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struck
2024
5th Juyeon Hyunjae Webzine

Watch stars, we can count’em from the rooftop. I just want you baby I don't need nobody else here.
Gotta show you off, but later keep you to myself.

 

 

 

 

 

이 이야기는 픽션이며 실제 사건, 단체, 지역 및 지명과 관계없습니다.

 

 

 

 

 

종종 악몽을 꾼다. 배경은 기억 속에 봉인된 오래 전의 케케묵은 기억. 어린 아이가 남자에게 갈색 허리띠로 얻어맞는 장면이 재생된다. 술 냄새와 폭력에 찌든 집에 갇혀 울다가 지쳐 잠든 아이는 꿈속에서 또 꿈을 보았다. 별안간 화면이 휙 전환되더니 그 허리띠를 맨 남자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언젠가의 예지몽이 나타났다. 온몸의 관절이 기괴하게 꺾어진 채로 도로에 널브러진 남자와 눈이 마주친 그 찰나.

 

히익! 숨을 집어삼킨 주연이 핏발 선 눈을 번쩍 떴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또다. 내용을 외울 정도로 익숙한 악몽을 꾼다는 건, 그날이라는 뜻이다. 핸드폰으로 날짜를 확인한 주연이 거칠게 마른세수했다. 주연이 생각하는 혹시는 언제나 역시가 된다. 오늘은 2021731.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열두 살 주연의 예지몽대로 세상을 떠난 아비의 기일이었다.

 

 

 

 

 

내밀어진 손을 잡는다면

이주연 이재현

 

 

 

 

 

도대체 왜, 어떻게, 이런 능력이 생긴 건지는 모른다. 이 별나고 괴상한 능력은 주연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발현됐다. 피부를 접촉한 채로 잠시만 집중해도 물건의 주인에 관한 온갖 정보가 흘러들어왔다. 어릴 때에는 영상처럼 눈앞과 머릿속을 메우는 장면들이 현실인 줄 몰랐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정보를 읽고 받아들였지만 머리가 크기 시작한 때부터는 얘기가 달랐다.

 

주연이 가진 초능력은 세간에서 이른바 사이코메트리라고 명명되는 것이었다. 주연은 자랄수록 이 능력의 사용을 극도로 피하게 됐다. 건강 악화와 정신적 피로가 상당한 탓이었다. 걸핏하면 편두통이 찾아오고, 코피가 터지고, 악몽을 꾸는 빈도 역시 잦아졌다. 이대로 살다가는 제정신으로 못 살거나 요절하겠구나 싶었다. 고민 끝에 주연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타인과 닿는 행위를 최대한 지양하기로 결정했다. 그러길 10년째가 되니까 오히려 자발적 아웃사이더로 사는 게 더 익숙했다.

 

누군가는 물을 수도 있겠다. 철저하게 혼자인 삶은 외롭지 않느냐고. 그러나 놀랍게도 주연은 딱히 외롭지 않았다. 반반한 외모 덕분에 주변을 서성대는 사람이 늘 많았기 때문이었다.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붙잡으며 연애도 적지 않게 했다. 모태 솔로니 뭐니 하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면 멀었지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인물이다. 그런 주연에게 있어서 연애의 문제점은 사실 시작보다 과정에 있었다. 고백 받고 교제를 시작해도 과정에 존재하는 스킨십이 불편해서 매번 연애를 할 때마다 목석처럼 굴었다. 일 년에 두세 번씩 바뀌곤 했던 그때그때의 연인은 하나같이 동일한 주제로 화를 냈다.

 

 

이주연. 너 나 사랑하긴 하니.

 

넌 어떻게 손잡을 때마다 2분을 못 넘겨?

 

주연아, 혹시 병 있어? ... 그게 안 선다거나 그래?

 

무슨 키스를 이런 식으로 해. 애기도 아니고.

 

 

스킨십이 문제였다. 연인이라면 닿고 싶은 마음은 당연하다. 주연도 그걸 잘 알았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가진 능력을 없애기란 불가능했다. 노력만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비밀이자 현실이었다. 고백 받고, 사귀고, 질타 받고, 차이고. 같은 루트를 반복하는 게 지겨웠지만 별 수 없었다. 어쨌거나 애인이 살아온 인생에서 굳이 파헤치고 싶지 않은 불량한 경험이나 범죄에 가까운 행동, 껄끄러운 성적 판타지 등등을 알게 되느니 까짓거 모진 말 몇 마디 듣고 헤어지는 편이 나았다.

 

 

학생 왔구만. 오늘이 아버지 기일이지?”

. 안녕하세요. 기억하시네요.”

학생이 여기 찾아오는 날이 일 년마다 딱 하루뿐인데 모를 수가 있나. 아버지 잘 뵙고 가.”

. 감사합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걷다가 경비 할아버지께 예의 바르게 인사한 주연이 계단을 밟았다. 기일이니까 적어도 이날만큼은 아들 노릇 해야지 싶어서 올해도 어김없이 납골당을 방문했다. 부친에게 남은 감정은 아직도 복잡하지만 이제는 원망보다 연민이 더 컸다. 공포와 증오가 세월 속에서 많이 희석된 덕분이었다. 그 당시 어린 주연은 이해하지 못했던 모친의 빈자리를, 죽음이라는 영원한 부재를, 부친은 뼈저리게 느끼고 좌절했을 테니까.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것도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부친이 한 행동에 면죄부를 줄 생각은 아니지만 더 이상 미워하지도 않고 그냥 내려놓기로 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신경 써서 미워할 만큼 남은 정조차 없었다.

