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struck
2024
5th Juyeon Hyunjae Webzine

Watch stars, we can count’em from the rooftop. I just want you baby I don't need nobody else here.
Gotta show you off, but later keep you to myself.

 

 

Whenever a man does a thoroughly stupid thing,

it is always from the noblest motives.

- Oscar Wilde

 

 

사람이 철저히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는 것은,

가장 고결한 목적이 있을 때이다.

오스카 와일드

 

 

 

 

 

 

 

 

 

 

 

1.

 

저 새끼 잡아!

 

해마다 봄이 되어 땅이 녹기 시작하면 쏟아지는 막걸리 냄새와 동시다발적으로 스멀스멀 올라오던 최루탄의 탄내. 평생 잊지 못할 향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으나, 망각의 기준을 따지기에 대학졸업 후 겨우 이 년이었으므로 퍽 민망했다. 재현은 이제 어엿한 사회인으로써 익숙한 향의 교정을 달리는 중이었다. 허리춤에 찬 무전기에서는 최 경사의 욕설 섞인 응원이 새어나왔고, 그 바로 옆에 찬 삐삐에서는 알 길 없는 알림음만 정신없이 울려댔다. 삐이삐이, 야 더 빨리 못 달려?, 삐익 삑, 코너 돈다 지금 잡아!, 삐삐삐삐.

 

안타깝게도 최 경사의 욕은 재현만이 들을 수 있었다. 욕 먹는 놈은 결국 이재현이란 소리였다. 스피커를 앞으로 쭉 빼며 야 이 새끼야 안 멈춰?! 협박을 해도 쟤가 들을 확률은 희박했다. 그렇다고 버젓이 멀쩡한 무전기를 냅다 던져버릴 수도 없는 것이, 재현은 강력3반 막내를 1년간 전전하고 있는 한낱 박봉의 공무원일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3분 준다. 괜히 소란 일으키지 말고.

 

교정을 넘어 별관으로 달리는 뽕쟁이의 신분은 이로써 확립되었다. 강남 8학군 토박이의 대학생이거나, 학교지리에 빠삭한 졸업생이거나. 재현은 전자이길 간절히 빌었다. 아마 강력3반의 유일하고도 공통인 희망일 터였다. 꼬인 실타래에서 하나를 툭, 잡으면 우르르, 풀려나는 소포박스 비스무리한 단서나 공범을 기대했다. 그 속에 들은 것이 무엇이든 간에, 하필 막내인 이재현이 일생일대의 중요한 하나를 잡았으니 놓치지 말아야 했다.

 

귀가 터질 법한 재현에게 있어서 한시라도 시급한 일은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었다. 일단 삐삐의 모든 버튼을 잡아 눌렀다. 말캉한 고무재질이 미끄덩거리며 잘 눌리고 있는 건지 모호했으나 뇌를 관통하는 경고같은 알람음의 소리가 죽었으니 그로써 만족했다. 재현은 1층의 계단을 두 개씩, 이따금 세 개씩 올랐다. 점박이같은 계단들이 몇 갠 줄도 몰랐다. 가장 높은 계단의 혼자 비정상적으로 큰 턱에 자꾸만 걸려 넘어질 뻔한 게 네번이었지만 우선 뛰었고 계속 달리다가 설령 무릎이 깨지는 한이 있어도 저 하얀 랩을 검은 봉다리에 담은 새끼만 잡으면 된다, 뭐 대강 그런 취지였다.

 

차에서 다리 뻗고 히터바람을 즐기고 있을 최 경장은 어디까지 들어가냐며 그거 하나 못 잡느냐 소리를 질렀다. 재현 또한 부러 거친 숨소리를 부각하는 동시에 궁금하다고 내뱉으려는 순간 활짝 열려진 강당의 문을 보고 방향을 바꾸어 씨발, 군말 없이 무전기를 원위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 망할 강당 속에서는,

 

"사랑하는 94학번 입학생 여러분."

 

 

 

군중을 가득 메운 입학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

 

 

 

"봄을 기다리고 계실 학우 여러분들 앞에 이러한 영광의 자리를..."

 

각고한 노력으로 이자리에 섰을 수많은 미래인재들과 사회에 대한 불만을 대학생이라는 신분으로 풀어내길 도모하는 소수이자 다수의 X세대들에게 참으로 미안한 일이지만, 재현은 모두의 어깨를 치고 곧장 뻗어나갔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너 이새끼 지금 어디야?, 아하하 죄송합니다. 사회적 체면을 구기지 않으려는 마음이던 재현은 조그마한 경찰 뱃지를 학부모들에게 내밀었다. 아니, 저건 그냥 옷핀이잖어 영장도 없이 어딜... 인색한 웅성거림에 얼굴이 홧홧해졌다. 무전기 너머 최 경사의 기어가 철컥이는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곧이어 차문이 열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잡지 못하면 난 여기서 죽도록 맞는다, 불같은 성격의 직장상사는 본능을 충실히 깨워주기 마련이었다. 다급해진 재현이 경찰봉을 꺼내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저희는 앞으로 사회를 이끌어 갈..."

"!!!!!"

 

마이크를 뚫고나올 성량은 못되었으나 주위의 어수선함이 무대까지 전달된 모양이었다. 익숙한 얼굴의 교수 몇 명과 앳된 얼굴의 학생회장, 그 너머로 가운데 단상이 희끄무리한 무대의 계단을 올라가는 검은 봉다리까지. 재현은 어느 시점부터 귓속을 후벼파는 카메라의 셔터소리와 마주했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 사건은 적어도 신문 4면 즈음에 나올 만한, 속된 요즘말로 '이슈'였다. 신랄한 공권력에 대한 비판을 첨언하는. 유독 언론에 예민한 경감이라도 신문을 볼 적엔... 재현네 서가 대대로 까일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잡지 못하면 죽음 혹은 시말서였다.(둘은 동의어이기도 했다.) 손에 땀이 흥건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희망찬..."

"좀 지나갈게요!!!!"

 

아 쫌!!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는 플라스틱 의자행렬이 끝나자 무대의 건너편을 모색하는 봉다리에게 육두문자를 외쳤다. 최 경사의 헉헉이는 숨소리가 동력이었다. 봉다리를 쫓는 재현은 최 경장에게 쫓기고 있었다. 생존본능이랍시고 쫙쫙 뻗어나는 다리가 슬 아릿했다. 비켜, 안비켜?! 괜한 스물들에게까지 역정을 냈다. 학생회장은 굳게 본인의 말을 이어나갔으므로 상황은 범죄스릴러보다 코미디에 가까웠다. 음질이 썩 뛰어나지 않은 마이크에 숨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일정한 간격이었다. 꼴에 입학연설이면 질기게 노력했을 터였는데, 아주 살짝 미안하지만 괘씸한 마음이 더 컸다. 이만하면 비켜줄 법도 한데 말야. 인천서 처음 상경할 때 1970년대에 버스안내양을 하던 재현의 고모한테 서울놈들 고집이 옹골차단 소리를 듣긴 했었다.(그는 이제 인천의 한 백화점에서 엘레베이터 안내원을 한다.) 징글징글한 강당의 끄트머리로 올라간 봉다리와 거리를 좁히기 위해 눈이 아픈 흰 조명을 사이로 무대중앙을 올랐다. 흰 조명이 재현을 비추자 열기가 훅 치밀었다. 구두를 신은 재현에겐 제법 미끄러운 재질의 바닥이었다. 다만 패기좋게 뛰어들었던 것이 화근이었다고. 염병할 왁스를 통 째로 부어버린 줄 알은 원목은 거즘 사백 년 간 무탈할 터였다.

 

"지금이라도 자수하면!!!"

 

경찰봉을 우악스레 휘두르며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봉다리에게 집어 던졌다. , 우렁찬 소리를 낸 가죽 재질의 그것은 왼쪽의 깃대를 맞고 튕겨져 강당의 피아노 페달 밑으로 굴러갔다. 그럼에도 최소한의 희망마저 사라진 재현은 목청이 터져라 외치던 중이었다. !!! 지금!!!이라도!!! 자수를!!! 한다면!!!!

 

"이리하여 제63회 입학식을 마무리...."

 

애꿎은 학생회장의 몸에 자빠지기 전까지는.

 

 

 

.

 

나무판자에 정통으로 머리를 박은 학생회장은 곱게 눈을 감은 채 누워있었다. 대학장 격의 교수가 분노섞인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저기요, 이보세요. 눈깔을 희떡 뒤집어도 흰자만이 보일 뿐이었다. 뜨거운 조명 밑에서 땀 한 방울 흐르지 않은 학생회장은 덩치에 답잖게 핏기가 돌지 않아 병약한 목각인형 같았다. 특히 테레비 틀면 나오는 희연 연예인들을 똑 닮았단 생각이 들었다. 길게 빼인 눈꼬리는 축 처진 것 같으면서도..., 아니 일단, 눈을 좀 떠보세요. 억지로 열은 눈의 동공이 위쪽을 휘돌았다. 오소소 소름에 학생회장의 몸을 더듬어봤다. 심장마비인가?

 

 

아악.

 

헐떡이며 입성한 최 경사의 우렁찬 재현아 뭐하냐!! 에도 반응할 수 없었다. 아 진짜 좆됐다. 본인의 운명을 직감한 것은 그의 손목때문이었다. 아마도 새로 맞춘 듯한 치수가 조금 긴 양복을 살짝 걷어내고 나면, 떡하니 시간을 가르키고 있는, 언젠가 많이 봤지만 그건 압구정동 혹은 테레비 광고 속이라고 확신할 수 있던,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R로 시작하는 명품 시계... 한 마디로 롤렉스가 있었단 소리였다 한낱 대학생이. 재현의 일년 치 월급으로도 겨우 살 그 시계를 손목에.

 

"니가 돌았니 재현아."

 

지식인 앞이라고 고상한 서울 사투리를 쓰는 최 경사는 누가봐도 전라도 사람이라 우스웠다. 재현이 허망한 눈빛으로 손목을 들어올릴 때부터 교수들은 알게모르게 헛기침을 동반하면서까지 초조한 모양새였고 최 경장 또한 헙, 잠시 멈칫했으며 그로 인해 재현은 더욱 불안해졌다. 롤렉스가 얼마드라. 얼핏 봤을 때 저 사소한 넥타이도 루이비똥일 뿐더러 넥타이핀은 무게가 나가는 것이 순금같았다. 평범한 직장인의 싸다구를 후려칠 착장이었다. 재현이 학생회장의 뺨을 몇 번 더 갈궈봐도 그는 뇌진탕인지 당췌 일어날 생각을 안했다. 곱게 감은 눈때문에 수시로 코에 중지를 대어봤지만 숨은 쉬고 있었다. 다행이다, 그래도 살아주긴 살아줘서...

 

인생 망하는 데엔 1분이면 족하다는 옛어르신 말들이 다 맞았다. 재현은 심지어 1분도 아닌, 정확히 13초 만에 평생 벌지 못할 돈을 손해배상금으로 날려버린 거였다. 진짜... 진짜 좆됐네... 현실을 직시했다. 실소가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재현은 그의 손을 부여잡고 울다시피 웃었다. 눈물이 나올 것만도 같았다. 진심으로 사죄하면 정상참작이 나올 수 있을지도 않을까, 그런 간사한 마음도 아주 잠깐 들었다. 그 뒤 대가리로 날아오는 손바닥 하나.

 

 

 

불쌍한 이재현은 1994221, 절묘한 연단의 위치로 언론의 몰매는 피했으나 최 경사의 빠따는 피할 수 없었다.

 

 

 

 

 

 

2.

 

마른세수를 연거푸 열 번정도 했다. 멀건 피부가 마찰때문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의 재력을 고려하여 특실로 잡아두긴 했는데 십분에 이 만원이었다. 육십 분이면 십이 만원, 하루면 아마 대학등록금 정도는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경찰 동기였지만 저보다 먼저 경장 승진시험에 합격한 이윤미가 재현에게 던져놓고 간 갱지를 살폈다. 1993년 겨울에 발간한 주간지였는데, 무려 경제성장기에 조선 사업으로 대박을 친 유성그룹의 이모저모를 살피는 내용으로만 6쪽을 채웠다. 간간히 끼워진 가족사진에는 흐릿하지만 유독 어리고 뽀얗게 생긴 '막내아들 이주연'이 착실한 정중앙에서 자리잡고 있었다. 빡빡 민 머리를 보면 제대한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나, 부터 그냥 귀한 집 자식이 아니라 25녀의 정말 귀한 그룹 자제분의 머리통을 깰 뻔 했구나, 까지 넘어가니 정신이 아찔했다. 청소년기 온통을 엘에이에서 보냈다던데 윤미는 이걸 어찌 구했을까. 애초 어떻게 알아보았지 죽은 듯이 자는 사람 면상을 보고.

