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struck
2024
5th Juyeon Hyunjae Webzine

Watch stars, we can count’em from the rooftop. I just want you baby I don't need nobody else here.
Gotta show you off, but later keep you to myself.

 

 

 

 

 

5) 이르쿠츠크

 

 

주연은 도착하자마자 멍만 때렸다. 그러다 급하게 숙박 어플부터 켰다. 옵션도 자세히 보지 않고 그냥 추천순 맨 위에 있던 아무 숙소나 결제했다. 그래놓고 다시 멍 때리던, 만능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때 익숙한 캐리어가 제 발 앞에 멈췄다. 깜짝 놀라 고개 들었다. 믿을 수 없는 얼굴이 보인다. 그는 입 꾹 다물고 옆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아무것도 물어보지 마세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서 입술을 꽉 물었다. 그래서 알겠다는 답은 고개로 대신했다.

 

"웃지도 마세요."

 

하지 말라는 것 중 몇 개는 해줘야 미덕이래서 그냥 웃었다. 어차피 참을 수도 없다. ……. 나 진짜 미쳤나 봐. 손으로 이마 짚은 재현이 급히 누나들에게 연락을 남겼다. 열차 이미 출발해서 확인하려면 한참 걸릴 것 같긴 한데……. 그냥 다 각자 알아서 잘 놀기만 하면 되지. 둘 다 의욕이 샘솟았다. 그 자리에서 기차표를 예매했다. 돌아가는 비행기는 고정이라 주어진 시간 고작 이틀. 그래도 내렸다는 자체에 힘을 실었다. 해방감이 물밀 듯 쏟아진다. 너무 당연히 다시 같은 칸에 찍힌 각자의 좌석을 보며 이번엔 이현이 낄 수 없는 열차가 되길 남몰래 빌었다. 너무 몰래 빌어서 자기 자신조차 알아챌 수 없댔다.

 

 

*

 

 

일단 택시를 타고 주연이 예약한 숙소로 갔다. 주연이 마지막 예약자였는지 자리가 꽉 찼단다. 터덜터덜 나오면서 근처에 있는 다른 숙소의 문을 두드렸다. 또 방 없음. 그다음 숙소는 어플로 찾았는데 다행히 싱글룸이 하나 남아 재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빠르게 결제하고 찾아갔다. 보자마자 왜 끝까지 비어있었는지 이해했다. 도로의 차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1층에 재현이 고른 방이 있다.

 

"괜찮겠어요? 제가 여기서 자고 재현 씨가 제 숙소 가서 쓰셔도 되는데."

". 저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불편함보단 당장 좋은 게 더 컸다. 아무 회상도 아무 추억도 할 수 없는 낯선 곳으로 빠져나왔다는 것. 탈선은 언제든 맛이 좋다. 공범이 있다면 더더욱.

 

"승무원한테 뭐라고 했어요. 미리 말도 안 했을 거 아니에요."

"아이 러브 바이칼! 아이 원투 고투 바이칼! 하면서 소리 지르니까 알겠다던데요."

 

재현의 기행을 듣고 길거리에서 막 웃었다. 어떤 길을 걷든 사람은 없는데 덕분에 두 한국인의 목소리만 적막 사이를 왕래했다. 여기 좋은 것 같아요. 왜요? 진짜 여행 온 것 같아서요. 그러면서 정말 아무렇게나 발이 이끄는 곳으로 걸었다. 저 건물이 마음에 드니 가까이 가보자, 저쪽으로 지나간 차가 범상찮다 따라가 보자, 하면서.

 

"이 앞에서 꺾으면 시장이 있대요."

"이렇게 추운데 열렸을까요?"

". 무조건 열렸어요." 주연이 책 내용을 더듬는다. 어떤 이도 재이에게 줄 선물을 이보다 더 추운 야외 마켓에서 샀다고 했다. 그래놓고 기차에 두고 내렸다고 했지.

 

주머니에 넣은 손을 주먹 쥔 채 펴지 못하고 있다. 동상 걸릴 것 같아! 재현은 무려 코트 차림으로 내렸다. 지금이야 들뜨고 기분 좋아 어느 정도 버틸 만하지만 곧 한계가 오겠거니, 하고서 턱 떠는 걸 들키지 않게 주의했다. 물론 주연도 그 차림을 내내 신경 쓰고 있었다. 제가 입고 온 롱패딩이랑 바꿔입자고 말하는 건 백 퍼센트 거절당할 각오가 필요하다. 와중에 시장이 있다니. 완전 희소식이다.

 

몇 보 걷지 않았는데 넓은 공터에 설치된 각종 천막이 보인다. 제일 먼저 방한용품만 눈에 들어온다. 어떤 천막엔 난로가 있었다. 재현을 끌고 그런 곳부터 들러 이것저것 구경하며 시간을 끌었다. , 장갑 멋있다.

 

"우리 사서 하나씩 끼고 다닐래요?"

"……. . 저 이런 거 껴 보고 싶었는데."

 

러시아표 가죽 장갑 당당하게 끼고서 천막을 빠져나왔다. 그다음 코스가 급하다. 마트료시카 보고 눈 돌아간 사람 버리고 옆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래놓고 목도리 들고서 나타났으니 의도를 들킬 수밖에.

 

"저 지금 추워 보여서 이러시는 거예요?"

 

너까지 이러면 안 되지 않겠냐? 얼굴로 묻는 사람에게 차마 우리 형이 왔어도 이렇게 했을 거란 말은 입 밖에 내주기 싫다. 그래서 그냥 휑 비어있는 목에 목도리나 칭칭 감아줬다. 얼굴이 반쯤 묻혀서 눈만 보였는데 그건 좀 위험하다. 모양을 가다듬어 코까진 보이게 했다. 그냥 아예 안 보이게 다 가려야 하나. 배우는 배우구나. 눈으로도 말을 해. 급히 인형 쪽에 시선 돌리며 웅얼댔다.

