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를 마치고 경찰서 사무실에 돌아가서는 재현의 말대로 정말 밤새도록 자료를 확인했다. 주연은 선우와 영재가 가져온 증거물을 차례대로 만지며 여러 정보를 읽어냈다. 한 번 능력을 쏟아내 쓰고 나면 극도로 지치는 탓에 최소 두 시간은 쉬어야 했다. 주연이 잠깐 쉬는 동안에는 창민이 자료를 업데이트하고 다시 취합해 파일로 보냈다. 그동안은 어떻게 해도 수사에 진전이 없더니 주연의 능력 덕분에 찾은 퍼즐 조각을 몇 개 끼워 넣자 수사가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벌써 동이 텄다. 다들 졸린 눈 비비며 자료를 취합하는 와중에 골치 아프단 듯이 이마를 문지르던 재현이 뭔가 결심한 듯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안되겠다. 아무래도 그 아주머니한테 직접 다시 물어봐야겠어. 주연씨가 읽어낸 정보로 밑밥 깔면 더 이상 발뺌 못하겠지. 자, 빨리 출발합시다.”
“저요...?”
“네. 주연씨요. 나랑 같이 가요.”
살펴보던 서류를 한쪽에 정리한 주연이 재빨리 재현을 따라나섰다. 재현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서울 외곽의 살짝 허름한 주택촌이었다. 대부분의 주택이 높아봤자 3층이었고 방마다 따로 세를 내놓고 있었다. 아직도 서울에 이런 곳이 있구나. 차에서 내린 주연이 잠시 주변을 둘러보는데 차문이 잘 잠겼는지 확인하던 재현이 별안간 누군가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뛰어갔다.
“김희숙씨! 김희숙씨 거기 서세요!”
재현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흠칫한 여성이 뒤를 돌아봤다. 흰머리와 주름이 세월을 따라 늘어 있었지만 분명 그 사진 속 아주머니였다. 재현은 길쭉한 다리로 한달음에 달려가 그녀와 마주보고 서서 열심히 뭔가를 얘기 중이었다. 재현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기겁하면서 도망가려는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느릿느릿 곁으로 다가간 주연은 두 사람이 격양된 채로 나누는 대화를 귀담아 들었다.
“미산 터널 살인사건 재수사 시작했다고 저번에 말씀드렸죠.”
“그게 뭐 어쨌다고. 왜 또 나를 찾아와.”
“그날 아주머니가 대량으로 구매한 원피스를 웬 남자한테 전달하는 장면이 포착됐거든요.”
“뭐? 그걸 어떻게....”
“과학기술의 발전이 이렇게 대단하답니다. 자,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솔직하게 털어놓으세요.”
“말하면... 지켜줄 수 있어? 내 명줄 보장되는 거냐고. 괜히 도와줬다가 해코지 당하면 어떡해.”
“도와주시면 어떻게든 범인 꼭 잡을게요. 그럼 앞으로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평생 발 쭉 뻗고 주무실 수 있어요.”
재현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파들파들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범인 꼭 잡겠다는 약속 지켜야 돼. 알겠지. 형사 양반.”
“네. 하늘에 맹세할게요.”
“사실은... 그때 뉴스에 나오자마자 그 남자 짓이라는 걸 알았어. 먼저 신고할까 생각도 했었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그 학생한테 한 것처럼 나도 죽일까봐 무서워서 용기가 안 나더라고. 그 학생 잘못된 거야 딱하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 사건 있고 나서 잠잠해질 때까지 협박 전화만 수십 통을 받았어. 이사를 다녀도 계속 그러니까 신고했다간 분명 죽겠다 싶어서...... 그래서 숨겼어. 나도 살아야 될 거 아니야.”
“협박 전화랑 편지도 왔어요? 그거라도 사실대로 얘기해주셨어야죠.”
“최근 몇 년 동안은 그런 것도 없어서 그냥 잊고 싶었어!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다고!”
아주머니는 재현이 난처한 표정으로 다그치자 그제야 흐느끼며 최근의 일까지 실토했다. 주연은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혹시 음성이나 말투 기억나세요?”
아주머니의 손을 붙잡고 묻는 주연의 목소리가 침착하고 나긋나긋했다.
“말투? 응... 억양이 좀 특이하긴 했지. 경상도 그쪽 같던데. 토박이는 아닌지 사투리가 어색했어. 목소리는 듣기 싫을 정도로 쉬어 있었고.”
“혹시 얼굴은요?”
“모자 쓰고 있어서 자세히 못 봤는데 화상 흉터가 심했어. 눈꺼풀 위쪽이 녹은 것처럼 생긴 게 아주 징그러웠지. 무서워서 꿈에도 가끔 나와.”
“키는 어느 정도였나요?”
“내 키가 162센티미터인데 두 발짝 떨어져서 마주보고 섰을 때 눈높이가 아주 살짝 위쪽이었으니까 그리 크지는 않았던 거 같어.”
강압적이지 않은 주연의 태도 덕분에 경계심을 낮춘 아주머니가 순순히 대답했다. 지켜보던 재현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만큼 많이 알고 계시면서 그땐 왜 말씀 안 하셨어요. 제가 신변보호 다 해드린다고 그랬잖아요.”
“나까지 봉변 당할까봐 무서워서 그랬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형사 양반.”
“혹시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지니고 계시는 물건 있으신가요?”
주연이 묻자 곰곰이 생각하던 아주머니가 지갑 속에서 작은 부적을 꺼냈다. 하도 악몽에 시달리고 가위 눌리길래 그쯤부터 마련해서 계속 지니고 다녔던 것이라고 그랬다. 아주머니의 설명을 들으며 손에 부적을 꼭 쥔 주연이 눈을 내리감았다. 그녀는 도통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연을 훑었고, 재현은 주연이 다시 눈을 뜰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아주머니의 오랜 기억 속 행적을 읽던 주연이 드디어 전봇대 뒤의 인영을 캐치해냈다. 주택 맞은편 전봇대 뒤에 서서 지켜보던 남자를 발견한 주연이 눈을 반짝 떴다.
“그 남자가 혹시 저 전봇대 뒤에 숨어서 지켜보기도 했나요.”
