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struck
2024
5th Juyeon Hyunjae Webzine

Watch stars, we can count’em from the rooftop. I just want you baby I don't need nobody else here.
Gotta show you off, but later keep you to myself.

 

 

 

 

 

 

재현씨, 꽃다발 좀 사와주라. 하나 모자란다. 과장님의 전언에 재현은 눈썹을 휘날리며 사무실을 튀어나갔다. 덜렁거리는 사원증 벗어서 뒷주머니에 꽂아넣는다. 회사 앞 횡단보도를 껑충껑충 뛰어 도착한 꽃집에서 빨리요 제발요 애걸해서 받아든 알록달록 꽃다발의 리본을 휘날리며 다시 회사 건물로 돌진.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신입사원의 단거리 부스터로 10분 미만 소요했다. 이러려고 스펙 쌓고 취업하진 않았으나 잔심부름에는 도가 텄다.

 

본사 창립기념일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 7층 연회장으로 향했다. 스피드를 위해 직원 전용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그제야 재현이 숨을 고른다. 사원증 다시 목에 건다. 손등으로 이마에 비지땀을 훑어내렸다. 그동안 차근차근 올라가던 엘리베이터는 생각보다 빨리 멈춰섰다. 재현의 계획에 없던 5층에서. 누군가 타겠거니, 한 팔로 꽃다발을 껴안은 재현 갈라지는 문을 무심히 여겼다.

 

“.........어.”

 

그렇게 펼쳐 또다른 세계. 5층 연회장의 좁다라한 백사이드 공간. 사람들 바글바글 바쁜 풍경이라면 얼른 닫힘 버튼 누르고 내 갈길 갔겠지만 하필이면 그 인간 혼자라 눈이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그 인간이란 바로 하얀색 조리복에 높다란 원통모양 조리모를 쓴 멀대같은 이주연. 오색찬란 에피타이저를 가득 실은 카트를 잡은 채 애매한 거리에 우두커니 서서 난데없이 나타난 재현을 바라본다. 나 엘베 안 눌렀는데.... 엘리베이터의 오작동이 가히 충격적인 듯한 얼굴로.

 

 드라마에선 흔한 장면일지 몰라도 이건 명백한 현실이다. 임직원만 500명에 달하며 하루 손님이 1000명 이상은 드나드는 서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관광호텔 안에서, 모두가 호텔 안에 머물며 일하고 있는 그 시간에, 오직 단 둘이서만 존재하는 공간이 발생했고, 심지어 어느 누구도 조작한 적 없는 엘리베이터의 오작동으로 마련됐으며, 문이 열리며 하나로 합쳐진 세계의 인물들이 결코 활동영역이 겹치지 않는 주방셰프와 총무팀 막내. 다른 누구도 아닌 이주연과 이재현이기 때문이다.

 

카트를 놓고 할 말이 많아보이는 입술을 달싹인다.

 

“잘 지냈....”

 

그러나 망부석이 된 재현과 뒤늦게 인사를 건네려던 주연의 세계는 다시 분리된다. 문만 열리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운명의 엘리베이터 다시 상승운동을 시작했다. 그 안에는 주연의 반토막짜리 인사만 남아서 재현을 흔들었다.

 

재현은 목적지 도착하자마자 아무렇지 않게 임무를 수행했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은 엘리베이터의 금도 밟지 않고 비상계단으로 틀었다. 비상구 문을 쾅 닫자마자 미뤄둔 소감을 터뜨렸다. 와.......내 인생 레전드.

 

인생은 26년 째. 취업한 지는 세달 째. 자취는 두달 째.

이주연한테 차인 지는 열흘하고도 이틀이 지났다.

 

 

 

사랑도 사교육이 되나요

 

 

 

어이구, 재현이 술 마않이 먹겠네. 3일 간의 신입사원 교육 공지글이 떴을 때 게시판지박령 팀장은 경고했다. 재현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으나 저 큰일 났네용 대충 대꾸하며 생각했다. 여기서 더 많이 마시고 다닐 수가 있냐고요. 심지어 교육 전날까지도 천하의 쓸데없이 사람만 박박 긁어모은 전사 총무팀 회식에 끌려가 소맥을 말았다. 내가 무슨 바텐더도 아니고, 팀장님은 우리 신입소맥이 기가 막힌다 천국간다 가는 곳마다 홍보를 해대서 재현은 미칠 노릇이었다. 입사하기 전만 해도 충만했던 소맥부심이 고작 한 달 만에 질려가던 무렵이었다.

 

복장 예의를 갖추라는 사전 공지대로 면접 때 옷차림인 재현이 평소와 다르게 2호선을 기다린다. 취직 된 이후로 본사는 처음 간다. 당시에도 기함했던 2호선의 출근 열기를 다시 느끼려니 끔찍했다. 아니나 다를까 몸을 싣자마자 콩나물시루 속 콩나물이 되어 잔뜩 어깨를 웅크린다. 그때만 해도 취준생 재현은 세상 사람들이 입에 풀칠하려고 이렇게 다들 열심히 출근하는 구나 귀감으로 삼았지만 오늘은 에어팟이 들려주는 음악에 영혼을 맡긴 채 멍이나 때렸다.

