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struck
2024
5th Juyeon Hyunjae Webzine

Watch stars, we can count’em from the rooftop. I just want you baby I don't need nobody else here.
Gotta show you off, but later keep you to myself.

가이드를 죽인 센티넬. 위험인자. 센터의 미친개. 얼음의 사신(死神).

 

 

? 너도 얼려줘?”

 

 

재현은 손등으로 얼굴에 튄 피를 아무렇게나 훔쳐내며 활짝 웃었다. 재현의 뒤에서 대기하던 비전투 계열 센티넬들이 질겁한 채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공포에 잠식된 타인을 지켜보는 건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재현의 눈동자가 차갑게 반짝였다. 재현이 손을 위로 들어 올리자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 저러다간 과호흡으로 뒈지지. 작게 혀를 차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긴 재현이 얼른 꺼지라는 뜻으로 거칠게 손짓했다. 그러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 달음박질했다.

 

 

, 진짜 재미없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재현이 아까부터 시끄럽게 울려대던 송수신기를 꺼냈다. 깜박거리는 빨간 불빛을 가볍게 건드리자 곧장 재현을 일갈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형 미쳤어요? 아니, 형은 무슨 목숨이 열 개라도 돼요? 형이 팀플레이 싫어하니까 일부러 비전투 계열로 구색 맞추느라 내가 며칠 동안 야근에 시달렸는지 설명한 건 그새 까먹었어요? 그리고 제가 하나는 살려서 넘겨줘야 한다고 말했잖아요. 다 죽이면 어떡해요? 상부에 뭐라고 보고해요, 진짜······. 급기야 한탄까지 하는 창민의 말을 가만히 듣던 재현은 피식 웃었다. 이제 좀 사람 사는 것 같았다.

 

 

미안.”

됐어요. 정말 미안하면 앞으로 능력 안 쓰고 버티는 짓이라도 관둬요. 그러다가 죽는 건 형이라니까요.”

미안 취소.”

!”

 

 

재현은 작게 웃었다. 센티넬의 능력은 허용치 이상으로 써도 가이딩이 필요했고, 허용치 이상으로 쓰지 않아도 가이딩이 필요했다. 체내에 누적된 능력치가 혈류를 막아버리기 때문이었다. 재현은 후자의 경우였다.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능력을 쓰지 않고 참다가 창민의 독촉에 못 이겨 한 번씩 작전에 참여하곤 했다. 유일하게 상성이 맞았던 가이드를 죽이고 위험인자로 분류된 재현의 일거수일투족은 센터의 관리 하에 있었다. 희귀한 원소 계열 능력자인지라 원한다면 언제라도 감시를 거절하고 복귀할 수 있었지만, 재현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적당한 간격으로 하나씩 사고를 치며 감시가 끊이지 않게 했다. 대체 왜 그러는 거냐며 이러다 죽기 전에 가이드 매칭을 다시 받아달라 간청하는 창민에게 재현은 티 없이 해사한 얼굴로 가이드를 한 명 더 죽이면 어떻게 되냐 되물을 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창민은 진저리를 치며 다시는 재현에게 행동의 이유를 묻지 않았다.

 

 

됐고, 걔 왔어요.”

?”

형이 저번에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애 있잖아요. 미국에서는 어제 왔는데 센터 입주는 오늘 했대요. 형이랑 같은 층 복도 맨 끝방이요.”

 

 

재현의 눈이 번뜩 빛났다. 이주연. 한미 친선 교류라는 별 뭣 같은 이유로 미국으로 끌려가다시피 한 원소 계열 센티넬. 원래였다면 운이 지지리도 없지, 하며 잠깐 동정하고 말았을 사연이었다. 센터에 있는 놈치고 안 불쌍한 새끼는 없기 때문이었다. 현역으로 뛰고 있는 놈들 태반이 아침드라마 신파극 주인공들이었다. 그 하고많은 사연 중에 재현이 굳이 이주연을 콕 집어서 창민에게 알아봐 달라 부탁한 건 재현 자신과 그가 동류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일어난 전대미문의 가이드 살인사건. 그 범인이 바로 주연이었다.

 

 

세상에 나 같은 새끼가 또 있을 줄이야.”

 

 

센터가 멋대로 붙여 준 가이드. 선민의식에 차 뭐라도 되는 양 행동하던 역겨운 얼굴. 재현을 진정시킬 수 있다는 명목으로 제멋대로 휘두르려 들던 광기 어린 눈동자. 살기 위해 견뎌야 했던 가이딩. 재현은 그 불합리한 연결 고리를 친히 제 손으로 끊어냈다. 그 결과 무려 반년간 능력을 제어하는 구속구를 차고 다녀야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다시 그 순간이 온다 해도 재현은 똑같이 행동했을 테니까. 숙소로 향하는 재현의 발걸음이 실로 오랜만에 가벼웠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팍랫

 

 

 

 

 

 

 

 

목에 채워진 구속구가 갑갑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저는 센터의 번견에 불과하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아 끔찍했다. 몇 번이고 끌어당겨서인지 목에는 구속구에 쓸려 생긴 옅은 상처들이 즐비했다. 각성 이후 능력을 쓰는 것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진 센티넬에게 구속구란 신체 일부분을 결박당한 상태와 느낌이 비슷했다. 가이드를 죽인 대가는 참혹했다. 본국으로 강제 송환, 반년간 구속구, 반년 이후로는 평생 시달려야 할 감시. 한국에 좋은 선례가 있다며 저를 비웃던 센터 간부들의 허옇고 꺼먼 얼굴이 훤히 그려졌다.

구속구에서 손을 뗀 주연은 침대 위로 풀썩 누웠다. 그래도 당분간 막무가내로 전투에 차출될 일은 없으니 나름 다행인 셈일까. 솔직히 다 귀찮았다. 세간의 시선에서 저를 격리하고 싶었다. 아무도 건드리지 말길. 귀찮았다. 모든 것이. 지독한 권태감이 주연을 좀먹어갔다. 그런 주연의 생각을 놀리기라도 하는 건지 예고 없이 방문이 열렸다. 감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원룸 형태의 숙소 덕에 주연은 누운 상태 그대로 고개만 살짝 돌려 침입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네가 이주연?”

 

 

감시관이 가지고 있어야 할 마스터키를 한 손으로 돌리며 생긋 웃는 얼굴이 퍽 고왔다. 센터에 어울리지 않는 인상이었다. 가로로 누워서 보는데도 이런 감상이면 제대로 쳐다봤을 땐 눈 마주치기도 힘들지 않을까. 척 보기엔 쓸데없이 섬세한 외양이었으나 속을 알 수 없는 인사였다. 그에게는 주연을 향한 호의 혹은 호기심만 엿보일 뿐 살기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고 아름다웠다. 대체 왜 여기에 온 걸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저와 같은 센티넬인데, 저 키를 들고 있는 것도 이상했다. 주연의 시선이 자신이 들고 있는 마스터키에 머무름을 알아챈 재현이 짓궂게 웃었다.

 

 

, 이거. 안 그래도 훔친 거라 금방 반납하러 가야 해.”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센터의 규칙을 깼노라 말하는 모습은 다분히 충격적이었다. 주연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재미있다는 듯 말간 웃음을 터트린 재현이 의자 하나를 침대 근처로 끌고 오더니 털썩 앉았다.

 

 

보고 싶었어.”

 

 

주연의 두 눈에 놀라움과 경계심이 가득 찼다. 표정의 변화는 거의 없는데, 눈에 담긴 감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귀엽네. 속으로 중얼거린 재현이 다시 한번 방싯 웃었다. 실로 무해한 웃음이었다. 자신을 찬찬히 뜯어보며 제 의중을 가늠하려 하는 주연의 눈초리는 노골적이었지만, 재현은 구태여 그걸 저지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저 경계심이 풀린다면야, . 늘상 재현을 쫓아다니는 감시관들 때문에 썩 반기지 않는 시선이었지만 이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저를요?”

 

 

기분 좋은 울림이었다. 하도 말을 안 하길래 목소리가 별로인가 했더니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저렇게 잘생겼으니 목소리 정도는 흠일 수 있겠다 싶었는데.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센터에서 길러진 재현이었지만 만약 제가 사회에서 태어난 일반인이었더라면 저런 사람이 내 취향이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수려한 외모였다. 단숨에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얼굴을 뒤로한 재현은 주연의 방에 오기 전 창민을 닦달해 얻어낸 정보를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센터의 지시에 불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유순한 성격. 그러나 하루아침에 가이드를 죽인 위험인자로 전락. 아무리 구속구가 있다지만 다짜고짜 방에 쳐들어온 제게 물리적 공격은 가할 수 있을 텐데 여태껏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걸 보면 척 봐도 센터에 어울리지 않게 착한 놈인 건 알 수 있었다. 아니면 그냥 만사에 무심한 놈이거나.

