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해
재현은 분명 슬펐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슬퍼해야 하는지 몰라 그저 헤맸다.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다는 것. 아마도 그건 배신이다.
첫 눈물은 장례식장에서 흘렸던 것 같은데 그곳에서의 정확한 기억은 희미하다. 잠깐 엎드려 울다가 이건 세상이 저를 골탕 먹이는 것 같아서 벌떡 일어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집에 돌아가 놓고는 발인 날 컴백했다. 진짜야? 진짜 없어? 거기서는 인정했다.
이현의 마지막 얼굴은 행복했다. 영정사진 속에서 아주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재현은 배우라는 직업 덕에 이현의 합당한 지인이 되어 탈 없이 동해까지 갈 수 있었다. 해도 되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기자들이 몇 따라왔다. 고인이 든 납골함보다 동해에 도착한 얼굴 새빨간 배우를 찍겠단 카메라가 더 많았다. 다행히 재현의 이성은 제 몫을 다했다. 그래서 유족에게 끼칠 수 있는 민폐가 뭔지도 알았다. 죄인처럼 도망치면서 제일 먼저 한 후회는……. 사실 없었다. 왠지 후회는 함부로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이현은 영화감독이었다. 작가로도 활동했지만 사람들이 더 많이 알아주는 건 영화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현 작가, 가 아닌 이현 감독, 으로 그의 호칭을 일단락했다. 그런 감독을 위한 추모 행사는 이듬해 봄에 열렸다. 어디서 열렸냐면 감독이 과거에 살던 곳이자 감독이 죽은 동해의 한 문학 마을에서 열렸다.
감독은 확실히 동해에서 죽었다. 수면제와 함께 먹어선 안 되는 약을 같이 복용해 사고가 났다. 그게 이슈가 되어 한동안 그 약명이 검색어에 길게 오르고 내렸다. 감독은 원래가 수면제 없이 못 살던 사람이다. 그래서 죽음 같은 건 그의 자의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재현을 뺀 모두는 이현의 고질적인 우울과 외로움에 대해 진지하게 토의했다. 그를 아끼던 문학 마을 식구들과 동료 작가들은 아마 그런 이유로 추모식을 따로 진행하겠다 팔 걷고 나선 것일 테다.
재현도 추모식에 참석하기 위해 날을 하루 비워 동해로 갔다. 감독을 오래 만났지만 말로만 듣던 문학 마을에 직접 발 디딘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그가 쓴 여러 시나리오 집이 입구의 탁상 한쪽에 돌담처럼 쌓여있었다. 참석자는 기부금을 냈다. 상자에 지폐를 넣던 손으로 얇은 팸플릿과 가장 마음 쓰이는 책을 골라 들고서 행사가 열리는 전시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가끔 감독을 인터뷰하던 유명 잡지사들이 미공개 사진을 주최 측에 보낸 모양이다. 벽마다 흑백으로 걸린 멋쩍은 화보 사진들이 재현을 고개 숙이게 만들었다. 참석자 중엔 익숙한 배우들도 보였다. 그의 작품에 등장했던 배우들과 등장했을 뻔한 배우들. 재현은 대충 후자쯤으로 보일 것이다. 거기선 크게 눈에 띄지 않아 좋았다. 그러나 이는 이대로 문제였다. 귀에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 한동안 외면하던 감독의 이름과 끝에 대한 이야기만 자꾸 내리꽂혔다. 왠지 자신에게 밖에 나가 있으라는 언질인 것만 같았다.
이현은 마지막 영화 일정을 끝낸 후 휴가 같은 공백기를 맞이했다. 물론 그 시간도 쉬지 않고 한 이름 있는 문예지에 단기간 특별 연재를 기획했다. 연재물은 러시아에서 써서 러시아에서 원고를 보냈다. 혹은 러시아에서 쓰던 글을 한국에서 완성해 보내기도 했다. 후자는 단 한 차례였는데 그 장소는 바로 여기 동해였고, 죽기 몇 시간 전이었다. 소설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재현은 읽기 전에 감으로 알아챘다. 이현이……. 잡지에 우리 얘기를 실은 것 같다.
연재물 초안을 포함한 모든 습작 글이 문학 마을에서 발간한 이현의 단문집(정식 발행 전이지만 추모객들을 위해 전시회장에서 미리 배부했다)에 끼워졌다. 재현이 단문집을 품에 끼고도 이거 평생 못 읽겠다, 낙담한 건
"그러게. 재이야. 네 말처럼 이 땅은."
이라는 문장 때문이었다. 이것은 재현의 입을 통해 읽힌 것이 아니다. 전시회장 뒤 주차장에서 울려 퍼진 어떤 남자의 목소리이다.
"그러게, 재이야."
"그러게. 재이야."
"그러게 재이야."
적당한 템포를 찾으려던 건지 남자는 계속해서 같은 부분을 반복했다.
"재이야. 재이……."
"……."
"재이가 누구야."
"……."
"그러게……. 재이야. 네 말처럼 이 땅은."
울고 싶지만 꾹 참아야 하는 사람의 억양을 시늉으로라도 이해한다. 그대로 조용히 운전석에 올라탔다. 뒷좌석 창만 반쯤 열었다. 음량은 밖에서 듣던 것과 비슷했다. 계속해서 근처 어딘가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을 잠자코 들었다. 팸플릿을 펼쳤다. 식순에 낭독이 있다. 웃기지도 않지. 가끔 작가들끼리의 행사가 있으면 선배님의 글을 읽기로 했다며 온종일 발음 연습만 하던 누구가 떠오른다. 괜히 목소리가 겹쳐 들려 숨은 김에 마음 놓고 그리워했다. 저 사람도 작가인가. 연습 하나 보다. 잘했으면 좋겠다……. 사람 많다고 떨지 말고…….
"그러게. 재이야."
"네 말처럼 이 땅은,"
"같이 오기에 너무 추운 곳이야."
아……. 절로 입이 벌어졌다.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마 재현은 그 시점에 제대로 감독의 부고를 체감했던 것 같다. 눈물이 몇 줄기로 갈라져 힘차게 떨어졌다. 눈은 뜨겁게 뜨여 크게 깜빡거렸다. 아직 꽃샘추위가 한창이다. 창문을 꽉 닫고 급히 시동부터 걸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큰 도로 탈 때까지의 시간을 초 단위로 기억한다. 원래 없었다 생각하고 살아서 버텨진 건데 이젠 그것도 안 먹히겠구나. 난 계속 이런 식이겠구나. 인사 없이 보내버릴 작정인 거구나.
재현은 세 차례나 공식적인 이별의 장소에서 도주했다. 그 이후 몇 번의 기회가 더 있었으나 이상하게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같은 해,
2) 블라디보스토크
타국행에 가족까지 대동하리란 건 계획에 없었다. 그 의견은 퇴사한 지 얼마 안 된 재현의 누나들도 마찬가지였다. 방해하면 따로 다닌다. 공항에 오기 직전까지 서로 입이 닳도록 떠들었던 가족 여행 최우선 조건은 이러했다. 누구든 나 방해하면 진짜 따로 다녀. 내가 할 말이거든. 그렇지만 따로 다닐 일은 없을 것 같다.
쟤 진짜 한동안 좀 이상했지. 연예인들은 자기 알아보는 사람 없는 곳 가야 마음이 편하대. 일단 밖을 데리고 나가자.
혼자 가고 싶은데 혼자 있으면 개 우울하겠지. 누나들 옆에 열심히 붙어 다녀야겠다.
남매들의 진심은 대충 이런 종류였다.