주연의 질문에 아주머니가 갑자기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그녀는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고갤 빠르게 끄덕였다. 재현이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오열하는 아주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더니 토닥토닥 달랬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며 다그칠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역시 아까 그건 걱정에서 비롯된 짜증이었나 보다. 이 형사님은 정말 다정하고 따뜻한 분이구나. 재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주연이 설핏 미소 지었다. 아깐 버럭 언성을 높이더니 지금은 한없이 조심스럽고 살가운 이재현이 솔직히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신기했다. 이주연 삶에서 이토록 솔직한 온기로만 가득 채워진 사람은 난생처음이어서.
“이제 좀 괜찮으세요?”
“안 괜찮아! 왜 아침부터 찾아와선 질질 짜게 만들어! 형사 양반 때문에 약속도 못 나가게 생겼잖아!”
“어휴. 깜짝이야. 목청 들으니까 괜찮아지신 거 맞네요.”
아주머니의 역정에 장난스럽게 받아친 재현이 씩 웃어 보이더니 잠시 전화를 받기 위해 골목으로 빠졌다. 웃기는 뭘 웃고. 아주 얄미워. 그냥. 얼굴만 새초롬하니 잘생기면 다인 줄 아는가봐. 찾아올 때마다 맨날 저러고 사람 좋게 웃어서 미워하지도 못했다니까. 주연은 아주머니가 재현 몰래 꿍얼거리는 혼잣말을 들으며 푸스스 웃었다.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힐끔 주연을 곁눈질한 그녀가 말했다.
“댁도 형사인지 경찰인지 그래?”
“아뇨. 저는 그냥 대학생인데 사정이 있어서 잠깐 도와드리는 거예요.”
“용케 사람 속을 다 읽더만. 무당 같은 건가.”
“그런 건 아니지만... 남들이 보기엔 비슷할 수도 있겠네요.”
“무당이든 아니든 고마워. 학생. 나도 사실대로 털어놓고 싶었어. 근데 무서워서 도저히 못하겠더라고. 그러다 보니까 시간이 이만치 지났네. 누가 먼저 알아채줬으면 했는데... 정말 고맙네.”
아주머니는 눈물 젖은 눈으로 재차 고맙다며 감사를 표했고. 주연은 평소 회상조차 잘 하지 않는 흐릿한 존재를 떠올렸다. 엄마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이 분의 연세쯤 되었을까. 떠올리려 해도 바로 떠오르지 않는 얼굴 때문에 마음이 저릿해진다. 그리고 잠시 상념에 빠진 주연의 팔을 붙잡아 현실로 끌어올린 건,
“주연씨.”
재현이었다. 네? 되묻는 주연과 여전히 훌쩍이는 아주머니께 동시에 어깨동무를 걸친 재현은 늘 그렇듯 호탕한 목소리로 외쳤다.
“자! 우리 사무실 가서 같이 몽타주 작성 좀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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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의 기억력과 주연이 읽어낸 장면을 바탕으로 몽타주 작성이 이뤄졌다. 수사에 있어서 목격자와 진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갈피를 못 잡아 지지부진하던 수사가 급물살을 탔다. 주연이 팀에 들어온 뒤로 모든 게 수월하게 풀리는 중이었다. 주연은 밤을 새고도 피곤한 내색 없이 의자에 걸터앉아 다만 무거운 눈을 비볐다. 주연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재현이 손을 뻗었다. 주연의 부드러운 생머리가 손바닥 안을 간지럽힌다. “왜요? 이 형사님?” 물으며 올려다보는 표정이 유순했다.
“그냥요. 기특해서. 고마워서.”
자연스럽게 말을 낮춘 재현이 대답과 함께 주연의 앞머릴 살랑살랑 흐트러뜨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눈을 껌뻑이는 주연의 속눈썹이 일어난 바람결을 따라 떨렸다. 잠시 한숨 돌리고 있으니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나타난 창민과 찬희가 팀원들을 책상 앞으로 모았다. 찬희는 방금 전까지 취합한 자료의 사본을 나눠주고 창민은 프로젝터 스크린을 체크했다. 당장 발표해야 할 만큼 많은 진전이 있는 듯했다.
“일단 목격자 진술 토대로 3D 몽타주 작성 마쳤고요. 프로파일링 업데이트 진행했습니다. 범인은 다른 지역에 살다가 경상도 쪽으로 이사를 간 것으로 추정되고.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진 상태라 말을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아마 성대에 문제가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얼굴에는 성인 여성 기준으로 손바닥 크기의 오래된 듯한 화상 흉터가 이마와 눈꺼풀에 걸쳐 있기 때문에 청소년기 때 화재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을 유심히 살펴봐주시기 바랍니다. 성대 문제도 이때 발생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흉터를 감추기 위해 늘 모자를 착용했을 것이고, 남들과 다른 외모가 자신감 결여에 큰 몫을 했을 겁니다. 더 자세한 건 내일 강당에서 발표할 예정이니까 그때 말씀드릴게요. 일단은 꼭 아셔야 될 엑기스만 뽑았어요.”
“오케이. 자, 다음은 큐. 화면에 씨씨티비 영상 캡처 이미지랑 3D 몽타주 띄워줘.”
“넵. 지금 띄웁니다. 일단 수사 초기부터 지금까지 몽타주 드로잉 자료만 최소 세 장이길래 이미지를 겹쳐봤더니 제일 비슷한 느낌은 첫 번째였어요. 그 아주머니가 말씀하신 인상과도 상당 부분 일치했습니다.”
“범인의 인격이 형성될 쯤에 화재사고를 겪은 거 같던데 국내 화재사고 검색은?”
“그것도 이미 끝냈죠!”
의기양양하게 대답한 창민이 덧붙였다.
“대략 중고등학생 때를 기준으로 잡아서 돌렸더니 인명피해가 커서 기사가 났던 건으로는 1995년 마리아 고아원 화재와 1997년 서순 화학 발전소 화재, 1998년 캐슬 사우나 화재 이렇게 세 건이 있었습니다. 작은 화재 사고들은 가정에서 일어난 거라 특별히 의심되는 사항이 없었어요. 아무래도 고아원 화재가 유력하겠다 싶어서 자료를 더 모아봤는데 워낙에 기사가 적더라고요. 생존자는 단 두 명이었다네요. 1995년 당시에 열 살 이었던 지아연 양과 열두 살이었던 최차성 군입니다. 혹시 모르니 만나보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둘 다 안산에서 거주하는데 오늘은 수원 한마음 요양원에 가는 날이라고 합니다. 봉사 활동을 하나 봐요. 안산에 들를 필요 없이 바로 수원으로 가시면 될 거 같아요.”
