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23일 15시 37분
서울 곳곳에서 변종으로 추정되는 RVA 바이러스가 점차 확산되고 있습니다. 기존 백신의 효과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감염에 각별히 주의하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우리 군은 감염관리본부로 보내진 샘플 분석 결과가 나오는 대로 브리핑을 실시할 예정입니다.
국민 여러분께 재난 상황 발생에 따른 생존 매뉴얼을 배포합니다. 방역 및 바이러스 확산 방지 조치를 시행하는 동안 바깥 출입을 자제하시고, 불가피한 경우 가까운 벙커 위치를 사전에 숙지하십시오. 사태가 정리되기 전까지 순차적으로 구호 물품을 조달할 예정입니다.
우리 군에서는 2013년 2월 최초로 발병한 RVA 바이러스 감염자 처분에 관하여 치료가 가능할 경우 포획하여 혈청을 투여하고,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는 예외 없이 사살할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임상 연구를 통하여 밝혀진 감염 경로는 타액을 매개로 한 접촉입니다.
감염자는 고열을 동반한 객혈 증세를 보이며 사망에 이르다가, 발작과 함께 살아나 높은 공격성을 보입니다. 물리기 쉬운 목이나 어깨, 팔, 그리고 발목을 조심하십시오. 감염자는 머리를 공격하지 않는 한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또한 빛과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이끌리는 습성이 있으니 참고하여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2020년 11월 23일 15시 37분, 우리 군은 서울 도심에서 일어난 바이러스의 재확산으로 인하여 코드 제트를 발령합니다. 이 시간부로 서울을 폐쇄하고 무장 군인을 투입하여 감염자를 사살합니다.
다시 알립니다. 2020년 11월 23일 15시 37분, 우리 군은 서울을 폐쇄하고 무장 군인을 투입하여 감염자를 사살합니다.
그 시각, 성문고등학교 3학년 1반
삼 학년 일 반 교실 뒤편 창문으로 궤도 잃은 야구공이 날아든 것이 고작 몇 분 전 일이었다. 파열음과 동시에 재난 문자 알림음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내려앉은 유리 파편 사이로 핏덩어리가 울컥 쏟아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을 구르던 몸뚱이 하나가 뒤틀린 무릎을 이끌고 벌떡 일어선다. 희번득한 눈을 마주한 순간, 짜고 치기라도 한 듯 사방에서 울리는 비명과 함께 아수라장으로 변모하는 주변에 재현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엉망으로 나부라져 바리케이드처럼 늘어선 책걸상을 피해 도약한다. 가방은 앞으로 메고, 휴대 전화는 잃어버리지 않게. 재난에 대처하는 보통의 한국인들이 늘 그러하듯이. 내뻗는 손을 피해 교실을 벗어나는 순간 스치는 생각은 명료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어떻게 빠져나가지?
힐끗 내다본 바깥도 괜찮은 상황은 못 됐다. 한적했던 오후의 도시는 산발적으로 터지는 경보음으로 뒤범벅된 지 오래였다. 운동장은 이미 새벽의 저주의 한 장면과 다를 바 없어졌고, 그대로 달려 나와 가까운 계단으로 돌아서려던 순간 재현의 눈앞에서 비상벨이 울렸다. 제동 걸려 멈춰 선 등 뒤에서 뼈마디가 우두둑 뜯겨 나가며 무언가 뜨뜻한 것이 흩뿌려지면 그제야 직감했다. 곱게 나가기는 틀렸다고. 주춤대는 걸음으로 돌아본 복도는 원래의 색을 잃은 대신 붉게 물들어 있다.
개중 아주 천천히 돌아가는 고개가 하나 있었다. 기이하게 꺾여 덜렁거리는 목을 가눌 새도 없이 피로 얼룩진 나무 바닥을 기어 다가오는.
비록 상황 타개할 일말의 대책 같은 것 떠올릴 새도 없었지만, 그렇기에 인생은 실전인 것이다. 십 년 내도록 막대한 예산 들여 뿌렸다는 학생용 교육 동영상 내용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친다. 일 번, 다른 감염자를 불러 모으지 않도록 소리에 주의하세요. 이 번, 감염자와 안전거리를 유지하세요. 삼 번, 감염자에게 물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방어……. 아니 씨발 이딴 게 다 무슨 소용이야. 등골 따라 쫙 끼치는 소름에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렇게 괴성과 함께 튀어오르는 상반신을 피하려 뒷걸음질 치다 보면 어디선가 그쪽으로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아래턱 뚝 빠져 공포영화 비주얼과 흡사해진 몰골 내려보던 중에 대뜸 팔목부터 낚아채였다. 정신없이 휘둘리는 와중에 언뜻 찾았다, 비슷한 문장을 들은 것도 같았다.
삼 학년 삼 반 문짝이 걸어잠기면 벽 위로 대가리부터 박고 한껏 참았던 숨을 가파르게 몰아쉬었다. 틀어잡힌 손 따라 시선 올리면 피칠갑된 성문고 야구부 유니폼 위로 멀끔한 얼굴이 드러난다.
니가 왜 여기 있냐.
모르겠어요.
몰라?
창문 깨뜨린 것 사과드리고 오래서 올라오는 길이었는데…….
그제야 둘러본 교실은 구석마다 겁에 질린 채 틀어박힌 열댓 명의 아이들로 드문드문 차 있다. 웃음이 비죽 샌다. 그러니까 이게 대국민 몰카 아니고 실제 상황이라고.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입술 짓씹으며 눈 굴리면 주연은 평온하게 웃고 있다. 피투성이가 된 주변을 두고도 멀쩡하게, 이질감 하나 없이.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성문고등학교 야구부 선발 투수, 등 번호 11번 이주연.