 

"누가 겨울에 여기 오면서 코트를 입고 와요……."

"저도 롱패딩 있긴 한데요. , 압축팩 안에."

"왜 숙소에서 안 갈아입고 나왔어요." 당장 돌아갈 심산으로 부산스럽게 굴었다.

"문제는 압축팩이 누나들 캐리어 안에 있어요."

 

그래도 이제 이런 거 생겨서 괜찮아요. 주연이 티 나게 실망했지만 재현은 진심으로 괜찮았다. 확실히 격이 다른 방한이다. 이 이후로 한 번도 턱을 떨지 않았다.

 

 

*

 

 

숙소의 라디에이터가 침대 옆에 있어서 춥지 않게 잘 수 있었다. 그러나 밤새 따듯했다면 일어난 이후가 문제다. 침대를 벗어남과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소름이 끼쳐서 재현은 내내 까치발을 들고 다녔다. 맨발로 걷는 것도 아닌데 최대한 온기 없는 건 피하고 싶었다. 주연과 아침 몇 시에 만나자 약속한 기억은 없다. 추위를 피해 자연스럽게 헤어졌고 뭔가 만남도 그런 그림이려니 예상했다. 그러나 이 넓은 대지 위 기차에서 만난 사람을 길거리에서까지 짜잔, 마주친다는 건 조금 힘든 일이다. 여태 몇 개의 운명이 우연을 기대하다 떠나갔는지. 이런 생각은 혼자 있을 때 하면 안 좋은 것 같아서 충전 다 끝난 핸드폰 들고 일어났다. 머리를 잘 말렸다. 드라이기도 누나들 캐리어에 두고 와서 숙소에 비치된 공용 드라이기를 썼다. 공용 뭐시기를 써 본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다.

 

주연의 숙소는 완전 번화가에 있었다. 덕분에 가는 길 눈 때문에 통행이 곤란해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눈이 더 내리지 않아 머리 위에 쌓이는 건 없는데 신 밑창은 자꾸만 홀린 듯 깊게 밟을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아 걸었다. 눈이 덜 치워진 부분에만 발이 꽂힌다. 결국 숙소 앞까지 가선 발가락 감각이 절반쯤 사라졌다. 혹시 벌써 나갔을까. 기차는 지루하니 둘 다 취침과 기상을 하루에도 수 번씩 했다. 그래서 그가 낮과 밤이 명확한 구역 안에선 얼마나 부지런한지 잘 모르겠다. 아는 게 별로 없는 건 당연한 건데도 그게 왠지 섭섭하게 느껴졌다. 몇 년 안 사람도 전부 다 알지 못하는데 겨우 며칠 만난 사람은 더 알기 힘들겠지. 따지면 평생 살고 있는 저 자신도 제가 잘 모른다. 지금 기분도 모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 누가 질문한다면 입을 꾹 다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아무 생각 안 하는데요? 할지도.

 

"?"

"……."

 

걱정과는 다르게 로비에 딱 오 분 정도 앉아 있으니 주연이 내려왔다. 재현이 멋쩍어해서 인사는 생략됐다. 주연도 마찬가지인지 눈을 보지 않고 말했다. 아침은 드셨어요? 아니라고 하자 재현을 끌고 숙소의 조식 뷔페로 끌고 갔다. 빵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찰흙 씹듯 씹었다. 마침 누나에게 전화가 와서 밖에서 핸드폰 붙잡고 실랑이했다. 주연이 따라 나왔다. 남은 커피를 종이컵에 옮겨 담아 막 전화 끊고 아무 일 없던 척하는 재현에게 내밀었다. 재현이 끼고 있던 장갑 한쪽을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바람에 닿자마자 커피는 바로 식어버렸는데 그래도 컵은 꼭 쥐고 있었다. 가고 싶은 데 있어요? 주연이 대답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바이칼은 한번 가 봐야 하지 않을까요?"

 

남들이 좋다 하니 우리에게도 좋을 것 같아. 주연이 생각한 좋은 곳은 모두가 좋아할 수 있는 곳이었고, 재현이 유일하게 아는 곳도 남들이 좋다고 하는 그곳이라 거절할 필요가 없었다. 세차게 긍정했다.

 

"컨디션 괜찮으세요?"

"……. 컨디션이요? 괜찮아요. 오늘은 별로 춥지도 않고. 주연 씨 어디 안 좋아요?"

"아뇨, 아뇨. 어제 너무 추우셨을 것 같아서……. 감기 오면 안 되잖아요."

"감기 걸려봤자죠. 그냥 약 먹고 자면 낫는 거."

"있어요?"

"약이요?"

"."

 

챙긴 적 없다. 누나들은 가져왔을 테니 기차에서 내리지 않았다면 필요할 때 억지로라도 먹었겠지만. 이 모든 배경이 저 눈에는 죄다 모지리처럼 보일까 봐 그냥 대충 있다고 고개 끄덕였다. 없으면 저한테 말하시고요……. 그 말에는 티 안 나게 끄덕였다. 주연도 명확한 대답을 기대하고 말한 건 아니었다. 사실 주연에게도 약 같은 건 없다. 둘 다 그런 걸 멀리하고 산지 올해로 1년째다.

 

같은 지역을 검색해 같은 블로그에 들어가 같은 경로를 보고 있는데 의견을 공유하진 않는다. 얌전히 화면 들여다보면서 그저 겹치는 길을 같이 걷는 사람 역을 자처했다. 왜 그랬냐 하면……. 서로를 진짜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원래는 나만 생각했다면, 여기까지 온 이상 당신만 신경 써야 할 것 같은데. 이런 상황은 태어나서 처음이라 연습이 덜 됐다. 성공하면 그 이후엔 성장하려나.