“그럼 선우랑 주연씨는 나 따라오고. 찬희는 계속 자료 수집하면서 프로파일링에 신경 써줘. 큐는 추가로 용의자 정보 찾아내면 전화 주고.”
“알겠어요.”
“다녀오세요. 형사님.”
대답하는 찬희와 창민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재현이 양옆으로 주연과 선우를 달고 사무실을 나섰다. 기껏해야 쪽잠 두 시간 정도로 버티는 재현이 안쓰러웠는지 이번엔 선우가 운전대를 잡았다. 요양원이 있는 수원으로 가는 동안 재현도 주연도 눈을 붙였다. 잠깐 동안 선잠이 들었던 주연은 꿈에서 그 여고생을 봤다. 재현이 늘 지니고 다니던 진주 머리핀을 옆머리에 사선으로 꽂은 채로 활짝 미소 짓는 그녀를 보자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났다. 연기처럼 흐려지는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점점 선명해졌다.
“주연씨. 주연씨! 괜찮아요?”
언제 도착했는지 뒷좌석 문을 활짝 열어젖힌 재현이 주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얼굴이 축축한 느낌이 든다. 재현은 주연이 멍하니 바라보자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손가락으로 주연의 눈가를 훔쳐냈다. 꿈에서만 운 줄 알았는데 실제로도 눈물을 흘린 모양이었다.
“왜 울어요. 혹시 능력 쓰는 게 힘들었어요? 나 때문에 무리했어요?”
주연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질문을 쏟아낸 재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혹시라도 힘들면 참지 말고 말해줘요. 알겠죠. 주연씨는 우리만큼 안 하고 쉬엄쉬엄 도와줘도 돼요.”
재현의 다정한 당부에 힘없이 고갤 끄덕인 주연이 커다란 손으로 마른세수했다. 지하주차장에서 걸어 지상으로 올라오자 한마음 요양원 건물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규모가 꽤 되는 요양원이었다. 건물 안에 들어서자 햇살 같은 미소를 장착한 데스크 직원이 인사와 함께 반겼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서울지방경찰청 수사과 미제사건 담당 강력1팀 김선우 형사입니다. 혹시 여기에 지아연 씨, 최차성 씨 있습니까. 오늘이 봉사 활동 나오는 날이라고 하시던데.”
“맞아요. 방금 도착해서 들어갔어요. 불러드릴까요?”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셋이서 요양원 내부를 둘러보고 있으니 곧이어 데스크 직원과 나란히 나온 남녀가 꾸벅 인사하며 눈치를 봤다. 경찰이 찾아왔다는 말에 놀라서 겁부터 먹은 듯했다. 지아연과 최차성은 이름을 알아보기 쉽게 왼쪽 가슴께에 명찰도 달고 있었다.
“저희를 찾으셨다고요?”
“네! 안녕하세요. 다른 게 아니라 1995년 마리아 고아원 화재에 관해서 여쭤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갑자기 그 일은 왜요? 한참 지났잖아요.”
“그 화재 사건보다 관련된 인물에 관한 수사를 진행 중이어서요. 혹시 다른 생존자는 없었나요? 아니면 당일에 행방이 묘연해진 원생이라든가.”
선우의 말을 듣던 아연이 뭔가 생각났는지 조그맣게 말아 쥔 주먹으로 제 손바닥을 가볍게 내리쳤다.
“아. 딱 한 명 있어요. 중학생이었는지 고등학생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교복을 입던 오빠였고, 이름은 기억이 안 나요. 그날 제가 소방관 아저씨께 안에 한 사람 더 있다고 말했는데 찾으러 들어가셨다가 건물이 무너져서...... 그 뒤론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그 형은 안 죽었을 거예요. 불이 다 꺼진 뒤에 소방관 아저씨 시신은 찾았는데 그 외에 다른 시신은 없었다고 그랬어요. 소방관 아저씨도 그 형 때문에 죽었을지도 몰라요. 그 형이랑 단둘이 남으면 항상 상대방만 다치거나 아팠거든요. 길고양이도 맨날 꼭 한 마리씩 잡아서 죽이고... 아무튼 무서운 사람이었어요.”
아연에 이어 차성도 거들었다.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당시 무서웠던 점을 아직까지도 자세히 늘어놓을 정도라면 주의 깊게 살펴볼 이유가 충분했다. 더군다나 어릴 때부터 동물학대를 일삼고 심심풀이로 죽였다면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일 가능성이 높았다. 혹시 그때 사진이나 영상이 있을까요? 재현이 묻자 눈동자를 데로록 굴리던 아연이 사물함에 넣어놨던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사진은 아닌데 고아원에서 물놀이 갔을 때 캠코더로 찍었던 영상이 제 노트북에 있어요. USB 갖고 계세요? 바로 옮겨드릴게요.”
“어어! 저 있어요! 가져왔어요!”
선우가 후드 주머니를 뒤져서 내놓은 USB에 비디오 파일이 천천히 복사되기 시작했다. 와, 진짜 대박이다. 우리 이번에 이 새끼 잡을 수 있을 거 같죠. 심장 존나, 아아니, 겁나 뛰어요. 지금. 선우의 호들갑에 한숨을 푹 내쉰 재현이 손으로 선우의 머리를 눌렀다. 알겠으니까 그쯤 떠들고 입 다물라는 뜻이었다. 선우의 머릴 손바닥으로 꾹 내리누르더니 신난 강아지 진정시키듯 쓰다듬는 재현을 바라보면서 주연은 괜히 자기 앞머리나 만지작댔다. 이 형사님은 머리 쓰다듬는 게 습관인가. 특별한 행동인 줄 알고 기분 좋았는데.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제 앞머릴 잔뜩 흐트러뜨리면서 웃던 재현의 귀여운 표정을 떠올린 주연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재현과 관련된 여러 생각들이 그렇잖아도 과부하 걸린 머릿속을 자꾸만 파고든다. 불청객처럼 들이닥친 호감 때문에 마음이 비좁았다.