세 사람이 택한 여행지가 러시아인 이유는 별거 없다. 재현은 감독이 작년 이날 블라디보스토크에 갔기 때문이고, 누나들은 재현이 처음으로 어디에 꼭 가고 싶다 아니, 가야겠다! 고집 크게 부리길래 굳이 반기 들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운 좋게 특가였다. 덕분에 두 시간에 18만 원짜리 종이비행기를 탔다. 난기류에 치명타를 입었다. 무려 비행기 안에서 멀미한 첫날은 한국인 투성이인 도심 한복판 호텔에서 대충 1박을 묵었다. 다음 날 짐을 바리바리 싸 내려와서는 숙소 앞 식당에서 끼니를 챙겼다. 메뉴판에는 한국어밖에 없었다. 누나들은 인상을 썼다가 아닌 척 풀었고 재현은 심하게 좋아했다. 아니, 여기 되게 괜찮지 않아? 사실 재현도 그다지 괜찮지 않았다. 러시아행 항공을 구매할 때와 현재의 심정이 조금 상이해졌기 때문이다. 고작 1년도 시간의 역할을 했나. 시간은 정말 재현에게 약이었던 걸까? 그러다 보니 몰래 이런 생각까지 고개 드는 것이다.
여기까지 온 거 혹시 내가 오바하는 거야?
그래놓고 자학하듯 입술 꽉 한번 물었다 놓았다. 오바긴 뭐가 오바야. 이런 거라도 안 하면 그게……. 그게 사람이냐…….
러시아는 사실 지명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굳이 위치에 초점을 두자면 시베리아에 두고 싶다. 이상하게 침울해 보이는 재현을 첫째가 달래듯 재촉했다.
"인나. 시간 다 됐어."
"삼십 분 넘게 남았는데?"
"그럼 지금 가자! 여기서 시간 때우나 거기서 시간 때우나."
외국인들 시내에선 잘 보이지도 않더니 죄다 역사 안에 몰려있어서 그랬구나. 대부분 곧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하는 횡단 열차를 기다리는 승객들이다. 모두가 안내판에 뜬 열차 도착 알림만 보다가 플랫폼으로 동시 대이동을 한다. 재현도 행렬에 속했다. 모스크바행 횡단 열차의 앞에서 3번째 일등석 칸은 재현의 자리. 누나들은 이등석인 4인 1실 쿠페 칸을 차지했다. 외국인 친구 사귀겠다는 기대를 크게 품고 있댔다.
승무원에게 티켓을 검사받고 겨우 자리 찾은 재현이 열차 안에서 제일 아늑하다는 2인실 문을 열고 입장했다. 이현 감독은 2인실을 7일 내내 혼자 썼다. 좌석을 그렇게 샀다고 했다. 그럼 뭐 해. 난 이제야 타는데. 혼자 쓰는 거 무서워서 칸 하나도 통째로 못 빌리긴 했지만. 조금 어색하고도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캐리어를 좌석 밑에 꾹 밀어 넣었다. 설마 앞자리 아무도 예매 안 했나. 그러기가 무섭게 누나들이 일등석 복도로 들이닥쳤다. 미리 공부해 온 횡단 열차 생정을 이제라도 언질 주기 위함이다.
"사람들 복도 막 왔다 갔다 하니까 지갑 같은 거 절대 꺼내놓지 말고."
"너어……. 낮에 심심하면 막 여기 혼자 우중충하게 있지 말고 우리 방으로 넘어와. 애기들 구경해. 애기 있어, 1층이랑 옆 방에."
"애기가 있어?"
"어. 완전 인형같이 생겼던데?"
"우와. 엄청 귀엽고 밤에 엄청 울겠다. 잘 자! 화이팅!"
시비를 걸었는데도 식구들은 굴하지 않았다. 저들끼리만 진지해져서는 방을 하루씩 돌아가며 바꿔야겠다느니 이렇게 밀폐된 곳에 혼자 오래 두기 불안하다느니 궁리가 깊었다. "왜들 이래, 진짜?" 식겁해서 내쫓으려 하니 재현이 손댈 필요 없게 알아서 외압이 들어왔다.
방 입구에서 티켓 들고 어수룩하게 두리번대는 꼴은 누가 봐도 재현의 맞은편에 앉아야 할 사람이다. 놀란 가족들이 쏘리, 어? 죄, 죄송. 하며 급히 자리를 비켜났다. 그런데도 자리 주인은 함부로 안에 들어오지 못했다. 첫째는 룸메가 한국인이어서. 둘째는 룸메가 연예인이어서. 재현은 저렇게 생긴 한국인과 7일씩이나 붙어있겠단 각오 따위 전혀 한 적이 없었기에 그보다 조금 더 걱정했다. 아……. 신경 엄청 쓰일 것 같은데. 쭈뼛대며 들어오는 룸메, 그러니까 곧 통성명하게 될 주연에게 재현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알겠지 싶어도 예의상 일러준 이름은 배우 예명인 현재였다. 주연은 현재인 재현의 손을 맞잡아 흔들면서 일부러 제 이름을 흐리게 말했다. 성도 붙이지 않았다. 아무렴 재현은 상관없었다. 그냥…….
이번에도 글렀다, 하는 생각밖에는.
*
11월 오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로 향하는 001번 열차의 앞에서 세 번째 일등석 칸. 그곳에 탄 한국인 둘에게 의도를 빼자면 의미까지 없다고 봐야 한다. 조용하고 느리게 두꺼운 옷을 벗어 정리하던 주연이 옷 개는 것도 버겁다는 듯 한숨 푹 뱉는다. 물론 재현은 귀 쫑긋 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 한숨 곧이곧대로 들었지만 도와준다 하기 어색하니 차마 보고 있는 창밖에서 눈 떼지 않았다. 또래의 성인들끼리는 어디까지가 선의이고 어디부터가 적선인지 그 경계를 파악하는 게 제일 고난이다. 가장 최신까지 영향 있던 성인은 하필 많이 연상이라 또래도 아니었고 온통 뭘 받은 기억밖에 없어서 더 모르겠다. 그래서 재현은 최대한 피곤해하며 말수 적은 사람처럼 굴었다. 이러면 아무 때나 잠들어도 자연스러울 거고 하품하며 사라져도 누나들 있는 곳으로 도망갔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을 거다.
동시에 주연은 재현의 의도가 궁금했다. 탑승의 의도.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말이 안 된다. 날짜랑 장소랑 좌석 모두. 그보다 더 확실하게는, 형의 장례식장에 잠깐 들렀다 간 거 알고 있다. 발인 날에도 왔다가 기자들 때문에 다시 돌아간 거 그 기자들이 쓴 기사 때문에 알고 있다. 동해에서 열린 추모식도 혹시 해서 방명록 뒤져봤다. 기사까지 확인해보니 맞더라. 그럼에도 먼저 운을 떼기 어렵다. 자신은 일단 가족 대표로 온 거고 그럼 좀 마음을 경건히 다잡아야 할 필요가 있고. 친동생인 제 존재도 모르면서 형을 이렇게 정성 들여 회상하는 연예인이라니. 왠지 진정성보다 곧 이현의 첫 기일을 대비하여 이슈라도 만들려는 건지 의심이 들었다. 늘 기사 사진 찍히자마자 사라지는 것부터 너무너무 이상했어. 아무 때 아무 위치에서나 "그쪽 저희 형이랑 생전에 알긴 했어요?" 물어본다면 재현은 크게 당황할 것이고……. 그럼 그거 지켜보는 제 심정도 불편할 게 뻔하다. 그래서 그저 참든가 고요하든가 둘 중 하나만 하기로 했다.
"저……."
그래서 말문은 연예인이 먼저 텄다. 마침 이부자리까지 대충 정리된 시점이었다.
"네."
"어디까지 가세요?"
"모스크바요."
"……. 그러시구나."
흐름이 유연하다면 주연의 입에서도 "현재 씨는 어디까지 가세요?" 따위가 나와야 했지만 경계 중인 사람은 지금 다른 생각 중이다. 꼭 한국인이 탔어야 했다면……. 이현의 골수팬이라든가. 애제자라든가. 그 정도는 되었어야 맞는 거 아닌가. 근데 배우……. 여기까지 와서도 팬을 끌고 다니는. 게다가 요즘 티비에서 얼굴 볼 일도 잘 없던데…….
대충 제가 누군지 알면서 밋밋하기만 한 주연이 재현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눈빛이 뾰족하고 꾹 다문 입술이 고집 있어 보이는 게 의식만 한다면 너무 익숙한 몽타주다. 그러나 그와 조금 닮은 것 같다는 연상이 이어지기 전에 다른 아이디어가 끼어들었다. 역시. 도망가자.
"전 잠시……."
