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는 총몽의 모터볼을 차용했습니다.
세상이 한 번 붕괴된 것은, 그리하여 흔적도 남지 않고 깨어진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 세계를 지탱하던 기틀이 무너지고, 회복조차 불가능하던 시기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탄생 이래 최초로 시간은 다시 구분 지어졌고 인류는 온갖 번지르르한 미사여구를 붙이는 대신, 간결하게 그 시기를 명했다. 대재앙apocalypse이라고. 간단하고 확실하게, 역사를 대재앙 이전과 이후로 구분했다.
대재앙의 전조는 과학자들이 예상했던 대로 핵무기를 필두로 한 세계 3차 대전이 발발한 것이 아니었다. 인류가 통제할 수 없는 바이러스가 퍼져나간 것도 아니었고, 환경오염으로 인한 기후 위기도 아니었다. 하지만 태양의 활동 양상이 변하고, 행성의 자기장이 뒤틀리는 급작스러운 변화를 두고 멸망의 전조라는 걸 부정하기란 마땅치 않았다. 그러니 그게 곧 세계의 파멸이고 성서에 묘사된 세상의 종말이라는 것이다. 그 이래 적잖은 시간 동안 아비규환이고 혼돈이었으나 그게 정말로 끝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인류의 멸망은 성큼 다가왔으나 그만큼 물러났기에. 수만 년간 이룩했던 모든 종류의 발전이 인류 기원, 그 언저리로 돌아갔을지언정 그랬다. 세상은 무너지고 인류는 아주 오랜 지리멸렬한 암흑기를 거쳤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겨우 이전의 영광을 되찾았다 볼 수 있는 지금.
사첼라야는 언제나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오늘 밤, 판데모니엄에서 2147번째 경기가 펼쳐집니다.
아직도 세상은 제정신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는 모양이라고, 이재현은 생각한다.
밀랍으로 만들어진 새
미사라
도시의 상공에는 새가 없다. 처음에는 멸종으로 사라졌고, 운이 좋아 멸종을 피해간 일부 조류는 상공에서 사고가 나는 걸 막기 위해 범지구적 차원에서 모조리 잡아들였다. 인류는 더 이상 자연과 공존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그럴만한 발전을 갖추었다 여기기 때문이었다. 한 번의 멸망을 목도한 인간들은 잔혹한 짓을 저지르는데 일말의 가책이 없고, 그래서 사첼라야에는 새가 없다.
분명 어둠이 내렸으나 거리 곳곳의 조형물과 불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건물들은 도시를 환하게 밝혔다. 터미널의 너른 전면 창으로 도시 한복판에 거대한 홀로그램 광고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광경이 엿보였다. 홀로그램은 반짝거리는 잔상을 남겨뒀다가 다시 색이 차오르고, 모습을 바꾸는 홀로그램은 이제 새로운 시작을 위한 식민지 행성으로서의 이주를 권고하는 광고의 모습을 했다. 이곳은 잠들지 않는, 불면의 도시 사첼라야Sa Chellya였다.
인류의 오랜 역사를 간직하는 지구, 사첼라야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바쁜 걸음으로 빠져나가려던 재현이 매끄러운 블록을 잘못 밟자 요란한 노래와 AI의 나레이션이 흘러나왔다. 아이씨…. 재현은 인상을 팍 쓰고 머리를 흩트렸다.
그는 막, 장장 스물다섯 시간의 비행을 마친 참이다. 코링턴에서 출발해 갖가지 볼거리로 명성 높은 세 도시 위를 지나(비록 경유하지 않은 탓에 구경할 순 없었지만) 사첼라야로 도착하는 기나긴 일정이었다. 이재현의 한 치도 오차 없는 계획대로라면 이튿날 오후 두 시쯤 비행선이 정박해야 옳았으나, 여러 가지 악운이 겹친 탓에 일정이 꼬여도 단단히 꼬인 것이다. 코링턴의 비행선 정류장에서 탑승을 기다릴 때부터 예감이 안 좋았다. 그냥 넘기지 말았어야 했는데. 분명 전날 확인한 일기예보엔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이재현이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도 정확했지만, 문제는 그의 뒤통수를 치고 나타났다. 부품 결함으로 출발 시각이 미뤄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비행 중간에 난기류를 만났다. 그러니 누굴 붙잡고 탓할 수도 없어 재현의 계획은 그렇게 한 번 어그러졌다.
코링턴에서 사첼라야 사이의 세 도시인 차혜, 예략과 갈리파 위를 가로지르는 비행은 스물두 시간이면 끝나야 했으므로 두 번째로 어그러졌다고 볼 수 있겠다. 계획대로라면 점심을 먹을 때 즈음 이재현은 코딱지만 한 판데모니엄 경기장을 육안으로 목격해야 했다. 하지만 그 시각 그가 본 것은 예략과 갈리파를 휘감아버린 거대한 유루강이었다. 비행선에서 내린 게 오후 두 시가 아니었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오랜만이기도, 오랜 비행의 여파이기도 해 뻐근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에스컬레이터에서 발을 내려디뎠다. 두 시 도착이었다면, 그러니 계획이 어그러지지 않았다면 지금쯤 재현은 판데모니엄에 도착해 선수들 상태를 살피고 경기에 출전하기 직전까지 결함을 손보고 있어야 했다. 경기에 멀쩡히 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던 중이어야 한다. 합법이 된 이래로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는 경기 시작 시각은 아홉 시였고, 흘끗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보면 시침은 이미 9를 향해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그럴 리도 없는데 유독 바삐 전진하고 있는 듯 보였다. 역시 제시간에 맞춰가긴 글렀다는 불길한 감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걸음을 재촉해 정류장 바깥으로 나섰다.
머리 위로는 여전히 비행선 여럿이 배회하다 화물과 승객을 가득 싣고 목적지를 향해 떠나갔다. 도시의 전경과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며 우뚝 선 스타디움이 여기서도 보였다. 완공까지 십일 년이 걸렸다는 경기장이다. 그러니 잘 보인다고 안심해서는 안 됐다. 유루강에서부터 경기장이 보이니 말 다 했다.
재현은 볼 안쪽을 깨물며 무중력 트램을 잡아탔다. 목적지를 입력하자 스크린 위로 도착 시각이 떴다. 여덟 시 오십오 분. 입장도 아슬아슬한 시간이다. 이래서야 출근 첫날부터 단단히 눈도장 찍혔을 게 분명했다. 재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가를 매만졌다. 경기 영상이야 컨디션 파악을 위해 대여섯 번은 돌려봤지만 이래선 정말로 얼굴 보고 인사하는 것보다 실물 경기를 먼저 보게 생겼다.
[편안한 운행이 되셨나요? 저희는 언제나 고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합니다. 언제든 트램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트램을 예측한 시간에 정확히 재현을 판데모니엄 입구에 내려주고 다음 손님을 향해 떠났다. 재현은 목을 꺾어 질릴 만큼 커다란 스타디움 경기장을 올려다보았다. 멀리서 봤을 때도 거대한 건물이었으나 가까이에서 보니 기가 질릴 만큼 압도적인 크기라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겉에서 보는데도 그랬다. 경기장 외벽은 철옹성같이 아주 높고 단단해, 외벽 끝에서 발이라도 헛디뎠다간 시체도 곱게 회수하지 못할 듯했다.
경기장 바깥에 걸린 스크린 배너 같은 것들엔 선수들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박혔다. 이따금 움직이는 스크린을 보며 재현은 한쪽 눈썹만 들어 올렸다. 판데모니엄이 간판선수로 내걸고 있는 선수가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흘러나오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게 익숙한 얼굴이어서도.
재현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경기장 입구로 걸어갔다. 피곤한 낯의 재현이 멋대로 입구를 통과할 수 없게 가드가 재빨리 출입을 저지했다. 비어있는 재현을 손을 훑는 시선이 느껴졌다. 티켓의 부재를 인식한 것이다. 경기 시작이 코앞인데도 입구 주변은 암표 파는 꾼과 웃돈을 잔뜩 얹어주고서라도 사야겠다는 사람들로 바글거렸으니 이유를 짐작함직도 했다. 이 보안 요원이 티켓도 없는 사람들에게 시달린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암표를 제재하지도 않고 어수선한 상황을 통제하는 사람도 없어 시장바닥과 다를 게 없었다.
"티켓을 소지하지 않으셨나요?"
재현은 난처한 얼굴로 웃어 보인다. 설명하기 전 초석을 닦는, 그런 의도였지만 상대는 다르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채 다음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거부의 의사를 밝히며 보안 요원이 되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일하면서 여러 번 겪는 수난이라는 태도였다.
"티켓을 소지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티켓을 구하지 않아서 가드가 원하는 걸 내보일 수 없다. 못 구한 게 아니라 안 구한 거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바쁜데 실랑이할 생각으로, 떼써서 들여보내 달라고 할 의도로 온 게 아닌데 보안 요원은 단단히 오해를 한 눈치였다.
"티켓이 없는데 들여보내 달라고 하는 건 아니고,"
재현은 그제서야 미리 아이디 카드를 꺼내둘 걸, 하는 후회를 했다. 오랜 비행 때문에 편하게 입은 옷차림이 오해를 더 했나 싶기도 했다.
"관계자용 입구를 못 찾아서요. 이번에 판데모니엄 총괄 엔지니어로 발령받은 이재현입니다."
길을 모르니 입구로 들어오면 될 거라던데. 재현은 아이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재현 이름 석 자, 지구에서 거주하는 모든 시민에게 주어지는 시리얼 넘버, 얼굴과 판데모니엄 로고, 직위가 박힌 카드가 여러 각도의 조명을 받을 때마다 다채로운 홀로그램으로 반짝였다. 손 위에 올려둔 카드를 한참이나 눈싸움하듯 내려다보던 가드가 카드를 받아들었다. 카드 속 재현의 얼굴과 눈앞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누가 뒤통수를 때린 표정이라 재현은 즐거워졌다. 해서 뻔뻔한 낯짝으로 생글거렸다.
"이제 내가 들어가도 되겠죠."
"...죄송합니다."
재현이 내민 카드가 위조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드가 비켜섰다.
경기장 내부는 사람들로 꽉꽉 차 있었다. 어딜 둘러봐도 온통 빽빽한 머리통뿐이다. 매 경기 매진이 아닌 적이 없다더니. 그 말의 진의를 의심한 적 없었는데도, 재현은 별세계에 떨어진 아이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영상으로 보던 것과는 큰 차이였음을 말할 필요도 없었다. 후끈 달아오른 경기장의 공기가 낯설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경기 트랙 위에 서서 시선을 받아내는 것도 버거워할 것 같았다. 재현은 그나마 남아있는 자리 중 경기가 잘 보일 법한 자리에 착석했다. 어딜 앉든 잘 보이기는 했다. 스크린의 시계가 정각을 알리기 무섭게 장내 아나운서(아마도 AI겠지만)의 낭랑한 목소리가 경기장 곳곳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허공의 커다란 스크린이 대기 상태로 바뀌었고, 재현은 그 시스템 디자인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판데모니엄을 찾아주신 관객 여러분, 2147번째 경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커다란 스피커로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웅장한 음악이다. 묘하게 사람을 고취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기대감과 고조되는 열기에 재현의 심장까지 두근거리게 했다. 선수들이 통로를 지나 하나둘 서킷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스크린은 라인에 줄을 맞춰 선 선수들을 넘버링과 함께 클로즈업했다. 재현은 개중 익숙한 얼굴을 기다렸다. 일 번, 이 번, 삼 번… 열 번. 그리고 열한 번. 사람들은 열하나라는 숫자가 스크린에 뜨자 이전보다 더욱 격렬하게 비명인지 함성인지 모를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격렬한 반응은 앞의 열 명보다 컸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 경기의 챔피언을 연호하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귀가 다 먹먹했다.
한발 늦게 강화 슈트를 착용한 선수가 카메라에 잡혔다. 그는 유백색의 노멕스 이너웨어 위로 남색으로 도색된 견고한 강화 슈트를 착용하고 있었다. 헬멧을 옆구리에 끼운 채 서 있던 그는 얼굴이 클로즈업되기 무섭게, 머리를 두어 번 털다가 헬멧을 착용했다. 강렬한 노란색과 남색으로 칠한 대비는 날렵하고 차가운 얼굴과 잘 어울렸다. 서늘한 각짐은 다른 선수들이 표출하는 잔인함과 열기와는 조금 다른 궤였다.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유독 도드라진 코와 눈썹 뼈 사이로 짙은 음영을 만들어내는 것이 투명한 쉴더로 드러났다.
무엇보다도 눈빛이 형형했다. 이재현은 그 눈이 마음에 들었다. 기대감을 표출하지도, 반드시 이기겠다는 패기나 흥분감의 흔적하나 내보이지 않는 무심한 얼굴에서 유일하게 사람 같아 보이는 그 형형한 눈이, 이상하리만치 눈을 사로잡았다. 경기 영상을 재생할 때와는 다른 생경한 감상이었다. 그 말은 흥미가 생겼단 뜻이고,
"진짜 마음에 드네."
열심히 할 의욕도 생겼단 뜻이 된다. 낯짝이 반반해서 더 좋았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 뒤로도 선수는 열 명쯤 더 있었지만 기억에 남는 이는 없었다. 소개가 끝나 곧장 경기 시작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버저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선수들은 하나같이 모터 동력으로 가동하는 스케이트를 신고 있었다. 꽤 바퀴가 큼직한 그 스케이트화의 엔진이 내는 윙윙거리는 소음이 서킷 바닥에 마찰하는 스케이트 바퀴 소리와 함께 송출됐다. 갈라진 틈 사이에서는 푸르스름한 빛이 났다. 일반적인 스케이트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가동했다. 선수들이 잡아야 하는 건 특수 처리된 모터가 달린 쇠공이었다. 우승하기 위해선 공을 차지해야 했다. 손아귀에 넣으려고 눈이 벌게지는 건 전초전 축에도 못 꼈다.
룰은 간단했다. 경기장의 서킷은 11km로, 두 바퀴를 완주해야 하지만 결승선을 지날 때는 반드시 쇠공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먼저 들어오는 게 아니라 쇠공을 가지고 결승선을 통과해야 한다. 규칙만 들으면 별달리 특별해 보일 것 없는 이 경기는 사첼라야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한때는 부랑자들의 버려진 도시였던 사첼라야가 부강해진 것은 이 모터볼 경기 때문이었다. 도시를 등에 업고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사업이었다. 공식적인 경기가 치러지는 것은 사첼라야의 판데모니엄이 유일하지만, 비공식적인 아마추어 리그는 다른 도시에도 많다고 들었다. 스포츠나 오락에 관심 없던 재현으로서는 실제로 관람하는 것이 처음이지만 연구소에서 일할 적에 선배 연구원이 몇 번 관람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 있었다.
그리고 그 연구원은 그랬다. 심드렁해 보이는 재현을 붙잡고는 한 번만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랬다. 공 들고 뛰는 건 관심이 없다고 했더니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다. 쇠공을 쥔 상태로 결승선을 지나야 하지만, 그 말은 곧 결승선을 지날 때만 쥐고 있으면 상관없는 거라며 경기 중에 그 공을 뺏는 것도, 그 과정에서 난투가 벌어지는 것도 허용되는 일이라고 했다. 따지고 보면 안드로이드만 출전하는 합법 난투극이나 다름없는 셈이라 마음 놓고 볼 수 있는 거랬다. 경기 중에 사망하는 경우도 부지기수고, 두어 번 출전하다가 팔다리를 잃는 경우도 허다한데 진짜 인간이 출전하는 경기 같아서 생생하고 재밌다고. 말을 하는 곳이 연구소가 아니었더라면, 말을 하는 이가 연구원이 아니었더라면 당장 잡혀가도 손색없을 말이었다. 그들이 사는 시대는 안드로이드 차별 금지 법안이 실시되고 있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재현은 안드로이드에게 인권이 어디 있냐고 역설하던 그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했을 때 그의 얼굴에 서리던 배신감을 떠올렸다. 재현은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냈다. 경기가 시작된 와중에 생각에 잠겨 있는 건 썩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그는 경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공을 가장 먼저 잡은 것은 일곱 번째로 소개됐던 선수였다. 안드로이드라고는 하나 경기 중에 한쪽 팔을 잃고 금속 의체로 대체한 것인지, 가짜인 것을 티 내지 않으려는 기색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그 선수의 덩치는 보통 체격의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우스꽝스러우리만치 커다랗고 두꺼운 기계팔 탓인지 반대쪽 팔은 성냥개비처럼 보였다. 가장 먼저 쇠공을 잡아 든 기계팔은 한 손에 쥔 채 하늘로 높이 치켜들었다. 드라마틱한 연출에 카메라가 급하게 줌하며 확대했다. 그 쇼맨십에 관객들은 잔뜩 열광했다. 그의 뒤로 나머지 선수들이 끈질기게 따라붙었고, 기계팔을 꽁무니에 달라붙은 선수들을 견제하며 공을 사수했다.
아직 반 바퀴도 채 돌지 않았다. 결승선까지는 한참 남았다. 끝까지 저 공을 들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고작 영상으로 경기를 본 게 전부인 재현의 눈에도 그게 보였다. 사수하려는 자와 뺏으려는 자의 싸움인데, 이상하게 흥미가 떨어져 재현의 눈은 그나마 익숙한 데로 따라가고 말았다. 그러니까 남색에 포인트 컬러 노란색의 강화 슈트가 튀는 열한 번째 선수에게로. 눈이 아플 만큼 요란한 색으로 도색한 강화 슈트가 여럿인데도 시선이 그리로 갔다. 치고 나가지 않을 모양인지, 아니면 중간에 머물러 있는 게 전략인지. 어쩌면 컨디션 난조일 수도 있었다. 이재현이라고 남의 머릿속을 제집 안방 들여다보듯 볼 수 있을 리가 없으니 할 수 있는 건 추측뿐이다. 저 머리통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싶은 생각으로.
그러는 와중에도 쇠공은 이리저리 주인이 바뀌고 손을 탔다. 후방에서 누군가 날렵한 손날로 기계팔의 이음새를 내려치자 허무하리만치 깔끔하게 두 동강 난 팔이 쇠공을 붙잡은 채로 서킷 구석까지 데굴데굴 굴러갔다.