“주연씨 괜찮아요? 아까부터 안색이 영 안 좋네. 열나는 건 아니죠?”
재현이 다정한 질문과 함께 살며시 주연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데.... 혼잣말 중얼거리더니 고개 숙이면 입술 닿을 거리에서 걱정을 퍽 진지하게도 한다. 없던 열도 오를 것 같았다. 아까보다 얼굴이 불긋해진 주연이 잠자코 손길을 받고 있는 사이에 USB를 도로 건네받은 선우가 씩씩하게 외쳤다.
“협조 고맙습니다! 형님. 우리 얼른 가서 이거 창민이 형한테 분석 맡겨요.”
“밖에선 형님 말고 형사님.”
“아. 넵. 이 형사님. 이만 사무실로 돌아가시죠.”
“감사합니다. 수고하십쇼. 혹시 추가로 더 기억나는 게 생기면 이쪽으로 연락 주세요.”
주연의 이마에서 손을 뗀 재현이 명함을 건네며 인사한 뒤에 선우와 주연을 챙겨 요양원을 나섰다. 돌아가는 길에는 재현이 운전을 했다. 선우는 조수석에 저 대신 주연을 앉힌 재현에게 가는 길 내내 투덜거렸다. ‘몇 년을 알고 지냈는데 어떻게 나를 뒤에 태울 수가 있어요?’ 부터 시작해서 ‘이제 나보다 주연씨가 더 특별하다 이건가?’ 까지 별 소리를 다 해댔다. 심지어는 거기다 대고 재현이 ‘뒤에 좀 태울 수도 있지. 내 차 조수석 전세 냈냐?’ 쏘아붙이고 ‘주연씨가 좀 특별하긴 하지.’ 일일이 대꾸하는 바람에 더 삐졌다. 선우는 도착하자마자 차에서 내리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그대로 쌩 들어가 버렸다.
“김 형사님 진짜 화나신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냥 놔두면 혼자 풀려서 또 달라붙어요.”
재현이 익숙하다는 듯이 대꾸하며 주연에게 짜장면? 짬뽕? 물었다. 저 짜장면이요. 일단 대답한 주연이 재현을 뒤따라 걸었다. 예상대로 저녁은 중국집 배달음식이었다. 선우는 어느새 재현의 등 뒤에 찰싹 붙어서 “저는 두 개 다 먹고 싶으니까 짬짜면! 탕수육 제일 큰 걸로 시켜줘요!” 이러고 있었다. 역시 재현의 말은 틀리는 일이 없다. 식사를 하는 동안엔 왁자지껄하게 각자의 이야기를 했다. 수사 내용을 제외하고 다 함께 모여서 떠드는 건 처음이었다. 며칠 내내 질리도록 수사에 관한 의견만 나누다가 사적인 주제로 대화를 주고받는 분위기가 즐거웠다.
“아, 엄마 보고 싶다.”
“손영재 쟤 진짜 마마보이라니까.”
“야. 울 엄마는 미국에 있는데 당연한 거 아니냐? 지는 집 가면 바로 볼 수 있으면서.”
“그건 그렇지. 다들 가족 얼굴 본 지 얼마나 됐어요?”
“나는 이거 각 잡고 수사 시작한 뒤로 한 번도 못 봤어.”
“나도.”
“난 어제 영상통화 했어!”
“아니. 창민이 형. 영상통화 말고 직접 본 거요.”
“직접? 직접 본 건 세 달 넘었는데.”
주연은 다들 한마디씩 하는 와중에 혼자만 침묵했다. 주연이 가족 얘기에 딱히 반응하지 않자 눈치를 살핀 재현이 창민에게 넌지시 물었다.
“창민이 너 여친이랑은 언제 봤어.”
“여친은 어제도 봤어요. 도시락 싸서 가져왔더라고요. 진짜 일등 요리사.”
“어후. 또 자랑 시작이네. 니 여친이 진짜 요리사인 거 누가 모르니.”
“응. 주연씨는 몰랐을 걸.”
“며칠 전에 합류했는데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해?”
다행히 창민도 찬희도 거기에 홀라당 넘어가서 창민의 여자친구 얘기로 투닥거리다가 저녁식사가 끝났다. 선우와 영재는 다 먹은 그릇을 정리하면서 주연을 힐끔댔다. 주연의 표정이 눈에 보이게 어두워진 탓이었다. 팀에 합류한 뒤로 늘 은은하게 웃고 있던 주연이 표정을 굳히고 조용히 있으니까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다. 재현도 주연의 표정 변화를 눈치 챘는지 주연의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주연씨. 나랑 한 바퀴 걷고 올래요? 소화도 좀 시킬 겸.”
“아, 네. 좋아요.”
자리를 털고 일어선 주연과 재현이 사무실을 나섰다. 한 바퀴 걷는다고 해봐야 경찰서 건물 앞이나 어슬렁대는 정도였지만 식사 후에 바로 일을 시작하는 것보단 나았다. 바깥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던 주연이 긴 한숨을 뱉어냈다. 몇 번 반복하고 나니까 그나마 숨통 트이는 기분이 든다. 모두 웃으며 가족 얘기를 하고 부모님이나 형제를 그리워할 때마다 주연은 할 말이 없었다. 재현은 주연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제 뒷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가족 얘기 별로 안 좋아하죠.”
“......티가 많이 났나요.”
“많이는 아니고 조금? 근데 나한테나 보였지. 다른 녀석들은 아마 몰랐을 거예요.”
“아, 다행이다.”
“생각보다 비슷한 데가 많은 거 같네요. 우리.”
“그런가요.”
“가족 얘기 잘 안 하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요.”
싱긋 웃어 보인 재현이 주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연의 능력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청한 악수였다. 역시 거절할 수가 없다. 잠깐 망설이던 주연이 제 앞에 내밀어진 재현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재현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꽉 붙잡으며 악수했다. 하나부터 백까지 자신을 전부 읽힐 수 있다는 걸 인지하면서도 재현은 망설이지 않았다.
“나랑 더 친해질래요?”
“.......”
“공통점이 많다는 건 좋은 사이가 될 수 있다는 신호거든요.”
맞잡은 손에 서서히 온기가 번졌다.
“주연씨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요. 나는 주연씨가 마음에 들어요.”
“......도요.”
“네? 잘 안 들렸어요.”