십 분 전, 성문고등학교 운동장
기합 바짝 들어간 유니폼 군단. 눈에 띄게 만족한 얼굴의 코치가 차례로 이름 세 개를 호명한다. 서지원, 이주연, 차형우, 잘했다. 며칠만 더 고생하고 마무리 훈련 끝나면 좀 쉬자. 나머지는 옆으로 빠져. 출발. 흙먼지 풀썩이며 질질 끌려나가는 배트 궤적을 따라서 걸음 붙이면 그때부터 혈전이었다. 운동장 양 극단 찍고 바쁘게 내달리는 무리를 한참 지켜본다. 줄곧 비실거리던 대가리가 하나 뒤처져 있었다. 계속, 계속 계속. 보다 못한 주연이 코치 옆으로 다가가 뭐라 속닥거리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고 곧장 손짓했다. 야, 나와도 된대, 오석준!
비틀거리다가 눈치 보며 빠지는 걸음 쫓아 움직이던 주연은 무심결에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야구 모자 챙 아래 시뻘게진 두 눈을 들여다보다가 너 괜찮냐, 묻는 것이었다. 석준은 말이 없었다. 대신 완연한 겨울 날씨에도 땀을 비 오듯이 흘렸고, 날숨마다 더운 열기가 훅 끼쳤고……. 몸살이면 말을 하지, 자식아. 앉아서 좀 쉬어라. 어깨 툭툭 치고 다시 뛰어가는 발걸음이 가볍기 짝이 없었다.
오석준은 득달같이 그라운드로 기어나왔다. 빠질 수가 없단다. 이유 안 붙여도 숨 고르던 선수들은 다 알았다. 봉황대기 우승 목전에 두고 삐끗해서 말아먹었으면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야 하니까. 가뜩이나 실적도 미비한데 훈련에 소홀한 모습 보였다간 바로 나가리였다. 그래, 그럼. 한심하단 듯한 얼굴로 한참 혀 차던 코치도 마지못해 허락했다. 그렇게 오석준이 휘두른 배트에 빗맞아 엉뚱한 방향으로 솟구친 공이 건물 방향으로 직행했다. 틀어지지도 않고 곧게. 타격음만 듣고도 알 수 있었다. 주연은 속으로 셋을 센다. 그러면 곧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코치가 불호령을 내렸다. 야, 오석준 너 이 새끼 나가. 당장 나가! 저기, 주연이 와 봐라. 올라가서 사과드리고 와. 나머지는 집합, 출발. 총애받는 넘버 원이 본관으로 달음박질 치는 동안 운동장 가득 메우는 발소리가 심심한 백그라운드를 채운다.
귀를 찢는 고함이 들려도 단지 개빡친 코치가 길길이 날뛰는 줄로만 알았다. 주연은 돌아보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걸음이 급해 두 칸씩 뛰어오르던 도중, 층계참에서 감염자를 맞닥뜨린 것이. 노란색 플라스틱 명찰이 반쯤 틀어져 있었고 교복 앞섶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2학년 3반 유시은. 복도에서 한두 번 마주친 적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오전 열한 시를 막 넘긴 시각, 주연은 잠시 주춤거리다가 등을 돌려 침착하게 도망친다. 괴성이 들렸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러니까 이건 아주 어렸을 적 눈앞에서 본, 잠깐만, 그런 거 맞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2020년은 아직 주입식 교육이 먹히는 시대였으니까. 주연은 재빠르게 도망쳤다. 한 번에 세 칸씩, 뛰어오는지 기어오는지 모를 감염자를 피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생지옥이 될 걸 알면서도 머리보다 몸이 더 빠르게 굴렀다. 이제 와서 거슬러 내려가긴 글렀다는 것을 알았다. 곧 누구든 쏟아져 나올 테니 위층으로, 더 위층으로.
주연은 감이 좋았다. 한 번도 틀린 적 없었다. 열 살에 처음 공을 쥐었을 때부터 줄곧 그랬다. 스스로 던지는 공마저도 스트라이크인지 볼인지 기막히게 알아챌 만큼. 이변은 찾아오지 않았다. 다만 재난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삼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비상벨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을 때는…….
대한민국, 과연 '좀비'로부터 안전한가?
다음 소식입니다. 지난 2011년을 뒤흔들었던 RVA 바이러스, 일명 '좀비 바이러스'를 기억하십니까? 신약 '리바이벌'이 개발된 이래로 RVA 바이러스는 인류에게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박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여전히 안전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국내외 의학계에서 RVA 바이러스의 변이 가능성이 제시되면서 일각에서는 '좀비 사태가 다시 터진다면 국민은 다 죽으라는 거냐', '사실 규명하여 관련자 처벌하라' 등의 의견이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전문가들 또한 철저하게 대비하여 벙커 시스템과 구호 제도 등을 확충하여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전국 도처의 벙커는 2000여 곳에 달하는 실정입니다. 예산을 횡령하고 값싼 자재를 사용하여 화재가 발생한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으나, 시공을 담당한 H건설은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좀비 영화 클리셰
완벽한 고립 상태였다. 숨죽인 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세 시간 같은 삼십 분이 지나고 나면 본관을 시끄럽게 메우던 비상벨 소리도 이미 멎은 지 오래였다. 시곗바늘이 천천히 돌아갔다. 째깍, 째깍, 째깍……. 소음을 좇아 끊임없이 서성거리는 감염자들의 군집을 가만히 주시하다 보면 저어기 멀리서 폭음이 일었다. 그 소리에 놀란 남자애 하나가 비명을 지르려다 입을 틀어막혔다. 주유소가 폭발했나 봐. 한참을 정체되어 있던 걸음들이 그쪽으로 바쁘게 쏠리기 시작하면 재현은 만류하는 손을 떨치고 은밀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의로) 내내 구겨져 있었던 탓에 앓는 소리가 슬슬 새어 나가도 어차피 바깥에서는 알아챌 수 없는 볼륨이다. 일단은 여기 얼마나 더 처박혀 있어야 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하여간 대한민국 고삼한테는 자원이 이십사시 무제한이었다. 전기세 아깝게. 고개 빼끔 내밀어 곁눈으로 창밖을 쳐다본다. 당연하게도 돈 아까워서 끄려는 건 아니었다. 해가 넘어갈 즈음이 되면 금방 어두워지고, 자연스레 감염자들이 불 켜진 교실 안으로 몰려들 테니까. 조심조심 걸음을 딛는다. 바닥에 잡다하게 흩어진 뭐라도 잘못 밟으면 낭패였다. 복병은 의자 더미였다. 다른 것보다는 어떤 소음도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 관건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재현은 옆에 웅크려 있던 누군가를 툭 건드려 속삭거린다. 해 지면 좀비 몰릴 것 같아서 지금 미리 불 끌 건데, 옆으로 전달 부탁해. 조용히 말해 줘. 혹시나 문 열고 나가려는 미친 새끼로 오해받을까 봐서였다. 전달 사항이 입에서 입을 타고 고요히 흘러 나간다. 그동안 재현은 의자 끌리는 소리 죽이겠다고 느리게 걸음을 끌었다. 그렇게 벽을 따라 천천히 돌다가,
야, 이재현이 불 끌 거니까 조용히…….
