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한국분이세요?"
핸드폰 너머로 선명히 들리는 한국어에 순식간 긴장이 풀렸다. 고작 며칠이라고 해도 외국어라곤 전혀 할 줄 모르는 엄마를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느라 저도 모르는 새에 스트레스가 쌓인 것 같았다. 구글맵에서 찾은 한식당에 전화를 걸었더니 또 샬라샬라 영어로 받길래 더듬거리며 답을 하긴 했는데, 그래도 티가 났나보다. 기분이 나쁘기보다 알아채 준 것에 대해 안도를 느꼈다.
"아, 네. 한국인이에요... 그, 저 혹시 배달 주문도 되나요?"
"여긴 한국처럼 결제 시스템이 따로 없어서 어플로 주문하셔야 돼요. 앱 이름 알려드릴 테니 거기로 주문 해주실래요?"
아, 그러게. 어플을 깔면 되는데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이재현은 삼일 사이에 바보가 된 것 같았다. 답지 않게 허둥거리며 앱 이름을 메모장에 받아 적고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직원이 알려준 앱을 까니 처음 보는 낯선 음식들 사이 버거킹, 맥도날드 이런 게 눈에 띄었다. 앱 검색창에 korean food라고 적었다. 방금 전화를 한 식당 외에도 꽤 여러 개의 옵션이 떴다. 그래도 도와주셨는데, 거기서 주문하는 게 맞겠지.
"재현아, 시켰어?"
방금 막 옷을 편하게 갈아입은 엄마가 물었다. 분명 우리 어제까지만 해도 엄청 쌩쌩하고 재밌었는데. 오스트리아의 겨울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춥고 연휴라 사람이 미친 듯이 북적이는 데다가 문을 닫은 식당도 많았다. 원래 가려던 식당을 찾아 30분이나 트람을 탔는데, 손으로 휘갈겨 쓴 안내 메모와 함께 닫혀 있었다. 구글 사진 번역을 돌려보니 크리스마스 주간이라 일주일을 쉰다고 했다. 허무한 마음에 한참을 서서 네이버에 오스트리아 비엔나 부모님 맛집을 검색하던 재현을 보고 엄마가 먼저 그냥 숙소에 돌아가서 배달 음식을 먹자고 제안했다. 아 우리 그럼 한국 음식 찾아볼까? 분명 오기 전까지만 해도 호기롭게 어차피 5일이니까 컵라면 김치 통조림 같은 거 절대 챙겨가지 말고 무조건 외국 음식 먹어보자고 약속했던 것 같은데, 막상 한국음식을 떠올리니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 여기 진짜 별거 다 있다. 김치찌개, 순두부찌개, 사이드로 막 파전 이런 것도 있어."
재현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시키고 싶은 거 다 시켜, 엄마는 자기가 사줄 것도 아니면서 그런 말을 했다. 일단 추우니까 뜨끈한 국물에, 밥도 추가하고, 코리안 치킨? 치킨은 못 참지. 이것저것 담다 보니 30유로를 훌쩍 넘었다. 결제 버튼 누르기를 잠시 망설이다가 에라이 어쩔 수 없지 하는 마음이 앞섰다. 돈이 아깝다기보다 언젠가부터 여행을 가면 현지 음식만 맛보게 된 습관이 영 거슬려서 그랬다. 습관이라고 표현해도 될까. 그냥 여행 가치관이 그렇게 바뀌었다. 뼛속까지 한식파인데도 불구하고.
결제가 완료됐다는 안내창과 함께 45-50분 이상 소요될 예정이라는 문구가 떴다. 엄마, 거의 한 시간은 기다려야 될 듯. 밖에 눈 때문에 미끄러워서 더 오래 걸릴 거 같아. 여기도 배달할 때 오토바이 타나? 근데 길거리에서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모르겠다. 엄마와 나란히 침대에 누워 눈을 반쯤 감은 채 주절주절 별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눴다.
5박 6일의 짧은 일정, 내년이면 엄마의 환갑이기도 하고 언젠가 티비를 보다가 아들이랑 유럽 여행 한 번 갔다 오고 싶다고 했던 게 기억이 나서 크리스마스 연휴를 껴 연차를 몰아 쓰기로 결정했다. 유럽 어디 가고 싶은데? 후보로 나온 프랑스, 프라하, 스페인 등등 중에 가장 깔끔한 곳이 오스트리아라고 했다. 검색해보니 크리스마스 마켓이 엄청 예쁘기도 했고. 첫날은 짐을 풀고 간단히 시내를 구경하며 모차르트 마그넷과 유명하다는 초콜릿들을 샀다. 어제오늘은 패키지 투어를 신청해서 잘츠부르크와 할슈타트에 다녀왔다. 꽃할배 코스라나 뭐라나. 커다란 대성당 앞에서 사진도 여러 장 찍고 모차르트의 생가도 봤다. 클래식에 관해서는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데,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듣는 엄마의 모습을 보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피곤하지."
"아니 이 정도는 괜찮아. 오늘 저녁 먹고 푹 쉬면 되지."
"맞아. 그리구 이제 내일은 널널하게 다니면 될 거 같아. 어차피 생각보다 비엔나가 쫍더라."
원래 여행 스타일이라면 대충 구글맵에 맛집만 우르르 표시해놓고는 끌리는 대로 돌아다녔을 텐데, 엄마를 데리고 왔다는 책임감에 메모장 가득 빼곡히 일정을 적어놨다. 영어라면 그래도 조금 할 줄 알지만 여기서는 웬만하면 다 독일어를 쓰는 것 같길래 간단한 주문 멘트 같은 건 미리 번역기를 돌려 적어두기도 했다. 내일은 천천히 일어나서 유명하다는 카페에 가 브런치를 먹고, 오후에는 슈테판 대성당? 이름이 뭐 이렇게 어려워. 아무튼 거길 가면 됐다. 모레 오전에는 공항으로 출발을 해야 하니, 사실상 내일이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피로가 쌓여 몸이 슬쩍 으슬으슬한 것 같았지만 하루만 더 견뎌보기로 했다. 메모장을 훑어보며 다시 일정을 되새기는 와중에 배달어플에서 알림이 왔다.
Deine Bestellung ist auf dem Weg
뭐래는 거야. 알림을 클릭하니 지도가 떴다. 지도에는 숙소 위치가 표시된 것 같았고, 조그만 자전거 아이콘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엄마, 자전거로 배달하나 봐. 여기 실시간으로 볼 수도 있음."
오, 어디 봐봐. 진짜 자전거네. 아이고, 날씨도 추운데. 안 미끄러우려나. 근데 여기 밑에는 뭐라고 써 있는 거야? 엄마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또 다른 안내 문구가 작게 쓰여 있었다.