그래놓고 옆으로 넘어갔다. 일등석 바로 옆 칸엔 식당이 있다. 처음 와보는 곳이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두리번대다가 직진했다. 러시아어투성이인 식당 칸 승객의 수다가 은근 무섭기도 했다. 대낮에 문 닫아 놓는 방은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이등석의 모든 자리를 곁눈질하면서 다녔다. 아기 웃음소리가 들렸다. 목적지 같아서 걸음을 빨리했다. 누나들 소리도 들렸다. 찾았다! 희열은 짧았고 누나들은 재현이 안중에도 없었다. "나 한 번에 찾아왔어. 대박이지."
"코스가 직진밖에 없는데 찾은 게 아니라 걍 우연히 마주쳤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니냐?"
"출발한 지 얼마나 됐다고 여길 와?"
아. 언제는 걱정된다고 자리까지 바꿔 준다며! 문제 많은 막내에게 룸메도 생겼는데 굳이 걱정을 사서 할 이유가. 둘째 누나는 계속 인형처럼 웃는 아기 발바닥만 간질이기 바빴고 아기는 몸을 베베 꼬며 자지러졌다. 나도 바닥에 드러누워 자지러지면 관심 가져 주려나. 그럴 의도 아닌 그저 힘이 풀려 쪼그려 앉았을 뿐인데 첫째 누나는 아무 데서나 구겨지지 말라고 척추 수술 천 팔백만 원을 들먹였다.
"나를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인가 봐."
"누구. 앞자리? 엄청 잘생겼더라. 잘 꼬셔서 친하게 지내봐라, 야."
"그런 거 할 줄 몰라……. 누나. 현재 요즘 쫌 비호감이야?"
마이쮸 안 줘서 그런 거 아니야? 좁쌀 같은 발가락 붙들고 있던 둘째가 드디어 재현에게 관심 뒀다. 정확히는 챙겨 온 힙색에 고갯짓하는 거였지만.
"아, 뭔! 뭔 마이쮸야!"
"야! 딴 것도 있거든."
"그래. 그거 나눠 먹으면서 친구야 이번 주는 나랑 짝꿍 하자, 그래 봐."
그래놓고 지들끼리 깔깔대는 것이다. 물론 완전 무시하기엔 웃기고도 설득되는 면이 분명 있어 좌석에 널브러진 힙색을 열었다. 집 앞 편의점에서 쓸어 온 간식거리가 빼곡하다. 하나만 가져갈게. 두 개 가져가도 돼. 그 칸 어린이는 둘이었다. 그쪽도 자매. 조금 큰 애는 이갈이 중인지 앞니가 없었다. 완전 작은 아기는 앞니가 나고 있었다. 큰 아기는 첫째 누나가 가져온 컵 솜사탕을 입에 넣고 새파래진 혓바닥 내밀며 헤헤 웃었다. 일주일 같이 지낼 룸메가 옆방 부모까지 합해 좀 많은 듯하지만 누나들이라도 행복해 보이니 그럼 됐지 싶다. 군말 없이 다시 식당 칸을 넘었다. 돌아가는 길은 아는 길이라 짧았다. 그리고 닫히지 않아 가까이 가면 인기척 느껴질 제 좌석 문 근처에 가선, 조금 긴장했다.
주연은 막 테이블 위를 물티슈로 닦고 있었다. 저기요…….
"드실래요?"
"네?"
"이거……."
손에 꼭 쥐고 온 마이쮸는 포장 까기 전이라 그저 투박한데 통째로 넘겼다. 마침 주연이 그 손끝 살짝 떠는 걸 발견한다. 마음 녹이기 딱 좋은 성의의 긴장!
"선물 받아 오신 거 아니에요?"
"선물? 보단 갈췬데……. 옆에 누나들 있어서요. 아까 여기 잠깐 왔다 간……."
오해도 풀렸다. "가족 여행 오신 거였구나."
"네. 누나들은 단체 퇴사 기념. 저는……. 그냥."
주연은 그제서야 솔직하게 웃으며 제 것도 드리겠다 사과 맛을 내밀었다. 그게 조금 더 레어인 듯해 재현은 주연이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 결론지었다.
*
혹시 이현 감독 알아요? 질문을 던지는 쪽은 의도찮게 계속 재현이 됐다. 주연은 어디까지 오픈해야 할지 몰라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어떻게 아셨어요?"
"뭐를요?"
"이거 열차요. 신기하다."
"……. 어떻게 알았냐니요?"
이현의 단문집을 읽었거나 추모식에 끝까지 참석했더라면 다들 아는 내용이다. 이현이 죽기 전 러시아에 왜 갔고, 어디를 갔고, 무슨 생각을 했고, 뭘 했는지. 은근 시무룩해진 주연이 물었다.
"딱히 글 찾아 읽을 정도는 아니셨나 봐요."
"음……. 저는 그냥 매번 스토리만 듣고 재밌다 재미없다 이런 얘기만 해가지고……."
친분을 이런 식으로 해명했다. 이현은 나한테 정말 별 얘기를 다 했다는 것. 그러나 좋은 설명이 아니었기에 좋은 대화가 이어질 수는 없다.
분위기에 묘한 긴장이 선다. 사실 당장 서로에게 필요한 건
그래, 나 여기 왔어. 그럼 이제 뭐 하면 돼.
따위의 정보인데. 완전 실용적인 거.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게 필요한데 자꾸 호기심이 존재에 꽂힌다. 당신은 누구야?
"감독님이랑 무슨 사이였는지 궁금해요. 사실 현재 씨를 장례식장에서도 보고, 동해에서도 뵈었었는데……. 매번 금방 자리 뜨시길래 신경 쓰였거든요."
주연도 마찬가지. 드러내지 않아도 눈치채주길 바랐다. 내겐 당신과 우리 형 관계를 평가할 자격이 있으니까. 웬만하면 우리가 듣기에 좋은 얘기만 해줬으면 싶다.
"……. 감독님 입에서 제 얘기 한 번도 나온 적 없어요?"
"네."
"그럼 뭐, 아니. 사실은 일 때문에……."
"……."
"지금은 엎어졌는데요. 당시에 다음 작품 주연을 제가 맡기로 해서……. 자주 뵀었어요."
"아. 비밀이었구나. 스포될 수 있으니까."
맞다는 식으로 고개 끄덕였지만 재현도 의아했다. 이현이 오래 알고 지내던 사람은 최소한 밥이라도 한 끼 같이 한 적 있는데 왜 이 사람은 처음 보지. 사실 나처럼 연주인가? 사람 뚫어져라 쳐다보며 세상의 온갖 연주를 떠올렸다. 그러나 연주는 이 얼굴과 쉽사리 매칭이 잘 안 된다. 연주 씨? 진짜 안 어울려.
"잘생기셨다. 음……. 배우시죠."
"네? 아뇨."
"……. 거짓말."
"진짜 아니에요."
문제는 헛웃음치고 활짝 웃는 얼굴을 집중해서 봐버린 것. 모르는 게 나았을 법한 정답을 찾아냈다. 얼굴이 좀 있다. 아니, 완전 있다. 왜 몰랐지. 당연히 이 정성은 나 아니면 핏줄밖에 못 쏟지. 주연이가 그 주연이네. 너 이주연이구나. 네가 현이 형 동생이야. 입을 쩍 벌리고 당황해야 할 타이밍인데 그러기에 제 처지가 당당치 못하다. 일단 얼굴을 굳히고 상체를 등받이에 똑바로 기댔다. 첫인상 너무 구렸던 거 아니야, 나? 입술 짓이기며 천천히 휩쓸려가는 바깥과 전신에 느껴지는 진동을 최대한 느꼈다. 모든 해소는 탄력 붙은 이 열차가 해 주어야 맞는데 재현은 정말 이현이 여기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아는 게 하나도 없다. 작년 당신이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보내 줬던 티켓 사진이랑 앞 좌석이 비어있는 이 자리 사진이랑 그 뒤로 도심에서만 되던 연락. 그리고 내일쯤 돌아올 것 같은 당신을 기다리다 대신 전해 받은 부고. 나는 딱 거기까지만 안다. 있잖아요. 주연 씨.
"저 감독님 진심으로 존경해요."