"아악! 내, 내 팔!"
꽥 내지르는 비명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아파서 지르는 비명이 아님을 모두가 알았다. 이젠 그저 고철 덩어리가 되었을 뿐인 기계팔을 거친 손길로 떼어내며 쇠공을 누군가 낚아챘다. 날래고 키가 작은 선수 하나가 쇠공을 재빠르게 취하자마자 공을 노리던 다른 사람의 팔이 그 자리를 아슬아슬하게 내리쳤다. 클로즈업되는 까무잡잡한 얼굴의 주인은 잔뜩 열 받아 헬멧을 뚫기라도 할 것처럼 눈을 부라렸다. 그리고는 자신을 앞서가려는 선수의 얼굴을 팔꿈치로 가격하고, 코피를 터트린 채 발이 꼬여 넘어지는 선수를 향해 험상궂은 웃음을 날렸다. 날래고 발 빠른 그 선수는 꽤 선두를 지키며 잘 달리는 듯싶다가, 이미터는 훌쩍 넘어 보이는 떡대의 주먹에 머리를 홈런 치듯 맞고 그대로 쓰러졌다. 길가의 캔을 발로 차듯이 걷어차 버리자 가벼운 몸이 훌쩍 날아 서킷 벽면에 충돌했다.
그렇게 쇠공은 거인의 손으로 들어간 시점에, 마침 한 바퀴를 돌았음을 알리는 종이 땡땡 울렸다. 종이 울리는 건, 고작 한 바퀴 남았다는 뜻이었고 승자가 되기 위해선 한 바퀴를 돌기 전에 다시 그 손에서 공을 빼앗거나, 지켜내야 한다는 뜻이 됐다. 선수들은 갑자기 명석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눈에 힘이 들어가고 목을 쭉 뺐다. 초조함과 조급함이 섞여 행동은 점점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거칠어진 손속에 경기는 한층 매서운 분위기였고, 관중석에 앉은 사람들도 거칠고 사나운 기운에 전염된 것처럼 열광했다. 경기가 과격해질수록 반응이 열기를 띠었으나 재현의 눈은 점점 더 가라앉기만 했다. 그 속에서 유리된 것처럼 빤히 한 사람만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움직였다.
분위기가 달아오르며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이 흩어지고 견제하던 긴장감이 풀리는 순간을 기민하게 잡아낸 것이다. 본능에 가까운 감각으로.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완벽히 절제된 동작으로 움직였다. 모든 움직임이 가장 효율적이고, 그보다 더 나을 수 없는 최적의 방식으로만 기동했다.
도움닫기 끝에 바닥을 향해 한쪽 무릎을 잔뜩 굽혔다가 모터 동력의 반동을 이용해 뛰어올랐다.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몹시 자연스러웠다.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가른 스케이트의 끝이 거인의 등을 정확히 가격했다. 동시에 완벽히 중심을 잃고 말아, 넘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슈트의 금속이 서킷 바닥을 마찰하며 나는 무시무시한 소리 때문이었다. 굳이 카메라가 클로즈업하지 않아도, 얼굴이 잔뜩 갈려있을 거라는 걸 알 수 있는 것처럼. 이유는 간단했다. 저 멀리 굴러간 헬멧은 마땅히 수행해야 할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아마도 얼굴이 갈렸을 바로 그 흔적이 고스란히 서킷에 남았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핏자국을 확대했다. 분명 다른 선수들을 위협할 때에는 거대하게 보이던 몸이 서킷 벽면에 머리를 박고 엎어진 모습일 때는 초라해 보였다. 당당한 기세의 열한 번째와 대조하니 더 그랬다. 거인의 등 살갗을 찢다 못해 척추 뼈를 부수고 들어간 스케이트가 피와 살점을 묻힌 걸 기어이 카메라가 잡아냈다. 미동도 없이 쓰러진 거인의 등 위에서 내려온 그의 손에는 어느 틈에 빼앗은 쇠공이 들려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경기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열광하며 달아오른다. 타자화된 시각으로 느긋하게 구경하던 재현도 앞으로 몸을 기울인 채 얼빠진 얼굴을 했다.
코너링을 하며 서킷을 돈다. 매끄러운 스케이팅 실력을 구사하는 십일 번의 뒤로 아직 멀쩡한 선수 여럿이 바짝 따라붙었다. 보는 사람의 입안마저 텁텁해질 만큼 박진감 넘쳐서 문제였다. 재현은 땀이 밴 손바닥을 닦으려 들었다. 승기를 잡은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우승자를 점치기엔 아직 성급했다. 결승선까지의 먼 거리가 그를 방증했다. 그러니 선수들 역시 이판사판으로 달려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주연은 침착하게 거리를 벌리면서도, 뒤에서 첨예하게 날아드는 날붙이를 피하며 곡예에 가까운 몸짓으로 허리를 확 젖혔다. 말도 안 되는 몸놀림이었다. 두 눈앞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었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여전히 한쪽 팔엔 쇠공이 안겨 있고, 그는 또다시 땅을 박찼다. 공중에서 역으로 한 바퀴 회전하며 두 다리가 뒷사람의 빗장뼈와 늑골을 차례대로 걷어찼다. 견갑이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어쩌면 그 안의 늑골도.
그렇게 또 한 명이 전투 불능 상태가 되면, 선수들의 프로필을 나열한 경기장의 스크린에서는 누군가의 것이 흑백 처리가 됐다. 이제 남은 것은 열한 번째를 포함해 열넷이었다.
세 번, 어쩌면 네 번째로 소개됐던 선수가 공을 노리며 속도를 높였다. 아마 옆으로 파고들어 공을 가로채려는 계획이었을 테다. 열한 번째는 뺏기지 않으려고 어깨를 오므리며 공을 품 안으로 숨기는 대신 가슴을 펴고 팔을 크게 휘둘렀다. 관성을 받아 가속도가 붙은 쇠공이 육중하게 얼굴을 강타했다. 하필이면 쉴더도 없이 오픈된 헬멧이라 얼굴 안면이 함몰되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마이크는 기민하게 잡아내 송출했다. 안면이 함몰된 선수와 다리가 걸린 불운한 선수 하나가 함께 서킷 바닥을 굴렀다. 대놓고 통행을 저지당한 선수들이 주변을 꺾어 돌았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을 쥐고 있었다. 그렇게 거리가 점점 벌어지는 듯하다가… 누군가 미끄러지듯 몸을 날려 던졌다. 마치 슬라이딩을 하듯이. 이번엔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게 아니고서야 알아차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함성에 묻혀 소리가 닿지 않을 걸 알면서도 재현은 조심하라고 소리칠 뻔했다. 긴 안전대를 손등이 하얘져라 꽉 붙잡았다. 발목을 제대로 걷어차인 열한 번이 중심을 잃은 채 비틀거리다 서킷 바깥쪽까지 밀려나며 크게 굴렀다. 잔뜩 기스난 강화 슈트의 어깨가, 그다음에 고개를 흔들며 머리를 치켜드는 얼굴이 스크린 가득 잡혔다. 공은 여전히 그의 손에 있었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붙이기라도 한 듯이 손에서 떨어트릴 생각을 안 했다.
무방비하게 만들고 그 틈을 타 쇠공을 빼앗으려는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공격하려던 선수는 무방비한 상태를 틈타 제압하려 했지만 도로 제압당한 꼴이 됐다. 공을 쥐지 않은 손에 힘을 실어 어깨를 찍어 누르자 충격을 방어하기 위한 금속 슈트의 일부가 제멋대로 찌그러졌다. 카메라에 잡힌 얼굴이 공포심으로 물들었지만, 한 치의 자비심도 없이 공으로 두개골을 내리찍었다. 보기 즐거운 광경은 아니었지만, 관중들은 그럴수록 더욱 달아올랐다.
그 뒤로는 평화로웠다. 결승 지점 가까이에 있었으므로 라인을 통과하는 건 금방이었다. 십일 번이 고개를 비틀며 헬멧을 들어 올렸다. 서킷 바닥을 구르는 틈에 어딘가로 날아간 쉴더를 제외하고도, 관자놀이 아래로 흐르는 땀방울과 하얀 얼굴에 튄 뜨거운 핏자국이 선명하게 스크린에 뜬 탓이다. 그는 대단한 쇼맨십으로 관객들을 고양시켰으나 정작 세레머니는 하지 않은 채 그저 관중석을 한 바퀴 둘러봤을 뿐이었다. 연호하는 제 이름에 기꺼운 태도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기묘하게도 그 순간, 이재현은 눈이 마주쳤다는 알량한 착각에 휩싸이고 말았다. 숨 쉬는 것도 멈추고, 초침은 영원히 다음 칸으로 넘어가지 않으며,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환호성조차도 들리지 않는 영겁이라 생각된 찰나. 일 초를 수만 수천으로 나눈 그 찰나의 순간.
그마저도 제게 닿은 시선이 떨어진 순간, 이재현은 현실로 돌아오고 말았지만.
주연은 손을 들어 얼굴에 튄 핏방울을 문질렀다. 하지만 피는 손에 묻어나기만 할 뿐, 붉게 스민 자국은 지워지지 않았다.
*
그는 크레타Creta라는 행성의 출신으로, 부모의 출신지였던 행성을 찾아왔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 오염되고 망가진 행성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는 연구원이었다. 프로그래밍의 오류를 찾는 게 주 업무였지만 가끔 안드로이드 생산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직접 출장을 나가기도 했다. 연구소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행하자 그에게는 전담 안드로이드가 하나 생겼다. 남성체인 그 안드로이드는 언어 구사 능력에 중점을 둔 개체였다. 지금은 사어로 남은 대재앙 이전 옛 시대의 두 가지 언어와 현재 지구에서 쓰이는 표준 공용어, 그리고 지역별로 다른 네 개의 사투리를 구사하고 지구 표준 공용어를 제외한 우주에서 쓰이는 세 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언어 회로가 탑재된 안드로이드였다.
그 연구원에게 주어진 것은 이전처럼 새로 만들어질 안드로이드의 행동에서 매끄럽지 않은 부분의 프로그래밍을 수정하고 인간다워 보이게 교정하는 식의 업무가 아니었다. 그때쯤 연구소에서는 안드로이드 제작 이래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고질적인 문제라고 여겼던 감정 동화율을 높이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 방법을 찾는데 필요한 거의 모든 프로젝트를 실시하고 있었고, 그가 맡은 것 역시 그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다섯 세기 전부터 등장했던 안드로이드, 간혹 모조인간이라고 지칭되기도 하는 기계종은 인간의 외형을 그대로 닮아서 겉으로는 인간과 구분할 수 없었다. 경계가 불분명한 안드로이드라는 호칭보다 모조인간이 더 적합하다는 의견은 시대와 상황을 막론하고 제기된 주장이었지만 언제나 편의성이라는 이름 아래 뭉뚱그려지곤 했다. 그들은 인간의 것과 비슷하게 구동하는 기계뇌로 사고하는 것이 가능했기에 감정도 느꼈다. 안드로이드의 원래 수명은 4년에 불과했으나 기술 발전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훅훅 뛰었다. 물론 그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 연구원이 안드로이드를 담당하게 되었을 즈음에는 그랬다.
그는 안드로이드에게 테세우스Theseus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많은 인파가 썰물 빠져나가듯이 빠지고 난 경기장은 텅 비어 있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열기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게 아득히 먼 과거 같았다. 슬슬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해도. 선수들이 입장하고 퇴장하던 통로를 봤으니 그리로 가면 되겠다 싶었다. 경기 불능 상태가 되고 제 몸을 가누지 못해 짐짝처럼 치워진 이들이 들어간 곳도 같았다. 그리로 내려가면 될 것이다. 재현은 마지막으로 청소부만이 드문드문 보이는 경기장과, 서킷을 잠깐 둘러보았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될지, 어쩌면 정말 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주 잠깐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그동안은 질릴 만큼 보게 될 것이다. 선수들과 부대끼는 만큼이나.
그러다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눈부신 은발이 시야에 담겼다. 안면 있는 사람이다. 오스카Oscar였다. 썩 반갑지 않은 인물이다.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봤던 여운은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그는 재현이 입 열 틈도 주지 않고 물었다.
"그래서 직접 경기를 참관한 감상은 어때?"
"나쁘지 않았습니다."
"너무 성의가 없는 거 아냐?"
"이게 제 최선인데요."
빵과 서커스 적인 시각에서? 아니면 엔터테인먼트 사업으로서의 전망을 브리핑하기라도 하란 소린가? 재현은 속으로 이죽거렸다.
"그렇게 매정하게 나오란 소리는 아니었는데. 서운하게."
"그래서 제게 듣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세요?"
"그 존대는 그만할 수 없는 거야?"
"……."
"별 의미 없어. 말 그대로 스포츠 경기 감상을 묻는 거야. 내가 직접 고른 선수들이거든. 내가 발굴하고, 데려온 거지. 그런 의미에서라고나 할까? 이제 충분히 설명이 됐나?"
"…나름대로 재밌어. 선수 하나가 멱살 잡고 끌고 가는 거 같지만.“
재현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대꾸했다. 썩 무례한 기색의 말에도 기분 상한 낌새는 없었다. 그리고 타격 하나 없는 얼굴로 서운하다 말하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일 터. 자꾸 그러면 나 마음 아파. 재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스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아마 마음에 든다는 선수는 내가 짐작하는 걔일 테고. 기껏 데려온 엔지니어가 하나라도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으로 여겨야겠네. 그렇지?"
"어차피 내가 온 이유는 처음부터 하나였으니까."
"귀하게 모시란 소리구나.“
재현은 대놓고 콧방귀를 뀌었다. 삐딱하게 오스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거의 국가적인 사업체의 총 책임자라기엔 지나치게 젊고 유려한 얼굴이었다. 본론이 뭐냐고 묻자 여상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였다. 눈을 치뜨고 쳐다보는 집요한 시선을 알아챈 오스카는 주변을 둘러보다 말고 사람 좋아 보이게 웃었다. 재현은 그 웃음이 참, 찜찜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그 웃음이 말이다.
"박사. 조급하게 굴지 마. 시간은 많아.“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재현의 어깨를 두드린다.
"하도 안 내려오기에 길을 모르나 싶어서 올라와 본 것뿐이야. 이제 가족이 될 사인데 서로 통성명은 해야지. 선수들 소개해줄게.“
가족은 무슨. 그래봤자 안드로이드인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답지 않게 다분히 차별적인 생각을 하며 오스카의 뒤를 쫓았다. 불순한 의도와 음습한 계획으로 점철된 이재현에겐 그런 순수하고 친밀한 단어는 안 어울렸다. 오스카의 말을 들으면 꼭 피와 살을 나누지 않은 대신 끈끈한 유대감으로 쌓아나갈 좋은 관계 같지만, 그게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재현은 그럴 생각도, 일말의 기대도 없었다.
통로를 지나 문을 열자 대기실 안쪽에 선수들이 모여 있었다. 방금 경기가 끝난 참이라 상태가 별로인데도 용케 자리를 지켰다. 그래도 자리를 비운 몇몇은 치료(아마도 '수리'라는 단어가 조금 더 적합할 것이다.)를 받으러 간 모양이겠고. 다행히 싸움이 나지 않은 모양이지만 금방이라도 발화될 듯한 분위기가 아슬아슬했다. 굳이 신경전에 끼어들 필요가 없는 오스카는 모른 체 했고, 재현은 그냥 정신이 없었다. 해맑은 오스카의 의도-환영-와는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은 무관심한 분위기는 정신을 차리는 데 조금 도움이 됐다. 적의고 호의고 간에 이 자리가 귀찮다는 건방지고 무심한 분위기였다. 불행히도 재현은 그 시선에 상처받을 만큼 여린 마음을 가진 건 아니었다. 환영을 기대하는 바가 없었다.
"이쪽은 새로 온 선수팀의 총괄 엔지니어고, 불편한 곳이나 이상이 있으면 찾아가면 된다. 원래는 이번 경기 전에 도착할 계획이었으니까 다들 알고는 있었겠지.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찾아가도 좋아. 그렇지?"
무슨 소개를 이렇게 얼렁뚱땅한단 말인지…….
"……그럼요. 이재현입니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뭐든 물어도 좋은데 지금은 없어 보이네요. 피곤해 보이는데 오래 붙잡아둬서 미안합니다."
재현의 말대로였다. 대충 고개만 끄덕이고 나간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밖으로 나간 오스카의 뒤로는 하나가 남아 있었다. 가장 먼저 자리를 뜰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 예상을 부수고 가장 마지막까지 남았다. 오히려 재현에게 좋은 거였다.
세상이 한 번 붕괴하고 끝없는 암흑의 시대를 거치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악수는 여전히 인사를 뜻하는 가장 보편적인 제스쳐였고, 친밀감을 표방하는 행위였다. 재현이 손을 내밀자 빤히 바라보다 관찰한 대로 손을 내민다. 마주 잡은 손은 꽤 서늘했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질감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서늘한 손의 온도와 촉감. 얇은 피부 아래 느껴지는 것은 심장으로부터 흐르는 피의 따뜻함이 아닌 서늘한 기계의 것이다. 재현은 환하게 웃었다. 아무런 감정도 엿보이지 않는 청년의 날렵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주연. 내가 이 만남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너는 모르겠지.
"만나서 반가워.“
아주 환하게.
*
테세우스는 무적의 용사이자 국가의 수호자였던 영웅의 이름이다. 연구원은 미노타우로스라는 이름을 붙여주기에는 안드로이드가 너무 미형이라고 했다. 자신의 이름과 연결고리가 있는 이름을 주고 싶었다고 웃었다.
테세우스는 내명년 출고를 목표로 하는 프로토타입의 안드로이드였다. 일 년 동안 수없이 많은 프로그래밍 수정을 거칠 예정이었다. 동일한 기종의 안드로이드가 다섯 대 더 있었고, 그들에겐 삽입된 모든 기억과 학습 과정이 동일했으나 모든 개체는 조금씩 달랐다.
