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은 세상에 이혼이 별건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별것 아니다. 하지만 고양이가 인간으로 변하는 건 별것이 맞다.
“저기……”
“가까이 오지 마, 으아아아악!”
확신하건대 아주 먼 미래에서도.
고양이와 나
재현이 이혼 조정 신청서를 접수한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함께 살던 신축 오피스텔을 정리하고 원룸으로 넘어온 지는 이 주째인데, 고작 일 년 살았으면서 대폭 줄어든 집 크기가 영 적응되지 않았다. 하다못해 현관문에 달린 도어락마저 반응 속도가 느린 것 같았다. 물론 최고로 적응되지 않는 건 따로 있다.
“먀-옹.”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문을 열자마자 달려와 다리에 몸을 스치는 검은 고양이. 그냥 고양이는 아니고, 하루에 한 번씩 여섯 시간 동안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고양이다. 같이 산 지도 일주일씩이나 됐으니 이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오늘처럼 야근이라도 하고 오는 날이면 혼자 지내는 집에 동물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게 다가왔다. 살면서 고양이를 키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아니다, 성인 남자로도 변하니까 키우는 건 아닌가.
재현은 가방과 재킷을 벗어 두고 냉장고에서 탄산음료를 꺼냈다. 침대 앞으로 터덜터덜 걸어가 쓰러지듯 앉자 고양이가 대각선 위치에 있는 책상으로 올라갔다. 게이밍 컴퓨터 옆에는 태블릿이 세워져 있고, 그 앞으로는 블루투스 키보드가 있다. 솜방망이 같은 발이 검은 화면을 툭 치자 하얀 메모장이 떴다. 재현이 설정해둔 첫 화면이었다.
고양이가 익숙하게 자판을 발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누르는 대로 문장이 완성됐다.
―많이피곤
“어, 엄청. 머리 붙이면 바로 잘 수 있을 듯.”
―그래도씻고
“네가 나 자는 동안 사람 돼서 씻겨주면 안 돼? 진짜 존나 피곤해서 그래.”
―그러면내일밥은누가해
“너 그거 요리 중독이야.”
재현은 태블릿 화면을 올려다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하루 중에 저녁밥 짓는 게 제일 중요한 고양이라니. 현실감이 전혀 없는데 현실이 그랬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제가 단단히 미친 건가 싶었는데 이제는 웃음도 나지 않았다.
노란 눈이 심심한 반응을 보이는 재현을 가만히 응시하다 침대 위로 펄쩍 뛰었다. 털이 촘촘하게 박힌 꼬리가 그의 귀와 목을 연거푸 건드렸다. 먀아아아옹. 길게 늘어지는 울음소리가 꼭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 같았다.
“알았어, 이것만 다 마시고 씻을 거야. 근데 화장실 모래로 목욕했어? 바닥에 모래가 왜 이렇게 많아.”
“…….”
“지 불리한 건 대답 안 하냐?”
재현이 형평성을 따지려 뒤돌자 검은 몸이 잽싸게 책상 의자 위로 옮겨갔다. 사람일 때는 느려 터졌으면서, 참나.