LJ ist auf dem Weg mit Deiner Bestellung und wird sie in ungefähr 5 Minuten bei Dir abliefern.
"5분 걸린다는 뜻인가 보네."
읽는 방법도 의미도 모르는 낯선 외국어 문장 속에서 숫자가 가장 먼저 눈에 띄어야 하는 게 당연한데, 이재현은 LJ라는 단어 이후로는 문장을 머릿속에 다 입력할 수가 없었다. 식당이 엄청 근처인가 보다, 그치. 엄마가 하는 말들이 뿌옇게 페이드아웃 되어 귓바퀴에서 웅웅거리는 것 같았다. 아니 잠깐, 진짜 LJ라고?
"엄마, 이 세상에 엘제이라는 이름은 많지?"
"갑자기 뭐라는 거야."
"그니까, 엘제이가 줄임말이잖아. 레오제이 뭐 이런 것도 있고."
"얘가 갑자기 왜 이래."
벨이 울렸다. 아니 5분 걸린다면서 왜 이렇게 빨리 와.
"뭐해, 얼른 문 열어줘."
갑자기 넋이 나간 재현을 엄마가 재촉했다. 재현과 엄마가 머무는 숙소는 주택 형식의 에어비앤비라서 벨이 울리면 그냥 대문만 열어주면 됐다.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고, 음식을 받고, 땡큐인지 당케인지 한 마디를 건넨 뒤, 다시 문을 닫으면 그만인데 그 일련의 과정이 평범히 흘러가지 않을 거라는 불행한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문을 향해 걷는데 심장이 쿵쿵 뛰었다. 긴장이 된 나머지 목덜미에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았다. 개무겁고 불편한 유럽식 주택 현관문, 도어락을 풀기 위해 자물쇠를 왼쪽으로 돌렸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 재현이형?"
문 앞엔 이재현이 아는 유일한 LJ, 이주연이 서 있었다.
얼굴을 반쯤 가린 머플러 위로 동그란 두 눈과 마주쳤다.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마치 이재현을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달려오기라도 한 사람처럼.
저 멀리 성당에서 종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막 오후 6시가 되었나보다. 종소리가 길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다.
Merry bad xxxing
이주연과 엄마가 구면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아니 그런 걸 떠올릴 새도 없었지. 오랜만의 재회치곤 무드가 하나도 없었다. 형? 재현이형? 형...? 넋이 반쯤 나간 재현을 보고 이주연도 무슨 npc처럼 재차 같은 말만 반복했다. 현관문 앞에서의 소란답지 않은 소란을 감지한 엄마가 다가오는 것으로 상황이 마무리됐다. 어머, 너 주연이니?
"이게 몇 년 만이야, 한 3년인가?"
벌써 세월이 그렇게 흘렀나. 불편한 재회에 엄마까지 끼어드니 정신이 더 없었다. 시선 둘 곳을 정하지 못해 이주연이 들고 있는 배달 가방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 그쵸. 너무 오랜만이죠. 잘 지내셨어요? 여전히 머플러를 목까지 올려 쓴 주연의 목소리가 윙윙 울렸다.
"재현이한테 너 외국 갔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그게 오스트리아였구나. 이재현, 너 왜 말 안 했어? 여기 주연이 있으면 미리 연락이라도 하지!"
연락을 하라고? 내가 어떻게 그래요. 따지듯 되받아치고 싶은 걸 꾹 참고 대충 고개만 저었다. 아, 몰라몰라. 음식 다 식어. 재현이 황급히 주연의 손에 든 배달 가방을 뺏을 듯이 낚아챘다. 얼른 줘. 너도 일하는 중인 거지? 빨리 가야 되지? 엄마, 얘 이렇게 오래 붙잡아두면 안 돼.
"네, 바로 이다음에 배달이 있긴 한데..."
이주연이 모처럼 눈치를 챙겼다. 그게 안심이 되면서도 또 마음 한켠에선 괜한 섭섭함이 스멀거렸다.
"근데 혹시 내일도 빈에 계시는 거 맞죠?"
뭐래는 거야. 눈치 쫌 챙겼다는 말 취소. 마치 자기도 어서 이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듯이 단칼에 거절하는 건 싫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들어 주연을 바라봤다. 두 눈이 완벽히 마주쳤다. 사실상 제대로 된 첫 조우였다. 얼굴을 반쯤 가린 이주연이 대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는 와중에도 재현은 자기의 눈동자가 엄청나게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주연의 질문에 엄마가 반갑게 뭐라고 맞받아치는 것 같았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주연은 재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엄마와 대화를 나눴다. 이렇게 머리가 긴 모습은 처음 보는 거 같은데. 제가 제일 잘 아는 눈인데도 살짝 긴 머리카락에 덮여 있으니 낯설게 느껴졌다. 피부가 더 탄 건지 분위기 자체가 조금 달라진 것 같기도 했다. 그냥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꺼멓게 입어서 그런가. 내가 아는 이주연은 꼭 어딘가 찢어지거나, 뜬금없이 반짝거리거나, 영문 모를 색조합을 하나씩 끼워 넣는 패션을 고수하는데. 재현이 제 맘속에서 움찔거리는 불편한 낯섦의 근원을 찾으려고 주연의 얼굴을 샅샅이 살피는 동안 몇차례 시선이 스쳤다.
***
구남친 그리고 엄마와의 동행은 어제 밤새 뒤척이며 걱정한 것만큼 어색하거나 이상하지 않았다. 아닌가, 이 상황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게 더 이상한 건가. 엄마는 아마도 재현이 느낄 부담감을 의식해서인지 그동안 궁금하거나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참았던 모양이다. 어느덧 빈에 산 지 3년이나 됐다며 이 동네는 완전 나와바리죠, 넉살 좋게 웃는 주연에게 끝없이 말을 걸었다. 주연은 귀찮아 하는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신이나 묻지도 않은 정보까지 줄줄 설명하기 바빴다. 여기서는 무당벌레랑 돼지가 행운의 상징이에요. 비엔나는 영어식 발음이고 여기식 발음은 빈이 맞아요. 아, 한국에서 알려진 비엔나 소세지는 사실 진짜 비엔나에서 온 게 아닌 거 아세요? 저 성당은 시내에서 제일 큰 성당인데 예전에 화제가 한 번 나서 양식을 완전히 바꿔서 재건했대요. 위에 전망대 예쁜데 한 번 올라가 보실래요? 아, 줄이 너무 기네요. 크리스마스라서... 그럼 그냥 점심 먹으러 갈까요? 뭐 드시고 싶으세요? 주연은 본인이 가이드라도 되는 것처럼 구글맵을 켜서 후보를 세 개 정도 불러줬다. 그래도 빈에 왔는데, 슈니첼은 제대로 먹어보자는 엄마의 말에 주연이 앞서서 길을 안내했다.