…….
이 새끼 물렸어, 씨발!
긁힌 거야. 진짜 조금 긁힌 거야.
한 바퀴를 거의 다 돌아서야 멈춘다. 식은땀으로 젖어든 얼굴이 전에 없이 절박해진다. 전형적인 전조 현상이었다. 믿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재현은 상황을 등지고 신중하게 다음 걸음 딛을 곳을 택한다. 책상 위로 의자가 아슬하게 걸쳐진 그 사이로, 곡예라도 하듯이. 위태로운 움직임에 시선 한 겹이 더해지면 미끄러지는 의자를 먼저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주연이었다. 삐그덕 소리가 청각을 자극했는지 곧 문짝이 묵직하게 들이받혔다. 교실 안을 채우던 음성이 뚝 끊긴다. 이렇게 된 이상 스피드가 생명이었다. 의자를 딛고 스위치를 껐다. 교실 조명이 점등되며 반투명한 문틈 바깥에서부터 낮게 그르릉거리는 울음이 샌다. 재현은 어느새 구석진 책상 위로 틀어박힌 모양새가 되었다. 겨우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낮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뒤를 돌았다. 어둑해질 기미 보이는 하늘을 지나 유리창에 맺혔던 상이 단번에 날아가고 나면 쏟아지는 것은 눈총이다. 겨우 숨었는데 너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쿵, 쿵, 울리는 소리가 일어도 재현은 동요하지 않았다. 대신 원래대로 의자를 끌어 문앞을 틀어막고 나서야 주연을 이끌고 벽 가까이 붙어 앉은 채 그 너머 기척을 살필 뿐.
나 진짜 아니야.
흐느끼듯 터져 나오는 소리에도 일절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모두 침묵했다. 헛구역질과 함께 마른 핏자국 위로 다시 핏방울이 튈 때까지. 밖으로 쫓아내야 되는 거 아냐?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점차 동조하는 목소리가 얹히더니 끝에는 격앙되었다. 벌써 늦었잖아! 저러다가 갑자기 변해서 누구라도 물면 어떡할 건데? 두렵고 무서운 건 피차 똑같을 텐데. 그러나 아무도 선뜻 먼저 나서지는 않았다. 목소리만 낼 뿐, 그냥 그 정도가 다였다. 아직까지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주연 역시 앞으로 튀어나가려는 재현을 저지하며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랫입술이 꾹 깨물린다. 방도가 없다는 것을 알아서 재현 역시 시선을 떨궜다.
그냥 내가, 내가 재갈이라도 물고 가만히 있을게. 나 묶어 놔도 돼. 제발 내쫓지만 말아 줘.
좀비와 인간의 차이가 뭘까? 재현은 생각한다. 단지 죽일 수 있다, 없다의 문제일까? 인간의 지성은 절체절명의 위급한 순간에 얼마나 효용 있게 굴러가는지. 벽면마다 바짝 붙어 죽상으로 목소리를 내던 아이들이 저마다 사물함을 뒤져 쓸 만한 것들을 골라 낸다. 그 애는 손수건으로 입이 틀어막혔을 때 잠깐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가 눈이 가려지자 이윽고 교실을 등지고 꿇어앉았다. 손발이 결박되고, 누군가 떨리는 손으로 귀에 이어폰까지 꽂아 주고 나면 차라리 쳐다보지 않는 편이 나았다. 불편한 정적이 흐른다. 아주 무겁고도 어려운. 그러다가 다시 구석에서 말문이 트였다. 그래도 불을 껐으니까…… 잘만 하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여섯 시 넘어서. 복도만 지나면 계단이잖아. 좀비들이 교실로 다 들어가면 그때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조금만 나오면 출구니까. 아니면 옥상으로 올라가거나. 그리고 구석에서 뒤채는 기척이 잠시 멎었다가 파드득 돋을 때쯤에는 그 누구도 말이 없었다. 재현은 문득 마른침을 삼키며 주연의 팔을 힘주어 붙들었다. 어떻게 할 거야, 이주연. 묻는 소리마저도 고요했다. 대답을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주연의 입모양을 읽고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다. 내다본 창문 저 너머로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FM 97.3hz
시민 여러분들께 알립니다. 우리 군은 한강을 통해 서울 도심으로 진입하여 순차적으로 생존자 구조를 펼칠 계획입니다. 이 방송을 듣고 계시다면 가능한 한 높은 지대로 이동하여 눈에 잘 띄는 표시나 불빛 등으로 위치를 나타내어 주십시오. RVA 바이러스 감염자는 불빛과 소리에 민감하므로 주의하시어 구조를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알립니다. 우리 군은 순차적으로 생존자 구조를 펼칠 계획입니다. 가능한 한 높은 지대로 이동하여 눈에 잘 띄는 표시나 불빛 등으로 위치를 나타내어 주십시오. RVA 바이러스 감염자는 불빛과 소리에 민감하므로 주의하시어 구조를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대화 일부 발췌 (1)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이주연.
일곱 시에 운동장 조명이 켜져요. 밖으로는 못 나가요.
언제 꺼지는데?
열두 시요.
그것보다 어떻게 할 거냐고.
어……, 형 따라갈 건데요.
그건 당연한 거고.
아.
쟤네랑 같이 움직이는 건.
위험하죠.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다른 방법은요.
방송실로 갈 거야. 많이 배고파?
버틸 만해요. 형은 점심 많이 먹었죠. 오늘 치킨이던데.