무엇이든 이름이 될 수 있는 길고양이는 인간으로 변할 때마다 ‘주연’으로 불렸다. 하지만 자유자재로 변하는 능력을 얻으려면 평범한 인간과 한 달 동안 같은 공간에서 생활해야 했다. 인간과 함께 사는 고양이 중에는 길고양이 출신이 많으니 쉬워 보일지 모르지만, 하루에 여섯 시간은 무조건 인간이 되어야 해 한 달씩이나 정체를 숨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성묘가 되면서 호기롭게 동거인을 찾아 나선 주연은 실패의 쓴맛을 여러 번 봤다. 당장 데려갈 것처럼 예뻐하길래 집 앞까지 졸졸 따라갔더니 뒤늦게 난감한 얼굴로 선을 그어버리는 건 기본이요, 운 좋게 집까지 들어가도 사나운 동물이나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아이들이 있어 스스로 도망쳐 나오기도 했다. 한 번은 꽤 오랫동안 정체를 잘 숨기며 생활하고 있었는데, 항상 집이 비는 시간에 인간으로 변해 있다가 다시 고양이로 돌아가려 할 때 현관문이 열리는 바람에 비명을 들으며 창문 밖으로 뛰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재현이 부피가 큰 택배 상자를 집 안으로 옮기느라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을 때 달려 들어간 건 몇 번째 시도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쯤 되면 간을 보는 건 사치였다. 주연은 승부수를 던졌다. 저를 귀여워하면서도 내쫓으려는 재현의 앞에서 인간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원조 인간은 당연히 사색이 됐다. 다가가며 말을 걸려고 하자 급하게 뒷걸음질 치다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잠깐 정신을 잃기도 했다. 주연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사정을 나열했다. 아까 보셨다시피 제가 고양이인데요, 인간으로도 변할 수 있거든요…… 모든 고양이가 다 그런 건 아닌데요…… 아무튼 제가 한 달 동안 인간이랑 같이 살아야 해서…… 근데 생각보다 저를 잘 안 주워가더라고요…… 솔직히 외모로는 빠지지 않는데…… 저 집안일도 잘하고, 그러니까 한 달만 키워보시면 안 될까요. 저 진짜 말 잘 들어요.
재현은 제 눈치를 보는 고양이 인간을 보며 지나치게 생생한 꿈이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판타지 영화가 성행한다지만 이건 좀.
이젠 살다 살다 고양이가 사람으로 변해서 같이 살자고 하는 꿈도 꾸네.
꿈 아니고 진짠데……. 제가 증명할게요.
시간이 흘러 주연은 그 말을 지켰고, 재현은 비명을 지르며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바들바들 떨며 돌아왔다. 노란 눈을 가진 검은 고양이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재현을 맞았다. 그렇게 동거가 시작됐다.
주연은 주로 오후 두세 시쯤에 인간으로 변해 집 청소를 하고 재현의 퇴근 시간에 맞춰 저녁을 만들었다. 정시에 퇴근하면 인간의 모습으로 마주 앉아 함께 식사하고, 늦게 퇴근하면 고양이의 모습으로 맞이하는 식이었다. 재현은 그런 주연을 볼 때마다 묘한 감정을 느꼈다. 아내 대신 수컷 고양이 인간이라니.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주연의 비밀을 끌어안고 어영부영 지내다 보니 주말이 돌아왔다. 주연은 정오가 되기 전에 일어나 재현과 함께 점심을 먹고 키가 엇비슷한 재현의 옷을 입었다. 최근에 재밌어 보이는 영화가 개봉했더라고 슬쩍 말을 던졌더니 순순히 영화관에 가자는 대답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들뜬 마음이 얼굴에 여실히 드러났다.
“그렇게 좋냐?”
“저 영화관 들어가 보는 건 처음이에요.”
“사실 나도 엄청 오랜만에 가는 거긴 해.”
재현과 아내는 영화관에 가는 것보다 집에서 빔프로젝터로 철 지난 영화를 보는 걸 선호했다. 물론 영화가 목적이 아닐 때도 있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좋았다.
“팝콘 먹을래?”
“팝콘?”
“짭짤하고 달달해서 맛있어. 원래 영화 볼 때 저런 거 먹어, 콜라랑.”
“먹어볼래요.”
영화관에 도착한 재현은 소란한 주위를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한 주연에게 모바일 매표기로 티켓 뽑는 방법을 알려주고 매점 키오스크로 팝콘과 콜라를 주문하게 했다. 주연은 어색해하면서도 무탈하게 임무를 완수했다. 재현이 잘했다고 칭찬해주자 입꼬리를 올리며 팝콘을 푸는 직원을 뚫어지게 보았다. 사람 그렇게 빤히 보는 건 실례야. 아, 이게 습관이 돼서 저도 모르게. 어쩔 줄 몰라 하다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주연이 퍽 귀여워 보여, 재현은 크게 소리 내 웃었다. 그 이유는 알려주지 않았다.