꽤 전통이 긴 레스토랑이라더니 성처럼 고풍스러운 분위기였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홀 중간에 커다란 나무를 세워두고 옆에선 라이브로 재즈풍 캐롤을 연주하고 있었다. 바깥을 거닐면서도 느꼈지만 실내에 들어오니 오늘이 크리스마스라는 게 확 실감이 나면서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비엔나 사람들 길거리에선 다 이상한 등산복 같은 것만 입고 있더만, 여기엔 온통 멋있게 입은 사람들 뿐이었다. 챙겨온 게 오직 패딩 뿐이라, 재현이 괜히 자크를 만지작거리다 얼른 벗어버렸다. 자리를 안내하던 직원이 재현의 패딩을 받아다 옆에 걸어줬다. 최대한 바디랭귀지로 공손함을 표현했다. 당케쇤, 당케쇤. 오, 재현이형 발음 좋은데요? 치사하게 혼자만 검은 목티를 단정히 차려입은 주연이 슬쩍 웃으며 말을 건넸다. 고데기를 안 가져온 탓에 아침에 열심히 빗질을 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비니를 쓴 재현이 모자를 괜히 긁적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아직은 제대로 주연과 대화라는 걸 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주연은 능숙하게 메뉴판을 훑더니 몇 가지 선택지를 줬다. 이것도 유명하고요, 이거랑 이거랑 같이 많이 먹어요. 맥주 드실래요? 맥주가 유명하긴 한데, 낮부터는 좀 그렇죠? 그럼 간단히 와인 글라스로 시킬까요? 화이트와인 이거 되게 가볍고 맛있어요. 너무 건조한 건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주연이 메뉴판을 내려놓고 손깍지를 낀 채로 홀을 슬쩍 둘러보자 금세 직원이 와서 주문을 받았다. 아니, 유럽에선 직원 부르는 거 예의 아니라길래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했는데 주연의 애티튜드를 보니 괜히 열이 받았다. 나는 딱 봐도 관광객이고 얘는 딱 봐도 여기 사는 사람이다, 뭐 그런 건가. 주연이 능숙하게 주문을 했다. 전혀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또 예전 영어 쓰던 버릇처럼 쓸데없이 발음을 굴린다는 거 하나는 알아챌 수 있었다.
그을린 피부에 길고 검은 생머리의 아시안 남자. 격식 있게 차려입은 웨이터와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대화를 한다. 천장 위엔 커다란 샹들리에들이 가득하고 홀을 채우는 피아노 선율이 산뜻하면서도 무겁다. 이재현은 이 일련의 그림이 흐르는 영상이 아니라 캡처된 사진처럼 느껴졌다. 낯설고, 다르고, 현실에서 붕 떠 있는. 새삼 이주연과 3년 만에 다시 만나는 게 실감이 났다.
주문을 한 뒤에는 가벼운 대화들이 오갔다. 주연이 너 여기 와봤니, 독일어 되게 잘한다, 멋있다, 이렇게 환한 조명 아래서 보니까 못 본 사이에 더 훤칠해진 것 같아, 그동안 뭐 하고 지냈어. 주로 엄마가 질문하고 주연이 답하는 식이었다. 그러면 여기서 대학 다니는 거니? 주연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제가 나이 제일 많아요. 이주연, 대학생. 갑자기 너무 익숙한 단어가 등장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나랑 처음 만났을 때도 대학생이었는데. 학교가 너무 좋아서 맨날 과잠을 입고 다닌다던 신입생 이주연, 고작 1년 선배인데도 그 덧없는 웃음이 귀엽게 느껴져서 맨날 놀리고 장난치고 싶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농구 하다가 풋살 하다가 또 과방에 누워서 배달 시켜 먹고. 툭하면 사람, 사람, 사람. 새로운 사람 만나는 데 서슴없는 데다가 무슨 정치인이라도 꿈꾸는 것처럼 학교에 여기저기 인맥 투성이라 나중엔 이걸로 엄청 싸우기도 했다. 그게 20살의 이주연이었는데. 28살의 대학생 이주연은 어떤지 모르겠다. 그 기억들은 모두 지난 페이지고, 지금 눈앞에 있는 이주연은 그런 건 다 덮어둔 지 오래라는 듯이 차분하고 점잖게 굴고 있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어느 날부터 안 보여가지고 아줌마가 걱정했잖아."
둘 다 서울에서 자취를 했지만 한두 달에 한 번 본가에 내려가는 주연과 달리 재현은 거의 매주 집에 출석도장을 찍어야 했다. 두 사람 모두 가족을 우선순위에 두는 건 비슷했지만, 이주연은 '그래도 형은 이제 성인이잖아요.' 하면서 재현을 이해 못한다는 듯이 꼽을 주곤 했다. 그래도 난 매주 가는 게 마음이 편하다고, 우리 엄마 일요일 아침에 브런치 먹는 거 좋아하는데 혼자는 잘 못 간다고, 한참 말씨름을 하다가 홧김에 그럼 니도 따라오든가 말을 뱉었던 게 화근이었다.
엄마는 이주연을 정말로 마음에 들어 했다. 주연이는 꼭 형 같아, 재현이 위로 아들이 하나 더 있었으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하는 말로 이재현을 분노하게 하기도 했다. 이주연이 어른 같다고? 엄마가 얘 몰라서 그래. 얘 진짜 치사하고 뒤끝 쩔고 나보다 더 초딩임. 그래도 둘을 하하 웃기만 했다. 화기애애한 주연과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늘 기분이 묘했다. 속이는 게 없는데도 속이는 느낌이었고, 누려서는 안 되는 편안함인 것만 같았다.
"갑자기 유학을 가게 돼서요. 인사도 못 드리고, 죄송해요."
"아이, 나무라는 거 아니야. 그래도 나중에 재현이한테 듣고 놀라긴 했어. 주연이가 유학을 갔구나, 하고."
"재현이형이 뭐라고 했어요?"
이름이 언급된 재현이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두 분이 분위기 좋잖아요. 그냥 둘이서만 얘기하지, 나는 갑자기 왜.
"주연이가 자기 버리고 외국 갔다고. 얼마나 투덜대는지, 묻지도 말라고 성질 내더라."