갑자기 달라진 태도는 영문 모르겠다지만 어쨌든 진지한 표정이 합격이다. 주연이 또 이현처럼 웃는다.
"아부가 아니라 진짜. 매번 끝까지 못 버텨서 이번에는 무조건 모스크바까지 가려고요. 여기선 중간에 집도 못 가요. 주연 씨 그러니까……."
그동안 현이 형 얘기 좀 많이 해 줘요. 아니면 아예 하지 말든가……. 뒷말을 책 덮듯이 묵혀버리고는 알 수 없는 저 눈빛에 온 진심을 다 쏟았다. 다 쏟지 못한 거라 해도 모스크바까지 남은 긴 경로만큼은 작년의 그 자리에 앉은 셈이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전부 다. 딱 1년씩만 앞서있는.
3) 하바롭스크
열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중간에 아무도 내리지 않는 정차역에 멈출 때도 있었지만 머물러주는 시간은 고작 2분. 7일 중 2분의 멈춤은 그냥 잠깐 진동이 사라지는 것. 고작 이 정도뿐이다.
하루종일 웃고만 있어 달라 하고 싶어. 그럴 때 제일 닮았으니까.
다행인지 천성이 유쾌해서 상대는 늘 잘 웃었다. 재현은 기운이 조금이라도 있다 싶으면 계속 말을 걸었다. 질문보다는 자기 얘기같이 쉬운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주연은 그래도 즐겁게 들었다. 제대로 된 교집합 있는 사람끼리 내내 붙어있는 것.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편하기까지 하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재현은 진짜 이현이 특별한 것처럼 굴었다. 그건 자신에게 하는 행동을 보고 알았다. 역시 눈치챈 걸까? 아님, 전혀 모르고 있나. 배우는 연기를 잘하니까 이렇게 밝고 친절한 모습도 시늉일 수 있겠지. 굳이 내가 우리 형 동생이 아니더라도 가능한 거겠지. 현재 인기 진짜 많던데. 그래, 괜히 연예인이 아니야. 모습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다 장면 같잖아.
여기에 온 건 형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형 생각만 해야 할까. 1년 내내 외로웠던 사람은 마음이 많이 무르고 물러졌다. 누가 나한테만 신경 쏟아주는 게 좋아. 계속 이런 식으로 관심받으며 쉬고 싶다. 왠지 형은 자신의 이 모습을 더 좋아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번 역의 정차 시간은 25분. 하바롭스크처럼 커다란 역에 도착하면 열차는 꽤 오래 머무른다. 혹시 유심이 터져줄까. 아까 전 재현과 좁고 긴 복도를 구경하면서 벽에 붙은 정차 시간표를 사진 찍었다.
"곧 도착하는데 인터넷 터질까요."
"음……. 잠시만요!"
재현이 이렇게 당당히 대기를 요구하면 열이면 열, 물어볼 곳을 향해 달려간다는 뜻이다. 누나들에게 간다는 걸 알아서 그 뒤꽁무니 보며 몰래 웃었다. 얼마 안 돼 다시 돌아온 재현이 멀리서부터 희소식 들고 온 사람티를 풀풀 풍긴다. 터진대요. 안 터져도 상관은 없을 텐데 괜히 저렇게 제 말 하나하나 허투루 넘기는 게 없으니까……. 나가서 엄마한테 전화라도 한 통 꼭 해야 할 것 같은 거다.
문이 열리길 코앞에서 대기했다. 대충 열 몇 시간 만에 걷는 땅은 무조건 반갑다.
"와! 진짜 춥다!"
먼저 밖으로 나선 재현이 깜깜한 밤공기를 폐에 마구 쑤셔 박고 있을 때 주연은 성의를 봐서 핸드폰을 만졌다. 검색창을 켠 건 충동이라기엔 진심과 더 가깝다. 검색을 열 번 연타해도 딱히 속도가 마음을 따라오진 못했다. 그래도 25분은 2분에 비해 길다. 이 날씨에 열차 도착 때만 잠깐 문 여는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온 재현이 하나를 주연의 입에 물렸다. 누나들 거예요? 손에 든 봉지 보고 웅얼거리니 잘 알아듣고 고개 끄덕인다. 근데 누나들도 나와서 이미 장을 한 아름 봤기 때문에 결국 아이스크림은 각자 두 개씩. 게다가 짐으로 컵라면까지 받아버렸다. 이가 많이 시려서 턱을 내내 떨었다. 그래도 맛있다고 좋아는 했다.
이런 식으로 배고프지 않아도 계속 먹을 일만 생긴다. 아니면 낮잠을 자고. 밤잠도 자고. 이현을 제외한 이야기를 하고. 온전히 뭔가에 몰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너지가 빨리 고갈됐다. 당연히 체감은 되지 않았다. 직장인이신 거예요? 대학원생인데 지금은 휴학했어요. 그랬구나. 왜 방송 잘 안 나오세요? 감독님 그렇게 되고, 쉬고 있어요. 이제 슬슬 다시 해야 되는데……. 할 수 있겠죠? 그럼요. 티비 나오면 챙겨 볼게요. 영화여도 극장 가서 꼭 볼게요. 말만 들어도 너무 감동이다. 진짠데……. 진짜로요……. 주연 씨 러시아 와서 보드카 마셔 봤어요? 보드카요? 아뇨, 아직.
재현은 술에 취향 둔 적 없지만 이현은 달랐다. 아저씨답게 저녁때의 반주를 소소한 낙으로 삼았다. 그 동생 입에서 먹자는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재현이 사라졌다. 이렇게 느긋한 곳에서 왜 혼자 바쁘실까……. 그러다가 아까 어딘가 내팽개쳐놓은 검색 되다 만 네이버 창이 아른거리는 것이다.
핸드폰 화면은 그 상태로 멈춰있었다. 뒤로 가기 눌러 말짱 도루묵 되기 전에 캡처했다. 동시에 화면이 넘어갔다. 사진첩에 들어간 재현의 프로필을 보았다. 본명부터 읽혔다. 현재가 예명이었네. 이재현. 이재현……. 어? 뭔갈 넘겨짚으면 안 되는 생각이 뒤통수를 치려다 만다. 빨리 사라진 재현은 빨리 돌아왔다.
"컵 예쁘죠."
"아, 맞다. 여기 오면 이거 꼭 써야 된댔는데."
열차에서만 쓸 수 있는 기념 컵을 대여했다. 호그와트 학생들이 쓸 것처럼 생겼어요. 그 말 듣고 잠깐 주연을 흘기듯 주시했다. 현이 형도 사진 보내주면서 그 말 했었는데……. 이런 거 좀 위험하다. 공통된 부분을 찾고 반가워하는 짓, 완전 몹쓸 짓인 것 같다. 그러면 안 돼. 짐처럼 받아 온 매점 비닐봉지 안에서 만만하게 생긴 과자를 뜯었다. 주연은 소주같이 생긴 보드카를 더 장난 같은 컵 안에 따라 부었다. 술 냄새가 심하다. 좌석 칸 문도 꽉 닫았다. 그럼 조용해야 맞는데 열차 소리는 아직 꾸준하다. 다 좋다는 뜻이다.
*
알딸딸하게 취기가 바로 올라선 둘 다 볼이 빨개졌다. 기분만 살짝 업되길 바랐는데 생각보다 제대로다. 한 입 입에 물자마자 도수부터 확인한 주연이 식겁하며 승무원에게 탄산을 주문했다. 체리 맛 강렬한 음료수는 지금 마시고 있는 이게 술인지 뭔지 분간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꽤 취했다. 기다렸단 듯 드디어 이현이 주제가 된다. 참은 것은 아닌데 두 사람 다 많이 조심해왔다(그래서 이때부터는 전혀 조심하지 않는다). 주연이 문예지 '창조'를 꺼냈다. 올해 1월 호. 살아있을 때 넘긴 원고가 실려있다. 귀퉁이가 많이 닳아 있다. 재현이 눈을 빠르게 깜빡거린다. 몇 장 넘기자마자 지금 없는 사람의 얼굴이 나온다.