영화는 심각한 분위기 속에 가벼운 유머 코드가 적절히 섞여 있었다. 러닝 타임이 긴 편인데도 지루하지 않았다. 주연은 눈치껏 따라 웃으며 옆자리를 수시로 곁눈질했다. 귀를 쫑긋 세워 대사보다 큰 웃음소리를 담았다. 아주 가끔 뾰족한 송곳니가 반짝 빛났다. 허벅지를 치던 손이 팔걸이에 올려둔 팔을 툭툭 건드렸다. 무릎까지 톡 맞닿을 때도 있었다. 주연은 그런 순간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몰랐다. 자꾸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게 되고 조금 열이 오르는 것도 같았다. 인간이라면 상대를 의식할 때마다 응당 이런 기분을 느끼며 사는 걸까. 관찰이 일상인 고양이로 살아온 시간이 길어서 그런지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그래도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재현을 선택한 건 잘한 일이었다. 앞으로 알아가야 할 게 차고 넘쳤다.
영화가 끝난 후에는 주연에게 남은 시간을 고려해 미리 봐둔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재현은 컵 두 개를 나란히 놓고 먼저 물이 찬 컵을 주연의 방향으로 밀었다.
“오늘 어땠어? 다닐 만하지?”
“…시간이 빨리 안 가도 괜찮을 거 같아요.”
“어? 왜?”
“그냥……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요.”
한 달이 지나면 쫓겨나려나. 사실 주연은 영화관을 빠져나온 순간부터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결과적으로 저를 거둔 재현 덕분에 비로소 원하는 경험을 하게 된 건 좋았다. 하지만 제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었다.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니 반려 고양이의 모습으로 곁을 지키는 방법도 있기야 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오늘 같은 하루는 의미가 없다. 집에 박혀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건 내키지 않았다. 그와 같은 모습으로 살고 싶었다. 느리게 자판을 두드리는 대신 목소리와 목소리로 소통하고 싶었다.
“한 달 채우려면 아직 보름은 남았는데, 충분하지 뭐.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고.”
“한 달이 지나고 나면요. 우리는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을까요?”
주연은 진지했다. 풀이 죽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재현의 눈에는 말이다. 갑자기 저런 얘기를 왜 하지. 재현은 당황했지만 아닌 척 작게 헛기침했다. 그 당시엔 꿈이라고 믿기도 했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받아줬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주연이 약속한 기간을 종종 잊게 됐다. 청소도 해주고 밥도 챙겨주고 고양이로 변해 있을 땐 귀여워서 그만.
“그러니까 너는, 고양이보다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거지?”
“…어려울까요?”
“아니 뭐, 네가 사람으로 사는 거야 네 자유긴 한데…….”
재현이 말끝을 흐렸다. 이혼을 결정하고 임시방편으로 구한 집이라 재산이 정리되면 더 큰 집으로 옮겨갈 생각이긴 했다. 그래도 새로운 동거인은 신중하게 결정할 문제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반인반수가 뒤통수를 칠 것 같진 않다만, 지금처럼 얹혀사는 건 곤란했다. 현실적으로 돈은 벌어올 수 있을까. 빡세게 교육시킨다고 한들 혼자 내보내는 건 불안할 테고, 잘난 얼굴을 무기로 너튜브나 별스타로 띄워봐야 할지 모른다. 상념이 가지처럼 뻗어나갔다.
“일단 나도 생각 좀 해볼게. 너도 알다시피 남자 둘이서 살기엔 집이 좀 좁잖아.”
“…….”
“그렇다고 해서 칼같이 나가라는 건 아니고. 시간 많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자.”
주연은 대답 대신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현의 반응이 긍정과 부정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 알 수 없었다. 기분이 처져 입을 꾹 닫고 있는 동안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많이 먹어, 부족하면 더 시켜줄게. 재현이 중앙에 놓인 접시를 주연의 방향으로 조금 밀었다. 그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주연은 털이 서는 걸 느꼈다.
먼저 선을 그은 건 아내였다. 그냥 우리 따로 살자. 그리고 재현은 그 말이 못마땅했다.
부부가 따로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럴 바엔 이혼을 해. 그게 네가 원하는 거 아냐?
