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struck
2024
5th Juyeon Hyunjae Webzine

Watch stars, we can count’em from the rooftop. I just want you baby I don't need nobody else here.
Gotta show you off, but later keep you to myself.

 

 

 

 

 

아침이 밝았다. 알람을 듣고 먼저 일어나 씻은 주연이 재현을 깨웠다. 형사님, 이재현 형사님, 이제 일어나셔야 돼요. 재차 부르는 목소리에 겨우 눈을 뜬 재현은 피곤해서 돌아가시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졸음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끙끙 앓더니 갑자기 두 팔을 쭉 뻗은 재현이 눈앞의 주연을 끌어안았다. 예고 없이 재현의 품에 갇힌 주연은 그대로 정지한 채 눈동자만 데록데록 굴렸다. 긴팔 옷과 긴바지를 입어서 망정이지. 만약 맨살끼리 닿기라도 했으면 벌써 기겁하고도 남았을 거다. 재현이 다시 잠들려는 틈에 슬그머니 탈출을 시도했으나 보기 좋게 실패했다. 분명 잠결일 텐데도 힘이 꽤 셌다. 결국 재현의 품에서 몰래 빠져나가는 선택지는 포기한 주연이 체념의 목소리를 냈다.

 

 

이 형사님.”

으음....... .”

팔 좀 풀어주세요. 너무 가까워서 곤란해요.... 그리고 더 자면 진짜 지각이에요.”

 

 

잠에 취해서 반말까지 놓던 재현이 지각두 글자에 눈을 번쩍 떴다. 상황파악까지 걸린 시간은 5초였다. 바로 코앞에 놓여 있는 주연의 이마와 주연을 꽉 껴안고 있는 제 두 팔만 봐도 대충 뭔 짓을 했는지 짐작됐다. 가까이에 사람만 있다 하면 껴안는 잠버릇이 있기 때문이었다.

 

 

, 미쳤다. 어떡해. 미안해요. 내 잠버릇이 손에 잡히는 사람 껴안는 거여서.”

괜찮아요. 그렇게까지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괜찮다는 대답에도 겸연쩍은지 마른세수만 연거푸 하는 재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주연은 설핏 미소 짓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 어릴 때 말고 누가 이렇게 오랫동안 꽉 껴안은 거 처음이에요.”

진짜요? 아니, 그러면 연애는 어떻게 했어요?”

고백 받고 싫지 않으면 사귀는 편이어서요.”

근데 사귀는 사이에 스킨십 안 하는 게 가능한가.”

저는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손도 잘 안 잡느냐고 화내더라고요. 다 비슷한 이유로 헤어졌어요. 스킨십 때문에.”

아하. 그래서? 오랜만에 사람 안아본 느낌이 어때요.”

걱정한 것보다 훨씬 편안하고 좋네요. 괜히 겁냈나 봐요.”

다행이다. 사실 그런 대답 들으려고 물어봤어요. 허락도 안 받고 껴안은 게 좀 걸려서.”

 

 

제법 뻔뻔하게 받아친 재현이 눈을 찡긋했다.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해놓고 뒤돌아서더니 잔뜩 쑥스러워하는 것도 어쩐지 재현답다. 으쌰, 구령과 함께 방바닥을 짚고 일어선 주연은 이불 개느라 분주한 재현의 뒤통수에 대고 흘리듯 말했다.

 

 

형사님 몸에서 제 집 냄새 나서 더 좋았어요.”

 

 

재현은 대답 대신 머릴 긁적였다. 그렇잖아도 새빨개진 뒷목이 한층 더 달아올랐다. 굳이 돌려세우지 않아도 재현의 얼굴색을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어쩐지 핑크빛 기류가 형성된 분위기 속에서 허겁지겁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이 드디어 집을 나섰다. 다행히 오늘따라 신호등 타이밍이 좋았다. 잠버릇 해프닝 때문에 하마터면 지각할 뻔한 걸 간신히 면했다. 강당으로 들어가자 평소엔 구경도 못한 얼굴들이 득시글했다. 강력반 전체 인원이 모여서인지 실내는 꽤 소란스러웠다. 강당에 들어서자마자 찬희에게 옆구릴 꼬집힌 재현이 브리핑 자료를 건네받았다.

 

 

내가 적어도 이십 분은 일찍 오라고 문자 보냈을 텐데.”

문자? 못 봤... ! 내 옆구리! 그만 꼬집어!”

이거 이따가 틀리지 말고 잘 읽어요. 그나저나 두 사람 완전 아슬아슬하게 세이프했네요?”

. 내가 꾸물대서 지각할 뻔했어.”

안 봐도 훤하죠. . 성실하고 착한 주연씨가 늦잠 따위를 잤을 리는 없고.”

아침부터 팩폭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살살해라.”

엄살은. 아무튼 앉아요. 이제 시작할 거니까.”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나서 강력반 전원이 모인 것을 확인한 찬희가 이윽고 단상으로 올라가 마이크 앞에 섰다. 창민이 노트북으로 타자를 몇 번 두드리자 사건 자료와 범인에 관한 정보가 스크린에 일목요연하게 떴다.

 

 

최종 프로파일링 발표하겠습니다. 범인은 2006년 범행 당시 23세부터 28세 사이로 추정, 현재는 38세에서 43세입니다. 신장은 최소 165에서 시작하고 175를 넘지 않습니다. 청소년기에 화재 사고를 겪었고 성대가 손상돼서 목소리에 쇳소리가 심합니다. 고아원이 화재로 소실된 이후부터 돌봐주는 어른 없이 성장했기 때문에 제때 치료를 받지 못했을 것이고, 그날 얻은 화상 흉터로 인해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게 되면서 자아 형성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평소에는 굉장히 조용하지만 때때로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다혈질의 성격을 가진 자입니다. 흉측한 외모 탓에 성인이 되고 나서도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겉돌다가 스트레스 해소의 일환으로 살인을 시작한 케이스입니다.”

범인 특징 말고 범행에서 보이는 고유한 특징은 없습니까?”

 

 

갑자기 손을 번쩍 들어 올린 박 형사가 질문했다. 열의에 찬 목소리였다.

 

 

있습니다. 이 범인은 아주 뚜렷한 성적 자신감 결여를 보입니다. 사진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시피 여성에게 성폭행 없이 폭력적인 구타만 가하고 교살한 이후, 흰 원피스를 입히거나 시신의 얼굴에 화장을 하는 행위에서 변태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타입이므로 발기부전을 앓고 있을 것입니다. 고정 수입이 없어서 일터가 있는 지역에 따라 싸구려 모텔과 고시원을 전전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이미정 양이 신림 고시원 근처에서 사라졌던 미산 터널 살인사건과 정확히 맞물려 있는 배경적 특징이니 특히 신경 써서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찬희가 설명을 마치며 고갯짓하자 곧바로 배턴 터치한 창민이 검색 결과를 화면에 띄웠다.

 

 

전국적으로 확대해서 검색했더니 특징이 겹치는 케이스가 몇 건 더 나왔습니다. 각 팀마다 자료를 전송할 테니 확인 부탁드릴게요!”