 

전날 왔던 시장 앞에서 버스를 탔다. 말이 버스지 조수석 앞 유리에 커다랗게 바이칼, 쓰여 있는 승합차였다. 뭔가 으스스해 승합차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다른 승객이 있나 살폈다. "우리밖에 없는 거면 어떡해요……." 하자마자 사람들이 몰렸다. 그래서 가장 늦게 탑승하게 됐다. 티켓도 필요 없다. 운전자는 모두에게 현금을 받자마자 출발했다. 누군가를 더 기다리거나 늦장을 부리지도 않았다. 도심을 벗어나는 건 너무 쉬웠고 곧바로 숲을 가로지르는 긴 포장도로가 나왔는데. 갇힌 곳은 정말 커다란 숲이었다. 세상 모든 침엽수가 여기 다 모여있는 것처럼 아득했다. 승합차 속력이 너무 빨라 무중력인 듯하고 도로에 아무런 차도 없어 고요하기까지 했으므로 재현은 꾸벅꾸벅 졸았다. 주연은 슬쩍 보이는 운전석 속도계를 보다가 긴장했다. 시속이 100, 110……. 그 이후로는 보지 않았다. 그를 빼고 모두가 익숙한 듯 잠에 들거나 할 일을 했는데 주연은 계속 머리에 허튼 사고 따위가 아른거려서 눈을 감지 못했다.

 

그래서 잘못 내린 건 아니다. 누가 졸아서 혹은 누가 다른 생각 해서 실수한 건 절대 아니다. 승합차에 있던 사람 중 절반이 우르르 내리는데 그러니 여기가 맞겠거니 해버린 거고, 눈앞에 얼어붙은 호수나 시장이 안 보인 건 그냥 원래 좀 멀찍이서 내려주나 보다 한 거였지. 다른 사람을 따라가려 했으나 모두가 뿔뿔이 흩어진다. 대충 도로변을 서성댄 지 한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 잘못 왔나 봐요."

"잠시만요."

 

급히 장갑 벗은 재현이 구글맵 켜 위치를 확인했다. 바이칼은 차 타고 한참 가야하고 여긴 그 중턱에 있는 이름 모를 숲이다. 지도상에 보이는 건 그들이 잠깐 올라 타 있던 도로와 인터넷이 터지지 않아 번역조차 되지 않는 러시아어 지명. 아마 마을 이름일 것이다. 어쩌지. 사실 깊은 고민은 없었는데 잠깐 얼을 탔다. 서로 얼굴 보며 빨리 해답 좀 찾아봐, 하고 있는데 둘 다 질문하는 쪽인 것 같아서 웃음이 터졌다. 한참 어이없어 웃기만 하다가 얼굴 보고 한 번 더 웃고, 이게 뭐야……. 하다가 또 눈 마주쳐서 웃고. 러시아에서 겪은 것 중 가장 웃긴 건 아니었는데 거의 그만큼 웃었다. 가장 웃겼던 사건을 꼽으라면 아마 두 사람 다 이르쿠츠크역에서 다시 만난 그 시점을 꼽을 것이다.

 

"만약에 여기서 못 돌아가면……. 끝이겠죠?"

 

재현은 좀 살벌한 소리를 했다.

 

"그럴 일은 없을걸요? 지나오다가 식당 같은 거 있는 거 봤는데."

"창밖 구경했어요?"

"."

". 전 너무 빨라서 뭐 어디 보기가 무섭던데. 길도 미끄러운데 사고 날까 봐."

 

주연은 거기서 조금 탄식했다.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존 게 아니라……. 쫀 거였구나.

 

"내리기 잘했어요. 여기서 교통사고 나면……."

"여보는 들었죠?"

"……."

 

뱉어놓고 뭐가 이상한지 몰랐던 재현이 왠지 못 들은 척 해야겠다는 표정 보고 기함했다. 아니요. 그거 아니고요. 여행자 보험이요. 주연도 타당한 여보 찾다 보험 얘기였구나 찰나에 깨달았으므로 "아아, 알아들었어요." 하며 웃어넘겼다. 안 웃었으면 본격적으로 이상해지는 거였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요?"

"같은 방향 가는 버스 보이면 그거 다시 타죠, ."

 

답이 하나밖에 없는 것 같아서 푯말도 서 있지 않은 도로 옆에 우두커니 섰다. 형식적으로는 일단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잠시 시간이 뜬다. 재현은 볼 것도 없는 핸드폰을 뒤적거렸고 주연은 슬쩍 주변을 기웃대다가 움직였다. 시야에서 멀어지지 않는 곳까지 걸어가기도 하고, 다시 오기도 하고. 그냥 이러려고 온 사람처럼 산책했다. 오히려 그편이 일정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참 기다린 것도 아닌데 그 시류에 탑승하기로 했다.

 

"당분간 차 안 올 것 같은데요." 재현이 괜히 텅 빈 도로를 기웃댔다. 포장도로는 뜀박질도 못 할 정도로 미끄러워 보인다.

"그러게요. 겨울이라 아무도 안 오나 보다……."

 

결국 다시 숲으로 가게 됐다. 가는 차가 있으니 오는 차가 한 대쯤은 있겠죠. 없으면 아까 지나쳤다던 그 식당에 들어가 택시라도 부를 셈이었다. 바이칼까지 가진 못하더라도 이르쿠츠크로 되돌아갈 방법은 기회처럼 아직 남아있으니까. 불안할 것도 없었다.

 

어젯밤에 내렸다던 눈은 이제 더 오지 않는다. 그래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숲길은 간간한 높이로 눈이 쌓여있었다. 마른 풀이 있는 곳만 골라 걸으며 소리에 집중했다. 앞만 보는 재현과 달리 주연은 가끔 뒤를 돌아 걸었다. 모든 자취에 흔적이 남는다는 건 잘못 내린 사람들에게는 희소식이다. 거꾸로 걷는 사람이 불안해서 살짝 곁눈질을 하다 보면 또 그 낌새를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다시 정방향으로 돌아온다. 그래 주면 마음이 도로 편안해진다.