금기어 같은 단어를 거침없이 뱉으며 과거를 곱씹어봐도 ‘무언가 잘못됐다’라는 생각이 들 만한 일은 없었다. 물증 없는 의심은 몸집이 불어난 의심을 낳을 뿐이었다. 재현은 남들과 다른 길을 걷는 게 싫었다. 하지만 현실 감각이 가시처럼 돋았다. 깨진 컵을 원 상태로 돌려놓는 게 더 힘들다는 사실쯤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았다.
회식이 예상보다 길어졌다. 건강상의 이유로 퇴사하게 된 직원이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 직원과 유독 사이가 좋았던 직원이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셔 인사불성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눈물로 끈끈해진 분위기 속에서 재현은 빠른 속도로 부딪치는 술잔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살 좀 찌라는 소리를 주기적으로 듣게 하는 얇은 손목이 꺾였다. 끊어 마시려고 해도 상사들의 시선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자정을 훌쩍 넘겨서야 택시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도로는 뚫려 있었지만 속은 꽉 막힌 것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자 진동이 고스란히 흡수됐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노란 불이 꼭 고양이 눈 같았다.
「오늘 회식이니까 저녁 안 차려도 돼」
주연은 재현이 출근 전에 남기고 간 쪽지를 보고 또 보았다. 평소보다 더 느지막하게 인간으로 변해서는 때가 타도록 쥐었다 놓았다. 회식이라는 게 뭔지는 알지만, 하루가 끝나갈 때까지도 소식이 없을 줄은 몰랐다. 휴대전화가 없으니 연락할 길도 없었다.
주연은 자정이 되자마자 다시 인간으로 변해 재현의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었다. 현관문을 열고 조용한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투명한 문이 온몸으로 가로막고 있던 밤바람은 차가웠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차도 앞으로 나갔다. 그러고 보니 재현이 어느 방향으로 오는지도 몰랐다. 어디에서 일하는지도, 어떤 일을 하는지도, 무얼 타고 출퇴근하는지도 몰랐다. 모른다는 건 괴로운 거구나. 그래도 기다리는 일을 멈출 순 없었다.
발가락이 꽁꽁 얼어붙어 감각을 잃어갈 때였다. 택시 한 대가 속도를 줄이며 다가왔다. 주연은 근처에서 멈춰서는 택시를 유심히 보았다. 뒷좌석 문이 느리게 열리더니 재현이 내렸다. 형! 목소리가 발보다 빨랐다. 뻣뻣해진 다리가 삐걱대며 앞으로 움직였다. 차 문을 닫은 재현의 시선이 그에게로 가 닿았다. 알코올에 짓눌린 눈이 크게 뜨였다.
“너……”
“왜 이제 와요.”
“왜 사람이야?”
그건 주연이 듣기에 정말이지 생뚱맞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재현의 입장에서는 합당한 질문이었다. 주연은 이 시간에 인간이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형이…… 언제 오는지 모르겠어서요.”
주연은 순순히 재현의 궁금증부터 해소해주었다. 반쯤 풀린 눈과 비틀대는 걸음걸이를 외면하기 어려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허리를 감싸자 기다렸다는 듯 체중을 싣는 몸에선 오만 가지 냄새가 났다. 그만큼 복잡한 시간을 보내고 왔다는 뜻이었다. 이렇게까지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인지라 궁금증보다는 걱정되는 마음이 앞섰다.
“기다렸어?”
“네.”
“왜?”
“원래 같이 살면 챙겨주는 거잖아요. 형이 저한테 그런 것처럼.”
재현이 고개를 들어 주연을 보았다. 키가 엇비슷해 검고 깊은 눈이 가까웠다. 숨결이 느껴졌다. 덥다. 그는 그 정도에서 생각을 멈췄다. 왜인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 시선도 반대편으로 넘겼다. 옷을 벗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나 오늘은 안 씻고 바로 자고 싶은데.”
“어……”
“오늘은 너무 피곤해. 술도 엄청 마시고 이야기도 엄청 많이 들어서 힘이 하나도 없어. 손 떨리는 것 좀 봐.”