 

존대라니, 거리감 느껴지게.

 

속으로 하던 생각을 티 나지 않게 갈무리한 재현은 일부러 작게 소리 내어 툴툴거렸다. 주연의 귀에도 명백히 닿았을 중얼거림이었다. 주연의 낯에 일순 당황이 스쳤다. 찰나였지만 그 감정을 눈치챈 재현은 웃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그래, 그냥 착해빠진 놈이다 이거네. 그런데 얘는 왜······ 죽였을까. 가이드를. 저와 동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었다. 평소의 재현이었다면 동류가 아님을 알아챔과 동시에 금세 흥미가 떨어졌겠지만, 오히려 주연이 자신과 전혀 달라서 더 궁금해졌다. 너 같은 애가, 왜 나 같은 짓을 했을까.

 

 

, 보고 싶었지, 너를.”

“······왜요?”

있잖아, 주연아.”

 

 

재현은 왜냐는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상당히 의도적인 화제 전환이었다. 그리고 재현은 그걸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 덕에 주연도 재현이 일부러 대답을 회피했다는 걸 뻔히 알았지만, 굳이 그 사실을 짚고 넘어가며 답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눈을 가느다랗게 뜬 재현이 의자에서 일어나 주연에게로 다가왔다. 몇 걸음 만에 주연과 재현 사이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주연은 재현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재현이 하는 모양새를 눈에 담고 있을 뿐이었다. 샐쭉 웃은 재현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재현의 입술이 주연의 귓가 근처로 내려왔다.

 

 

, 이거 푸는 방법 아는데.”

 

 

재현의 얇은 손가락 끝이 주연의 목을 죄고 있는 구속구를 톡 건드렸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주연에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주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경계심 명백한 표정을 본 재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가벼운 어투로 덧붙여 말했다.

 

 

나도 그거 해봤거든. 갑갑하잖아. 짜증 나고.”

 

 

주연의 까만 눈동자가 재현에게 닿았다. 한국에 있다던 선례. 그게 이 사람인가. 강아지를 닮은 듯 반짝이는 눈동자에 담긴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신기했다. 날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분명한 의도를 담고 있던 시선만 줄곧 받아온 주연에게 있어 재현이란 논외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죽였을까. 가이드를.

오늘 처음 본 자신에게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이며 대뜸 구속구를 푸는 방법을 안다는 말이며 대가 없는 호의를 내보이는 것도 다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다름 아닌 이주연 본인이었다. 미국에서 제게 관심을 보였던 몇몇 센티넬과 가이드가 성적인 의미가 명백히 담긴 은근한 손길로 건드릴 때는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던 몸이 재현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달아올랐다. 주연의 눈동자의 농도가 서서히 짙어졌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주연을 마주한 재현이 입을 벙긋거려 입 모양으로 글자를 만들어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주연이 재현의 양 손목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크게 긴장을 하지 않고 있던 터라 몸에 전혀 힘을 주지 않고 있던 재현은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주연에게 끌려왔다. 재현의 무게가 주연에게로 쏠리면서 주연은 침대 위로 쓰러졌다. 졸지에 재현은 주연을 덮치게 된 꼴이었다. 당황한 재현이 급히 일어나려고 하자 손목을 잡고 있던 주연의 손이 슬며시 위로 올라오더니 덥석 재현의 손을 잡았다. 주연의 손이 순식간에 재현의 손에 깍지를 끼며 주연이 재현을 포박한 모양새가 되었다.

 

 

너 지금 이게 무슨-”

입 맞춰도 돼요?”

?”

키스. 해도 돼요?”

 

 

얘 원래 입꼬리가 이렇게 올라가 있구나. 재현의 시야 가득히 들어찬 주연의 얼굴이 웃음기를 머금었다. 예쁘게 휘어진 눈꼬리며 키스 따위를 내뱉는 요망한 입술이며 하는 것들이 여과 없이 재현에게 전해졌다.

첫눈에 반하면 귓가에 종이 울린다던가. 운명이란 게 정말 존재한다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던가. 월하노인이 맺어준 천륜의 연이 빨간 실로 묶여 있다던가.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속설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씨발. 재현은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이런 행동은 대담하게 했으면서 고작 재현의 욕설 한 마디에 놀란 건지 주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여우짓을 하려면 끝까지 여우처럼 굴던가. 막판에 와서 순둥이 노릇이라니. 이게 귀여워 보이면 나도 미친 거야. 미친개 소리를 하루이틀 들은 건 아니었지만 이 순간 재현은 자신이 정말 미친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지금 이 짓을 하고 있는 거겠지. 재현의 얼굴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맞물리는 두 입술이 부드럽게 포개졌다.

완벽한 성애와 애욕의 의미였다. 가이드를 죽인 두 센티넬이 가이딩을 하듯 진득하게 입술을 맞붙였다. 위험인자라는 공통분모가 아니었다면 절대 얼굴을 맞대지 않았을 만큼 정반대에 위치한 두 사람이 오직 하나의 교집합을 향해 질주했다. 하나둘 불이 꺼졌다. 센터에는 밤이 찾아왔고, 아직 밤은 길었다.

 

 

 

 

 

 

* * *

 

 

 

 

 

 

형 요즘 되게 이상한 거 알아요?”

뭐가?”

 

 

재현은 다 마신 사과 맛 피크닉을 한 손으로 가볍게 구겼다. 빨간 사과 모양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창민의 말을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무던한 재현의 표정과 대비되는 꼴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창민이 책상을 가볍게 톡톡 두드려 재현의 주의를 환기했다.

 

 

구내식당은 왜 반파시켰어요?”

, 모기 새끼들이 웽웽거려서.”

모기요?”

, 순진한 애새끼 하나 잡겠다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꼴이 며칠 굶은 모기떼 같길래.”

······ , 그건 그렇다 쳐요. 그럼 훈련소 2층은 왜 얼렸어요?”

애가 큰맘 먹고 바깥 공기 좀 마시고 싶대서 데리고 나왔더니 개 같은 놈들이 낄 때 안 낄 때 분간 못 하고 짖어대잖아.”

 

 

재현이 말을 하면 할수록 창민의 얼굴은 점차 사색이 되어갔다. 종내에는 희게 질리다 못해 핏기가 싹 가셔 창백해진 안색을 한 창민이 이 대화의 종지부를 찍듯 단호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아까부터 애, 애 하는데 그 애가 설마······”

이주연, 맞는데?”

 

 

만사 귀찮다는 기색을 표하며 늘어져 있다가도 흥밋거리 하나가 생기면 미친 듯이 몰두하는 재현의 성미를 익히 알고 있는 창민은 종종 그런 재현을 초딩스럽다 묘사하곤 했다. 그러나 창민도 알고 있었다. 귀엽게 말해서 초딩스러운 거지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재현의 행동 양상은 다분히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면이 있었다. 어이없는 건 재현은 그가 원하는 목표에 한해서만 계획적으로 변한다는 거였다. 그러니 그렇게 가이드를 죽이고 감시가 느슨해질 때마다 큰 사고 하나씩을 터트리며 사는 거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아니었다. 최근 창민에게 올라오는 보고서 중에 이재현 석 자가 찍힌 문서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태연자약한 재현을 마주한 창민은 뒷골이 띵 하니 당겼다.

 

 

연무장 가벽 날린 거랑 간부실 유리창 깬 것도 이주연 센티넬 때문이에요?”

지하 창고 자물쇠 부순 건 아직 보고 안 올라갔어?”

? 아니, 그건 또 무슨, ! 사고도 정도껏 쳐야 수습이라도 하지, 지금 이것들이 다 한 달 사이에 올라온 보고라는 자각이 있긴 해요?”

창민아, 형 귀 아파.”

 

 

방싯 웃은 재현이 손으로 귀를 막는 시늉을 하며 능청을 떨었다. 금세 전의를 상실한 창민이 이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힘을 풀었다. 재현이 본인을 스스로 형이라 칭한 이유야 뻔했다. 창민더러 이 일을 함구해 달라는 뜻이었다. 지창민에게 이재현은 가족이었다. 조실부모 사고무탁 지창민에게 있어 거역할 수 없는 단 한 사람. 유일하게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 그런 재현을 창민이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반면에 이재현은 본인 사전에서 가족이란 단어를 지워버린 지 오래였다. 유아독존 독고다이였다. 그러기에 재현은 입버릇처럼 인생은 혼자 사는 거라고 말하곤 했지만 지창민의 생각은 달랐다. 바닥에서 굴러먹을 적 재현이 창민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준 그 순간부터 그에게 이재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도 덕분에 능력 펑펑 써대서 별로 안 쌓였어.”