“저도요. 형사님이 좋아요.”
마음에 든다는 말을 좋다는 표현으로 바꿔서 대답한 주연이 재현을 마주봤다. 낯간지럽게도 손 꼭 붙잡은 채 눈을 맞추는 낭만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재현은 살짝 민망했는지 큼큼 헛기침하더니 주연과 다시 시선이 마주치자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고른 치열과 뾰족하고 작은 송곳니가 활짝 지어진 웃음 사이로 드러난다. 주연은 그런 재현이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해본 적조차 없으면서 사랑과 닮은 수식어를 자꾸만 붙이고 싶다.
“이 형사님! 긴급, 긴급! 빨리 들어오세요!”
두 사람의 손을 떨어트린 건 다른 게 아니라 창민의 다급한 부름이었다. 재현과 주연이 사무실로 뛰어 들어가자 차장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차장님이 왜 여기에 계세요?”
“긴급이라고 하면 내 호출인 거 바로 알아야지. 최종 프로파일링 완성이라길래 퇴근 전에 공지하고 얼굴도 볼 겸 해서 왔다. 내일 아침 아홉 시까지 강력반 전 인력 모아서 강당으로 집합해. 프로파일링 발표 끝나면 해당 지역 경찰서마다 지원 요청할 테니까 수색 범위 좀 좁혀보자고. 유전자 감식 결과랑 영상 대조 결과는 아직이야?”
“유전자 감식은 결과 나오는 대로 메일로 전송해주신다고 했고. 영상 대조는 창민이가 아직 애쓰는 중입니다.”
“그래. 고생한다. 그리고 니들 다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텐데 오늘밤엔 집 가서 좀 쉬어라. 내일부터는 더 정신없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차장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올리고 뒤돌아선 재현이 곧바로 찬희부터 찾았다. 어느 틈에 최종 프로파일링을 마치고 차장 책상 위로 보고까지 올린 건지 대견해 죽겠다. 창민과 함께 머리 싸매고 계속 정보를 더해가며 프로파일링에 집중하더니 일처리가 이렇게 야무질 수가 없다. 찬희가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제 입으로 직접 범죄행동분석팀에서 제일 똑똑한 프로파일러라고 말하는 데에는 다 근거가 있었다.
“얌마. 최찬희.”
“왜요. 천재라는 칭찬 이제 식상하니까 정중히 사양할게요.”
“틈을 안 주네. 아무튼 넌 최고다. 찬희야.”
“안다니까요.”
계속 칭찬을 마다하는 찬희에게 재현이 엄지를 달랑달랑 흔들어 보였다. 차장이 일찍 들어가라고 직접 당부했지만 맘 편히 쉬기엔 아직도 확인할 게 많았다. 기지개와 함께 한숨을 푹 내쉰 재현이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범인이 거주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미리 체크한 재현이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찬희야. 내일 발표할 프로파일링 내용 좀 미리 알려줘.”
“그럴까요? 어디 보자. 범인은 2006년 범행 당시 23세에서 28세 사이로 예상돼요. 그러니까 지금은 38세에서 43세 정도겠죠? 신장은 작은 편. 최소 165에서 시작하고 175를 넘지 않아요. 주거지는 일정하지 않지만 경상도 지역 사람인 건 확실하고요.”
“하아. 이건 뭐... 잔디밭에서 바늘 찾기네.”
“초반엔 다 그렇죠. 그래도 유전자랑 감식이랑 영상 대조 결과 나오면 확 풀릴 거예요.”
찬희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대꾸하더니 창민의 도시락 통에서 꺼낸 복숭아를 한입 베어 물었다. 상쾌한 아삭, 소리와 함께 찬희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찬희가 좋아하는 말랑한 복숭아가 아니라 딱딱한 복숭아였다. 일단 깨문 복숭아 반쪽을 마지못해 으적으적 씹던 찬희가 남은 반쪽을 재현의 입에다 무작정 밀어 넣었다. 재현은 때마침 늘어지게 흐아암 하품하다 말고 입 안에 쏙 들어온 복숭아를 씹으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냐...?”
“이거 너무 딱복이어서 먹기 싫어요.”
“그런다고 니가 먹던 걸 나한테 줘?”
“뭐 어때요.”
“너 때문에 하품하다가 끊겼잖아. 아. 찝찝하게.”
“좀 있으면 졸려서 또 나올 거예요. 기다려요.”
재현이 투덜대자 찬희가 샐쭉 웃으며 받아쳤다. 선우는 복숭아를 집어먹으면서 찬희와 재현을 구경하다가 문득 주연이 어딨는지 둘러봤다. 주연은 사무실 구석의 소파에 기대어 앉아서 졸고 있었다. 커다란 몸을 한껏 구긴 채 자는 둥 마는 둥 조는 모습이 왠지 짠하다. 경찰도 형사도 아닌 일개 대학생이 여기까지 와서 별 고생을 다 하네. 재현이 형은 저렇게 호구처럼 착한 녀석을, 심지어 국내에선 알려지지도 않은 사이코메트리 능력자를 어디서 찾아가지고 데려왔지? 하여튼 어떻게든 인생 잘 풀리는 형님이라니까. 주연을 보면서 곰곰이 생각하던 선우가 손등으로 재현의 팔을 툭툭 쳤다.
“재현이 형.”
“어? 왜.”
“벌써 며칠째 제대로 못 잤죠. 사무실에서 자지 말고 집 들어가서 편하게 눈 좀 붙여요.”
“나 괜찮은데.”
“차장님 말씀 못 들었어요? 괜찮긴 무슨. 눈 다 풀렸는데. 형 지금 사슴 눈 아니고 동태눈이다. 동태눈.”
“야. 이렇게 맑고 예쁜 동태눈이 어딨어.”
“뭐래. 그래서 저 친구도 안 재울 거예요? 우리야 뭐 철야 근무 짬밥 있어서 버틸 만하다지만 저 친구는 다 죽어가잖아. 합류한 뒤로 사이코머시기 그 능력도 오지게 쓰고 있구만.”
“어머. 쟤 지금 사이코메트리 명칭 몰라서 저렇게 말한 거야? 미치겠다.”
“아니. 그리고 너 임마. 오지게가 뭐냐. 오지게가.”
“암튼요. 쟤 좀 케어하라고요.”