"저도 이 프로필 사진 폰에 있는데. 여기……. 아 맞다. 다 지웠구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핸드폰 화면만 뒤적거리는 손가락을 안타깝다 봐야 할까. 주연은 취한만큼 단순무식한 가설만 떠올라 그런 제가 제일로 안타까웠다. 어느새 잡지로 옮겨간 손가락이 이현의 사진을 천천히 매만진다. 이름 옆에 붙어있는 흰 국화 일러스트. 이 국화를 빌미로 다들 무슨 얘길 하고 자빠졌더라. 곧 1주기다. 듣기 싫은 소리를 또 잔뜩 듣게 될 예정이다.
"수면제 알고 먹었다. 모르고 먹었다. 아직도 말 나오죠." 재현은 이제 이런 말도 할 수 있다. 그만큼 그날에서 많이 벗어났나 보다.
"네. 많아요."
"너무 화나요. 기사도 이상한 것밖에 없고. 사람들도 이상한 말만 하고."
주연은 자기 형의 사인이 진짜 사고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 라는 것을 아마 이때 확신했을 텐데. 그러려면 기괴하리만치 랜덤인 촉과 그간의 짧게 스쳐 간 의심들을 하나로 맞춰야 한다. 재이가 이재현의 재이야? 그래서 개명했던 거구나. 왜 저러나 했더니 그게 당신 이름이었어. 웃기는 말장난으로 밀애를 했네……. 얼마나 좋아 미쳤길래 이름까지 바꿔. 그래서 결말이 이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실망했다고 봐야 한다. 정확히 뭐가 실망스러운 건지는 파악이 힘들다지만.
아니면 정말 사고사였을 수도 있다. 재이가 재현이라면 형은 꼭 살아가야만 했다. 형은 재이와 더 오래 살고 싶었다는 말을 이 좌석에 앉아 적었다. 같이 오지 못한 재이를 떠올릴 땐 너무 외로워져서 꼭 캔맥주를 시켜 먹었다고. 그래서 다들 로맨스 소설로 읽었댔다. 당신은 안 읽어봐서 모르겠지. 주연은 서툴게나마 이재현이란 사람을 달래 주고 싶었다. 예의 있는 모습으로 보이길 바랐다.
"아무래도 자살에는 심상이 있으니까요. 감독이라는 직업에 딱 어울리는."
"……."
"무심결에요……. 죽음까지도 감상해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나 봐요. 연예인이라든가. 이현 같은 예술인이라든가. 그냥 다들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
"……."
"보통 고인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자살이 맞아도 절대 그게 아닐 거라고 하던데. 누가 살인을 했든가. 어쨌든 남이 잘못한 거라고 우기고."
재현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열이 확 올라 테이블에 엎드리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렇죠. 현재 씨."
"……. 어쨌든 감독님 진짜 그럴 분 아니에요. 의사가 말을 이상하게 했던 거예요. 그 의사부터 조사했어야 했는데."
"……."
끝난 사랑이라도 멋대로 드러내면, 혹시 그게 가족에겐 고통이 될까. 재현의 고민은 언제라도 숨을 쉰다.
"아니면 감독님이 정말……. 정말 실수했던 건지."
"바보처럼."
"맞아요. 바보같이……."
재현은 창밖도, 잡지도, 주연도 보지 않고 그저 앉아 있는 기차 칸의 닫힌 문에만 주목했다. 직접 열지 않는다면 영영 벽으로만 기능해줄 기관이 당장엔 편하고 절실했다. 이미 뼛가루 되어 반은 동해 앞바다에 반은 가족 납골당에 들어갔을 이의 사인을 이제 와 재명명한다 한들. 모든 의견이 낭설이자 정설이겠다. 보통 그것을 너무 늦었다, 라고 말한다. 혹여나 괜찮다면 독특한 방식의 추모, 라고 여겨도 된다.
세상에서 가장 긴 묘지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안간힘 쓰며 틀어막지 않아도 눈물은 딱 잠깐 각막을 거쳤다가 몰래 빠져나가는 수준으로만 고였다. 창밖도, 잡지도, 꾹 닫혀 열차 진동에 따라 덜컹거리는 문도 아닌. 재현의 눈만 보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얼굴이 심상으로 다가왔다.
이 세상에 죽음까지 감상해버리고 싶은 이가 존재한다면. 당연히 실의까지 감상해주고 싶은 이도 살고 있기 마련이다. 살아남은 사람을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주연이 겪을 충격 중 유일하게……. 형의 유작으로써 기억될 생존자.
형이 얽혀버리니 더 자주 감성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
"주연 씨한테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는데……. 사실 전 다 울었어요."
당신은 이 기차에 왜 올라탔을까. 어째서 이 땅 어디든 도착해 무언가를 끝내려 하고 있는 거야.
"요즘은 그냥 이 정도가 끝이에요. 이제 펑펑 울 정도로 많이 힘들지가 않나 봐요."
눈물이 끝나는 시점은 또 어떤 시작을 이야기 하고 있는 건데.
"그럼 전에 울 땐. 무슨 생각 하면서 우셨어요?"
재현이 그제서야 창밖을 본다. 아직 다음 역에 정차하려면 한참 남았다는 시베리아. 내내 질리도록 구경한 아까 그 얼어붙은 초원이 또 보인다.
"시간을 좀 더 잘 쓸 걸 그랬다."
"……."
"그런 생각만 했던 것 같은데……."
죄송해요. 제가 진짜 감독님 속 많이 썩였었거든요. 재현은 웃지 않고 진심으로 사죄했다. 같은 날 같은 칸에 타러 온 사람이라면. 그게 친동생이든 그저 지인이든,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밉다고 여기겠거니.
이제 펑펑 울지 않는다는 건 연인 사이 이별을 뜻하는 말인가. 주연은 제발 그러길 바란다고, 재현이 여기서 벗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죽은 사람은 떨쳐내고 그냥 빨리 새 삶을 찾았으면. 왜 미련스럽게 러시아까지 와서는 우리 형한테 얽매여있는 건데. 제가 대신 문을 열어 주고 싶은 심정이다.
사이에 감도는 적막도 이들의 몫이다. 침묵을 의도한 것처럼 곱씹는다. 재현은 제가 저 눈에 조금이라도 투명하길 바랐다. 그 바람과는 달리 주연에게 재현은 기차 안에서 금세 지나친 몇 개의 시차와도 같았다. 마주 보고 있는데도 놓친다. 같은 사람 얘길 하는데도 의도는 둘 다 다른 데서 만난다. 서로를 상대하는 동안은 시간을 확인하지 않은 것이 첫 번째 증거이다. 이 좌석 칸 안에는 이현만 있지 않다.
"제가 혹시 주연 씨 기분 나쁘게 하면, 꼭 알려 줘야 돼요. 저는 그런 거 이제 구분을 못 하겠어요."
"그럴 일 없을 것 같은데요."
"감독님이 예전에."
"네."
"동생 얘기 가끔 해줬었어요."
주연의 존재를 인정하기로 한다.
"저 형이랑 웃는 거 똑같죠. 다들 그러던데."
재현과의 짧은 만남 동안 상상한 모든 게 전부 외도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놓고도 자학하고 싶지는 않다는 게 제일 죄스러운 부분이다. 주연은 퍽 당당하게 입을 다물었다.
"네. 웃는 게, 그래서 사실……. 기분이 좀 묘해요."
두 번째 증거를 만들고자 재현은 후회도 여기서 다 정리해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것. 이는 계획에 없었고, 목표에 있지도 않았다. 다만 주연이 책등 닳도록 읽는다는 이현의 심상인지 뭔지 하는 거. 주연이 주연과 닮은 사람의 감수성까지 물려받은 탓에 이현을 회상하는 게 어제보다 더 괴롭지 않아졌다. 주연을 만난 것 자체가 이미 이현의 연작인 것이다. 혹은 지난 마음의 마침표.
이상하다. 이현과 전생에 헤어진 것만 같은 느낌이다.