“···,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창민은 차마 장난기 만연한 얼굴에 대고 모진 소리를 쏘아댈 만큼 악독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래도 삶에 아무런 미련이 없는 것처럼 굴던 재현이 이렇게나마 생기를 띠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불철주야 야근은 확정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창민은 차라리 이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가이드를 제 손으로 죽인 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하루가 다르게 재현의 이성을 갉아 먹어가는 것 같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센터의 미친개라는 소문을 재현에게 전해줄 때만 해도 우스갯소리로 치부했지만 창민은 실상 재현이 스스로 그 자신을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빨리 눈치챘었다. 그러니······ 괜찮다. 괜찮아야 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건 따로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창민이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다른 감정이 있는 건······ 아니죠?”

 

 

찰나의 적막이 억겁과도 같이 느껴졌다. 푸핫. 재현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너무나도 간단히 긴장감을 깨부쉈다. 재현의 눈꼬리에 눈물이 아롱아롱 매달렸다. 재현은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듯 손사래까지 쳤다. 겨우 웃음을 진정한 재현이 창민의 우려에 가차 없이 일갈을 날렸다.

 

 

너는 내가 누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저로서는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봐야 하니까요.”

내 어머니란 작자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네가 더 잘 알잖아. 설마 내가 사랑을 한대도 그게 센티넬은 될 수 없어.”

 

 

주변을 환히 밝히듯 유려한 호선을 그린 입매와는 달리 재현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심지어 그 목소리가 담아내는 말은 더욱더 차가웠다. 재현의 시선이 창민을 슬쩍 비켜 갔다.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는지 아니면 저 멀리 누군가를 떠올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어떤 배우가 봐도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릴 만큼 처절한 눈빛이었다. 진실과 거짓이 맹렬한 싸움을 이어가는 가운데 공중에 부유한 사실은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았다.

 

 

 

 

 

 

* * *

 

 

 

 

 

 

정의되지 않은 관계의 끝이 시사하는 바는 비교적 명확하다. 가볍게는 결별 무겁게는 파멸. 목구멍에 콱 박히듯 꽂힌 단어가 씁쓸했다. 주연은 괜스레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걸 본 이재현은 이주연 속도 모르고 웃었다. 지금 그거 섹스어필이냐는 실없는 소리를 건네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여간 잠시의 틈도 놓치지 않고 장난을 걸어오는 사람이었다. 주연이 답이 없자 생글생글 웃은 재현이 주연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샐샐 새는 눈웃음이 얄망궂었다. 그러면 이주연은 이재현 목선에 시선 고정하고 이빨을 박아넣는 상상을 했다. 저 하얀 목덜미에 어울리지 않게 새빨간 울혈을 남기고 헐떡이는 입술을 물어뜯는 상상. 정제되지 않은 맹수의 눈으로 재현을 바라보면서도 주연의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죄 순둥하기 짝이 없었다.

 

섹스어필 맞으면요. 저랑 잘래요?

 

물론 이재현 기준 순둥 남들 기준 퇴폐였다. 어쨌거나 그 말 들은 이재현은 별 재밌는 소리를 다 들은 이처럼 말간 웃음을 터트렸다. 못내 귀엽다는 듯 주연의 머리를 헝클어뜨린 재현은 뭉근한 손길로 주연의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었다. 금방이라도 머리채를 그대로 잡아 뜯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주연의 두 눈동자는 오롯하게 재현만을 담아냈다. 재현은 주연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꾹 짓눌렀다. 성욕에 따랐다기엔 도장을 찍는 듯한 행위였다.

 

 

한 여자가 있었어.”

 

 

갑작스런 화두였지만 주연은 묵묵히 재현의 말을 들었다. 재현의 손가락이 주연의 뺨을 느리게 두드렸다. 그와 동시에 재현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 같은 말투였다.

 

 

그리고 그 여자를 사랑한 남자가 있었지.”

“······.”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는 알게 됐어. 자신의 배 속에 아이가 생겼다는 걸 말이야. 여자는 선택해야 했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속이거나 도망자 신세가 되거나.”

 

 

잠시 말을 멈춘 재현이 숨을 골랐다. 주연을 바라보는 재현의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이주연 너라면 어떤 선택을 할래? ······도망쳤겠죠. 주연의 답을 들은 재현의 웃음보가 다시 한번 터졌다.

 

 

순진하긴. 틀렸어. 여자는 아이와 함께 죽었어야 했어. 하지만 어리석게도 아이의 아버지를 속이는 걸 택했지. 멍청했던 거야. 사랑을 부정당하고 배신감만 남은 사람이 어디까지 잔악해질 수 있는지를 몰랐거든.”

“······고발했군요.”

자백이었지. 금기를 어긴 여자와 아이를 저와 함께 죽여달라는 죄인의 청이었으니까. 하지만 죽은 건 여자와 남자뿐이었어. 왜냐면······”

 

 

주연은 말을 하다 말고 뜸을 들이는 재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재현은 주연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주연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온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재현이 이렇게 예고 없이 거리를 벌릴 때면 주연은 당장이라도 재현을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재현의 입술에서 그들의 끝에 관한 얘기가 나올 것 같았다. 그 즉시 안녕을 고하고 신기루처럼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 재현이 내뱉은 건 그보다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센터는 두 센티넬의 힘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이의 강력함이 아까웠거든.”

“······.”

부모와 같은 실수를 범하지 못하도록 아이에게는 어릴 때부터 혹독한 훈련과 함께 가이드가 붙여졌어. 아이는 혐오를 먹고 자라 성인이 된 해에 드디어 가이드를 죽였지.”

재현이 형.”

섹스는 안 돼도 키스는 되는데.”

“······.”

못 알아들었으면 다시 말해줄까? 지금 나한테 키,”

 

 

벌떡 일어난 주연이 긴 팔을 뻗어 재현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재현은 속절없이 주연과 가까워졌다. 주연의 입술이 재현에게로 돌진해왔다. 비자발적으로 말을 멈춘 재현의 입꼬리가 슬며시 위로 올라갔다. 난폭하게 부딪힌 입술 사이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알았다. 왜 처음 봤을 때 이 사람에게 맹목적으로 끌렸는지. 우리 둘 다 삶의 목적을 잃고 방랑하고 있었구나. 잠시 기댈 곳은 있어도 몸 의탁할 곳 하나 없어 떠돌다가 이제야 기어코 방랑의 종말을 선언했다. 주연의 머릿속에 재현과 함께했던 다섯 달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인간은 타인의 비극에 무심하다. 자신의 비극은 책 한 권을 통으로 써내도 부족하다고 여기면서 타인의 비극에는 지나치게 관조적이다. 몇 줄 되지도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해 희극을 내놓으라며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주연은 문득 헛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이다지도 이기적이다. 해서 주연은 안간힘을 다해 제 비극을 숨겼다. 가령 세상에 나자마자 가족에게 버림받았다는 지독한 클리셰나, 본인의 의사와는 일절 상관없이 타국으로 행한 이야기나, 인종차별로 상성이 맞지 않는 가이딩을 견디다가 끝내 그 가이드를 죽여버린 과거사나 하는 것들. 주연에겐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시였다. 그래서 제아무리 재현의 앞이라 해도 그런 것들을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댈 마음일랑은 요만큼도 없었다. 적당한 거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우스운 건 주연이 아등바등 벌려놓은 거리를 재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단번에 좁히곤 했다는 사실이었다. 허망해야 마땅했으나 기꺼웠다. 반가웠다. 그맘때쯤 주연은 자각했다. 이재현 이름 석 자가 이주연의 삶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하여.

 

5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재현의 곁에서 지내며 주연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참을 수 없는 욕망에 이끌려 입술을 맞댄 날 이후로 재현은 하루도 빠짐없이 주연을 찾아왔는데, 주연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그렇다는 말을 핑계 삼아 고분고분 재현을 따랐다. 재현은 센터의 규칙을 아무렇지 않게 깨뜨리는 이였다. 지극히도 당연한 손길로 아무렇지 않게 주연의 목을 죈 구속구를 벗겨냈다. 평소와 달리 서늘한 미소를 머금은 재현은 구속구에 쓸려 생긴 주연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쓰라린 고통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 등골이 오싹했지만 주연은 예의 그 덤덤한 눈으로 재현을 응시했다. 재현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세이렌의 노랫소리보다 유혹적이었다.

 

 

내 옆에 있으면 이거 안 해도 돼.

 

 

기실 그딴 말 없어도 이주연은 이미 이재현 옆에 있을 의사가 차고 넘쳤지만 입 밖으로 그 사실을 꺼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재현이 조건을 내걸면 주연이 거래를 수락하는 패턴은 그 이후로도 반복됐다. 담백한 쌍무적 계약관계. 누구 하나가 끊어버리면 감쪽같이 바스러질 얄팍한 신뢰를 가장한 채 간절히 상대방의 공명을 바라는 관계. 우스웠지만 그 부분을 꼬집지는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센티넬임을 자각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센터를 거스른 적 없는 주연에겐 재현이 선사한 모든 것이 전부 생경했다. 이재현과 함께 있으면 주연은 광활한 들판을 누비는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비로소 삶이란 걸 살아가는 듯했다.