 

 

재현은 팀원의 브리핑을 가만히 듣다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특히 각 지역의 서와 협력하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놓친 미제사건 중 폭행과 교살을 당했으며 어떤 디자인이든지 하얀 원피스가 입혀진 채로 입술에는 빨간 립스틱이, 손톱에는 빨간 매니큐어가 발라져 있었던 케이스를 수집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해산해서 빨리 움직여주세요.”

 

 

재현의 말에 다들 우루루 일어나 강당을 빠져나갔다. 바라고 바라던 미제사건 해결을 코앞에 두고 마침내 대대적인 지원과 수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미리 김칫국을 마시고 싶진 않지만 처음에 비하면 확실히 희망이 보였다. 자료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재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것보다 일단 찬희가 읽으라는 대로 잘 읽어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다간 꼬집힌 옆구리를 또 꼬집혔을 게 분명했다.

 

 

넌 이걸 어떻게 발음 한 번 안 꼬이고 술술 말하냐.”

 

 

재현은 찬희의 프로파일링 자료를 들춰보며 혀를 내둘렀다. 최찬희는 몸 쓰는 데에 젬병인 이유가 있어. 뇌에다 능력치를 몰빵해서 그런 거라니까. 칭찬인지 아닌지 애매한 재현의 말을 듣던 찬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재현 형사님. 또 옆구리 꼬집히고 싶죠.”

아니.”

그럼 조용히 하고 내려가서 일하세요.”

. 알겠습니다.”

 

 

찬희에게 구박 받으며 강당에서 나온 재현이 주연의 옆에 나란히 섰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간간이 어깨가 스쳤다.

 

 

, 맞다. 이 형사님.”

. 왜요. 주연씨.”

잘 주무셨어요?”

그걸 이제 묻는 거예요?”

. 지금 생각나서요.”

주연씨가 준 따뜻한 우유 덕분에 숙면했어요. 주연씨는요.”

저도 덕분에요.”

 

 

덕분에라는 표현으로 서로를 격려하는 두 사람의 가운데로 선우가 왁! 하고 달려들었다.

 

 

어우. 뭐야? 둘이 무슨 하트시그널 찍어요?”

 

 

선우는 주연과 재현 사이에 서서 번갈아보며 핀잔을 주다가 어깰 으쓱했다. 장난으로 던진 하트시그널 찍느냐는 질문에 정적이 흘렀다. 아무것도 없는 창밖 응시하면서 딴청 부리는 이재현이나 묵묵히 계단만 내려다보며 걷는 이주연이나 둘 다 반응이 영 이상했다.

 

 

암튼 나 먼저 갑니다. 둘은 하트시그널 마저 찍으세요.”

 

 

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감지하고 뻘쭘해진 선우가 덧붙이더니 눈치껏 자릴 피했다.

 

 

하트시그널은 무슨. 쟤는 저런 프로그램 좀 그만 봐야 된다니까. 저러니까 맨날 차이면서도 연애에 환상 가지지.”

 

 

괜히 꿍얼댄 재현이 주연의 표정을 살폈다. 저야 물론 주연을 그런 감정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주연의 진심은 어떨지 모르는 일이다. 주연은 늘 그렇듯 별 말 없이 은은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선우가 던진 말 때문에 더 의식된다. , 망했다. 속으로 한탄한 재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전개는 호감과 별개로써 썩 반갑지 않았다. 수사에만 온 정신을 쏟아도 모자랄 판에 같이 일하는 (이번 수사만 해당이지만) 사람한테 마음을 쓰고 있다니.

 

형님은 일이랑 연애하든지, 아니면 같은 경찰이랑 연애를 하든지 그래야 된다니까요. 맨날 서에 처박혀서 사건만 들여다보고 애인 서운하게 만들어서 남들이 하는 평범한 연애는 절대 못할 걸?

 

예전에 선우가 까불거리며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러게 말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평범한 연애 절대 못할 팔자 맞는 거 같네. . 혀를 찬 재현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내려와서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선우가 씩 웃었다. 이재현 머릿속 복잡하게 만든 장본인이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속 좋다.

 

 

뭘 웃냐.”

왜 시비야? 나 뭐 잘못했어요?”

아니. 걍 얄미워서.”

황당하네. 암튼 박 형사님이 지역 서마다 보고된 케이스 확인하고 모아서 사무실로 보내준댔으니까 그거 기다리면서 추가 제보 받으면 될 듯요.”

그래. 유전자 감식 결과는?”

별 말 없는 거 보니까 이번에도 텄나 봐요.”

하긴. 워낙 오래 지났으니까....”

그래도 우리한테는 새 증거물이 있다! 창민이 형이 물놀이 영상 고화질로 돌리고 씨씨티비 화면이랑 대조 중이랬으니까 금방 찾아낼 거예요.”

오케이.”

근데 주연씨는 이제 더 도울 일 없지 않나? 집에 보내도 되는 거 아니에요?”

 

 

선우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주연에게로 쏠렸다. 수사에 줄 수 있는 도움은 이미 초반에 다 줬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선우는 본의 아니게 일침 날려놓고 아차 싶었는지 슬며시 눈치를 봤다.

 

 

, ... 나 방금 안 해도 될 말 굳이 한 거 맞죠.”

알긴 아냐? 하여튼 저 입방정. 이 형사님이 돌려보내는 게 아니고서야 주연씨도 끝까지 함께할 자격 있는데 왜 네가 나서서 집에 보내라 마라 오지랖이니. 선우야. 주연씨 아니었으면 이만큼 수사 진전하지도 못했을 텐데.”

 

 

때마침 사무실로 돌아온 찬희가 선우의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선우를 꾸짖었다.

 

 

저 괜찮으니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솔직히 무례했지.”

 

 

주연이 만류했지만 찬희의 잔소리 부스터를 멈출 수는 없었다. 찬희는 선우를 있는 대로 쪼아대더니 점심 사줄 테니까 나오라는 말과 함께 먼저 사무실을 떴다.

 

 

어휴. 잔소리쟁이. 진짜 쫑알쫑알 시끄러워서 못살겠다니까.”

! 김선우! 안 나와?”

예예. 갑니다~”

 

 

투덜거리던 선우가 밖에서 들려오는 독촉에 후다닥 뛰어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자 마치 폭풍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듯한 고요가 찾아왔다.

 

 

미안해요. 정신없죠. 쟤네 원래 맨날 저래요.”

아니에요. 활기차서 좋은데요.”

그리고 선우가 아까 했던 말이요. 주연씨가 원한다면 여기까지만 해도 돼요.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충분히 잘 도와줬으니까 굳이 피곤하고 힘들게 자리 안 지켜도 괜찮아요.”

 

 

나긋나긋 말하는 재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주연은 무표정으로 잠시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마지막을 보고 싶어요.”

마지막이요?”

이 형사님이 범인 검거하는 모습이요.”

 

 

되묻는 재현에게 웃으며 대답한 주연이 책상 위에 팩스로 들어온 자료를 집어 들었다.

 

 

최대한 많이 도와드릴게요. 일단 이것부터 확인하면 되나요?”

그런 거 안 해도.......”

?”

아니, 아니에요. 같이 합시다.”