 

합정에 가서야 숨통이 트여서 손잡이를 잡고 섰다. 소스의 기술. 대문짝만 한 제목만큼이나 커다란 책.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읽는 책의 삽화가 무심코 눈에 띈다. 스테이크다.

 

맛있겠다..”

 

혼잣말 중얼대는 건 회사 생활 시작한 후 업무 쳐내느라 생긴 버릇이다. 그걸 망각하고서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앞자리 남자와 멀뚱히 시선을 맞춘다. 눈이 맑네.. 코가 엄청 높네.. 근데 왜 쳐다보지? 뒤늦게 인지했다. 개쪽... 창피한데 저 자신이 웃겼다. 어금니 꽉 깨물고 얼른 눈을 깔았다. 아침 안 먹고 다니니까 이런 헛소리가 나오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문앞으로 가서 섰다. 시청역입니다. 도착역를 알리는 방송에 시간을 보니 8 50. 아슬아슬했다. 문 열리자마자 단거리 부스터 발동시켜 뛰기 시작했다.      

 

저와 함께 발맞춰 뛰던 인간이 있었단 사실은 본사 로비를 통과한 후에야 알았다. 1층에 멈춰있는 엘리베이터를 운 좋게 잡아탔더니 사원증 목에 걸며 따라 들어오는 네이비색 정장 잘 차려입은 남자. 아까 그 소스의 기술. 설마설마 하며 도착한 교육장에는 6 1조로 책상 붙이고 앉아 뻘쭘하게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빈 자리가 딱 두개. 책상 위에는 랜덤으로 지정된 좌석배치를 알려주는 각자의 명찰. 재현이 자신의 명찰이 올려진 자리에 섰다. , 상연이 형? 마침 옆자리 직원과 친분이 있어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재현의 맞은편 자리에 도착해 사람들에게 정중한 인사를 건네는, 소스의 기술이 아닌 이주연. 자리에 앉은 재현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걸린다. 아까 일이 생각나서였다. 그 작은 웃음은 주연만 발견했다. 그의 입꼬리도 부드럽게 말려올라간다. 그것 역시 재현만 발견했다. 

 

서먹한 분위기로 교육은 시작됐다. 첫 날 과정은 뻔했다. 회장님 일대기. 역사. 설립이념. 핵심가치. 블라블라. 사원들이 좀 조는가 싶으면 교육 마지막 날에 시험 있다고 겁을 주며 1교시가 끝났다. 2교시는 넉살 좋게 생긴 인사팀 최대리가 들어왔다. 출중한 말빨로 이목을 휘어잡았다. 이쯤 되면 자기소개 할 것 같죠? 전 그런 거 안 시켜요. 그러면서 메모지를 꺼내랬다. 롤링페이퍼예요. 맨 위에 자기 이름을 적고 쪽지를 옆으로 돌리세요. 받은 사람은 그 사람의 첫인상을 아주 솔직하게 적어주시면 됩니다. 솔직이 가장 중요합니다, 솔직.

 

이주연이라고 적힌 쪽지는 가장 마지막으로 재현의 손에 들어왔다. [연예인인 줄 알았다] [강동원 닮음] 앞사람들이 적어놓은 얘기가 죄다 외모 칭찬이다. 재현 역시 전철에서 처음 보고 잘생겼다는 생각부터 했었지만 왠지 남들과 똑같은 얘긴 하기 싫은 맘. 목을 문지르며 고민하다 힐끗 당사자 쪽을 넘겨다본다. 진지한 정수리만 두둥실. 전철에서도 봤던 동그란 정수리.

 

재빨리 두 글자를 적고 쪽지를 넘겼다. 인연. 좀 오글거렸나? 옅은 후회와 설렘이 뒤엉켰다. 다른 사람들 쪽지까지 열심히 써주고 이윽고 제 쪽지를 다시 돌려받았다. 본인의 첫인상을 확인한 조원들이 한마디씩 입을 열었다. 저 너구리 닮았어요? 이건 누가 쓰신 거에요? 와 난 첫인상이 다 달라. 그때 옆자리의 상연이 재현의 쪽지를 엿봤다.

 

아이 왜 훔쳐봐요.”

누가 재현이한테 천사라고 썼어.”

나 착하잖아요.”

착하게 생겼단 뜻 아니야?”

아 생긴 것만?”

 

조원들 내부에 잠깐 이재현 천사설이 돌았다. 그동안 한 명만 유독 조용했다. , 주목하세요. 시끌해진 장내를 진정시킨 최대리가 1번 자리의 사람들만 자신의 쪽지 내용을 발표시켰다. 마침 재현은 1번 자리였다. 제 차례에 뻘쭘하게 일어난 재현이 멋쩍게 읽어내렸다. 제 입으로 말하기엔 낯부끄러운 것들이 많은 탓이다.

 

우선, ...찢남. 그리고.. 낯가리는 것 같다. 눈이 반짝거림. 회사원같음. ... 천사.”

천사요?”

. 그렇게 쓰셨네요.”

 

대답하면서 어렴풋이 작성자가 주연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천사라는 단어만 개중에서 뜬금없고 추상적이라. 더군다나 방금 천사에 대해 논할 때 혼자만 조용히 있었으니까. 천사는 누가 쓰셨어요? 마침 최대리도 궁금했는지 재현을 대신해 물었다. 번쩍 손을 든 사람은 다름 아닌 주연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한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 전데요..! 그게 멀쩡한 외모와 달리 헐렁한 반응이라 사람들이 웃었다. 절대 사무직은 아닌 듯했다.