 

주연은 부친의 빛바랜 사진 앞에 서서 멍하니 생각하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허울뿐인 조문을 마치고 나오면 다음으로 가는 곳은 늘 똑같았다. 주연이 납골당에 올 때마다 들르는 개인 카페였다. 원목 인테리어의 분위기가 90년대 그쯤에 멈춘 것처럼 아늑하고, 특히 핸드드립 커피를 잘 내리는 집이라서 꼭 들르게 된다. 드디어 카페에 다다른 주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때마침 밖으로 나오던 손님과 어깨가 부딪쳤다. 주연의 어깨 끝을 살짝 치고 지나간 남자한테서 기분 좋은 향기가 풍겼다. 볕에 잘 말린 빨랫감의 뽀송하고 포근한 향이었다.

 

 

, 죄송합니다!”

 

 

한 손으론 음료 캐리어를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론 지갑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사과하는 남자의 발밑으로 진주 머리핀이 툭 떨어졌다. 주연은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머리핀을 발견하곤 대답의 내용을 바꿨다.

 

 

저기요.”

 

 

남자를 불러 세운 주연이 무심코 바닥에 떨어진 머리핀을 주웠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홀린 듯이 주워든 머리핀이 손끝에서 손바닥 안으로 안착한 그때. 끔찍한 기억이 주연의 손바닥에서부터 펼쳐져 눈앞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어느 골목 끝의 반지하 단칸방, 혈흔이 낭자한 방바닥, 울부짖는 비명소리와 함께 붉게 젖어가는 여고생의 교복. 주연은 못 박힌 듯 멍하니 서서 진주 머리핀의 주인이 살해되는 끔찍한 장면을 죄다 읽었다. 곧이어 머리핀을 내팽개치듯 놓은 주연이 벌벌 떨면서 주저앉았다. 남자는 들고 있던 음료를 일행에게 건네주더니 주연의 앞으로 다가와 자세를 낮췄다.

 

 

괜찮으세요? 이봐요.”

저거... 저거 도대체 뭐예요. 뭔데요!”

 

 

주연은 도와주려는 남자의 손길도 뿌리치고 저 멀리 떨어진 머리핀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주연을 들여다보던 남자의 착한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 잠시 침묵하던 남자가 그냥 머리핀이에요.” 대꾸했다. 그럴 리가 없다. 평범한 그냥 머리핀. 그런 평범하고 의미 없는 물건일 리가 없었다. 잠깐 손을 댄 것만으로도 장면이 이만큼 선명히 펼쳐지려면 생전의 엄청난 원한이나 사연이 필수였다. 생의 마지막 기억이 강렬할수록 더 잘 보일 뿐만 아니라 전이되는 감정의 범위도 컸다. 어쩌다 보니 오랜만에 쓰게 된 능력 때문에 차오른 숨을 색색 몰아쉬던 주연이 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거짓말.... 그냥 머리핀 아니잖아요.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할 물건이 아니잖아요.”

 

 

주연이 그 말과 함께 어느새 축축하게 젖은 눈동자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남자는 그제야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주연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일으키며 물었다. “이 물건, 뭔지 알아요?” 남자의 질문에 주연은 대답 대신 눈을 질끈 감았고. 남자는 주연을 이대로 지나쳐선 안 된다는 직감의 신호를 받았다. 재킷의 주머니를 더듬거리던 남자가 겨우 찾아낸 명함 한 장을 주연의 눈앞에 내밀었다.

 

 

 

 

서울지방경찰청

수사부 형사과 - 강력1

경위 이 재 현

서울 종로구 사직로 831

Office 02-4321-5678

Mobile 010-2020-1124

 

 

 

 

서울지방경찰청 수사부 형사과 강력1팀 이재현 경위입니다. 일단 자리 좀 옮길까요?”

 

 

재현이 그 말과 함께 주연을 일으켜 세웠다. 주연은 카페 안까지 저를 부축하는 재현을 따라 걸었지만 여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마주앉아 주연이 진정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던 재현이 이윽고 운을 뗐다.

 

 

이름이 뭐예요?”

이주연이요.”

이름 예쁘네요. 주연씨. 이제 좀 괜찮아요?”

.......”

혹시 뭐 알고 이러는 거예요? 이 머리핀의 주인을 안다든가.”

아뇨. 몰라요. 그 머리핀도 오늘 처음 본 거예요.”

근데 어떻게 그런 반응을 해요.”

말해봤자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안 그래요. 괜찮으니까 말해 봐요.”

 

 

상냥하게 말한 재현이 주연의 손등을 감싸고 토닥거렸다. 타인의 체온이 직접 피부 대 피부로 닿는 게 실로 오랜만이었지만 어쩐지 불편하지 않았다. 주연은 재현의 손에 집중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지금처럼 한껏 예민한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신경을 쏟으면 마치 책 읽듯이 상대방의 행적이나 감정이 다 읽혀져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혹여나 동의 없이 재현을 낱낱이 읽어내게 될까봐 조심스레 손을 빼내는 주연의 미간이 꿈틀했다.

 

 

손으로 뭔가를 집중해서 만지면... 그 물건의 주인이 겪은 일들이 보여요. 살아온 인생, 겪은 사건과 사고, 가장 최근의 기억이나 감정까지 다 흘러 들어와서 읽어져요.”

 

 

나긋나긋 이어지는 주연의 얘길 들으며 딸기 스무디를 쭉 빨아 올려 마신 재현이 사람을 상대로도 가능해요?” 물었다. 목소리에 총기가 서려 있었다.