 

극악의 확률로 1992년 서울시 최초 여성 경찰 타이틀을 달았으므로 그의 집념은 재현조차 인정하는 편이었지만, 딸랑 기사사진 하나로 오늘 쓰러진 놈의 얼굴을 기억해내자 최 경사도 몸서리를 쳤다. 유독 그가 부잣집 도련님들의 여흥에 흥미를 가지긴 했다. 생각보다 막장이고 골 때리는 놈들이 비일비재했으니까. 그의 얼굴에만 빨간펜으로 동그라미를 돌돌 감은 걸로 보아 시집 갈 생각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나 했다. 어이구, 별표까지 쳐놨다. 이윤미는 이런 취향인가부다. 부케는 죽어도 안받겠다던 그의 속내를 살피니 조금 많이 웃겼다.

 

"..."

"정신이 듭니까?"

"..."

"...내 말 알아듣겠어요?"

 

다른 곳도 아니고 머리가 다쳤으니 당연 기억상실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 당장 무얼 찍어볼 순 없고 일단 일어나서 경과를 살펴보자고, 의사가 그랬다. 재현이 손깍지를 끼고 새끼손가락의 굳은살을 잡아 뜯었다. 초조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주연씨, 본인의 이름이 들리니 짐짓 움찔했다. 다행히 언어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지 이름도 기억하고. 혹시 실어증이? 고작 사람 하나(비록 백팔십이긴 했지만은)가 지한테 뛰어들었다고 말을 못한다니 그건 그거대로 황당했다. 일단 기다리세요.. 의사 불러올게요. 최신식 테레비의 전원을 돌리다가, 순간 티비 속 오렌지족 생각이 났다. 하도 그들을 타깃으로 한 혐오범죄가 들끓기 때문에. 재현은 저들이 뭐 어떻게 죽어도 관심 없는 축이었기에 상관 없었지만 주연에게는 심각한 현실로 와닿을 수도 있었다. 가뜩이나 정신적 충격으로 말도 못하는 친구에게 더 강한 자극을 주긴 싫었다. 결국 테레비대신 왼편의 라디오를 틀었다. 교회방송으로 주파수를 맞추었더니 예스러운 찬송가가 흘러나왔다. 그래, 확실히 이 편이 낫겠다.

 

받아온 시말서도 작성하지 못하고 의사를 부르러 나갔다. 말을 안하는데요 선생님 아니다 못하는건지 안하는건지 잘 모르겠네요. 일단 잠시 시간의 경과를 지켜보시고... 일어났다니까요 눈을 떴다고요, 일단 회진을 다녀오고 그때... 긴급이라며 달려오는 간호사의 말에 밀쳐진 재현은 실소를 터뜨렸다. 운이 없는 날이다, 운이 없어서 이따구로 살살 긁히는 중인거다, 그러니 진정하자. 참을 인 세 번 쓰고 돌아섰다. 혼자 맞닥뜨려야 했다.

 

터덜터덜 특실로 들어가는 동안 일말의 죄책감과 어색함과 미안함과 수치스러움이 동시에 물밀듯 밀려왔다. 갑갑한 오장육부를 비우기 위해 큰 한숨을 들이쉬고 차가운 쇳내가 나는 손잡이를 잡으면 끼익하고 드르륵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학생회장은 탁상에 놓여있던 과일바구니의 포도를 톡톡 떼어내며 테레비를 보고 있었다. 뭐야 리모컨이 있었네... 머쓱해져 소음으로 전락한 라디오 볼륨을 최대로 낮췄다. 아니, 이런 거 맘대로 드시면 어째요. 재현이 그의 포도를 뺏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이주연. 모를 쎄함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형사님이세요?"

"....예에."

"저 진짜 멀쩡해요. 집에 좀 보내주실래요.“

 

, 아까 고정해둔 발목의 수갑이 떠올랐다. 다행히 실어증은 아닌 주연이 맨발을 흔들었다. 죄송, 죄송합니다. 바지 주머니를 더듬어 열쇠를 찾아 덜그럭 수갑을 풀었다. 저의 피해자에게 무의식적으로 피의자 취급을 해버린 데에 더 미안했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그렇게 혼자 속으로 타협했다. 젊은 나이에 험한 꼴을... 혹여 뇌에 손상이 갔을 수도 있으니 꼭 정밀검사를 받아보시구요... 구차한 재현의 변명을 끝맺는 동안 이주연은 듣지도 않고 바지 겉주머니를 더듬었다. ?

 

"제 페이저 어디있어요?"

"뭐 뭐요?"

"제 페이저... 그러니까 그게 이름이... 비퍼?"

 

페이저고 비퍼고 나발이고 재현은 온통 처음 듣는 단어였다. 벙찐 재현이 어벙거리고 있으니까 주연 쪽에서 이골이 났다. 다 큰 성인남성이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저희 어머니가 아시면 큰일 나세요. 좀 엄격한 집안이라. 벌써 알리신 건 아니죠? 뭐 뉴스에 나오진 않은 것 같고. 예예 엄격하시겠지요... 유성그룹 막내아들이라는 사실은 알리지 않을 생각인 듯 해보여 재현도 모른 체 하기로 했다. 주연은 붉게 달아오른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고 병실 바닥을 뚫어져라 살펴봤다. 비퍼같은 소리하네, 골몰하던 재현은 맛이 간 제 삐삐를 순간적으로 떠올렸다. 최 경사에게 44441818, 8282를 수십 번도 더 받은 그 '삐삐'.

 

"삐삐라면 그... 밑 서랍장에 뒀는데요."

"...개박살이 났네요."

"그쵸. 좀 많이... 금이 갔죠."

 

재벌아들래미스럽지 않은 단어선택이었다. 주연이 길게 삐져나온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괜찮아요. 새로 갈면 되잖아요. 왜 저한테 동의를 구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돈을 달라고 할 경우에 더 낭패를 볼 재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연은 그 헬렐레한 병원복 차림으로 어딜 가려는지 임시방편으로 숨겨놓은 지갑과 소지품들을 전부 찾아내기 시작했고 재현은 아까 검은 봉다리와 관련해 묻고 싶은 질문이 산더미였지만 하물며 삐삐가 삐삐가 아니고 페이저나 비퍼라고 부르는 이유도 궁금했으나 잠자코 문을 열어 주연을 보내주었다. 그가 나가기 전 내뱉은 한 마디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병원비는 제가 낼게요."

 

족히 서너살은 더 어려보이는 남자가 지갑을 열어재끼는 일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존심따위야 고작 재물로 꺾이지는 않은 인생을 살아온 터라 재현은 주연이 저의 자동차까지 데려다달라 부탁했을 때도 즐겁게 받아들였다. 절대 그가 택시비의 두 배를 준다고 호언장담해서는 아니었고.

 

주연은 교정 주차장으로 향하기 전 통신업체에 들리자며 길을 틀게 만들었다. 신세대의 패기란 이런 것인가. 요즈음 대학생들은 삐삐없이는 한 시간도 견딜 수 없나? 무채색의 옷에 잠바 하나 걸친 주연의 머리카락은 스프레이의 효력이 다해 맥아리없이 풀썩 주저앉았다. 재현은 못 이기는 척 주연이 원하는대로 핸들을 꺾었다. 값은 톡톡히 받을 터였다.

 

"같이 안 가세요?"

"제가 거길 왜 가요."

"네 뭐... 먼저 가심 안돼요.”

 

알겠다는 의미로 안전벨트를 풀었다. 벨트 풀고 운전하면 벌금만 4만원이었다. 핸들 왼편에 꽂아둔 삐삐 위에 놓인 만년필로 시말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윤미가 경장을 달고 자축선물로 강력팀에 전부 돌린 것이었다. 모나미펜이 익숙한 이 상경은 만년필로 새로운 글씨체를 구사하는 중이었다. 미제라서 비싼 건 알겠지만 영 재현과는 맞지 않았다.

 

'금번 본인은 1994221일 마약 소지 혐의의 밀매범을 잡기 위하여 민간 대학 내로 들어'

 

똑똑, 유리창을 건들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죄없는 포니의 크락션을 울렸다. 만년필 심지가 부욱, 시말서의 정중앙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 되는 일이 없다. 한숨 거하게 내쉰 재현이 상체를 쭉 뻗어 락커를 열었다. 씨익 웃는 주연이 귀엽지 않느냐며 젖소 모양의 삐삐를 재현에게 자랑했다. 직접 개통하는 건 처음이라 시간이 좀 걸렸어요. 아아 그르세요. 큼지막한 두 손으로 작은 제 삐삐의 버튼을 만지작거리던 주연이 갑작스레 시동을 거는 재현의 손을 덥썩 잡았다. 일단 인사말부터 녹음하고 가잰다. 얘를 어쩌면 좋지, 속으론 그렇게 씹다가도 겉으론 예예, 그르세요만 반복했다. 다시 차문을 박차고 나가는 이주연. 본인은 인사말따위 생략해버리는 편이라 내용이 궁금했고, 공중전화에 사람이 많아 혹여 그를 알아보기라도 할까 잠깐 담배를 태우는 척 길거리로 나섰다. 경찰차에서 나오는 재벌 도련님은 달달한 기삿거리였으므로.

 

유리를 관통하는 주연의 목소리가 선명했다. 예상 외의 앳된 소리가 흘러나왔다.

 

"89학번 진유경 학우를 찾습니다."

 

줄곧 긴장이 역력한 표정이던 주연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유경? 흔해빠진 이름인데 조금 낯설었다. 실종신고라기엔 민망한 한낱 제 삐삐에, 누군가를 찾습니다, 그 말투가 사뭇 진중해서 더 묘했다. 여자친구에요? 동갑인가? 재현이 주연의 어깨를 툭 치며 캐물었다. 저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선한 마음에서였다. 받아야할 게 있어서요. 좀 급한 일이라... 말끝을 흐리는 주연의 시선이 불안정했다. 좋을 때네. 미심쩍었지만 구태여 엮이기 싫었다. 단정한 대학생의 사라진 연인을 찾는 일이래봤자 꼴랑 소리소문 없이 유학에 가는 거 그 뿐이겠지. 조수석의 차문을 열어주며 생각했다. 에스코트 받는 행색이 퍽 익숙했다. 자주 있는 일인 양 굴었다. 사람은 태초 간사한지라 살짝 배알이 꼴렸다.

 

"이게 뭐에요?"

"...경위서요."

"아 저땜에."

 

됐어요 그냥 내려놔요. 여분의 종이는 조수석 앞 트렁크에 있었다. 귀신같이 알아챈 주연은 오늘 일의 보답이라며(대체 본인이 보답을 왜?) 만년필을 흔들었다. 제 글씨체가 꽤 예쁘거든요. ...너무 예쁘게 쓰면 안되는데. 왼손으로 쓸까요? 아 그냥 이쁘게 해요. 좌회전을 하던 재현이 주연에게 파일철을 내밀었다. 여기 위에 쓰세요. . 감사합니다. 돈 많은 놈이 정 많다더니. 머리가 아플텐데..., 그 사실을 빤히 알아서 사소한 호의가 배로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적어나가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글재주도 있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대치동에서 이십 년을 썩혔을 건데 논술학원 하나쯤은 껌도 아닐 것이었다. 교정에 도착해서 갈무리하는 주연을 기다렸다. 대충 써요, 형식적인 말을 갖다 붙였음에도 주연은 열과 성의를 다 했다. ! 밝은 외침 끝에는 정형화된 글씨가 일자로 나열되어 있었다. 꽤 아름다운 시말서다. 제법 문학작품 느낌도 났다.

 

"이 숫잔 뭔데요?"

"제 삐삐번호요."

"제가 그쪽 번호가 왜 필요해요. 주연씨가 어디 아프면 저한테 연락해요."

"아 그럼 적어주세요."

"그냥 경찰서로 오지..."

 

서는 좀, 그렇잖아요. 추위가 훅 들어오는 교문 앞에서 포니의 차창 사이로 어정쩡하게 손바닥을 내민 주연은 어쩌라는 식으로 쳐다보는 재현에게 저가 손에 쥐고 있던 만년필을 건넸다. 이걸루, 여기에 적어주세요 일단. 아프지 않겠어요? 악필이 대개 그렇듯 필압이 센 편에 속하는 재현은 눈치를 살폈다. 뭉퉁한 손끝이 움츠러드는 게 느껴졌다. ... 언젠가 연락해요. 주변이 붉게 달아오른 것을 애써 모른 척 했다. 덜 마른 잉크가 그의 손바닥을 파고 녹아들었다.

 

"형사님도 그거 버리지 마시구요.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맞다, 검은 봉다리. 유유히 걸어가는 주연의 등 뒤로 듬직함이 느껴졌다. 비록 설레발이지만 주연의 재력과이력을 미루어보아 예상보다 이롭고 도움이 될 만한 파트너를 찾은 것 같기도 했다. 시말서 맨귀퉁이에 적어놓은 전화번호를 뜯어 자켓 안주머니에 간직했다. 실적 따고 표창장 받은 다음 승진시험 쁘라스 점수까지 따기, 유구하며 유일한 희망이 다시금 피어올랐다.

 

 

 

 

 

 

 

3.

 

"?"

 

. 막걸리나 퍼마시지 왜 역정을 낸대냐. 낸들 알어, 그쪽 의경들이 나가긴 했다는데 할 일도 없고 해서 우리도 구경이나 가자구. 혹시 아니, 걔네도 같이 잡힐지.