아씨, 그랬었나. 얼굴이 달아 올랐다. 그때 힘들긴 했는데, 그렇다고 엄마한테까지 그렇게 말했었나. 사실 이주연과 헤어지고 나서 한 두 달 간의 기억은 선명한 게 하나도 없다.
"버린 건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버린 게 아니면 뭔데. 따져 묻고 싶은 걸 꾹 참고 째려봤다. 시선을 받아치는 이주연의 눈빛이 묘했다. 때마침 식사가 나왔다. 직원이 메뉴를 하나하나 뭐라 설명하면 이주연이 간단히 해석해줬다.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원래 술을 안 좋아하기도 하고, 엄마랑 여행하면서 처음 마시는 알콜이었다. 너무 쓰고 텁텁한 와인은 질색인데, 이주연이 추천해준 와인은 향이 상긋해서 첫 모금부터 나쁘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으음, 해버렸다. 다행이다, 이거 형이 좋아할 거 같았어요. 그 말만 없었어도 우걱우걱 배부르게 잘 먹었을 텐데. 결국 계속 속이 얹힌 느낌에 식사를 남겼다.
***
밥을 먹고 나오니 어느덧 유럽의 겨울은 해가 지는 시간이었다. 어둑어둑해진 길거리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따라 조금 걷다가 커다란 성당을 마주했다.
"크리스마스라 그런가, 성당에 사람이 가득하네."
"아, 그렇기도 한데 여기 안에서 클래식 공연이 열려서요."
"어머, 그래? 주연이 너 음악 공부하러 왔다고 했잖아. 여기서 몇 번 봤어?"
"네, 학생이면 티켓이 비싸지 않아서요... 종종 봤어요. 아마 오늘 공연 티켓 바로 살 수 있을 텐데. 잠시만요."
엄마의 눈빛이 기대감으로 빛나는 걸 포착한 주연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급하게 결정된 여행이기도 하고 재현은 클래식, 오페라, 뭐 그런 거에 하나도 관심이 없는 터라 제대로 찾아보지 않았다. 슬쩍 봤을 때도 이미 티켓이 다 매진이기도 했고. 근데 여기서 구할 수 있는 거야?
"여기는 티켓 시스템이... 취소가 안 돼서 사람들이 당일 티켓은 여기 서서 그냥 조금 더 싸게 팔기도 해요. 동행이 못 왔다든가, 자리를 잘못 예매했다든가 하면요."
며칠 돌아다니면서 길거리에 티켓 판다는 사람들을 꽤 마주쳤는데 그럴 때마다 사기인 줄 알았다. 완전 유학생 혜택이다, 혜택. 엄마가 웃으며 주연을 팔뚝을 툭 쳤다. 주연이 멀뚱히 티켓을 파는 것처럼 보이는 아저씨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흥정을 하는 건지 뭔지 대화가 좀 길어졌다. 옆에서 귀를 기울이는데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어... 근데 아마 티켓을 세 장을 다 구하진 못할 것 같아요. 이 아저씨는 한 장만 파신다고 하고... 아마 조금 더 여기저기 물어보면 한 장은 더 구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재현이형이랑 둘이서..."
"아니,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엄마가 두 손을 내저었다.
"너네 둘이 오랜만에 보는데 좀 어디 돌아다녀. 아줌마는 체력이 안 돼서 그냥 혼자 공연 보면서 쉴게."
곧 공연시간이 임박해서 사람들이 우르르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었고, 엄마 말마따나 지금 당장 표를 더 구하는 건 어려워 보이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게 괜찮으시면 그렇게 할까요?"
"싫어. 나도 같이 볼래."
동시에 전혀 상반된 대답이 튀어나왔다. 지금까진 엄마랑 같이 있어서 괜찮았다. 단 둘이서 얘기를 해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다가도, 너무 제가 알던 것과 다른 얼굴을 하고 다른 말을 쓰는 이주연이 낯설기도 해서 그냥 이 시간 자체를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그냥 무작정 떼쓰기로 했다. 싫어. 나 엄마랑 같이 있을래. 엄마 걱정돼. 니가 왜 걱정을 해. 아니 엄마, 내가 싫다니까. 아니 아들, 내가 좋다니까? 의미 없이 몇번을 투덕거린 끝에 결국 재현의 패배였다. 옆에서 가만히 관망하던 주연이 엄마와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고는 지갑에서 현금을 꺼냈다.
"에구, 주연아 고마워. 현금이 없어가지고..."
"아니에요, 식사도 제가 사드리고 싶었는데... 여기 연주 진짜 괜찮아요. 공연장도 예쁘고요. 천장이 엄청 높고 무늬도 특이하니까 꼭 사진 찍으시구요."
주연이 티켓을 사서 엄마에게 건넸다. 아무것도 모른 채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어수선하던 장내가 순식간 조용해졌다. 성당 앞을 가득 채우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관광객들에게 뭐 하나라도 더 팔아보려고 마그넷과 엽서를 한가득 들고 다니던 잡상인들도 하나둘 자리를 떴다. 맨 마지막 입장객이 들어가고 성당의 문이 닫힐 동안 주연과 재현은 나란히 서서 그 장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적막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다. 주연이 먼저 몸을 돌려 재현에게 말을 건넸다.
"형, 진짜 오랜만이에요."
"...뭐?"
"인사, 제대로 못 했잖아요. 어제."
골때리는 스타트. 나도 오랜만이라고, 너무 반갑다고 살살 웃으며 손이라도 맞잡아야 되나.
"넌 아무렇지도 않냐?"
"뭐가요?"
"뭔 생각으로 오늘 우리 따라다닌 거야."
따지고보면 재현이 하루종일 주연이 이끄는 대로 따라다녔지만, 아무튼.
"그럼 형은 무슨 생각으로 여기 온 거예요, 빈."
다짜고짜 그런 대답이 돌아오면 할 말이 없었다. 말문이 막힌 채 뚱한 표정을 짓는 재현을 향해 주연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이어갔다.
"한 20분 걸으면 엄청 큰 크리스마스 마켓 나오는데, 거기 구경할래요? 어머니 말씀으로는 마켓도 제대로 구경 안 했다는데."
차, 이번엔 헛웃음이 나왔다. 엄마 사라졌다고 바로 어머니라고 부르는 거 봐. 예전에도 그랬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이상하다고, 아무리 말려도 이주연은 실실 웃으면서 어머니 어머니 거렸다.
"넌 진짜 내가 살면서 본 인간 중에 제일 이상해."
"기분 좋은데?"
"칭찬 아닌데?"
"난 그래도 영광인데?"