 

 

주연씨는 그런 거 안 해도 될 만큼 넘치도록 많이 도와줬어요. 하려던 말을 삼킨 재현이 주연의 손에 들려 있는 서류를 반 넘게 뺏어 가져왔다. 이 정도로 도와줄 이유는 없지 않느냐고. 왜 이렇게까지 발 벗고 나서서 돕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재현은 말을 아꼈다. 주연이 호의를 베푸는 이유가 저와 아예 같진 않더라도 하다못해 비슷한 마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

 

 

 

 

 

각 지역의 서와 협력한 지 이틀이 지났다. 그동안 미산 터널 살인사건 범인의 짓으로 보이는 사건이 무려 열두 건이나 추가로 발견됐다. 미제사건 전담수사팀은 재현과 주연, 선우와 영재로 조를 나누어 추가 목격자를 만나는 작업에 착수했다. 케이스가 늘어난 만큼 만나봐야 할 인원수가 많았다. 미산 터널 살인사건을 제외하면 대부분 경상도 지역 곳곳에서 벌어진 범행인 탓에 제보자들의 대부분이 경상도 주민이었다. 경상도를 집중으로 맡은 선우와 영재는 현지 경찰 인력에 합류하기 위해 아침 일찍 차를 몰고 내려갔고, 재현과 주연은 수도권과 중부 지역에서 거주 중인 제보자 면담을 맡았다. 오늘 하루만 벌써 열네 번째 면담을 마치고 나온 재현이 뻐근한 허리를 짚는데 때마침 선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 선우야. 뭐 좀 나왔냐.”

진술을 받고 있긴 한데요. 프로파일링 내용이랑 다 겹쳐서 새로운 정보는 없어요. 아까부터 존나 뺑이치는 중이에요.

우리도 마찬가지다. 좀만 더 고생해. 쓸 만한 정보 들어오면 나랑 큐한테 보고하고.”

. 알겠슴다.

 

 

통화를 끝낸 재현이 골치 아픈 표정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시간은 어느덧 밤 10시를 지나가는데 진척이 없다. 대부분 프로파일링으로 밝혀낸 제보들만 들어오고 있었다.

 

 

이 형사님. 괜찮으세요?”

괜찮다고 하고 싶은데 솔직히 안 괜찮네요. 또 막다른 골목인가 싶어서 좀 답답해졌어요.”

형사님, 이건 제가 제보자들이 당시에 가지고 있었다던 소지품 만져보다가 든 생각인데요. 전자기기 중에서도 특히 핸드폰이 다 최소 2년에서 3년은 더 지난 예전 모델들뿐이더라고요. 이건 연쇄살인사건이니까 올해는 아직이더라도 최소한 2020년 여름까진 기억이 읽혀지는 제보자가 한 명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전부 다 2년이나 3년 전쯤에서 끊겨요. 꼭 누가 가위로 싹둑 자른 것처럼....”

 

 

주연의 말을 듣던 재현은 이내 뭔가 깨달은 듯 아, 외마디를 뱉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받은 제보를 종합했을 때, 2018년 이후의 내용이 전혀 없었다. 추가로 확인된 사건들의 범행주기는 2006년부터 2017년까지 비슷한 1년 간격이었으나 어째선지 2018년부터 2021년까지는 아무리 보고서를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만약 범인이 아직도 활개치고 다니는 중이라면 주연이 말한 대로 2018년부터 현재까지도 해마다 보고된 사건이 있어야만 한다. 주기적으로 연쇄살인을 저지른 범인이 자의로 범행을 멈출 리 만무했다. 드디어 어떤 가설에 도달한 재현이 창민의 번호를 눌렀다.

 

 

전화 받았습니다. 듣고 있으니까 말씀하세요.

. 창민아. 2018년부터 수감 중인 죄수 중에 프로파일링과 부합하는 용의자가 있는지 확인 좀 부탁해.”

아직 복역 기간 남은 죄수랑 올해 최근까지 풀려난 출소자들도 포함해서 리스트 만들고 연락드릴게요! 끊어요!

, 고맙... 그래.”

 

 

재현이 고맙다고 다 말하기도 전에 발랄하게 대답한 창민이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머쓱한 표정으로 쯥, 입맛 다시는 재현을 보던 주연이 시원한 에너지 드링크를 건넸다. 창민과 통화하느라 집중했을 때 편의점 들어가서 사온 모양이었다. 귀엽게 빨대까지 꽂아둔 에너지 드링크를 받은 재현이 한 모금 쭉 빨아올렸다. 안 그래도 오늘 하루 종일 떠든 탓에 목이 칼칼하던 차였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우리도 밥 먹으러 가요. 주연씨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 밥집은 다 문 닫았으려나.”

형사님 혹시 김치찌개 좋아하세요?”

당연하죠. 김치찌개 싫어하는 한국인도 있나? 물론 내가 몰라서 그렇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 저랑 집에서 같이 밥 드실래요? 저 김치찌개 잘 끓여요.”

 

 

주연의 질문에 늘 빛나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인 재현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물었다.

 

 

주연씨, 저번에 나 빌려준 칫솔 안 버렸죠.”

. 칫솔걸이에 잘 놔뒀어요.”

그럼 갑시다! 미리 말하는데 나 밥 두 공기 먹을 거예요.”

 

 

주연은 으름장 놓는 재현에게 푸스스 웃어 보이며 차키를 건네받았다. 복잡한 지하주차장에 주차한 날은 주연이 재현보다 더 빨리 차의 위치를 찾아내곤 해서 지금처럼 앞장설 때가 잦았다. 사실 처음에는 자동차 번호판을 외워도 찾는 데 한참 걸렸는데 이제는 어느 곳에 주차하든 금방 찾아낸다. 재현은 주연에게 차키를 쥐어주고 어슬렁어슬렁 걸어 차로 향했다. 운전석 문이 또 미리 열려 있었다. 먼저 조수석에 앉으면 항상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운전석 문을 열어주는 주연의 사소한 습관이자 배려였다. 운전석에 앉은 재현이 시동을 걸자 내비게이션이 켜졌지만 둘 중 누구도 화면을 터치하지 않았다. 철야 없이 같이 퇴근하는 날마다 바래다줬더니 처음엔 안내를 받아야만 갈 수 있던 주연의 빌라 주소가 금방 외워져서 굳이 목적지 설정을 하지 않고도 갈 수 있게 됐다.

 

빌라에 도착해서는 각자 씻고 나와서 옷을 갈아입었다. 활동하기 편한 반팔과 반바지를 선호하는 재현이지만 주연의 집에는 온통 긴팔과 긴바지밖에 없었다. 키가 비슷하지 않았으면 소매고 바짓단이고 다 질질 끌고 다녔을 거다. 주연은 재현을 거실에 앉혀놓고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조금 지나자 밥 짓는 냄새와 김치찌개 냄새가 솔솔 풍기기 시작했다. 식사는 못 하고 종일 음료만 마셔댄 탓에 더 허기가 졌다. 한 시간쯤 지나서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김치찌개에 계란말이까지 차린 주연이 재현을 불렀다. 거의 자정을 앞두고 먹는 첫 끼였다.

 

 

잘 먹겠습니다!”