 

 

가능한데 방금 전처럼 아주 잠깐 손을 잡는 정도로는 알기 어려워요. 그러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 그런 뜻으로 한 질문 아니에요. 나는 뭐 얼마든지 읽고 들여다봐도 상관없어요. 대신 그쪽 속이 안 좋아질 걸요. 내가 보고 살아온 게 그렇게 아름다운 장면은 아니어서. 그건 그렇고, 혹시 대학생이에요?”

지금은 휴학 중이에요.”

 

 

주연이 대답하자 재현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휴학생이면 비교적 한가하겠네요?”

. 학교 다닐 때보다는 그렇죠.”

그럼 저 좀 도와줄 수 있을까요.”

제가 뭘 도와드릴 수 있는데요?”

아주 많은 것들이요. 특히 이런 일.”

 

 

재현이 그 말과 동시에 아까의 머리핀을 들어 보였다. 그 머리핀을 잠자코 응시하던 주연은 재현이 말하는 이런 일이 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고갤 끄덕였다. 긴 생머리에 진주 머리핀을 꽂고 환하게 웃던 여자애 생각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미 닿아 버렸기에, 알게 되었기에, 조금이나마 돕고 싶어졌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서럽게 울던 저 머리핀의 주인, 그리고 정의와 열정에 가득 차 있는 이재현 형사를.

 

 

 

 

 

/

 

 

 

 

 

서울지방경찰청 미제사건 전담수사팀을 맡은 이재현 경위의 손에 들려 있는 서류는 3년 전, 형사가 되고 강력계에 갓 들어왔을 때 제 앞으로 맡은 첫 미제사건 파일이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파일을 곁에서 떼놓은 적이 없었다. 마음에 걸려서 계속 품고 살았지만 다른 주요사건에 밀리고 밀려서 뒷전이 되다 보니 제대로 수사하지 못했다. 여태 범인을 검거하지 못한 만큼 집착이 대단했다.

 

2007년 이후의 사건들은 공소시효가 25년이지만 2006년까지 발생했던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는 여전히 15년이었다. 앞서 이 사건을 맡았던 선배 형사는 미제사건 수사가 지원 받지 못한 탓에 2014년까지 삽질만 거듭하다가 은퇴했다. 이후에는 여러 팀을 떠돌다가 2018년에야 재현이 소속된 강력 1팀 소관으로 옮겨졌고, 그로부터 어영부영 3년이 또 흐른 것이었다. 공소시효가 끝나는 2021822일까지 주어진 시간은 한 달도 되지 않는 고작 몇 주. 좋든 싫든 끝을 보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저 이 사건 제대로 해결하고 싶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범인 꼭 잡아야겠어요.”

왜 이게 다른 사건보다 우선이어야 하는지 말해봐.”

공소시효가 얼마 안 남았거든요. 앞으로 한 달도 안 남았습니다.”

 

 

돌아오는 질문에 확고하게 대답한 재현이 자료를 책상 위로 올려놨다. 자료에는 사건 개요와 자세한 범행 수법 및 정황이 적혀 있었다.

 

 

 

 

상 황 보 고 서

외 부 유 출 금 지

06. 08. 22

제 목 : 미산 터널 여고생 살인사건 수사보고 (67)

 

1. 발견일시 및 장소

2006822, 서울 미산 터널 내부

 

2. 변사자 인적사항

성 명 : 이 미정

주 거 : 서울특별시 강북구 하순동 53-121번지 평화 아파트 1081102

 

3. 신고자(발견자) 인적사항

성 명 : 박 필수

주 거 : 노숙 생활 중

 

4. 사망원인 및 사건개요

대상 선정이 불분명한 묻지마 살인으로 추정됨 고속도로 아래의 미산 터널 옆 개울에 유기되어 있었으며 시신의 부패 상태가 심각했음 실종 당시 교복 차림이었는데 시신이 발견된 시점엔 하얀 원피스가 입혀져 있었음 입술에는 빨간 립스틱이 칠해져 있었으며 손톱에는 빨간 매니큐어가 균일치 못하게 발라져 있었던 점으로 보아 범인은 비정상적 성욕을 가졌거나 성 불구의 남성일 가능성이 큼

 

 

 

 

 

이게 전부야? 오래 전 사건이라서 자료가 너무 부족한데 이걸 한 달 안에 해결할 수 있다는 건가. 검거할 자신이 없으면 시작도 말아야 돼. 괜히 공소시효 가까운 사건 들쑤셨다가 범인 못 잡아내면 변명하기 성가셔진다고. 기자들도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서 물어뜯을 테고.”

할 수 있습니다. 범인 꼭 잡을게요. 저 아시잖아요.”

.......”

 

 

한 장, 한 장 넘기며 찬찬히 읽다가 못미더운 눈빛으로 재현을 훑어본 차장이 자료를 슥 밀어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일단 수락하겠는데 검거 못할 경우엔 어떻게 책임질지도 미리 생각해둬.”

알겠습니다. 그래도 옷 벗겨서 내쫓을 건 아니시죠?”

말이라고 해. 이 형사 내쫓으면 밥값 하는 놈 더 줄어드는데. 그만 떠들고 나가. 수사 시작해.”

 

 

피곤하다는 듯이 대답한 차장에게서 나가라는 고갯짓이 떨어졌다. 책상 밖으로 떨어질 듯이 걸쳐진 서류를 차곡차곡 모아 품에 껴안은 재현이 씩씩하게 !” 외치며 나왔다. 자판기 앞에 서서 음료를 뽑던 찬희는 낯빛 환해져서 나오는 재현을 보더니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허락 받음?”