재현이 신빙성을 더하고자 파르르 떨리는 왼손을 높게 들었다. 주연의 눈이 손을 좇아가다 한 곳에 꽂혔다. 네 번째 손가락에 난 희미한 자국. 좁은 간격을 두고 나란히 뻗은 선 두 개. 실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흔적의 존재를. 다만 그 의미를 몰랐을 뿐이었다. 뒤늦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깨우쳤다.
“알겠어요. 자요.”
주연은 재현이 곯아떨어진 후에도 그것을 아주 오랫동안, 끈질기게 바라보았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헤어지지 말자.
태블릿 화면 속의 연인은 제법 행복해 보였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과 빈틈없이 맞잡은 손이 그들의 관계를 명확히 했다.
“재밌어?”
화장실에 다녀온 재현이 무릎을 모아 앉은 주연의 옆자리로 복귀했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로맨스 드라마인데, 주연이 며칠 전부터 집중해서 감상하길래 슬쩍 꼈다. 주변인들로부터 내용을 전해 듣기나 했지, 제대로 본 적은 없었다.
“그냥, 볼 만해요.”
“그러면 엄청 재밌지는 않다는 뜻인데.”
“형은 저런 사랑 해 봤어요?”
불쑥 치고 들어온 질문에 재현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같이 산 지 삼 주째가 되더니, 고양이 출신치고는 질문의 깊이가 깊었다. 불필요하다 싶을 정도로. 그는 한참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예전에.”
“어땠어요?”
“뭐가 어때?”
“헤어졌을 때요.”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지만 동요는 없었다. 이혼을 결정하자마자 빼버린 반지의 모양이 벌써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함께한 시간이 소중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원해 후회가 남지 않을 정도로 몰입해야 마무리도 깔끔해지는 법이다.
“우리도 끝이 있었구나. 어쩔 수 없네. 잘 지내라. 딱 그 정도.”
“…….”
“안 되겠다 싶을 땐 놓는 게 맞아. 내 경험상.”
“그럼 끝이 없을 순 없을까요?”
“뭐, 끝이 없는 관계도 있기야 하겠지?”
한날한시에 묻어달라는 부부도 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재현이 가볍게 웃으며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잠깐 한눈판 사이에 장면이 전환돼 있었다. 깨를 쏟던 커플이 비눗방울처럼 사라졌다.
“저는 형이랑 끝나고 싶지 않은데요.”
주연이 담담히 말했다. 제 말이 끝나자마자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아래로 울대뼈가 움직였다. 큰마음 먹고 전한 진심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는 일은 강한 끈기를 요구했다.
“우리는 좀…… 다른 경우 아니냐?”
“아, 그런가.”
“많이 다르지. 좀 다른 게 아니라.”
재현이 어색한 손짓으로 머리칼을 괴롭히는 동안 드라마가 끝났고, 주연은 고양이로 변했다. 먀—옹. 한참 낮아진 눈높이에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이제 재현은 고양이의 언어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오늘은 일찍 잘까?”
재현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등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한쪽 팔을 옆으로 길게 펼치자 어둠과 같은 색을 지닌 존재가 그리로 다가와 몸을 둥글게 말았다. 맞붙은 피부로 체온을 공유했다. 서로의 숨소리를 담았다. 이른 시간이 무색하게 누구도 쉬이 잠들지 못했다.
해가 중천에 있을 시간인데도 등과 허리에 닿은 온기가 거대했다. 다시 고양이가 아니라 여전히 인간.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시작이었다. 재현은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올리고 머리맡에 둔 핸드폰으로 달력을 확인했다. 뒤늦게 아, 하고 작은 탄성이 터졌다.
“주연아. 너 사람 됐다.”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흘렀나 몰라. 재현이 손을 뒤로 넘겨 주연을 툭툭 쳤다. 주연이 숨을 길게 내쉬며 목덜미에 머리칼을 비볐다. 협조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반응이었다. 아직 꿈나라에 머물러 있는 게 분명했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잠이 오냐?”
재현은 픽 웃으며 몸을 돌려 작은 머리통을 끌어안았다. 기분이 조금도 나쁘지 않았다. 오늘은 이혼 조정 기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