 

둘 사이엔 침묵이 있었지만 그 종류가 적막은 아니었다. 분명 그랬는데 일순간 모든 감각이 사라지고 한 곳에만 집중됐다. 이래 버리면 적막이 맞았다. 재현이 걸음을 멈추자 주연도 따라 했다. 당황한 두 눈도 따라 좇았는데 아마 그것이 흰 눈과 너무 대비되는 바람에 어떻게든 발견되긴 했을 것이다.

 

"에이……. 돌이겠죠."

 

그렇게 말하자마자 아차, 했다. 피 흘리는 돌은 들어본 적도 없고 있다 해도 보고 싶지 않다. 그냥 아예 피 같은 건 보고 싶지 않다. 의례적으로 따라갔다. 홀린 듯이 끌려갔다는 쪽이 맞을까. 나비는 굉장히 편한 자세로 누워있었고 꼬리엔 오래된 상처가 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있진 않았을 텐데. 미동이 없어서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눈은 감고 입은 살짝 벌어져서 송곳니가 보인다. 마지막으로 아주 차가운 숨을 들이쉬었을 것만 같다. 어찌할 바를 몰라 길게 한숨 쉬었다. 난감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가슴이 아파서 그랬다. 둘 다 나비를 사이에 두고 쪼그려 앉았다. 입을 열 수 없어서 그저 눈을 깊게 깔고만 있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두꺼운 장갑이 털 위에 닿는다. 이상하게 촉감도 느껴진다. 몸통을 그냥 꾸욱 누르고 있었다. 전혀 딱딱하지 않았다.

 

"금방, 금방 그랬나. 따듯해요."

 

주연도 따라 손을 뻗었다. 재현의 말대로다. 장갑을 뚫고 미약한 온기가 느껴진다.

 

"나무에서……."

 

작게 중얼거렸지만 여기는 적막 속이라 둘 다 하늘을 올려다봐야 했다. 고개를 세게 꺾어야만 꼭대기가 보인다. 아주 커다란 나무이다. 아무리 반사신경이 좋다 한들, 만약 정말 저기서 떨어졌다면……. 손을 늦게 떼면 늦게 뗄수록 오래 부드러울 것 같아서 계속 부동했다. 그러자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는데도 무조건 그러고 싶었다. 늦출 수 있는 모든 걸 최대한 늦추고 싶다. 곧 뻣뻣해질 몸을 누르고 있자니 연상이 아니 될 수 없다. 둘 다 동시에 같은 것을 떠올리고 같은 감상에 각자 꼬리를 달았다.

 

'왜 내렸을까.'

 

이 후회는 너무 늦었다. 후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에 사실 이를 수도 없었다. 그 기차는 이미 이르쿠츠크를 떠나갔고, 어차피 그곳에 백날 타 있다 한들 이현은 그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다. 이미 내리고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 눈이 마주쳤다. 나비와 같은 속도로 몸이 굳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동네에서 차에 치인 길냥이를 묻어준 적이 있어요." 아주 느리고 또박또박 말을 꺼냈다. 그렇게 바라본 재현은 이미 눈이 새빨갛다.

"그런 동물을 한두 번 본 건 아니었는데. 왠지 걔는 꼭 제가 아니면 아무도 안 묻어줄 것 같더라고요. 무턱대고 안아다가 근처 주차장 정원에 묻어줬었는데." 제 말에 제가 집중하다 보니 재현처럼 울 준비를 하게 된다.

"생각이 짧았어요……. 죽어서도 차 소리는 싫을 거 아니에요. 거기는 차만 오는 곳이니까……."

 

그리고는 울어줄 수 있을 만큼만 울었다. 딱 진심이 허락하는 만큼만. 얼굴이 흥건해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도리를 다한 기분이었다. 고작 눈물 세 방울로 말이다. 정말 딱 그 정도인데도 무언갈 해 준 것처럼 만족스러워졌다. 그건 참 슬픈 일이다. 인사에 용량이 있다는 거. 이현과 비교하자면 너무 찰나에 끝난 추모겠지만 어쨌든 이 모든 것에도 끝은 있다고 하니.

 

주연이 근처에 흩어진 돌을 하나 주워다 땅에 얕은 구덩이를 팠다. 구덩이라고 하기엔 빈약했지만 위에 덮어 줄 게 꽤 있어서 깊을 필요는 없었다. 재현이 두 손으로 나비를 들어 옮겼다. ", 잠깐만요." 낙엽을 덮어 주려다 말고 재현이 멈칫하니 주연도 잠깐 손을 뗐다. 재현이 천천히 장갑을 벗었다.

 

"주연 씨, 이거……. 얘 줘도 돼요?"

 

장갑의 주인은 본인인데 주연에게 허락을 받는다. 얼떨떨하게 그러시라 답하면서 따라 벗었다. 똑같이 생긴 장갑 두 쌍이 들어가니 제법 푹신하다. 한술 더 뜬 재현이 목도리까지 풀었다. 아마 허락받으려던 쪽은 목도리였을 것이다. 그건 주연에게 선물로 받았으니까. 한기가 옷 안으로 훅 끼어들었다. 희생도 과정이라 생각하니 억울한 마음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주연도 딱히 말을 더 얹지 않고 코만 훌쩍거렸다. 낙엽은 산 지 하루 된 두 쌍의 장갑과 목도리 위에 올려졌다. 몇 줌의 흙도. 그리고 전부 다 숨겨줄 수 있는 눈도 한가득 끌어와 위에 봉분처럼 쌓았다. 이제 눈앞에 놓인 건 만들어 본 최초의 무덤이자, 아마 최고의 무덤이다. 손바닥을 맞부딪쳐 흙을 털었다.

 

"이러려고 내렸나 보다."

"그러게요……. 잘 내렸다."

 

낮게 웃었다. 무덤을 만들어 줄 사람이 필요해서 하필 우릴 여기 내리게 한 거라면. 너무 잘한 거야. 똑똑했어……. 러시아에 처음 왔을 때처럼 맨손이 된 채로 일어났다. 주연도 찌뿌둥한 허리를 주무르며 재현을 따라 했다. 미처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는 손을 따라 한 것이다.