. 내가 누구냐.”

누구긴요. 일단 일 벌이고 보는 이재현 형사님이지. 뭐 마실래요.”

데미소다 사과맛.”

 

 

재현의 말에 데미소다 버튼을 꾹꾹 연달아 누른 찬희가 앞머릴 쓸어 넘겼다. 캔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먼저 허릴 숙인 재현이 캔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재현이 건네는 캔을 받아든 찬희가 재현의 옆구리에 낑겨져 있던 서류 파일을 쑥 빼갔다.

 

 

나 그럼 이거부터 먼저 살펴볼게요. 큐한테도 전달해 줄까요?”

그래주면 고맙지.”

형사님은 뭐 하실 건데요.”

나는 미정씨랑 미정씨 어머님 뵈러 다녀오려고.”

납골당?”

. 여태 범인 못 잡아서 뵐 면목이 없긴 한데... 이제라도 각 잡고 수사 시작하게 됐으니까 말씀 드려야지.”

이 형사님 같은 경찰이 더 많았으면 미제사건은 벌써 씨가 말랐을 텐데.”

웬일로 칭찬을 다 해주냐.”

웃겨. 저 원래 칭찬 잘하거든요?”

오케이. 일단 들어가서 창민이랑 사건 정리 시작해. 나 간다!”

알겠어요. 이따 봐요.”

 

 

서류를 옆구리와 팔 사이에 끼우면서 받아친 찬희가 캔 따개를 시원하게 꺾었다. 차르륵. 탄산 속 기포 터지는 소리가 재현의 힘찬 첫발에 맞춰 터졌다. 뛰어가는 걸음은 늘 그렇듯 사뿐하지만 마음은 사실 무거웠다. 부모님 두 분 다 건강하시고 조부모님도 정정히 살아 계시는데도 재현이 주기적으로 납골당을 찾는 이유는 언제나 같다. 바로 이 사건의 피해자인 이미정 양과 그녀의 어머니 최순영 씨였다.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수사에 좌절한 순영 씨가 딸의 유품인 머리핀을 재현에게 쥐어주고 이튿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지도 어느덧 1년 반이 지났다. 재현은 그날부터 한시도 이 머리핀을 품에서 떼어놓은 적이 없었다. 어느 옷을 입어도 안주머니에는 항상 미정의 머리핀이 들어 있었다. 억울하고 가여운 두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근처에 용건이 있다던 박 형사의 차를 얻어 타고 납골당을 찾은 재현이 3층의 익숙한 구역으로 향했다. 재현은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모녀를 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그간의 소식과 수사에 진척이 있음을 조근조근 늘어놨다. 이번에는 꼭 잡을게요. 경찰 인생을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꾸벅 인사하고 한껏 비장해져서 밖으로 나오자 이미 용건을 마치고 돌아와 기다리고 있던 박 형사가 손을 휘휘 흔들어 보였다. 박 형사는 이곳에 올 때마다 찾는 카페가 있으니 들렀다 가자며 재현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이, 귀찮은데. 그냥 돌아가서 자판기 커피나 마시지?”

이 형사님이 여기 커피 맛을 몰라서 그래요. 기가 막히다니까요.”

나 참. 뭐 마실 건데.”

저는 아이스 라떼요.”

알겠어. 사올 테니까 밖에서 기다려. 시럽 많이?”

. 달달하게.”

알겠다.”

 

 

투덜거리면서도 카페로 들어간 재현이 아이스 라떼와 딸기 스무디를 주문했다. 십여 분이 지나자 포장한 음료가 나왔다. 박 형사 입맛에 맞춰서 시럽을 들이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 손으로는 음료 캐리어를 들고 남은 손으로 대충 안주머니에 지갑을 넣으며 문을 밀었다가 마침 들어오려던 남자와 재현의 어깨가 스치듯 부딪쳤다.

 

 

, 죄송합니다!”

 

 

우렁차게 외친 재현이 미처 인식하지 못한 사이, 지갑 귀퉁이에 걸린 머리핀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리고 어깨를 부딪친 뒤 멀뚱히 서 있던 그 남자가 우연히 머리핀을 집어 든 그 순간.

 

 

저기요.”

“......?”

 

 

재현은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세계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된다.

 

 

 

 

 

/

 

 

 

 

 

주연씨!”

안녕하세요. 이 형사님.”

 

 

멍때리며 앉아 있다가 차 유리창을 내린 재현이 씩씩하게 부르자 그제야 재현을 발견한 주연이 살며시 눈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우연이라기엔 마치 정해진 드라마 대본처럼 극적이었던 어제의 첫 만남 이후로 두 번째 대면이었다. 세 시까지 은하 아파트 버스 정류장 앞에서 보자던 재현은 새까만 지프 그랜드 체로키를 몰고 나타났다. 깔끔하게 잘 빠진 차의 모양과 색상이 재현의 이미지와 꽤 잘 어울렸다.

 

 

짐은 다 챙겨왔어요?”

갈아입을 옷들이랑 세면도구 챙겼어요.”

잘했어요. 아마 며칠 동안 집에 못 들어갈 텐데 부모님 허락은 받았어요? 뭐라고 안 하세요?”

....... .”

그럼 됐다. 앞에 타요. 안전벨트 잘 매고.”

 

 

캐리어를 뒷좌석으로 올리고 조수석에 앉은 주연이 재현의 말대로 안전벨트를 꼼꼼히 매면서 물었다.

 

 

멀리 가나요?”

멀리는 아니고. 차로 이동하는 게 편해서요.”