4) 페트롭스키 자보드
조금은 무섭게 들릴 수 있지만. 이현은 정말 재현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뮤즈를 만나서 필명이 생기고, 나중엔 아예 본명까지 바꿔버렸다. 이걸 무모하다고 봐야 하는 건지 로맨틱하다고 봐야 하는 건지. (아니면 소름 돋아야 하는 부분인 건지) 미적미적한 재현의 반응에 이현은 그럴싸한 설득을 얹었다. 그러더니 재현의 입에서 "하긴 외자라서 어감이 좀 좋긴 하다."라는 동의를 얻어냈다. 실제로 개명 뒤 일이 잘 풀려서 나중엔 전부 다 제 이름 덕이라며 열심히 생색냈다. 최근 일은 아니다. 심각하게 많은 시간이 지났다. 안 헤어지고 있었더니 절로 시간이 흘러버린 거지만……. 하여튼 짧은 사이는 절대 아니다. 주변에 만남을 들킬 만큼 신중치 못하게 군 적도 없었고. 조심한 만큼 정성 들였고 정성 들인 만큼 진심이었던 그런 제 인생에 절대 두 번을 못 할……. 정말 여정 같던 사랑.
그래서 더 어려운 것이다. 죽은 애인을 어제보다 덜 사랑한다는 거. 왠지 죄인이 되고 있다.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넘겨야 할지 모르겠다. 가족이 죽은 것과는 완전 다른 개념일 테다. 그래서 주연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다. 심지어 주연은……. 제가 예상보다 더 미지근한 상태라는 걸 자각하게 만들어 준 인물이다.
말도 안 되는 짓거리 하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대체 그 '말도 안 되는 짓'이 뭔지 모른다. 입 밖으로 아니, 속으로 정리해보는 순간 저주에 걸릴 것만 같다. 악몽을 꿔야겠다. 그런 생각 하며 눈을 감았다. 졸음은 때를 비켜 가는 일이 없다.
*
긴 강을 지나고 있다. 그러나 강의 유속보다 열차가 더 빨라 집중되는 건 강보다 하늘이었다. 곧 창에 빗방울이 날아왔다. 결국 하늘이 강이고 강이 하늘인 풍경이 되었다. 주연은 아직 깨지 않은 이른 아침의 재현을 보며 마음을 진정하려고 애썼다. 어떤 종류의 떨림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너무 여러 가지가 뒤섞여 그 정체가 모호하다. 온 심정에 비가 쏟아지네. 형이 미처 끝맺지 못한 사람이다. 진짜 가상의 이야기인지 긴가민가해서 책을 읽는 동안에도 계속 원망하던 사랑이다. 그랬던 재이를 직접 만났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설레도 되나.
떠는 이유는 공감 중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형의 취향이 닮아서가 아니라. 그냥 인간이라면. 숨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든 재현을 앞에 두고 과호흡할 것이라는 그런 보편에 대한 공감.
그래도 나는 이러면 안 돼.
마른세수하며 두통 앓았다. 그럼 또 왜 이러면 안 되는지 이유를 저 자신에게 설명해야 한다. 이러고 싶다는 자아와 이러면 안 된다는 자아가 마구 싸우는데 그 어느 쪽에도 논리는 없단다.
이러려고 온 거 아니잖아.
이러려고, 가 뭔데. 우리 형 유작 속 등장인물을 탐내는 거? 형의 애인을 보고 괜히 내가 차인 것처럼 분해 하는 거?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성스럽고 혹은 불순한지. 주연은 감히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재현더러 나쁜 사람인 것 같다 흉보며 얼굴만 몰래 훔쳐볼 때가 제일 편할 때였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고뇌가 무한정 꼬리를 물다가 재현의 기상과 함께 증발해버린다. 뻐근한 듯 기지개부터 켜는 몸이 왜 초면치고 수억 배나 더 짠한지. 합당한 이유를 찾지만 아까처럼 계속 실패한다.
"비가 와요. 눈이 아니라 비가……."
"잠깐 올 것 같지가 않은데요? 와, 구름 봐."
"……. 전 비 오는 거 좋아해요. 재현 씨는요?"
이제는 현재가 아니다. 완벽히 맨정신인 김에 제 이름 듣고 조금 놀랐다.
"어차피 남의 나라 기차 안인데. 우박이 내려도 일단 좋죠."
우박은 이미 이유 없이 맞고 있어요. 그래도 일단 좋아해도 될까요. 타격받지 않고 아픈 제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재현이 잠 다 깬 듯 눈 끔벅대며 오늘은 뭐 하지,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달싹대는 주연의 입술을 대답 대신 확인하며 일어난다. 누나들한테 갔다 올게요, 하면서. 애처럼 웃더니. 사라졌다. 뭔가를 더 말하고 싶었던 주연은 가방을 뒤져 추모식 때 들고 온 단문집을 폈다. 기억나는 구절을 펼쳐 눈으로 몇 번 보다가 한숨만큼 작게 낭송했다. 언젠가 연습했던 부분이다.
"비를 시베리아라는 이름과 곁들이자면 분위기가 꺾인다. 그럼 적어도 이 칸 창문에 달라붙어 있는 줄기는 녹은 눈이다." 여기까지 읽고 덮었다. 이 의도는 순수하지 않은 것 같다. 형한테 면목 없다면서 반성이랍시고 재이 나오는 글을 읽다니.
그러게, 형. 녹은 눈이 내리네. 봄이 오려나 봐. 아니면 겨울이 아직 안 왔다든지.
글을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재현도 칸 연결부에 잠깐 끼어서 열차 굉음을 잠자코 들었다. 소리보단 바닥 틈새로 밀려오는 찬 공기를 마시기 위함이었다. 시베리아에는 비 같은 거 안 오는 줄 알았는데. 재현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가만히 있어도 입김이 나오는 기온에 너무도 이상한 장맛비다. 장마일 리 없지만 그렇게 보았다. 혼자 하는 이별 여행에 딱 맞는 선물이다. 돌이켜보자면 이현과의 기승전은 과하리만치 깔끔했다. 그러니 결 정도는 엉망진창이어도 괜찮다. 그도 이해해줄 것 같…….
그냥 이해해주면 안 될까…….
"누나. 여기서 목욕 어떻게 해?"
"목욕씩이나?"
"해야 돼."
"승무원 찾아가서 돈 줘. 샤워실 쓰게 해 줄걸."
에휴. 겨우 찾아 들어온 샤워룸 문을 꼭 닫고 한숨 쉬었다. 혼자 있었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짓이다. 150루블짜리 샤워부스에서 휘청대며 씻느니 그냥 잠을 계속 잤겠지. 이현의 동생이 이상한 초능력을 쓰는 것 같다. 사람의 기억을 멋대로 지우고. 기분을 멋대로 바꾸려 들면서. 모든 걸 바빠지게 만드는……. 조급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초능력. 시간은 확인하지 않더라도 날짜는 확인해야겠다. 모스크바까지 얼마나 남았더라. 눈알 굴려 계산했다. 기껏해야 4일 반에서 5일이다. 겨우 이틀 안에 빠져버린 건 고려하지도 않고 5일 뒤 안녕할 걱정부터 했다. 완결이 두 개나 있어. 그제서야 착잡해지는 것이다.
수압 낮은 뜨거운 물이 정수리를 타고 목으로 줄줄 밀려 내려온다. 주연 씨랑 내 공통사가 이현만 아니라면 참 좋았을 텐데. 저도 모르게 없는 사람 탓을 하고 놀라서 양 뺨을 살짝 때렸다. 아마 재현이 이현과 관련해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생각을 저지른 것 같다.
내가 왜 이러지, 진짜.
쓰레기도 아니고 진짜 왜 이래.
그래도 이 중에 슬픔은 없었다. 그게 가장 슬픈 부분이란 것도 알지 못한 채 집에서 가져온 향기 좋은 샴푸나 잔뜩 짜서 거품 냈다.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을 느끼며 이 물은 어디로 가는지. 철도 아래로 흘러내려 가는지. 아니면 열차의 어떤 틈에 고이게 되는지. 마음보다 쉬운 종류를 상상했다.
물은 흐른다. 높은 데에서 낮은 데로 흐른다. 고일 수 있는 곳을 향해 발을 뻗는다. 사람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건 물의 이러한 고유 특성 덕분이고. 그래서 물로 지은 이들도 늘 어딘가 멈출 곳을 찾아 유랑하려는 습성을 지녔다. 구석을 찾는 먼지와도 그 맥을 공유한다.