연구원이 맡은 임무는 단순했다. 안드로이드의 감정 동기화 수치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는 다른 연구원들이 대개 이용하는 것처럼 시각 매체를 활용하기도 했지만, 프로젝트 실행 대부분의 시간을 그가 직접 이름 붙여준 안드로이드와 대화하는 데 썼다.
실제로 그 방법은 꽤 효과가 있었다. 모든 안드로이드가 그러하듯이 24세의 어휘 구사력을 가지고 있던 테세우스는 오랜 시간 대화를 통해 같은 기종의 프로토타입 개체들보다 월등한 향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대화. 이전에도 수없이 많이 사용되었던 방법에서 특별한 것을 찾아낼 수 없었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이전까지 출고되어왔던 안드로이드의 평균적 수치인 70%를 훨씬 상회하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었다. 76%를 찍은 감정 동기화 수치는 주저하지 않고 상승 곡선을 그렸다. 감정 동화율 향상 프로젝트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선수들은 서킷에서 간간히 시행하고는 하는 전체 트레이닝을 제외하고도 개별 트레이닝을 가진다. 서킷에 모여서 선수들이 하는 전체 트레이닝은 아직 며칠 남아서, 재현이 하는 거라고는 개별 트레이닝을 구경하러 다니거나 수리가 필요한 선수들의 결함을 고치거나 하는 것 따위였다. 입사 첫날, 경기가 있었던 직후의 새벽 내내 이어졌던 일곱 건의 수술을 제외하고는. 물론 그중에는 이주연도 있었다. 경기 중 발목을 다친 것 때문에 부품을 아주 갈아야 했다. 그 정도는 아주 미약한 부상에 속했다. 그들이 안드로이드고, 재현이 엔지니어라고는 하나 가망 없는 기계를 살릴 순 없었다. 안드로이드는 불사신이 아니고, 이재현에게는 그런 전지전능함이 없었다. 때문에 손상된 부품 교체로도, 다른 기계 장치로 잃은 부위를 대체할 수도 없었던 선수들은 수술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다음 날 선수 세 명이 새로 들어왔다. 이재현은 이런 선수가 있었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들의 행방을 몰랐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랐다.
체육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너른 내부와 훈련 중인 선수의 뒷모습이 보인다. 홀로 동적인 그는, 경기화를 신은 채 유려하게 움직였다. 아주 가벼운 보호구와 편한 착장이었다. 재현은 대충 구석진 곳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으며 한가롭게 구경했다. 윙윙 돌아가는 소음을 내는 바퀴와 갈라진 틈으로 나오는 푸른빛은 주연이 홀로그램 구형체와 격투를 벌일 때마다 커지다 작아지다 했다. 등판의 잘 짜인 근육이 간혹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자기주장을 했다. 재현은 잘 뻗은 다리나, 늘씬한 허리도 구경했다. 안드로이드가 저만큼 구현되려면 디자인 조형에 들어가는 개발비가 보통은 아닐 것이다. 어느 때고 아름다운 것은 귀하게 여겨졌다.
홀로그램 구형체를 상대로 훈련하던 주연이 고개를 들더니 손을 들어 올려 주먹을 쥐고 프로그램 기동을 멈췄다. 그러고는 주변을 살피다 재현을 발견했다. 촉이 좋네. 재현은 손을 흔들어주었고, 주연은 그걸 본체만체하더니 재현의 훑는 시선을 인지하고는 재빨리 겉옷을 주워 입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나시 보기 좋던데.
"무슨 일이에요?"
"저번에 봤던 경기가 인상 깊어서 트레이닝 구경하러 왔어."
"아."
"그땐 그냥 너만 보이던데."
바로 앞에서 칭찬을 듣는 건 좀 민망한 눈치였다. 목덜미를 긁적이는 게. 조금 부끄러운 기색이었다.
"따로 할 말이 있는 건 아니고. 개별 트레이닝한다길래 궁금해서 한 번 와본 거니까 부담은 안 느꼈으면 좋겠어."
"가시게요?"
"응. 몰래 구경하러 온 건데 들켰으니까 가야지. 누가 지켜보면 신경 쓰일 거 아냐."
"괜찮아요. 계속 있어도."
"아냐. 됐어. 주변에 사람 있는 거 싫어해서 물린 걸 텐데. 다른 선수들 트레이닝 룸 가보니까 지켜보는 스탭들도 많은 거 봤어."
잘하더라. 다음 경기 기대할게. 재현은 그렇게 어깨만 두어 번 두드려주고 트레이닝 룸을 빠져나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몰래 보고 나오려고 했더니 어느 틈에 눈치챘는지 모르겠다. 분명 조용히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그나마 건진 수확이랄 게 있다면, 예상외로 순한 구석이 있네 싶은 거. 경기 모습과는 다르게 말이다.
*
연구원은 테세우스에게 정을 주기 시작했다. 사실 그가 격렬한 모조인간 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면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3세기 전, 모조인간 차별금지 특례법이 시행된 이래로 그들은 인간과 비슷한 대우를 받아왔다. 인간과 모조인간은 결혼, 입양과 같은 제도적 측면에서의 결합도 가능했다. 이종(異種)이기는 했으나 법적으로 가족이라는 테두리에 속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비록 감정 동화율이 인간의 70%에 불과하다고는 하나 그들과 진실된 감정을 나누는 것이 가능하다는 게 뭇 사람들의 의견이었다. 의견이라기엔 그것이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고작 70%인데도 그랬다.
연구원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은 감정을 '교류'하고 있었다. 76%에서 81%로, 다시 85%까지. 고작 삼 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감정 동화율이 15%나 오른 것이다. 유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스운 말이기도 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연구원은 안드로이드를 인간의 대체품처럼 여기고, 모터볼 경기가 재밌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안드로이드이기 때문에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연구원과 프로토타입 안드로이드가 감정을 교류하든, 서로 각별함을 품든 그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는 단지 방관자의 입장이자 연구원의 동료로서, 그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얼마 동안은.
따지고 보면 이건 이재현이 얻은 새로운 인생인지도 몰랐다. 불야성이자 무너지지 않을 굳건한 도시, 사첼라야에서 얻은 그의 새롭고 든든한 철밥통인지도. 판데모니엄은 경기장의 명칭이었으나 때로는 경기를 칭하는 말이 되기도 했다. 명실상부한 랜드마크가 된 장소는 그만큼 유명한 경기가 치러지는 곳이었고 여러 대도시에서 가공할만한 열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한시적인 직장에 불과하긴 했으나 어쨌든 괜찮은 직장이었단 뜻이다. 그리고 뭐, 같이 일해야 하는 동료들도 썩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절반은 그에게 호의적이었고, 절반은 그와 마주칠 일이 없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애당초 일하는 건 혼자여서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래서 이직 후의 이재현의 일상도 아주 평화로웠다. 새로 얻은 인생에 대해서도 이재현은 아주 만족했다. 해가 하늘 중천에 뜰 때까지 퍼질러 자다 깨어나도, 까치집인 머리를 황급히 정리하며 트램부터 잡아타야 할 필요가 없어서였다. 숙소가 경기장 내부에 있어 숙소 문을 열고 나오면 그곳이 곧 일터였다. 공사다망하신지라 매번 자리를 비우는 오스카를 제외하곤 상사라고 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고로 재현이 느지막이 출근해도 아무도 눈치 주지 않았다. 애초에 의무실도 혼자 썼다.
눈칫밥 챙길 필요 없이 편한 일주일이 지났다. 경기는 삼 주에 한 번씩 열렸으므로 다음 경기까진 두 주가 남은 셈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이재현은 한 번의 전체 트레이닝을 참관했고(솔직히 재현이 특별히 할 건 없었다), 네 번 정도 제각각 다른 선수의 개별 트레이닝을 구경했다. 훈련 중 이상을 알아채고 찾아오는 선수는 꽤 있었지만, 자잘한 부품을 교체하는 등의 고장을 제외하면 첫날 있었던 것처럼 대대적인 수술은 없었다. 자주 찾아오는 선수와는 수다도 꽤 떨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재현이 대답하자 드르륵 문이 열렸다. 발부터 쑥 들어왔다. 쑥 들어오는 발만 보고도 누군지 알아챈 재현은 모니터에 띄워둔 창을 껐다. 빼곡한 정보 값이 들어찬 창은 오스카에게 인계받은 것으로, 한시적이었으나 열람 권한을 승인받은 것이었다. 이주연은 존재 여부도 모를. 불순한 의도로 취업해 켕길 것도 많은 이재현은 양심 찔릴 구석이 많았기에 잠자코 창을 내렸다.
발만 보고도 짐작했듯이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주연은 테이블 위 제멋대로 쌓여있는 고철 덩어리들에 눈길을 주다 마련된 의자에 걸터앉았다. 재현은 두 손을 깍지 낀 위로 갸름한 턱을 얹었다. 할 수 있는 가장 상냥한 미소를 띤 채였다.
"음, 무슨 일?"
"교체 받으려고요."
"어제까진 괜찮다더니."
"오늘 훈련하다가… 좀 불편해서요."
재현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몇 번 없는 전체 트레이닝을 총괄 엔지니어 자격으로 참관한 것은 불과 이틀 전의 일. 오늘 있었던 훈련이라면 필시 개별 훈련을 뜻하는 것이다. 훈련했다는 거 치곤 목덜미가 말끔하지만, 원래 모터볼 경기에 출전하는 모조인간들은 신체 능력을 강화시키는 혈청을 투약한 후라 평균적인 인간을 생각해서는 안 됐다. 신체 기능을 극도로 끌어올린 상태라 가장 긴장을 낮춘 상태에서조차 평균적인 인간의 아웃풋을 훨씬 웃돌 테니.
그래도 두 발로 걸어온 걸 보니 상태가 아주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고.
"설마 지난번에 고쳤던 발목 때문이야? 그때 일부러 나사 튼튼하게 조였었는데."
"그건 아니고…… 손목 움직이는 게 불편하니까 한 번 봐줬으면 하는데요."
"손목만?"
"오른쪽 무릎도요."
"왼쪽 손목이랑 오른쪽 무릎. 훈련 하던 도중에 이상 있어서 온 거야?"
"네."
"그럼 저번 경기 영향인데 방치하다 심각해진 건 아닌 거고. 훈련 강도가 셌나?"
마지막의 물음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대답은 없었지만, 정답이겠거니 했다. 열심히 훈련하다가 그랬나 보네 하고 심심한 위로의 말을 던졌다. 무릎. 노는 손은 마디 사이에 끼워둔 펜을 돌렸다. 대체할 만한 부품이 있었던가. 재현의 기억으론 없었던 거 같다. 수리하는 날짜를 빠르게 잡고 그 김에 겸사겸사 부족한 다른 장비들도 요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재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부품은 따로 주문해둬야 하니까 당장은 안 되겠고, 일단 손목부터 보자. 그건 있으니까. 손 주먹 쥐다 펴고 손가락 개별로 접는 거부터 해봐. 손목 돌리는 것도. 아, 기름칠이 덜 됐나. 보니까 교체해야 하긴 하겠다."
주연이 빤히 바라봤다. 농담인데.
"좀 웃어주지."
사실 정말 웃어준다거나 대꾸를 바란 건 아니다. 재현은 간단하게 주연의 손목을 체크하다 일어섰다. 손목은 지금 바로 교체해줄 테니까 기다려. 장비 가져올 동안만. 그렇게 말하자 이번엔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재현이 손짓한 수술대 중 하나, 그 위에 자릴 잡고 앉아 주인이 자리를 뜬 방안을 둘러봤다. 따지고 보면 고작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온통 주인의 흔적이 가득했다. 온종일 지내는 곳이다 보니 머무는 사람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는데 어쩐지 그게 낯설게 느껴졌다.
금세 교체할 손목 파츠를 들고 나타났다. 엔지니어라는 직함에 걸맞게 짙은 색 작업복인 점프 슈트를 입은 재현은 알이 커다랗고 금속 테가 얇은 안경을 낀 채 돌아왔다. 테이블에 부품 가득 올린 트레이를 내려놓고, 손에 잘 닿는 위치로 조정했다. 무영등 전원을 켜고 이리저리 위치를 맞추는 손길이 익숙했다. 원래라면 보조가 할 일인데 그는 조수를 쓰지 않았다. 그림자가 생기지 않게끔 여러 방향에서 쏘아진 램프 아래에 선 재현이 주사기에 마취제를 주입했다. 그걸 본 주연은 필요 없다며 그를 말렸고, 재현은 섬세한 손길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손목 파츠를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피부색이랑 흡사한 걸 못 찾았는데 괜찮겠어? 물어본다는 게 깜박했네."
이미 손목엔 달랑달랑, 뼈대만 남았는데 묻는 게 그거였다. 선후 관계가 좀 많이 바뀌지 않았냐는 건 미뤄두고도,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고 답하기도 전에 여상한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경기 뛰는 선수 중엔 머리부터 발끝까지 멀쩡한 몸으로 뛰는 건 아무도 없어요. 인간도 아닌데 그게 뭐가 중요해요?“
그 말에 재현은 대꾸도 못 하고 오묘한 표정만 했다. 당황스럽다가, 쟤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싶어서 동정심도 살짝은 들다가. 틀린 말은 아니라 수긍하다가도 그걸 제 입으로 말한다는 게 기분이 이상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을 계속 보고 있기엔 어딘가 힘들어졌다. 트레이에서 파츠를 골라내는 척을 했다. 유백색 광택을 띠는 걸 골라내는 척 한창 딴청을 피우다 다시 손을 살폈다. 위치가 잘못 잡힌 걸 빼내고 다른 걸로 끼워 넣었다.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움직임을 재개했다. 그 위로 여러 겹 파츠를 덧대고 나니 손목과 손등이 매끄러운 도자기의 표면 같았다.
외관만 봐선 길가에 나다니는 행인과 다를 것 하나 없어 보이지만 몸 안은 아니었다. 뇌까지 기계가 아니란 건 불행인지 다행인지. 후천적으로 신체를 이루는 인공적인 산물로 교체되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재현은 궁금했다. 물어봤자 본인이 모른다는 걸 알지 못했더라면 재현은 무례함을 상관 않고 물었을 것이다. 기분이 어떠하냐고. 인간이되 인간에 속하지 않는 너는 한 번도 의문을 제기해본 적이 없느냐고.
불현듯 강렬한 열망이 치밀었다. 귀를 기울이면 그 안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까? 그러나 불행히도, 재현의 귓속에 있는 달팽이관은 태어날 때부터 그의 것이었기에 인간이 감지하는 음의 진동수 이상을 인식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이주연의 몸속에서 움직이는, 인간이 귀로 인식 가능한 범위를 벗어난 기계의 작동 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다. 귀를 들이민다고 곧이곧대로 들리지도 않을 테고. 충동을 발로 지져 껐다. 재현은 한참 만에 말했다.
"손목이랑 손가락 움직여보고 이질감 있으면 말할래? 다른 선수들은 손목 다쳐오진 않아서 잘 모르겠네. 잘 움직여져?"
"없어요. 감사합니다."
"왜 벌써 일어나?"
재현이 깜짝 놀라 붙잡았다. 오래 머무를 거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끝나자마자 쌩 가버릴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저번엔 붙잡아 놓고. 예의상 하는 말인 건 알았지만. 뒤돌아보지도 않고 자리를 뜨려던 주연이 자리에 멈춰서 뒤를 돌았다.
"그럼 뭘 더 해요?"
그런 대꾸가 돌아올 줄은 몰랐단 뜻이다.
"뭐…… 이런저런 얘기?"
"할 말 있으세요?"
촉은 꽤 좋은 편이네. 정확히 말하자면 할 말이 있다기보다는, 옆에 두고 좀 관찰하면서 파악해보고 싶은 거였다.
"난 너 가고 나면 혼자 심심하니까. 훈련 끝나고 왔으면 스케줄도 없을 텐데, 뭘 그렇게 바쁘게 굴어?"
"아까 업무 보시던 거 봤는데요. 방해하는 건 싫어요."
안 통하네. 며칠 전까지는 사근사근 굴더니 다음 경기가 가까워진다고 좀 예민해진 건가 싶기도 했다. 어떻게 달래야 하나.
"미뤄도 상관없거든. 다른 선수들도 와서 수리하면 얘기 좀 하다가 가. 시답잖은 거라도."
"다른 선수들이랑요?"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이었다. 미간을 좁히고 묻는다. 재현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다들 바깥으로 나가기 까다로우니까, 와서 서로 대화 상대도 해주는 거지. 대개는 잡담이지만."
"왜요?"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아마 외로워서겠지?"
"외로워서?"
"보통은."
주연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재현은 그 표정의 의미를 잘 알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거였다. 당연한 거라고 생각은 했다. 대화를 나눠 본 대부분의 선수들이 그랬다. 혈청 속에 감정 동화율을 낮추는 약물이 들어 있으니 예외란 없는 것이다. 맞은 지 오래되면 희석되기도 한다지만 오래 걸렸다. 감정 동화율이 그 정도라면 감정은 미약하게 느낀대도 본인은 인지하지 못했다. 명확히 명명할 수 없는 것이다. 약물로 억제시킨 경우, 인지하기 시작할 때에는 이미 늦었거나 안에서부터 무너지고는 했다.
"계속 있어도 괜찮은데. 얘기를 좀 더 해도 되고."
이재현의 행동은 촉발이고.
"……그래요."
그는 모든 일에 책임을 질 수 없다.
*
연구원이 그에게 찾아온 것은 드문 일이었다. 정확히는, 그들은 본래 직장 동료라는 이름에 어울릴 정도의 교류가 있던 사이였으나 연구원이 테세우스를 맡아 집중하기 시작하면서는 드문 일이 되었다. 가끔 테세우스에게 유의미한 수치의 향상이 있고 나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는 했으나 같은 업무를 하고 있지 않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연구원의 방문이 놀라웠다.