가방에 초코바 있으니까 이따 애들 나가면 너 먹어.
고마워요. 그런데요, 형.
응.
왜 제 카톡 씹었어요?
…….
제가 분명 카톡 보냈는데요, 음. 핸드폰 벤치에 놓고 왔다.
너 이럴 때마다 나 진짜 울고 싶어.
PM 6:37
불 꺼진 교실 내부를 희미하게 밝히는 휴대 전화 불빛이 있다. 아무래도 나가야겠어. 누군가 운을 떼고 나면 결연한 얼굴로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한다. 어떻게 된 게 가만히를 못 있고 아까부터 창문에 한참 매달려 빨간 마커로 SOS 따위를 커다랗게 휘갈겨 놓더니, 이번에는 못 견디겠다고 자리를 박차야겠단다. 저희는 여기서 구조 기다릴 거예요. 내내 침묵을 지키던 주연이 거수했다. 스물네 개의 눈동자가 주연에게로 굴러들었다. 니가 안 나가면 어떡해? 어딘가에서 반사적으로 물음 하나가 튀어나왔다가 곧 눈치를 먹고 잠잠해진다. 재현이 코웃음을 쳤다. 하, 니들 얘 하나 믿고 나가자고 여태 선동한 거야? 얘 앞세워서 뻑나가면 니들은 바로 후퇴하고? 다시 침묵. 말없이 팔짱을 얽고 돌아앉은 주연이 벽에 머리를 기댄다. 겁대가리만 없으신 줄 알았더니 양심까지 없으시네요. 교실 안 공기가 더욱 더 불편해졌다.
PM 6:45
둘은 다만 방관하는 중이었다. 앞문과 뒷문을 각각 가로막은 두 개의 바리케이드를 양옆에 두고서. 얼핏 보면 대치 상황 같기도 했으나, 어쩐지 반대편은 명백하게 눌린 얼굴들이었다. 복도가 점차 적막해지고 반쯤 열린 창문 너머로 음산한 울음이 일면, 앞문을 빈틈없이 싸고 있던 벽이 느리게, 그러나 조용히 해체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는 것이다. 재현이 가방을 틀어쥐었다. 무릎을 모아 웅크린 채 널브러진 롱패딩을 끌어다가 주연과 나란히 덮은 채였다. 이러다가 우리가 먼저 뒤지는 거 아냐? 우린 안 죽어요. 저는 절대로 형 죽게 안 놔둬요. 단언하는 투였다. 웃음이 터졌다. 막혀 있던 앞문이 다시 드러나고 나면 다들 휴대 전화를 그러쥔 채 숨을 들이켠다. 플래시가 라이트 앞에서도 효과가 있을까. 생각하면서도 주연은 아무 말 않는다. 그냥 패딩 바깥으로 삐죽 튀어나온 재현의 발을 꼼꼼하게 감싸 줄 뿐. 그러고 보니 발에 신겨진 것이 고작 슬리퍼였다. 미간이 구겨진다. 어떻게 하면 좋지. 고민하다가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한다.
PM 6:55
움직이는 기척이 없는 것을 보니 기대 이상으로 잘 움직이기는 했는지 고요했다. 앞문에 다시 자물쇠를 채운다. 재현은 한참 말이 없었다. 손목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여섯 시 오십오 분. 오 분만 있으면 운동장 조명이 켜진단다. 마무리 훈련 시즌이었으니까. 그리고 일은 항상 그쯤에 터지기 마련이었다. 돌아가는 초침을 내려다본다. 55분 57, 58, 59. 짤막한 비명이 울리자 곧 옥상 방향으로 무수한 걸음이 몰리기 시작한다. 휩쓸고 지나가는 발소리를 가만히 듣고만 있다. 음, 옥상은 틀렸고. 밖에서 문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재현, 이재현! 나 좀, 아아아악! 따뜻한 손이 양쪽 귀 위로 덮이면 아무것도 안 들리는 척이라도 해 본다. 아무것도 듣지 마요.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게 맞는 일일까? 재현의 낯빛이 어두워진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내 잘못은 아닌 거지. ……. 아닌 거 맞지? 움켜쥐고 있던 가방에서 초코바를 꺼내 주연에게 내밀었다. 너 하나, 나 하나. 속이 쓰라렸다.
일곱 시는 대낮처럼
몇 번 깜빡이던 조명이 일제히 켜지고 나면, 그때부터 모든 것이 정신없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일 층까지 도달한 아이들 외에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는지 출구 두 곳을 각각 빠져나와 합쳐지는 무리가 있었다. 선두에서 내달리는 인원이 대여섯 명 정도. 누군가 넘어지고 나면 그 뒤의 누군가는 등판을 밟아 다음으로 도약하기를 반복하며 레이스는 이어진다.
쿵, 쿵, 희미하게 울리는 소리에 창문 가까이 다가갔던 주연이 경악하며 뒤로 물러난다. 눈앞으로 감염자 하나가 스쳐 지나간 탓이었다. 잘못 봤나 했지만 아니었다. 불빛을 따라 옥상이나 열린 창문 틈으로 감염자들이 하나둘씩 몸을 내던져 불나방처럼 낙하하고 있었다. 강한 조명에 눈살을 찡그리다가도 손차양을 만들어 바깥을 내다보면 그곳은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뜯어먹히고 뒤엉킨 채로 흙바닥을 구르는. 잠깐 넋 놓은 사이 몇몇은 굳게 닫힌 정문까지 도달해 그 위로 기어 올라간다. 그리고 삽시간에 맥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 위로 좀비들이 득달같이 몰려들었다가 다시 축 늘어져 나가떨어지기를 반복한다. 주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정문 바로 앞에서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잠시 지켜보다 말고 깨닫는다. 스파크가 아니라 총격이었다.
총격은 그 후로도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정문 앞으로 널브러진 사체가 수북하게 쌓일 때까지. 물렸을지 안 물렸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아직 살아 있는 사람까지 사살할 수는 없는 거잖아. 어깨 위로 얹히는 손이 있었다. 고개 돌려요. 재현이 코웃음을 쳤다. 형 앞에서 똥폼 잡지 말라고 서른마흔 다섯 번째 말했다, 하고 속삭이면서. 대낮처럼 밝은 일곱 시의 운동장은 눈부셨다. 눈부셨고 어딘지 처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총성 없이도 얼마든지 퍼질 수 있는 비명 안에서 무력감이 움튼다.