어디 가는데요?”

혹시 국과수 알아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요?”

. 거기 가는 거예요. 주연씨가 그 손으로 꼭 읽어줬으면 하는 증거물이 있어서요. 실은 그저께 이 증거물에 대한 DNA 분석을 다시 의뢰했거든요. 근데 돌려받으려면 시간이 좀 걸린대서 조각이라도 받으려고 직접 찾아가는 거예요. 공소시효 때문에 한시가 급한 사건이라 주연씨의 능력이 절실해요.”

 

 

재현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주연은 방금 전 재현이 한 말을 곱씹으며 제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재능일 거라곤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저주라고 여겼던 이 능력이 쓸모 있는 취급을 받는 날도 오는구나. 창밖을 하릴없이 바라보고 있으니 금세 국과수에 도착했다. 입구를 지나자 건물 입구에 커다랗게 써져 있는 문구가 보였다.

 

 

 

진실을 밝히는 과학의 힘

­ 국립과학수사연구원 ­

 

 

 

주연은 그 문구를 가만히 바라봤다. 과학. 따지고 보면 과학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이 자신의 능력 아닌가. 어쩐지 이 현실이 모순적으로 느껴진다.

 

 

주연씨. 다 왔어요. 내려요.”

 

 

능숙하게 주차를 마친 재현이 주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고갯짓했다. 뭔가 특별한 점이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시청이나 세무서 같은 보통 행정기관 내부와 비슷했다. 실내의 왼쪽으로 난 복도를 지나 법유전자과 긴급정밀감정실 앞에 다다른 재현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선생님. 저 감정실 앞에 와 있습니다. 증거물 분석 의뢰했던 원피스 천이 필요한데요. 조금만 잘라서, 네네! 부탁 드려도 될까요? 그럼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

원피스 천은 왜요?”

, 증거물인 원피스를 막 만지게 할 순 없으니까. 주연씨가 만져볼 수 있을 만큼만 달라고 부탁 드렸거든요. 가지고 나와 주신대요.”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주연에게 재현이 막 설명을 끝낸 그때, 감정실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나왔다. 등에 NFS 로고가 박힌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였다. 그녀의 손에는 증거물 보관용 밀봉 비닐이 들려 있었다. 안에 든 것은 살짝 빛바랜 천 조각이었다.

 

 

또 보네요. 이 형사님.”

그러게요. 잘생긴 얼굴 자주 보니까 좋죠.”

됐거든요. 올 때마다 귀찮기나 하지. 근데 이건 왜요?”

 

 

돌아온 질문에 재현이 힐끔 주연을 쳐다봤다. 바로 코앞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재현은 잠시 빤히 주연과 눈을 맞추다가 이내 별 거 아니라는 듯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

또 재미없게 나오신다.”

그런 게 있습니다. 이 사건 해결하면 알려드릴게요. 일단 마저 수고하시고 분석 끝나면 창민이한테 메일로 결과 넣어주세요.”

알겠어요. 나중에 봐요. 두 분 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재현과 주연에게 고갤 까딱 숙이며 인사한 그녀가 감정실의 문손잡이를 잡았다. 주연이 꾸벅 허리 숙여 인사한 뒤 다시 상체를 세웠을 때, 그녀는 이미 감정실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주연씨는 보기보다 사람이 좀 느리네요. 재현이 그 말과 함께 주연의 등을 토닥토닥 두어 번 가볍게 두드렸다. 어쩐지 처음부터 느릿느릿하고 여유로운 타입 같긴 했지만 인사까지 굼뜰 줄은 몰랐다. 그녀가 감정실 안으로 들어간 지가 언젠데. 인사를 마치더니 의아한 표정을 짓는 얼굴이 아직 어리긴 어리고 순진하기까지 하구나 싶어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피식 바람 새는 소릴 내며 웃던 재현이 한 손으로 주연의 어깨를 붙잡고 걷기 시작했다. 주연은 저를 거리낌 없이 터치하는 재현 때문에 몇 번이나 흠칫거렸다. 재현이 어느 타이밍에 훅 파고들어올지를 모르니까. 타인과의 접촉이 낯선 주연으로서는 그만큼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귓바퀴는 아까부터 계속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화끈거렸다.

 

 

일단 이거 가지고 경찰서로 돌아갑시다. 우리 전담수사팀 사무실에서 살펴보게요.”

팀 사무실이 따로 있나요?”

. 이게 보통 미제사건이 아니어서요. 한때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이고 작년에는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에도 방영됐는데 범인 실마리가 전혀 안 잡혔거든요. 공소시효 지나기 전에 꼭 해결하고 싶어서 각 분야 엘리트 모아서 팀 꾸렸어요. 솔직히 이 새끼를 잡을 수만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에요.”

 

 

주연은 재현의 말을 들으며 고갤 주억거렸다.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 그 정도의 간절함이니까 과학적으로 입증이 안 된 능력을 가진 저한테까지 도움을 요청했을 터였다. 차를 타고 경찰서로 향하는 동안 재현은 이따금씩 재킷의 가슴 쪽에 달린 주머니를 쓰다듬었고 주연은 그런 재현을 유심히 쳐다봤다. 의미가 있는 행동인가.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아까 밀봉된 조그만 비닐과 머리핀을 저 주머니에 넣었던 게 떠올랐다. 저 사람이 살고 있는 현재의 원동력과 사명감은 이 사건이구나.