 

숲을 벗어나야 고인 한기 대신 해라도 제대로 볼 수 있다. 아마 그런 이유로 왔던 길을 도로 밟았겠지. 주연이 말했던 곳에 정말 식당이 있었다. 손도 씻을 겸 뜨거운 커피를 시켜놓고 앉아서 몇 시간에 한 번씩 이곳에 들른다는 승합차 정보를 얻었다. 창가 자리라서 창 너머 보이는 건너의 숲도 명확했다. 안전지대에 놓여야만 숲이 숲으로 보인다. 그전엔 사실 미로로 보였다.

 

웃지 않으면 아무도 닮지 않은 주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 사실 내면을 자세히 훔쳐보자면, 주연 쪽이 재현을 더 궁금해했다. 재현은 아직 주연에게 자신과 감독의 관계를 고백하지 않았다. 그저 눈치를 채줬으면 좋겠고 아닐 거라면 평생 몰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반반인데, 전자와 후자 모두 같은 결말을 바라고 하는 소망이다. 그리고 보통 욕심뿐인 이기적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는 편이 좋다.

 

나는 아직 당신을 잘 모르지만 우리에겐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확실한 하나가 있어서, 사실 이렇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것도 충분히 괜찮다. 간격이나 거리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그저 인지할 수 있기만 하면 된다. 재현은 악착같이 주연에게 눈 떼지 않았다. 일부러 그랬다. 주연을 보는데 사실은 주연을 보는 게 아니라는 티를 내려고. 그 안에 있는 다른 게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거라고. 돌파구 하나를 미리 깔아놓은 것이다. 이런 것도 이현을 이용해먹는 걸까. 러시아에 와서 한 생각 중 두 번째로 나쁜 생각이다. 그래도 이번엔 뺨을 때리지 않았다. 제대로 반성하려면 누군가는 자길 나무라야 할 텐데 주연은 그 시선이 다 제 몫인 양 받아먹고 있었다. 같이 이현을 이용해먹고 있으니 대비되는 옳은 사상이 여기 없다. 이게 정상이 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텅 빈 얼굴로 서로만 보고 있다가 재현이 먼저 정신 차렸다.

 

"이제 슬슬 나가요."

 

주연이 놀라 빠르게 눈 깜빡댔다. 한번 녹은 몸은 식당 밖으로 나가자마자 금세 얼어붙는다. 보니까 아직 네 시밖에 안 됐는데도 낮 기운이 가셨다. 도로를 횡단해 아깐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정거장 표지판 앞에 섰다. 다른 승객은 없고, 시간표도 없다. 식당 주인도 그냥 이 시간쯤 나가 서 있으면 탈 수 있을 거란 말만 해줬다.

 

재현이 추위를 숨기지 못하고 떨기 시작했다. 얇은 코트 주머니에 손 넣고 오들대는 모양새가 어제보다 더 처량하다.

 

"옷 바꿔 입어요. 저는 진짜 추위 안 타서 얇은 거 입어도 괜찮은데." 이번엔 이 말을 참기 힘들었다.

"? 아니요. 저 별로 안 추워요."

 

그렇게 말하면서 음절마다 진동을 뱉는다. 뭣도 없는 도로만 쳐다보고 있는데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낌새라는 건 무시 못 한다. 그래서 재현은 슬쩍 긴장했다. 완전 고민하고 있던 주연이 결국 고민할 가치도 없단 듯 주머니에 꽂힌 재현의 한쪽 손을 붙잡아 제 패딩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손이 정말 얼음장 같아서 다른 이차적 감상은 들지 않았다.

 

이런 낯간지러운 행동에 합의한 적 없던 재현은 눈만 끔뻑였다. 어쩌면 올 게 왔다고 생각한 걸까. 참으려고 했지만 기차에서 잠깐 내려 빗속을 질주했던 그 날, 어둠에 숨어 했던 행위가 떠오른다. 자세히는 그 느낌.

 

"추워하시니까 마음 불편해요. 그냥 한 번만 넘어가 주세요."

"……. 그럼 이쪽도."

"?"

 

재현이 반대 손도 내밀어 주머니 하나 더 빌리고 싶어 하니 앞으로 마주 봐 밀착한 자세가 된다. 여기엔 카운트다운이 없어서 뭘 해도 용인이다. 기다렸단 듯 지퍼를 내려 품을 열었다. 아기였다면 꽁꽁 싸매 안아 줄 수 있었을 텐데 이미 다 커버린 어른을 안아 주는 거라 목석같은 재현을 녹이기엔 불이 필요했다.

 

"우리 형이 왔어도 이렇게 해줬을걸요."

"……."

 

하지만 불을 막 가져다 쓰는 건 비겁하다.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재현이 듣고 당황해할 말을 해버린 건 비겁하고 멍청한 짓. 그러나 재현은 무언갈 되묻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그냥 다 받아들일 뿐이었다.

 

아니. 너희 형이랑 왔으면 애초에 코트 같은 건 안 입었겠지. 그럼 이런 쑥스러운 짓도 안 했을 거야. 할 수 있는 말을 굳이 삼킨 건 현명했기 때문일까. 재현은 목구멍으로 많은 변명을 눌러 삼키며 주연의 어깨에 더 깊이 고개 묻었다. 몸이 터무니없게 따뜻해서 사실 불이 닿기도 전에 추위는 날아갔다. 당연하다. 무덤은 숲에 두고 오지 않았는가.