 

 

씩씩하게 외치고 찌개부터 한 숟갈 입에 넣은 재현이 곧바로 감탄했다.

 

 

우와. 완전 맛있는데요? 나 진짜 밥 두 공기 먹어야겠다.”

많이 드세요.”

 

 

음식의 양, 숟가락과 젓가락, 소란스러운 대화,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 모든 게 두 사람 분량이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끼는, 익숙하지 않은 행복이었다. 주연은 식사에 집중하는 재현을 사르르 웃으며 바라봤다. 직접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재현이 귀엽고 고마울 따름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녹음을 들으며 제보자의 진술 내용을 기록했다. 주연이 듣고 정리해서 읊으면 재현이 타이핑하는 식이었다. 십 분쯤 지나자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는 재현의 손이 현저히 느려졌다. 고개가 간헐적으로 떨어졌다가 올라오길 반복하길래 자세히 봤더니 꾸벅꾸벅 졸고 있다. 벌써 새벽인데다가 식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졸음이 쏟아질 만했다. 재현의 허벅지 위에 놓여 있던 노트북을 가져온 주연이 나머지 내용을 전부 타이핑했다. 파일 저장하고 노트북 전원을 껐는데도 여전히 깨어날 기미가 안 보인다.

 

주연은 결국 재현을 그대로 소파에 눕히고 이불과 베개를 가져왔다. 혹여나 목 아플세라 베개 받쳐주고 얇은 여름이불까지 덮어준 뒤에야 잠든 재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주연의 짙은 눈동자에 재현의 말간 얼굴이 맺혔다. 비교적 도톰한 아랫입술을 검지 끝으로 슬며시 누르자 벌어져 있던 입술이 꾹 다물린다. 재현의 입술은 보기보다 더 부드럽고 말랑하고 따뜻했다. 누군가를 자의로 먼저 만져보는 게 꽤 오랜만이었다. 손끝에 남은 재현의 입술 촉감을 되새긴 주연이 소파의 남는 공간에 팔을 얹었다. 한참동안 잠든 사람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저도 슬슬 졸렸다. 이제 침대에 누워야겠다. 생각만 하다가 잠들어 버린 주연이 곧 규칙적인 숨소리를 냈다. 그리고 한 시간쯤 곤히 자던 주연의 미간이 갑자기 찌푸려졌다.

 

 

안 돼...... 형사님... 이 형사님...... 가지 마세요. 형사님.”

 

 

어디서 자꾸 부르나 했는데 주연이 식은땀 흘리며 잠꼬대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재현은 잠결에도 형사님 호칭 몇 번 듣고 깨어나 곧바로 주연의 안색을 살폈다. 인상을 잔뜩 구긴 채 끙끙 앓는 걸 보아하니 악몽을 꾸는 모양이었다.

 

 

주연씨! 주연씨!”

 

 

이름을 부르며 몇 차례 흔들자 숨을 힉, 집어삼킨 주연이 눈을 떴다. 꿈에서 그토록 애타게 불렀던 재현이 바로 눈앞에 있다. 주연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갤 떨구더니 두 손 안에 제 얼굴을 감췄다.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기에 꿈 때문에 겪는 두려움과 슬픔조차 남들보다 더 많은 걸까. 이주연만이 볼 수 있는 타인의 세상. 그건 어쩌면 이재현이 매일 보는 사건들만큼 잔혹할지도 모른다. 어정쩡하게 들고 있던 손을 뻗은 재현이 주연의 어깨를 살며시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유일하게 옷 밖으로 드러난 목의 맨살끼리 맞닿았다. 재현은 일정한 박자로 토닥토닥 등을 다독거리면서 주연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서로의 다른 체온이 번지고 섞여서 비슷해졌다. 한참 뒤에 다시 들여다본 주연은 진이 다 빠져 있었다.

 

 

악몽 꿨나 보네요. 무슨 꿈이었길래 그래요.”

“......말 못하겠어요.”

그럼 하지 마요. 안 해도 돼요.”

죄송해요.”

죄송해하지도 말고요. 아무튼 이제 좀 괜찮아요?”

. 근데요. 이 형사님... 꿈 얘기는 아니지만 할 말 있어요.”

뭔데요?”

듣고 화내지 마세요.”

무슨 얘긴데요. 주연씨가 그렇게 말하니까 벌써 겁난다.”

... 방금 이 형사님 성적 취향 알아 버렸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주연의 말에 당황해서 벙쪘던 재현이 목소릴 낮추고 물었다.

 

 

정확히 어떤 거요......?”

형사님이 지금 머릿속에 떠올리시는 거 전부 다요.”

아니, 아니, 잠깐만. 무슨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이런 때까지 써요?!”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맨살끼리 오랫동안 닿으면 저절로 그렇게 돼요. 여름에도 항상 긴팔, 긴바지 옷만 입는 이유에요.”

 

 

말을 마친 주연이 재현을 빤히 바라봤다. 재현은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재현이 당장 머릿속에 떠올린 자신의 취향은 일단 성별에 있어서 일반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침대 위에서는 살짝 고약한 편이기 때문이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평소에는 주로 제압하는 입장이지만 침대에선 지배하는 것보다 오히려 거칠게 다뤄지거나 거칠게 몰아세워지는 걸 더 선호했고. 타고난 체력이 좋은데다가 몸이 튼튼해서 꿰뚫리며 부서질 듯이 박히는 걸 즐기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낯 뜨거운 취향을 다 읽혔다니.

 

 

갑자기 나한테 정 떨어진다거나... 더럽다는 생각이 들거나 그러진 않아요?”

 

 

재현은 그렇게 묻더니 얼굴이며 귓바퀴, 목까지 새빨개져선 주연과 살짝 떨어져 앉았다. 한 뼘만큼 거리가 생겨났다.

 

 

무슨 말씀이세요. 절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사람은 누구나 비밀이 있으니까요.... 실수든 고의든 그걸 읽은 제가 문제죠. 다들 소름 끼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접촉을 잘 안 하게 됐어요.”

 

 

그새 평온을 되찾은 주연이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소름 끼친다는 말을 들으면서 자라왔다는 게 안쓰럽다가, 그것과는 별개로 주연의 말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다. 정말 이걸 다 알고도 부정적인 인식을 안 가질 수가 있나. 머릿속에 떠오른 성적 취향을 죄다 읽었다면서 어떻게 이 정도로 태연할 수가 있지. 게다가 그 외에도 읽은 마음이 분명 있을 텐데.... 아랫입술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하던 재현이 마침내 운을 뗐다.

 

 

그런 취향 말고 다른 건 못 읽었어요?”

어떤 거요?”

그냥... 뭐 그런 거 있잖아요. 호감이라든지. 좋아하는 사람이라든지.”

읽었어요.”

“.......”

저 맞죠.”

 

 

묻긴 묻는데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다. 머릿속 생각을 전부 읽었으니까 당연히 알아챘겠지. 재현이 입술을 감쳐문 채로 고갤 한 번 끄덕였다. 남다른 호감을 이런 식으로 들킬 줄은 몰랐다.

 

 

이 형사님한테도 이 능력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갑자기요?”

그랬다면 제가 형사님이랑 같은 마음이라는 걸 바로 아셨을 테니까요.”