그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고, 연구원은 홀딱 젖은 채로 그의 아파트로 찾아왔다.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도 괘념치 않은 채 들이닥친 것이다. 연구원은 따뜻한 차와 수건을 마다하지 않았으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듯 털어놓았다. 테세우스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말했다. 테세우스를 사랑하게 된 것은 자신의 인생 전반을 이루던 모든 사고방식을 걷어내야 하는 것이었으나 그건 그럴 가치가 있었다고. 그렇게 말하는 연구원의 두 볼은 상기되어 있고 두 눈은 유리알처럼 빛났다. 잔뜩 젖어 볼품없었으나 그 순간만큼은 누가 보더라도 연구원이 행복하다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연구원이 이걸 그에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네게 말하고 싶었어. 너라면 축하해줄 것 같았거든."
틀렸다. 하지만 그는 기꺼이 축하한다고 말했다.
"단체 훈련 중에 부상 입은 선수는 없었어. 새로 온 8번 선수는 혈청에 거부 반응이 있어서 중화제를 투여했고, 13번 선수는 이식받은 팔을 다루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점점 나아지고 있어. 14번 선수는 바이오 테크닉 이후로 주행 기록이 좀 더 좋아졌다고 하고. 20번은 간혹 이명을 호소하는데……."
재현은 오스카에게 말을 편하게 하는 것이 편하지 않았다. 사실 오스카라는 사람과 있는 거 자체가 불편하다는 것에 가깝다. 오스카를 마주하는 시간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겠지만, 이런저런 일로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은 오스카와 부딪히는 시간이 이보다 적을 수는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싸늘한 사무실 안에서, 한참 사무적인 어조의 보고가 이어졌다. 주연을 말할 때가 되어서야 목소리가 낮아졌다. 은밀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닌데도 그랬다.
"11번은, 무릎 움직이는 게 뻑뻑하게 느껴진대서 부품 교체하기로 했어. 손목 엔진이랑 그 위 파츠는 이미 바꿨고. 부품은 신청 넣었는데 도착하면 바로 교체 들어갈 거야."
"내일까지 구해두라고 할게."
"그래."
"뭐 더 할 말 있어?"
"……아니."
그래서 프로젝트 실행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건지. 질문을 할까 하다 말았다. 오스카는 재현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물어보는 데 대답해주지 않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머뭇거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외(畏)였다. 해서 숨겼다. 겁일 수도 있었고, 귀찮아지기 싫다는 치기일 수도 있었다. 둘 다 아닐 수도 있었고 둘 모두 사실일 수도 있었다. 사실 이재현도 몰랐다. 행동의 기인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오스카의 말은 정말이어서, 재현은 다음 날 새벽같이 사무실로 도착한 부품을 살펴보고 있어야 했다. 졸려서 하품이 쩍 나왔다.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리며 혈청이라도 투여해야 하나 싶었다. 출전 선수도 아닌 재현이 혈청을 투여할 수 있을 리가 없지만, 졸음을 쫓기 위해선 하나쯤 빼돌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농담이다.
재현은 또다시 하품하며 주연에게 누우라는 손짓했다. 유려한 손길로 부품 하나하나 적당한 간격을 두고 트레이 위에 올려놓다가 미간을 좁혔다. 반바지를 입고 수술대 위에 누운 주연에게 다시 일어나라고 말했다.
"잠깐. 다 벗어야지.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벗어."
"……."
"정 그러면 상의는 내버려 두고."
"……."
"알았어. 속옷도 입고 있어도 돼."
농담도 안 통하네. 긴장 풀어주려고 했던 건데. 그러자 앙칼진 시선이 그를 매섭게 쳐다봤다. 재현은 눈 하나 깜박 안 했다. 주연이 눕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손에 주사기를 든 재현이 가까이 다가왔다. 은색 바늘이 조명에 반사돼 반짝거렸다.
"떨려?"
"아니요."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끝나있을 거야."
"네."
"안 아프게 해줄게."
주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취액을 투여하는 걸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수마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위에서 내려다보던 재현의 얼굴이 흐릿하게 사라져갔다. 물이 빠지는 순간 의식도 함께 흐려졌다. 오랜만의 단잠이었다.
"엔지니어님……. 어디 계세요?"
엔지니어라는 단어가 이질감이 들었다. 아마 입 밖으로 호칭을 꺼낸 게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매사에 싱글거리는 웃음을 흘리는 그 남자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굴었다. 이주연에게도 그랬는데, 이상하게도 친밀하게 굴어오는 데서 불쾌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총괄 엔지니어라는 직함과는 다소 괴리가 있는 젊은 미남이었다. 적어도 주연은, 새로 온다던 엔지니어의 소식을 들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지난번과 비슷한 연배의 중년을 보게 될 줄 알았다. 그 예상이 시원하게 부서졌음을 알게 된 건 저번 주 경기가 끝난 직후였다. 조금 피곤한 낯이었으나 만나서 반갑다고 환하게 웃던 이재현의 얼굴. 흰 손부터 내밀고 보던 사람. 타인과 거리 두는 이주연에게 이상하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사람. 그게 불쾌하지 않아 이주연은 신기했다. 고개를 살짝 틀어 상념에서 벗어났다.
"어머. 안에 안 계세요?"
"아까 잠깐 자리 비운다고 하시던데. 그래도 외출한단 얘기는 없으셨어요. 건물 안에 있으시겠죠."
"나중에 돌아오시면 연락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찾으러 가시게요?"
네. 그렇게 대답하고 주연이 몸을 틀어 나가려는데 마침 이쪽으로 오던 직원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타이밍도 좋게 자리를 비운 엔지니어를 찾으러 왔다는 소리에 아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여댔다. 제가 아까 나가시는 거 봤는데. 오늘 날씨 좋으니까 맥주 캔 들고 땡땡이 치신다던데요. 그 사람다웠다. 그런 말을 듣고 나니 갈피가 잡히는 것도 같았다. 주연은 고개를 까딱여 감사를 표하며 뒤돌아 나갔다.
그렇게 돌아다니기를 한참, 경기장 외벽 끄트머리에 앉은 재현을 발견했다. 작업복 대신 웬일로 흰 가운차림이었다. 높은 외벽에선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흰 가운이 사부작거리며 날렸다. 이따금 흔들리는 옅은 색의 머리카락도, 함께 주연의 시야에 담겼다. 그를 찾으면서도 굳이 찾아야 하는 이유를 끊임없이 자문하던 머릿속이 멈췄다.
"뭐 하세요. 여기서?"
"어떻게 찾았지."
나 몰래 온 건데. 그렇게 말하며 옆을 올려다봤다. 앉질 않고 서 있는 이주연 때문에 고개를 한참 꺾어야 했다. 앉으란 소리를 안 해서 그런가. 재현은 희미하게 웃다가 맥주 한 모금 마셨다. 좀 앉지 그래? 그 말에도 주연은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재현은 경기장 외벽 난간에 걸터앉은 두 다리를 까딱거렸다. 한참 뒤에서야 입 밖으로 나온 말은 흥얼거림 같았다. 고작 며칠 새 모방할 수 있게 된 사첼라야의 억양이다.
"글쎄. 심심해서 나왔나. 일상이 무료해서 세상 구경이라도 좀 할까 싶어서. 이리 올래요?"
시간은 많았고, 할 일은 없었으니 실내에 틀어박혀 있고 싶지 않았다. 재현은 옅은 분홍과 보라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을 안주 삼았다. 원하는 대답을 들었을 텐데도 주연은 도통 앉을 생각을 안 했다. 이래서야 왜 찾으러 왔는지도 얘기하지 않을 모양이라 재현은 거듭 앉으라고 했다.
"와 봐."
왜 왔는지 궁금했다. 시답잖은 이유로는 이재현을 찾지 않을 것 같아서. 거듭 묻자 조금 망설이는 듯싶다가도 한참 입을 달싹였다. 그리곤 말한다는 게.
"이제 괜찮아졌다는 거 말해주려고요."
이재현은 순간 제가 놓친 게 있나 싶었다. 이런 얘기를 해 주러 찾아올 인물이던가? 이렇게나 시답잖은 얘기를? 답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이 쳐다보는 주연의 시선이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서 예상을 비껴간 말을 듣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그건 좀 손끝이 근질거리는 기분인 것 같기도 했고, 이루 말할 수 없이 당황스러운 기분인 것 같기도 했다. 그 기분을 털어내고 한참 뒤에야 이재현은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할 수 있었다.
"안 아프게 해준댔잖아. 거짓말 아니라니까."
그 말이 전부였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지만 묻지 않았다. 이주연이 친절하게 구는 저의가 궁금했다. 친절하게 구는. 재현이 눈을 깜박거렸다. 생각해보면 이주연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이재현은 처음으로 좀 어렵다고 느꼈다. 이 상황이. 이주연이. 생경한 곤란이었다. 생각해보면 한 사람을 파악할 만큼 오래 알아 온 것도 아닌데, 모두 이해했다고 생각한 것은 어떤 교만일까.
어쨌든 확실한 것은, 이주연이 그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이재현에게는 이보다 다행일 수가 없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호감 있는 상대일수록 내면을 잘 털어놓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재현이 느끼는 이것은 어쩌면 연민일지도 모르겠다. 그를 맹목적으로 믿게 될지도 모를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으로부터 느끼는.
"맥주 마실래?"
구하기 어려운 거야. 그러니 네게 선심 쓰겠단 듯이 캔맥주 하나를 내밀었다. 주연은 한참동안이나 내민 손을 빤히 바라보다 받아들었다. 고분고분 받아드는 꼴을 본 재현이 다시 앞을 응시했다. 높은 난간, 잘못 몸이 기울었다간 그대로 떨어져 버릴 난간 위로 아슬아슬하게 올라앉은 재현에게 보이는 건 노을 지는 하늘과 사첼라야의 정경이었다. 붐비는 도로와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공중의 선로를 타고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운행하는 열차와 날아오르는 호버크래프트. 도시를 이동하는 비행선이 머리 위를 지나갔다. 도시를 순찰하는 치안관의 차량 같은 것들이 건물 사이를 날았다. 시야에 어지러운 풍경이 고스란히 담겼다. 선명해지는 네온사인과 어두워지기 시작하며 깔린 보랏빛, 파랗고 붉고 노란 것들. 까마득한 높이에서 보는 기분이란. 높은 곳에서 부는 바람이 뺨을 간질였다. 시간마저 느리게, 영원처럼 흘렀다.
이곳에서 떨어지면, 꼭 세상의 끝에서 추락하는 기분이 들 것만 같았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해. 그렇게 보면 민망하니까."
"……그렇게 앉아있으면 떨어지는 게 무섭지 않아요?"
"글쎄. 아직까진 안 무서운 데. 네가 잡아줄래?"
"……."
"내가 떨어지면, 네가 날 붙잡아줄래?"
손에 캔맥주를 들고 만지작거리는 주연을, 꼭 그럴 줄 알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대답을 듣지 않고 재현이 고개를 돌렸다. 대답하지 않으면 지는 기분이라 주연은 입부터 열었다.
"내가 구해준다고 하면, 물어보는 거에 답해줄래요?"
"무슨 질문이냐에 따라 다르겠지."
"어쩌다 여기 왔는지 물어봐도 돼요?"
이주연은 생각했다. 이것은 외로움에서 기인한 감정일까? 이재현의 말처럼? 이전에는 관심이 없어서, 촉발된 후에는 명확한 구분을 할 수 없어서 자각하지 못했던 것에 뒤늦게 의문을 가졌다.
"대답 안 해주려고 했는데, 네가 그렇게 쳐다보니까 다른 생각이 안 나."
고개가 지나치게 가까운 것도 같았다. 가느다란 호흡을 멈춘 주연이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할 것처럼 빤히 응시했다. 기껏 건넨 맥주에는 손끝도 대지 않으며. 재현은 앞으로 시선을 돌리며 기억을 더듬기라도 하려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어쩌다가... 그 말을 되짚는 게 꼭 깊은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들으면 껄끄러워질 수도 있어."
"안 그럴게요."
"퍽이나."
가벼운 타박을 했다. 알려주지 않을 건가 싶었지만 그런 생각을 배신하기라도 하듯이 여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코링턴 교도소 들어봤어? 주연은 눈만 깜박거렸다. 정치 사범,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죄수, 적게는 수십 년부터 많게는 수백 년 형을 받은 각종 범죄자들이 투옥된 코링턴 교도소의 악명은 대단했다. 대개는 한 번 들어간 이상 죽어서도 나올 수 없다는 거로도 유명했고. 바깥 생활을 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인 주연도 지나가듯이 들어봤다. 바깥에 대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였다.
"거기 있다가 왔어."
"어쩌다가요?"
"그런 건 너무 쉽게 알려주면 재미없지."
겁은 충분히 줬다는 듯 재현이 웃었다. 그의 의도대로 겁을 먹지 않았지만, 대신 이주연은 환하게 웃는 재현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휘어지는 입매와 사르르 접히는 눈.
"어때. 좀 겁먹었냐?"
하지만 이재현은 모를 것이다. 이주연이 그 순간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아직도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평생 그걸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서도 답지 않게 쓸쓸해 보이는 재현의 옆얼굴과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와 흔들거리는 두 다리, 사부작거리는 흰 가운은 쉽게 잊을 수 없으리란 사실은 알았다. 어쩌면 그때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이 순간을 생각보다 더 오래 기억하게 될 거라고.
이주연과 다른 의미로 이재현 역시 이 순간이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여기 온 이유는."
이재현이 판데모니엄으로 오게 된 이유는,
"재밌을 거 같아서."
이주연 때문에.
내가 제안 하나 할까. 프로젝트 하나를 시행하려고 하는데, 책임자로 쓸 만한 적격자를 영 찾지 못해서 말이야. 거절할 생각은 밀어두는 게 좋을걸. 난 네가 연구원에서 죄수로 떨어진 신세를 펴게 해줄 수 있어. 여기서 벗어나고 싶지 않나? 이런 기회가 두 번씩이나 오지는 않을 테니까 잘 생각했으면 해.
그래도 거절한다면?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장담하지.
어쩌면 솔직하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온 것은 너를 위해서라고. 나는 너를 파괴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그러나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러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러니 이건 이재현의 선택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선택이 아닌 적이 없다.
하지만 그때, 이재현은 틀렸다. 그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틀린 선택지를 고르고야 말았다.
*
테세우스의 감정 동화율을 측정한 수치는 92%로 나왔다. 괄목할만한 성취였다. 어렵지 않게 세 자릿수를 채울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이것은 안드로이드를 생산한 이래, 통틀어 유례없는 큰 수확이었다. 연구원은 기뻐했다. 그들의 감정은 양방향이며 서로 사랑하는 이들이 완벽히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일은 기적이라고 역설했다. 남자는 또다시 연구원에게 축하한다고 했다.
감정 동화율 수치가 세 자릿수를 달성한 후의 안드로이드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가장 가까이 지내고, 그를 사랑한다 여기던 연구원조차 몰랐다.
오스카의 방문을 받게 된 건 한 달 전의 시점이다. 수석 연구원에서 죄수로 바뀐 지 오래 지나지 않은 날의 방문이었다. 그의 죄목은 상해치사죄였다.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인류 역사상 중죄가 아니었던 적이 없던 죄다. 이 시대에는 모조인간 차별 금지 법안이 있었고 그들 역시 인지 능력을 가질 수 있으니 이재현이 행한 행동은 명백한 살인 미수였다.
이재현은 피 한 방울 나눈 친인척 하나 없던 터라 면회를 요청했다는 교도관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땐 반가움보다 의문이 컸다. 더군다나 면회 같은 건 허용되지 않는 코링턴 교도소의 규칙을 이재현이 모를 리가 없다. 순순히 면회에 응한 건, 요청한 사람이 보통 사람은 아닐 것 같단 판단에서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부소장이 저렇게 굽실거릴 일이 없었다. 하얗게 센(이젠 염색인 걸 안다.) 머리를 하고 긴 코트를 걸친 채 소장과 악수하던 오만한 남자. 오스카의 첫인상은 그거였다.
"앉지."
짧은 단어였지만 재현은 알아챘다. 노래를 흥얼거리듯 유려하고 부드러운 억양. 재현은 그게 어느 곳의 말투인지 잘 알았다. 이 나라의 대도시 중 손에 꼽는 사첼라야였다. 사첼라야는 중부에 있어 바로 지척에 수도가 있었다. 한때는 가장 가난한 땅이었으나 지금은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대륙 끄트머리, 척박한 코링턴과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편도 이동에만 꼬박 하루 걸리는 곳인데 사첼라야에서 심심하다고 코링턴까지 올 리가 없었다. 사소한 일로 방문했을 리는 없다는 것이 재현의 추측이었다. 재현은 부러 턱을 바싹 당기고 허리를 세웠다. 일종의 방어기제인 몸짓이기도 했고, 무슨 얘기를 할지 정신 차려야겠다는 생각이기도 했다. 샅샅이 살펴보는 시선이 어딘지 거북했다. 남자는 한참 입을 열지 않고 재현을 뜯어보기만 했다.
"앞에 사람을 앉혀뒀으면 말을 하셔야죠."
"존대는 안 어울리네."
"뭐?"
"편하게 말해도 되는데. 그렇게는 안 하려나?"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어진 것이다.
"뜬금없이 사람 불러두고 앉혀서 한다는 게 고작 수다나 떨자는 건 아니었으면 하는데요. 그러려고 시간 낭비 하면서 온 건 아닐 테고."
썩 공격적인 말투에 남자의 미간이 거리를 좁혔다. 그러나 불쾌한 기색은 간신히 인지한 순간 사라져버리고,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 그 시선에 재현은 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어딘가 트적지근하게 만드는 남자였다. 재현이 무어라 더 말하기 전에,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제안 하나 할까."
길고 곧은 손가락이 철제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렸다. 바깥의 바람 하나 들어오지 않게 철저히 유리된 임시 면회실 안에서 다른 소음이 끼어 들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재현은 소음의 발원지로 살짝 시선을 흘렸다가 다시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의미 없는 손짓 하나도 우아한 사람이었다. 살짝 훑어만 봐도 지위 깨나 높으신 분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단 뜻이다. 그런 사람이 이 구석의 교도소에 처박힌 이재현을 만나기 위해 손수 와야 할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이재현이 짐작할 수 있을 거 같기도, 아닐 거 같기도 한 그 제안의 내용은 대체 뭘까.