사람의 일부를 마음 어떤 틈 속에 끼워 넣으면 이름을 잊을 때쯤에야 들여다보게 된다. 언젠가 마모되어 있는 사랑이 사람과 닮은 단어로 설정된 건 이 때문일까.
유일하게 수평으로 살고 죽는 기차의 단칸방일지언정 또다시 구석을 찾게 된 것도. 이들은 이미 닳아 구르는 시점이기 때문일까.
세상에 남길 거라곤 이제 각 없는 사랑밖에 없다는 듯이. 자유롭고도 무력하게. 정차할 곳을 지나쳐도 창밖으로 뛰어내릴 수 없게. 전진이 곧 하강인 상태로.
어디 다른 곳에라도 빠지지 않는다면 이 긴 이별을 견뎌낼 자신이 없어요. 이렇게 말할 용기만 주어진다면, 그럼 기차에서의 남은 며칠이 편안해질 것이란 걸 안다. 이미 닮고 닳아 있는 주연이 도와줄 거란 걸 안다. 그러나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도 많은 책임을 지던 사람에겐 감정의 선언이 그저 무섭다. 용기는 왠지 자격이 주어진 사람에게만 권한이 생기는 것 같다.
*
이제부터 이 방에 보드카는 출입금지. 일어나자마자 속이 뒤집힐 정도로 긴장되던 그 느낌은 역시……. 숙취다. 주연 씨도 그랬어요? 나만 그런 줄 알았네. 증상이 겹친다니 맞는 것 같다. 그런 거라고 합리화했다. 눈처럼 펑펑 내리는 줄기 굵은 비가 바깥을 내내 으스스하게 만든다. 내부는 늘 일정 온도를 유지하지만 기분상 가끔씩 오한이 왔다. 피부 밖만 쌀쌀한 건 아니었다. 속에도 바람이 불었다. 그래서 내내 얇은 이불을 몸에 두르고 누워있었다. 이제는 적막하기만 한 것 같은 내부에서 각자 명상에 빠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말을 걸어 정적을 헤집기도 했다. 다운 받아 놓은 모스크바 지도를 뒤적거리던 주연이 곁눈질로 앞자리를 흘긋였다. 제대로 눈이 마주쳤다. 둘 다 티 나게 고개를 돌렸는데 정말 티가 많이 났던 바람에 의식해야 했다. 한숨 쉰 재현이 한숨 같은 말을 뱉는다.
"그냥 마실까요."
"네."
"왜냐면,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 렇죠. 러시아 하면 술인데요."
겁이 나서 맥주로 시작했다. 그러다 어제처럼 말문이 터지고 기운이 솟구치길래 다시 무모해지기로 했다. 눈치껏 옆 칸으로 넘어갔다 온 재현이 옆구리엔 보드카를 끼고 손엔 아이패드를 들고 나타났다.
"앗. 저도 갖고 오긴 했는데."
심심할 일 없어 꺼낸 적 없는 아이패드가 가방 안에 묵혀져 있다. 슬쩍 꺼내려다가 재현이 굳이 누나들 거에 손댄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 그만뒀다.
"음……. 영화 볼래요? 비도 오고, 뭔가 차분하니까."
전혀 차분하지 않았는데 재현은 잘도 그런 말을 했다. 너무 장단 맞춰주고 싶어 제 자리를 바짝 당겨 앉았다. 재현이 속으로 주춤댔다. 생각이 넓지 못했던 탓에 붙어 앉는 모습은 차마 예측하지 못했다. 에이, 됐다. 이런 게 걱정될 거면 술도 안 깠겠지. 누나가 미리 다운 받아놓은 영화는 유명한 종류뿐이다. 주연은 다 본 적 있다 했고, 재현은 절반 정도 보고 나머지는 제목만 알았다. 그래도 무의식중에 이현과 봤던 영화에는 눈길 주지 않았다. 아예 초점을 회피했다.
"울어요?"
"아닌데요……."
"에. 운다. 전에 봤다면서."
재현은 주연이 두 번 봐도 재밌을 거라는 영화를 틀었다. 이입해서 보면 살짝 슬픈 영화이긴 했다. 갑자기 울어도 뜬금없지 않은. 축축한 주연은 영화에 집중하기도 했고 다른 생각을 하기도 했다. 술기운인 척하는 설움이 올라 뜨끈해진 몸은 이제 바람을 느끼지 못했다. 옆에 더 뜨거운 사람이 있어서인지. 주연이 우는 이유가 영화의 씬 때문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이 상황이 코믹했다. 그렇게 받아들여도 되길 원한 걸 수도 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좌석 칸 전등을 다시 켰을 때 제일 먼저 빨간 코와 빨간 눈이 시야에 잡혔다. 마음 놓고 놀렸다. 눈이 밝아 암전된 건 화면뿐이다. 그리고 시간. 지금 위치한 경도는 어느새 밤이다.
"이게 그렇게 슬펐어요?"
급하게 휴대용 티슈를 꺼내는데 기척에서 술 냄새가 확 끼친다. 내일은 정말 숙취가 올 것 같다.
"재현 씨 정말……. 피도 눈물도 없으시네요."
"있지 왜 없어요. 눈물도 닦아주는데."
한 장 달랑 뽑은 티슈로 눈을 찍어내듯 훔쳐줬다. 아, 자국 봐. 눈 모양대로 났어. 이게 그렇게 웃기다고 웃는데 어떻게 따라 안 웃을 수 있어. 주연이 더이상 울지 않는데, 영화도 끝났는데, 자리는 바뀌지 않는다.
"저도 보고 울었던 영화 있어요."
"어떤 거요?"
"어벤져스 앤드게임."
"아. 슬프죠."
주인공이 죽었으니까. 괜히 말했다 싶다. 둘 다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아, 입방정 돌았냐. 잘 넘기면 넘길 수 있는 건데 예 갖춰 곱씹었다. 주연의 손이 잠깐 와 어깨를 쓰다듬는다. 왜 나를 달래 줘. 나는 당장 당신부터 안아 주고 싶은데. 얼굴을 마주하기 힘들어 다른 곳으로 시선 옮겼다. 만만한 건 역시 동적인 바깥. 시베리아의 비가 거세다. 창이 희뿌옇다.
"어. 번개."
"그러니까. 저도 봤어요."
주연이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 접힌다. 쾅! 하늘이 쪼개지는 소리가 난다. 열심히 보고 있던 건 손인데 자극은 귀에서 터졌다. 와. 5초 걸렸네. 어느새 자기 자리로 돌아간 재현이 다음 번개를 먼저 목격했다. 각자의 손이 테이블 위에 올라간다. 재현은 주연이 펼친 다섯 개 중 두 개를 먼저 접었다. 하나, 둘, 셋. 쾅!
"어떻게 알았어요?"
"이번 거는 3초 같아서요."
신기하다. 감이 좋구나. 정말 신기한 마음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만지고 간 새끼와 약지에 마비가 온 것 같다. 간지러워 문질렀다. 그 모습 지켜보던 재현은 주연의 예상대로 감이 좋았다. 당신도 이 장소가 좀 이상하단 걸 아는가 봐. 지금 나 혼자 미치기 일보 직전인 건 아니지. 허락된 게 동정하는 것밖에 없다면 그거라도 해본다. 제가 당장 저를 볼 수 있다면 같은 얼굴로 쳐다봐 주고 싶다. 차마 당신에겐 받기 싫으니까.
"직업병?"
"뭐가요?"
"눈치 엄청 빠르신 것 같아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 본인이 더 눈치 빨랐단 생각은 못 하고 있는지 얼굴이 그저 순백이다.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좌석 칸 문을 열었다. 복도에 나가 정차 시간표를 확인했다. 우두커니 서 있으니 머지않아 주연이 따라붙어 핸드폰 시간과 정차 시간을 비교한다. 적혀 있는 시간 기준은 모스크바라서 계산할 틈이 필요하다.
"건물 보인다. 곧 어디 내리나 봐요."
"여기 어느 역인데요……."