구태여 언어로 표현하지 않았다. 뭣도 아니지만 눈 맞으면 입술부터 가져다 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몸정이 맘정 되는 건 또 아니었다. 몸정이라기엔 지고지순하게 순결을 지켰다. 간사한 혀 놀림으로 섹텐 올리다가도 막상 때 되면 내빼기 일쑤였다. 동정 못 뗀 애새끼마냥 빌빌거렸다. 이 이상을 넘어가면 끔찍한 미래를 목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도망쳤다. 결국 얘나 쟤나 죄 겁쟁이뿐이었다.

 

 

그랬던 두 사람의 관계가 묘하게 뒤틀리기 시작한 건 주연이 센터에 온 지 반년이 거의 다 되어가던 어느 날 주연에게 내려온 공문 때문이었다.

 

 

원소 계열 이주연(TYPE: FIRE) 센티넬의 가이드 매칭 일시가 정해졌습니다. 본 센티넬은 공문을 받는 즉시 서관 메인 홀로 와주십시오. 자세한 사항은 대면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 씨발.”

 

 

욕설을 짓씹듯 뱉어낸 재현의 목소리가 형형했다. 할 수만 있다면 눈빛으로 종이를 태워버릴 요량으로 공문을 매섭게 쏘아 본 재현이 다분히 신경질적인 기색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화가 나는지 씨근대다가도 체념하듯 한숨을 쉬는가 싶더니 제 성질 못 이기고 공기를 냉랭하게 얼렸다. 그 일련의 과정이 몇 번이고 반복되는 동안 당사자인 주연은 빳빳한 종이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저 재현을 지켜보며 경보가 울리지 않는 선에서 저리 분노를 표출하다니 참 대단한 능력이구나 생각했다. 비꼬려는 의도는 없었다. 순수한 감탄이었다. 이내 자신에게 성큼 다가온 재현을 마주한 주연이 순박한 소년인 체 무구한 얼굴로 물었다.

 

 

이제 좀 진정됐어요?”

진정? 진저엉? 넌 지금 진정하게 생겼냐?”

 

 

개 같은 센터 놈들. 내 언젠가 이 새끼들 다 부숴버리든가 해야지. 아직 맘이 다 안 풀렸는지 꿍얼꿍얼 불만을 토해낸 재현이 능숙한 손길로 주연의 구속구를 풀러 냈다. 이 짓도 며칠 안 남았다. 반년이 채워지면, 주연을 속박하던 구속구는 완전히 부서질 테니. 평소에는 뒤에서 끌러 줬던 것과 달리 앞에서 구속구를 풀어낸 탓에 주연은 재현에게 어정쩡한 자세로 안겨 있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재현에게서 물씬 풍겨오는 시원한 체향은 그의 능력과 똑 닮아 있었다. 재현은 물비린내라며 질색하곤 했지만 한평생 불을 다룬 주연에게는 더없이 달콤하게만 느껴졌다. 주연의 눈꺼풀이 느리게 내려갔다. 재현은 그사이 주연의 구속구를 씹어먹을 기세로 침대 옆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

, .”

 

 

저와 달리 침착한 어투가 거슬렸다. 불쑥 치미는 감정은 재현이 통제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탐탁지 않았다. 주연을 붙잡고 사탕을 사달라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따져 묻고 싶었다.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 나만 이런 건지. 재현 내면의 무언가가 끊임없이 보내는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 이상은 위험하다. 어쩌면 이 길 끝에서 재현을 기다리는 건 그의 부모와 같은 비참한 최후일지도 모른다. , 그들을 끝도 없이 경멸했던 게 무색했다. 그들의 피를 이어받은 나는 결국 똑같은 전철을 밟는구나. 강렬한 자기혐오가 일었다. 주연의 구속구를 풀어주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느껴졌던 타인보다 여실히 뜨거운 그의 체온이 손끝에서 맴돌았다. 이 순간, 재현은 제 손에 들린 것이 독배인 줄 알면서도 달게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갈 거야?”

“······가야 하죠.”

 

 

어딘지 묘하게 어긋난 대답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주연은 제 본심을 들키지 않으려 애써 저를 탐색하는 듯한 재현의 시선을 피했다. 주연도 알고 있었다. 지금 재현이 원하는 답은 따로 있다는 걸. 하지만 그럼에도 주연이 끝내 그 답을 입에 담을 수 없었던 건 비겁하기 때문이었다. 도망치려면 지금뿐이야. 출처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웽웽 맴돌았다. 도망. 도망이라. 주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주연은 여전히 센터의 명령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일개 센티넬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은 불확실한 감정의 파국에서 도망가고 싶은가 아니면 숨을 옥죄는 센터에서 도망치고 싶은가. 자신은 정녕 무엇으로부터 도망을 치는가.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센터에 입소한 모든 센티넬이 가장 먼저 배우는 불문율. 천지가 개벽해도 지켜야 하는 조건. 센티넬은 가이드와 함께한다. 이 자명한 명제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센티넬은 가이드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근원적인 지론부터 시작해······ 센티넬과 센티넬은 엮일 수 없을뿐더러 엮여서는 안 될 관계임을 뜻했다. 절대적인 금기. 폭풍전야와 같은 고요함이 주연의 눈동자를 일렁이게 만들었다. 재현은 모진 풍파에도 꺾이지 않을 듯 꼿꼿했고 그 앞에 선 주연은 세상을 다 산 이처럼 공허했다. 그들은 그렇게 태풍의 눈에 서 있었다.

 

 

가고 싶어?”

“······.”

나한테는 그런 거 안 와. 아니, 못 와. 멀쩡한 가이드 하나 또 죽이고 싶은 거면 계속 보내라고 했거든.”

 

 

톡 쏘듯 말하는 재현의 모습에 주연은 졌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재현이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며 저런 말을 꺼내는 이유야 뻔했다. 난 이렇게까지 했어. 이젠 네 차례야. 퍽 귀여운 거래 제안 아닌가. 주연은 문득 재현의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세게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물론 실제로 이행하지는 않았다. 따라올 재현의 반응이 조금 두려운 탓이었다. 어쨌거나 주연은 재현이 건넨 말에 답하고자 입을 열었다.

 

 

가기만 할 거예요.”

“···가이드는?”

 

 

주연은 해사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눈매를 사르르 접어 웃는 건 재현이 가장 좋아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그 결과 주연은 재현의 입을 다물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저를 종용하는 매서운 눈초리를 거두게 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주연이 재현의 손목을 살포시 잡았다.

 

 

같이 가요.”

?”

어차피 제 능력 버틸 수 있는 가이드는 없을 거예요.”

 

 

재현이 알 수 없는 눈으로 주연을 응시했다. 부족한 설명을 더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주연은 재현을 마주 봤다. 이미 주연에게 자신을 여과 없이 전부 보여준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응당 저 역시 재현에게 자신의 치부를 내어 줄 수 있었다.

 

 

가이딩 받던 도중에 죽였어요. 능력이 날뛰는데 살의를 못 참아서.”

 

 

그날, 서관 메인 홀의 벽이 화마를 이기지 못하고 녹아내린 가운데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센티넬이 가이드 매칭을 거부하며 감당할 수 있겠냐는 말을 남겼다는 소식은 온 센터를 휩쓸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센터에 미친개가 하나 더 나타났다.

 

 

 

 

 

 

* * *

 

 

 

 

 

 

번복은 없을 거예요. 이건 제 선에서 커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서요.”

 

 

자못 심각한 창민의 얼굴과 무료한 듯한 재현의 얼굴은 극명히 대조적이었다. 창민은 그러한 재현을 앞에 두고 답답하다는 듯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정작 재현은 한 손으로는 턱을 괴고 반대쪽 손으로는 볼펜을 휘휘 돌리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지금 오늘 아침 갑작스럽게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명령은 짧고 간단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이번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질 반란 분자 소탕 건에 재현도 참전하라는 명이었다. 당장 내일이 출정인 마당에 이렇게 예고 없이 떨어진 명령이 의미하는 바는 비교적 뚜렷했다. 너의 목줄을 쥐고 있는 건 우리니까 알아서 기라는 뜻이겠지. 센터의 미친개는 괜찮아도 미친놈은 용납할 수 없다 이건가. 필시 저번에 주연이 녹인 서관 메인 홀 때문임이 자명했다. 영악하게도 재현을 틀어쥐면 주연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수작이었다. 재현은 치졸한 센터의 간부 놈들을 향해 욕 한 바가지를 쏟아내고픈 마음을 애써 참았다.

 

 

이번엔 비전투 계열로도 못 맞춰줘요. 대신 즉결 처형이 가능해서 전원 사살해도 되긴 한데······ 문제는 아무도 형이랑 팀 하겠다는 사람이 없대요.”