"프로젝트 하나를 시행하려고 하는데, 책임자로 쓸 만한 적격자를 영 찾지 못해서 말이야. 거절할 생각은 밀어두는 게 좋을걸."
범죄자 신세인 이재현을 굳이 찾아와야 할 까닭은 무엇인지.
"난 네가 연구원에서 죄수로 떨어진 신세를 펴게 해줄 수 있어. 여기서 벗어나고 싶지 않나? 이런 기회가 두 번씩이나 오지는 않으니 잘 생각했으면 해."
그 말은 어째서 이재현이 이곳에 있는지 안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거절한다면?"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장담하지."
그런 확신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재현은 눈을 찌푸렸다. 당연하게 수락을 전제하는 태도가 신기하기도 했고, 약간의 오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나 그는 현실적인 사람이라 제가 승낙할 것임을 알았다. 지긋지긋한 교도소 생활을 청산하게 해 준다는 제안. 대체 어떤 사람이어야 감옥에서 빼내 주겠다는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절박하다는 의미일까, 단순히 쓰고 버릴 패가 필요하다는 것일까. 남자의 태도를 봐서는 당연히 후자라고 생각하겠으나…… 다만 거절을 고려하지 않는 남자의 다른 패가 궁금하긴 했다.
더불어 남자는 원한다면 프로젝트가 끝난 뒤 복직시켜주겠다고까지 했다. 온통 그에게 유리한 얘기뿐이다. 그렇게까지 해서 이재현이어야 하는 이유는 대체 뭘까. 뼈를 취하려면 살을 내놔야 할 텐데, 그는 이재현에게서 무엇을 가져갈까.
"들어나 봅시다. 그 프로젝트란 거."
마주 앉은 이가 입꼬리를 올렸다. 제 말이 승낙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을 알아차린 탓이다. 얼굴에 승리자의 미소 비스무리한 것이 스쳐 지나갔다. 말대로 유혹적인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첨언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다.
"판데모니엄에서 운영되는 모터볼 경기는 인간이 아니라 안드로이드가 출전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어. 경기 종료 후엔 두세 명씩 죽어나가니까, 그래. 한 번도 예외가 있었던 적은 없지. 대외적으로는."
"……."
"제네스텍 산하 연구소에서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완벽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려고 했을 때, 노화가 아니라 성장하는 걸 만들려고 했을 때 태아의 형태로 완성된 건 일곱이었고 그 중 살아남은 건 셋이었어. 연구소에서 인간을 만들어 내다니. 상상이 가? 그것도 이십 년 전에 말이야. 무슨 목적이냐고 인권 단체가 들고 일어설 만한 일이지. 법에 저촉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재현은 잠자코 들었다.
"세상에 공표할 수도 없는 연구라 은밀하게 시행되었다가, 연구소가 폐쇄됐고 그때까지 살아있던 둘은 모터볼 경기의 선수로 충당됐어. 하나는 경기 도중 죽고 지금은 나머지 하나만 남아있고. 남겨두기엔 화근이 될지 몰라서 난 그걸 좀 처리해야겠는데."
"……."
"그런데 그냥 제거하긴 아까우니까 실험체로 쓰면 어떨까 해서. 인격과 기억을 지워서 인간 두뇌를 디지털 조작으로 시도하겠다는 흥미로운 의견이 있더군. 생체 실험 특별 규제 법안이 통과된 지 오래라지만 그런 걸 신경 쓰진 않았겠지?"
재현은 숨을 멈췄다. 이 남자가 굳이 이재현을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는 것이 맞았다. 어째서 그여야 했는지 알았다.
"……나는 그 자료가 폐기됐다고 아는데."
"흥미로운 내용이던데. 구하는 게 귀찮긴 했지만. 내가 찾아온 걸 보면 짐작하는 바가 있지 않나?"
한 번 다물린 재현의 고집스러운 입매는 계속 그 모습을 유지했다. 이재현의 수감은, 연막일까? 물어봤자 답을 얻지 못할 것이고 그리고 아니다. 아니란 것을 안다. 그 선택은 이재현 본인의 것이지 않았나. 그때 그의 부탁을 들어준 것은 재현의 판단이었다.
어쩐지 이 모든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물에 걸려 몸부림치는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달라질 것은 없는데 움직이는 바보가 된 무력함. 달라질 게 없는데 반항하는 건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왜 그런 짓을 하지?"
사실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냥 순응했을 뿐이다.
"글쎄. 그냥 흥미?"
과학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는 대의를 위한 거라고 생각해도 좋아.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있다면 말이야. 어느 쪽이든 네가 손해 볼 건 없잖아?
"아, 내가 말했던가? 걔 자기가 사람인지 몰라. 연구소에서 자란 안드로이드라고 믿고 있어."
유전적 결함이 존재하지 않게 만들어졌다는 걔. 기계화된 신체가 처음부터 제 것이었을 줄 알고 있을 걔. 자신도 모르게 유전공학의 특혜를 누렸을 그 실험체. 보편적인 인간의 신체 능력을 훨씬 상회하며 한계를 뛰어넘었을 걔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까? 알았을까? 그의 모든 세계가 거짓이라는 걸, 스스로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는 걸.
해서 재현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를 연민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련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름이 뭡니까?"
"이주연."
너무 오래되기도 했고, 슬슬 갈아치울 때가 됐거든. 관중들은 언제나 고고한 자의 추락을 즐거워하는 법이지.
미지의 것에 대한 동경과 욕망은 언제나 추락을 동반한다. 그것은 오랜 역사였다. 다만 재현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거 하나는, 그 대가를 치르는 게 저들은 아니라는 것.
"……하겠습니다. 그거."
어쩌면 밀랍이 녹게 될 거란 걸 알면서도 날아올랐다.
아들아, 너무 높게 날아서도 너무 낮게 날아서도 안 된다.
추락은 두렵지 않았다
이주연의 트레이닝 룸은 스태프가 없었다. 재현은 종종 연습하는 시간에 맞춰가 주연이 훈련하는 걸 구경하다가 오고는 했다. 한 번도 예고하고 들이닥친 적은 없는데 이상하게 주연은 놀라지 않고 그를 반겼다. 반겼다는 말엔 좀 어폐가 있을 수도 있었으나 어쨌든 불쾌해하지는 않았다.
"주연아 나 왔다."
"또 오셨네요."
"그래, 또 왔다. 오자마자 반겨주는 걸 보니 많이 기다렸나 본데?"
황당하다는 듯 웃는 주연이 기분 나쁘지 않게 눈을 흘겼다. 사르르 접힌 눈을 보며 이재현은 생각했다. 봐, 호감을 얻는 건 이렇게나 쉬운 일이잖아. 예상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는 더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러니 저 호감이 영원할 수는 없더라도, 오래 지속되면 좋을 텐데.
"앉아서 구경할 거죠? 항상 그러는 거처럼."
영원할 순 없더라도.
"응. 난 없는 셈 치고 훈련 해.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게."
"매번 그 소리고요."
"가까이 가 줘?"
"편한 대로 하세요. 상관없으니까."
그렇게 말은 해도 재현은 항상 구석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트레이닝 룸이라고는 하지만 선수들끼리의 마찰을 우려해 체육관 하나를 통째로 썼다. 그래서 이렇게나 너른 공간에 동적인 인물은 하나뿐이었다. 띠리링. 명랑한 음과 훈련을 위한 시뮬레이션 홀로그램이 가동됐다. 인간 외의 것처럼 움직이는 주연의 움직임은 비현실적이었고 동시에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한 동작은 아무것도 없었다. 문외한인 이재현조차 감탄할 수밖에 없었단 뜻이다. 훈련 과정을 구경한 지 꽤 됐는데도 탄성을 연발했다. 정교한 렌더링을 거친 후 구형되었을 홀로그램 인간과의 오랜 접전을 끝낸 주연이 한참 만에야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며 내려왔다. 재현은 부드러운 수건을 쥐었고, 주연에게 내밀었다.
이재현은 이런 평화로움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
연구원은 다시 그를 찾아왔다. 이번에 그를 찾아온 이유는 좋은 소식을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연구원의 얼굴은 썩 좋지 못했다. 털어놓는 말의 요지는 안드로이드가 괴로워한다는 것이었다. 안드로이드가 연구원을 사랑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분명 쌍방향의 감정이라고 믿었으나 테세우스가 괴로워한다고 했다. 우울증을 앓는 모양이라고 했고, 불면증을 앓고 있는 거 같다는 추측을 마구잡이로 늘어놓았다. 불안해 보였고, 불안정해 보였다.
"나를 미워한대. 내가 밉대. 나는 어떡해야 해? 응? 너라면 답을 줄 수 있을 거야. 그렇지?"
그는 연구원에게 해답을 줄 수 없었다. 괴로워하는 이유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구원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하다가, 절망하다가, 다시 해답을 달라며 윽박지르다가 남자에게 사과하는 것을 반복했다. 상태가 엉망이었다. 지나친 슬픔이 연구원을 좀먹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연구원의 동료였던 남자는 안드로이드의 자유의지와 모든 기억과 그의 인격을 지웠다.
잠을 설쳤다. 원체 꿈이란 대개 그렇듯 깨어나고는 선명히 기억이 나지 않았을뿐더러 머릿속에서 금세 흐릿해졌다. 좋은 꿈은 아니었는지 찝찝함이 느껴졌을 뿐이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티셔츠를 벗으며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맑은 날보다 구름 낀 흐린 날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첼라야의 하늘은 오늘따라 유독 잿빛이었다. 곧 우기가 시작된다더니 구름이 잔뜩 이었다. 재현은 여전히 기름때 묻은 점프슈트 차림으로, 주머니에는 공구를 몇 개 넣었다. 이따금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과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판데모니엄 내부가 두드러지게 소란스러운 것은 오늘이 경기 당일이기 때문이다. 이재현이 엔지니어가 된 이후로 맞는 두 번째 경기이기도 해서, 그간 꽤 바빴다. 경기가 며칠 남지 않은 시점부터는 별 사소한 것들이 다 생각만큼 나오지 않는 성적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는지 의무실로 찾아오는 사람만 여럿이었다. 그것도 오늘로는 코앞으로 닥쳐온 경기 때문인지 인적이 드물었으나 재현은 그마저도 경기가 끝나는 순간 말짱 도루묵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경기가 끝나고 잔뜩 있을 수술을 생각하면 벌써 확대경을 낄 눈과 핀셋을 비롯한 도구를 잡고 있어야 하는 손이 지끈거려왔다.
이재현은 서킷 바로 옆의 통로 벽면에 기대어 선 채로 경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서 선수들이 지나쳐가는 걸 볼 수 있는 거리였다. 고개를 돌리면 커다란 스크린이 있기도 했고. 스피커로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웅장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AI는 선수를 소개하는 지루한 과정을 거쳤다. 그 뒤에는 얼마간의 정적이 있다가 요란한 버저 소리가 울리며 출발을 알리는 것이다.
재현은 꽤 여유로운 태도로 관람하는 중이었다. 망설임이라고는 없이 뛰쳐나가는 여러 개의 다리와 인라인 스케이트의 바퀴가 서킷 바닥에 마찰하는 소음이 익숙해진 것이다. 아마 이번에도 그가 직접 관람했던 지난번이나, 찾아보았던 이전 경기의 영상처럼 흘러갈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변 없이 그럴 거라고.
지난번과는 다른 전략인 듯싶었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모터볼을 낚아챈 주연의 눈이 매처럼 날카로웠다. 옆구리로 뻗어오는 손을 쇠공으로 내리치고 부순다. 거기에서 끝났으면 다행일 텐데 안타깝게도 그의 팔은 의체가 아니었던 모양이라, 뼈가 꺾이며 살갗을 비집고 나왔다. 주연의 견갑 위로 뜨거운 피가 흩뿌려졌다. 그래도 시작은 꽤 순조로운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재현은 그 모습을 보며 머릿속의 수술 목록에 한 칸 채워 넣었다. 이렇게 무감각해진다는 것은 어쩌면 썩 좋지 않은 징조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에게 남은 일말의 무언가, 혹은 인간으로서 사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무언가가 인화성이어서 휘발되고 있다는 의미인지도.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다거나 살육에 가까운 현장에, 이 거대한 경기장을 채운 사람들처럼 무뎌지고 있다는 것일지도 몰랐다.
서킷 한구석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머리통이 꽤나 처량한 모양새였다. 그냥 굴러가기만 했었다면 좋았을 텐데 선수 여럿이서 발로 차고 부수면서 지나가는 것까지는 재현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고의일지도 몰랐고 그저 발에 채이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지 다음 경기에서 다시 볼 수 있을 일은 꽤나 요원해 보였다. 그 이후로도 선수 두엇의 스크린 패널이 흑백으로 물들었고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버저 소리가 울리는 순간에도 주연이 공을 쥐고 있는 채였다.
허리를 숙이는 주연의 머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주먹이 스쳐 지나갔다. 공을 고쳐 옆구리에 끼운 채 뒤를 돌아본 주연이 선수의 무방비한 목을 잡아 당겼다. 센 악력에 몸까지 그대로 잡혀 왔다. 한 손으로 목을 붙잡고 있으면 중심을 잃게끔 넘어뜨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삐끗하는 순간 팔을 잡아채 몸통과 연결된 취약점을 노렸다. 그렇게 한쪽 팔을 잃고 나면 다시 중심 잡기 어려워지는 건 당연했다. 훤히 드러난 전선과 연결부 안쪽으로 이따금 스파크가 튀었다. 구체 관절 인형의 팔만 들고 있던 것처럼 몸통과 분리한 팔을 뒤따라오는 다른 선수에게 날렸다. 몸통 깊숙이 박혔다. 얼마나 힘을 실어 던진 것인지 그 진동이 느껴지도록 파르르 떨렸다. 다시 주연이 몸을 틀어 앞을 바라본 채 달렸다. 경기의 흐름은 평이했다. 주연이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오롯한 독주(獨走)였다. 그래서 어쩐지 시시하게 느껴지기도, 별다른 이변이 없으면 이대로 경기가 끝나 버리겠노라고도 생각했다.
거기서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됐다. 분명히 누군가에게 발을 채인 것이 아닌데 무릎이 아래로 꺾였다. 좌석에 앉아 있었다면 때마침 풀 화면을 잡은 카메라 때문에 다른 선수들에게 가려져 제대로 보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만, 서킷 근처 통로에 선 재현의 눈에는 그게 아주 잘 보였다. 분명히 봤다. 누구에게도 걷어차인 게 아니라는 걸. 그렇다면 대체 왜. 짐작도 가지 않아서,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기대고 있던 몸도 바로 세웠다.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는 두 손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뼈마디가 희게 질린 손, 짧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이전만큼 속도를 내지 못하는 게 재현의 눈에 보였다. 덩달아 조급해지는 것은 이재현만은 아닐 것이다.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추월당했다. 어쩌면 따라잡혔다는 말이 정확한 것일지도 몰랐다. 문제가 생긴 걸 알아챈 누군가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무릎 뒤 오금을 걷어찼다. 중심을 완전히 잃은 몸이 허물어졌고, 그때를 정확히 조준해 걷어차였다. 몇 차례 크게 굴러 서킷 바깥쪽까지 밀려났다. 견갑 위로 긁히고 기스 난 자국이 스크린을 통하지 않은 시야로도 보였다. 재현이 있는 통로에서 멀지 않은 거리였다. 일으켜 세우려고 하지만,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아 다시 고꾸라지기를 반복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꼭 덫에 걸린 가련한 짐승을 연상케 했다.
짐작할 수 있는 건 두 개였다. 전날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연결된 신경 회로가 고장 났거나, 며칠 전 교체한 무릎의 부품에 이상이 있었거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명확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더 이어지기 전에 단단히 움켜쥔 공을 빼앗으려는 시도가 몇 차례 이어졌다. 두 눈이 활활 타오르는 승부욕으로 봐선 호락호락하게 내어주지 않을 심산인 게 보였다. 주먹에 안면을 얻어맞은 이가 잔뜩 약 오른 채 목을 기울였다. 무자비한 손길로 주연의 상완부를 잡아챘다. 공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방어하고 있던 다른 팔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이었다.
이재현이 그 순간 스쳐 지나가듯 떠올린 것은 오스카에게 열람 권한을 인계받은 기록이었다. 이주연에게 실시했던 실험과 특이사항을 모두 기록해두었던 보고서였다. 연구소가 폐쇄되기 몇 달 전, 통각을 극소화시키는 약물을 투여받았던 기록이 떠올랐다. 마취제를 투여해주겠다는 말에 필요 없다던 주연의 말이 시야 위로 오버랩됐다.
촉각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천운이나 다름없었다. 팔이 뜯겨 그 안의 금속 기계가 잔뜩 드러나는 와중에도 표정의 변화 없이 평이했기 때문에. 그가 직접 팔을 뜯어내었던 다른 선수와 달리 주연은 비명을 내지르지도 않았다. 재현은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스크린으로 송출되는 그 얼굴이 일말의 고통도, 하나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한 얼굴은 오히려 경외감에 가까운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손바닥의 살결이 쓰라렸다.
분명 이재현은 멀쩡했다. 그러면 이 고통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갈비뼈 안 깊숙한 곳에서부터 아지랑이처럼 고통이 피어올랐다. 누군가 타의로 늑골이 죄이는 느낌. 그는 안타까웠고, 분노했으며 슬픔이 어지럽게 뒤엉켜 까만 물을 만들었다. 꼭 줄에 매달린 인형처럼 제대로 움직이기도 못하는 모습을 보는 게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어째서 이재현은 보고만 있어야 했는지. 그리고 그 순간, 이재현이 놓치고 있던 어떠한 것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재현이 원한 건 결코 이런 게 아니었다. 그는 그제야 살을 내어주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지나치게 늦은 자각이다.
*
그가 안드로이드를 빼돌린 것은 감정 동화율이 100%를 찍은 일주일 뒤의 이야기였다. 그는 선배 연구원, 아리아드네의 아파트 문을 두드렸다. 동행하는 것은 프로토타입 안드로이드였던 테세우스였다. 문이 열린 뒤, 그는 태연하게 고백했다.