이주연이 자연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실실 웃었다. 내가 크리스마스 마켓 가겠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일단 출발하는 거 봐. 아니꼬웠지만 달리 반박할 건 없어서 그냥 주연을 따라 나란히 걸었다. 주연의 장난기 서린 목소리를 들으니 이제야 제가 알던 사람과 제대로 다시 조우한 것 같았다. 속이 한결 편했다.
"라트하우스라고 빈 시청 바로 앞에 있는 마켓인데 제일 커요. 오늘이 마지막이기도 하고."
마지막이라는 단어의 중의성을 되새김하느라 뭐라 대꾸할 타이밍을 놓쳤다.
"좀 유난스럽기는 한데, 그래도 예쁘지 않아요? 길거리에 이렇게 다 크리스마스 조명... 이 앞으로 쭉 걸으면 엄청 큰 백화점도 있는데 거기 실내도 잘 해놨어요."
"별로 안 궁금해. 더현대가 더 이쁠 듯."
하하, 그건 그렇죠.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은 채 몸까지 살짝 숙여가며 웃는다.
"여기 온 지 벌써 3년이에요. 한국 다 까먹겠어요."
"근데 넌 진짜 크리스마스에 놀 사람도 없냐? 왜 여기서 이렇게 땅에 시간 버리고 있어."
"시간 버리는 건 아니고. 저 원래 친구 없어요. 오늘 딱히 계획도 없었어요. 걱정 마세요."
"걱정된다고 한 적 없는데."
하, 아 진짜 재현이형. 그만 웃겨요.
웃기려고 하는 말 아닌데, 진짜로.
"맨 처음에 왔을 땐 외롭고 힘들기도 했는데... 이젠 그냥 그럭저럭 괜찮아요. 딱히 약속 없어서 이번 주도 계속 알바 잡아놨고. 와, 근데 형을 만날 줄이야."
"나도 너 만날 줄 몰랐어."
"거짓말."
사실은 거짓말이 맞다.
엄마의 입에서 유럽 여행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이주연을 떠올리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이주연이 떠난 도시. 이주연은 음악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다시 대학에 다닐 거라고, 그래서 떠나야 될 거 같다고 했다. 3년을 만난 연인인데도 그 소식을 거의 통보하듯이 내 품에 밀어 넣었다. 그 갑작스러운 무게감에 나는 그냥 네게서 밀려나 줘야만 할 것 같았고. 이주연이 저를 버리고 가버렸다는 말은 그냥 투정 같은 말이 아니었다. 정말 그렇게 느꼈다. 언젠가 자취방에 함께 널브러져 있을 때, 이주연이 뜬금없이 클래식을 틀면 그냥 괜히 무드를 잡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미니탁상 위에 올려진 허니콤보와 뼈다귀들 광경과는 이질적으로,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대체 모르겠는 지루한 음악들을 들으며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그래서 마음 한쪽으로는 확인하고 싶었다. 이주연이 사라지고, 제가 버려진 게 아니라, 그냥 이주연이 어딘가로 떠났을 뿐이라는 것을. 이 도시를 직접 거닐며 클래식의 본고장인지 뭔지 그 허울 좋은 명성을 발로 밟고 손으로 만져보면 이주연이 떠났다는 게 그제야 실감이 날 것 같았다.
이렇게 실제 이주연이 제 앞에 나타나 함께 도시를 걷는 것까진 상상하진 않았지만.
"진짜야. 너 만날 줄 몰랐어. 그냥 엄마가 오자고 해서 온 거야."
재현의 말에 주연도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점점 크리스마스 마켓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북적북적한 사람들의 소란이 느껴졌다. 저기야? 네, 저기 엄청 큰 성 같은 건물. 저게 시청이에요.
크리스마스 마켓을 한 바퀴 돌아보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미 며칠 사이에 좀 유럽식 어쩌구에 무던해지기도 했고 가는 부스마다 비슷한 걸 팔고 있었다. 크리스마스트리에 걸 오너먼트나 연말 분위기의 향초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주연 말로는 오늘이 크리스마스 당일이라 사람이 평소보다 훨씬 적은 거라고 했다. 이제 오늘이 지나면 한동안 의미를 잃게 될 물건들 앞에 40% 할인, 같은 문구들이 휘갈겨져 있었다. 배가 안 고파서 음식을 먹고 싶지도 않고, 살 것도 없고, 그나마 주연과 재현의 시선을 끈 건 버튼을 누르면 춤추는 산타 인형, 심지어 목소리 녹음까지 되는 루돌프 인형 같은 거였다. 상점 주인과 독일어로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뭔가 질문하는 이주연 옆에서 루돌프에 대고 이주연 바보, 이주연 잘난 척 토나와, 이주연 아는 척 그만해, 같은 걸 녹음하고 깔깔 웃었다. 루돌프 인형이 경박하게 몸을 흔들어대며 재현의 말을 그대로 녹음해 따라 했다. 이주연 바보, 이주연 잘난 척 토나와, 이주연 아는 척 그만해.
"형, 저기 옆에 작은 스케이트장 있는데 스케이트 탈래요? 아저씨 말이 두 시간 뒤에 폐장이래요."
"스케이트? 내가 너랑? 미쳤냐?"
그건 진짜 데이트 코스잖아.
"그래도 공연 끝나려면 앞으로 2시간은 더 있어야 할 거 같은데... 크리스마스 당일엔 할 게 없어요. 카페 같은 데도 다 문 닫아서 밖에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망설이는 재현을 향해 주연이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럼 일단 어떻게 생겼는지나 볼래요? 여기서 한 7분 정도 걸어야 된대요.”
크리스마스 당일엔 오히려 한가하다는 이주연 말이 사실이기는 한지, 스케이트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벌써 철수한 마켓 부스들이 몇몇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오늘이 딱 장사철인데 왜 쉬는 거야? 얘네한테 크리스마스는 가족이랑 보내는 날이라서요. 여기 일하는 사람들도 얼른 접고 저녁은 가족들이랑 보내야죠. 그렇구나… 괜히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도달한 스케이트장은 작지도 크지도 않았다.
“저 지나가면서 보기만 했었는데, 여기 원래 줄이 엄청 길어서 막 1시간 씩 기다려서 타야 되는 데예요. 오늘이 마지막이라니까 그래도 한 번 타볼래요?”
“너 사실 네가 타고 싶은 거지.”
“어, 티 났어요?”
그래도 이주연이 마지막을 강조하며 뭔갈 해주고 싶은 게 보여서, 재현은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매표소 쪽으로 향했다. 아싸, 이주연의 작은 목소리가 솜털처럼 뒤에서 휘날렸다. 야, 니가 나보다 앞으로 와야지. 나 말 할 줄 몰라. 알겠어요, 형 발 저랑 똑같은 거 신으면 되죠?