 

윤미는 다행히 똥폼은 잡지만 위계질서는 없는 상사였다. 느닷없이 다나까를 따박따박 붙이는 것도 웃길 뿐더러 그는 기가 막힌 신여성 축에 속하기에 수직관계보단 수평관계가 좋단다. 재현은 경장님 앞에서 대놓고 담배를 까는 그의 패기가 멋스러웠고 동시에 저가 덜떨어진 기분이 들기도 했다. 저번 승진시험에서도 재현이 열등했고, 그 결과가 입증했다. 낙과 합격. 사내새끼가 떨어지고 계집년이 붙었다며 한동안 흉흉한 분위기가 웃돌았으나 동안 당사자인 재현은 저를 향한 자기혐오에 허덕였다. 윤미와 재현의 차이는 명백했다. 재현의 실적이 잘 안나오는 이유는 아무래도 피를 보기 어려워하는 성정 때문이었다. 범죄자를 후려갈기고 용의자를 압박하는 데엔 조금 물렀다. 곱게 자란 도련님이라 그렇다고, 윤미는 입버릇처럼 저를 놀려댔고 확실히 누나땜에 기가 죽었나 재현 스스로도 의문스러웠다.

 

"걔네가 오긴 할까?"

"원래 그런 애들이 폼나는 일엔 다 동참해."

"운전은 네가 해라."

 

자동차키 말고 사건 파일철 하나를 집어들었다. 윤미의 단화가 또각또각 경찰서를 울렸다. 휘익, 희롱의 휘파람이 불자 윤미는 재현의 파일철을 뺏어들어 놈의 대갈통을 갈겼다. 여즉 적응되지 않는 성미였다.

 

재현은 잔뜩 구겨진 싸구려 갱지를 곱게 폈다. 자료 하나하나가 유독 소중했다. 재현의 특진이 달린 일이었다.

 

 

 

 

이번 마약혐의를 가진 오렌지파는 강력1반에게 애써 뺏어온 작품 아닌 작품이었고 조직 자체를 검거해온다면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버금 갈 명작일 터였다.

 

오렌지파. 이름이 애들 장난 같지만 걔네는 진짜 오렌지족이었고, 아무리 그래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단어를 대놓고 범죄무리들에게 쓰기에 조금 그렇지 않느냐는 최 경사의 의견을 적극 수렴해 오렌지족에서 오렌지파로 한 글자 변경한 것이었다.

처음 단서가 잡힌 건 서울대학 내 하이텔 채팅방에서. 의심스런 암호로 범벅된 단어들이 5명 남짓한 비밀방에서 쉴새없이 주고 받아졌다. 흡사 삐삐언어같기도 한 그것은 영어와 일어, 가끔은 프랑스어의 지분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암호'는 온전히 해독은 불가능했으나 대강 정도는 알아볼 정도였으므로, 그들의 행동경위를 살핀 강력1반은 이들이 해외 브로커에게 히로뽕을 받은 다음 되파는 범죄무리로 판단했다.

애들 장난쯤으로 치부한 강력1반 덕분에 사건은 강력1반에서 3반으로 넘어왔는데, 평소 붉은 것은 윤미에게로 향한 터라, 하얗고 묽은 마약과 관련해선 재현이 받게 되었고, 채팅방을 거즘 53시간정도 살펴본 경과 실제로는 아이디를 돌려쓰는 놈들이 상당했으므로 다섯 명보다 훨 많은 30명 남짓이 이따위 짓에 가담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이 되어서, 판이 생각보다 훨 커졌다. 최 경사 또한 호시탐탐 재현의 사건을 뺏기 위해 눈을 부라리는 중이었다.

 

 

 

굳이 갈 필요 없는 대학 데모에 참가한 것도 그즘부터. 학교 다닐 때 두어 번 참여했다가 지독한 최루탄에 고통만 받고 도망친 그곳에 제발로 걸어가게 될줄은 몰랐다. 운동파 출신이나 아직 국가에게 들키지 않은 윤미는 내심 이런 것들을 즐겼다. 공권력의 폭력과 청춘들의 발악이 법을 무시한 채 공존하는 장소였다. 의경들에게 막무가내로 쳐맞는 대학생들은 애잔하다 못해 애처로웠다. 때리지 마시라고요, 할 수 있는 위치가 못되는 재현은 가슴 쓰라리지만 파일철로 얼굴을 가리고 유리창을 깨뜨리며 날아오는 돌멩이들만 피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유독 그날따라 눈에 잘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학생회의 페인트칠이라던지, 최루탄의 썩은내에 서로 치약을 발라주는 CC커플이라던지, 담벼락 위에 올라가 정의를 촉구하는 사내들,

 

그리고,

 

오른손으로 눈을 벅벅 문대고 있는 이주연이라던지.

 

", 멈춰 봐."

"?"

"스탑."

 

따가운 가시같은 공기가 재현의 볼을 찔렀다. 선발대가 아닌 점에 감사해야 하나. 두건을 턱에 둘러 쓴 모습은 여과없이 데모하는 대학생인데 영 엉성했다. 그래서 몸이 먼저 튀어나간 걸지도 몰랐다. 선량한 시민을 보호하는 것이 경찰의 우선 업무이므로, 재현은 인파를 헤치고 역으로 달려나갔다. 셔터 내린 대학로의 수많은 가게 앞에서 잠깐 스쳐지나간 잔상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다가, 유독 말간 나이키 캔버스화를 찾고는 손을 뻗었다. 적중. 주연의 벌건 눈에 눈물이 옹골찼다. 여기서 뭐해, 면박을 주려 했지만 등에 치이고 어깨가 치여 자꾸만 발이 붕 떴다. 팔뚝을 낚아채 밀착한 사람들 사이에서 인적 드문 뒷골목으로 향했다. 다행히 잘 아는 길거리였다. 희한하리만치 선명한 곳이었고. 재현도 이곳에서 똑같은 시위에 껴들었고, 똑같이 방황했었다. 이주연의 눈물은 곧 이재현의 기억이었다. 대학로의 세상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 하물며 재현의 어리숙한 판단까지도. 온통 그대로였다.

 

"눈 비비지 말고 나 봐요."

"..."

"고개 젖혀."

 

쓸리는 얼굴이 따가울 테니 최대한 조심해서 두건을 벗겼다. 두 눈 위로 오백미리짜리 생수를 부었다. , 짧은 신음이 흘렀다. 이런 델 미쳤다고 나오세요? 저도 나오고 싶었던 것은 아니고... 집이 엄하다면서? 그렇기야 하죠... 주연의 턱으로 흐르는 물이 재현의 무릎에 닿았다. 아끼는 가죽바지가 이렇게 더럽혀진다, 속으로도 겉으로도 대놓고 한탄했다. 얼추 얼굴빛이 되살아나자 주연은 다시 얼굴을 비비려 했다. 미쳤어? 급하게 저지시키고는 주머니 속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문질렀다. 부드러운 살결이 얇은 천 너머로 달라붙었다. 차분한 숨결도. 부러 눈두덩이를 꾸욱 눌렀다. 아아, 아파요 형사님. 형사라고 부르지 말고... 누구 오면 어쩌냐. 이제 눈 떠도 돼요? 안돼.

 

"왜요?"

"..."

"심술을 부릴거면 제대로 부리든가."

 

피식 웃는 입술이 미웠다. 괜히 얼굴 보기 싫어 눈 감으라 했으니까. 얄팍한 심술에 다리라도 저려오게 만들 셈이었건만 저가 생각하기에도 얼탱이 없어 서로 민망해지기만 했다. 재현은 제 손수건을 주연의 목에 걸쳤다. 나중에 빨아서 갖다 놔. 폭삭 젖은 무릎을 털며 일어섰다.

 

"이런 거 하면 부모님이 걱정하신다. 운없으면 잡힌다고."

"가면? 형도 있어요?"

미친놈이."

"형사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면서요."

 

호칭이 문제가 아니라... 김찬우 주연의 드라마에 나올 법한 대사를 치니까 문제라고 정정해주려다 말았다. 나름의 낭만과 패기로로 쳐줘야 하나 저런 구린 말도?

 

골목의 입구에서 거리를 빠져나오는데 필요한 시간을 가늠해봤다. 손으로 코와 입을 막고 최대로 달리면 주차장까지는 무탈하게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하교하고 술집 들릴 때 죽도록 달려본 데모길이었다.

 

"맨얼굴로 가면 따가울 텐데."

"...꽤 더럽다?"

"뒤집었어요."

 

한순간에 주연의 두건이 재현을 휘감았다. 말마따나 체류탄과 흙먼지를 막아냈다기엔 제법 하얬다. 너머 경찰봉 하나가 보였다. 윤미인가. 빨리 찾아오라는 독촉같기도 했다. 자리를 오래 비웠다간 소주에 돼지껍데기에 족히 만원은 뜯길 모습이 눈에 선했다. 고맙다, 곧장 집으로 가고! 재현은 빠르게 걸음을 떼고 알았냐, !! 했지만은 허무하게도 함성소리에 묻혔다. 함성이 아니라 악바리들의 고함에 더 가깝겠지만. 골목을 온전히 나와서야 뒤돌아본 주연은, 희끄무레했으나 오로지 맨얼굴에 빈 생수통 하나만을 들고 있었다. 민낯은 보기싫게 불그스름했고 흙물에 적신 듯한 과잠은 가히 말할 것도 없이 생쥐꼴이었다.

 

, 목에는 재현의 손수건이 나풀거렸고.

 

 

 

 

/

 

 

 

 

"누구였어?"

"그냥,"

"놓쳤구나."

"그런 거 아니다."

"그건 또 뭔데. 비싸보인다, ."

 

백색 수건의 무엇이 비싸보인다는건지. 떠보려는 술수가 얄팍했다. 그러나 곧장 못이기는 척 털어놓았다. 그의 집념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무덤까지 쫓아와 파고들 것이 뻔했다. 좁디좁은 경찰차 안에 한기가 서렸다. 그러니까 이주연이, 말을 하다말고 히터를 틀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윤미가 그 손을 탁, 소리 나게 후려쳤다. 청양고추보다도 매운 것이 손등에 닿자 이내 얼얼해졌다. 왜 이래? 이빨과 이빨 사이가 맞붙었다. 추위에 약한 재현을 알면서도 윤미는 꼼짝을 안했다. 왜 그러냐니까. 한참 생각을 정리하고서야 준비가 되었다는 듯 천천히 입을 떼었다.

 

"유성제약이라구 아니."

"?"

"유성그룹 계열인데,"

"그게 왜."

"일단 받아적기라도 해봐."

"뭔데?"

 

윤미는 비장하게 침을 꼴깍 삼키더니 사람들의 나가리된 신발만이 나뒹구는 거리를 향해 악셀을 밟았다. 계속 뜸 들일 거면 히터 좀 틀자, 춥다. 그놈의 히터로 손을 뻗은 재현의 손가락은 다시 내쳐졌다. 아까 기름 넣었다구. 내 사비야, 아껴 써야돼. 째째하기 그지없었다. 재현은 대신 미제의 만년필을 들었다.

 

"유성제약은..."

 

내 추측일 뿐야. 윤미가 목소리를 내려깔았다.

 

 

조금 쎄해. 유독 그곳만이.

 

 

 

 

 

 

4.

 

'우리나라엔 옛날부터 동물성 단백질 차원으로써 가장 훌륭했던 것이 바로 우렁이가 있습니다. 우렁이는 고동에 속하는 것인데, 굉장히 우리나라에 종류가 많습니다만 대표적으로서는 참우렁이가...‘

 

따지자면 재현은 우렁이보다는 굴을 더 좋아했다. 동물성 단백질은 단연 삼겹살이 최고. 그러나... 춘곤증을 이겨내기에 아침시간 흥미로운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다보면 그나마 알아듣겠는 것이 결국 음식과 요리 카데고리였다. 성경과 명상과 클래식을 들어서 뭐하겠느냐고. 차라리 오늘 먹을 반찬 얘기나 듣고 말지.

 

이재현 단독 잠복근무에 들어선지 19일째, 놀랍도록 진전이 없었다. 강력3반으로 사건을 넘긴 데엔 이유가 있다. 얌체같은 놈들이 티를 내지도 않고 뽈뽈뽈 돌아다니니까 눈을 부릅 떠도 찾기 어려웠다. 최첨단으로 도약하는 시대에서는 쪽지와 공중전화 없이도 충분히 교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진즉 알았어야 했는데. 핸들을 쥐던 손의 땀을 닦고 애쎄 하나를 집자 타이밍 좋게 삐삐가 울렸다. 눅진한 필터는 죽었다 깨어나도 싫은 터라 들고있던 담배는 도로 곽에 집어넣었다. 공공이칠...?

 

0027...

땡땡이칠?

이새끼가 미쳤나.

 

발신인은 누가봐도 걔였다. 재현이 이곳에 눌러붙은 사실을 아는 유일한 일반인, 동시에 유력한...