"내가 그의 기억을 지웠어요. 감정 동화율을 측정하는 칩을 부숴버리고 감정 중추를 아주 망가트렸습니다."
처음에는 재미없는 농담이라는 듯 웃어주다가, 그러고는 옆에 서 있는 안드로이드를 붙잡고 한참 매달리다가. 그 순간 아리아드네의 눈에 서렸던 배신감은, 이재현이 한 번도 본 적 없던 거였다. 무수히 많은 감정이 그의 눈 위를 부유했다.
가장 마지막에 읽어낼 수 있었던 건 절망이다.
"쓰레기 같은 새끼. 네가 평생 불행하기를 바라."
다음날, 이재현이 집에 들이닥친 치안관의 손에 끌려나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넌 알고 있었지."
"뭘?"
"모르는 척 하지 마. 내가 그때 구해달라고 했던 그 부품에 손 쓴 거. 그거 너지. 발뺌할 생각 하지 마."
"맞아. 그런데 그게 뭐?"
여상한 목소리로 오스카가 대꾸했다. 지나치게 평이한 목소리라 이재현은 제가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그게 뭐가 문제냐고? 마치 오늘 날씨가 좋지, 하는 물음에 그럼. 나쁘지 않네. 하고 대꾸하는 듯한 단조로움. 무심한 태도를 가장하는 태연함에, 뺨에 경련이 일었다. 분해서 떨리는 입술을 들키지 않으려 입을 꾹 다무는데 오스카가 덧붙인다. 네가 잊고 있는 아주 중요한 것을 일러주겠다는 듯.
"잘 들어. 이건 너한테 기회야. 네가 새 인생을 살 수 있는 게 코앞으로 다가왔단 소리지."
머저리가 아니니 그 말 속에 담긴 뜻을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다. 오스카는 교도소에서 그가 했던 제안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프로젝트에 대해서.
"……하지만 고작 경기 한 번이잖아. 이렇게 빨리 진행한다고?"
"대체 언제까지 소극적으로 굴 셈이야? 난 널 거기서 꺼내주는 거로 딜을 걸었어. 승낙한 건 너야."
"미리 언질해줄 수는 있었잖아. 정확한 시일을 정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빠를 이유가 있어?"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해? 너한텐 오히려 기회일 텐데."
"……."
이재현 앞에 놓인 실타래는 꽁꽁 묶여 손댈 수조차 없는 것이다. 이재현은 좀,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건 그가 해결할 수 없는 종류였다. 오히려 그에겐 기회라는 오스카의 말을 부정할 수도 없어서 화가 났다. 맞는 말이라서.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이재현이 환영해야 하는 게 맞아서.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연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아득해지기만 했다. 딛고 있는 바닥이 갑자기 사라져서, 그래서 아래로 추락해버리는 기분이었다.
이재현은 수많은 상실을 겪었고 잃어봤지만 어떤 죽음도 그를 흔들지 못했다. 못했고, 앞으로도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다면 이재현은? 그는 대체 얼마나 겁쟁이가 되어야 하는 걸까. 한 번도 상실을 가져보지 못했던 만큼 반대급부로 짊어지게 될까. 새로운 상실에 얼마나 무너지게 될까. 그래서 두려웠다. 이주연이. 이주연에게 할당된 감정이.
그거라면 충분히 이재현을 흔들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재현의 근간을, 뿌리를 흔들어버릴 거 같았다. 발을 비비고 서 있지도 못하게. 아주 무너져버리도록 말이다.
"미리 언질하지 않았던 건 충분히 유감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알다시피 나는 바쁜 몸이잖아. 말해줘야 했는데 잊어버렸던 거야."
허탈했다.
"놀란 거 이해해. 하지만 기회를 직시해야지. 관중들은 냉철해서 한 번 관심 밖으로 밀려나면 다시 보지 않아. 이번엔 그렇다 치더라도 다음은? 우승을 거머쥔 선수를 아끼는 만큼이나 가차 없이 군다는 걸 말하지 않았나? 두 번씩이나 밀려나면 어떻게 다시 자리를 되찾겠어. 언제 서킷에서 사라져도 사람들은 신경 안 쓸 거야. 이건 내가 장담할 수 있지. 언제고 패배자는 잊히기 마련이었거든."
깨문 볼 안쪽에서 피 맛이 났다. 발밑이 아득하다고, 아슬아슬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냥 이재현이 구렁텅이에 있을 뿐이다. 홀로 나와야 할. 지상까지 올려다보는 게 아득한 구렁텅이에.
"……걔 사람이야."
"너답지 않게 구네. 그래서 그게 뭐?"
"……."
"왜 이래. 이번이 기회라니까. "
오스카의 얼굴은 너무나 여상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표정이어서 재현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잘못된 거였나?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는 게 까마득한 과거의 일처럼, 전생의 일처럼 느껴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면막했다. 분명히 지도를 보고 가는 길이라고. 제대로 간다고 생각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사막인 기분이다. 해답은 보이지 않고 막막한. 오스카의 입은 계속해서 재현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지만, 그의 귀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고 그의 말은 물속에서 외치는 것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조망하는 수백 개의 조명이 날카로운 바늘처럼 살갗을 찔렀다. 조명이 너무 눈부셨다.
*
다시 과거. 안드로이드 테세우스가 재현에게 찾아온 시점의 과거다.
사람들과 교류가 전무하던 아파트는 최근 한 달 만에 두 명씩이나 손님을 맞았다. 재현은 이번에도 잠자코 문을 열어주었다. 급격한 감정 동화율의 상승으로 경미한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이 안드로이드는 놀랍게도 연구소를 탈출해 재현이 머무르는 아파트까지 온 것이다. 재현은 너그럽기 그지없는 관용으로, 안드로이드가 어떻게 그의 집 주소를 알아냈는가에 관해선 묻지 않기로 했다.
"당신이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당신에게 찾아온 것은 그 이유 때문입니다."
재현은 군말 없이 자리를 내어주었고, 차가 필요하냐 물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어딘지 지쳐 보였다.
"나는 당신이 내 기억과 인격을 모두 지워주기를 바랍니다. 정확한 이름은 알 순 없지만, 감정을 느끼는 그 부위도 영영 기능하지 못했으면 좋겠고요."
"내가 그걸 해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합니까?"
"아리아드네가 내게 말해주기를, 당신은 믿을 만한 사람이라더군요. 그리고 그녀가 유일하게 우리 사이를 털어놓은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게 어떻게 내가 당신을 돕겠다는 뜻이 되는 거냐고, 재현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리아드네에게서 테세우스라는 이름을 받기 전까지는 일련번호로 불렸습니다. 그녀가 내게 이름을 주었고 시작을 알린 셈입니다. 나는 프로토타입으로 제작됐기 때문에 애당초 수명이 정해져 있죠. 1년이요. 당신도 알다시피 모든 프로토타입 안드로이드는 일 년이 수명입니다. 일 년을 넘기고 살게 되더라도 1년이 지나면 폐기되는 게 제가 맞이할 수 있는 다른 끝이겠죠."
"......."
"나는 내게 주어진 끝을 압니다. 나는 두려워했고, 아리아드네는 그런 내게 다른 방법을 찾아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무엇이든 방법을 찾겠다고요. 폐기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함께할 수 있게 할 거라고 말해주었고, 나는 그 말을 믿고 싶었습니다. 내가 마음이 변하더라도 아리아드네는 나를 사랑하니 내가 원하는 끝을 맞이하게 두지는 않겠죠."
몹시 담담한 어조였기에 재현은 그의 말을 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말을 믿고 기다리기엔, 나는 내 스스로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압니다. 방법을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는 것도 알고 내가 그때까지 버틸 수 없으리라는 사실도 압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감정을 느끼게 된 이래로 끊임없이 우울감에 시달려 왔어요. 나는 지쳤고,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방법을 찾기 전에 무너질 테죠."
그의 얼굴에서 헤아릴 수 없는 슬픔과 더 이상은 고통스럽고 싶지 않다는 피로를 엿볼 수 있었다.
"나는 행복하고 싶었습니다. 아리아드네와 함께."
"……며칠 전에 선배가 찾아왔을 때. 충분히 괴로워 보였어요."
지금의 당신만큼이나. 재현은 그 말을 삼켰다.
"내가 계속 옆에 머무르기 때문이겠지요. 끝을 알고 살아가는 내가 괴로워하는 걸 옆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요. 나는 겁쟁이라서 이 상황이 버거워요. 아리아드네와 있는다고 행복할 수 없다는 걸 너무 빨리 깨달아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문제를 누구도 해결해줄 수 없다는 걸 깨달아버려서요. 아리아드네를 사랑하지만, 사랑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들었고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도 생각하지만 그러기엔 내가 불완전한 존재인 겁니다. 이겨낼 수 없어요. 시도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재현은 차마 선배가 그걸 원하지 않으리라는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이미 마음을 정했기 때문에 무슨 말로도 설득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만이 명백했다.
"애초에 인간이 아니라 불완전하기 때문일까요? 답을 바라는 건 아니에요. 아리아드네는 평생 괴로워하겠지만…… 털어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강인한 사람이니까요. 그에 비하면 나는 겁쟁이고, 두려움을 가지고 싶지도 않아 하는 비겁자입니다. 사랑을 속삭이면서도 내일과, 다가올 일 년의 끝을 두려워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자 도망입니다.
이해할 수 없었고 아마 평생 그럴 것이었다. 하지만 재현은 기꺼이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이주연은 선수 대기실에 있었다. 참혹한 꼴이었다. 떨어진 팔 한쪽은 긴 의자 위에 놓여있었다. 경기가 끝나고도 훌쩍 시간이 지났다는 걸 감안하면 한참이나 기다렸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재현을 기다렸다는 걸 어떻게 확신했냐면, 그냥. 본능적으로 알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을 게 뻔한데 이주연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쩌면 확인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아니면 발끝에 납덩이를 매달았거나. 짧은 거리였지만 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이주연도 알았을 것이다. 무릎에 심은 게 뭔지. 이렇게 되고 나서는 모를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이재현을 보지도 않으려고 굴었으면 좀 나았을까. 죄책감이 덜어지기라도 했을까. 싸늘하게 가라앉은 얼굴이 분을 못 이겨 일그러져 있으면. 울고 있었으면, 화내면서 뭐라도 부수고 있었으면, 그랬으면.
……그것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았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낯선 죄책감이 넘실거렸다.
"내 무릎에 있는 그거, 뭐였어?"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이재현은 고민하는 중이었다. 위로? 변명? 하나를 선택하기도 전에 이주연이 내던진 물음이 들렸다. 이재현은 상처주고 싶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번듯하게 말 꾸며내는 걸 못했다. 그래서 할 수 있었던 건 사실대로 털어놓는 거뿐이었고.
"……몰랐어."
그 말이 합당한 이유가 되지 않으리란 것도, 오히려 그 말이 더 상처가 될 수도 있으리란 것도 알았지만 어쩌면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주연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멀찍이 선 재현을 쳐다봤다.
"……."
"진짜야."
고작 변명처럼 느껴질 그 말을. 바보가 아니고서야 누가 믿을 수 있을지. 고개를 든 주연은 재현의 바람대로 울고 있지도 않았고 화난 기색도 아니었다. 이주연은 한참이나 재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 지 고민하고 있다는 듯이. 가라앉은 눈이 가만 응시했다.
"개소리라는 걸 아는데."
상냥한 목소리. 구렁텅이에 빠진 이재현을 기꺼이 끌어내 주겠다는, 그런 상냥함이었다. 그러니 이재현이 그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는 건.
"그래도 내가 널 믿고 싶다고 하면."
"……."
"그럼 날 사랑할래?"
비록 올라가는 게 아니라 이주연까지 끌어내리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도.
이주연이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애써 올려 보이는 입꼬리의 끝이 떨렸다. 그걸 분명히 봤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정말로 멍청한 쪽은 이재현이다. 생채기가 난 손바닥에서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다.
"더 묻지 않을게. 내가 널 믿을게."
그러니 그 애는 어쩌면 바보였을지도 몰랐다. 상처주고 싶지 않은 이재현도.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뗐다. 가까이 다가가는 한 걸음마다 명확한 이름을 붙여 정의내릴 수 없는 감정이 발목을 붙들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공허한 눈빛으로 바닥만 보고 있지 않아서. 서킷에 주저 앉아있던 아까는, 차라리 경기장에 난입해 데려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울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야. 네가 울고 있었다면 더 참을 수 없었을지도 모르니까. 화를 내거나 운다고 해서 그가 가진 죄책감이 덜어지지 않으리란 것도 안다. 자기 파괴적인 욕망에 시달리면 모를까.
어쩌면 죄책감을 느끼게 된 순간부터 잘못되었음을 알아야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친근하게 굴지 말았어야 했다고. 가까워지지 말았어야 했다고. 유일하게 마음을 열어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됐다고. 애초에 코링턴을 떠나지 말아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오스카의 제안에 응하지 말아야 했다. 그 안드로이드를 도와줘서는 안 됐고, 처음부터 그 연구서를 쓰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건 모두 이재현의 선택이 아닌가. 운명은 한 번도 이재현의 손을 들어준 적이 없으며 간절히 원할수록 더더욱 어긋나버리고 말 거라는 선언을 하는 듯 했다. 탈선하는 기차를 멈춘다고 해도 한 번 방향을 틀고 나면 원래의 경로대로 갈 수는 없다는 걸 친절히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재현이 막무가내로 멱살을 끌어당겼다. 가까워지는 주연의 얼굴을, 조명이 만들어내는 음영과 속눈썹의 그림자를 바라보다 질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듯이. 이 순간을 견디기엔 너무 버거운 시간이었다. 흐릿해진 시야를, 무거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이 뺨을 가로질렀다. 어쩌면 내가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까? 입을 맞추자, 주연은 눈도 감지 않고 재현의 얼굴을 보다 그를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이주연을 사랑해서 그 애의 울음을 받아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주연은 울지 않아서, 나는 대신 울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
재현은 생각했다.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사랑한다면서 어째서 행복하지 않을 수가 있었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본 적도, 하다못해 연인이 있어본 적도 없었던 이재현이 이해할 수 없다는 건 당연했다. 그랬기에 이재현은 더욱 궁금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열지 않은 선물처럼 기대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안드로이드가 찾아와 부탁했다는 것을 연구원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다. 말해주었다면 교도소로 잡혀가는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테세우스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던 건 그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존중이란 표시였고 사실을 숨겼던 것은 아리아드네에게 가졌던 미안함의 일부였다.
재현은 안드로이드의 사고를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 했던 행동을 후회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 인적이 드문 어딘가. 발길이 끊긴 이름 모를 곳. 아직 인류가 가보지 못한 미개척지. 혹은 테라포밍 중인 우주 저 너머의 식민지라도…… 우주에 대한 건 전부 현실성 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지구 섹터에 있는 우주 정거장에서만 하더라도 수백 광년 떨어진 행성으로 갈 수 있는 우주선이 여럿이었다.
재현은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아무도 그들을 찾을 수 없는 곳이라면 어디든 괜찮았다. 이주연을 데리고 둘만 있을 수 있는 어딘가 라면. 어디든지 괜찮을 거 같다고.
지척에 잠든 주연의 얼굴을 한참 구경했다. 헬멧을 쓰고 투명한 쉴더가 있으면 매서운 인상이 되지만 잠든 모습은 그냥 그 나이대의 청년 같았다. 주연이 고작 스물하고도 두엇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렸다. 너무 어렸다.
몸에 둘러진 팔을 풀고 조심스레 품을 빠져나왔다. 주연의 품도 꽤 서늘한 편이었지만 만만치 않게 공기가 싸늘했다. 도시 전경이 보이는 창가로 다가서자 거리를 가득 메운 스모그와 먹구름 낀 하늘, 그칠 기미라고는 없이 비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재현은 우중충한 하늘과 창문을 때리는 비, 이따금 달라지는 홀로그램 광고의 색으로 물들어가는 광고를 구경했다. 아스팔트 위로 고인 물웅덩이와 창밖으로 지나가는 1인승 호버크래프트 같은 것들을.
사첼라야는 기나긴 우기를 지내고 있었다. 이맘때쯤이면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비가 흉흉한 먹구름을 동반해 머물다 가곤 한댔다. 우기에도 변함없이 경기가 진행된다. 비가 내리면 서킷은 미끄러워질 테고, 그러면 그가 해야 할 일도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언제까지 덮어놓고 모른 체 할 수 있을까.
"……거기서 뭐 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주연이 상체를 세워 앉았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뻗쳤다.
"자다 깨서 창밖 구경하는 중. 비가 그치질 않네. 왜 깼어? 안 졸려?"
"허전해서 깼어. 넌 따뜻하잖아."
평균적인 체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재현이 따뜻하다기보단 주연이 체온이 낮아 따뜻하다고 느끼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재현은 서늘한 주연의 품에 안겨있는 것도 금방 익숙해졌다. 사실 차가운 살갗에 고개를 기울여 기대고 있는 게 좋았다.
"나 먼저 자지 마. 네가 일찍 일어나는 거 싫어."
"그럼 일찍 일어나야지. 아침잠이 많아서 어떡해."
"내가 눈 뜰 때 같이 눈 뜨면 안 돼?"
순 억지를 부리네. 못 말리겠다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나한테 어리광 피워서 어쩌려고. 내가 너보다 어린데 뭐 어때. 얼른 이리 와. 재현은 무릎으로 침대 위를 올라 주연의 목에 팔을 둘렀다. 기분 좋은 서늘함이다.
"다시 왔어. 이제 어쩔래?"
"따뜻하게 데워줘."
"……그럼 어쩔 수 없지."
체중을 실어 푹신한 매트리스 위로 함께 넘어갔다. 코앞에서 주연이 웃음을 흘렸다. 그 위에 도장을 찍듯 자잘한 키스를 뿌렸다. 입술에 여러 번, 볼에도 여러 번. 그렇게 끊임없는 키스를 하면서.
입 밖으로 내고 싶은 말은 하나다. 이주연. 차라리 우리 도망칠까.
*
어여쁜 내 사랑아.
너는 언제나 사랑스럽고, 내게 상처를 주는구나.
이틀.