***
안 타겠다고 튕긴 거 치곤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전속력으로 달렸다. 나 성인 되고 아이스 스케이트 처음 타는 거 같아.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족 단위의 사람들을 제치고 건장한 성인 남성 둘이 레이스를 펼쳤다. 형 좀 타네요? 난 원래 못하는 거 없다니까. 패딩에 모자 그리고 장갑까지 꼭꼭 챙겨 낀 재현과 달리 주연은 좀 추워 보였다. 코트 소매로 어떻게든 손을 덮으려고 애쓰는 거 같은데, 그래도 시려운지 손이 빨갰다. 추우면 손 주머니에 넣으라고 하고 싶은데, 그러면 또 스케이트 타다가 넘어질 것 같고, 그렇다고 손을 잡아줄 수도 없고… 여기까지 사고가 닿은 뒤로는 그냥 시야에 들어오는 이주연 자체를 무시하기로 했다. 일부러 더 속력을 내서 이주연을 앞질러 갔다.
한바탕 몸을 움직이고 나니 오히려 한기가 훅 끼쳤다. 살짝 흘린 땀이 그새 말라서 그런 것 같았다. 이주연의 빨간 손등이 신경 쓰여선 아니고, 이제 슬슬 다시 배가 고프기도 해서 다시 마켓 쪽으로 가자고 했다. 글뤼바인이라고 불리는 크리스마스 전통 과일 와인을 각각 한잔씩 주문하고 나누어 먹을 핫도그도 하나 샀다. 아, 이건 형 스타일 아닐 거 같은데. 내 스타일이 뭔데? 형은 원래 달 거면 완전 단 거 좋아하잖아요. 글뤼바인은 달지도 않고 쓰지도 않고 좀 특이하거든요. 양손으로 머그잔을 감싼 채 글뤼바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이주연이 말한 그대로였다. 단 맛이랑 쓴 맛이 섞이면 왠지 모르게 불쾌했다. 뜨거운 와인이라는 것 자체에서부터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괜히 틱틱대고 싶었다. 아닌데? 맛있는데? 주연은 그냥 웃었다. 다행이네요.
글뤼바인을 들고 자리를 옮겼다. 마켓 안에는 의자 대신 서서 음료를 마실 수 있는 높은 테이블들만 몇개 듬성듬성 세워져 있었다. 여기 그래도 예쁘네요, 저기 라트하우스도 보이고. 사람이 드문 곳으로 오니 그제서야 희미하게 들리던 캐롤이 의식됐다. 크리스마스긴 하구나. 재현이 조용히 캐롤을 따라 흥얼거렸다.
“형, 근데 빈 오면서 제 생각은 진짜 하나도 안 했어요?”
“안 했다니까?”
소리를 꽥 지르듯이 답을 한다. 여전한 이재현. 모든 좋아를 싫어로 바꿔 말하는 이재현. 좋아일수록 더더욱 싫어인 이재현.
“그때... 저희 얘기도 제대로 못 해보고 끝난 거 같아서 계속 미안했는데.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아니, 니를 찾아서 온 게 아니라니까?”
“그래도요.”
“오스트리아 니가 전세 냈냐? 난 그냥 여행 온 거라고.”
“어쨌든 왔잖아요. 내가 여기에 있는데, 형이 여기로. 그래서 아무튼 내 말은 고맙다고요.”
그리고 좋아는 명확하게 좋아인 이주연. 싫다고 해야 하는 분위기에서도 자기가 좋으면 그냥 좋아해 버리는 이주연. 속수무책으로 이재현이 질 수밖에 없는 화법이었다.
“저는 형 생각 많이 했거든요.”
KO 패인 거 알겠으니까 그만하라고. 이재현은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는 게 싫었다. 마무리의 방향은 몰라도 그냥 진지한 궁서체에 마침표를 찍고 싶진 않았다.
“야, 너 우냐?”
그래서 그냥, 또 한없이 가벼워지기를 택했다.
“지금은 안 울죠.”
“참나, 어이없네. 그럼 언제 울었는데.”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진짜 울었어?”
“네. 형 알잖아요, 저 원래 혼자 뒤에서 몰래 우는 스타일.”
뭐가 좋다고 실실 웃으면서 말한다.
“넌 꼭 그러더라. 속으로는 계속 나쁜 생각했다가 좋은 생각했다가 혼자 질문하고 대답하고. 나중엔 결론만 띡.”
“아, 그만 뭐라고 해요. 저 진짜 울었다니까요? 엄청 많이?”
“그래, 재현이형 말 들을껄, 한국에 가만히 있을껄, 하면서 울었지?”
또 답 없이 웃기만 한다. 뜨거운 와인으로 데워 놓은 속이 차갑게 내려 앉는 것 같았다.
연인이 나를 떠난다는 것, 그것도 아주 먼 곳으로 기약 없이 떠난다는 것, 나 홀로 남겨지고 버려진다는 감각을 견딜 수가 없는 와중에도 재현은 주연을 나무라거나 탓하지 못했다. 배우고 싶은 게 생겼다는데, 하고 싶은 게 생겼다는데. 주연의 1순위가 재현 저 자신이 아니라는 그 당연한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건 꼭 못난 사람 같았다. 늘 이런 식이었다. 이주연은 이재현을 서운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잘잘못을 따져 물을 수도 없이, 재현이 느끼는 서운함은 이주연의 악의에서 비롯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주연은 언제나 새로운 사람을 만났고, 새로운 색을 입었고, 여행을 가면 새로운 음식을 먹었다. 이주연은 떠나고 움직이는 사람인 거다. 그런 너에게 발 붙여 안정감을 느끼고 싶은 건 애초부터 나의 잘못된 소원일 수도 있다. 재현은 원래 매주 집에 가서 엄마를 보고, 강아지를 만지고, 얼어 죽어도 무조건 패딩인데다가, 좋아하는 치킨만 한 평생 먹을 수 있다면 그 세계 어느 새로운 나라도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니까. 우리 진짜 어떻게 만났지.
"우리 진짜 어떻게 만났지."
생각만 한다는 게 입 밖으로 뱉어 버렸다. 이주연은 잠시 묘한 표정을 짓더니 장난기 서린 표정으로 답했다.
“반대가 끌리는 이유?”
하, 헛웃음이 났다. 반응이 좋으니 멈추지 않는다.
“제가 형 쫓아다녀서? 만나달라고 싹싹 빌고 울고.”
“그건 맞음.”
"근데 이번엔 형이 쫓아온 거고."
"그건 진짜 아님."