 

해방되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끼리 달라붙어 있으니 자연적으로 신호가 왔다. 들킬까 민망해 하체를 한 발짝 뒤로 빼려 했는데 주연이 등을 콱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말하지 않고도 의도가 확실해서 참지 못하고 뜨거운 숨을 어깨에 훅 뱉었다. 바지 위로 완연히 느껴졌다. 일방적이지 않다는 게 사람을 더 미치게 만들었다. 머리에 단 한 가지 생각만 떠오르는데 그러기 무섭게 이곳이 너무 대낮 같아진다. 주변을 두리번대려는 재현을 더 꽉 붙들었다. 얼굴이 콧김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에 있다. 지금 타이밍에 하면 어울릴 짓도 알고 있다. 마지노선이 딱 코를 맞대고 있는 이 자리까지란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경계를 밟아버리면 둘 중 하나는 입술이 물어뜯겨 피를 철철 흘리게 될 것이다. 일단 주연은 이를 세우고 싶었고 그 마음은 재현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한 대 패버리고 싶어.

 

두 사람 다 주먹에 힘을 줬다. 여기서 누군가 때릴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모두 자신의 얼굴에 손을 댈 것이다.

 

차 소리는 적당한 타이밍에 등장했다. 이번엔 놀라서 떨어지지 않고 경계하듯 서로를 야리며 뒤로 물러났다. 야렸다고 느낀 이유는 눈에 불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건 이제 변명조차 하지 않겠다는 선전포고였다.

 

 

승합차엔 사람이 많았다. 빈자리가 딱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조수석, 하나는 뒷좌석. 재현이 먼저 뒤에 올라탔다. 대놓고 얼굴을 피했다. 큰 소리 한 번 오가지 않았는데 왠지 싸움을 막 방해받은 사람들처럼 감정이 격양되어 있었다. 차는 올 때처럼 빠른 속도로 도로 위를 달렸다. 분명 그랬는데도 딱히 속도가 궁금하지는 않았다. 이미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는 상태라서 그런 걸까. 그래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아까 차를 탔던 시장으로 되돌아와서는 재현이 먼저 선수 쳤다.

 

"저 먼저 갈게요."

 

그러고는 뒤도 보지 않고 도망치듯 멀어졌다. 여기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은 단둘뿐이라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부르면 그것만 들릴 텐데. 주연은 왠지 입을 뗄 수 없었다. 내일 아침이면 우리는 다시 기차에 올라탄다. 정말 '우리'가 기차에 탈 수 있을까. 이번엔 진짜 나 혼자면 어떡하지. 이미 한 번 계획을 바꾼 사람이 두 번이라고 못 바꿀까. 내일 기차역에 저 혼자 한국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재현도 같은 생각을 했다. 대놓고 이제 그만하자 티를 냈으니 저쪽도 얼마나 마음이 불편할까. 당장 내일이 캄캄해지더라도 일단 죄책감이 먼저 고개 들었다. 도망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숨고 싶은 거지. 그럼 이건 죄책감이 아니라 수치심일까. 재현은 제 존재를 영원히 숨겼어야 맞는 거라고 그간의 행실을 후회했다. 그러나 내내 느꼈다시피, 후회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러니까 이런 마음을 갖는 것 자체가 벌을 받는 중인 것이다.

 

*

 

해가 완벽히 졌다. 주연이 침대에 누워 천장에 달린 조명의 특이한 무늬를 샅샅이 훑었다. 원래 자던 시간은 아니었지만 잠이라도 들지 않으면 많은 잡념을 자의로 꿔야 한다. 예를 들면 형, 사실은 형의 애인. 안다는 티를 내지 말았어야 했나. 알아주기 바라는 것 같다고 멋대로 추측해 미안했다. 멀미 섞인 한숨이 뜨겁게 쏟아졌다. 한숨에 열이 섞이면 눈가까지 때꾼해진다. 그걸 못 참아서 다 엉망으로 만드냐. 그 사람은 내가 자꾸 형으로 보이니까, 형이 보고 싶어서 온 사람 눈앞에 형이랑 닮은 내가 나타나니까. 그러니까 그런 건데 나는……. 나는, 뭐야. 나는 뭔데. 내가 뭔데.

 

나도 형이 보고 싶었는데 형 애인이 형 대신 내 눈앞에 나타났을 뿐이야. 작년 기차에 둘이 같이 타지 못한 게 그렇게 아쉽고 한이 됐나. 그래서 나를 대신 여기 오게 만든 거 아닐까. 마치 자기 무덤을 만들어 줄 사람이 필요해 우리를 숲에 내리게 만든 그 고양이처럼.

 

답답함을 참을 수 없어서 로비로 내려왔다. 로비는 살짝 쌀쌀했고 사람이 없었고 조식을 먹는 숙소 식당에선 술을 잔뜩 팔고 있었다. 맥주 한 캔을 사서 비어있는 테이블을 찾았다. 의자에 닿은 엉덩이가 깨질 듯 시렸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자꾸만 슬퍼지는데 나무랄 사람이 없어서 눈물을 막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낯선 장소에서의 원래 감정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또 밀려났다. 손에 쥐고 온 이현의 단문집을 캔 옆에 올렸다. 표지에 적힌 필명이자 본명이 눈에 너무도 거슬려서 머릿속으로 괜히 예전의 이름을 읊었다. 이씨. 작명소에서 돈 주고 지어왔다고 했으면서. 난 사랑 때문에 이름까지 바꿀 수는 없는 사람인데. 재현 씨가 그래서 형을 사랑했나. 인생을 다 갖다 바칠 정도로 열정적이니까 마음 내줄 만했나. 나한테는 등을 보였으면서……. 형한테도 그런 적이 있었을까. 연상에 이현을 기계적으로 끼워 넣으며 고작 이것을 도리라고 생각했다. 가족한테는 무슨 짓을 해도 이해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랬다.

 

이현이 러시아에서 쓴 연재물의 초안을 펼쳤다. 글은 한 남자가 러시아에 와서 재이를 향한 사랑을 회고한다는 내용인데. 보아하니 재이는 권태기를 빙자한 끝을 대비하는 것 같았다. 주연은 이현이 죽고 나서야 이 글을 읽었다. 재이를 모르던 때의 주연은 어쩌면 모든 책임을 재이에게 덮어씌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내 형제는 형제의 사랑이 망가트린 거라고.