 

재현씨 첫인상이 천사 같았어요?”

. .”

 

천사같이 생기셨어요. 고개를 끄덕인 주연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반박할 싹을 자르는 해맑음. 주관적인 칭찬을 이다지도 일방적이고 당당하게 전하니 꼭 명제처럼 들렸다. 뭐야 얼굴 얘기였어? 생각보다 단순한 의미에 재현은 어이가 없어졌다. 동시에 부끄러워졌다. 하하... 그렇구나... 감사합니.. 얼버무리면서 자리에 앉았다. 책상 위의 어색함에 묘함이 섞여들었다. 그러자 유머를 빙자한 일침을 듣는다. 두 분 사내연애 그런 거 아니죠? 그거 죄악입니다. 하하하.

  

사내연애가 죄악이란 건지 사내들끼리 연애가 죄악이란 건지. 생각해보니 둘 다 죄악이다. 전자는 선배들의 케이스 스터디만 여러번, 후자는 직접 경험해봐서 아는 사실. 가벼운 농담임에도 재현은 부러 아하하 소리내며 내 얘기가 아닌 양 굴었다. 하지만 밍숭맹숭한 미소만 띠고 있는 주연이야말로 정말이지 그런 죄악이랑은 저만치 동떨어져 보여서 좀 약올랐다.

 

 

*

 

 

어디 좋은 곳 아세요?”

저 골목 들어가면 가성비 쩌는 횟집 있어요. 광어 한 접시 만원.”

오 괜찮다.”

 

회사원들 득실대는 먹자골목을 남자 넷 여자 둘 도합 여섯 명의 사회초년생들이 똘똘 뭉쳐 가로지른다. 거리에 만연한 중장년의 눅진한 분위기에 물들면서. 회 어때요? 저 예전에 가봤는데 맛있었음. 주연과 앞장서며 행선지를 정한 선우가 뒷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한다. 반대표는 없었다. 술만 있으면 장땡이라는 의견들이었다.

 

2일차 교육은 이런저런 전문인 교육을 받았다. 각자 직업군은 다양했으나 조별로 몸으로 말해요나 부루마블 게임을 하면서 첫날보단 한층 가까워졌다. 그래서 점심때부터 슬슬 얘기가 나온 술자리가 쉽게 성사됐다. 회식하기 적격인 목요일의 횟집이 북적대고 있었다. 운 좋게 자리 잡아 테이블 두개를 붙여 앉았다. 딱히 의도하지 않았으나 앉고보니 주연과 나란히였다. 다들 주량이 어떻게 돼요? 기본적인 음식과 술을 시켜놓고 상연이 물었다. 누구는 두병. 누구는 한병 반.

 

전 소맥밖에 못 먹는데.. 다섯 잔 정도?”

소맥밖에 못 먹는게 더 쎈 거 아니에요?”

근데 재현씨 소맥 잘 탄다고 여의도 바닥에 다 소문났어.”

 

상연이 추켜 세워주니 탄성이 터졌다. 오늘 맛 보자며 성화였다. 기대해요. 다 죽었어. 분위기 탄 재현이 와이셔츠 소매 걷어 붙이는 액션 취했다. 이 죽일 놈의 쇼맨십. 그러자 주연이 옆에서 와아 박수쳤다. 커다란 덩치로 하는 행동이 귀엽다. 아직 한 방울도 안 마신 상태지만 재현은 오늘 기어서 들어가는구나 직감했다. 내친 김에 일대일로 물었다. 주연씨는 얼마나 먹어요?

 

저 소맥은 잘 안 먹어서 모르겠는데..”

아 진짜?”

. 타주세요, .”

 

주연은 요리사다. 그게 직업인 사람도 소맥은 제게 맡기는 상황이 됐다. 별말 아닌데 퍽 애교스럽게 느껴졌다. 끓는 물에 데친 듯한 목소리 때문에 맘이 살살 녹는다. 역시 동생이라 그런가. 딸랑 1살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이주연은 엉덩이라도 쳐주고 싶게 기특한 면이 있다. 이거 완전 자극되네. 재현이 마침 서빙되어 나온 참이슬을 비장하게 가로챘다.

 

일번. 잡기술만 만렙인 이재현표 환상의 회오리쇼 한번 돌리고 팔꿈치로 밑둥 팍팍. 이번. 소주잔 두 개를 겹쳐 생긴 선까지 소주를 계량하여 맥주잔에 붓는다. 삼번. 맥주는 소주잔 끝까지 담아서 한방울도 흘리지 않고 때려넣는다. 일련의 과정을 행하는 표정은 신성하다. 라스트. 두 주류의 믹싱은 젓가락을 이용해 한짝은 중심 잡고 한짝은 트라이앵글 치듯이 울림 있게 hit. 그렇게 여섯 잔을 야무지게 탁탁탁탁탁탁. 도미노로 발생하는 카푸치노 버금가는 거품에 모두가 찬사를 보냈다. 선우는 동영상까지 남겼다. 이 형 대박 술꾼이네.