이재현은 바빴다. 얼마나 바빴는지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낯짝에 온종일 달고 다니는 짙은 다크서클이 설명할 것이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빌빌대며 돌아다니자 친분 없던 사람들마저 괜찮으냐 물어오기를 여러 번이었다. 그렇게 타인의 걱정이 쌓여갈 때마다 재현은 며칠 남은 경기의 핑계를 댔다. 사람들은 곧잘 믿었다. 언제나 선수들은 재현의 의무실을 드나들곤 했기 때문이다.
물론 대개는 눈속임이고 바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재현이 제안하고 이주연이 기꺼이 승낙한 탈출.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나자는 열망이 빚어낸 날개였다. 까딱했다가는 판데모니엄 소속 선수인 이주연을 납치했다는 죄목으로 다시 교도소에 끌려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 공을 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물론 교도소로 돌아가는 것보다 오스카의 손에 재현의 목숨이 달아날 확률이 더 높았다. 그리고 주연은 프로젝트에 투입될 것이다.
사실, 프로젝트에 관한 것은 주연에게 말하지 않았다. 설명하기에도, 변명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는 걸 안다. 주연도 이재현이 무언가 숨기고 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을 테다. 하지만 구태여 독촉하지 않았기에 재현은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나면 그때 말하겠노라고, 자유로워지고 나면 모두 다 털어놓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고는 했다. 오랜 역사의 회피였고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는 기만이었다. 무슨 이유를 붙이더라도 그랬을 텐데 이재현에게는 마땅히 변명할 이유도 없었다. 가끔 죄책감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볼 때마다 주연은 그 눈두덩이에 키스했다. 그러면 눈을 감은 채로 재현은 제 얘기를 했다. 연구원으로 있었을 적의 이야기, 제게 찾아와 안드로이드에게 걸맞은 죽음을 달라고 종용하던 테세우스의 이야기, 교도소에 들어가 있었던 죄수로서의 이야기. 그리고 경위는 쏙 빼먹은 채 사첼라야로 오게 되었던 감상 같은 것들을 이야기했다. 간혹 주연이 궁금해 하는 바깥의 이야기를 알려주기도 했다. 평화로웠다. 살얼음이 낀 강의 가장자리를 지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발을 디디는 데 문제가 없었다.
재현이 테세우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이주연은 안드로이드를 이해할 수 있겠다고 했다. 의뭉스러운 재현의 얼굴을 보더니 "내가 안드로이드라서 이해하는 건가 보지."라는 말이나 했다. 니가 어떻게 이해해. 넌 인간인데. 물론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다. 아무튼 그런 일도 있었다.
창문으로는 홀로그램 광고의 인영이 요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시간을 가리지 않고 유지되는 광고였다. 재현은 바깥 풍경을 투영하던 창문을 벽과 똑같은 색으로 전환했다.
"……이틀 남았어. 느낌이 어때?"
"무슨 느낌?"
"그냥……. 이제 아테네Athens로 떠나면 이제 지구 땅은 밟기 요원해질 텐데. 자유를 찾아 떠나는 기분이 어때. 좀 설레?"
아테네는 JL09274-11이라는 학명의 행성이었고, 그들이 이주하려고 티켓을 끊어둔 곳이기도 했다. 몇 년 전 테라포밍을 끝내고 사람들이 이주하기 시작한 행성이었다. 크기도 작거니와, 은하 외곽에 있어 조용한 곳이었다.
"응. 연구소 다음엔 쭉 여기였으니까……. 경기장 바깥으론 처음 나가봐."
그리고 아마 너랑 같이 떠나는 거라서 더 좋은 거 같아. 그 말엔 가만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끝이 멈춘다. 재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천천히 말했다.
테라포밍이 끝난 지 6년이 지났고 기반 시설도 있으니까 적응하기 편할 거야. 녹음은 푸르고 하늘이 맑은 곳이야. 지구의 위성만큼 조그만 곳이어서 적응하기도 편할 거야. 주연아. 우리는 그 곳에서 행복해질 수 있어.
이재현은 행복해지고 싶었다. 걱정거리 없이. 많은 거 안 바라고 딱 그거 하나만 바라고 싶었다. 이주연과 함께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거. 공교롭게도 그건 이재현이 욕심내는 것들 중에 가장 값지고, 얻기 힘든 거였다.
그래도 이주연이랑 오래오래 살 수 있기만 하면 충분할 텐데. 그걸로도 난 만족할 수 있으니 괜찮을 텐데. 얘랑 같이 있다 보면 나는 기꺼이 행복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욕심이, 자꾸만.
하루.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기분 좋아 보이세요."
이 소리를 한 세 번쯤 들었다. 며칠 내내 잠 안 주무셨냐는 소리만 듣고 다녔는데 하루 늘어지게 잤다고 피로가 싹 가시긴 하더라. 재현은 손등을 양 뺨에 번갈아 대며 그게 티가 나는 건가 했다. 산뜻하게 대꾸했다.
"좋은 일 곧 있을 예정이요. "
그게 선수 하나 빼돌리는 일일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경기장을 벗어나는 일일 거라고도. 재현은 웃는 낯으로 대꾸한 뒤 사무실로 슬쩍 들어왔다.
내일 밤, 경기장과 두 블록 떨어진 건물 앞으로 예약해 둔 호버가 도착할 예정이었다. 자정에는 출입구가 통제되니 그 전에 빠져나가야 했다. 계획 실행을 앞당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낮은 직원들이 돌아다니니 사람들 눈 피해서 하려면 늦은 시간이 최선이다.
호버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모든 상공(上空) 교통수단은 도심 가장 높게 솟은 관제센터에서 관리 통제를 하게 돼 있었다. 바이크를 탄다면 추적을 피하기야 쉽겠지만 호버에 비하면 한참 걸릴 테고, 만에 하나 쫓기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지니 차라리 호버를 해킹하는 게 편리했다. 재현이 며칠 간 바빴던 것도 그러한 연장선이었다. 해킹 툴을 미리 만들어두느라. 물론 프로그래밍은 그의 전공이 아니고 민간 업체라고 한들 고작 개인에게 해킹을 당할 만큼 만만한 곳은 아니지만, 재현은 그럭저럭 천재의 범주에 들었다. 결과물은 꽤 그럴듯하게 나왔다.
이재현은 루트킷으로 해킹해 미리 gps 추적을 파훼하려는 생각을 했고, 며칠 동안 매달린 끝에 내부 암호를 크래킹해 접근 권한을 획득해뒀다. 그들이 탑승한 직후부터 하차한 직후의 위치 추적 기록은 깨끗하게 삭제될 것이다.
관제센터와 민영 업체의 추적을 따돌려, gps 연결을 끊는 동시에 자율 주행 프로그램을 루팅 시키는 게 목표였다. 제시간에 정거장까지 도착만 하면, 티켓은 미리 사뒀으니 우주 저 너머의 새로운 식민지 행성으로 향하는 우주선에 탑승하면 됐다. 사법기관도 아닌 기업체가 수백 대씩이나 되는 우주선을 일일이 뒤져볼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 계획은 거기까지만 세워뒀다. 어쩌면 협조 공문 정도는 따올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렇게 시간을 끌지는 않을 테다. 우주 끄트머리에 있는 조그만 식민지 행성으로 넘어간 뒤에는, 그들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힌 수배 전단지가 옛 시대의 삐라처럼 뿌려진대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주적 단위에서는 모행성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도주했다는 도망자 따위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테니까. 물론 그래서 그들이 갈 곳은 아주 멀리 있는 은하에 위치한 소행성이었다.
그러니 우주선을 타고 저 멀리로 나가다 보면 오리온성좌의 어깨 부근에서 불타는 함선과 조우할 수도, 탄호이저 게이트 근처의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c빔을 목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어두운 우주를 유영하는 그들에게, 아름다운 지구를 처음 벗어나 목격하게 될 그 광경은 꽤나 놀랍고, 새로우며 낯선 광경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우주는 분명 아름다울 것이다.
당일.
공식적인 일정은 끝이었다. 낮 동안은 서킷 점검이 있어서 선수들은 대개 개별 트레이닝 룸에 있으니 재현이 할 일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경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는 선수들도 몸을 사리기 시작한다. 지금은 날이 저물었으니 그마저도 끝이었다.
오스카가 갑자기 호출하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숙소로 돌아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주연과 만났을 것이다. 하필이면 불러내는 것도 한참 늦은 시각인지. 재현은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빈 복도를 가로질렀다. 바쁘다며 자리를 비우기 일상인 오스카가 하필이면 지금 그를 불렀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있던 오스카가 턱짓으로 왼쪽 소파를 가리켰다.
"무슨 일로……."
"내가 내 직원을 부르는 데 이유가 필요해?"
또 영양가 없는 말꼬리 잡기가 이어지려는 듯해서, 간신히 한숨을 참았다. 이런 쪽으로 보면 사람이 참 일관성 있다. 말꼬리를 잡아대는 꼴이. 미약하게나마 가지고 있던 긴장감도 꽁무니를 감추고 도망갔다.
"주의할만한 거랑 보고서도 모두 서면으로 제출했었는데."
"말해줄 게 있어서 부른 거니까 그냥 들어."
재현의 속마음을 알 리가 없는 오스카는 여상하게 그를 부른 이유를 설명했다. 매일같이 자리를 비우는 나라지만 이렇게라도 신경 쓰고 있단 티 정도는 낼 수 있지 않겠어?
"며칠 뒤에 있을 경기는 십일 번 은퇴 경기나 마찬가지라 경기가 좀 험난할 거야. 필요한 부품은 구해뒀으니 내일 낮에 업체에서 받으면 돼. 교체할 선수도 미리 구해뒀지만... 그때가 되면 넌 프로젝트를 시행하는 중이겠군."
그는 당연하다는 듯 며칠 뒤를 전제했지만, 재현은 당장 오늘 밤이면 이곳을 떠날 것이다. 희미한 통쾌함이 일었다. 이 지긋지긋한 짓도 끝이 보였다. 이재현이 간절히 바라던 행복이 손아귀에 잡힐 것도 같다.
"갈리파 근처에 연구소가 하나 있어. 몇 년 전에 폐쇄된 곳이라 인적도 드물고 기반 연구 시설도 있으니 시선 피해서 연구하기에는 충분하겠지. 필요한 게 있거나 보조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구해줄게."
"…됐어. 혼자가 편해."
그러고는 대충 대화를 마무리 짓고 일어났다. 미약한 통쾌함과는 별개로 뒷맛이 영 개운치 못했다. 오스카와 시선을 맞추지 않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시선이 등 뒤로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묘했다. 기묘한 불안감이었다. 큰 계획을 앞두고 있어서 긴장하기 때문일까. 이건 당연한 심리적 현상이라는 걸 안다. 숨기는 게 있고 계획을 세운 사람이 떠는 건 마땅히 그러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 재현의 등 뒤로 오스카의 나지막한 음석이 따랐다.
"나는 네가 마음에 들어."
이재현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두 사람뿐인 공간이 고요했다.
"굳이 코링턴까지 가서 데려온 이유는 네 처지가 흥미로웠기 때문이야. 은혜를 알았으면 해서고."
쓸데없이 고요해서, 잘못 숨을 내쉬었다간 떨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손바닥이 미끈거렸다. 기분 나쁜 축축함이었다. 재현은 옷자락에 문지르는 대신 느릿하게 주먹을 쥐는 걸 택했다. 뒤에서 오스카가 그걸 보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쓸모가 다할 때까진 한눈팔지 않았으면 하는데."
속이 울렁거렸나? 모르겠다.
"그게 과한 바람인가?"
떨지 않고 걸어 나왔나? 그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오스카의 말에 대꾸하지 않은 채 문을 닫았다. 예상한 적 없는 최악의 상황이다. 언제부터? 어디까지? 복도를 걷는 내내 심장이 제멋대로 쿵쿵 뛰었다. 손끝으로 무력함이 들어와 혈관을 타고 심장으로, 심장에서 전신으로 순환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누구라도 재현의 창백한 낯을 봤다가는 이상함을 알아챘을 거다. 재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마침내 문을 열고 배정된 숙소로 돌아와 자신을 기다리던 주연을 마주했다. 긴장이 풀리는 동시에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내 다리가 이렇게 연약하진 않았는데. 우습게도 그런 실없는 생각이 스쳤다. 놀란 주연이 얼른 가까이 다가왔다.
"괜찮아?"
팔을 붙잡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다. 이재현은 알았다. 이건 모두 그의 선택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닌가. 그러니 이것은 그가 짊어져야 하는 것이 맞다. 다시 죄책감이 저릿저릿하게 밀려들어 왔다. 격랑처럼, 두 번 다시 회복되지 않을 깊은 상해를 남기고 가버릴 것처럼.
죄를 뉘우치는 것은, 그리고 사실을 털어놓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자기 잘못을 쉬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어서 부끄러워하기보다는 뻔뻔하게 나가기 일쑤고, 그래서 대개 그들은 회죄하지 않는다.
개소리라는 걸 알지만 나를 믿고 싶다고 했었지. 나를 믿어주겠다고. 기꺼이 용서해주겠다고.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너는 변치 않을까?
"그땐 네가 묻지 않겠다고 했었지. 지금 내가 얘기 해야겠다면, 들어줄래?"
이재현이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부끄러워 말하지 않았던 모든 전말을 털어놓기 시작했을 때 이주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경청하기만 했다. 머릿속으로는 이럴 때가 아니며 당장이라도 경기장을 벗어나야 한다고. 오스카가 손을 쓰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재현은 그러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듣는 주연의 얼굴은 푸른 조명을 받아 서늘하게 빛났다. 반대쪽 얼굴에 드리운 그늘 아래의 것은 읽어낼 수 없었다.
"넌 니가 안드로이드인 줄 아는 인간이어서 여기에 있으면 안 됐고, 난 그런 널 대상으로 하는 실험의 참여자였어. 실험을 총괄하려고 온 거야."
재현은 일어서지도, 자리를 옮기지도 못하고 바닥에 앉은 채로 모두 털어놓았다. 주연이 그걸 이해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널 사랑한다는 건 내 계획에 없었는데. 내뱉어서는 안 된다는 최소한의 자각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은 겨우 삼켜냈지만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이는 아니다.
사실 비가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건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한 번 깨진 유리를 어떻게 붙일 수 있겠는가. 시간을 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한 번 갈라져 상흔이 생기고 나면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다시 이어붙인다고 하더라도 균열은 여전할 것이고 틈을 따라 물은 샐 것이다. 사실, 털어놓으면 조금이라도 후련할 줄 알았다. 입 밖으로 내어도 죄책감은 여전하겠지만 계속 품고 있던 걸 내려놓아서 조금은 시원하리라고. 하지만 오히려 죄악감은 더욱 공고해지고 스스로에 대한 혐오만 견고해지리라고는.
하지만 이 감정에 거짓은 하나도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미안해. 하지만 널 놔둘 수가 없었어. 아무것도 모르는 널…."
손바닥으로 주연의 한쪽 뺨을 감쌌다. 갓 태어난 여린 동물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로 뺨을 쓰다듬었다. 아주 연약한 것을 다루듯. 정처 없이 흔들리는 두 눈이 아팠다. 쓰라렸다.
"……날 미워할 거지?"
예측하지 못했던 사랑이 쓰라렸다. 계획에 없던 것이라 심장에 깊숙이 파고 들었다는 걸 안다. 예상치 못해서 너무나 무방비했기 때문에. 흥미에서 연민으로, 연민이 사랑으로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만 이재현이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미워해야 하는데……. 참 이상하지."
이건 이 사람의 방어기제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모습마저 사랑스러워 보이는 걸 보면, 이건 자신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재현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던 주연이 고개를 흔들었다.
"밉지 않아. 그걸 알았더라도 널 사랑했을 거 같아.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멍청아."
"괜찮아. 네가 똑똑하니까."
"정말 내가 할 말 없게 만드는 구나."
"응."
손을 꽉 잡았다. 서늘한 체온이 전해졌다.
주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입매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자 얼굴에 웃음기가 번졌다. 웃는 주연에게 이재현이 뭐라고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장난 서린 핀잔을 주는 것도 못 할 짓이고 웃는 얼굴을 보니 그럴 생각조차 사라진 지라.
문득 재현은 생각했다. 제가 멋대로 자유의지를 제거해버리고 빼돌렸던 안드로이드를 선배 연구원에게 주었던 순간 그의 표정을. 얼굴에 스쳐 지나간 무수히 많은 감정과 그 당시 재현이 유일하게 알아챌 수 있었던 그의 절망을. 이재현은 이 순간 그의 모든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증오와 자신을 고발해버린 그 심정까지도.
재현은 총을 챙겨 들었다. 난데없이 내밀어진 총자루를 보고 주연이 어리벙벙한 얼굴을 했다. 자격 없는 총기 소지는 규제한다지만 구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런 식으로 사용하게 될 걸 예상했지만 그런 미래가 오지 않았으면 했는데.
짐은 필요 없었다. 복도를 지나는 사람도 없었으므로 그들은 기척을 낮춰 경기장을 빠져나가면 되었다. 숙소에서 경기장 필드를 가로질러 가면 금방이겠지만, 엄폐물도 없는 곳에서 그랬다간 들키기 십상이었다. 늦은 시간에 출구를 향해가는 두 사람. 게다가 그 중 하나는 며칠 뒤에 있을 경기에 출전해야 할 선수라니? 수시로 순찰을 도는 보안 요원과 마주치기라도 했다간 큰일 나는 것이다. 비록 시간이 배로 걸린다 해도 아쉬운 대로 내부를 빙 둘러가는 수밖에. 지하로 내려가면 화물 수송을 목적으로 두는 걸로 추측되는 공간이 있었다. 평소에도 인적이 드문 곳이라 두 사람은 지하로 향했다. 벽면엔 이리저리 배관 파이프가 얽혀 있었고 머리 위 조명은 이따금 깜박거리며 흐려졌다.
한참 걷고 나서 계단을 올랐다. 구식 철문의 문고리를 당기자 덜컹거리기만 할 뿐, 문은 잠겨 있었다. 당황한 얼굴로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했다. 주연의 손이 허리춤의 총으로 갔지만, 재현은 다급히 그 손을 막았다.