처음엔 형을 추억하기 위해 읽었다. 지금은 재이가 보고 싶으니 읽어야겠다. 양심 없게 질투가 두개골 내벽을 쿡 찌르고 등장하더라도 말이다.

 

[재이는 '이젠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네가 있으니까 괜찮아.'라는 말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했다. 근데 나는 정말 평생일 작정이었다.]

 

[한 달 뒤에 이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이태원은 월세가 너무 비싸.' 월세가 비싸서 같이 살 수 있었던 건데 재이는 그렇게 떠났다.]

 

[재이의 인생에 나라는 평생은 없다. 내 세상도 그렇다. 지나가는 재이만이 차곡하다.]

 

페이지를 넘겨 비슷한 내용을 찾았다.

 

[그렇다면 최대한 오래 달리는 기차를 타고 싶었다. 단 며칠이라도 재이를 닮은 풍경만 쌓고 싶었다.]

 

[거창하게 나라 하나를 빌미로 사람을 추억하기로 했다. 적어도 시베리아는 계속일 테니까.]

 

몇 장 더 넘겼다.

 

[재이가 이걸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꼭 같이 가자고 했던 러시아를 나 혼자 오게 내버려 둔 건 다 이런 이유였겠거니. 그래서 재이는]

 

이어지는 글자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재이는 영영 내 안에서 아름답다.]

 

더 못 읽을 것 같아서 단문집을 세게 덮었다. 말도 안 되게 재현을 향한 원망과 이현을 향한 질투가 정말 두개골을 꿰뚫고 튀어나왔다. 한국이었다면 절대 안 일어났을 법한 일이다. 다 여기가 시베리아, 게다가 시베리아 중에서도 올 계획이 없었던 낯선 지명의 도시여서, 형도 여기에는 온 적이 없어서. 그래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반절밖에 비우지 못한 캔을 버리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옷을 껴입었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한다지만 일단 깨져버린 머리를 다시 차갑게 굳히는 게 우선이다. 그 누구도 미워하고 싶지 않아.

 

거리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주위를 둘러보면 한 명씩 눈에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고요했다. 그리고 밤답게 추웠다. 정말 미친 듯이 추웠다. 대낮의 재현이 이만큼 추웠겠거니 생각하니 눈을 깜빡일 수 없었다. 덕분에 바람을 정통으로 맞았다. 눈이 몸을 보호하려고 눈물을 뿜었다. 이건 진심으로 생리적으로 나온 눈물이다. 좋은 때에 드러난다면 좋은 핑계로 쓸 수 있겠다.

 

뿌예진 시야를 빠르게 깜빡거렸다. 머리를 굳히려고 나온 건데 이러다 눈이 얼어붙겠구나 싶어 열을 냈다. 골목을 꺾자 거리에서 크게 소리 지르는 남자 둘이 보였다. 그냥 시끄럽게 구는 것이 아니라 싸우고 있었다. 가까이 갈 수 없고 구경할 만한 것도 아니어서 비켜 가려 했다. 그렇게 퍽, 하고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소리를 들었다.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자기도 모르게 지켜보게 됐다. , , . 그들은 사이좋게 나눠 맞으며 욕일 게 분명한 말을 쉴 새 없이 뱉었다. 주연은 계속 추워 울고 있었고, 그들은 결국 피 흘렸다. 바닥에 침을 뱉는 소리가 불쾌했다. 그가 제 입안에 뱉고 간 것처럼 쇠 맛까지 느껴졌다. 아주 착각은 아니었다. 맞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혀를 깨물어서 정말 입안에 피가 돌고 있었다. 그렇게 피 묻은 주연을 두고 남자들은 떠나갔다. 정신 차리니 거리엔 아무도 없었다. 피 삼키지 못하는 주연과 꼬리 털이 풍성한 이 동네 고양이의 울음소리 빼고는 진심으로 이번엔 혼자였다.

 

지금 가지 않으면 큰일 날 것만 같은 장소 하나가 깨진 머리를 다시 때리며 떠오른다. 덕분에 머리가 산산조각이 났다. 바닥에 널브러진 정신을 챙기지도 못하고 부리나케 달렸다. 재현의 숙소가 보이니 도착지도 그곳일 것이다. 로비를 통해 갈 작정이 아니다. 이미 주연은 편리하고 양심적인 경로에서 한 칸씩 밀려났다. 대신 이른 아침 도로의 차 소리로 눈을 뜰 재현의 1층 싱글룸 창을 두드렸다. 내 행동을 민폐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여기서 한 모든 일을 평생 기억하고 살 텐데, 당신한테 호되게 혼나지 않는다면 큰일이 날 거야. 꿈에 형이 나오면 그 꿈이 뭐든 전부 악몽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

 

아닌 밤중에 찾아온 손님이 누군지 알고 있다. 재현이 숨죽였다. 마찬가지로 누워만 있었지 자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내일 아침에 주연을 만나서 해 줄 사과의 내용을 정리하고 있었다. 괜히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미안하다느니. 여기에 온 이후로 내내 제정신이 아닌 것만 같다느니. 입으로 전할 수 있는 최대한의 그럴싸한 말을 다 꺼내 늘어놓고 후보를 고르는 중이었다. 그랬는데 아직 준비 안 된 사람을 주연이 찾아왔다. 돌려보낼 수는 없다. 사과해야겠다는 각오도 주연을 더 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으니까.

 

창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주연의 얼굴이 보였다. 눈이 소중해서 눈을 보았는데 금방 운 것처럼 축축했다. 울고 있으리란 건 예상에 없어 머리가 백지가 됐다. 왜 우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몸도 마비가 됐다. 방 안으로 한밤의 시베리아 바람이 쉬지 않고 들이닥쳤다. 바람에 정말 결과 날이 있는 걸까. 내내 전신을 차갑게 베고 스쳐 간다.

 

"죄송해요……. 번호를 몰라서 무턱대고 왔어요."