"무슨 자보드……. 밖에 못 읽겠다. 근데 나가진 못해요. 2분이라."
본인들 자리가 바로 뒤에 있는데 굳이 복도에 서 있었다. 건물 수가 많아지고 역이 보일 때까지. 오만가지 갈등이 머리를 찌른다.
"2분?"
"네."
"나갈 수 있어요."
재현이 열차 칸 연결부로 나간다. 속도가 줄어 역사에 도착하고 문이 열릴 때까지 출입구 앞에 대기했다. 동행하란 뜻은 아니었는데 주연이 뒤에서 감기 타령을 한다. 미친 것 같은 한기가 들이닥친다. 벽 없이 보니 비가 아니다. 비처럼 보이는 눈. 곧 눈으로 바뀔 하늘의 장난. 뭐 그런 종류다. 주저 없이 젖는 영역에 섰다. 아직 열차에서 내리지 않은 주연을 보고 비장하게 말했다.
"삼등석 끝까지 뛰어갔다 올게요."
"못해요!" 급히 핸드폰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못하세요?"
"그 뜻이 아니라!"
결국 같이 뛰게 됐다. 쿠페에서도 중간쯤 있는 다른 승객들 방에는 재현의 누나들이 놀고 있다. 러시아 학생들과 할리갈리 하던 첫째가 창밖 슬쩍 보며 혀를 찬다.
"야. 누구 밖에서 뛴다. 술 존나 취했나 봐."
그 말 듣고 구경하겠다 창문에 머리 박은 둘째가 소리친다. 언니!
"쟤 이재현 아니야?!"
야! 기차 안에서 아무리 소리친다 한들 빗소리 뚫고 그들의 귀까지 닿을 순 없는데. 재현 따라 정신줄 놓은 주연의 입에서
"안에서 누가 우리 구경해요!"
가 나온 덕분에 재현도 누나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와! 누나! 안녀엉!" 최고로 짜릿한 경험이다. 창문 쾅쾅대며 빨리 안 들어와! 입 모양으로 욕하는 얼굴들 보며 배 잡고 웃다가……. 진짜 몇 초 안 남은 듯해 후진했다. 올 때보다 더 빠르게 달렸다. 기차가 우릴 두고 가면 그대로 미아가 돼 버릴 테니까.
다시 기차에 올라타자마자 기다렸단 듯 문이 닫힌다. 하나도 힘들지 않았는데 숨이 찼다. 몸이 뜨거운데 캄캄한 열차 칸 연결부는 밖보다 추워서 김이 보인다. 입김도 보이고 아마 전신에서 뿜어지는 증기도. 전등이 없어 밖에서 기어들어 오는 빛이 그 꼴을 멀미처럼 흐트러트렸는데. 너무 춥고 캄캄하고 호흡이 버거워서 모두 가라앉히고 싶었다. 좁은 틈에서 서로를 기다렸다. 배려인 척했지만 그런 건 섞여 있지 않았다. 바늘 같은 비를 맞았다고 해서 단번에 제정신을 찾기엔 술을 너무 마셨다. 어둠을 빌려 얼굴을 마음껏 보았다. 자세히는 안 보여도 본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니까. 키가 엇비슷해 얼굴이 가까우니 표정도 너무 빨리 도착해. 상대를 해석하느라 내 것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위로인 척 안았다. 추운 척 끌어안았다고. 얼굴 안 들키고 닿는 방법이 하필 여기 존재해서. 주연은 제법 전투적이었다. 반항이 담겨있었으니까. 뭘 하든 내 맘이라고 최면 걸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형이 화가 났나. 작은 창문에 빛이 번쩍한다. 둘 다 눈을 감고 은밀히 탄식한다. 5초 안에 최대한 다 느끼자. 하나, 둘, 셋, 쾅! 헉!
이번 건 예측을 잘못해서 진심으로 놀랐다. 반사적으로 확 떨어졌다. 2초를 대비하지 않아서 대놓고 당황했다. 허둥지둥 좌석으로 돌아와서 젖은 옷을 벗었다. 의도적으로 맨몸을 염탐하지 않게 제 것에만 집중했다. 건강한 침묵이 아니라 공포에서 기인한 고요가 이 칸을 숨 막히게 했다. 물 뚝뚝 떨어지는 젖은 티셔츠 한 쌍이 테이블 위에 애처롭게 널려있다. 후회해야 해. 정석대로라면 지금부턴 후회해야 한다. 당황해버리는 바람에 접촉이 은밀해졌잖아. 죄명만 없지 아주 큰 잘못을 저질러 버린 셈.
열차가 전보다 더 빠르게 달리는 것 같다. 누워서도 감지 않은 두 쌍의 눈이 천장만 뚫을 듯 노려본다. 그러다 정작 뚫린 건 가슴이고. 밤만큼이나 어둡게 소등됐는데 의식이 자꾸 서로에게 쏠린다. 주연은 홀몸이라 각오 하나를 더 해야 했다. 각오는 급하게 마쳤다. 없는 사람이 원망스러워져서 빨리 결정해야 했다.
"내일 아침에 이르쿠츠크 도착한대요. 전 내릴 거예요."
"그럼! ……. 모스크바는요."
목소리를 많이 눌렀다. 실수로 안 된다는 말이 튀어나올까 봐 눌렀다.
"거기까지 가는 열차는 많아요."
차분해서 태클 걸 수 없다. 재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어차피 대답으로 나올 수 있는 거라 봤자 한숨이 고작이다.
*
동정받고 싶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다. 사실 그게 무엇보다 간절하다. 혼자 있으면 외로워할 것 같단 핑계로 날 더 상대해 줘. 같이 지나간 사람을 지나쳐 줘. 잠이 든 줄 알았는데 그저 눈을 오래 감고 있었나 보다. 기상하는 과정 없이 아침이다. 잠들지 못한 건 주연도 마찬가지다. 천장 보며 눈 꿈벅대는 재현을 미련 담아 쏘아봤다. 우리 형은 씨발 복도 많지. 또 속으로 누구 욕을 해보면서.
"진짜 갈 거예요?"
고개만 살짝 돌려 애처롭게 물었다. 쳐다보고 있는 거 아는데 마주 보기까지 하면 속이 뒤틀릴 것 같다. 그건 숙취 핑계도 못 댄다. 그래서 그냥 대충 네, 했다. 짐 정리가 너무 간단했다. 정신을 반쯤 빼놓고 하는 중이라 사실 몇 개는 두고 내리게 될 것이다. 몰라. 폰이랑 돈이랑 여권만 있으면 돼. 일찌감치 여권부터 챙겼으니 내려서 멘탈이나 챙기면 된다. 아마 그때부터 제대로 붕괴일 테지만 그건 혼자 있을 때 수습하도록 하자.
열차가 이르쿠츠크역에 진입한다. 조용히 자신의 아침 시간을 보내던 재현이 고개 꾸벅이고 나가는 주연을 무시했다. 정차 시간은 30분. 쓸데없이 길다. 처음 들어보는 데라 뭔지도 모르는데. 데이터가 터지길래 검색했다. 바이칼 호수? 그래. 그런 거 있구나. 흥미 떨어져서 다시 화면 끄고 드러누웠다.
…….
에이씨, 진짜!
캐리어를 꺼냈다. 부랴부랴 옷을 겹쳐 입고 짐을 챙겼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다 쓸어 담았다. 아직 안 마른 차가운 옷들은 그냥 버리기로 한다(주연이 두고 간 옷도 보여 챙길까 고민했지만 바로 취소했다). 캐리어 지퍼가 꽉 잠겼는지는 잘 모르겠다. 승무원을 만나 뭐라 뭐라 하니 여권을 돌려받았다. 그 시간이 억겁이었다. 다행히 열차에서의 30분은 만능의 시간이라 모든 것이 가능하다. 냅다 달렸다. 등 뒤로 열차 문 닫히는 소리가 흐릿하게 맴돌다 휘발됐다. 각오는 홀몸이 아닌 사람도 할 수 있다. 조금 긴장되는 마음으로 역사 안에 발 내디뎠다. 사람을 다 빼앗겨 한산해진 내부의 벤치엔, 주연만 보였다. 아예 공석은 아니었는데도 주연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