 

 

주연이 대답과 함께 미소 지었다. 같은 마음. 재현은 주연의 입에서 나온 네 글자를 곱씹으며 주연과 눈을 맞췄다. 짙고 빽빽한 시선이 얽히다가 서서히 입술로 떨어졌다. 어차피 가장 은밀한 취향까지 다 들킨 마당에 거칠 것 없어진 재현이 다시 주연과 거릴 좁혔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주연의 뺨을 감싸고 쓰다듬으며 만지작대는 표정이 나른했다. 잔뜩 긴장한 주연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보통 이쯤이면 누구 한쪽이 먼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키스했겠지만 주연은 사이코메트리능력을 가지고 살아온 탓에 보통과 달랐다. 이 나이 먹고 키스하기 전에 분위기보다 허락을 우선순위로 두게 되다니. 마른침을 꼴깍 삼킨 재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연씨. 연애하면서 스킨십 제대로 해본 적 없다면서요.”

...... .”

키스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굳이 재촉해서 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예 첫 키스까진 아니겠지만 아무튼... 내가 가져도 괜찮아요?”

 

 

재현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주연이 내리뜬 눈동자를 굴렸다.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한다는 말이 좋아요. 근데...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돼요?” 그런 숙맥 같은 소리였다. 나이만 놓고 봤을 때 배덕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죄스러울 지경이다. 나 얘랑 이래도 되나. 진짜.

 

 

주연씨는 그냥 가만히 있어요.”

 

 

말을 마친 재현이 먼저 주연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 맞췄다. 이마에서부터 점점 아래로 눈꺼풀, 콧대, 뺨을 타고 입술까지 내려왔다. 재현이 얼굴 곳곳에 입 맞추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는 동안, 주연은 반쯤 몽롱하게 뜬 눈으로 제게 입 맞추는 재현의 얼굴을 감상했다. 사이사이에 눈을 뜰 때마다 자꾸 시선이 얽혔다. 재현은 그럴 때마다 흥분하면서도 속으로 갸웃했다. 하도 숙맥이라 눈을 감으면 더 집중되고 좋다는 걸 모르는 건지. 아니면 키스할 때 눈 뜨고 지켜보는 게 주연이 가진 뜻밖의 취향인 건지 도통 모르겠다.

 

 

계속 그렇게 나 쳐다보고 있을 거예요?”

왜요? 형사님 얼굴 보고 싶어서 그런 건데... 불편하시면 눈 감을게요.”

아니, 불편해서 말한 건 아니에요. 보는 것도 뭐 괜찮긴 하지.”

 

 

재현이 머쓱해하며 대답하자 주연이 말없이 눈웃음 지었다. 이윽고 고개를 살며시 틀고 다가간 재현이 주연의 입술 사이를 혀로 간지럽히듯 핥아 올렸다. 윗입술이 살짝 들리면서 틈이 벌어졌다. 재현은 그 틈으로 천천히 제 입술을 맞물리고 주연의 아랫입술을 사탕처럼 쪽쪽 빨았다. 어쩔 줄 모르고 얼어붙은 주연의 손이 허공에서 헤매다가 내려왔다. 분명 어디든 잡거나 만지고 싶을 텐데 선뜻 그러지 못하는 주연이 안타깝다.

 

 

괜찮아. 살에 직접 닿는 거 아니니까 만져도 돼요.”

 

 

잠깐 입술을 뗀 재현이 어르듯 말하면서 주연의 손을 잡고 제 허리로 이끌었다. 처음엔 얹어진 대로 가만히 있던 커다란 손이 슬슬 허리를 쓸어 만진다. 허리가 예민한 재현의 입술 사이로 금세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격정과는 거리가 먼, 느리고 옅고 간지러운 키스였다. 한참을 부드럽게 입 맞추다가 이마를 맞대고 모로 누운 자세 그대로 단잠에 빠져든 주연과 재현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 두 번째 악몽은 없었다.

 

 

 

 

우리가 서로의 비밀을 알게 된다면

과연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 존 처튼 콜린스 ­

 

 

 

 

 

/

 

 

 

 

 

핸드폰 벨소리가 요란했다. 알람보다 한참 빨리 울린 벨소리에 으으, 앓는 소릴 낸 재현이 전화를 받았다. 손으로 들고 있기도 귀찮아서 뺨 위에 핸드폰을 얹어두고 있으니 저 너머에서 창민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형사님!

어어... 창민아. 이 새벽에 무슨 일이냐. 뭐 다른 사건 터졌어?”

아뇨. 그게 아니라 어제 얘기했던 그 리스트 말인데요.

. . 설마 벌써 끝냈다고? 이야. 대단하다.”

한국 사람이면 말 좀 끝까지 들어요.

“......알겠어. 뭔데.”

애초에 리스트를 작성할 필요가 없었어요. 최근 출소자 중에 프로파일링에 들어맞는 용의자가 딱 한 명이더라고요.

? 누구. 누군데.”

 

 

남아 있던 졸음기가 싹 가겼다. 벌떡 일어나서 다급하게 묻는 재현의 목소리가 격양된 듯 떨렸다. 창민은 정리한 자료를 컴퓨터 여러 대에 동시에 띄우고 차근차근 읽기 시작했다.

 

 

이름 조한기. 나이는 현재 41. 2017728일부터 2021726일까지 4년 복역하고 출소했습니다. 경상북도 출생에 현재 거주지도 경상북도 영주시예요. 프로파일링대로 얼굴에 화상 흉터가 꽤 크게 있어서 몽타주와 영상을 대조했더니 동일인물로 확인됐습니다. 미산 터널 살인사건의 범인이 분명해요.

.... 처음부터 수감자도 대상에 넣었으면 더 빨리 검거할 수 있었을 텐데. 아무튼 수고했다. 각 팀에다 조한기 신상이랑 자택 주소, 차량 번호 전송 부탁할게.”

지금 바로 보낼게요. , 그리고 범인이 자기 명의로 된 핸드폰도 새로 개통했던데 지금은 전원을 꺼놨더라고요. 다시 켜서 문자나 전화 발신하면 위치 추적하려고 대기 중이에요.

가장 최근에 핸드폰 사용했던 지역은?”

어젯밤 경상북도 영주시 봉황산에서 마지막으로 신호가 잡혔다가 입구 근처에서 전원이 꺼졌어요. 풍기IC 씨씨티비에 기아 봉고3 트럭을 몰고 통과하는 조한기의 모습이 찍혔으니까 확실합니다.

나 지금 바로 차 몰고 내려갈 테니까 선우랑 영재한테도 그쪽으로 출동하라고 위치 알려줘.”

! 핸드폰 신호 잡히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핸드폰을 내려놓은 재현이 후다닥 씻고 나왔다. 옷 갈아입으려고 부산을 떨다 보니 깨어난 주연이 쳐다본다. 꼭두새벽에 뭐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깼어요? 미안. 내가 너무 시끄럽게 했죠.”

아니에요. 근데 어디 가시려고요?”

경북 영주시요. 잘하면 오늘 범인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주연은 재현의 말에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들킨 사람처럼 흠칫 놀랐다. 왜요? 어디 안 좋아요? 재현이 물었지만 주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 초조한 표정으로 윗입술 짓씹던 주연이 덩달아 분주하게 나갈 채비를 했다.