 

관찰을 끝낸 주연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타인의 열정이 지금처럼 가까이에서 피부로 느껴진 적이 없었다. 잘은 몰라도 이 사건이 재현의 인생에서 그만큼 비중을 차지하는 일이겠거니 짐작할 뿐이다. 경찰서에 도착해서는 재현이 이끄는 대로 따라 걸었다. 경찰과 체포된 용의자로 붐비는 복도의 반대쪽 복도를 걸어 모퉁이를 돌자 아무도 오가지 않는 조용한 사무실 하나가 나왔다. 재현은 문고리를 잡아 힘차게 돌리는 것과 동시에 외쳤다.

 

 

형님 왔다. 얘들아. 회의 들어가기 전에 소개할 사람 있으니까 잠깐 집중! 미산 터널 살인 미제사건 관련해서 오늘부터 우리 팀에 합류할 팀원이야. 서로 인사들 해.”

 

 

재현의 말에 U자로 둥글게 모아둔 책상 앞에 둘러앉아 머릴 맞대고 회의 중이던 네 명이 일제히 고갤 들어올렸다. 네 쌍의 눈이 정확하게 주연을 쳐다본다. 호기심을 감추지 않는 표정과 시선이 주연의 얼굴로 날아와 꽂혔다. 어디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사람인데요? 수사부 사람이야? 왜 초면이지? 경찰 맞아요? 그냥 대학생 같은데...? 새로 들어온 형사인가? 어느 팀이에요? 주연은 제게로 쏟아지는 온갖 질문을 들으면서 눈만 껌뻑거렸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심지어 질문 몇 개는 무슨 소리인지조차 못 알아들었다. 거기다 대고 대뜸 저는 사이코메트리 능력자입니다.’ 대답하기도 곤란했다.

 

 

야야. 얘들아. 경찰 아니다. 대학생 애기야. 이름은 이주연이고 지금 휴학 중이래. 그리고 나이는... 주연씨 몇 살이랬죠? 기억이 안 나네.”

스물넷이요. 어제 나이는 안 물어보셨어요.”

. 내가 안 물어봤구나. ~ 나이 좀 모르면 어때. 그쵸? 아무튼 일단 앉아요.”

 

 

겸연쩍게 받아친 재현이 제 맞은편 자리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재현이 콕 짚은 자리에 순순히 앉은 주연이 책상 위의 원피스 천을 내려다봤다. 삼삼오오 모여 있던 팀원들은 주연의 정체가 어지간히 궁금한 듯했다. 개중에서 구릿빛 피부에 눈이 유리구슬처럼 반짝이는 남자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진짜? 스물네 살이라고요? . 대박 어리다. 난 나보다 한참 형일 줄 알았어.”

김선우 넌 초면에 뭔 소릴 하냐.”

? 그런 안 좋은 뜻이 아니라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진짜 어른스럽게 잘생겨서 그런 건데. 나 또 억울하네.”

됐고. 반가워요. 주연씨. 저는 범죄행동분석팀에서 제일 똑똑한 프로파일러 최찬희예요. 나이는 비밀인데 아무튼 내가 연상이니까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억울하다며 눈썹 끌어내리는 선우의 말을 간단히 무시한 찬희가 소개를 마쳤다. 주연은 고갤 꾸벅 숙여 인사하고 다시 선우를 쳐다봤다. 선우는 도톰한 입술을 꾹꾹 씹다가 주연과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소개를 읊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김선우입니다. 원래는 강력1팀 소속인데 재현이 형, 아니 이 형사님이 요청하셔서 미제사건 전담수사팀으로 지원 왔어요. 형일 줄 알았다고 해서 미안요. 나쁜 뜻 아니었어요. 알죠?”

알아요. 그리고 저 노안이라는 말 자주 들어서 괜찮아요.”

아니.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돼요. 노안이라니. ? 난 노안이라고 한 적 없는데!”

선우야. 너 진짜 너무하다.”

어어. 창민이 형까지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선우가 다람쥐처럼 귀엽게 생긴 남자의 어깨를 잡고 짤짤 흔들어댔다. 까만 뿔테 안경을 쓴 창민이라는 남자와 비교적 조그만 체구의 남자는 핵심적인 내용만 뽑아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기술 분석가 지창민이에요. 해킹이랑 정보 검색 및 분석이 주특기이고, 해커들의 세계에서 쓰는 이름이 quest여서 제일 앞의 알파벳을 딴 닉네임 Q로 통해요. 큐라고 불러도 되고 창민이라고 불러도 되니까 더 편한 걸로 부르세요. 잘 부탁해요.”

저는 손영재요. 김선우 형사랑 강력1팀에서 같이 왔어요. 범인 꼭 잡읍시다! 파이팅!”

소개 다 끝났냐. 이제 시작해도 되지?”

 

 

팀원들과 주연의 통성명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재현이 박수를 짝짝 두 번 치면서 묻자 모두 분주해졌다. 창민은 앞으로 나가 프로젝터 스크린을 내렸고 찬희는 미리 준비해둔 프린트물을 나눠줬다. 창민이 초동수사 자료와 증거물 사진을 띄우면 찬희가 프로파일링 소견을 덧붙이는 식으로 회의가 진행됐다. 주연은 찬희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쭉 나열되는 증거물 중에는 재현이 말했던 하얀 원피스도 있었다.

 

 

이 원피스는 당시 아주 흔했던 디자인으로 동대문 쇼핑센터에 풀린 것만 만 벌 이상입니다. 초동수사가 미흡했던 탓에 카드 결제 없이 현금으로 구매한 사람들은 다 추적하지도 못했어요. 범인은 남성이 확실하지만 씨씨티비 자료를 살펴본 결과, 남성이 원피스를 사 가는 장면은 없었습니다. 구매 경로나 장면을 포착해 용의자 범위를 줄이려고 했으나 구매자 전원이 여성으로 밝혀져서 현재까지는 가장 소득이 없었던 증거물입니다.”