찬희와 재현의 잔소리를 각각 하나씩 적립한 선우가 손가락으로 주연을 가리켰다. 그제야 꾸벅꾸벅 졸고 있는 주연을 발견한 재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맞네.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다.”
“알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잔소리 그만해. 이 자식아. 들어가서 쉬고 오면 되잖아.”
“그래요. 빨리 가. 빨리. 쟤랑 같이.”
“알았어. 알았어.”
선우의 잔소리에 귀 틀어막는 시늉을 한 재현이 주연의 앞으로 서서 어깨를 잡았다. 주연은 갑작스러운 손길 때문에 화들짝 깨어나 재현을 올려다봤다. 많이 놀랐는지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말보다 행동이 먼저인 사람이어서 뜻하지 않게 주연을 자주 놀라게 만들고 만다. 눈썹을 여덟팔자로 끌어내린 재현이 한껏 미안쩍은 표정을 지었다. 재현의 투명한 반응 때문에 괜스레 제가 더 미안해진 주연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어디 갈 곳 있어요?”
“집이요. 이제 퇴근할 거예요. 데려다줄 테니까 일어나요. 일단 오늘은 가서 푹 자고! 내일 출근해서 또 달립시다.”
“이 형사님은요? 형사님도 집으로 가시는 거예요?”
“저도 가야죠.
“아, 그럼 갈게요.”
“왜요. 나 안 가면 주연씨도 안 가려고 그랬어요?”
“네.”
재현이 장난기를 담아 묻자마자 대답한 주연이 소파에 폭삭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주연에게서 시원하면서도 묵직한 향수 냄새가 났다. 주연이 갑자기 벌떡 일어난 탓에 얼굴이 너무 코앞이었다. 당황해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난 재현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출발해요?”
주연이 겨우 뜬 눈을 비비며 물었다. 재현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다크써클이 짙어진 주연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주연이 며칠간 느꼈을 피로가 다 저 때문인 것만 같다. 제게는 이 사건이 책임감과 직결된 오랜 숙제지만 주연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렇게까지 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기특해서 품에다 넣고 꽉 끌어안아주고 싶다가도 조그만 접촉에도 흠칫거리는 주연을 생각하면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멈추게 된다. 그래도 한 번 더 따뜻하게 닿고 싶은 마음은 멈출 길이 없어서,
“주연씨. 팔 잡아도 되죠?”
“네?”
“안 된다고 해도 무의식적으로 잡을 거 같긴 한데. 아까처럼 놀랄까봐 일단 미리 말하는 거예요.”
말을 마친 재현이 자연스럽게 주연의 팔을 붙잡았다. 주연은 기습 같은 재현의 스킨십에도 익숙해졌는지 군말 없이 뒤따라 걸으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저만큼 커다란 주연을 꼭 조그만 반려동물처럼 챙겨 다니는 모양새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제법 잘 어울린다. 실상 적당히 말하자면 누구든지 재현이 앞장서는 그림에 들어가면 부조화가 없기는 했다.
재현이 차키를 누르자 자연스레 조수석에 탄 주연이 길쭉한 팔을 뻗어 운전석 문을 열었다. 차문이 무슨 자동문처럼 알아서 활짝 젖혀졌다. 재현은 얌전히 앉아 저를 기다리고 있는 주연을 빤히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제는 먼저 차에 타서 문도 열어주는구나. 양끝이 예쁘게 말려 올라간 입을 꾹 다물고 졸려하는 표정이 고양이 같네. 다 큰 성인이, 심지어 저와 비슷하게 커다란 남자가 이 정도로 귀여워 보일 수도 있구나. 진짜 귀엽다. 잠시 주연의 옆모습을 감상하던 재현이 드디어 운전석에 앉았다. 두 사람 다 안전벨트를 착, 소리 나게 꽂고 나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었다. 미리 맞추지 않아도 동일한 행동을 하고 나면 꼭 실없이 웃음이 났다. 두 사람 다 특별한 얘길 하지는 않았지만 분위기가 한층 더 따스해졌다. 내비게이션에 주연의 집주소를 찍은 재현이 한 손으로 핸들을 부드럽게 돌렸다.
길고 긴 여름해도 어느새 완전히 졌다. 바깥이 꽤 캄캄했다. 재현은 라디오를 작게 켜놓고 운전에 집중하다가 룸미러로 주연을 쳐다봤다. 하도 피곤해하길래 잠들었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주연은 창밖으로 스쳐가는 한강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연의 까맣고 짙은 눈동자에 밤의 불빛들이 잠깐씩 맺히다가 흐려진다. 그 얼굴이 그렇게도 쓸쓸해 보였다. 아무 연고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듯한 표정을 지은 채로 침묵하는 주연의 이름을, 이 애를, 부르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았다.
“주연씨.”
재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눈을 힘주어 뜬 주연이 고갤 돌렸다.
“네. 이 형사님.”
느릿느릿 숨소리를 섞어 대답하는 목소리가 아까보다 깔깔하게 잠겨 있었다.
“괜히 나 도와준다고 했다가 엄청 고생하네요.”
“아니에요. 저는 형사님을 도울 수 있어서 기뻐요. 바른 일 하려고 애쓰시는 거잖아요.”
“그쵸. 바른 일.......”
재현은 주연이 한 말을 곱씹다가 덧붙였다.
“진짜 마지막 기회인데... 이번엔 범인을 잡을 수 있을까. 미정씨랑 미정씨 어머니의 한을 풀어드릴 수 있을까. 내가 이걸 끝까지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하고 의심해요. 완전 가오 빠지죠. 하나도 안 멋있죠. 내가 이런 생각 하는 거, 우리 팀원들이 알면 기겁하면서 놀릴 걸요.”
말을 마친 재현이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로 하하 웃었다. 주연은 빨간불 신호등에 맞춰서 정차하는 재현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이윽고 재현의 뺨에 붙어 있던 속눈썹 한 올을 살살 털어 떼어낸 주연이 말했다.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리고? 뭐지. 왜 말을 하다 말아요.”
“..........”
“말 안 할 거예요? 나 궁금해서 잠 못 자는데. 그럼 내일 엄청 피곤하고 힘들 텐데.”
주연은 으름장 놓듯 보채는 재현을 놀리듯 미소만 짓다가 입을 열었다.