 

신나게 건배한 후 모두가 첫잔은 원샷이라는 법칙을 지켰다. 맛보고 나서는 입을 떡떡 벌렸다. 진짜 맛있어요. 이거 한 잔에 오천 원. 어깨가 한껏 올라간 재현이 넋 놓고 있는 주연에게도 슬쩍 물었다.

 

맛있지.”

 

그러자 저를 향하는 눈빛이 존경이 담긴다.

 

미슐랭.”

 

묘하게 라임까지 맞는 진실한 대답에 재현이 폭소를 했다. 퍽 밀쳤더니 돌덩이같은 팔뚝을 하고서는 풍선마냥 곧이곧대로 튕겨나갔다. 진짜 웃기고 깜찍한 새끼네. 얼마나 웃기면 이젠 욕까지 나온다. 물론 속으로만 생각했다.

 

이주연은 착했다. 남들 담배 피러 나갈 때 혼자 편의점에서 컨디션 여섯 개 사와서 나눠줄 정도로. 누가 초장을 흘리면 전광석화의 속도로 휴지를 건넸다. 날것 꺼리는 재현이 번번이 동내는 감자샐러드를 누구보다 빠르게 리필 주문해줬다. 솥뚜껑 같은 손으로 재현의 앞에서 얼쩡대는 모기도 잡아주고, 매운탕에 살고기 부분도 덜어주고. 멀리에 있는 밑반찬 집어먹으려 할 때는 그릇을 당겨줬다.

 

심지어 재현의 흘러내린 소매깃에 음식이 묻을까 잡아주기까지 했다. 야 너 팔 엄청 길다아. 구렁이 담 넘듯이 말 깐 지 한참 된 재현이 꼬부랑 혀를 놀리자 더이상 안 되겠는지 재현의 앞에 놓인 소맥까지 대신 마셨다. 꿀꺽 움직이는 목울대. 어어...?!

 

내꺼 왜 먹냐?”

목 말라서..”

씁 안돼. 니꺼 마셔.”

 

한편. 이재현은 푹 빠졌다. 툴툴대면서도 주연이 화장실을 다녀오면 제 옆에 빨리 앉으라고 의자를 빼줬다. 옆자리인 그가 벌주를 마시게 될까봐 소주병 꼬다리 날리는 게임도 대충 건드리기만 해줬다. 왁스 바르고 온 주연의 머리가 잘못 건드려서 삐죽거리고 있으면 뒤에서 몰래 정리해줬다. 형들 언제 그렇게 친해졌대? 우연히 그 장면을 포착한 선우가 태클을 걸었지만 능글맞게 어깨동무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우리 베프야. , 맞앟. 주연은 속된 말로 빠꾸가 없었다. 호기심 많은 은진이 끼어들 때까지 재현은 헤어나올 기미가 없었다.

 

재현오빠 여자친구 있죠?”

아니.”

없어요? 전 어때요?”

 

토끼눈을 하니 은진이 귀엽게 웃었다. 농담인데.

 

오빠는요?”

 

주연은 이런 것까지 역시나 속시원하게 답했다. 있어. 몇살인지 얼마나 사귀었는지, 은진이 이것저것 캐묻는 동안 묘하게 웃음기가 가신 재현은 컵에 물을 따랐다. 찬물 끼얹어진 김에 냉수 마시고 속을 차렸다. 동요하지 않으려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경쾌히 주문했는데 벌컥 삼킨 냉수가 차가워도 너무 차가워서 피가 식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 화장실 어디더라. 형 방금 갔다 왔잖아요. 또 가면 안 돼? 어딘지도 기억 안 나요? 안 날 수도 있지! 티격태격 하는 관계가 된 선우와 공연한 실랑이를 벌이다가 뭐 마려운 것도 없는데 고집스레 자리를 빠져나왔다. 놀라진 않았다. 다만 제멋대로 자란 소란한 감정들을 버리고 돌아와야 했다.        

 

다같이 택시를 잡았다. 정신 차리고보니 막차 끊긴 시간이라 다음 날의 교육을 위해 자리를 파했다. 그런데 회사원들 줄서서 택시 잡는 진풍경에 놀라 방향 비슷한 사람들끼리 동승하다보니 또, 주연과 함께 타게 됐다. 그를 피하고 싶었지만 막상 닥친 상황을 피하진 못했다. 다 떠나고 덩그러니 남은 주연을 먼저 이끌고 말았다. 우리 같은 방향이야. 그렇게 단둘이 남겨진 택시 안은 고요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옛날 발라드만 적적함을 덜었다.

 

둘은 약속한듯 양끝에 뚝 떨어져 앉았다. 술이 깨고 거의 맨정신이 된 재현이 무뚝뚝하게 휴대폰만 만졌다. 사교성 없는 어른아이처럼. 이런 자신의 모습이 별로라는 걸 알면서도 도무지 무슨 말부터 붙여야할지 모를 긴장된 공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알게 된 지 고작 이틀째다. 꽤 친밀해진 건 몇 시간째. 주연도 곁눈질만 보낼뿐 한마디도 않고 있었다. 그저 하루끝의 피로가 몰려왔겠지. 담담하게 침묵을 즐기는 줄 알았는데.

 

.”

“...?”

 

드디어 휴대폰에서 눈을 뗐다. 자못 진중하게 운을 뗀 주연의 눈빛이 착각인지 뭔지 그윽해보였다.