 

밖이 이렇게 추운데! 이 말을 진짜 뱉었는지 생각만 했는지는 모르겠다. 준비한 근거처럼 정말 여기에 온 이후로는 내내 제정신이 아니니까. 목도리도 없이 텅 비어 새빨갛게 얼어붙은 목을 양손 뻗어 감쌌다. 얼음을 만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손바닥에 힘이 들어갔는데 목을 조르려는 의도가 아니었는데도 목이 졸렸다. 주연은 정말 숨을 참았다. 재현의 얼굴을 본 순간부터 계속 숨 막혀 한 것 같기도 하다.

 

"산책하다가 잠깐 들렀는데……."

"……. ?"

"내일 시간 잊으셨을까 봐……. 아침에 제가 여기로 올게요. 여기서 택시 타고 가요."

"그 말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고요."

"……."

 

손에 힘을 풀었다. 그대로 뺨도 녹여주고 싶었는데 주연이 가려 한다.

 

"그럼 전 갈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안쪽 창문을 닫아 주며 잠그라고 손가락질하는 걸 멍하니 보고 있었다. 시키는 대로 잠갔지만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안전한 걸 확인한 주연이 제일 바깥 창문에 손댄다. 창틀과 창 테두리가 마찰하는 소리는 미리 도착한 천둥만큼이나 겁을 준다. 이렇게 뛰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심장이 아프게 뛰고 있다. 결국 세게, 잘못하면 유리가 깨질 수도 있을 만큼 세게 창을 열었다.

 

정말 무언가가 깨지긴 했다. 으깨진 건 경계. 얼어붙은 뺨을 붙들었다. 자석처럼 마치 청해진 것처럼 주연이 끌려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이 맞물렸다. 몇 번 급하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 겉면이 타들어 간다. 고로 이 사이에 피어오르는 건 입김이 아니라 연기다. 누가 다 타버린 장작을 발로 걷어찼을까. 곧 죽을 불씨와 화산재 같은 숯의 파편이 공중에 휘몰아친다. 두꺼운 혀끝에서 낯선 사람의 맛이 난다. 재현이 울컥 차오른 감정을 애써 눌렀다. 주연에게 집중하면 절대 안 되는데 이현을 붙잡으려 해도 손에 닿는 건 그 동생의 얼굴뿐이다. 주연이 손 올려 제 뺨에 닿은 뼈밖에 없는 팔뚝을 쥐었다. 천천히 눈을 떴다. 물려 있던 아랫입술이 아픈 소리 내며 떨어진다.

 

아까 깨물고 싶었는데 못했던 건 다 덜 추워서 그랬던 거지. 주연은 떨고 있었다. 재현에겐 이불이 있었다.

 

제발 들어와……. 이 말도 입 밖으로 꺼냈나. 아니면 삭혔는데 들었나. 주연이 창을 타고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쌍방이다. 한쪽이 내부로 쏟아질 때 다른 한쪽은 상대의 멱살을 잡고 방향을 인도했다. 완벽히 고립되어있는 장소에 도달하니 무서울 게 없어진다. 요란하게 침대로 쓰러졌다. 단순히 성욕에 몸이 달은 지경이 아님에도 이것만이 해답인 척 옷을 벗어 던졌다. 재현은 저 눈에 제가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이길 바랐다. 주연은 저 눈에 제가 정상인 것처럼 보이길 바랐다. 한 사람은 이해받고 싶었고, 한 사람은 용서받고 싶었다. 대상이 서로는 아니었다. 그 사람은 이곳에 없는 존재였다.

 

*

 

엎드린 채 누워 제 쪽을 보지 않는 재현의 등에 코를 박았다. 거의 올라탄 자세와 비슷하다. 여기서 들이마시는 숨만 숨이라는 듯 크게 호흡하니 종아리가 움찔댄다. 안 그래도 얹고 있던 다리를 더 세게 얽었다. 닿는 면적이 늘어날수록 요람에 누워있는 기분이 들어 자꾸만 잠이 쏟아진다. 주연이 조금만 더 무거웠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느껴지는 존재감이라면 차라리 몸에 자국을 내줄 정도로 무거웠으면. 갈비뼈 하나를 부러뜨리고 가 줬으면.

 

"있잖아."

"."

 

제 몸통에 팔 둘러오는 주연을 느끼며 입 열었다. 주연이 계속 어깨에 입술을 묻고 있어서 대답 후 침을 한번 삼켰다는 것도 알았다. 주연과의 첫 키스에선 쇠 맛이 났다. 재현은 주연을 제대로 알기도 전에 그의 가장 내밀한 신체를 맛봤다.

 

"너무 나쁜 생각은 하지 말자."

"그럴까."

"너무 좋은 생각도……. 하지 말고."

"……. 어렵다."

 

당신은 그걸 어떻게 해낼 건데. 나한테도 알려주면 안 될까. 이 말을 하고 싶어 뜸 들이는 사이 재현이 잠들었다. 주연은 한참 동안 눈 감지 않고 잠든 재현을 껴안아 살냄새를 맡았다. 해도 되는 감상은 무엇일까. 나는 여기서 어디까지 느껴도 될까. 기억은 해도 될까? 말도 안 되는 확률을 뚫고 이곳에서 만난 사람을 운명이라 취급하면 안 되는 이유는. 정말 무엇일까. 미리 좋아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그게 얼마나 먼 과거이든 내가 먼저 좋아했을 텐데. 당신이랑 평범하게 사랑하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조언을 듣고 싶은데 유일하게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하필이면 나를 닮았다. .

 

…….

 

왜 나한테 벌줘?

우리 그래도 꽤 사이좋았잖아.

제대로 화내고 싶었으면 살아있었어야지.

그럼 차라리 치정극 한 편 시원하게 찍었을 거 아니냐고.

근데 이게 뭐야.

내가 이 상황에서 뭘 더 할 수 있겠어.

 

?

?

 

…….

……

5th Juyeon Hyunjae Webzine all rights reserved.
Design by boold (@nonair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