없긴 왜 없어.”

지금 몰라서 물어요? 적군한테 죽기 전에 아군한테 죽고 싶은 사람은 없을걸요. 형이 근 한 달간 친 사고만 해도 몇 건인데요. 덕분에 형 악명만 드높아졌어요. 축하해요.”

 

 

창민이 영혼 없는 표정으로 짝짝 박수를 쳤다. 그 꼴이 퍽 웃긴 탓에 재현은 낭랑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창민은 빙글빙글 여유로운 재현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얼마 안 가 웃음이 멎은 재현이 창민을 마주 보며 두 눈을 반짝 빛냈다.

 

 

하나 있어. 나랑 같은 팀 하고 싶어 하는 애.”

누군데요?”

 

 

창민은 마지못해 재현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조금의 기대감도 비치지 않았다. 재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뜻 모를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재현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이 인간 방에 올 사람이 없는데. 창민이 의아함을 가득 담고 천천히 열리는 문을 빤히 응시했다.

 

 

저기 왔네.”

 

 

유쾌한 재현의 목소리 너머로 들어선 건 다름 아닌 주연이었다. 졸지에 마주치게 된 주연과 창민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그 가운데서 재현만이 못내 즐거워하고 있었다. 위에서 까라면 까라고? 좆 까라지, 난 내 좆대로 살 거라서.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창민이었다. 창민은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짚었다.

 

 

이주연 센티넬은 근신 중이잖아요.”

네 선에서 커버할 수 있잖아. 이주연 넣는 것쯤은.”

하지만,”

가이드 없는 센티넬이 폭주하는 꼴 보고 싶냐고 해. 그러면 찍소리 못하고 넣어주겠지.”

 

 

! 주연과 창민이 동시에 재현을 불렀다. 살짝 찡그린 재현이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가 뗐다. , . 나 귀 안 막혔어. 작게 좀 말해. 고막 터지겠다.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두 사람이 안 보이는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둘 다 가이드가 없어서 기각될 수도 있어요.”

 

 

수많은 말을 고르고 골라 겨우 뱉어낸 한 문장이었다. 사실 창민으로서는 재현의 제안이 영 내키지 않았다. 약아빠진 센터의 간부들이 그간 무엇도 요구한 적 없던 재현이 주연을 원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재현을 움직이는 카드로 주연을 확신하고 이를 저들 유리하게 쓰려고 들 게 불 보듯 뻔했다. 주연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재현이 센터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물 밑에서 얼마나 애를 썼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창민은 현 상황이 달갑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 창민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재현은 또다시 폭탄 발언을 투하했다.

 

 

그래? , 주연아. 그럼 니가 내 가이드 해라.”

 

 

간혹 센티넬과 가이드 두 특성을 모두 타고나는 자가 있긴 했지만, 재현과 주연에겐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러나 재현은 장난인지 진심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방싯 웃었다. 웃긴 건 이 와중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주연이었다.

 

 

, .”

 

 

네는 개뿔.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상식적인 창민만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여간 센티넬 놈들의 사고방식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재현에게 번복의 의지가 전혀 없음을 확인한 창민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역할은 끝이었다. 그들의 목줄을 쥐는 게 센터가 될지, 아니면 서로가 될지.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창민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번 전투를 기점으로 꽤 많은 것이 달라질 거라는 사실을.

 

 

나 내일 출정이야.”

내일이요?”

. 너도 같이 갈 거야.”

.”

 

 

이주연이 설핏 웃었다. 뚜렷한 이목구비 위로 흐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주연은 재현이 제게 무얼 요구하든 상관이 없었다. 재현이 바라는 바가 곧 주연이 원하는 바고, 재현이 원하는 바가 곧 주연이 바라는 바였다. 주연은 생전 처음 자신의 의지로 재현을 택했다. 그때부터 주연의 가치관은 재현으로부터 비롯됐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온 이가 처음 본 상대에게 각인하듯 주연은 그저 자신의 모든 것을 오롯이 재현에게 전가했다.

재현이 주연의 손을 끌어당겼다. 주연은 순순히 재현 쪽으로 걸어갔다. 주연의 손바닥을 손가락 끝으로 살살 쓸던 재현은 천천히 주연과 깍지를 꼈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마주 얽혔다. 발끝에서부터 찌릿하고 섬광과도 같은 희열이 올라왔다. 흐렸던 미소가 차츰 진해졌다. 이윽고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그들이 걸어가려는 길 위에는 그 무엇도 없었다. 그저 서로를 불빛 삼아 걸었다. 이름을 잃은 감정은 매 순간 깊이를 더했다. 더는 담백하지 않았다. 무거워진 감정은 밑바닥의 바닥에 가라앉았다. 진득하고 질척이는 원초적 욕망에서 기인한 것을 계약관계 따위의 허울 좋은 핑계로 속박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어쩌면 이미 깨달았을지도 몰랐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이 순간 명백한 것은 오직 하나. 그들 서로만이 서로에게 구원이었다.

 

 

 

 

 

 

* * *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 틈 사이 아슬아슬하게 몸을 기댄 재현이 거친 숨을 고르며 위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실전 경험이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다인원이 함께하는 대규모 전투는 낯설었다. 오히려 이런 류에 특화된 건 주연이었다. 미국 지부에 몸담았을 적 툭하면 양동 작전이나 테러 진압에 선발로 나서야 했기 때문이었다. 주연은 드디어 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며 순수하게 기뻐했지만, 그 얼굴을 마주 보고 있자니 목구멍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 그러나 실전에 투입되자마자 주연의 활약은 돋보였다. 빠른 상황 판단을 통해 경험에서 우러나온 다양한 전략을 제시했다. 그때부터 재현은 제 생각을 일절 배제한 채 온전히 주연의 지시에 몸을 맡겼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절벽 위에서 몸을 낮추고 있던 주연이 아래에 있는 재현에게 손가락으로 간단한 수신호를 보냈다. 재현은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세며 체내에 돌고 있는 능력을 손끝으로 모았다.

 

 

-

 

 

폭죽이 터지듯 하늘이 환히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역시 불은 사람의 이목을 끄는 데 제격이었다. 일부러 보란 듯 화려한 기술을 연달아 사용하는 것에서 재현을 향한 배려가 느껴졌다. 혹여나 망설일 재현을 위해 시간을 더 벌기 위함이겠지. 이럴 때 보면 이주연은 종종 이재현이 가이드까지 죽인 미친개라는 걸 잊는 것 같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재현이, 타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 따위에 망설일 리가 없는데.

재현은 단숨에 절벽 위로 올라왔다. 육안으로도 확연히 보일 만큼 적들이 가까워졌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별천지에 혼란스러워 사리 분간이 잘되지 않는 찰나의 시간. 재현이 노린 타이밍이었다. 눈을 아래로 내리깐 재현은 적들의 머리 위로 얇은 얼음 막을 넓게 펼쳤다. 이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높이에, 그러나 너무 멀어지지는 않게. 이쪽은 둘이요, 저쪽은 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재현은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재현이 집중할 시간을 벌어주고 있을 이주연을 믿었다.

 

그 애는 강한 애니까. 우리는 죽으러 온 게 아니라 싸우러 온 거니까.

 

이윽고 재현이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재현이 허공에 글씨를 쓰듯 부드럽게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얼음 막이 귀가 찢어질 듯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산산이 조각났다. 재현이 의도한 대로 첨예하게 벼려진 가시 파편들이 일제히 아래로 내리꽂혔다. 햇빛에 반사되는 얼음 조각들은 눈이 부시도록 반짝였다.

주연은 그 가운데 서 있는 재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대로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아득함이었다. 주연은 재현의 근처로 적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그의 발치에 작은 불씨를 심어 놓으며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씩 재현에게 가까워질수록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내면에 휘몰아쳤다. 재현이 고개를 돌려 주연을 응시했다. 언뜻 스쳐 간 미소엔 숨길 수 없는 따스함이 배어 있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이주연에게만 오롯이 허용된 따스함이었다. 고통에 가득 찬 타인의 비명 따위는 그들에게 있어 의미 없는 소음에 불과했다. 주연의 눈이 사르르 접혔다. 어여쁘게 휜 입꼬리는 재현을 향했다. 주연은 그렇게 자신의 악이자 선이며 구원이자 파멸인 상대를 끌어안았다.

 

 

나 사실 누구랑 같이 싸워 본 건 처음이야.”

