는 옆에 없단 사실이 너무나 속상해서 카톡을 남기고 잠이 들었다. 형 나 아픈 것 같아. 싸가지 없게 반말을 툭 전송해놓고는. 정작 보고 싶다는 카톡만은 보내지 못한 채로.
형 꿈을 꿨어. 그라운드에서 내 공을 받아주는 형을. 형이 야구를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내 공은 받아주지 않았을까 싶어. 그렇게라도 내가 던진 무언가가 형 손에 들어가길 바라.
11.
이마 위로 느껴지는 이물감에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냉장고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녹슨 수전이 삐걱대는 소음이 귓전을 스친다.
일어났냐?
……재현이 형?
어어… 야 너는 꼭 아프면 카톡을 씹더라.
몇 주간 흔한 안부 메시지 않고 잠수한 건 자기면서 되레 나무라는 게 영락없는 재현이다. 나 형 앞에서 처음 아픈 건데. 무슨 소리냐 타박할 힘이 없다. 흔들리는 인영을 바라만 보다 결국 몸을 일으켰다.
형 몸이 왜 이리 차요?
겨울이잖아.
일어났으면 저기 약 먹어. 검은 봉지를 향해 턱짓한다. 야 그 전에 밥 좀 먹자. 이거 어떻게 열쇠는 거야? 한솥 담긴 죽을 가리키며 묻는다. 친구 집에서 인덕션 몇 번 켜보긴 했는데 이건 좀 이상하네. 안 켜져. 애꿎은 인덕션을 쾅쾅 친다. 툴툴대는 입술을 빤히 바라보다 재현의 손을 덮어 전원 버튼에 갖다 댄다.
오, 들어왔네.
형 어디 있었어요.
집에 있었지.
거짓말하지 말고… 제발……
………
재현의 어깨에 입술을 묻곤 중얼거렸다. 난 형이… 형이… 병신처럼 문장 하나 완성하지 못하는 이주연이나 이주연이 문장 하나 구사하지 못하는 동안 우두커니 서 있는 이재현이나 겁쟁이들의 방어기제에 시간만 죽어간다. 기껏 켜둔 인덕션은 아무 반응이 없자 도로 꺼졌다.
이주연 너는.
꾹꾹 속에 담아뒀던 진심을 구토한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 안 버릴 거지.
제가 형을 왜 버려요.
…접을 거라고 했잖아.
이주연이 처음 고백했던 당시를 상기시킨다. 그때만 해도 제 감정 하나 주체하지 못하는 애송이였는데 언제 이렇게 커서 날 애 먹이고 있지. 진심을 말하는 게 이렇게 어려웠나. 치기 어린 마음은 모두 소진한 지 오래다. 귓가가 홧홧한 게 느껴진다. 조심스레 제 어깨를 감싼 주연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접지 마…
사랑하지 못해 죽을 것 같이 연신 입술을 핥는다. 침묵은 곧 허락을 의미한다는 걸 안다. 재현아. 갈망해온 그 이름을 읊조리며 서로의 숨을 공유함으로 욕망을 울부짖는다. 못 이기는 척 긴장해 빳빳해진 혀를 살짝 깨물었다. 그걸로는 긴장이 풀리지 않아 목을 쓸어내리다 침대 위로 끌어당겼다. 키스해도 돼? 해놓고 묻는 건 무슨 싸가지야. 더 하면 감기 옮을까 봐. 내가 약을 몇 개 샀는데. 근데 아까부터 자꾸 말을 까… 구두로 허락 받은 이상 더는 지체할 거리가 없었다. 4년 만에 쟁취한 것이 어디 갈 세랴, 두려워 집요하게 입술을 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