 

 

주연씨는 여기 있어요.”

저도 갈래요.”

안 돼요. 범인이랑 직접 마주칠 수도 있고 위험해서,”

혼자 기다리기 싫어요. 데리고 가주세요.”

 

 

재현의 말허리까지 끊으며 부탁하는 표정이 간절했다. 재현은 제 팔목을 붙잡은 주연의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다가 고갤 들었다. 주연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새 마음 약해져서 뿌리치지 못한 재현이 허락의 뜻으로 고갤 주억거렸다. 웬만하면 현장에는 안 데려가고 싶었건만. 누구한테든 지는 일 없이 살아온 이재현이 이주연의 부탁 몇 마디를 못 이겨먹어서 결국 나란히 차에 올랐다.

 

평일 새벽이라 그런지 고속도로가 뻥 뚫려 있었다. 쌩쌩 달려서 경상북도 영주시에 들어서자마자 선우가 타이밍 좋게 전화를 걸어왔다. 범인의 자택 수색을 마쳤다는 소식이었다. 범인은 없지만 안방의 상자 속에 빨간 립스틱과 매니큐어가 한가득 쌓여 있었고, 방바닥에는 최근에 흘린 것으로 보이는 핏자국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다고 했다. 재현은 선우의 보고를 가만히 듣다가 형사로서의 직감을 따라 봉황산으로 급히 방향을 틀었다.

 

 

선우야. 그 집 방바닥에 핏자국이 있었다고 그랬지.”

. 마른 지 얼마 안 된 거였어요. 새로운 피해자의 혈흔일지도 모르겠네요.

. 창민이 말로는 어젯밤에 봉황산에서 마지막으로 핸드폰 신호가 잡혔다는데... 아무래도 피해자가 또 생긴 거 같다. 봉황산 앞으로 출동하라고 전달해.”

. 나 금방 갈 테니까 먼저 진입하지 말고 기다려요. 알겠죠.

상황 봐서.”

, .

알겠다. 빨리 와.”

 

 

전화를 끊은 재현이 손끝으로 관자놀이와 이마를 짚었다. 범인을 잡으러 온 곳에서 어쩌면 범인이 아니라 피해자의 시체를 찾아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잡을 수 있는 기간이나 혐의는 늘어나겠지만 범인이 도주할 시에 미산 터널 살인사건으로 처벌 받게끔 하기는 어려울 게 불 보듯 빤했다. 이미정 양과 그녀의 어머니를 위해서 공소시효가 만료되기 전에 어떻게든 조한기를 미산 터널 살인사건 혐의로 확실하게 잡아넣어야만 했다. 입술 꾹 악물고 핸들을 돌리던 재현이 저 멀리 보이는 봉황산 주차장 표지판을 발견하고 입구와 제일 가까운 곳에 주차했다.

 

주연은 아까보다 한층 어두워진 낯빛의 재현을 지켜봤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는 표정이 심각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재현을 산에 혼자 들여보내고 싶지 않았다. 재현에게는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지만 짚이는 데가 있었다. 그러나 아는 사실을 다 털어놨다간 열혈 형사 이재현이 언제 산으로 발 벗고 뛰어갈지 모르는 일이어서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잠시 그러고 있으니 선우와 영재의 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차 위에 부착한 사이렌 소리가 요란했다. 재현을 따라 차에서 내린 주연이 산등성이를 올려다보다가 서서히 시선을 떨어트리더니 이윽고 산 왼쪽에 치우친 어느 지점을 정확히 응시했다.

 

 

형님!”

. 왔냐. 근데 사이렌은 왜 켰어.”

조금이라도 빨리 오려고요. 근데 여긴 왜요?”

범인이 있을 곳으로 추정 중인데,”

 

 

재현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창민의 연락이었다.

 

 

이 형사님, 혹시 지금 다 같이 있어요?

선우랑 영재 왔고 나머지 팀은 합류하러 오는 중. 스피커폰으로 돌릴게.

방금 조한기 핸드폰으로 112에 살려달라는 신고 전화가 왔거든요. 기지국 접속 정보로 추적했더니 역시나 봉황산으로 나왔습니다. 납치된 여성이 탈출할 때 조한기의 핸드폰을 갖고 도망쳐서 신고했다는 거 같아요. 피해자의 신고 내용에 의하면 산을 중반쯤 올라서 좌측으로 십오 분쯤 갔더니 낡은 오두막집이 나왔다고 합니다. 거기에 갇혀 있었대요.

“119는 출동했어?”

거기서 제일 가까운 소방서의 산악구조대를 출동 시켰다고 뜨네요. 조한기의 정확한 위치는 파악이 안 되지만 건너편 갓길에 트럭이 주차되어 있는 걸로 봐서 아직 산에 숨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오케이. 그럼 우리가 그쪽으로 가볼게. 다른 팀한테는 피해자 찾는 걸 우선으로 하라고 전달해. 조한기가 먼저 찾으면 다 헛수고 되는 거야.”

지금 전달할게요!

고맙다. 수고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재현이 크게 심호흡했다. 산으로 진입하자는 눈빛을 주고받은 선우와 영재가 앞장섰다. 재현은 걸음을 옮기려다가 주연을 돌아봤다. 주연이 아까부터 불안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며 자꾸 산 어딘가와 재현을 번갈아보고 있었다.

 

 

형사님, 저도.......”

안 돼요. 주연씨는 여기에 있어요. 산까지 따라오는 건 진짜 허락 못해요.”

 

 

재현이 단호한 목소릴 냈다. 어떻게 애원해도 절대 수락하지 않을 표정이었다. 주연은 대꾸 한마디 없이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어쩐 일인지 아까 출발할 때와 달리 고집도 부리지 않는다. 일반인을 위험한 현장에 안 데려가는 건 당연한 일인데 괜스레 또 마음이 안 좋다.

 

 

차키 줄 테니까 안에 앉아서 기다릴래요?”

아니에요. 그냥... 좀 걷고 있을게요.”

그래요. 그럼. 멀리 가지 말고. 특히 산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마요. 알겠죠.”

 

 

재현은 몇 번씩 당부하다가 주연이 고갤 끄덕이자 그제야 안심하고 산으로 뛰어갔다. 주연의 시선이 끈질기게 뒤통수로 따라붙는다는 걸 알면서도 뒤돌아볼 수가 없었다.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야 저도 굴뚝같지만 주연을 다치게 만들기는 싫었다. 마침 들어온 메시지에는 지원 팀의 도착과 합류 소식이 담겨 있었다. 한달음에 선우와 영재에게 뛰어간 재현이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질문했다.

 

 

뭐 인기척 들린 거 있었어?”

아뇨. 아직 잠잠해요. 그리고 오두막은 산 좌측에 있댔지만 도주 가능성을 고려하면 각자 찢어져서 수색하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일단 지원 팀 전원 도착했다고 연락 왔으니까 여기서 찢어지자. 나 먼저 좌측으로 갈 테니까 선우는 중앙, 영재가 우측 맡아서 합류한 팀이랑 같이 수색해.”