다시 생각해도 신기하다. 어떻게 여기서 만나냐.
"학교 다니면서 알바 하는 거야?"
"네, 그냥 주말이나 이렇게 홀리데이 기간에만... 자전거로 하는 거라 운동 삼아 좋아요."
"학교는 어떠냐. 친구 없는 건 알겠구."
"하하. 버겁고 어렵긴 한데 그래도 재밌어요. 하고 싶어서 온 거니까... 잘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맨날 그랬잖아. 너 완전 예술가 타입이라고."
"예술가... 는 너무 거창하긴 한데, 아무튼 재밌어요."
재밌구나, 잘 지내는구나.
"형은요? 형 인스타 가끔 보니까 완전 어른 같던데요."
"어른? 내가?"
"네. 막 회사 다니고, 워크숍 갔다 왔다고 단체 사진 올리는데 다 아저씨들이고, 이사도 한 거 같고."
"너 근데 내 스토커냐."
"별 뜻은 없고 그냥 궁금해서요. 잘 지내나... 여기 있다 보면 가끔 현실 감각이 사라지거든요. 한 번 인스타 가서 쭉 훑어요."
"다들 그냥 그렇게 살지, 그게 무슨 어른이냐..."
제게 어른 같다는 말을 건네는 주연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또 문득 얘는 아직 애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눈가를 찌를 만큼 긴 생머리를 대충 넘기고 목폴라에 코트를 입은 모습, 이주연이 괜히 낯설게 느껴졌던 건 얘가 못 본 사이 너무 많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마치 하나도 자라지 않은 것처럼 보여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재현이 천천히 시간을 겪으며 제때 맞는 어른의 허울을 입어갈 동안, 이주연은 정형화되지 않은 특정한 분위기를 입고 있는 것 같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또 다시 서러움에 속이 쓰렸다. 그니까, 이재현은 이주연보다 재밌는 걸 하나도 찾지 못했는데, 그래서 그냥 어른이 됐는데. 이주연은 세상에 넘치고 넘치는 재밌는 걸 찾아서 영영 떠도는 것처럼, 마치 저와는 아예 다른 궤도로 이탈해버린 것처럼.
"빈 와보니까 어때요? 형 옛날엔 비행기 오래 타는 거 싫다고 유럽 쪽은 여행도 싫다고 했으면서..."
"유럽 치고 여기가 되게 깨끗하다더라. 뭐 다들 친절한 거 같기도 하고 음식도 너무 이상하지 않고... 예뻤어."
"딱 크리스마스에 맞춰서 와서 다행이에요. 이제 내일이면 다 사라지거든요."
"이걸 다 없애?"
"네. 얄짤 없어요. 딱 크리스마스 기간 한 달 동안 마켓에 음식에 노래에 행사에 마구 휘몰아치다가 내일이면 끝."
"뭔가 아깝다..."
주연과 재현의 시야에 보이는 크리스마스 마켓들도 서서히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유럽의 겨울은 힘들 것 같은데. 해도 일찍 지고 왠지 더 어둡고 흐리고. 좀만 더 있다가 치우면 안 되나. 기왕이면 겨울 내내 조금이라도 밝고 빛나면 좋잖아.
"근데 그래서 좋은 거 아닐까요."
"뭐가?"
"1년 365일 있으면 거슬리고 예쁜지도 모를 거예요. 잠깐 있다가 사라지니까 아쉽고, 더 기다려지고. 그런 거죠, 뭐."
이재현은 지금까지 크리스마스 마켓을 둘러보며 느꼈던 묘한 거슬림의 원인을 찾은 것 같았다. 그래서 싫어. 그런 게 싫다고. 마치 끝이 있어서 더 아름다운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와중에도 그다음은 절대 기약하지 않는. 곧 끝날 공연의 클라이맥스 같은 느낌. 모든 예쁜 것엔 다 유통기한이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즐기는 동시에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하는.
그래서 주연과의 이별 후 새로운 인연을 섣불리 시작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어차피 저 자신은 버려지는 사람일 것만 같아서. 모두 미련 없이 철수하고 허허벌판이 된 크리스마스 마켓에 철없이 혼자 서 있게 될 것만 같아서. 이주연이 제 미래를 좇아 떠나버린 와중에도, 오직 이재현만 현재의 영속성을 믿으며 뜬구름 위에 엎어져 엉엉 울고 있는 거 같아서.
적막 속 재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주연이 운을 띄웠다.
"형이랑 이런 거 잘 안 맞죠. 잠깐이고, 유행이고, 그런 거."
"아는 놈이 이런 델 데려오냐."
"근데 또 오면 좋아하잖아요. 형이 핫도그 혼자 다 먹었어요."
"치사하게 이런 걸로 시비 걸래?"
푸스스 가볍게 부서지는 웃음의 조각들만 공간을 채웠다. 이주연이 주머니를 뒤척였다. 잔뜩 꼬인 줄 이어폰이 하나 나왔다. 너 줄 이어폰 쓰면서 힙한 척 하는 건 여전하구나, 틱틱대고 그저 웃으며 엉킨 이어폰 줄만 풀어낸다. 무슨 짓이냐는 얼굴로 쳐다보니 대뜸 이어폰 한쪽을 내민다. 이주연은 가끔 아무런 의중 없이 행동한다는 걸 알아서, 그냥 순순히 귀에 꽂아줬다. 누군가와 귀를 맞대는 거리감 자체가 오랜만의 감각이었다.
주연이 휴대폰에서 음악을 재생시켰다. 피아노 선율이 오른쪽 귀에 꽂은 이어폰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이재현이 고개를 틀어 주연을 마주 봤다. 이거...! 주연이 빨간 코 끝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정말 음악을 만드는구나. 이주연이 무언가를 만드는구나. 클래식엔 문외한이라 음악에 감상은 딱히 들지 않았다. 그저 이주연이 저를 등지고 저벅저벅 걸어 나갔던 방향 속의 미래, 그 미래의 모양이 귓가에 선명히 들린다는 게 이상했다. 너는 이런 세상에 와 있구나. 너는 이런 세상을 찾아 떠났구나. 이어폰을 꽂지 않은 쪽에서는 간간이 차가 지나다니는 소리, 사람들의 웃음소리, 찬 겨울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하모니를 이뤘다. 잘 알지도 못하는 악보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오선지에 일사불란하게 모여진 작은 음표들의 불특정한 높낮이를 상상했다. 처음엔 착각인가 싶었는데, 음악 사이사이로 작은 허밍 소리가 들렸다. 못 알아챌 수가 없다. 이건 주연의 목소리다.
"형이 그랬잖아요. 노래엔 가사가 있어야 된다고."