. 일단 거기까지. 원피스 설명 다 들었죠. 주연씨.”

.”

그럼 나랑 아까 국과수에서 가져온 거 지금 좀 만져볼 수 있겠어요?”

 

 

재현의 질문에 마른침을 꼴깍 삼킨 주연이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주연과 재현을 제외하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리 없는 팀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재현은 주연과 눈빛을 교환하곤 비닐의 지퍼를 열었다. 이윽고 주연의 너른 손바닥에 조그맣고 퍼석거리는 원피스 천 조각이 올려졌다. 주연은 살며시 손가락을 모으고 주먹을 말아 쥔 채 눈을 감았다. 덮인 눈꺼풀 위로 분주한 눈동자의 움직임이 드러난다. 재현은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 동안 집중하는 주연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기다렸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팀원들도 그저 숨죽이고 주연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주연이 드디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 원피스를 샀던 사람은 남자가 아니에요. 당시에 30대 후반 아주머니로 보여요. 싸게 떼서 도매상에다 넘기는 것처럼 엄청 많이 구매해요. 아주머니가 커다란 봉투를 어떤 남자한테 건네줘요. 남자는 모자를 썼는데 헤진 초록색 모자에 진회색 외투...... 신발은 옛날 군화 같아요. 남자가 봉투를 어깨에 둘러메고 서둘러 떠나요. 걸어서 가다가 골목으로 사라지는데....”

. 그런데요?”

그 뒤로는 행적이 안 읽어져요. 죄송해요.”

죄송하긴 뭐가요. 잘했어요. 진짜 잘했어요! 고마워요. 그리고 주연씨가 방금 말한 그 아주머니 말인데, 혹시 이 사진들 중에 있어요?”

 

 

다급하게 묻는 재현의 목소리에 데로록 눈동자를 굴리던 주연이 검지로 한 장의 사진을 짚어냈다. 재현은 주연이 고른 사진을 보자마자 탄식했다. 사진 속 인물은 재현의 선배가 수사하던 당시, 진술을 번복하고 도망치듯 짐 싸서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약 2년 전에 다시 상경한 중년의 여성이었다. 실은 몇 달 전에도 그녀의 거주지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진술을 추가로 받기 위해서였지만 몇 번을 물어도 시종일관 모르쇠로 일관하길래 더 진행하지 못하고 접었는데. 지금 주연이 손끝이 그 아주머니를 지목하고 있었다.

 

 

확실해요?”

. 확실히 봤어요.”

오케이. , 들었지? 창민이는 프로그램 돌려서 씨씨티비 화질 더 선명하게 복원할 수 있는지 시도해봐. 찬희는 당시 저 아주머니 진술서를 토대로 범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었는지 다시 확인하고. 선우랑 영재는 주연씨가 말한 인상착의 토대로 건물 드나든 남자들 싹 다 조사해서 그날 행적 쫓아.”

 

 

재현의 지시가 떨어지자 다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찬희는 진술서 검토뿐만이 아니라 사건 자료를 더 찾아 분석하겠다면서 제일 먼저 사무실을 나섰고 뒤이어 선우와 영재가 통합 증거물 보관실로 향했다. 쥐고 있던 원피스 천을 다시 비닐에 넣고 지퍼가 맞물리도록 꾹꾹 누르던 주연은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갤 돌렸다. 창민이 안경 너머로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왜요...?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아뇨. 신기해서요. 방금 그거 사이코메트리 맞죠.”

.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우와! 대박! 우리 팀에 진짜 든든한 지원군이 왔네요? 사건 관련해서 궁금한 정보 생기면 이쪽으로 연락 줘요. 제 작업실 직통 전화번호예요.”

작업실이요?”

, 개인 사무실이 또 따로 있거든요. 사람은 없고 컴퓨터랑 모니터만 잔뜩 있는 방이긴 한데. 아무튼 수고해요. 저는 추가로 정보 더 찾아내면 연락할게요. 이 형사님도 수고!”

 

 

쉬지 않고 재잘재잘 떠들던 창민은 재현이 고갤 끄덕이자 방긋 웃어 보이더니 그대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널찍한 사무실 안에 이재현과 이주연 두 사람만 남았다. 책상 위에는 재현이 늘어놓은 증거물 사진들이 올라와 있었다. 프린트물을 모아 탁탁 책상에 각 맞춰가며 정리하던 주연은 문득 어떤 의문에 도달했다. 이상하다. 증거물 자료 페이지에 왜 머리핀 사진은 없지. 그때, 마침 내리떴던 눈을 반짝 뜨더니 새침하게 깜빡거리던 재현과 시선이 얽혔다. 차분하지만 차갑지는 않은 정적. 재현은 마치 주연의 속내를 다 안다는 듯이 설핏 미소 지었다. 어느새 재현의 손에 꼭 쥐어진 머리핀의 진주알이 맨들맨들,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주연씨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맞춰볼까요.”

?”

이 머리핀 사진은 왜 없을까? 그 생각 했죠.”

어떻게 아셨어요?”

글쎄요. 주연씨 초능력이 나한테 옮았나.”

... 진짜요?”

 

 

주연이 되묻자마자 으하하! 호탕하게 웃어젖힌 재현이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으로 덧붙였다.

 

 

뭘 또 진짜요? 이러고 있어요. 주연씨 엄청 순진하다. 이걸 믿네. 당연히 농담이죠.”