그렇게 할 말을 고르다 말고 비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재현은 시선을 굴렸다. 볼이 불룩해지도록 초코바를 깨물어 삼키는 애. 어이없고 귀여워서 웃음이 터지다가도 곧 세모눈을 뜬다.
너 그렇게 살지 마.
제가 뭘요. (라고 발음하는 듯했다.)
그렇게 귀여운 척하지 마.
어쩔 수 없어요. 원래 그렇게 태어나서.
또라이.
커튼을 모조리 치고 나면 실실 웃는 얼굴을 말없이 노려보던 시선이 칠판으로 홱 돌아갔다. 분필을 쥐고 거침없이 그어 나가는 선과 선이 맞닿아 면을 이루는 도중에도 주연의 눈은 그게 뭐예요, 하고 묻는 것 같았다. 보면 몰라? 교실 배치도잖아. 스스로 보기에도 부끄러웠는지 곧 지우개를 들어 벅벅 문지른다. 하얗게 남은 분필 자국 위로 새로운 선이 그려지면 방금보다는 조금 더 보기 좋은 모양새가 되었다. 재현이 노란 분필을 들어 곳곳에 1부터 8까지 숫자를 적어 내고 나면, 얼마간 생각에 잠겨 있던 주연이 조용히 손을 든다. 정답, CCTV. 그런데 아무나 못 보잖아요.
방송부장 권한으로 볼 수 있거든.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구라야. 경비 아저씨한테 살살 캤어.
그 정도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반응이었다. 어딘지 자존심이 팍 꺾이는 기분이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손을 털고 숨을 고른다. 재현이 제시한 루트는 가까운 서쪽 계단이었다. 왜 서쪽이에요? 여기까지 좀비들이 몰렸는데. 그야 운동장 조명도 들어왔고, 계단 쪽에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재현이 확언하면 주연은 순순히 응한다. 이 층 상황이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은 나가 보기로 했다. 언제라도 다시 뛰어들 수 있도록 문을 잠그지 않고 닫아 두었다. 일단 제가 돌아서 뛰면 무조건 후퇴고요, 형 먼저 앞세워야 할 때는 앞쪽을 가리킬게요. 어두우니까 제가 형 보고 고개를 기울였을 때 보이면 보인다고 고개 끄덕여 주세요. 그리고 이렇게, 손들면 멈추는 거예요. 재현에게 잠깐 손을 들어 보인 주연이 교실 바깥으로 나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 잃은 스니커즈 한 켤레를 들고 돌아온다.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신발 선물하는 거 아니라는데, 지금은 도망쳐야 되니까. 뻔뻔하게 속삭이고 재현 앞에 무릎까지 꿇어 보인 주연이 발목을 쥐고 슬리퍼를 벗겨 냈다. 너는 진짜 그런 소리 좀 하지 마라. 근데 신발이 약간 커. 투덜거리면서도 보일 듯 말 듯하게 올라간 입꼬리로 재현은 얌전히 발을 내밀었다. 스니커즈 끈을 묶고, 매듭까지 안으로 잘 감추고 나면 준비는 끝났다.
잠깐만요.
또 뭐가? 묻는 말 대신 주연을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걸치고 있던 롱패딩을 벗은 주연이 교실 뒤쪽 구석으로 향한다. 아까부터 줄곧 무시해 왔던 존재감. 그것은 입이 막혀 소리 내지 못하고 잔울음만 끓였다. 주연은 그 위로 패딩을 덮어 주었다. 밤이 너무 길고 춥잖아요. 한참 모자라다는 것은 알지만 달리 어떻게 애도할 수 있을까. 재현은 그것을 말없이 응시하다가 방송실 열쇠를 고쳐 쥐며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Round 1
옆 반 교실을 지나면 곧바로 코너였다. 살짝 들여다본 4반 교실은 운동장 쪽에서 들이치는 조명에 정신 팔린 감염자들로 포화 상태. 복도까지 이어진 빛줄기에 이끌린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문이 반틈은 열려 있었으므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긴다. 바깥이 이미 충분히 소란스럽기는 했지만 창문 몇 개는 닫혀 있기도 했고, 옷감 스치는 소리가 일까 봐 다른 옷가지 따위는 챙겨 나오지도 못했다. 텅텅 빈 가방을 무엇으로 채워 넣었냐 하면 간단했다. 피 묻은 후드집업 한 장과 일말의 가책 없이 책상 서랍을 뒤져 찾아낸 휴대폰 대여섯 개, 그리고 충전기가 전부였다.
건물 안팎으로 스며든 냉기에 골이 뻐근하게 시렸다. 벽에 몸을 바짝 붙인 주연이 손바닥으로 잠시 한쪽 눈을 덮어 가린다. 언젠가 들은 적 있다. 어둠에 빠르게 적응하려거든 한쪽 눈을 가려 두었다가 그 눈으로 어둠 속을 들여다보라고. 원래도 그렇게 밝은 데 있지 않았으니 무엇이든 보일 리 만무했지만 주연의 발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층계 앞까지 도달하면 주연의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아주 작지만 낮게, 거친 숨소리가 스쳤다. 멀쩡한 사람이 이 날씨에 맨정신으로 계단 구석에 주저앉아 있을 리 없다는 사실을 배제하고 놓고 봐도 감염자가 틀림없었다. 주연이 뒤돌아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면 재현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맨눈으로는 분간하기 어려운 시야에 잔뜩 미간을 구긴 주연이 신중하게 한 칸을 내려간다. 또 한 칸, 다시 한 칸. 피인지 무엇인지 모를 물기로 진득한 난간을 짚고. 다행히도 구석에 처박힌 신원 미상의 감염자는 골이 제대로 깨진 모양인지, 바로 옆을 지나는 인간까지는 감지해 낼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층계참을 돌아 첫 발을 딛은 순간, 주연의 발 아래 무언가 물컹하게 밟히는 것이 있었다. 큰 소리가 일지는 않았지만 발 아래서 뭉개지는 감각이 생생했다.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춘다. 뒤따르던 재현도 덩달아 어정쩡하게 멈춰 선 채 이리저리 눈을 굴리기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편에서 부산하게 고개 돌아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굳어 있던 관절이 삐걱거리며 기묘한 마찰음을 빚어 내면 주변은 한순간 정적에 휩싸인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반쯤 몸을 돌린 주연이 아래를 가리켰다가 양 손가락을 교차시켜 엑스를 보이고, 이어서 포물선을 그렸다. 밟지 말고 넘어서 내려오라는 말뜻이었다. 열쇠를 쥔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면 재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으니까.