 

그만, 그만 생각하자. 생각은 끊임없이 뻗어나가고 그렇게 되면 재현 자신조차도 믿지 못하게 된다. 그만, 중얼거리면서 삐삐의 알람을 껐다. 주연은 불러내는 수법이 점점 다양해지더니 이젠 점점 버르장머리 없어졌다. 농땡이 피울 필요도 없는 학생이 무슨 땡땡이냐, 땡땡이가. 그럼에도 실소는 새어나왔고 저 멀리 뻥튀기를 한아름 안고 오는 주연이 보였다. 오늘은 뻥튀기인가, 재현의 귀에서 아직 끄지않은 라디오 속 어렴풋 우렁의 효능이 들렸다. 우렁은 무슨, 저한테는 우렁각시가 있었다. 껍닥은 없고 매일 새참을 챙겨주는.

 

"요 앞에서 팔길래."

"."

"...."

"아 빨리 줘."

"다시."

"...고맙다, 주연아, , 먹을게."

"별것두 아닌데요 뭐."

 

매일 이런 식이었다. 고맙고 이름을 부르고 잘 먹겠다는 다짐까지. 삼종세트를 마치고나면 손으로 간식이 쥐여졌다. 미친놈이라기보다야 골 때린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길들여진다는 표현이 적절치는 모르겠으나 대강 그런 기분이었다. 만족한듯 웃는 주연의 입꼬리 위로 봄볕이 강하게 내리쬐었다. 일단 타. 라디오를 끈 재현이 락커를 달칵 열었다. 주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찬찬히 운전석에서 조수석으로 몸을 움직였다. 답답하리만치 느긋한 그의 걸음걸이. 햇빛이 좋네요, 퍽 낯간지런 말을 내뱉은 주연 옆에서 재현은 허벅지를 살짝 꼬집었다. 빨리 타라고 했지. 누가 보면 어쩔래. 회색 크로스백을 동여맨 이 대학생은 하라는 대답은 안하고 입술만 대빨 내밀었다.

 

"왜 자꾸 타래."

"지금 반말?"

"형이 야타족이에요, 뭐예요?"

"뭐래."

 

그렇잖아요. 자꾸 타라, 안 타냐, 내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내가 타면 나한테 어쩌려고. 저한테 호감 있으세요? 아까의 걸음걸이와는 상반되게 빠른 말이 우다다 튀어나왔다. 그래봤자 재현의 발끝에도 못 미치지만. 그럼 그냥 내려, 퉁명스런 재현의 말에 이번엔 창문을 열었다. , 소리쳐버릴까보다. 공무방해죄로 잡아간다.

 

"유치하시네요."

"반사."

"...집에 갈래요."

"짜장면 먹을까?"

"우동."

 

우동은 어제도 먹었잖아, 툴툴거리면서도 짜장면집 반대편 우동집으로 길을 틀었다. 지갑의 주도권은 백이면 백 주연의 것이었으니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남에게는 학생 돈 떼어먹는 파렴치한으로 보이겠지만서도 솔직히 주연은 평범한 부잣집 아들 그 이상이었으므로 별 죄책감따위 들지 않았다. 저쪽도 분명 학식은 죽어도 싫다 하지만 저는 면허가 없으니 데려다 달라, 그렇게 성립한 거래 아닌 거래였다. 밥심으로 똘똘 뭉친 약속이었다.

 

 

사월의 봄은 예상 외로 일렀다. 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돌아서는 길에 활짝 핀 벚꽃의 잎이 마구 날렸다. 잎이 떨어지기 전에 잡으면 소원을 이뤄준대요. 5세 유아용 만화에 나올 법한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며 하나 잡으려는데 계속 엇나갔다. 이거 은근 어렵네. 개나소나 소원을 빌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는 주연은 벌써 다섯 개째였다. 졸지에 개와 소가 된 재현은 이내 포기하고 가죽점퍼 속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안 잡아, 포기하는 게 아니라 흥미가 떨어진 거라고 합리화했다.

 

"하나 드릴까요."

"됐어."

"다섯 개도 드릴 수 있어요. 저는 빌 소원이 없어서."

"...고마워. 주연아, ,"

 

.

 

습관이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얘가 무엇을 그 커다란 손으로 건네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고마워하고 이름을 부르고 다짐을 해야했다. 손으로 틀어막은 얼굴 너머에 달아오르는 열이 느껴지고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저보다 어린 이주연은 웃음을 참고 있었다. 애써 모른 척 해주겠다는 듯, 저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듯이. 사실은, 앞으로 다부지게 놀려먹겠다는 포부가 느껴졌다. 적응과 습관이란 이래서 무서웠다.

 

"왜 안 줘?"

"...갑자기 소원이 생겼어요."

"골 때리네..."

 

가로수길 정중앙에 멈춰 두 손을 맞잡은 주연은 아주 잠깐 그러고 서있었다. 바람에 이끌리는 꽃잎 몇 개가 주연의 청자켓에 달라붙었다. 몇 초 후, 눈을 부릅 뜨더니 재현에게 어서 가자며 손짓했다. 가벼워보이는 소원 하나에 꽃잎을 다섯 개나 쓰다니. 낭비가 따로 없었다. 소원을 비는 모습이 깨나 부러워 재현도 다시금 하나 잡아보려는데, 작은 면적의 손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도, 결코 하나가 잡히지 않았다. 일단 배가 고파 걸음을 빨리 하기로 결정했다. , . 주연이 재현의 팔목을 잡아 끌었다.

 

"하나 잡았네요."

"놀리냐?"

"아뇨, 여기."

 

주연이 재현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굵은 마디가 눈앞을 아른거렸다. 손가락에 눌린 머리카락이 눈을 찔렀다. 아 뭐하는데. 잠깐만요, 조금 엉킨 것도 같구. 그늘진 입꼬리가 순간 사이 꿈틀 움직이는 꼴을 보며 기다렸다. 여기. 활짝 웃는 얼굴 밑으로 붉고 작은 꽃잎 하나가 손등 위에 떨어졌다.

 

"머리카락 사이에 있었으니까,"

"..."

"형한테 직접 온 거죠, 소원이."

 

그늘이 개었다. 늦은 오전의 햇살이 주연의 얼굴을 파고들었다. 맑은 하늘과 구름 한점 없는 날씨가 오늘의 벚꽃을 특별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재현은 문득 소름이 돋았다. 특별함은 곧 잊지 못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 길은 앞으로 수없이 걸을 텐데 그럴 때마다 오늘을 떠올릴 것만 같고, 벚꽃잎을 볼 때마다 소원을 이뤄준다는 주연의 말이 귓가를 맴돌 것도 같아. 조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대개 이러한 촉은 틀리는 경우가 드물다.

 

자꾸만 이랬다. 시선이 오로지 한곳으로 모이는 기분은 주연을 만나고 자주 느낄 수 있었다. 애초 처음부터 그랬을지 모른다. 입학식 날 중앙의 연단에 서있던 사람, 데모 속 끄트머리에 있던 사람, 그리고 지금, 재현 앞의 한 대학생. 시선은 없던 감정을 만들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했다. 이미 늦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눈에 잔상이 남을 정도로 강렬한 태양, 손등 위 꽃잎, 지나치는 수많은 자전거들. 그 많은 것들 중에서, 그 애의 웃는 낯짝에서 눈을 떼지 못해 꽃잎을 으스러뜨리도록 손바닥을 맞잡은 이유는 왜였을까. 그 애가 찡그린 얼굴로도 나를 보며 웃었던 이유는. 주연을 둘러싼 모든 것이 허황된 기대를 만들고 우스운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목이 아려왔다. 간질거리는 마음은 봄이기 때문이었다. 재현은 마음 한켠에 길고 큰 장벽 하나를 만들었다.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재현은 그날, 온전한 벚꽃을 그리며 소원을 빌었다. 그 누구도 아른거리지 않는 온전한 꽃잎들을.

너와 나의 오늘이 매일이 되길 바라면서, 아주 어렴풋한 마음으로 저도 모르게 그런 소원을 빌었다.

 

 

 

 

/

 

 

 

 

"더러워.“

"...십 분만에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예요?"

 

재현이 벽의 코르크판을 문질렀다. 이게 다 뭐니. 분명 저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없었던 것 같은 코르크판이 사방팔방 깔려 있었다. 이 동네 사람들만의 연락수단이랬다. 주연의 설명을 듣고보니 곳곳에 압정으로 꽂아둔 편지와 쪽지가 한가득이었다. 너한테 온 편지도 있어? 모르죠, 딱히 받고 싶은 사람도 없고. 주연이 재현쪽에 곱게 휴지를 깔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아주었다. 나무식탁 위에 차가운 스댄 그릇이 놓였다. 깍두기나 자르는 재현에게 주연이 물었다. 형 때는 없었어요? ... 고작 일 이년 전인데. 두리번거리던 재현이 삿대질로 벽 한 켠을 가르켰다. 여기 있네, 네 이름.

 

'주연아 계속 기다리다 안와서 남겨 여기로 와, 89 진유경이'

 

작은 약도와 함께인 쪽지는 귀퉁이가 접혀있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대학 포스트잇이었다. 또 진유경이었다. 유경이가 누구냐니까? 장난스레 물은 말에 주연의 표정은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방금 전 햇살때문에 찌푸린 얼굴과는 다르게 확실히 자의로 구긴 이목구비가 보기 싫었다. 주연은 한참을 그 쪽지만 바라보더니 아예 찢어버렸다. 별 중요한 것도 아니라면서 그럴 필요 있나. 궁금해졌다. 진유경이 누군지, 아직도 삐삐 인삿말은 진유경을 찾고 있던데. 멍하니 한곳을 응시하던 주연이 앞서 정적을 깨뜨렸다.

 

"...꽤 낭만적이지 않아요?"

"뭐가?"

"이렇게 남기는 글들."

 

전화가 암만 편리해도 손편지만 못하죠. 인간은 구태여 아날로그를 사랑한다는 글을 봤어요. 합리적이지 못한 일 속에서 낭만을 찾는대요 행복을 느끼거나. 무미건조한 디지털에 반감을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고.

편지를 쓰고, 가까운 길을 데려다주기 위해 빙빙 돌아가고, 우스운 이벤트라도 준비하는 거.

상대를 위해 불편해지는 일이 낭만적인 것 같아요? 어때요 형은.

 

"우동 불겠다."

"무드없게."

"그런 거 생각할 바엔 공부나 해라."

 

주연은 볼 안에 면을 밀어넣고 벽에서 쪽지와 펜 하나를 가져왔다. 오늘 며칠이에요? 428. 헤엑 시간 진쯔 빠르닿. 작게 그린 포스트잇 속에는 1994.04.28, 이주연 이재현이 적혀져 있었다. 싱거웠다. 두 이름의 간극이 허전하다고 생각할 때 즈음 주연이 가방에서 말라붙은 꽃잎 하나를 꺼냈다. 침을 발라 연과 이 사이에 붙이고는 후후 바람을 불었다. 꾹꾹 눌러주고서야 주연은 만족한 듯 재현에게 보여주었다. 그새 연해진 꽃잎의 존재는 있으나마나였다. 정성 깃든 엉성함이 좀 귀여웠다.

"그걸 왜 붙여?"

"제 소원이 담긴 꽃잎이에요."

"웃기네."

 

가장 좋은 금싸라기 구역에 붙여야겠다며 자리를 뜬 주연은 오 분 뒤에서야 돌아왔다. 저기 봐요. 수많은 쪽지들 사이에서 재현과 주연의 것은 아주 작은 쪼가리에 불과했다. 다만 희한하게도, 재현에게 딱 하나가 정확히 보였다. 특별한 쪽지. 사사로운 것에 의미를 부여하면 안되는데. 지끈거리는 머리통을 한 번 쓸어넘기며 다 식었다며 징징거리면서도 꾸역꾸역 입으로 집어넣는 주연을 바라봤다. 재현은 벌써 다 먹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볼이 가득 부푼 주연은 성급해 보였다. 아마 재현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불편할 터였다. 생긴 여유 탓에, 아까 대답하지 않은 질문에 대해 골몰했다. 재현에게 낭만이란 무엇인지. 그런 것들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낭만적이다 통상적으로 내뱉는 감탄사조차 잘 쓰지 않았었다. 그래도, 굳이 재현만의 낭만을 찾는다면.

 

"기억되는 거라고 생각해."

"?"

"나의 낭만은. 굳이 불편해지는 게 아니라 기억되는 거야. 사람들은 전부 본인이 기억하는 사람에게 기억되고 싶어 하니까. 대개 불편한 것들은 비교적 쉽게 한 사람의 기억에 남고.

아까 말했지? 꾹꾹 눌러쓴 손편지는 고이 간직하고 싶잖아. 같이 걸으면 그 길을 걸을 때마다 그 사람이 생각 날 거고, 이벤트는 상대가 오직 나만을 위해 준비한 거니까... 좋든 나쁘든 어느 쪽으로든 기억에 남게 되겠지.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

"불편보다는 성의이지 않을까."

 

경우에 따라... 헌신일 수도 있고.

...너무 떠들었나. 민망해진 재현이 목덜미를 문질렀다. 점심이나 같이 먹는 애한테 별 얘기를 다 한다, 평생토록 숨겨놓은 제 속내를 들킨 것 같았다. 주연은 물을 마시지도 않고 한참을 가만, 그러다 아까 꽃잎을 꺼냈던 그 주머니에 다시 손을 넣어 무언갈 꺼냈다. 주연의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그럼 형의 낭만은 이런 거겠네요."