 

 

막사에 도착하자마자 피비린내가 배인 전투복을 벗어 던진 재현이 툭 말했다. 주연은 재현의 전투복을 곱게 접어 제 옷 옆에 가지런히 두었다. 주연은 어렵지 않게 재현의 과거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혼자 모든 적을 죽여버리고 웃었겠지. 방어 기제로 그 예쁜 웃음을 사용하는 사람이니까. 어쨌거나 타인과 함께한다는 감각은 재현으로서 정말 생경한 것이었고, 무엇보다 신기한 건 그것에서 비롯되는 모든 감정이 마냥 좋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그건 그 타인이란 자가 이주연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이재현은 생각했다. 고집 세고 자존심 드높은 이재현이 협동이라니, 오늘 전투만 해도 창민이 봤다면 아마 기겁을 했을 터였다. 이렇듯 재현의 복잡한 심리가 잔뜩 담긴 한 문장이었지만 주연은 이에 대해 참으로 산뜻한 답을 내놓았다.

 

 

좋네요. 형의 처음이 저라서.”

별난 놈.”

특별한 거죠, 형한테.”

하여간 한 마디를 안 지지.”

형이 원하기만 하면 지는 건 언제나 저예요.”

 

 

주연이 항상 제게 진심으로 부딪혀 온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가끔씩 그 진심이라는 것의 농도가 너무나 짙어서, 재현은 이대로 콱 질식사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시답잖은 생각이 들곤 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재현은 짐짓 주연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척 화제를 돌렸다.

 

 

이거 끝나면 여행 갈까.”

같이 가요.”

 

 

기다렸다는 듯 냉큼 말하는 모양새가 퍽 앙큼했다. 재현은 터지는 웃음을 막지 않았다. 둘 다 센터에 매인 몸이라 여행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여행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재현은 노래 부르듯 흥에 겨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도 우릴 모르는 곳으로 가자. 어느 여관에 짐을 풀고 원하는 만큼 걷다가 배가 고프면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는 거야. 졸리면 자고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고. 그러다가 질리면 다시 또 훌쩍 떠나는 거지. 주연은 상상 속 즐거워하는 재현의 옆에 자신의 형상을 그려 넣었다. 기쁘다는 듯 생긋 웃은 주연이 재현의 이마 위로 살포시 입을 맞췄다. 경건해 보이기까지 하는 입맞춤이었다. 주연은 속삭이듯 답했다. , 좋아요.

 

 

 

 

PM 11:30 본부 막사

 

 

 

 

다들 알겠지만, 오늘 발생한 대규모의 살상 전투는 이제껏 있었던 게릴라전과는 비교가 안 될 수준이었다.”

 

 

이번 작전의 총사령관은 정신 계열 센티넬이었다.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다던가.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큰 축복인 망각을 받지 못한 인간. 총사령관은 저런 중책을 맡기엔 많이 어려 보였지만, 재현은 그가 살아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하기야 저런 끔찍한 능력을 가졌다면 미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제 앞의 총사령관에 대해 상당히 냉정한 평가를 내린 재현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안 죽였으면 오늘도 그냥 게릴라전이 됐을걸.”

 

 

싸늘한 시선들이 일제히 재현에게 날아와 꽂혔다. 재현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주연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재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서도 주연의 상태를 어렴풋이 짐작했는지 조용히 한쪽 팔을 뒤로 뻗어 주연의 손을 세게 잡았다가 놓았다. 그제야 주연은 본인도 모르게 넘실거리던 살기를 갈무리했다. 재현은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더니 다시 말을 시작했다.

 

 

내 말이 틀려? 어제까지만 해도 양측 모두 피해가 거의 없는 데다가 쓸데없이 시간만 질질 끌었잖아. 마치 목적이 반란이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이재현!”

 

 

재현을 일갈하는 매서운 목소리와 함께 모랫바닥의 돌들이 들썩였다. 찰나를 놓치지 않은 재현의 시선이 미끄러지듯 바닥을 향했다. 염력인가. 염력치곤 너무 조절에 미숙한데. 염력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로 하잘것없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닐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구태여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재현이 코웃음을 쳤다.

 

 

? 찔리기라도 해? 아아, 꼭 반란이어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

 

 

방금 염력을 썼던 노란 머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럴 줄 알았다. 이래서 본부고 작전이고 다 귀찮았다. 전시 상황에서 규율을 어기면 위험하다며 어떻게든 저를 구슬리려는 이주연의 노력이 퍽 가상하기도 하고 제가 자신의 말을 안 들을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이 꽤 귀엽기도 해서 큰맘 먹고 온 거였는데 역시 이럴 필요가 없었다.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통하는 건 말이 아니라 힘의 논리였다. 재현은 작게 혀를 찼다.

 

 

이번 작전에서 공을 세우면 엄청난 포상을 해주겠다고 한 모양인데,”

흐익······!”

이를 어쩌나. 내가 볼 때 여긴 폐기물 처리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은데.”

 

 

노란 머리는 자신의 눈앞에 겨눠진 얇고 뾰족한 얼음 작살을 마주하더니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그때, 총사령관이 탁자를 세게 내리치며 외쳤다. 그만! 여기서 더 밀고 나갈 수 없음을 알아차린 재현은 순식간에 얼음을 거뒀다. 노란 머리와 재현을 번갈아 노려본 총사령관이 말했다.

 

 

두 사람 모두 각자 막사로 돌아가 있도록. 회의는 둘 없이 진행한다.”

 

 

고리타분하시긴. 재현은 아무렴 상관없다는 태도로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막사에서 빠져나왔다. 재현의 옆에서 그의 얼굴을 기민하게 살피던 주연이 무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서 겁이라도 줄까요. 별 웃긴 얘기를 다 들었다는 양 맑은 웃음을 터트린 재현이 주연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아서라. 석연찮은 부분도 있고··· 그다지 분란을 만들고 싶진 않아. 아직은.”

 

 

주연은 나른한 맹수라도 된 것처럼 재현의 손길을 받으며 살풋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재현의 말에 답을 하지는 않았다. 이주연은 이재현과 달리 이 상황을 그대로 묵과할 생각일랑은 조금도 없었으므로.

 

 

 

 

 

 

 

 

제길, 그 새끼는 대체 어떻게 눈치를 깐 거야?”

 

 

막사로 복귀한 노란 머리가 신경질적으로 뇌까렸다. 재현은 단순히 회의에 참여한 이들을 도발하기 위해 넘겨짚은 가설에 불과했지만, 재현에게 간파당했다고 생각한 노란 머리는 초조한 상태였다.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초라한 염력. 그리고 그보다 더 한미한 조절력.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고 센터에서 내쫓길 날만을 기다리던 노란 머리에게 찾아온 일생일대의 기회가 이번 작전이었다. 상대가 반란군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곳에 오기 전 이미 언질 받은 정보였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전투에 참여했던 건데, 자잘한 국지전이 전부일 거라던 사전 정보와 달리 오늘 일어난 전투는 진짜전투였다. 피가 튀기고 살점이 뜯기며 비명이 난무하는. 노란 머리가 떨리는 손으로 송수신기를 찾았다. 센터와 연락해야 했다. 그러면-

 

 

동작 그만.”

 

 

지옥에서 온 사자의 목소리가 저러할까. 등골이 오싹했다. 굳어버린 몸체가 뻣뻣하게 돌아갔다. 그가 마주한 건 싸늘하게 식은 두 눈동자였다. 안광조차 없는 눈동자에는 그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막사 안에 조악하게 달아 둔 전등이 하나둘 꺼졌다. 코끝을 맴도는 건 지독한 탄내였다.

 

 

개미 새끼인 줄 알고 겁만 주려고 했는데.”

, 잠깐! 일단 진정하고 내 말부터 좀,”

쥐새끼라면 사치지.”

 

 

노란 머리가 들고 있던 송수신기가 한순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명백한 경고였다. 노란 머리 본인 역시 언제라도 저렇게 까만 재가 되어 단숨에 죽을 수 있다는 경고. 말없이 재현과 함께 있는 모습만 봐서 얕본 게 패인이었다. 공포에 잠식된 노란 머리는 가쁜 숨을 헐떡였다.

 

 

알고 있는 거, 다 불어. 그럼 목숨은 살려줄게.”

 

 

마지막 전등의 불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해사하게 웃는 얼굴은 죽음을 부르는 사신(死神) 그 자체였다.

 

 

 

 

 

 

어디 다녀왔어?”

“······, 쥐 소리가 나는 것 같아서.”

, 최악. 잡았어?”

, 죽이진 않았지만요.”

잘했어.”

 

 

아직 능력 사용의 여파가 남아 뜨끈한 체온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재현으로부터 한 발짝 뒤로 물러난 주연이 무구하게 웃었다. 재현은 무어를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주연을 관철하듯 빤히 응시했다. 그때, 막사 안으로 전령이 들어섰다. 본부에서 작전 회의가 끝난 듯했다. 재현이 작전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전령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주연은 조금 전 노란 머리의 막사에서 있었던 일을 복기했다.

 

 

“······이런 데에 금제(禁制)를 걸어둘 줄이야.”

 

 

두려움으로 가득 찬 눈동자를 한 주제에 아무런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던 꼴이 가소로웠다. 그 탓에 비록 얻은 건 없었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히 인지할 수 있었다. 이 작전은 센터가 놓은 커다란 덫이었다. 불유쾌한 감정이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듯했다.