계단을 내려온 주연이 앞편을 가리키면 재현은 몸을 낮춘 채 벽에 붙어 천천히 걷는다. 건너편으로는 여전히 이따금씩 창밖으로 추락하는 감염자들뿐이었다. 정신 팔려 있는 사이 쇠붙이 부딪히는 소음 나지 않도록 방송실 문고리를 더듬어 찾았다. 피와 땀으로 미끄러지는 손이 덜덜 떨려 자꾸만 어긋났다. 뒤에서 옷자락을 넌지시 쥐어 오는 주연을 잠깐 돌아보았다가, 열쇠를 꽂아 돌리고 나면 철문이 열리면서 귀를 찢는 금속음이 퍼진다. 들켰을지도 모른다. 등 뒤의 상황을 가정하자니 단숨에 귓가가 먹먹해졌다. 바짝 얼어붙은 몸이 뒤편에서 떠밀려 방송실 바닥으로 넘어지고 나면 다시 쾅, 하고 무겁게 문이 닫혔다. 문이 다시 잠길 때까지도 현실감이란 일절 없었다. 재현은 그대로 카펫 위에 이마를 처박고 널브러진 채 눈을 깜빡거린다.
너 괜찮아?
갑자기 밀쳐서 미안해요.
고개를 내저으며 주연을 끌어당겼다. 중심 잃고 쓰러지는 몸을 피해서 옆으로 가볍게 굴렀다가, 이윽고 눈높이가 맞아떨어지면 젖은 손을 교복 바지 위로 문질러 닦고 주연의 뺨을 쥐었다. 핏자국이 옅게 묻어난다. 본래는 하얀색이었을 야구 모자를 벗겨 어디론가 던져 버리고 그대로 뒷목을 붙들었다. 정적이 흘렀다. 어색하게 눈만 굴리던 주연이 바닥을 짚어 거리를 한 뼘 남짓으로 좁혔다.
키스하자는 거예요?
헛웃음이 샜다. 자꾸 수작을 부려. 그러면서도 재현은 못 이기는 척 그대로 입술을 들이박는 것이었다. 먼저 불붙은 쪽은 재현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더 솔직해지는 것은 주연이었다. 버석하던 입술이 부벼지다 말고 천천히 포개지면, 열린 틈을 놓치지 않고 주연이 선수를 쳤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핥기를 반복했다가 부드럽게 파고들며 고개를 틀었다. 타액을 머금은 입술이 금방 축축해진다. 숨이 차오를 즈음이 되어서야 떨어져 나가는 주연을 잔뜩 가라앉은 시선으로 응시한다. 심장이 사정없이 두근거렸다.
대화 일부 발췌 (2)
너는 내가 왜 좋은데?
이재현이라서요.
그런 유치한 거 말고.
제가 형 좋아하는 게 유치해요?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
삐쳤어? 주연아, 야. 형 봐봐.
됐어요.
아, 미안해. 형이 잘할게. 여기서 나가면 우리 사귀자.
…….
싫어? 싫으면 관두고.
저는……. (웅얼거려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뭐라고?
너무 좋아요. 당장 뛰쳐나가서 운동장 다섯 바퀴 돌면서 소리 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맛이 갔나?
네?
응, 나도 사랑해.
제가 더요.
알겠는데 거기 청소기 안 돌린 지 꽤 됐거든. 그만 뒹굴고 일어나.
키스 한 번만 더 해 주면요.
Round 2
1234 엔터. 한숨 돌리고 보안 프로그램 창 위에 비밀번호 네 자리를 입력하면 금방 스크린이 켜진다. 간단하게도 뚫리는 보안망에 어이없다는 듯 헛헛하게 웃기만 하던 주연이 재현 옆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형 얼굴이 비쳐 보이네. 그렇다면 뽀뽀. 등판 한 대 얻어맞고 나서야 겨우 본분을 되찾은 주연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노이즈를 그리며 일정한 텀을 두고 계속해서 넘어가는 CCTV 화면을 응시한다. 재현은 개중 이 층 복도를 비추는 캠을 메인 스크린으로 띄워 놓았다. 일전의 진입 과정 때문에 교실을 벗어나 방송실 앞쪽으로 나온 감염자들이 두리번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지금 시각이 여덟 시 사십 분. 앞으로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반이 채 되지 않았고, 달리 부족하지는 않았으나 허송세월만 하다가는 금방 곤란해질 것이 뻔했다. 방송실을 고집한 이유가 단지 냉장고에 꿍쳐 놓은 비상 식량이나 폐쇄되어 안전하다는 이점에 국한되지는 않았으니까. 지나온 루트와 이제까지의 상황을 되짚어 생각해 봐야 할 때였다. 한참 이마를 짚고 있던 재현이 주연을 올려본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옥상은 열려 있기는 한데, 좀비들이 많은 것 같았어요. 원래 경보 터지면 바로 개방되잖아요. 위에서 아주 뚝뚝 떨어지던데요.
체육관은 잠겨 있지. 체육관 옥상에는 자동 개방 시스템 없잖아.
열쇠는 코치님이 가지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운동장까지 나갈 수는 없으니까.