 

교육 끝나면.. 연락 안 하는 거 아니죠.”

“...내가?”

. 회사에서 저 보면 막 모른 척 하고..”

 

농담인듯 진담인듯. 무심결에 의미 부여하기 딱 좋은 애매함.

 

너나 모른 척 하지 마.”   

 

사실 그건 재현이 주연에게 염려했던 부분이었다. 그는 교육 내내 은근한 분위기메이커였다. 얌전히 있다가도 활동을 시작하면 적극적이고, 하는 짓이 허당이라 사람들 웃길 때가 많았다. 모난 데 없는 미남에게는 다들 자석처럼 끌리곤 했다. 주연은 누구에게나 한결같았다. 재현이 든든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햇살이라면 그는 잔잔히 출렁이는 바다였다. 다가가면 누구든 발이 젖었다.

 

아니에요. 저 정말.. 형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한편으론 깊은 곳까지는 쉽게 내어주지 않을 거란 느낌도 있었기에. 이런 명백한 호감 표시는 더욱 뜻밖이다. 주연은 주저없이 직언만 거듭했다.

 

혹시 제가 연락 안 해도, 저한테 먼저 연락해요.”

 

알겠죠.

 

재현은 조금 멍해졌다. 대인관계 이런 식으로 하는 놈도 있구나. 먼저 연락하라니. 잘 생각해보면 뻔뻔하기 짝이 없는 요구인데, 문제는 잘 생각해보기 싫었다. 뉘앙스는 무슨 청혼하는 뉘앙스라서. 형 옥장판 오백 개만 사주세요 라고 해도 눈 뜨고 코 베일 것 같았다. 약간 재입대만 빼면 다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은 이주연의 요구. 말려들었다. 뭐야... 생각은 함 해보께... 피식피식 웃는 이재현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끄덕. 바다에 풍덩풍덩. 빠져버릴 것 같아 요즘 수영 배운다는 노래가 이주연 주제곡인가.

 

근데 벌써 다이빙했다. 택시가 바닷속을 유영했다.

 

가위처럼 깨끗하게 도려낼 수 있는 감정이란 없다. 그러기 위해선 이주연에 대한 기억은 숫제 소각이라도 해야했다.

집에 가서 샤워를 해도, 침대에 누워도, 눈을 꽉 감고 잠을 청해도 재현의 귀에 먼저 연락하라는 목소리가 맴돌았다.

 

 

*

 

 

말 한마디 허투루 하지 않는 이주연은 교육 끝나자마자 진짜 연락을 안 했다. 단톡에서조차 메시지를 읽기만 할뿐 가끔씩 올라오는 이모티콘 생존신고가 전부였다. 재현은 주연의 얄미운 프로필 사진만 몇 번 넘겨보다 대강 체념했다. 사실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주말엔 인천 본가에 다녀왔고 평일에는 갑작스러운 경영감사 여파로 죽어라 야근했다. 삼 년에 한 번 꼴인 감사가 하필 입사 첫 해에 걸려 고생이라며 선배들이 재현을 다독였다.     

 

전임자가 처리했던 일을 대신 소명해야 할 건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옆자리 사원과 푸념하며 아메리카노 사들고 돌아온 사무실에 혼자 튀는 실루엣이 보였다. 자신의 책상 앞에서 두리번거리는. 하얀 조리복 입은 이주연. 다가가며 그의 이름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아직 이름을 부르긴 어색하다. 

 

너가 여긴 무슨 일로..”

오랜만이에요.”

 

서류봉투 든 채로 파티션 앞을 서성이다 저를 발견하고 웃는다. 가까이 가자 신선한 채소 냄새가 났다. 현장에서 조리모를 쓰느라 넘긴 머리 때문에 이마가 깔끔히 드러나있다. 유니폼 입은 모습에 낯 가리느라 어정쩡하게 서있으니 마치 어제 본 친구처럼 바투 붙었다. 저 심부름 왔어요. 혹시 인사팀 어디로 가야... 재현은 인사팀 쪽을 돌아봤다가 그냥 주연의 서류를 직접 가져갔다. 

 

"내가 전해줄게."

".. 고마워요. ."

"나밖에 없지."

"."

 

능청을 떨면서 자리에 앉았다. 볼일 끝났으니 갈 줄 알았던 주연은 어쩐 일인지 계속 그 자리다. 빤히 올려다보니 뒷머리 긁적대며 얘기했다. 형 왜 연락 안 했어요. 재현이 입술 삐죽 내밀며 반문했다. 뭐임마? 따질 말이 차오르는 찰나에 눈치 없는 전화가 울려댄다. ....감사합니다, 총무팀 이재현입니다. 남의 전화도 재깍재깍 당겨받는게 신입의 미덕. 하필 용건이 복잡한 전화다. 어쩔 수 없이 수화기를 든 채로 주연에게 양해를 구하는 눈짓을 보냈다. 그제야 주연은 아쉬움이 남는 손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재현은 모니터에 비치는 뒷모습만 쫓아야 했다. 

 

퇴근하고서야 다시 주연을 생각할 수 있었다. 팀장이 일주일 내내 야근 중인 재현에게 칼퇴를 지시한 덕분이었다. ? 왜 연락 안 했어요? 내가 무슨 지가 연락하라고 하면 따박따박 연락할 줄 알았냐고. 내가 꼭두각시야. 난 너보다 한살이나 많고 사회적 체면이 있으며 자존심도

 

[퇴근했어?]