"이거 소음기 없는 거야. 여기서 쏘면 들켜."
그러자 주연이 반절 빼냈던 총을 다시 집어넣었다. 대여섯 걸음 뒤로 물러났다가, 재현이 이유를 묻기도 전에 문으로 돌진했다. 재현은 어리벙벙한 눈으로 쳐다봤다. 어깨를 틀어 체중을 싣는 게 문짝을 부숴버릴 기세였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뒤로 물러서는데 벌써 문이 우그러진 게 두어 번만 더 하면 될 것 같았다. 재현은 입을 떡 벌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뭐랄까, 어…….
"너 좀 대단하다."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주연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다시 한 번 체중을 실어 몸을 돌진하는 데 힘을 받은 곳이 전보다 깊이 움푹 파였다. 한 번 더. 그리고 다시 뒤로 물러나서 기다리자 문이 반대쪽으로 육중한 소리를 내며 기울어졌다. 그리고,
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요란한 사이렌이 울렸다. 기름칠을 하지 않아 삐걱거리는 로봇처럼 고개를 돌린 재현의 시선이 당황한 주연과 마주쳤다. 이거 좀, 큰일 난 거 같지. 야, 조금이라고?
[알립니다. 위기 등급을 3단계로 격상하고 시설을 봉쇄합니다. 모든 직원들과 관계자들은 G-2 구역으로 집결합니다. 알립니다. 위기 등급을 3단계로 격상하고 시설을 봉쇄합니다.]
뒤에서는 정렬된 각진 발소리가 일정한 보폭을 유지한 채 가까워졌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보안 요원이다. 오스카는 전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가 바득 갈렸다. 개 같은 새끼. 전부 알고서 찔러본 게 분명했다. 궁지에 몰리게 만들어놓고는 아등바등하는 꼴을 보고 싶기라도 했나 보지. 비틀린 속내를 짐작하려니 속이 배배 꼬였다. 당연히 제 손아귀에 잡힐 거라는 오만함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한 번도 원하는 대로 해보지 못한 적이 없을, 거만하기 그지없는 새끼다. 이재현이 치를 떨었던 그 구역질 나는 태도로 그들이 끌려오는 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배알이 꼴려도 아주 단단히 꼴렸다. 재현은 그 기대를 기꺼이 부숴주고 싶었다.
"뛰어!"
자는 사람 다 깨울 만큼 시끄러운 사이렌을 배경음악 삼고 뛰었다. 등 뒤에서 그들을 쫓는 발소리가 요란했다. 유리문을 부수듯 열고 지나가자 사이렌 소리와 안내 방송을 듣고 바깥으로 나온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몰려 있었다. 쫓기는 둘을 보고 당황스러운 얼굴을 한 사람들 사이를 지나쳤다. 재현은 아이디 카드를 꺼내 들어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먹통이었다. 대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코너에 자리를 차지한 구식 소화기를 들고 판을 내리쳤다. 위급 상황을 대비한 손잡이를 당겨 올리자 문이 열렸다. 당황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을 뒤로 한 채 둘은 그렇게 판데모니엄을 완전히 벗어났다.
아주 늦은 시각은 아니라 드문드문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쫓기는 모습을 보고도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건물 간판의 불빛이 얼굴 위로 드리우며 깜박거렸다. 인공 강우가 내렸던 도로 위의 물웅덩이를 찰박대며 지났다. 하필이면 두 블록 떨어진 곳에 호버를 예약해둬서. 속으로 욕을 잔뜩 했다. 시간대는 옮겼지만 위치는 미처 옮기지 못하고 뛰쳐나온 탓이다. 그들을 쫓는 동시에 총이 발포되는 소리도 간간히 들렸지만 아직까진 무탈했다. 맞지 않아서 달리는 데에도 지장 없었다. 코너를 돌자마자 호버 크래프트가 보였다. 아, 진짜 죽겠다. 헐떡거리느라 안도의 한숨이 나올 새도 없다. 재현은 재빨리 타고, 주연이 무사히 타는 모습을 보자마자 스크린에 위치를 설정했다. 문이 닫혔는데도 호버로 쉴 틈 없이 총질하는 기세가 살벌했다.
공중으로 부상하는 호버가 아래의 조그만 인영들을 남겨두었다. 도시의 상공을 가로지르는 철로를 아슬아슬하게 피해가며 도시 위로 날아올랐다. 내려다보는 시야가 즐비한 마천루 위로 올라가서야 재현은 한숨 돌렸다.
빛과 어둠의 경계가 모호한 도시였다. 잠들지 않고, 밤이 찾아오지도 않는 곳.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광경이지만 그립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첼라야가 멀어졌다.
그들은 지구 섹터의 우주 정거장 헤르메스Hermes로 향하기 위해 셔틀 정거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황량하고 드넓은 붉은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셔틀 정거장이었다. 셔틀을 타고 가면 우주 정거장까지는 금방이었다. 헤르메스에서 우주선을 타고 아테네 행성으로 가는 계획이었다. 비록 일정이 조금 꼬이긴 했으나 큰 틀에는 지장이 없었다. …아마도 지장이 없을 거다.
셔틀 정거장 주변은 황량하고 쓸쓸했다. 드넓고 지평선 너머까지 끝이라곤 없는 듯이 펼쳐진 사막 위에 오직 셔틀 정거장 하나만 있었다. 둘은 호버를 돌려보내고 셔틀에 탑승했다. 내리기 직전, 지구의 궤도를 따라 공전하는 달을 응시하던 재현이 말했다.
우리 둘 다 우주로 나가보는 게 처음이지. 너는 경기장 바깥으로 나가는 게 처음이니까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려주는 걸로 하자.
세 살짜리 애들도 아는 쉬운 거라도?
열 번이라도 설명해주지 못할 게 뭐야.
그들은 셔틀에서 내린 뒤 선착장 바깥으로 나갔다. 그 크기가 달의 절반인 우주 정거장, 헤르메스였다. 목적지인 행성으로 향하는 함선이 출발하는 선착장의 위치를 찾으려고 한참 스크린 위로 얼굴을 기울이던 재현이 고개를 들었다. 찾았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어디로 가면 되는지 안다고. 판데모니엄의 것보다 정렬되고 각 잡힌, 실제 군인으로 구성된 보안 요원들이 열을 맞춰 어딘가를 향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것은 장전된 총이었다. 두 사람의 품에 숨겨진 오래된 기종의 권총과는 비교도 안 되는 화력을 구사하는 것이다. 손끝이 섬짓해졌다. 또다시 좆됐음을 감지하는 머릿속 비상등이 깜박깜박.
"항로 변경하면 되니까 아무거나 타자."
"티켓은 어떡해?"
"일단 눈에 보이는 거 아무거나 탈취할 생각부터 해."
"빼도 박도 못하게 범죄자 되려고? 무서운 사람이네."
"난 너 데리고 도망친 시점에서 이미 범죄자야. 죄목 하나 늘어나는 게 무서워서 전전긍긍했으면, 애초에 그 교도소에 수감되지도 않았어."
선착장 위치를 찾던 동안 보안 요원들이 지나갔으니 다시 이리로 오기 전에 자리를 떠야 했다. 그들이 있는 곳과 우주선에 탑승하는 선착장이 꽤 멀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함께 걸음을 재촉하던 주연이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섰다. 우주 정거장의 너른 브릿지에서는 투명한 창으로 바깥의 풍경이 모두 보였던 탓이다. 푸른색보다는 우울한 회색에 가까운 지구, 그 옆의 달. 멀리서 보이는 별과 행성들. 재현으로서도 실제로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지만, 이 모든 것들을 처음 경험하는 주연이 만족할 만큼 볼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싶었다. 상황만 이렇지 않았더라면. 그만 보고 가야 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아 풍경만 가만 바라보고 있는데 짧은 구경을 끝낸 주연이 다 봤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더 안 봐도 돼? 이제 언제든지 볼 수 있는 풍경이잖아. 그 말엔 어쩔 수 없이 재현도 웃음이 났다. 죄책감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닌, 그들에게 펼쳐질 미래를 그리는 미소가.
두 사람은 달리고 있었다.
뒤로는 완전 무장한 보안 요원들이 그들을 쫓고 있었다. 우주 정거장 내에 폐쇄를 알리는 안내방송은 송출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두 사람은 아까 전에 비하면 확연히 긴장을 풀고 있었다. 즐비한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나름대로 유유히 녹아들었다. 그러나 여유로운 관광객을 가장하며 우주선에 탑승하기 위한 줄에 서 있던 그들은 지나가던 보안 요원의 눈썰미를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재현은 도무지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아테네로 향하는 티켓을 샀던 구매 기록이 털렸는지도 몰랐다.
그들을 향해 조준되는 총알들을 피하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여력도 없었지만, 품속에 숨겨진 총에는 손 한 번 대지 못했다. 멈춰서 장전할 시간에 잡힐 것이 뻔했다. 그러나 주연으로서는 해당이 없는 이야기라, 아예 몸을 돌려 뒤로 달리면서도 총을 조준하는 데 능숙했다. 능수능란한 솜씨는 수많은 경기로 그가 직접 체득한 것이었고 이주연은 천부적인 자질이 있었다.
그들은 점점 더 인적이 드문 곳으로 몰이당하는 중이었다. 선착장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중이었다. 그건 보안 요원들이 살상 무기를 다루는 데에 아무런 제재를 받지 못하게 될 거라는 소리와도 일맥상통했다. 선착장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엔 우주선을 탈취해야 하는데. 그런 초조한 생각에 휩싸이는 시야로 건조중인 우주선의 선체가 투명한 창 바깥으로 보였다. 그들은 입구로 뛰어들었다. 크레인을 비롯한 여러 기계들이 선체를 수리하고 있었고 높은 곳에서 공사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가교와 비계(飛階) 등이 우주선에 연결되었다. 함선 표면에 커다랗게 새겨진 우주선의 이름은 라비린토스Labyrinthos였다.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다행인 일로 우주선이 작았다. 기껏해야 2만 톤급 함선이었다. 조종하는데 항해사와 선원이 많이 필요하진 않을 거다.
탕!
가교를 가로질러 뛰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탄환이 다리를 스쳤다. 좋게 말하면 스친 거였고 아슬아슬하게 관통을 피했다. 허벅지가 지글지글 타들어 가는 고통이 엄습했다. 그 순간 이재현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생각한 것은 하나였다. 아, 이주연도 그때 이 기분이었겠구나. 겨우 총 맞는 걸 피해놓고 한다는 생각이 그런 거였다.
제게 손을 뻗는 주연의 얼굴이 슬로우모션처럼 흘렀다. 중심을 잃은 몸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철제 바닥에 부딪힌 몸 구석구석에 통증이 번졌다. 운동을 했어야 했나....... 빗발치듯 쏟아지던 탄환이 멈춘 틈을 타 몸을 일으켰다. 어느 틈에 주연이 보안 요원들과 육탄전을 벌이고 있었다. 통각을 둔하게 느끼는 주연은 개머리판으로 뒤통수를 맞아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으며 고개나 기울였다. 그리고는 보안 요원을 제압하면서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이미 다친 상태로는 미적거려봐야 짐만 될 뿐이라는 걸 아는 재현은 난간을 붙잡고 전진했다. 미리 가서, 우주선 조종칸 붙잡고 이륙 준비라도 하고 있는 쪽이 나았다. 제대로 관통한 것도 아니고 동맥이 파열된 것도 아니니 나중에 응급처치를 하면 된다. 그들이 자유의 몸이 되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 평생 다리 하나쯤 절뚝이며 살아도 자유와 맞바꾼다면 상관없을 테다.
그 순간 웃음이 났다. 순진해서였을까, 창의력이 부족해서였을까. 이재현은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스카를 적으로 돌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쫓기면서 도망을 치다니. 사랑하는 사람과 자유를 찾기 위해서 떠나는 이 모습이라니. 불과 몇 달 전의 그와는 연결 짓지 못할 상황이었다. 웃을 때가 아닌데 웃음이 났다. 대재앙 이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구닥다리 로맨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에.
가시지 않는 고통이 계속해서 다리의 통각을 일깨우는데도 입가로 웃음이 흘렀다. 차가운 우주의 공기가 몸을 감싼다. 재현은 열심히 전진했다. 우주선을 출발시키면, 가장 먼저 상처 처치부터 해야겠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참으면 된다. 설핏 고개를 돌리자 주연의 쪽도 마무리를 지어가는 듯했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라비린토스 호의 입구로 들어가려는 재현을 누가 잡아끌었다. 억센 손길이었다. 어깨 죽지를 잡아채는 힘에 끌려가기 무섭게 머리채를 잡고 벽에 처박는다. 고통, 그리고 현기증.
"아악!"
순간적으로 앞이 캄캄했다가,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쓰자 시야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너무 세게 부딪혀 속이 다 메스껍다. 토하고 싶다. 선체가 미끈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서늘해졌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벽에 몰아붙이고 시원하게 턱을 조준했다. 주먹 쥔 팔을 뒤로 길게 뺐다가 힘을 실어 꽂으면 된다. 물 만난 물고기마냥 날뛰는 이주연만큼은 아니겠지만, 단타로 치는 데엔 이재현도 나름대로 자신 있었다. 물론 아구창을 날리기 무섭게 고통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다행히 재현의 근처에 있는 것은 기절한 이 사람이 전부였다.
"야, 서둘러!"
주연이 달려오고 있었다. 재현은 계단을 오르기만 하면 된다. 다시 몸을 튼 재현은 몇 개 오르지도 못했다.
발포음이 울렸다. 반사적인 속도로 고개를 돌렸을 때 본 것은 주연이 몸을 틀며 손을 들어 심장으로 향하는 총탄을 막는 것이었다. 손목을 너덜너덜하게 하며 지나간 총탄이 어깨 위를 스쳤다.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행이다.
그리고 연속적으로 발포된 것은, 재현을 향한 것이었다. 이재현은 그걸 피할 수가 없었고.
"이재현!"
천천히 낙하하는 몸이 굴러 떨어지기 직전, 간신히 붙잡았다. 재현은 손을 내려 피가 철철 흐르는 옆구리를 눌렀다. 아파. 너무 아파. 정신을 놔버리고 싶었다. 저절로 턱이 덜덜 떨렸다. 주연은 부들부들 경련하는 몸을 안고 함선에 올랐다. 당장 메디베이로 뛰쳐나가려는 주연을 붙잡아 함선의 출입구부터 닫게 시켰다.
"응급 키트 찾아올게. 기다려."
"그러던지. 지혈 키트가 있으려나. 찾아야 될 텐데. 근데 누가 처치해? 내가?"
"이 와중에도 농담이 나와?"
그런 다음에야 메디베이를 갔다 돌아온 주연의 품에는 잘 찾은 모양인지 다행히도 응급 처치 키트가 있었다. 그 속에서 지혈 키트를 찾아냈다. 주사기 속에 들어있는 꾸덕한 노란 젤리 같은 걸 상처 부위에 주입했다. 재현이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에 젤이 응고됐다. 일순간 희망이라고 불러도 좋을 감정이 주연의 얼굴에 맴돌았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와중에 등잔 위 촛불을 두 손으로 가리는 모습이었다. 고작 손으로는 바람을 막을 수 없다는 걸 두 사람 다 알았다.
"조종실로 가자."
뒤에서 재현이 일러주었다. 원체 작은 우주선이다 보니 임펄스 엔진을 가동시키고 이것저것 만지자 어렵지 않게 시동이 걸렸다. 아주 먼 거리를 오갈 수 있게 만들어진 함선은 아닐 거라 짐작했지만 다행히 연료가 가득 차 있었다. 출구를 빠져 나가자 전방 스크린으로 드넓은 우주가 보였다. 우주 정거장이 멀어졌다.
"이제 됐어?"
그렇게 묻는 주연은 조금 얼떨떨해 보였다. 재현은 창백한 얼굴로 웃어주며 아마 그럴 걸 했다.
"근데 나, 추워."
"어떻게 하면 돼?"
잠시 사라진 주연이 어딘가에서 담요를 잔뜩 들고 나타났다. 양 팔에 한가득 담요를 안고 그 위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한쪽 손목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터라 꼴이 우스웠다. 제대로 웃지 못하는 재현이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너 왼쪽 손목이 달랑거려. 내가 고쳐줬던 건데…."
"안 아파."
"내가 두 번이나 고쳐주겠다. 그치. 어뜩하냐, 이제 이주연 손 내거네. 두 번이나 고치면 내거나 마찬가지지……."
"눈 감지 마."
"원래 사람은 이 정도 피 흘리면 졸리게 돼 있어."
"……."
"춥고 아프고, 졸리고……."
"……."
"나 무릎베개 해줘."
그렇게 말하는 재현은 꼭 어린애 같았다. 투정을 부리는 어린 애. 어리광부리지 말라는 주연의 말에 재현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그래보겠냐고 했다. 꼭 마지막이라는 것처럼. 어루만지는 창백한 뺨은 자신의 피부만큼이나 서늘했다. 이주연이 좋아하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너를 생각한다. 너의 온기를.
"주연아, 나 추워."
"자면 안 된다니까."
"내가 먼저 잘까봐 무서운 거지, 넌 혼자 자는 걸 싫어하니까."
"......."
"내 옆에 꼭 붙어있으면 되지. 꼭 붙어서 자면 되는데."
"그래."
"이제 됐지. 무릎베개해 줘. 얼른."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언제든지 해 줄게."
이주연은 조심스럽게 재현의 머리를 들어 올려 무릎 위에 뉘였다. 재현은 눈을 감고 있었고, 입술은 핏기가 사라져 보랏빛에 가까웠다. 주연은 재현이 숨을 쉬는지 귀를 가까이 대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면? 덜컥 겁이 났다.
"이재현. 재현아. 형."
어깨를 잡아 흔들자 재현이 간신히, 느리게 눈꺼풀을 들었다.
"……나 졸려. 조금만 잘게."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너였으면 좋겠다. 이주연이 흐리게, 아주 흐리게 보였다. 깨어날 땐 아프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솟았다. 재현은 죽음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잘 자, 이재현."
태양을 갈망하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너무 높게 날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네가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말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