데스크 서랍을 열어 한참 뒤적거리던 재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주연의 조건반사 프로세스가 착실하게 반응한다. 무슨 일이냐며 곧장 다가붙는 주연을 의자에 밀어 앉혀 놓고 미간을 잔뜩 구긴 재현이 허리를 숙여 얼굴을 눈앞까지 바짝 가져다 댔다. 너 달리기 잘해? 백 미터 십삼 초 나와요. 그러면 재현은 방송실 화이트보드를 어디선가 질질 끌고 돌아와서 십이월 학사 일정을 모조리 지워 내고 다시 펜을 들었다. 건너편에 바로 일 학년 교무실 있는 거 알지. 앞문으로 해서 열쇠 보관함까지 갈 수 있어? 대답이 즉각 돌아온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요. 풀어질 줄 알았던 표정이 어째 더욱 굳어진다. 그런 소리는 왜 하냐며 재현에게 이마 박치기까지 당하고 나서야 아야, 하고 되도 없는 엄살을 부리며 주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찾아야 할 열쇠가 두 개야. 체육관이랑 별관 계단 열쇠. 재현의 말은 끊기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다음에는 우리 왔던 복도로 해서 체육관 따고 들어가. 여기까지는 형이 여기서 CCTV로 봐 줄 테니까 귀 잘 열어 놓고, 체육관 문은 다시 잠그지 마. 불 켜고 활짝 열면 더 좋아. 그리고 별관 계단 입구만 잠그고 삼 층까지 쭉 올라가 있으면 돼. 비상 계단 위치 알아? 말인즉슨 백업을 맡겠다는 소리였다. 잠자코 새겨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주연이 입매를 꾹 당겼다. 그러면 형은 어떻게 나오는데요.
계획이 다 있어.
그러더니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주연을 일으켜 세워 유니폼 양쪽 주머니에 주인 모를 휴대 전화 두 개를 하나씩 찔러 넣는다. 무슨 심산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리 하나만큼은 끗발 나게 굴러가는 재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걱정이었다. 저는 허무하게 첫사랑 잃을 생각 추호도 없어요. 나름 엄포 놓는 발언이었는데 재현은 의자에 앉은 채 한 바퀴 빙글 돌며 웃기만 했다. 익숙한 손길로 음향 믹서까지 조작하고 나면 한구석에 박힌 방송용 마이크를 끌어다가 스위치를 켠다. 빨간색 불이 들어왔다. 두어 번 두드린 뒤 가볍게 중얼거렸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소리를 포착한 감염자들의 움직임이 기민해진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궤도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이다. 노이즈 잔뜩 낀 720p 화면을 곧 뚫고 들어갈 기세로 들여다보던 주연이 얼마 지나지 않아 헛웃음을 터뜨렸다. 교실 스피커만 건드려 놨구나. 건물 문 닫힌 건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한구석에 위치한 팔 번 캠에 운동장이 비스듬히 걸려 있었으나 학교 건물 안팎을 오가는 움직임은 일절 없었다. 바깥으로 넘어간 감염자들도 골이 반쯤 깨졌거나 이리저리 쓰러져 널린 사체들 사이로 조명 불빛을 따라 정처 없이 떠돌기만 할 뿐. 그 정도야 뻔하지. 도망치려는 애들이 학교 안에 있는 좀비들까지 다 데리고 뛰쳐나갈 리는 없잖아. 어깨를 들먹여 보인 재현이 채널을 다시 조작해 마이크 볼륨을 조금 더 높였다. 운동장 구석부터 해서 교실 곳곳으로 감염자들이 다시 빈틈없이 몰려들어 떼를 이루면, 그제야 문간 방향을 턱짓해 보인다. 재현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가 허공을 빠듯하게 메웠다.
주연아, 형 믿고 뛰어. 형이 다 알아서 할게.
Round 3
복도를 배회하던 감염자들이 점차 문 안쪽으로 사라지면 재현이 마이크를 건드리는 틈을 타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 사이로 고개를 내민 주연은 복도 건너편의 교무실 벽 쪽으로 몸을 낮추어 움직임을 주시한다. 감염자들은 다른 낌새 없이 여전히 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들이박고 있을 뿐이었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감염자들의 움직임이 전부였고, 주연은 기억을 더듬어 파티션 아래로 기척을 감추고 열쇠 보관함 앞까지 다가갔다. 다행히도 교무실 내부가 적잖게 밝았던 탓에 열쇠를 찾아내기까지의 과정은 그닥 어렵지 않았다. 마이크를 건드리는 소리가 다시금 교실을 울리는 동안 열쇠를 빼낸다. 체육관, 별관 계단. 의문스러운 구석이 쌓였지만 형이 다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까. 다시 문틈을 비집어 바깥을 내다보던 주연이 숨을 틀어막았다. 어디서 기어왔는지 모를 감염자가 복도를 활주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잠깐만 기다리자, 주연아. 재현의 음성이 교실마다 울리면 감염자는 목소리를 따라 애꿎은 문짝을 들이박는 데 여념 없다. 잔뜩 긴장한 것은 방송실에서 CCTV를 들여다보고 있는 재현도 마찬가지였다. 쿵, 쿵. 철문 바깥에서 진동이 울린다. 2층 서쪽 계단으로 그 소리를 들은 감염자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씨발, 다 망했다. 마이크를 붙든 재현이 다급하게 외친다. 지금 뛰어가!
주연은 달린다. 모자가 벗겨지든 말든 개의치 않고. 차라리 활주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괜찮으니까 뒤돌지 말고 그냥 앞만 봐. 코너 돌 때 조심하고. 발소리에 잠깐 걸음을 돌렸던 감염자들도 재현의 말이 이어지자 죽은 눈으로 스피커를 멍하니 쳐다본다. 점차 속력이 붙으면 계단이 목전이었다. 감염자들보다 한 걸음 앞서 벽을 짚고 왼쪽으로 방향을 튼 주연이 소강당을 지나 앞으로 내달린다. 한 번 더 돌아 통로를 향해 직진하면 굳게 잠긴 체육관 문이 보였다. 아직 뒤따르는 발걸음이 있다. 다급한 마음에 열쇠가 자꾸 엇나갔다. 주연은 유니폼에 꽂아 두었던 휴대 전화 플래시를 켜서 지나온 코너를 향해 힘껏 미끄러뜨린다. 감염자들이 빛을 향해 몰려든 틈을 타 주연은 몸을 숨기고 조용히 문을 열어 제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주연을 반겼다. 가쁜 숨을 고른다. 잘 해낼 줄 알았어. 재현의 목소리가 귓전을 오래오래 맴돌았다.