“형사님은 항상 멋있어요. 제 눈엔 그래요.”
대답과 함께 활짝 웃는 주연의 눈매가 접히며 가늘어졌다. 마음을 사르르 녹이는 눈웃음에 잠시 넋을 놨던 재현은 뒤에서 울리는 클랙슨 소릴 듣고 나서야 다시 정신을 차렸다. 신호등이 어느새 초록불로 바뀌어 있었다.
“말뿐이라도 그렇게 해주니까 힘이 나네요.”
“진심이에요.”
진실을 말할 때면 훨씬 더 확고해지는 태도가 재현의 마음을 콕콕 찌르면서 간지럽힌다. 언제나 장난기 넘치고 쾌활하지만 막상 칭찬을 받으면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재현이 “고마워요....”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주연은 한껏 쑥스러워하는 재현을 쳐다보다가 새빨개진 귓바퀴를 발견하곤 푸스스 웃었다. 멋있다는 말에 얼굴을 온통 붉히는 재현이 사뭇 귀여웠다. 몇 마디 더 주고받는 사이에 벌써 주연이 사는 동네에 다다랐다. 비상등 버튼을 누르고 빌라 입구 앞에 잠시 차를 세운 재현이 짐짓 어른스러운 목소릴 냈다.
“들어가서 푹 자고 내일 아침 여덟시 반까지 나와요. 데리러올게요.”
“저기, 이 형사님.”
“네? 왜요. 주연씨. 뭐 문제라도 있어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뭔데요. 괜찮으니까 편하게 말해요.”
“잠깐 들어왔다 가실래요?”
“손님 막 데려가도 괜찮아요? 부모님한테 안 혼나요? 아, 스물넷이면 혼날 나이는 아닌가.”
“부모님 안 계세요. 저, 혼자예요.”
재현이 주연과 마주친 눈을 두 번 깜빡였다. 주연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대답이 조금 더 깊은 뜻으로 해석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연은 내뱉은 말의 심연에 비하면 한참 얕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재현이 이윽고 다시 핸들을 잡았다.
“그럼 주차 제대로 할게요.”
/
주연이 사는 빌라는 주연의 성격을 닮아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색깔이 많지 않아서 살짝 삭막하게 보이는 공간인데도 어쩐지 아늑한 느낌이 드는 게, 이마저도 주연을 닮았다. 그나마 방을 꾸미는 소품이라고 할 만한 것은 향초와 조그만 무드 등뿐이었다.
“나처럼 아예 따로 사는구나. 주연씨도 집 오면 심심하겠네요.”
“저는 밖에서도 혼자니까 별 차이 없어요.”
“와, 향초 엄청 많다. 이런 거 좋아해요?”
“네. 마음이 편해지거든요.”
“무드 등은요?”
“아, 제가 어릴 때부터 어두운 걸 무서워해서... 생긴 거랑 좀 안 어울리죠.”
재현의 질문마다 재깍재깍 반응하던 주연이 별안간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재현에게 의외의 모습을 보이게 될 때면 유난히 더 부끄럽다.
“생긴 게 뭐 어때서요. 전부 다 따뜻하고 분위기 있고 주연씨랑 잘 어울리는데? 주연씨는 너무 자기를 낮추는 경향이 있는 거 같애.”
존댓말과 반말을 적절히 섞어서 대답한 재현이 맑게 웃었다. 주연은 부엌에서 꼼지락거리더니 따뜻하게 데운 우유 두 잔을 가져왔다.
“갑자기 웬 우유? 우유 좋아해요?”
“네. 형사님은요?”
“좋아하는 것까진 아닌데 주면 잘 먹어요.”
“따뜻한 우유가 수면에 좋대요.”
따뜻한 우유가 수면에 좋다는 건 건강을 유난스레 챙기는 어머니한테 들었던 정보였다. 재현의 인생에서 이런 팁을 알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챙기는 20대 남자는 처음이었다. 당장 주변만 둘러봐도 따뜻한 우유보다는 영양제나 건강즙을 챙겨 먹는 사람이 더 많았다. 아, 설마 이것 때문에 올라왔다 가라고 한 건가. 잠을 잘 잤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나 보다.
“그런 것도 알아요?”
테이블 위로 팔을 얹고는 불쑥 거릴 좁힌 재현이 사슴 같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물었다. 주연은 한참 뜸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식기 전에 드세요.”
우유가 든 잔을 재현의 앞으로 슬쩍 더 밀어주고 나서 뒷목을 주무르는 주연의 커다란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재현은 주연이 말한 대로 우유가 식기 전에 부지런히 마셨다. 무더운 여름밤에 따뜻한 우유를 마시기는 처음이었다. 재현이 콧잔등에 배어난 땀을 손등으로 두드리자 주연이 바로 에어컨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시원한 바람이 금세 공기를 식혔다.
“언제부터 혼자 살았어요?”
“혼자 살기 시작한 건 스무 살부터요. 이모네에서 지내다가 대학교 일 학년 첫 학기 때 독립했어요.”
“그렇구나. 그럼 생활비는 이모님이 책임지시는 거예요?”
“아뇨. 성인 된 뒤로는 가끔씩 용돈만 보내주세요.”
“근데 용돈 받는 정도로는 이런 집에서 혼자 살기 빠듯하지 않나?”
“아, 괜찮아요. 예전에 수령해서 저금해놨던 부모님 보험금도 있고... 아르바이트해서 직접 버니까 충분하거든요.”
주연이 태연하게 늘어놓은 문장 속에서 ‘부모님 보험금’이라는 표현이 유난히 튄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다른 가족한테 얹혀살다가 독립한 거구나. 가족 얘기에 표정이 침울해지고 말을 아끼는 이유가 있었구나. 머릴 재빨리 굴린 재현이 쩝, 쓴 입맛을 다셨다. 이 일이 끝나면 자신의 급여에서 반쯤 더 떼어 주연에게 주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혹여나 동정하는 걸로 인식하면 어쩌나 걱정된다.
“주연씨.”
“네?”
“수사 도와주는 것도 일종의 아르바이트인 거 알죠?”
“그랬나요? 저는 그냥 형사님이 좋아서 도와드리려던 건데....”