"어떤 거?"

"제가 이 손수건을 볼 때마다 형을 떠올리는 것."

"이걸 이제야,"

"저만의 낭만이라고요."

 

형한테 받은 손수건을 손세탁하고, 다리미로 다리고, 제 향수를 덧댔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훅 끼치는 주연의 체향 섞인 향수 냄새. 불편이 아니라, 성의. 경우에 따라 헌신일 수도 있겠네요. 고스란히 재현의 말을 읊는 주연은 장난의 지분율이 상당한 표정을 지어서 재현은 다시 민망해졌다. 이거는 그냥 개고생이지, 어린애처럼 툴툴거렸다.

 

아무튼 형의 생각도 들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자신의 냄새가 진득히 벤 손수건을 건네면서 주연은 기억해요, 아주 아슬히 재현만 들을 정도로 웅얼거렸다. 재현은 차마 그걸 주머니에 넣지도 못하고 꽉 쥐었다. 아줌마가 열어둔 쪽창의 봄바람을 뜨겁게 느꼈다. 그깟 낭만이 뭐라고 그따구로 대답해서는. 잔뜩 놀아나고 있었다. 쌍방향으로 어울리는 건지 외방향으로 휘둘리는 건지 성미 급한 재현은 답답했다. 점점 조급해질 거라는 사실을 버젓이 알면서도 이건 재현의 관할이 아니라서,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었다.

 

 

 

 

 

 

 

5.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그게 궁금해지기 시작한 건 재현의 손수건에서 거즘 주연의 바닷내가 빠지기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분명 명품이었을 그 향수내가 달달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바다의 내음이 짙게 깔렸다. 빠질 단내가 아쉬워서 막상 들고 다니지도 못하고 책상 한 켠에 고이 접어두었으므로.

 

다섯 개의 꽃잎 중 하나를 우동집에 꽂아둔 이후로부터, 주연은 손수 책갈피를 만들어 네 개의 꽃잎을 간직하고 다녔다. 날이 더워지고부터 하나둘 옷의 주머니가 사라지는데도 왼손에는 꼭 책갈피였다. 재현을 만날 때도 예외는 없었다. 책갈피 속에 담긴 그 소원이란 게 무엇일까, 신경 쓰이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재현의 일상을 파고들었다. 달달달 내뿜는 열기가 어마무시한 대형 선풍기 앞에서 셔츠를 팔락이며 혹여

유경이 돌아오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었나?

지레짐작하고나면 제 기분만 더러워지는 것이었다. 하필 주연을 보는 일도 이젠 줄었으니까.

 

오렌지파의 진상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단지 급한 일은 속속이 늘어나고 끝이 없어서, 보류해둘 뿐이었다. 새로운 신입이 들어왔고 재현은 그의 사수가 되었다. 덕에 주로 실내 업무를 맡았다. 취객 대응부터 음주운전 단속까지 밤에 하는 일이 주류였기에 낮에는 종이 쪼가리 복사하고 정리하는 일이나 몰아서 했다. 그래서,

 

자연스레 주연의 삐삐가 끊겼다. 원래 당연한 일이었지. 명문대생인 동시에 재벌 아들인 주연과 한낱 경찰일 뿐인 저는 교집합이랄 게 없었다. 윤미와 매번 점심을 먹고 가끔은 최 경사와도 겸상을 했다. 아무튼 당연하고... 어차피 이렇게 되었을 일이었다고, 재현은 죽어가는 선풍기의 뒷편을 탁탁 때리며 생각했다.

 

"오늘 우편 왔나?"

"아직."

"아침부터 죽상이니 왜."

 

수갑을 찬 성인 남성 둘과 동행한 윤미가 뛰어들어왔다. 아침부터 열심이다, 대꾸하는 재현의 어조는 무미건조했다. 한숨을 내쉬는 윤미. 재현 또한 저가 이상하다고 자각하기 시작할 시점이었다. 사실 여름 내내 이런 식이었으니까.

 

뒷맛이 쓰라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여즉 조수석은 주연의 사이즈로 맞춰 두었고 받은 손수건을 눈에 잘 보이는 자리에 놓았고 주연이 보냈던 0027은 이제 저가 윤미와 신입에게 주로 보내는 신호였기 때문이었다. 무작정 교문으로 달려가기엔 진유경 양에게 미안했다. 미안할 건 없지만 조금 껄끄러웠다. 게다가 주연도 재현을 찾지 않으니까, 걔는 새로운 운전대를 하나 골라잡으면 그만이었다. 그 대상이 꼭 재현일 필요는 없었다는 얘기였다. 삼천포에 빠지고나면 다시 으악, 기분이 요상했다. 진짜 그만. 담배곽을 쥐고 윤미에게 손짓했다. 엄지와 검지를 구부리며 오케이, 이유없이 잡범들의 머리통을 갈긴 다음 일어났다.

 

"보고 싶어?"

"뭐가."

"이주연."

"...뭐야?"

"다 보여, 재현아."

 

매일 외근이던 놈이 눌러 앉으니 얼마나 근질거리겠어. 담배 연기를 잘못 삼켜 한참을 켁켁거렸다. 그동안 걔 만나고 다녔니? 아니 걔가 누구야. 이주연, 석 자 나올 때마다 의도치않게 연기가 눈알을 찔렀고 유난이라며 윤미의 질책을 들을 때면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고는 반박할 말을 찾다가 결국 수긍했다. 내가 그날 말했잖아, 결국 네 심증이잖.... 말끝을 부러 흐렸다. 윤미에게 당해내는 수가 없었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 건너편 달려오는 죄없는 오토바이를 추궁했다.

 

"우편 아냐?"

"?! 어디?"

"저어기,“

 

재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미가 달려갔다. 그는 콘솔게임의 광팬이었다. 신작은 누구보다 빨리 받아야하는 법이라며 제 직장으로 등기를 받았다. 농구와 축구 게임밖에 모르는 재현으로서는 마리오가 누군지 플레이스테이션이 뭔지 알 턱이 없었다. 칩이 들은 누런 봉투를 가져오던 윤미가 힐끗 재현을 보며 책 하나를 받았다. 저 멀리서부터 뛰어온 터라 잡지인지 소설책인지 구별도 못했다. 올 곳도 없는데.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윤미가 주는 책 한 권을 받들였다. 예상 외의 대학신문이, 것도 레포트지를 접어 만든 띠를 두른 학보가 재현의 이름 앞으로 배달된 거였다. 벙찐 표정으로 몇 번 훑어보니 오히려 윤미가 편지를 꺼내 읽어주었다.

 

"도서대출카드에 형 이름이 있길래 보내요."

"...그게 끝이야?"

"아니... 난 오글거려서 못 읽겠다."

 

던지듯 쪽지를 재현의 가슴팍으로 밀어넣었다. 열어본 띠에는 주연의 반듯한 글씨로 여백을 많이 둔 시 한 편이 있었다. 재현이 옛날 도서관 선배땜에 억지로 읽은 시집이었다. 이정하 시인의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제목을 기억해낸 본인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여간 감성적인 게 아닌 주연의 끝 글씨가 떨렸다. 종이에 달달한 향초향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바람이 불었다.

나는 비틀거렸고,

함께 걸어주는 이가

그리웠다. - 바람 속을 걷는 법1

 

형이 저희 학교에 다니실 줄은 몰랐어요. 이름은 모르겠고 날짜를 적은 숫자가 저한테 적어줬던 전화번호랑 똑 닮았더라고요. 귀퉁이가 접혀있는 페이지의 시를 적어 보내요. 형이 접은 게 아닐지도 모르지만... 저도 마음에 들어서요. 지금의 저와 꽤 닮아있어요. 학식은 여전히 맛이 없어요, 형이랑 밥 한 끼 먹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이상한 사람이 받으면 안될 텐데. 이재현 형사님 맞으시죠?

 

 

꽤 작은 종이에 작은 글씨로 꾹꾹 눌러쓴 기색이 확연했다. 재현 또한 교내 우체국서 근처 여대로 학보를 보낸 경험은 많았지만 주연처럼 아예 외부로 학보를 보낸 것은 전교를 통틀어서도 전무후무했다. 유치하게 진짜. 글에서 주연의 다정함이 묻어났다. 한없이 초조했다가도 고작 띠 하나로 풀어지는 자신이 웃겼으나 종이를 곱게 접어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집게로 고정해둘 거였다. 힘들 때마다 보게. 최 경사가 가족사진과 더불어 마돈나의 흑백 사진을 프린트해둔 이유가 납득됐다.

오늘 오전에 시간이 비던가. 오후라도 좋고.

 

 

 

 

 

 

 

6.

 

칵테일 사랑이 흘러나왔다.

3월에 발매된 곡이 미쳤다고 여름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프리지아 꽃 따위 알 길 없는 재현은 애꿎은 쌍화차만 호록 마셨다. 쓰거운 맛만 맴돌았다. 조금 늦는다는 주연은 10분이 흘렀는데도 깜깜무소식이었다. 조금, 이라고 했으니 20분까지만 기다리고 나오지 않으면 재현의 소중한 주말을 위해 집으로 갈 참이었다. 담배연기 풀풀 나는 지하 다방이 아니라 경관 좋은 까페라서 가격이 어마무시했다. 비엔나커피도 살인적인 가격이었다. 주연의 약속장소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딸랑 팔천원 들고나온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주연의 시험과 재현의 당직이 겹치는 바람에 때늦은 약속은 여름이 되고서야 만들 수 있었다. 움직이기도 힘든 더위이므로 실내에서 놀자더니 근처 좋은 까페를 안다는 주연은 재현이 기억나지도 않는 시집을 들고 오겠다며 호언장담했다. 꿀같은 일요일을 버리지만 주연의 얼굴을 못 본지 꽤 되었으니까 기분 좋게 나왔는데, 이렇게 배신을 당할 줄은 몰랐지. 쌍화차 옆 냉수를 들이마시면서 생각했다. 2층 유리 밑으로 누군가 신호등을 건넜다. 열 받을 정도로 여유 넘치는 걸음이었다.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 있었고. 카메라?

 

"죄송해요."

"뛰어온 성의라도 보여라."

"이거 안 보여요? 파르페."

"뭐든 그렇게 돈으로 해결될 거란 생각은 하들말고..."

 

말은 그렇게 해도 재현은 벌써 파르페의 우산을 뽑고 있었다. 맨위 초코시럽으로 둘러싸인 와플과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다. 비싸니까 두 배로 달았다! 계속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주연에게 파르페 한입으로 선심을 베풀었다. 조금 머뭇거리더니 이내 받아먹었고 다시 시선은 카메라로. , 뭔데? 조금 심통이 난 나머지 주연의 어깨 너머 액정을 살폈다. 잠깐 움찔, 재현은 그 작은 행동을 정확히 포착하고 어깨로 몸을 기댔다. 그냥, 이번에 인화할 사진들... 설명해주는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보고 싶었다며."

"...."

"이거랑 나랑 뭐가 더 중요해."

"너무, 가까운..."

 

안절부절 못하는 이주연은 초면이라 웃음부터 나왔다. 재현이 주연의 볼을 콕, 검지로 찔렀다. 이번엔 붉게 물든 귀. 생각보다 부드러운 귓볼. 자연스레 손이 올라가는 귓바퀴... 어딘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어 파르페로 손을 옮겼다. 행동이 부자연스럽게 뚝뚝 끊기는 기분이 들었고 찰칵, 주연의 셔터 소리가 났을 땐 입에 댄 빨대를 툭 내려놓았다. 찍었어? 주연이 사르르 웃었다. 저 웃음이, 유독 진실로 다가왔다. 벚꽃처럼.

 

"다시 찍어."

"왜요?"

"멋있게."

 

충분히 귀여운데. 렌즈가 툭 튀어나온 카메라는 한손으로 들기엔 무거웠다. 콤팩트 카메라만 자주 쓰던 재현에게는 조금 어려웠다. 잘 찍은 거 맞아? 나중에 인화해서 줄게요. 그때 봐요. 주연은 자연스럽게 미래를 기약했다. 현재만을 생각하는 사람들 주위에 둘러싸인 재현은 나중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나중에, 막연하고도 붕 떠서 이후 주연의 실없는 소리가 공중에 흩날렸다.

 

"나도 너 찍을래."

"이거 학교 건데..."

"나 못 믿어?"

 

주연이 카메라를 내밀었다. 놓치면 안돼요. 어린아이 다루듯 저를 가르치는 모습에 평소 같았으면 열이 받을 법도 한데 마가 씌였는지 그냥 그렇구나, 대단하네, 주연의 심기를 맞춰주었다. ...놀려요? 이번엔 저쪽에서 쎄한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포즈 잡아봐. 뷰파인더에 눈을 갖다댔다. 하나, , . 약간의 딜레이 끝에 주연의 웃음이 카메라 안으로 담겼다. 모델 해두 되겠다는 말은 오바인가 싶었는데 꼴에 부끄러워 했다. 너 진짜 웃긴다.