 

쥐뿔도 없는 이재현이라고.

 

[저 퇴근했어요]

[아까 고마워요^^]

                                  [그럼 밥사줭]

[좋아요]

                                  [오늘 고?]

[오늘이요?]

 

물음표가 따끔하다. 그래도 큰 기대는 안 했으니 실망도 않았다. 회사 로비에 멈춰서 밖의 하늘만 째려봤다. 날씨 더럽게 좋네. 약속 있으면 다음에 보자고 보냈다. 그러나 휴대폰을 집어넣으려는 찰나에 도착한 날씨 만큼이나 산뜻한 답장. 고기 먹을래요?

 

경기도 광주에서 올라온 주연은 호텔이 있는 여의도 근처에서 자취를 했다. 그 동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그가 파란 불이 되자마자 횡단보도를 굳이 막 뛰어서 왔다. 금방 씻은 듯한 덜 마른 머리와 마치 태어날 때부터 입고 있었을 것 같은 체크남방. 너 남방 잘 어울린다. 만나자마자 칭찬 들은 주연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진짜요. 형 만날 땐 남방만 입어야 겠다. 별말 아닌 말이 또 별말처럼 들렸다. 하는 말마다 그 모양이라 재현은 앞이 캄캄해졌다.

 

연탄구이집에서 버릇처럼 술을 시켰다. 이런 분위기의 식당에서 고기만 먹는 건 아무래도 이젠 위법 같았다. 이 동네는 아직도 개발이 안 됐다. 월세가 얼마다. 그래도 회사랑 가까우면 장땡이다. 우리집이랑도 가깝다. 그런 시시껄렁하고 영양가 없는 얘기만 오가다가 주연이 그때 배운 소맥을 따라하겠다며 잔을 세팅했다. 유심히 봤는지 복습 안 해줘도 척척 만들어냈다. 청출어람 소맥 맛이 달달하다.

 

그렇게 경영감사에 시달리는 고달픈 신입사원 적응기로 한 잔. 군대보다 심한 주방 군기 문화 에프소드로 또 한 잔. 같은 회사라 맞장구 치기 편했다. 식당 이모가 총각들 이쁘다며 서비스로 주신 멸치국수에서 폴폴 피어오르는 김을 쳐다보며 주연이 말했다. 저도 오늘 딱 술삘이었어요.

 

무슨 일 있냐?”

“...헤어졌거든요.”

? ?”

 

헤어진 건 주연인데 심각한 표정은 재현이 다 했다. 망설임 없는 손은 그냥 우직하게 술을 말았다. 건배. 후련한 건배 제의 끝에 캬아아. 인생 달관한 만큼 좁혀지는 진실의 미간. 그런 우울한 얘기를 해서 뭐하겠어요. 그랬던 이주연은 정확히 세 잔을 더 먹고나서 눈이 풀렸다.

 

. .”

.”

그니까.. 뭐냐면여. 헤어지는 거는... 사랑 안 해서! 헤어지는 게 아닌 거 알죠.. .”

그럼.. 왜 헤어지는데. 사랑하면 안 헤어져야지.”

사랑이랑 연애는 다른 거예요, ...”

 

취했다. 허공에 삿대질 했다가 엑스표 했다가 제 머리 쾅쾅 내리쳤다가 하는 정신없는 모습이 재현의 눈에도 아롱아롱 흔들렸다.

 

사랑은 영원할 수 있지마안... 연애는 끝이 있으니까...”

“......”

연애를 하면 우리가 어떤 관계가 되는 거니까안...”

“.....”

대신 연애하면, 미치게 좋을 때도 있고.. 미치게 싫을 때도 있고.. 그러다가..”

“....그 관계가 지루해지고.”

그렇죠...”

 

난 이제 연애 안 해. 이주연이 회색빛 재만 남은 연탄 앞에 고개를 저으며 선언했다.

 

재현은 속이 울렁거렸다. 헤어졌구나. 그것도 존나 사랑하다 헤어졌구나. 택시 동승하고 귀가했던 날 이주연 이름 석자 인스타그램에 집요하게 검색한 끝에 계정 찾아내서, 그가 태그된 게시물까지 다 뒤져서 3년을 만났다는 연상의 여자친구와 커플링 맞춘 사진을 기어코 두 눈깔로 확인하고 나서야 속이 시원해져 두 발 뻗고 잤었다. 혹여 친해진대도 친구로만 잘 지낼 수 있겠구나. 허구헌 날 단짝처럼 붙어서 담배피러 나가는 우리 팀장과 부장이 세상에서 가장 친해보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남남인 것처럼. 그냥저냥 회사 친구가 될 수 있겠다. 이걸 본 이상 절대 내가 실수할 일 없겠구나. 그렇게 다치지 않고 단념했으나 어째서 여자친구 있다는 말보다 헤어졌다는 말이 더 힘빠지는지.