주연의 대답을 듣던 재현이 방긋 웃었다. “저 좋아요?” 묻는 목소리에 그새 또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주연은 고양이를 닮은 눈으로 지그시 재현을 바라보더니 두어 번 고갤 끄덕이곤 언제나처럼 미소 띤 얼굴로 “좋아요.” 대답했다. 재현은 저도 모르게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에두르지 않는 주연의 표현방식이 재현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아이의 것이나 다름없는 일차원적인 표현이 유치하긴커녕 사랑스럽게 들린다. 스물네 살의 성인 남성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다니. 오글거리는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닌데도 주연과 있으면 꼭 그렇게 된다. 온갖 수사에 매달리느라 한동안 메말랐던 연애 감정조차 슬그머니 고갤 내밀 정도니 말 다 했다. 만약 선우나 영재가 이 장면을 목격했다면 과로 때문에 드디어 미쳤냐면서 어떻게 자기들 또래의 사내새끼한테 사랑스럽다는 단어를 쓰냐고 비명부터 내질렀을 거다. 실은 재현이 남자를 좋아하는 성 지향성을 가졌으리라곤 꿈에도 상상 못할 테니까. 아무튼 그건 그거고. 재현이 주연에게 확실하게 말해둬야 할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나도 주연씨 좋아요. 그래도 금전 문제는 확실하게 합시다. 내 팀원으로서 수사 돕는 중이니까 급여 나오면 꼭 받아요. 알겠죠.”
“저 진짜 괜찮아요. 이 형사님.”
“안 돼요. 내가 안 괜찮아요.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요. 주연씨도 우리처럼 발로 뛰고, 잠 못 자고, 같이 고생하는 게 있는데 당연히 상응하는 보수를 받아야죠.”
재현과 눈을 맞추던 주연이 곧바로 돌아온 야무진 대꾸에 살며시 미소 지었다. 단단하면서도 섬세하고, 살짝 발끈할 때가 있지만 실상 다정하기 그지없는 재현의 성격이 신기했다. 주연에게 있어서 재현은 이제까지 봐 온 여느 타인과 달랐다. 처음 겪는 유형이었으나 주연의 마음에 쏙 들었다는 건 굳이 짚을 필요조차 없었다. 거리감 혹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 유일무이한 대상이다. 주연은 재현의 최대 장점인 동시에 아마도 유일한 단점일 인정(人情)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을 선뜻 사랑하고 쉽게 미워하지 않는 선한 마음씨. 주연이 가장 대단하다고 여기는 점이었다.
두 사람은 틀어둔 TV 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리는 거실에 나란히 앉아서 꽤 긴 시간을 대화했다. 주연이 감추려 애썼던 가족 얘기, 유년시절의 자잘한 추억과 재현이 형사가 된 뒤로 갖게 된 좋은 기억, 싫었던 사건, 늘 지니고 다니는 그 진주 머리핀에 관한 이야기까지 오갔다. 캐묻지 않아도 먼저 자세히 털어놓는 재현의 배려 덕분에 주연도 조금씩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주제가 부모님일 땐 마치 어린아이 시절로 돌아간 듯이 훌쩍거렸다. 재현은 사무치게 슬프지 않더라도 어떤 주제에 관해서는 반사적으로 쏟아지는 눈물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경찰이라는 직업을 가지면서 여러 형태의 슬픔을 느끼고 더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재현이 손끝으로 주연의 눈물을 살며시 훔쳐냈다. 미지근한 눈물이 재현의 손가락을 적셨다. 며칠 전만 해도 주연에게 이 정도로 마음이 쓰일 줄은 몰랐는데. 알면 알수록 주연이 애틋했다.
“주연씨 뚝. 여기서 더 울면 엄청 부어서 내일 눈 뜨기 힘들 걸요?”
“그러게요. 큰일 났다....”
재현의 말에 힘없이 푸스스 웃으며 대답한 주연이 잔뜩 붉어진 눈가를 문질렀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서 이만큼 울어보긴 처음이다. 주연에게 있어선 기념비적인 감정의 교류였다. 재현의 앞이어서 더 의미가 남달랐다. 재현과 함께 있으면 신기하게도 긴장이 풀어지고 평소보다 많은 것들을 말하게 된다. 이건 어떤 마음인 걸까. 주연이 재현을 생각하며 골똘해진 사이에 재현은 소파에 등을 기대더니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 떠드니까 졸리네요. 주연씨, 혹시 새 칫솔 있어요?”
“네. 드릴까요?”
“어. 빌려줘요. 나중에 갚을게요.”
“안 갚으셔도 돼요. 여기요. 먼저 씻으세요.”
주연이 서랍에서 꺼낸 칫솔을 받아든 재현이 욕실로 들어갔다. 재현은 말끔하게 씻고 나오더니 살짝 젖은 앞머리를 털어내며 “나 그냥 여기서 자고 내일 같이 출근해도 돼요?” 물었다. 역시 털털하고 시원한 성격이다. 주연은 흔쾌히 고갤 끄덕이고는 소파 위에 이불을 깔았다.
“형사님이 침대에서 주무세요. 저는 소파에서 자도 돼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주인이 침대에서 자야죠. 얼른 올라가서 누워요. 내가 불 끌게요.”
짐짓 어른 행세하듯 쓰읍, 바람을 들이마신 재현이 가서 빨리 누우라는 표정으로 고갯짓했다. 잠시 버퍼링 걸린 것처럼 제자리에 서서 안절부절 못하던 주연은 결국 재현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침대로 올라갔다. 재현은 주연이 누워서 이불 덮는 모습까지 확인한 뒤에야 불을 끄고 소파에 누웠다. 등을 대고 제대로 누우니 며칠간 누적된 피로가 파도처럼 와르르 밀려왔다.
“잘 자요. 주연씨. 내 꿈 꿔요.”
“아하하.”
“뭐야. 왜 그렇게 웃어요. 싫어요?”
“아뇨. 좋아서요. 좋아서 웃은 거예요.”
“그쵸. 당연히 그래야죠.”
“안녕히 주무세요. 이 형사님.”
“주연씨도요.”
실없는 장난과 살가운 굿나잇 인사를 마지막으로 주연도 재현도 언제 곯아떨어졌는지조차 모르게 까무룩 잠들었다. 엇갈리다가도 이따금씩 겹치는 숨소리가 유난히 포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