 

"시집은?"

"가져왔어요. 이거 형 글씨체 맞아요?"

"맞네. 근데 전화번호는 다른 형 거야."

"... 왜요?"

"자꾸 나한테 연락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내가 너맘때는 인기 엄청이었거든. 교내에서 유일하게 염색도 했고, 특히 동기 중엔 김영훈이... 왕년의 이야기를 몇 번 흘렸더니 주연은 곧이곧대로 들었다. 귀퉁이에 낙서들이 되게 많았다. 주로 재현과 재현의 친구들...이었다. 공용이라는 개념에 반항하던 시절이었구나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주연의 뭉툭한 손끝이 향한 데엔,

 

"재현아 사랑해..."

"나도, 라고 적혀 있네요."

"...과거가 중요해?"

 

이름도 기억 안나. 여기 수지야 라고 써있는데요. 따지려는 심산이었는지 제 책갈피를 그곳에 넣어두었다. 방금까지 미래를 도모하던 놈이 과거에 연연하니 당혹스러웠다. 수지가 누구고 정말 기억이 안 나는데, 그리고... 그렇게 따지자면 너는 진유경이 있지 않느냐고. 마음 한 켠에 계속 응어리지던 그 이름이 순간 튀어나올 뻔 했다. 대신 책갈피를 빼내고 휘리릭 넘겨 재현이 명백히 기억하던 시 한 편을 보여주었다. 마음. 제목을 읽은 주연이 저를 바라봤다. 낭독해주세요. 싫어. 즉답을 보내니 다시 수지가 있는 페이지로 넘어가려 하길래 우선 목부터 가다듬었다.

 

마음

그에게 자꾸 보여주고 싶었다.

보이는 것보다 보여지지 않는 것을.

 

후딱 읽고 끝내버렸다. 심심찮은 감상평이라도 기대한 재현이 힐끗 주연의 눈치를 봤고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연은 턱을 괸 채 재현의 새끼 손가락을 지분댔다. 입술이 달싹거리며 혼잣말인지 분간할 수 없는 웅얼거림이 들려왔다.

 

"형이 누굴 만났는지 그건 저랑 상관 없는 일일 텐데..."

"..."

"자꾸 불안해서요.”

"....“

"형은 너무... 좋은 사람이고,"

 

우리 만남도 꽤 운명적이었고. 주연의 웃음에 재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운명은 무슨. 곧장 반박하며 주연의 이마를 톡 쳤다. 단순한 헤프닝일 뿐이었다. 우연에 더 가까웠고 재현에게서는 최악인 사고로 남겨두고 싶은 일이었으며,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까워졌던 거지. 인생에 드라마틱한 운명따위는 없었다. 어쩌다 보니, 왜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그런 식으로 흘러갔고.

 

"...욕심이 생기면 어떡해요."

 

재현의 팔로 고개를 처박은 주연한테 파르페 한입을 먹였다. 새파랗게 어린 놈이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다, 지입으로 액션 영화를 선호한다고 했던 이주연은 사실 로맨스 대사를 줄줄이 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재벌의 후계자는 원래 이런 고민들을 하나? 아니, 애시당초 주연은 장남도 아니었다. 너무 깊게 땅굴을 파는 중이었다.

 

"너 편한 대로 해."

 

먼저 내뺀 건 재현쪽이었다.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 멋있는 척을 했다. 주연에게 연락이 안 오는 동안 초조했으나 또 이렇게 만나고나니 켕기는 것들도 있고 해서, 이렇게 연이 끊긴다면 그건 그거대로 받아들여야 겠다고 생각했다. 관계의 주도권을 갖고픈 마음은 없었다. 거기까지 마음이 닿질 않았고 우선, 보통의 사람들보다 리스크가 컸다. 윤미의 말과 진유경을 무시할 수 없었다.

 

"...갈까요."

 

낮아진 목소리에 고개만 끄덕였다. 딸랑이는 종을 지나쳐 문을 나서자 땡볕이 파고들었다. 영화나 보러가자는 주연이 반대편 극장을 향한 횡단보도가 아닌 까페 뒤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런데요 형. 우뚝 멈춰선 주연은 재현에게 차키를 보였다.

 

"저 사실 면허 있어요. 차도 있고."

""

"형이랑 같이 있고 싶어서 거짓말 좀 쳤었어요."

 

껌뻑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하던 재현은 주연의 손에 이끌려 조수석으로 앉고 어영부영 안전벨트까지 맸다. 오늘도 그냥 걸어가기로 했었잖아. 이제 더이상 같이 있고 싶지 않다는 거야? 극장이 아닌 재현의 집으로 향하는 주연이 낯설었다. 재현보다 훨배 능숙한 코너링으로 서울 한복판의 골목 속 재현의 빌라 건물에 도착했다. 걸어서도 5분 거리였다. 가까운 그곳에 당도하기까지 2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재현이 방금 전까지 운운하던 우연은 첫만남을 제하고는 전부 주연의 노력이었다. 만들어진 우연이라는 사실을 받들이자 누군가 가격한 듯 머리가 멍했다. 이제 그만 지쳐버린 주연은 재현을 포기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님 벌써부터도.

 

"내려요."

"영화는?"

"다음에,"

"...이게 네가 편한 선택이야?"

 

쥔 주먹이 비틀렸다. 다음은 없으면서 속이 텅 빈 말을 하는 주연에게 서운했다. 이곳까지 와버렸잖아. 나는 이제 집에서도 널 생각할지 몰라서, 서운하고 불안했다. 집과 경찰서와 대학교에 전부 주연이 있었고 그걸 회상할 때면 저한테서 주연은 없을 터였다. 재현의 누나도 윤미도 하물며 최 경사도 재현에게 정을 쉽게 붙이는 성정이랬다. 재현은 주연에게 매달릴 만한 처지가 아니었지만 이토록 허무맹랑해지기는 싫었다. 모호한 결말의 여운은 오래 남으니까.

 

"이렇게 헤어지면 너 다시는 나 안 볼거잖아."

"...."

"보고 싶었다며?"

"."

"나도 보고 싶었어."

 

너만 그러는 거 아니야, 나도 그래. 너랑 똑같아. 그러니까..., 뒷말은 끊겼고 주연은 핸들을 꽉 잡고 멈춰 있었다. 너는 나에게 낭만을 줬다고, 손수건과 웃음과 너의 성의로, 그러니까 나는 너를 이제 잊을 수 없다고, 어느새 진심이 되었다고. 생겨난 단어들을 뱉지 못했다. 침을 꿀꺽 삼키며 주연의 대답을 기다렸다. 거절과 거부의 확실한 언사를. 그러나 주연은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고 그 정적을 견디지 못한 재현이 앞장서 차문에 손을 댔다. 더이상 버틸 수 없었다. 누군가 몸을 끌었다.

 

"형이 먼저 붙잡은 거에요."

 

재현의 목덜미에 대고 속삭이는 주연은 이내 고개를 파묻었다. 그렇게해서 숨어지겠니, 재현이 주연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강아지가 몸을 기대는 이유는 신뢰하기 때문이라는데 주연은 잘 모르겠다 싶었다. 일은 벌어졌다. 윤미가 알면 까무러칠 일이었다. 대개 사랑은 이런 방식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더 낭만적일지도 몰라. 주연의 손가락을 꽉 쥐었다.

 

얼마 후 주연이 낮게 뇌까리는 소리 중, 재현은 파동만을 들었다. 웅얼거리는 목소리의 울림이 느껴졌다. 고뇌에 빠진 듯 심각한 모습이었지만 재현을 둘러싼 팔만은 풀지 않았다. 재현이 도망가는 일은 없었음에도, 불안한듯 계속.

 

"집에 들어갈까?“

 

주연이 재현의 목덜미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삐죽이는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7.

 

", 아버지."

 

해가 뜨지 않은 새벽 주연의 통화소리에 잠에서 깼다. 보송한 솜이불이 덮고 있는 침대 바로 앞에는 손으로 쓴 레포트지가 가득이었고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시계와 정장과 하여튼 재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옷가지가 널려 있었다. 유독 탐나는 것은 향수만 들어찬 화장대 밑 시계 보관함이었다. 일본부터 프랑스까지 외제로 가득 찬 시계는 누가 뭐래도 부의 상징을 나타냈다. 서서히 허리의 고통이 올라오기 시작한 재현은 탁상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4시였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많이 이른 시각이었다.

 

"연락이 없습니다."

"도망간 것 같습니다. 잡을까요?"

"상황이 조금 급합니다. 낌새가 보여요."

 

할 수 있습니다. 웃음기 쫙 뺀 사무적인 말투를 듣고 있노라면 잠이 훅 달아났다. 주연의 집은 재현이 좋아하는 것들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아무때고 들이닥치는 유성그룹의 콜은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유학시절부터 평생을 그렇게 살았을 법한 주연이 안쓰러워지고 애틋해져오면 재현은 부러 입을 열지 않았다. 파묻는 고개와 가끔은 골프채로 맞은 흔적이 생생한 등덜미를 쓸어넘기기만 했다. 저한테도 버거운 순간이었지만 당사자인 이주연은, 재현이 상상도 못할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을 것만 같아서, 한없이 연민과 동정이 속을 왔다갔다 했다.

 

그리고, 의심과 불신의 경계도 모호해졌다. 재현의 본업이 그 이유이기도 하고, 가만 들어보면 범법적인 말들이 한두개가 아니었다. 미술품과 운반, 건들이지도 못하는 대기업의 탈세이겠거니 무시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지만 믿고 싶었다. 주연이 제 곁에 있기를 바랬다. 무한한 신뢰가 저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대도, 재현은 주연을 믿었고 모른 체 했다. 서로가 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사랑했으나 항상 맑은 햇빛이 비춰주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고장난 로봇처럼 반복했다. 위태로운 동앗줄 위에서 계속 걸었다. 사랑하니까. 걔도, 나도, 지금은 서로가 필요하니까. 어느 한 점에서 만나고야 말았으니 그곳에서 정지. 제자리를 돌고 돌며 굵고 둥근 반점을 만드는 중이었다. 때가 되면 알아서 떠날 터였다. 까만 원을 크게 남기고. 우리는 그걸 낭만이라 불렀다.

 

주연이 너머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손에는 원두커피가 들린 채였다. 비엔나 커피만을 고수하는 재현은 입에도 못 대는 쓰거운 것이었다. 춥지도 않은지 속옷 바람인 주연이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침대 한켠이 풀썩 꺼졌다. 재현도 경사진 그 면을 따라 주연에게로 굴렀다.

 

"깼어요?"

"."

"피곤할 텐데."

"..."

"목도 쉬었고."

 

누구 때문인데. 낮은 목소리로 기지개를 한 번 쫙 펴서 온몸을 팽창했다가 주연의 차가운 손이 닿자마자 움츠러들었다. , 안 추워? 조금. 웃는 주연의 몰골이 더 피곤해보였다. 얘를 어쩌면 좋지. 점점 말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이불을 널찍이 펼쳐 주연에게로 던졌다. 유리잔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이내 품으로 들어왔다.

 

"이제 자자."

"형은 내가 없어지면,“

 

나를 잊을 거야.

 

주연의 손가락이 재현을 향해 움직였다. 목울대를 매만지던 주연은 고개를, 파묻더니, 입을 열어, , 외설스런 소리가 온방을 울리도록 깊게 빨았다. 재현은 버거운 느낌이 들어 계속 눈을 감았고 복잡하고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외면했다. 내가 너를 잊어? 그럼 너는? 새벽을 말하는 찬공기는 계속해서 불어들었고 달라붙은 맨몸은 더 차가웠다. 너도 나를 잊겠지.

 

그려지지 않는 미래가 있었다. 재현과 주연이 나란히 붙어있는. 보이지 않는 먼 훗날은 언젠가 도래할 테고 그때서야 지금의 예상이 틀렸을지 명확히 알 수 있을 터였다. 재현 또한 확신이 없었다. 과하게 불안할지도 몰랐다. 주연이 간곡히 바라는 것은 그것이었는데, 그것 뿐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입은 통 열리지 않았다. 저부터 겁이 나서, 저와는 다른 세상에 있을, 아니 지금부터도 재현과의 차이가 뚜렷한 주연과 어느때고 함께일지. 미래는 항상 불안한 법이니까, 스스로를 달래며 오지 않는 잠을 기다렸다. 알람시계가 울릴 때까지, 주연의 심박을 들으며.

 

 

 

 

/

 

 

 

 

주연의 lp판에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앨범부터 올해 엄청난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오아시스의 슈퍼소닉도 있었다. 재현은 밝고 경쾌한 기타소리가 담긴 브릿팝이면 대부분 좋아했다. 목을 긁으며 나오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매력적이었다. 지지직거리는 lp판의 먼지를 닦고 엉성하게 턴테이블 위로 올리면 찬찬히 돌아갔다. 부드러운 원목의 주변을 만지면 까슬한 촉감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궁상맞게 쭈그리고 앉아 무얼 하는 거냐, 생각이 들 때면 씻고 나온 주연이 재현의 옆으로 누웠다. 머리. 잊지 않고 가져오는 드라이기를 어쩔 수 없는 척 콘센트에 꽂았다. 실은 주연이 재현에게 기대는 것이 좋았다. 의지하는 것도. 버거운 건 그 다음의 일이었다. 따뜻한 바람이 머리칼을 간지럽혔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주연의 머리들은 여전히 차가웠다.