. 조심하세요.”

형님. 진짜 다치지 마요.”

너희도.”

 

 

선우와 영재를 반대편으로 보낸 재현이 허리춤의 총집에 한 손을 얹은 채 주변을 살폈다. 십분 쯤 더 오르다 보니 피해자의 신고 내용처럼 낡은 오두막집 한 채가 나왔다. 다 쓰러져가는 모양새에 쾨쾨한 냄새까지 풍기는 불쾌한 장소였다. 발로 슬며시 밀자 나무문이 끼이익- 듣기 싫은 소음을 내며 열렸다. 부엌도 화장실도 없이 단칸방이나 다름없는 실내에는 조한기가 미리 가져다놓은 흰 원피스와 빨간 립스틱 그리고 매니큐어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었다.

 

이 새끼 그냥 다 놔두고 내뺀 건가. 산을 이 잡듯이 탈탈 털어 뒤져야 되게 생겼네. 못마땅한 듯 쯧, 혀를 찬 재현이 오두막의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주변에 숨어 있을까봐 샅샅이 나무와 수풀을 뒤졌지만 소득은 없었다. 다시 앞문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재현이 내내 잡고 있던 총에서 손을 뗀 그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빠르게 달려드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다시 총을 쥔 재현이 돌아섰을 때에는 윽, 하는 신음소리가 발소리를 이미 끊은 뒤였다. 피해자가 다시 잡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재현은 소리가 났던 방향으로 살금살금 다가가다가 저 멀리 보이는 장면에 우뚝 멈춰 섰다. 너무 놀라서 당장에라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재현의 시선이 향한 그곳에 다른 사람도 아닌 주연이 있었다. 제가 산 근처엔 얼씬도 말라고 당부한 이주연이,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이주연이 어떤 남자를 두 팔로 꽉 끌어안고 압박한 채로 수풀 사이에 넘어져 있었다. 오지 말라고 했는데. . 도대체 왜. 재현은 고장 난 것처럼 같은 생각만 반복했다. 선뜩하게 내려앉은 가슴을 미처 진정시킬 틈도 없이 내달렸다. 주연과 뒤엉켜 바닥을 뒹굴던 남자는 악에 받친 고함을 질렀다.

 

 

이 씨발! 씨발새끼! 죽여 버릴 거야!”

 

 

그와 동시에 모자가 벗겨지면서 끔찍한 화상 흉터가 훤히 드러났다. 주연이 절대 놓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던 남자의 정체는 조한기였다. 재현은 조한기를 알아보자마자 바로 공포탄을 발사했다. 총소리에 움찔한 조한기가 주연의 배에 쑤셨던 칼을 다시 뽑아들면서 피가 왈칵 터져 올라왔다. 모로 쓰러져 누운 주연은 아까부터 고통스러운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달려와서 주연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은 재현이 도망치는 조한기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물었다.

 

 

주연씨! 괜찮아요?”

빨리... 빨리 가세요. 지금이 아니면 못 잡아요.”

 

 

주연이 피 묻은 손등으로 힘없이 툭, 재현을 밀었다. 이를 꽉 악문 재현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금방 올게요. 최대한 빨리 올 테니까 제발 버텨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한 재현이 벌떡 일어섰다. 조한기가 사라진 쪽으로 뛰어가는 재현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진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주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자꾸만 정신이 아득해진다. 헐떡거리던 호흡의 횟수도 느려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떨어지는 체온 때문에 몸은 으슬으슬 추워지는데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본 얼굴이 재현이어서, 가슴 어딘가는 따뜻했으며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여기에서 이렇게 죽는 건가. 삶이 간절한 적 없이 살아왔지만 이제야 좀 사는 게 즐겁다고 느끼는 중이었는데. 내가 죽으면 이 형사님은 매일 자책으로 괴로워하실 텐데. 이 형사님을 슬프게 만들고 싶지는 않은데.... 자포자기한 주연이 그런 생각이나 하던 차였다. 가볍고 빠른 발걸음 소리에 이어 우렁찬 재현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주연씨! 대답해요. 주연씨! 이주연!”

형사님.......”

정신 놓으면 안 돼요. 눈 떠요. 빨리 눈에 힘 줘요.”

잡았어요...?”

. 잡았어요. 내가 수갑 채웠고 선우가 끌고 갔어요.”

저도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이 꼴을 하고서 그런 말이 나와요?”

제가 어제 꿈 얘기하기 싫다고 그랬잖아요. 사실은 형사님이 칼에 찔리는 장면을 봤어요. 가끔씩 예지몽을 꾸거든요. 솔직하게 말씀 안 드려서 죄송해요. 그치만 사실대로 말했으면 여기까지 안 데려왔을 거잖아요.”

당연하죠.”

, 저 하고 싶은 말 있는데....”

안 돼요. 출혈 심하니까 나중에 얘기해요.”

 

 

재현의 만류와 동시에 주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정신을 붙잡기 어려웠다. 재현은 손과 팔을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주연의 상처 부위를 압박하려 애썼다. 찔린 부위를 아무리 막아도 피가 자꾸만 왈칵왈칵 솟구친다.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선혈이 흘러넘쳤다.

 

 

“......이 형사님.”

주연씨. 그만 말해요.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곧 죽을 사람처럼, 마지막인 것처럼 떠들지 말라고요. 제발.”

죄송해요. 근데...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거 같아서요.”

뭐가요. 도대체 뭔데요.”

제가 전에 형사님이 좋다고 했잖아요. 그거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거 같아요. 사랑이 정확히 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요.”

 

 

담담한 말투로 고백한 주연의 눈꺼풀이 맥없이 스르르 감겼다. 주연씨. 주연씨, 내 말 들려요? 주연씨! 재차 외쳐도 주연한테서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어떻게 아직도 사랑을 모르겠다는 소릴 할 수가 있어요. 나 대신 목숨 내놓고 칼까지 찔린 사람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재현의 눈에 고였던 눈물이 창백히 질린 주연의 얼굴로 후두둑 떨어졌다. 마침내 저 멀리서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뜬 주연의 눈앞에 제일 먼저 보인 형체는 하얀 옷을 입은 누군가였다. 제 머릴 쓰다듬는 손길에 아직 시야가 뿌옇고 흐린 눈을 느릿느릿 껌뻑거리던 주연이 중얼거렸다.

 

 

천사......?”

천사 아니고 형사예요. 이 형사.”

... 이 형사님.”

천사 아니어서 실망했어요?”

아뇨. 어차피 저한테는 같은 말이어서요.”

 

 

주연이 그 말과 함께 눈웃음 지었다. 재현은 주연의 대답에 말을 잇지 못하고 어버버했다. 눈뜨자마자 저런 낯 뜨거운 소릴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애써 웃다가 금세 옅은 한숨을 내쉰 재현이 침대 가까이로 다가섰다. 주연은 수술을 받고 나서 꼬박 사흘 동안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과다출혈뿐만 아니라 수술 도중 혈압이 심각하게 떨어졌던 탓에 의사조차도 온전한 정신으로 깨어날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했었다. 재현은 주연이 의식을 되찾을 때 함께이고 싶어서 어제부로 휴가까지 다 꼴아박았고, 놀랍게도 주연은 재현이 제 곁에 있을 때 눈을 떴다. 첫 만남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두 사람에게 따르는 모든 우연이 꼭 운명 같았다.