, 그럼 제 생각은 어떻게 아셨어요?”

주연씨 얼굴에 다 써져 있던데요.”

 

 

재현은 뭐 그런 뻔한 걸 묻고 그러냐는 듯이 대꾸하곤 늘씬하게 뻗은 팔로 쭉 기지개를 켰다. 벽시계의 시침이 7을 지나는 중이었다.

 

 

일단 저녁 먹으러 다녀올까요? 내가 밥 살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안 그러셔도 돼요.”

왜요? 불편해요? 혹시 부담스럽나.”

그게 아니라... 한 일도 없는데 얻어먹기 좀 그래서요.”

한 일이 왜 없어요. 주연씨 덕분에 첫 단추부터 성공적으로 끼웠는데.”

“.......”

안 갈 거예요? 나 배고파요. 얼른 와요.”

 

 

먼저 자릴 털고 일어난 재현이 사무실 문을 열고 기대어 선 채로 채근했다. 주연은 망부석처럼 의자에 앉아 그런 재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겠네 어쩌네 하는 재현의 엄살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따라 일어섰다.

 

재현이 주연을 데리고 간 곳은 삼겹살집이었다. 주방에서 이미 기름을 쫙 빼고 충분히 익혀서 나온 고기라 그런지 굽는 시간이 절약된다는 점이 편리했다. 재현은 부지런히 쌈을 싸면서 말했다. 고기를 먹고는 싶은데 굽고 앉아 있을 시간이 마땅치 않을 때 타협 보려고 찾은 곳이에요. 곧이어 동그랗게 싼 쌈을 입 안으로 쑥 넣은 재현이 주연에게 얼른 먹으라며 손짓했다.

 

 

언제 사건 터져서 경찰서로 다시 뛰어가야 될지 모르니까 얼른 입에 넣어요.”

 

 

채근하는 재현의 표정이 진지하다. 주연은 느릿느릿 쌈을 싸면서 제 앞에 앉아 쉴 새 없이 우물거리는 재현을 물끄러미 관찰했다. 이 사람은 식사도 시간에 쫓기면서 하는구나. 그게 왠지 좀 짠했다. 주연이 이제껏 살면서 본 사람 중에 밥을 제일 빨리 먹는다. 먹는 게 아니라 마시는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곧이어 올라온 된장찌개를 밥공기에 넣고 밥과 슥슥 비벼서 맛있게 먹는 재현의 볼이 꼭 해바라기 씨를 가득 문 햄스터처럼 볼록해졌다.

 

 

형사님, 보기보다 되게 잘 드시네요.”

저요? 왜요. 밥 잘 안 먹을 것처럼 생겼어요?”

. 조금 그래 보였어요.”

흐음. 왜 그럴까~ 나는 밥심으로 사는 사람인데. 다들 나만 보면 음식 깨작댈 것처럼 생겼다고 그러더라고요.”

, 그런 나쁜 뜻은 아니었는데....”

알아요. 주연씨 놀리려고 그냥 한 말이에요.”

 

 

난감한 듯이 손사래 치는 주연을 보며 대꾸한 재현이 픽 웃었다. 주연의 솔직하고 섬세한 반응이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강력반에서는 장난을 치면 싸늘한 면박이나 두 배로 응징하는 헤드록이 돌아오는데 주연한테는 깜찍한 반응이 나오니까 퍽 즐겁다.

 

 

빨리 먹어요. 꾸물거리면 음식 다 식어요. 먹어야 힘내서 일하죠. 주연씨 오늘 나랑 밤새 자료 확인해야 될지도 모르는데 지금 안 먹어두면 배고파서 더 힘들 걸요?”

 

 

으름장 놓는 재현의 말에 고갤 세차게 끄덕인 주연이 숟가락을 들었다. 타인과 단둘이 마주앉아 함께하는 식사자리도, 밥을 먹으며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도 전부 실로 오랜만이었다.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사람 냄새가 주연의 마음을 자꾸 달싹이게 한다. 주연에게 내밀어진 것은 단지 재현의 손이나 명함이나 원피스 천 조각뿐만이 아니라 혼자이길 결심한 이후부터 주연이 줄곧 그리워한 온기였다. 재현이 아무렇지 않게 베푸는 관심과 배려가 못내 좋았다. 자꾸만 얼굴과 목이 뜨뜻해지는 느낌이 든다. 이건 지금 먹는 된장찌개가 너무 뜨거워서일 거야. 애써 다르게 생각하려는 주연의 숟가락질이 조금 빨라졌다.

 

 

이제 좀 팍팍 먹네요. 밑반찬 더 갖다 줄까요?”

 

 

흡족하게 웃으며 묻는 재현의 애굣살 밑으로 인디언 보조개가 드러난다. 웃는 얼굴이 무표정일 때와 달리 귀엽네. 그런 생각을 하던 주연이 살며시 눈웃음 지으며 고갤 절레절레 젓자 재현이 대뜸 덧붙였다.

 

 

우와. 주연씨 웃을 때 눈이 꼭 이모티콘처럼 되네요. 귀엽다.”

 

 

주연의 웃는 얼굴을 보고 귀엽다고 생각한 건 재현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잠시 마주보고 미소 짓다가 동시에 물을 마셨다. 남들이 보기엔 서로 대놓고 호감을 표현하는 꼴이었지만 둘 중 누구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이유 없는 웃음이 오갔다. 많이 다정하고, 살짝 묘하고, 가슴속 어딘가가 간질거리는 첫 번째 식사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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