 

"찬물로 씻었어?"

"도통 잠이 깨질 않아서요."

"감기 들어. 일교차가 심한데."

"내일이 형 생일인가?"

 

재현이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화제를 돌리는 것이 이젠 청산유수였다.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 재현은 주연의 등에 난 상처로 뜨거운 바람을 쬐었다. 조금 따갑겠지만 온몸이 차디차서 견디고 볼 수가 없었다. 추위에 예민한 재현과는 정반대였다. 겨울에 태어나서 그른가. 몸에 열기가 많은 체질은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새퍼렇게 멍이 든 자국이 짙었다. 어젯밤에도 보았던 흉이었다. 몸을 쓰는 직업은 재현인데, 다치는 건 주연이었다. 아픔을 또다른 고통으로 상쇄하려는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면 또 가슴 한 켠이 쓰라렸다. 머리를 말려주다 말고 구급상자를 가져와 파스를 붙였다. 너는 네 상처를 보지 마.

 

"내일 어디서 만날까요."

"...밥이나 먹어."

"영화 볼래?“

"어디서 반말을."

둘이서 본 적은 없잖아요. 데리러 갈게.

 

내일 당직이야. ... 세 시 쯤에 와. . 고개를 꺾은 주연의 입을 손가락으로 찝었다. 소리 나게 맞붙은 입술은 부드러웠다. 사랑해. 그 말엔 나도, 라고 대답하지 않는 규칙이 있었다. 사랑해, 사랑해. 같은 말을 다른 어조로 반복하고 나면 확신이 생겼다. 대답보단 그런 게 좋았다. 감정을 고백하는 일은 진심을 담지 않고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동조는 너무 쉬웠다. , 그래, 나도. 그것 따위야 상대의 말을 듣지 않아도 얼추 맞아 떨어졌다. 그래서 독립적인 사랑해, 그 단어가 좋았다.

 

벌써 7시였다. 슬슬 나가봐야 할 시간이었다. 재현은 차를 가지고 나왔으니 혼자 현관을 나섰다. 잘 가요, 크게 외치는 주연은 드라이기의 콘센트를 뽑고 있었다. 신발을 욱여신었다. 미처 올리지 못한 양말의 끝을 올리고 문을 열었다.

 

실내에서 찌익, 주연이 파스를 떼는 소리가 들려왔다.

 

 

 

 

 

8.

 

참으로 요상한 세상이었다. 이토록 살기 좋고 아름다운 서울 한강에서 왜 자꾸만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하는지. 사업을 망했다는 자영업자 한 명이 마포대교에서 뻐팅기는 바람에 재현은 경찰차에서 내려 실랑이를 벌여야만 했다. 덕에 삐삐가 한강으로 떨어졌고,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서로 돌아온 다음에야 깨달았다.

아무리 생일이라 해도 좋은 시작이라 말하기엔 조금 켕겼다. 아침부터 이게 뭐야, 옷에 술냄새가 찌들진 않았는지 확인했다. 거구의 아저씨를 상대하느라 식은땀까지 흘렀다.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분주한 윤미를 쳐다봤다. 영 직감이 별로였다. 심지어 점심까지 거른댄다. 그말은 즉슨 오늘따라 일이 배로 많다는 뜻이었다. 어젯밤 야근으로 밤을 꼬박 샌 재현만 여유로왔다. 아주 잠시.

 

윤미가 재현에게 무전기를 던졌다.

 

"?”

"뭔가 이상해. 동선 좀 봐봐."

 

윤미가 펼친 지도에는 일정한 구역을 나다니는 빨간 줄과 cctv 속 한 여성의 얼굴이 잡혀 있었다. 검은 모자와 검은 봉다리. 어딘가 익숙한 착장이었다. , , 입학식 걔였다.

 

"언제부턴데?"

"일요일. 얼마 안됐어."

 

윤미의 지시를 받으며 차에 올랐다. 시간은 한 시. 아직 여유가 있었다. 계속 같은 동선을 돈다는 소리는 그리 치밀하지 못하단 뜻이기도 했다. 드디어 실마리가 잡히나 싶었다. 하나만 잡아도 조사하다보면 연달아 나올 터였다. 꼭 필요했다. 두 번의 실수는 없었다.

 

네가 나가. 나는 여기서 기다릴게.

 

윤미가 재현에게 기회를 돌렸다. 차에서 내리자 다리가 빠지는 줄 알았던 그날의 겨울이 떠올랐다. 긴장보다 침착함이 앞섰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서점 앞의 잡지를 펼쳤다. 예상치도 못한 유성그룹의 인터뷰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바람에 이 아저씨는 허구헌 날 언플이냐, 마음이 심란해져 도로 덮었다. 그 순간이었다.

 

"코너로 돌아. 체격이 조금 왜소해. 키는 백육십 중반대."

 

연결해둔 헤드셋으로 윤미의 브리핑이 잇따랐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보폭은 일정히 걸었다. 검은 봉다리의 바스락거리는 잡음이 들려왔다. 쟤다. 으슥한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는 검은 봉다리와 간격을 두며 걸었다.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앞에서 먼저 죽도록 달리기 시작했다. 재현도 뛰기 시작하며 아예 무전기를 빼버렸다. 재현만의 페이스로 달릴 생각이었다. 윤미에게 엄청 깨지긴 하겠지만. 쓰레기통을 넘나드는 날쌘 검은 봉다리를 두 번 놓치는 불상사는 없어야 했다.

 

이를 악물었다. 아드득거리는 소리가 뇌리를 울렸다. 회유하고픈 마음도 없었고 오로지 잡아버리겠다는 불멸의 의지 뿐이었다. 특진을 향해. 아니, 특진보다도 젊은 청춘들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 사실 순목적은 특진이었다. 제발. 순경 딱지를 떼고 싶었다.

 

한 블럭 너머의 거리로 나아간 검은 봉다리는 어제 내린 소나기때문에 고인 물웅덩이에서 찰박이며 비틀거렸다. 기회다, 재현이 속력을 냈다. 검은 봉다리와의 격차가 좁혀졌을 때 즈음 과일 아저씨의 햇사과 하나를 집어들어 정확히 목에 가격했다. 덮친 격으로 빗구덩이까지 있어 조금 버팅기다 이내 고꾸라졌다. 감사합니다, 깍듯이 인사를 건네고 삼천원을 드렸다. 너는... 변호사... 됐다, 일단 들어가자. 미란다의 원칙이고 뭐고 헥헥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무전기로 윤미를 불렀다. 검은 봉다리 속에는 역시나 흰 가루였다. 외견 상으론 아마 히로뽕이 아닐까 싶은데. 요즘 암거래되는 마약의 종류와는 약간 달랐다. 그거야 국과수나 뭐 그런 애들이 결정할 내용이고, 재현은 실적 하나를 잡아 신부터 났다. 이걸 위한 액땜이었구나. 한강물에 떠내려간 삐삐 생각은 일절 나지도 않았다.

 

"대학생이니?"

"..."

"배고프겠다. 순대국밥 좋아해?"

 

유독 다정한 윤미는 제 것으로 순대국밥 특을 샀고 검은 봉다리의 것으로 순대국밥을 포장해왔다. 그 사이 재현은 검은 봉다리와 둘이 있어야 했는데, 어차피 이런 놈들은 재현이 조사해봤자 소용 없으리란 걸 알기에 잠자코 바깥구경이나 실컷 했다. 경찰서로 돌아오는 길에 최경사의 연락을 받았다. 잘 터지지도 않는 무전기로 잡았냐? 꼴값 떠는 꼴이 우스웠으나 날이 날인 만큼 맞춰줬다. , 이야 이재현이 계 탔네, 아닙니다. 그럼 난 먼저 퇴근한다잉. 그게 목적이었다. 230, 약속시간이 코앞이었다.

 

"윤미야, 나 약속이 있어서."

"? 또 걔야?"

"...“

"다녀와. 내가 맡을게."

 

기분파인 윤미가 이토록 고맙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재현은 윤미와 하이파이브를 한 번 찐하게 하고 검은 봉다리를 끌었다. 겁은 먹지 말고, 아는 거나 말하고 빨리 끝내자. 검은 봉다리가 침을 찍 뱉었다. 재현의 구두에 묻은 멀건 액체를 본 윤미가 그의 허벅지를 탁 소리 나게 때렸다. 고맙지만 유난 같기도 하고...

 

반 이상이 퇴근한 경찰서의 불을 켰다. 이게 뭐하는 짓이니, 유치장을 지키고 있는 신입까지 고작 다섯 남짓이었다.

 

"그래서, 이름이 뭐니?"

"..."

"배 안 고파? 석 자만 말하면 국밥이야."

"...진유경."

 

,

재현이 옆에서 피우려던 담배를 떨궜다.

?

뭐라고?

 

"한국대 89학번?"

"...."

 

그토록 의문이던 이름이 제 앞에 서있었다. 것도 검거된 신분으로.

하 씨발... 실내흡연 금지고 나발이고 라이타를 켰다. 진유경. 동명의 다른 여성이라기엔 학번도 맞고 직접 쓰게 한 글씨체도 똑 닮았다. 팔뚝에는 주사바늘을 맞은 흔적이 여러 개였고. 이런 앨 이주연이 찾았다고? 대체 왜? 주연의 맨 팔뚝에는 아무 흔적도 없었다. 소위 말하는 금단현상 따위 보이지도 않았는데. 249. 유경을 조사실로 데려가려는 윤미를 제지시켰다. 씨발. 이런 개씨발같은 상황이 도대체 어디에,

 

"내가 할게.“

 

 

 

 

/

 

 

 

 

진유경은 영장이 올때까지 닥치겠다며 뻐겼고 재현은 그사이 담배를 다섯 번 입에 걸쳤다. 닥쳐도 상관 없어, 영장은 내일 나올 거고... 의미없는 상황 정리만 번복하며 재떨이를 털었다. 유경은 단아하게 생겼으나 미용실이 아닌 본인이 직접 자른 듯한 머리칼은 형편 없었고 값싸보이는 컬러렌즈는 유난스러운 푸른색이었다. 꽤 이국적인 교포 느낌도 났다. 윤미의 말마따나 왜소하고 갸날픈 몸집은 그동안 왜 그리 잘 뛰었는지 설명해주었다. 순대국밥을 허겁지겁 먹는 모습에 뒤늦게 시킨 재현의 고기도 몇 점 건넸다. 많이 굶었나보네. 그사이 소지품을 탈탈 털어봐도 삐삐는커녕 노트도 없었다. 오로지 작은 지도 하나와 교차로 달력 뿐이었다. 이런 경우는 보편적으로 딱 한 가지였다. 공급망으로부터 버림 받았을 가능성이 컸다.

 

"걔네가 널 버렸어?"

"..."

"...이주연이니."

 

결코 뱉고 싶지 않았던 이름을 꺼냈다. 눈에 띄게 움츠러드는 모습. 재현은 그 반응을 보고도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걔가 사주했어? 유성 제약?" 목소리가 떨려왔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일이지. 왜 나는, 정말 아무 것도 몰랐었고.

 

더는 이쪽에서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대강 인적사항들만 받아적은 후 유치장에 데려갔다. 뭐 이리 오래 걸리셨습니까, 신입의 농담조에 바라본 밖은 이미 어두컴컴했다. 시간의 경과조차 짐작하지 못한 재현은 덤으로 너무 수척해보이십니다, 하는 걱정까지 들었다. 기상예보에는 없던 소나기가 살벌하게 내리고 있었다. 우산이 없는데 큰일이에요, ...이거 너 써라. 주연이 사준 검은 우산을 신입에게 던졌다. 장마가 오면 꼭 이것만 쓰고 다니라며 귀중하게 손에 쥐여준 것이었다. 차로 뛰어들어가는 동안 어깨가 폭삭 젖었다. 그 우산을 쓸 자신이 없었다. 진유경은 범죄자고 걜 애타게 찾는 이주연은, 당췌 어떤 상관관계가 있어서? 주연아, 아니지? 불러도 대답없는 빗소리만. 아니어야 해. 무얼 부정하고픈 건진 모르겠지만.

 

뻑뻑한 핸들을 틀었다. 끼이익, 듣기 싫은 마찰음이 차내를 가득 채웠다. 라디오의 볼륨을 한껏 돌려 크게 했다.

 

포 논 블론즈의 왓츠업이었다.

 

 

 

 

/

 

 

 

 

"...많이,"

"..."

"늦었네요."

"...우산 없어?"

 

첫말은 퉁명스러웠다.

헤드라이트에 비친 검은 형체는 태연히 웃었다. 웃는 입꼬리 가운데엔 터진 상처의 피가 빗물과 섞여 고였다. 왼쪽 얼굴이 부은 주연은 재현이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소름돋게 똑같아서, 그러니 전부 속아 넘어갔던 거구나, 허망하게 깨달았다. 안전벨트를 푸는 동안 주연은 재현의 자리를 열어주었다. 우산 없이 맨몸으로 내리는 재현에 많이 당황한 것처럼 보였으나, 한참동안 똑바로 눈을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아 땅바닥만 쳐다봤다.