 

그가 어떤 연애를 했을지 그려졌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느껴졌다. 누구와 헤어졌든 제게는 기회조차 없는 걸 확인했다. 스스럼없이 그럼 난 어떠냐고 묻는 은진처럼 당당할 수 없다. 그와 더불어 이주연이 얼만큼 제 안에 스며들었는지 이재현은 깨달았다. 그 모든 사실이, 부정하기엔 인생이 너무 고달팠다. 그냥 외면을 택했다.

 

. 다 괜찮아질 거야.”

“....”

근데 나같음 너랑 절대 안 헤어져.”

 

니 진짜 괜찮은 애거든. 그 사람을 오늘 하루만에 다 알았다는 듯이 말하면서 꾹 다물린 입술 앞에 고기 한 점을 들이밀었다. 그걸 취한 주연은 냉큼 받아먹었다. 그럼 형이랑 사귈까요. 결국 절대 듣기 싫은 말까지 듣고 만다. 기분은 엉망이 되는 와중에 재현은 나사 빠진 놈처럼 웃었다. 이 죽일 놈의 금사빠. 인스턴트 사랑의 중독자.

 

이재현 26 연애의 역사는 보잘 것 없었다. 사랑은 잘하고 싶어도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았. 소스의 기술처럼 사랑의 기술. 뭐 그런 교본도 없이 크다가 절로 알아야 해서. 실패부터 해야 해서 그런 거라 위안했다.

 

사람들은 제게 곧잘 사랑에 빠졌다. 아직 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술 먹자면 먹고 자자면 자고 콩팥을 내놓으라면 당장 배를 가를 기세였다. 그게 너무 시시했다. 한 계절만 흘러도 질렸다. 아무리 똑똑하고 듬직하고 나이 많은 사람을 만나도 이재현 앞에서는 하나같이 놓칠까 전전긍긍. 불안한 만큼 퍼주고 그러다 집착하고 그러다 욕하고 종국엔 집어던지기까지. 몇 년을 짝사랑했던 고등학교 때 첫사랑과도 다를 바 없었다. 세상에 때 묻고나서 다시 만나니 술 먹고 잠 자면 그뿐인 것처럼 굴고 있었다.

 

첫사랑이고 나발이고 그마저도 이젠 다 퇴색된 기억들.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본 게 얼마나 오래 전인지. 어느덧 그때의 순수함은 영영 되찾을 수 없는 나이가 됐.

 

나 집에 못가아..”

가야죠. 삼십 분째 이러고 있잖아요, . 여기서 잘 거예요?”

 !! 나 여기서 잘 거야!!! 조타아!!”

 

그래서 이재현은 실수를 반복하고 만다.

 

불 꺼진 상가건물 입구 계단에 퍼질러 앉은 재현이 몸을 눕힌다. 어어!! 진짜 잘려고 그러네!! 주연이 처음으로 소리를 꽥 지르며 허리를 받쳐줬다. 재현은 아랑곳 않고 대자로 뻗었다. 나 출근 안 해!! 자정이 넘어 이미 다가온 오늘을 막아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엉겁결에 부둥켜 안은 자세로 곤경에 처한 주연은 술도 다 깨버렸다. 전방에 지나가는 택시를 간절하게 불렀다. 택시!!! 재현의 팔을 어깨에 걸치고 무대뽀로 일어났다.

 

같이 가.”

?”

나 우리집 기억 안 나.”

신도림이라며?”

어 근데 기억이 안 난다. 우리집이.. 그냥 걸어갈게. 나 걸음 빨라.”

어느 세월에 걸어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릴...”

 

그럼 같이 가... 겨우겨우 택시에 태운 재현이 문 닫아주려는 주연의 팔을 잡고 한껏 불쌍하게 올려다봤다. 나 버리지마.. 입술 삐죽. 눈은 초롱초롱. 그걸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택시 붙잡고 세월아 네월아 지체할 수도 없어 올라탔다. 교육 때 같이 택시 탔던 기억으로 신도림역 무슨 건물 쪽으로 가달랬다. 주연이 어느새 제 허벅지를 베고 누운 재현의 복실복실한 머리칼을 내려다봤다. 쓰다듬을까 손을 가져가다가 그냥 어깨를 토닥였다. 한숨 자요..

 

다행히 재현의 오피스텔이 눈에 띄는 곳에 있어 무사히 도착했다. 재현이 들어가는 모습까지 확인하고 가려는 주연이 전봇대처럼 곧게 서서 배웅했다. 그런데 안 들어간다. 가다 말고 돌아보더니 할말 많은 눈을 깜빡깜빡. 안 가요?

 

너 입 텁텁하지.”

 

기름진 음식 잔뜩 스쳐간 입속이 텁텁하긴 했다. .

 

양치하고 갈래?”

무슨... 됐어. 빨리 들어가.”

 

순간 혹할 뻔했다. 정신 차리고 손사래를 쳤다. 형 되게 자연스럽네. 그러자 재현은 눈썹 사이를 문지르며 아쉬운 기색이다.

 

우리집에 칫솔 겁나 많은데..”

와 부럽다.”

 

영혼 없는 대꾸에 입맛만 쩝 다신다. 팔에 걸치고 있던 정장 재킷을 다른 팔로 옮기고 크로스백 고쳐 메며 부산스레 굴더니 알았어 안녕 깔끔하게 외치고 들어가는 시늉. 그러다가 다시 턴. 공동현관 자동문이 열렸다 닫혔다만 무한반복이다.