내가 그런 얘기를 했었나. 아마 이주연이 뜬금없이 클래식을 틀어댈 때면 가사도 없는 그게 무슨 음악이냐고 장난치듯 나무랐던 것 같다.
"요즘 작곡 공부하는데, 그게 진짜 어려워요. 말 없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거요."
"처음엔 그래서 좋았거든요. 아 쫌 멋있다. 언어가 없는데도 뭔가 말을 하는 것 같으니까. 그냥 만드는 사람은 그 사람만의 의미를 담고, 듣는 사람은 자기만의 해석으로 이해하고. 그런 게요."
"너답다."
"저다워요?"
"응. 이주연 같다."
"근데 요즘은요, 어떤 마음은 또박또박 전달을 해야 한다는 걸 느끼고 있어요."
당연히 말 안 해도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그런 건 없다는 걸 왜 몰랐을까요. 주연을 바라봤다. 바람이 부는 바람에 눈을 가린 앞머리가 계속 흔들렸다. 코 끝은 여전히 빨갰다. 맨 처음 만났을 때, 스무살의 맹한 얼굴이 겹쳐 보였다. 어떨 땐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데시벨의 애정으로 저를 당황하게 하다가도, 또 냉랭하게 나를 네 바운더리 밖으로 밀어버리기도 했던. 다정하면서도 이기적이었던 그 서툴고 순한 얼굴.
"형, 지금 형한테 키스하면 저 나쁜놈이죠."
"...넌 한 번도 나한테 착한 놈이었던 적 없어."
그래서 이재현에게 이주연은 늘 나빴다. 난 네가 꺼내서 보여주는 것만 알 수 있어서, 네 속에 남은 게 뭔지 몰라서, 그게 언젠가 소모되어버릴지도 몰라서, 그러면 나를 훌쩍 떠나버릴 것만 같아서.
주연이 서서히 입을 맞춰왔다. 계속 글뤼바인을 홀짝인 탓에 맞붙은 두 입술이 뜨거웠다. 주연이 살짝 아랫입술을 물었다. 따뜻한 감각과 함께 코 끝으로 계피향이 퍼졌다. 뒤늦게 술기운이 도는 느낌이었다.
입술은 금세 멀어졌다. 취하고 싶진 않았다. 와중에서 시선은 여전히 얽혀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시야의 높이가 맞아서 쉽게 눈을 떼어버릴 수도 없다. 이재현은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할 시간이라는 걸 알았다. 오른쪽 이어폰을 주연에게 건넸다.
"너 내일 공항 안 올 거지? 오지 마."
"......"
"나 이제 우리 걸어왔던 길 따라서 돌아갈 거야. 엄마랑 크리스마스 저녁은 단 둘이 오붓하게 보낼 거야."
재현은 마지막 마음을 또박또박 전달하기로 결심한다.
"무작정 찾아와서 미안해. 근데도 놀아줘서 고맙고, 그리고..."
"음악 좋다. 무슨 말인지 다 알 것 같아. 따뜻하게 지내고."
마치 포커스가 나간 카메라 렌즈처럼, 주연의 표정이 흐릿하게 번져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 주연의 뒤로 펼쳐진 빈 시청의 크리스마스 조명들이 반짝거려 눈이 부셨다. 황급히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라고 부르기 애매할 정도로 축축한 진눈깨비가 발밑으로 사각사각 밟혔다. 저 멀리 성당에서 또 다시 종이 울렸다. 지금은 몇 시일까, 여전히 주연의 허밍 소리가 귓바퀴를 맴돌고 있었다.
***
크리스마스 다음 날의 빈 국제공항은 사람들로 붐볐다. 낭만의 도시라 불리는 이곳에서 연휴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커다란 가방을 둘러메고 뚱뚱한 캐리어를 이끄는 사람들. 저 안엔 모차르트 초콜렛이 가득할 테다. 우리 캐리어도 그렇다.
수화물을 부치고 수속을 마치니 기진맥진 온몸에 힘이 없었다. 엄마와 나란히 게이트 옆 의자에 앉아 비행기 탑승 시간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어젯밤엔 엄마의 인생 첫 클래식 공연 후기를 듣다가 잠에 들었다. 마지막 날이니 아쉬워서 숙소 근처에서 비싼 와인까지 사다가 몇 잔씩 나눠 마셨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어쩔 수 없었다고 설명했지만, 엄마는 끝내 주연과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한 게 아쉬운 모양이었다. 너네 따로 연락은 하지? 주연이한테 고맙다고 꼭 전해줘야 돼.
공항 벽면에는 빈을 상징하는 랜드마크 사진들과 함께 좋은 비행 되라며, 다음에 또 보자는 문구가 영어로 적혀 있었다.
"재현아, 빈 어땠어? 또 오고 싶어?"
"당연히 재미는 있었지... 근데 난 해외여행이랑은 안 맞는 거 같아."
"그래? 하긴 너는 물도 은근히 가리고, 음식도 가리고. 엄마 때문에 고생했지?"
"그런 뜻 아냐, 난 그냥..."
음...
"머무는 게 편한 사람인가 봐."
누군가 떠나는 사람이라면, 나머지 누군가는 버려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버려지는 건 없고, 단지 버려졌다는 마음이 들 뿐이라고, 재현은 그 마음을 수거하기로 했다. 마침내 이 도시에 두고 가는 게 아무것도 없는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엄마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래, 재밌었는데. 우리 다음 연휴 때는 그냥 이쁜 카페 가서 다롱이랑 브런치 먹자. 송도가 더 나아. 킥킥 뒷담화를 하는 것처럼 작게 속삭이며 웃었다.
마지막으로, 진짜 마지막으로. 숙소 현관문을 열자마자 찬바람과 함께 쏟아지듯 제 눈 앞에 나타났던 주연의 얼굴을 한 번 더 선명히 복기했다. 머리는 산발을 한 채로, 항상 어디로든 달려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생생한 두 눈을.
"밖에 비 온다."
엄마의 말마따나 커다란 투명창 밖으로 보이는 활주로 바닥이 축축했다. 우리가 떠나는 날 비가 오다니, 그래도 다행이다.
"근데 우리 비행기 못 뜨는 거 아니겠지?"
"비가 이정도 내린다고 못 뜨진 않는다. 걱정 마."
비가 오는 빈은 이런 모습이구나. 대낮인데도 흐린 하늘 사이로 빗줄기까지 내리니 보기만 해도 습하고 으스스했다. 비행기 탑승을 위해 게이트 앞으로 모여달라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시 돌아가는 여정에 몸을 싣는다. 재현이 머무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