 

"형한테 줬잖아요."

"..."

"...왜 없어요?"

 

내가 오늘 챙겨가랬잖아. 울컥, 속에서 무언가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얘가 저한테 쏟은 애정까지 거짓으로 치부하고 싶지 않았다. 저를 위한 이 모든 행위가 거짓되질 않길 바랬다. 그렇지만 그럴 확률은 또 희박해서, 스스로를 절망에 빠뜨리길 반복했지만, 순정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주연의 어떤 것이 드러날수록 버거웠지만 싫었던 적은 결코 한 번도 없어서, 걔는 이미 재현에게 깊이 들어왔고 거기에 적응해버린 잘못이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제 꼴이 비참해져도 계속 붙잡고 싶었다.

 

옆자리에 걔가 없다면 허전함을 넘어서 좁은 집안은 텅 비었고 머릿속도 텅 비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고 목소리를 듣지 못하면 잠이 오질 않았는데 되려 그것이 더 비참한 쪽 아닐까. 진유경이 누구야? 지금이라도 추궁해야 하는데 그러면 정말 끝일까봐, 마땅한 변명조차 해주지 않을까봐 뒤집어질 관계가 겁이 났다.

 

"...어딜 다녀왔어요."

"주연아."

"선물."

 

주고 싶어서 기다렸어요. 손 내밀어 봐요.

 

달칵, 부드럽게 열리는 케이스 안에 메탈시계 하나가 쇳내를 풍기며 재현의 손목을 감싸쥐었다. 형한텐 가죽이 어울릴 것 같았는데, 그래도 나랑 같은 걸 주고 싶어서. 섞인 다정이 빗물을 타고 흘러내렸다. 비가 내려서, 것도 하필 오늘 소나기가 쏟아지는 바람에, 모든 게 노골적이었다.

 

"왜 화를 안 내?"

"...?"

"내가 말도없이 늦었는데, 어딜 다녀왔는지 대답도 않았잖아. 왜 가만 있어."

".......괜찮아요.“

 

오겠거니 기다렸어요. 맞잡은 두 손은 이질적일 정도로 따뜻했다.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분명 화가 나야 할텐데.

주연의 웅얼거리는 소리는 가까이 다가서야 들렸다. 재현은 한 걸음 걸었고 주연이 허리를 끌어당기자 균형을 잃었다. 머리에 고인 빗물이 우수수 떨어졌다.

 

"형은 저한테 너무 많은 걸 가르쳐줘요."

"어떤 거?"

"마음."

 

인생은 복잡하지만 아름답다고 하잖아요. 그 의미를 알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이러고 있으면.주연은 고개를 파묻는다, 재현의 어깨에.

 

주연을 사랑했다. 마음마저 거짓이 아니었다. 보여지지 않는 것도 보일 수 있었다. 믿기로 했다. 믿었다. 재현은 주연을 믿고 사랑하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래두 숟가락으로 바닷물을 퍼내는 일이래두 이건 날씨와 계절 탓도 아니었고 하나뿐인 우산 때문도 아니고 진유경의 움찔거리는 모습과 오늘 채워준 시계와 폭삭 젖은 주연의 두 어깨 탓도 아니었고 그저 보이는 것이었다. 만져지고 더듬을 수 있고 향이 나고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 감정은 때때로 만질 수 있었고 주연은 거짓이 아니고 재현은 믿기로 했다. 마음만으로,

 

"사랑해."

 

인생이 움직여주진 않겠지만.

 

 

 

 

 

 

9.

 

이주연이 사라졌다.

제 스스로 혀 깨물고 피를 토한 진유경이 퇴원하고도 한참 후였다. 계절은 한 바퀴를 돌기 직전에 멈춰섰다. 올해 겨울은 눈보다 비가 자주 온댄다. 재현은 추적이는 진눈깨비가 내릴 때면 짐짓 밖을 나섰다. 어둑한 날씨는 혹독한 추위를 수반했다. 자주 맞이한 추위는 이내 무던해졌다. 입김을 한껏 내뿜고 안으로 들어가선 온통 시뻘개진 피부를 마구 긁었다. 건조해 갈라진 틈 사이로 피가 새었고 서랍에 가득 쌓인 대일밴드 하날 붙였다. 하루 일과같은 일이었다. 추위 뿐 아니라, 어쩌다보니, 모든 것에 무던했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진유경은 첫눈이 내리는 날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것은 얼마 없어요.

약을 받았고 조금씩 제 몫을 빼돌리다가...

 

이주연은 사라졌다.

소리소문없이. 주연의 동기들조차 재현에게 물어올 지경이었다. 학회장이 사라졌으니 퍽 곤란할 터였다. 실종신고를 해야하지 않겠냐며 우는 여자애도 있었다. 글쎄요, 그럴 때마다 재현은 무능한 경찰을 자처했다. 짐작가는 부분이 없었다. 유성그룹은 본디 국내 유일하게 해외에 본사를 둔 기업이었다. 눈 씻고 찾아봐도 한국을 뜬 흔적없이 말끔했다.

 

윗사람들한테 들켰고 보시다시피 왼쪽 손목을.

마지막으로 기회를 준 사람은 가장 높으신 분이었어요.

 

유경의 손목은 너덜너덜했다. 엉성한 붕대를 감았지만 부어오르다 못해 짓무른 그것을 병원에서 같이 치료하느라 더 오래 걸렸다. 망치로 내려쳤습니까? 대답을 망설이는 진유경은 여느 중독자들과 다를 바 없이 불안하고 위태로웠다. 계속해서 뜯는 손톱을 보고 여분의 밴드를 건넸다. 밴드를 붙이는 손마저 덜덜 떨렸다. , 만선을 운행하는 밀매업자들이었어요. 거긴 또 어딥니까. 진유경은 항구의 이름과 구역까지 알려주었다. 쉬이 잊을 기억은 아니니까요. 마약선은 윤미와 최 경사가 맡기로 했다. 진유경이 입을 연지 꼬박 이틀 째에 대강 윤곽이 잡혔다.

 

, 유성그룹 막내 아들이요.

 

돌리던 만년필이 멈췄다. 좁은 조사실에서 진유경을 마주했던 것은 몇 개월 전이었는데, 도무지 주연이 그의 입에서 나올 때면 당황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꽤 급조한 일인 것처럼 보였어요. 시간이 없는 것도 같았고, 아무튼... 어딘가 이상했어요. 원리원칙은 철저히 따르던 사람이. ...그게 언제쯤이었습니까? 여름과 가을의 언저리였습니다. 메탈 시계의 차가움이 아리듯 느껴졌다. 모든 일을 자초한 것은 너였다. 너의 행동은 나로 인해 기인한 것이었을까? 이주연은 도망갔으나 재현은 아직도 주연에게 놀아나는지 몰랐다.

 

빼돌리면 죽는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약을 보니 정신을 차릴 수 없더라고요.

원래 운반해야하는 목적지를 건너뛰고 두 배로 쳐준다는 곳만 돌았어요. 금방 뒤를 밟히더군요.

차라리 지금 잡혀서 다행이에요. 어차피 개죽음이었을 테니.

 

"그들이 사람을 죽였어요?"

"...불구는 많았습니다."

"...것도, 유성제약이 관여했습니까?"

 

.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배신감이었나. 걱정과 연민을 어거지로 꾹꾹 누르고 나서야 붉게 충혈된 눈으로 진유경을 추문했다. 혀를 씹었던 이유는 뭐였어요, 죽으려고? 유경이 입을 뗄 때마다 깊게 패이는 구멍에 동그란 잇자국이 선명했다. 조사실에 짱박혀 있던 윤미의 흰 와이셔츠가 붉게 물든 그날 윤미가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봤었다. 그날 흘렸던 피를 생각하면 여태 살아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빼내줄까 싶어서."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고?"

"..."

"재현아!"

 

윤미가 문을 벌컥 열어재꼈다. 무슨 일이야. 손에는 재현과 밤새 조사하던 유성제약의 조세서류들이 들려있었다. 내 말이 맞아. 그날 기억하지?

 

"탈세가 중요한 게 아니야. 브로커에게 돈을 댄 증거를 잡았어."

"전부 유성 제약이야?“

 

윤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주연은 빼도박도 못해. 진유경이 책상에 머리를 찧기 시작했다. 약발이 다 되었으므로 부작용일 터였다. 급히 신입을 불러 유경을 제지시켰다.

 

...형사님이 쿵, 주무실 때, ,

창 너머로, ,이주연이, , 찾아왔어요.

멍청한 새끼. , , .

 

수갑에 베였는지 이마에 피가 흐르는 진유경이 재현을 노려봤다. ...그래. 이주연은 사라지지 않고 도망쳤다. 유구한 증거들을 남기고서. 재현을 확인하고.

 

 

이주연은 재현을 사랑했다. 그동안의 쌓이고 쌓인 어리석은 선택으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

 

 

 

 

유성그룹은 전부 조직폭력배들 산하에 있어.

지금이야 손을 털었다느니 어쩌니 지랄해대지만, 그거 전부 날구라야.

거즘 회사 간부인 사람들이 탈세부터 사기, 몇몇은 살인과 폭행이란 소문도 있고.

전과가 너무 많은 애들 모아둔 곳이 유성제약이야. 이주연은 깨끗할지 몰라도 그 조직체는 절대 아니야.

 

거리를 둬.

 

 

거리를?

 

유성제약의 패거리가 잡혔다. 11월의 겨울이라선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우동집의 사람은 차고 넘쳤다. 실내의 무수한 쪽지들로 가득찬 판떼기들 때문에 새로이 생겨난 바깥의 코르크판을 매만졌다. 어디냐, 오늘은 너 두고 먼저 누구누구의 집으로 간다, 누구야 보고 싶다, 그립다, 감기 조심해라. 발신인과 수신인을 알지 못하는 주인없는 쪽지가 대부분이었다. 한켠의 압정 중 하나를 뽑았다. 붙일 것이 있었다.

 

유성제약 연구소의 주소지는 허허벌판이었다. 그 사실을 지금 알았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동네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미 건물을 헐군지 꽤 되었다는 거였다. 이미 튈 준비를 끝냈을지도 몰라서 똥줄 탔지만 다행히도 멀지 않은 곳에 주된 밀매항구가 있어 몇 주간의 잠복 끝에 공급망의 주요인물들을 잡았다. 사건이 일단락되기까진 즐거웠다. 재현은 특진이 됐다. 이제 경장이었다. 이 경장님, 신입이 너스레를 떨면 기분 좋게 받아쳤다. 그리고 생겨난 여유에는,

여즉 잡히지 않은 이주연이 선물한 시계를 쳐다봤다.

 

모두가 주연의 행방을 몰랐다. 사라졌다는 말이 옳았다. 직속 부하란 놈들도 전부 진술이 달랐다. 짜고 쳤다고 볼 수도 없었다. 하나같이 그들을 버리고 떠나간 주연에게 막강한 배신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주연의 삐삐는 더이상 진유경을 찾지 않았다. 아예 없는 번호였다. 이별도 이런 이별이 없었다. 여운 있는 결말은 싫다 했더니 그냥 허무맹랑하게 꾸며 버렸네.

압정이 딱딱한 코르크판을 꾸욱 눌렀다. 쭈구리고 앉아 사람들의 손글씨를 하나둘 살피는데, 사진 두 장이 유독 가로등 불빛에 빛났다. 살짝 건들자 조그맣고 살짝 흔들린 사진 한 장이 눈길 위로 떨어졌다.

 

재현이 찍은 주연이었다.

 

옆엔 응당 주연의 시선으로 담은 재현이었다. 폼 잡고 찍은 사진을 인화하랬더니 붉은 귀로 엉성하게 파르페를 휘젓는 모습을 인화했다. 하여간 고집이 은근 쎄서.

사진 끄트머리에 89 이주연, 은 확실히 주연이 쓴 글씨였다. 우스웠다. 도망가는 와중에 이걸 붙이고 갔을까, 아님 너는 아직 이곳에 있을까.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보고 싶었다. 그 애가 날 엉성하지만 진실되게 사랑했다는 흔적이 나오면 나올수록.

 

잘 사라지길 바란다. 나는 마주치지 말고. 주연이 사진 뒷편에 남긴 글귀를 보고 피식 웃음이 터졌다. 오직 재현에게만 하는 작별인사였다. 재현도 속삭였다.

후일에 만나기로 하자. 언젠가. 시간이 흘러도 서로를 잊지 못할 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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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1124,

세상은 그의 얼굴을 대서특필로 보도하였다.

지명 수배자의 신분이었다.

 

 

 

 

 

 

In love, one always starts by deceiving oneself and ends by deceiving others.

That is what the world calls a romance.

- Oscar Wilde

 

 

 

사랑은 늘 자신을 속이면서 시작하고, 남을 속이면서 끝난다.

세상은 그걸 연애라 부른다.

오스카 와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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