 

 

딱히 들을 것도 없었어.”

 

 

귀찮다는 얼굴로 늘어지게 하품을 한 재현이 가벼이 어깨를 으쓱였다. 카우치에 걸려 있던 숄을 집어 든 주연이 재현에게 숄을 둘러 주며 말했다. 밤은 쌀쌀하니까요. 정작 중요한 내일 작전에 관한 내용은 조금도 묻지 않는 담담한 모양새에 재현은 푸스스 풀어지듯 웃었다.

 

 

내일도 잘 부탁해.”

.”

 

 

한껏 과장된 몸짓으로 중세 시대일 적 기사가 맹세하듯 재현의 손등에 살포시 입을 맞춘 주연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장난기 만연한 얼굴을 마주한 재현이 낭랑한 웃음소리를 자아냈다.

 

 

너 되게 재미없는데, 진짜 웃겨.”

 

 

주연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은 채 눈동자에 재현의 얼굴만 아로새겼다. 여전히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재현이 주연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흐트러뜨렸다. 손가락 사이로 결 좋은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빠져나갔다.

 

 

동쪽 협곡, 알아? 작전이랄 것도 없어. 그냥 거기에 우리 둘이 가래.”

“······나머지는요?”

서쪽 고원에서 백병전이라도 할 생각인가 보던데.”

 

 

가장 험준한 지형에 배정된 인원이 고작 이재현과 이주연 두 사람이라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었다. 분명 같은 편으로 전투에 차출된 걸 텐데, 대놓고 편 가르기라니. 부자연스러울뿐더러 불공평한 작태였다. 하지만 주연과 재현 둘 모두 그저 속내에 말 못 할 얘기들을 담아둔 채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 모든 것들이 센터가 만든 무대라면 그 위에 올라가 있는 우리는 배역을 모르는 배우겠지. 그래도 이 우스꽝스런 연극은 대본이 존재하지 않기에 이 극의 끝을 우리의 손으로 써 내려갈 수 있는 거 아니겠어. 비극인지 희극인지 모를 촌극이었다.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진 밤은 깊어만 가고 돌아오지 않을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와 반비례해 차오르는 애달픈 감정은 오늘도 이름을 잃은 채 두 사람 사이를 부유했다.

 

 

 

 

 

 

* * *

 

 

 

 

 

 

빠른 손놀림으로 거침없이 서류에 사인해 나가던 창민의 손이 갑자기 멈췄다. 창민이 바라보고 있는 서류는 재현이 주연과 함께 나간 전투에 관한 내용이었다. 예고 없이 등장한 반란군부터 시작해 출정 하루 전 발생한 인명 피해로 느닷없이 전투에 나가게 된 재현까지. 마치 잘 짜인 판처럼 너무나 완벽하게 아귀에 들어맞았다. 그 어떤 의혹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더없이 깔끔한 일 처리. 이상하게 평소보다 서두른 듯한 관련 서류들의 승인 속도. 입술을 짓씹은 창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선배, 이 건이랑 관련된 서류들이요. 처리가 너무 빠르지 않아요?”

 

 

창민의 말에 그가 들고 있는 서류를 확인한 선배의 얼굴이 섬찟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무렇지 않은 척 글쎄, 하고 대꾸하는 선배의 모습에 창민은 뭔가가 있다는 걸 확신했다. 의심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창민이 찾은 이는 센터 내에서 칼같이 융통성 없기로 유명한 관리3팀 팀장이었다. 꼬장꼬장한 성격 탓에 동기들이 승진하는 동안 관리3팀에서만 몇 년째 머무르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소문이었다.

 

 

팀장님, 관리1팀 지창민입니다. 여쭤볼 게 있어서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지창민이면······ 이재현이랑 이주연 담당이었나.”

 

 

대충 전말을 짐작하겠다는 듯 알쏭달쏭한 미소를 머금은 팀장이 확인차 물었다. 그러자 창민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 맞습니다. 힘겹게 나온 창민의 대답과 대비되게 여상한 목소리의 팀장이 말했다.

 

 

굳이 3팀에 있는 나를 찾아온 걸 보면 답은 하나지. 이번 작전에 관해서 물으러 온 건가?”

“······너무 완벽해서 이상합니다.”

자네는 헛똑똑이가 아닌가 보군.”

 

 

창민의 의심이 정답임을 시사하는 팀장의 말에 놀란 창민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팀장은 끌끌 혀를 차더니 창민을 애잔하게 쳐다봤다. 창민의 두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를 마주한 팀장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팀장을 통해 듣게 된 이번 작전의 진실은 창민 혼자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운 것이었다. 창민은 앞뒤 잴 것 없이 자신의 자리로 뛰어 돌아왔다. 연신 헛손질을 반복한 끝에 송수신기를 찾은 창민이 급히 재현에게 연락을 취했다. 창민의 머릿속에서 아까 팀장이 했던 말이 끝없이 반복 재생되었다.

 

과도한 능력 사용으로 체내에 악성이 많이 쌓여 가이딩의 효과가 전혀 없는 센티넬. 약한 능력과 조잡한 조절력으로 가이드를 배정받지 못한 센티넬. 상성이 맞는 가이드를 찾지 못한 센티넬. 자네는 이들의 공통점이 뭔지 알겠나. 그래, 가이딩을 못 받는다는 거야. 그렇다면 센터의 결정도 알겠군. 센터는 으레 그래왔듯 그 빌어먹을 간부회의에서 이들의 폐기처분을 결정했다. 반란군은 없어. 그들을 죽이기 위한 간부들의 정예 군대만 있을 뿐이지.

 

받아······ , 제발 좀···! 받으라고, 받으란 말이야!!!”

 

이재현을 왜 보냈겠나. 개미 떼 사이에 등장한 맹수는 환영받지 못해. 개미들은 그를 더 위험한 곳으로 내몰겠지. 전시 상황에 가이딩 없이 쉬지 않고 능력을 사용하는 센티넬이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지,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PM 4:00, 비어 있는 재현의 막사. 카우치 위에 놓인 송수신기에는 계속해서 빨간 불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폭주. 이재현과 이주연 둘 중 하나만 폭주해도 그 일대는 전멸이야. 센터는 마침 폐기처분도 하고 주인을 물어뜯기 전에 미친개도 없애버리겠다는 비열한 속셈인 거지.

 

창민이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소리 없는 울음이 끝도 없이 새어 나왔다. 지독히도 화창한 오후였다.

 

 

 

 

 

 

* * *

 

 

 

 

 

 

, 뒤쪽!”

 

 

주연의 외침에 곧바로 반응한 재현이 자신에게 날아오는 창을 단숨에 얼려버렸다. 텔레포트 센티넬이라도 있는 건지 아까부터 일정한 규칙성 없이 무작위로 화살이며 창이며 하는 것들이 날아왔다. 협곡이라는 지형적 특성상 어디에 적이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다시 말해, 재현과 주연의 위치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상대편과 달리 두 사람은 당장 눈앞으로 닥쳐오는 공격을 막기에도 급급했다.

협곡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사방이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정말 이곳에 반란군이 있기라도 한 건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래서 유인책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협곡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면 시야 확보를 위해 위에 있어야 한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래, 실은 조금 오만하게 굴었던 걸지도 모른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니까 반란군 따위는 손쉽게 쓸어버릴 수 있을 거라고. 그리 생각했다.

 

 

이주연!”

 

 

하늘에서 화살 비가 쏟아졌다. 주연의 눈동자가 번뜩 빛났다. 그와 동시에 화살들이 전부 불타올랐다. 화살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불길이 낙화하는 꽃잎처럼 일렁였다. 파괴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압도적인 힘에 놀란 적들의 동태가 일순 흐트러졌다. 틈을 놓치지 않은 재현이 인기척이 느껴진 곳으로 차례차례 능력을 쐈다. 사람을 통째로 얼려버릴 정도로 강력한 능력이었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한기가 척추를 타고 발끝으로 내려갔다. 이가 시릴 정도로 통렬한 냉기였다. 손바닥에 생채기가 날 정도로 손을 세게 말아쥐자 조금씩 감각이 돌아오는 듯했다. 저릿저릿한 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한 끝에 재현은 겨우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

 

 

재현은 몸을 흠칫 떨었다. 재현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쥔 주연의 손을 통해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재현이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능력을 끌어다 쓴다는 걸 알아챈 주연이 재현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몸을 강제로 혹사하는 중이라는 건 주연 역시 재현과 마찬가지였다. 재현의 반작용이 동사(凍死)의 위협이라면 주연의 반작용은 열사(熱死)의 위협이었다. 몸 안의 장기를 전부 녹여버릴 정도로 맹렬한 뜨거움이었다. 가이드를 거부한 대가로 감내하고자 했던 통각이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가이딩을 거부한 두 센티넬은 맞닿은 서로의 손 너머로 상극인 기운을 느끼며 빠르게 진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일시적이나마 맛본 안정감은 달았다.