 

 

형사님은 괜찮으세요? 다친 데 없어요?”

사흘 내내 의식 없이 누워 있던 주연씨가 물어볼 질문인가?”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됐어요. 깨어나 줘서 고마우니까 쌤쌤으로 칠게요.”

 

 

주연은 재현에게 조용히 미소 지어 보이더니 손등에 링거 주사 바늘이 꽂힌 손을 내밀었다. 주연이 먼저 손을 내미는 건 처음이었다. 분명 깊은 마음과 특별한 의미가 담긴 행동일 터였다. 혹여나 주사 바늘을 잘못 건드릴까봐 아주 조심스레 주연의 손을 잡은 재현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재현은 입술 틈으로 나오려는 울음을 참기 위해 혼신의 노력 중이었다. 맞잡은 손을 꼼지락대던 재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보다 깊게 찔려서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대요.”

그렇구나. 잘 회복돼서 다행이네요.”

주연씨는 뭐가 그렇게 다 덤덤해요. 주연씨 때문에 내가 며칠 동안 얼마나....”

 

 

말하다 보니까 또 울컥하는지 하아, 내쉬는 한숨소리가 유난히 길고 무거웠다. 주연은 재현의 표정을 살폈다. 안도하는 것 같으면서도 화난 얼굴이라서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아리송했다.

 

 

왜 그러세요. 형사님.”

얼마나 죽을 맛이었는지 알기나 해요? 주연씨 대신 내가 그 자리에 누워 있었어야 했다고, 칼에 찔리는 건 나였어야 했다고 얼마나 자책했는지 아냐고요.”

제가 좀 더 빨리 깨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오래 걸렸네요.”

그러니까요. 어떻게 사흘 동안 눈을 한 번도 안 뜰 수가 있어요.”

꿈을 조금 오래 꾸는 중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꿈에서도 형사님이랑 같이 있어서 좋았거든요.”

 

 

재현은 주연의 대답을 듣고 황당해하면서도 설레어 했다.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는 사랑이란 어떤 면에선 심장에 굉장히 해로웠다. 꿈에서도 저와 있었다며 영원히 일어나기 싫었다는 듯이 말하는 주연 때문에 골치가 아픈 와중에 주책맞게 두근거린다.

 

 

꿈에서 나랑 뭐 하고 놀았어요.”

같이 바다 보러 갔어요. 저 중학생 때 이후로 바다 보러 간 적 없거든요. 근데 형사님이 바다를 보러 가자고 하시더라고요. 행복했어요. 무의식중에 깨어나기 싫어서... 그래서 늦었나 봐요.”

 

 

주연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주연은 햇살처럼 사르르 웃는데 이재현은 아까부터 눈물만 났다. 불가항력이었다. 눈물이 그냥 뚝뚝 떨어졌다.

 

 

그게 행복했으면 더 빨리 깨어났어야지. 그래야 진짜 나랑 같이 바다도 보러 가고 할 거 아니에요.”

 

 

울먹이면서 말한 재현이 주연의 손바닥 안으로 고갤 숙였다. 따뜻한 눈물이 너른 손바닥을 적셨다. 재현은 한참 동안 울기만 하다가 겨우 말했다.

 

 

좋아해요.”

?”

좋아한다고요. 내가 왜 휴가 다 꼴아박고 며칠 동안 눈물 콧물 짜면서 병실 지킨 줄 알아요? 주연씨 깨어나면 바로 대답해 주려고 그랬어요.”

 

 

재현의 대답에 놀란 주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제까지 본 주연의 눈 크기 중에서 가장 컸다. 그 표정이 너무 초면이라서 조금 우습고, 많이 귀여웠다. 재현이 눈물 짜다 말고 피식 웃자 고양이를 닮은 눈매가 가늘어지도록 활짝 웃어 보인 주연이 들어 올린 손으로 재현의 뺨에 난 눈물자국을 살살 닦아냈다.

 

 

형사님이 이렇게 우는 거 처음 봐요.”

나는 그날 산에서도, 구급차 안에서도, 그저께도, 어제도, 오늘도 엄청 울었어요. 주연씨가 못 봐서 그렇지.”

 

 

퉁명스럽게 받아치는 재현을 지그시 바라보던 주연이 못내 귀엽다는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재현이 킁, 하고 코훌쩍이는 모습에는 아하하! 웃음을 터뜨리더니 곧 아야야... 앓는 소릴 냈다.

 

 

주연씨 크게 웃으면 안 돼요. 갑자기 힘 들어가거나 충격 받으면 봉합 부위 터질 수도 있다고 그랬단 말이에요.”

, 어쩐지......”

. 아파요? 터진 거 같아요? 간호사님 부를까요?”

아니에요. 조금 욱신거려서 그렇지 괜찮아요. 그냥 옆에 있어주세요.”

 

 

간호사 호출 버튼을 누르려다가 멈추고 허릴 수그린 재현이 주연의 이마에 가볍게 뽀뽀했다. 이마와 입술에 스미는 체온이 따스했다. 닿은 코끝끼리 귀엽게 두어 번 비비고 문지르고 나서 지그시 마주보는 재현의 눈동자에 주연이 비쳤다.

 

 

, 진짜... 병실이어서 키스도 못하고.”

 

 

재현의 직설적인 한마디에 주연이 귓바퀴를 붉혔다.

 

 

, 반응 바로 오네.”

 

 

재현이 이것만 기다렸다는 듯이 짓궂게 놀리더니 덧붙였다.

 

 

나랑 같이 바다 가고 싶으면 빨리 나아요.”

. 형사님.”

그리고 앞으로는 언제 어디서든 절대 다치는 일 없게 지켜줄게요. 진짜로.”

 

 

마지막 세 글자에 특히 힘을 실으며 비장하게 말하는 재현의 눈빛이 처음 만났던 날처럼 번뜩였다. 언제 어디서나 사냥감을 목전에 둔 맹수처럼 형형하게 빛나는 눈과 어떤 거짓도 없이 확신에 찬 목소리. 그게 좋았다. 주연은 어린 시절 제가 선망하던 영웅을 닮은 이 형사님이, 제게 표현과 마음을 착실히 돌려주는 이재현이 좋았다. 재현의 곁이라면 이 손바닥에 어떤 기억이 닿아도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다 가끔은 감당하지 못해 울게 되더라도, 또 마음이나 몸 어딘가를 다치게 되더라도, 그래도 다 괜찮을 것 같다.

 

갓 시작한 사이의 낭만적이며 건방지기까지 한 착각. 누군가는 미련하고 무모하다고 혀를 찰 테지만 이 또한 사랑의 한 단면이리라. 때는 바야흐로 태양이 뜨겁게 작열하는 2021년 여름. 지금부터 기록될 재현의 모든 순간에는 늘 주연이 함께일 것이다. 서로에게 내밀어진 손을 잡는다면, 미래의 언제까지나.

 

 

 

 

 

()

5th Juyeon Hyunjae Webzine all rights reserved.
Design by boold (@nonair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