주연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면 재현은 5번 캠을 내리고 11번 캠을 확대한다. 스크린 구석에 계단으로 통하는 유리문을 여는 주연이 걸렸다. 이윽고 체육관 내부가 새하얗게 밝아진다. 이제 된 것 같은데. 내내 손에 땀을 쥐고 있던 재현이 그제야 여유를 되찾았다. 컴퓨터 폴더 하나를 클릭해 열어 놓고 오래도록 고심한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이어서 할 일은…….
Stop, now let's begin
You're in too deep to go back again
Cash, it's pay-to-play
You want more hits than a lemonade
그다음부터는 온전히 재현의 몫이었다. 허공을 떠돌던 재현의 목소리가 멎고 나면, 운동장과 체육관에 락 음악이 깔린다. 감염자들이 본능과 육신밖에 남지 않은 몸으로 소리를 따라 질주한다. 발걸음 소리가 철문 너머의 복도를 무겁게 메웠다. 의자에 앉은 채 책상 위로 발을 올리고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던 재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냉장고를 뒤적여 물 한 병과 옷가지, 남은 휴대 전화들을 구겨 넣고 가방을 앞으로 멘다. 누가 놓고 갔는지 모를 롱패딩까지 껴입고 나면 준비는 끝났다.
No, you don't own me
You don't even know me
Who, this vagabond
With a toop hop back to the great beyond
CCTV를 돌린다. 11번 캠에서 다시 4번으로. 앞다투어 미끄러지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며 달려가는 감염자들의 얼굴은 어딘지 익숙하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해서 재현은 잠깐 침묵한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 있겠느냐만은. 1번부터 3번 캠을 모조리 메인 스크린 아래 깔아 놓고 한참을 주시한다. 바깥을 울리던 소리가 어느덧 줄어들고 캠을 가득 메우던 광경마저 한산해지면, 체육관을 가득 메운 인파를 내려다본다. 형이 갈 테니까 거기 있어. 한마디만을 남기고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볼륨을 최대로 키운 뒤 철문을 열었다.
How, say genuine
A ground floor up, I can help you find
Oh, you're a dreamer
Call me when you're Bieber
재현이 향한 곳은 동쪽 계단이었다. 감염자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고요했다. 천천히, 그러나 가벼운 걸음으로 층계를 걸어 내려간다. 입구 바깥으로 몰린 감염자들을 발견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조금 더 서둘러야 했지만.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더 이상 목소리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 행정실 문 앞에 멈춰 선 재현이 불 켜진 내부를 살폈다. 닫혀 있는 문 안의 감염자는 한 명. 기척 없이 뒷문을 반쯤 열어 놓고 스위치를 더듬어 불을 껐다. 내내 신경이 팔려 있던 감염자가 체육관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를 들었는지 문득 고개를 돌려 천천히 걸어 나온다. 이 층 계단으로 달음박질 치는 발길은 어딘지 짐승의 무언가에 더 가까워서 소름이 돋는다. 그새 다시 밖으로 몸을 숨긴 재현이 타이밍을 맞추어 앞문으로 뛰어들었다. 필요한 것은 일 층 유리문을 여는 별관 계단 열쇠 하나.
And when they play it
You can't help but sing along
That's nothin' odd, that's nothin' wrong
'Cause a good song never dies
너무 서두르지 말고. 열쇠를 쥔 손 안이 땀으로 젖어들면 금속 냄새가 배긴다. 추위로 얼얼해진 코끝을 문지르고 숨을 들이쉬었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발걸음 소리에 맞추어 창밖으로 살아나는 움직임이 있었다. 애써 무시해 본다. 신경 쓰지 마. 그냥 앞만 보고 달리면 돼. 닫혀 있는 문 앞으로 누군가 머리를 들이박는다. 야구부 유니폼. 두어 걸음 물러나 코너 뒤로 몸을 숨겨 보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재현은 멈칫거리다 차라리 앞으로 돌파하는 편을 택한다. 계단까지 다섯 걸음을 앞두고 위태롭게 흔들리던 문이 결국 파열음과 함께 깨지고 나면, 다시 어디선가 팔목을 낚아채는 손길이 있다. 올려다본 앞에 주연이 서 있었다.
It just reminds of where you were
The first time it made you cry
The first time you felt alive
No, a good song never
계단 문을 잠그자마자 주연은 정신없이 뛰어간다. 무언가 더 물을 새도 없이. 위층으로, 층계참을 돌아 더 위층으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입술을 꾹 깨물고 아무 말 없이 보폭을 맞추어 내달릴 뿐. 삼 층까지 단숨에 도달하고 나면 주연이 다시 열쇠로 빠져나온 문을 잠가 버린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막상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쳐다보는 주연은 어딘지 굳은 표정을 하고 있고, 재현은 그제야 메고 있던 가방을 툭 떨궈 놓는다. 멋쩍게 웃으며 뺨을 잡아 입술을 꾹 눌렀다 떼면, 주연이 기다렸다는 듯 끌어안아 온다.
No, a good song never
The first time it made you cry
The first time you felt alive
No, a good song nevet
Dies
대화 내용 발췌 (3)
그러게 올라가 있으라니까.
제가 어떻게 그래요. 저는 형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데.
형만 믿으라고 했잖아.
저 안 내려왔으면 어떻게 됐을지 뻔하잖아요.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되는 걸 가지고.
알았어, 고마워. 그런데 지금 몇 시야.
아, 이제 막 열두 시 됐네요. 구조대는 언제 올까요?
해 뜨면 오겠지, 뭐. 조명 꺼졌다, 주연아. 플래시 켜 놓을게.
춥지는 않죠.
어어, 누가 아주 딱 달라붙어 있어서.
땡, 제 마음이 불타고 있어서요.
너 헛소리할 때마다 아주 깨물어 버리고 싶어.
어쩌라고요. 형은 이런 저도 좋아하잖아요.
그렇지. 좋아하지.
알았으니까 우리 사귀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