 

 

북서쪽에 둘, 북동쪽에 셋.”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느낀 달콤함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누구보다 냉정하게 전투에 임할 뿐이었다. 주연과 재현이 인외의 능력을 보이거나 잠깐의 흔들림을 신속하게 진정시킬 때면 적들은 티가 나게 동요했다. 주연은 그 찰나 타인의 움직임을 포착해 재현에게 알렸고, 재현은 주저 없이 그들을 사살했다. 뒤처리는 다시 주연의 몫이었다. 오가는 대화는 적었으나 완벽에 가까운 플레이였다.

 

 

“······이상하네.”

 

 

주연과 재현의 저력이 이 정도나 되는지 예상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애초부터 협곡에 적은 수의 인원만 보낸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중추가 되는 인원을 전부 죽이고 나자 더는 공격이 쏟아지지 않았다. 두 사람 역시 전열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기에 절벽 옆 비좁은 동굴 사이로 몸을 숨겼다.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긴 재현이 기이함을 느끼고 중얼거린 것도 그때였다. 식은땀을 식히기 위해 동굴 벽에 아무렇게나 기댄 주연이 그 말을 듣고는 느리게 눈을 내리깔았다.

 

 

반란군이라기엔 잡스러워요.”

능력이 부족한 건 아니야. 다만······”

살기가 없죠.”

살기가 없어.”

 

 

거의 동시에 내뱉은 말은 같은 내용을 가리키고 있었다. 반란군은 으레 증오에 차 있었다. 센터를 향한 복수심에 칼을 갈고 울분에 찬 목소리를 내질렀다. 정제되지 않은 악의를 그대로 내보이며 누구보다 거센 살기로 달려들었다. 죽음을 각오한 몸짓으로. 그러나 협곡이라는 지형을 이용해 몸을 숨기고 텔레포트로 간을 보듯 공격하는 건 반란이라는 그들의 목적과는 사뭇 동떨어진 행동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용병단쯤으로 치부하기엔 새것처럼 잘 다듬어진 무기의 출처를 설명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전면전으로 나오지 않고 굳이 이렇게 나오는 모습이······

 

 

능력을 소진시키려는 것 같잖아.”

 

 

재현이 중얼거린 말에 주연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일부러 치고 빠지는 전략을 사용해 센티넬의 능력을 개방시킨다. 그 후, 간헐적으로 공격을 쏟아부어 회복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저열한 속임수에 가까운 전술이기에 실제 전투에서 사용된다는 얘긴 들어본 적 없었지만 분명 알고 있는 병법이긴 했다. 이것이 가리키는 결과는 오로지 하나였다. 센티넬의 폭주. 재현도 주연과 같은 결론에 다다랐는지 눈빛이 돌변했다. 드디어 전투 첫날부터 느껴졌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반란군이 아니에요.”

간부들의 하수인일 확률이 높지.”

어차피 쓰고 버릴 패들이니 전멸해도 상관없다는 거네요.”

, 말로만 폐기물 처리장인 줄 알았더니··· 진짜였잖아?”

 

 

재현이 허공에 대고 웃었다. 어이없다는 듯한 헛웃음이었다. 이미 마모되어 더는 상처 받지 않을 줄 알았던 심장께가 뻐근하게 아팠다. 센티넬을 소모품으로 보는 센터의 간부들에겐 질릴 대로 질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깊은 절망의 수렁을 느끼는 거로 봐서는 어쩌면 그들에게도 일말의 인간성은 남아 있을 거라 기대를 했었는지도 몰랐다.

 

미친 척 온갖 사고를 몰고 다니며 위험인자를 자처했다. 그러면서도 센터의 개라는 신분을 벗어나지 않았다. 되려 미친개라는 이명 아래 더러운 짓도 서슴지 않았다. 감정을 버리고 이성을 배제하고 끝내 마지막 남은 인간성의 말로마저 저버렸다. 그리해야 살 것 같아서. 이 질긴 목숨줄 그렇게라도 이어가기 위해서.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센티넬이기에 재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저항이었고 차악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재현에게 남은 건 처절한 추락이자 배반이었다. 아니, 배반이라 할 수도 없었다. 애초부터 그들은 재현의 편이었던 적이 한순간도 없었으니까.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있던 재현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재현이 마주한 건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이재현 한 사람만을 온전히 비추고 있는 주연의 까만 눈동자였다. , 너는. 이주연 너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삶의 마지막 장에 선 이재현은 혼자가 아니었다. 잔뜩 비틀리고 뒤엉켜 본래의 빛을 잃었을지라도 이재현이 이재현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게끔 하는 사람이 남아 있었다. 여기, 그의 앞에. 두 발 붙이고 서 있는 이 세상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이상 따위는 죽어버렸다고 온몸으로 알려주는 이가 있었다. 주연의 목을 와락 끌어안은 재현이 성마르게 입술을 맞부딪혔다. 그들답지 않게 서툴고 조심스러웠으나 다분히도 서러운 입맞춤이었다.

 

 

 

 

 

 

 

서쪽 고원. 초반에 강세를 보였던 진압군 쪽이 차츰차츰 반란군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어찌 된 일인지 곳곳에서 소규모의 능력 폭주가 일어났다. 능력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센티넬들의 폭주라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 적은 양의 출혈이 점차 가중되니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가 되었다. 그쯤 되니 다들 이 전투의 내막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들은 이곳에서 결코 살아나갈 수 없으며 여기가 바로 그들의 무덤이 되리라는 것을. 심지어 누구보다 앞장서서 주연과 재현을 동쪽 협곡으로 몰았던 몇몇은 그들을 따로 보낸 것이 자충수였다며 수군거렸다. 물론 그 쑥덕임은 오래 가지 못했다. 간사한 혀를 더 놀리기 전에 죽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시작된 화마가 바싹 마른 초원을 태웠다. 피를 머금은 풀잎을 불쏘시개 삼아 점점 몸집을 불렸다.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삼켜버리는 불길은 길들지 않은 맹금류 같았다. 저토록 커다란 불을 다룰 수 있는 자는 현존하는 센티넬 중 이주연 한 사람뿐이었다. 처음엔 반란군을 공격하는 줄 알고 환호했던 이들은 곧이어 자신들도 안전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혼비백산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퇴로는 이미 막혀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빙벽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빙벽을 넘어가면 갑작스레 튀어나온 얼음 작살에 의해 꼬챙이 꿰어지듯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사람들은 깨달았다. 이주연과 이재현이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을 몰살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어째서, 대체 왜 다 죽이려는 거야···!”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남자가 도망치던 도중 넘어졌다.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화염 앞에서 누구에게 묻는지 모를 질문을 남긴 남자는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모습을 감춘 채 무미건조한 얼굴로 불길을 조종하던 주연은 일각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남자가 듣지 못한 답을 들려주었다.

 

 

“···우리가 반란군이니까.”

 

 

반란군이 없다면 반란군이 되면 되질 않나. 결국 이 전투는 반란군과 진압군의 싸움으로 기록될 것이었다. 센터가 없는 반란군을 만들어냈다면, 주연과 재현은 그 반란군을 얼마든지 자처할 수 있었다. 머잖아 이곳에 재앙을 불러일으킨 자들이 주연과 재현이라는 걸 금세 알아챈 누군가가 미친개들이라며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연은 말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미친개가 아니라 미친놈이 되어보려고.”

 

 

이왕이면 이재현한테 미친 새끼로. 주연은 평생 내뱉지 못할 속엣말을 삼켰다. 주연은 재현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줄 수 없었다. 그건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다 없애버리면 된다. 다만 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함께할 수는 있었다. 주연에게 그리고 재현에게 서쪽 고원은 최후의 격전지였다. 능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린 몸은 쉴 새 없이 경고를 보내왔고 심장은 터질 듯이 뛰어댔다. 하지만 이번에야 비로소 과거의 굴레를 제 손으로 끊어낼 차례였다. 그들은 그 기회를 마다할 생각이 없었다. ‘다음이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텅 비어버린 고원은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자욱한 연기만이 방금 이곳에서 일어난 학살의 흔적을 가리키고 있었다. 핏빛으로 물든 풀잎이 바람을 따라 흐늘거렸다. 까마귀 울음소리만 남은 벌판에 위태롭게 선 두 사람이 빛을 잃어가는 황혼을 마주했다. 지나치게 높으며 지나치게 낮았다. 그러나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목덜미 옥죄던 구속구를 스스로 벗어던진 이들이었다. 점차 더 짙은 어둠이 사위에 내려앉자 그들은 그림자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막이 내리고 조명이 꺼졌다.

 

여명이 찾아오지 않을 밤은 아침과 함께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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