 

야 목에 왜케 마르냐.”

?”

물 마시고 갈래?”

 

끈질기다. 말해놓고 저도 푸스스 웃는다. 그 얼굴 보고 따라 웃지 않기란 힘들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주연도 면역 없이 전염됐다. 마주 선 채로 바보들처럼 흐흐흐 웃었다. 외계인이랑도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여름 끝자락의 밤공기였다.

 

방심한 틈에 주연의 팔을 잡아 끌고 집에 데려간 재현은 물 먹이기를 성공시켰다. 신발장에 서서 깔끔한 원룸 둘러보던 주연이 고맙습니다 하고 물컵을 건네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갈게요. 그러고는 진짜 가는 모양새라 재현이 얼른 팔목을 붙들었다. 어디 갈라구. 집에.. 뭔 문제 있냐는 듯한 순진무구한 눈빛. 재현은 말없이 그저 원하는 바를 가득 담아 바라봤다.

 

한동안 전에 없던 농도와 깊이로 시선이 얽혔다. 어쩐 일인지 주연의 발도 떨어지지 않았다. 서로의 입체적인 얼굴을 과도하게 눈에 새겼다. 손만 닿으면 만질 수 있는 거리에서. 그렇다고 쉽게 손을 뻗을 수 없는 분명한 선을 두고.

 

그러던 주연은 이윽고 재현을 감싸안았다. 천천히. 선을 밟지 않고 단지 포옹만 했다. 맞닿은 가슴. 그의 심연 속에 갇힌다.

 

이주연은 눈치가 없지 않다. 모른 척도 하지 않는다.

 

저는 형이 내일 후회하는 게 싫어요.”

 

다 알고 있다.

 

우리..”

“…..”

오래오래 볼 거잖아요.”

                              

잘자요. 따뜻한 목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그릇된 충동을 타이른다. 이재현의 못난 욕심까지 품에 안아준 이주연은 그렇게 가버렸다.

 

 

*

 

 

이튿날 숙취 괜찮냐는 연락도 주연에게서 먼저 왔다. 전날 밤의 추태는 거론도 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연락하니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됐다.

 

거의 매일 카톡을 했다. 그래서 재현은 매일 주연을 생각해야 했다. 저번에 니가 샀으니 이번엔 내가 산다고 꼬시고. 퇴근하고 한강에서 자전거 타자고 꼬시고. 편의점에서 노상 까자고 꼬시고. 잠 안 오면 맥주나 마시자고 꼬시고. 술 마시면 노래방도 가고. 것도 안 되면 교육때 조원들을 모아서 당구도 치고 볼링도 쳤다. 술을 하도 먹어서 얼굴이 늘 부었다. 살도 몇 키로 쪘는데 만날 구실이 술뿐이라 어쩔 수 없었다. 취하기만 하면 철판을 깔고 집에 가기 싫다 생떼를 썼다. 우리집 전기 끊겼어. 단수 됐어. 말도 안되는 핑계를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주연은 택시 잡아주며 물었다.

 

형은 술만 먹으면 이러더라.

나 너한테만 이러는 거야.

 

만날 때마다 혼자 데이트를 했다. 꿈에도 이주연이 나왔다. 거기선 진짜 연애를 했다. 그러다 잠이 깨면 죽어라 눈을 감고 꿈을 이어지길 기도했다. 하루 중 이주연을 완전히 잊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주연의 휴무에 맞춰 연차를 쓰고 우연인 척했다. 그 덕에 을지로에서 골뱅이에 수육을 먹었다. 둘 다 그런 동네는 처음 가봤다. 우린 왜 이렇게 아재술집만 다니냐. 늙었으니까요. 진짜 늙은이들이 들으면 노할 소리를 키득대며 잔을 부딪쳤다. 주연은 알딸딸한 상태가 되면 말수가 몇 배는 많아졌다. 특히 재현은 따분한 회사 얘기를 재밌게 들어주는 고마운 존재니까. 

 

사실 그때 실습생이 실수한 거였어요.”

근데 니가 했다고 했어? 억울하지 않냐?”

저도 예전에 그랬으니까요.”

.. 대인배다 너.”

그리고 명태주방장님 엄청 무섭거든요. 제가 까이는 게 낫죠.”

명태가 별명이시냐?”

실명인데.”

그짓말.”

진짠데.”

 

재현이 입을 가렸다. 야 이르면 안돼. 주방장님 이름 듣고 총무팀 이재현이 웃었다고. 주연은 재현이 팔을 들어올리며 쏟을 뻔한 술잔을 얼른 안쪽으로 당겨준다. 근데 주방 사람들 형 좋아해요. 총무팀에 잘생기고 친절한 분 새로 왔다고. 재현의 발이 테이블 아래로 주연의 다리에 부딪혔는데도 그는 꿈쩍도 않고 대화만 이어간다. 미안할 소지를 주지 않는다. 친하다고 하지 그랬냐. 그냥 조용히 있었어요. . 나만 알고 싶어서. 참나.

                                    

저번에 노래방 갔던 얘기. 한강공원에서 라면 먹다가 옷에 흘린 얘기. 우연히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쳤던 얘기. 공유할 추억 거리가 부쩍 많아졌다. 항상 앞으로의 계획도 세워놓곤 했. 서울 살면서 관악산도 안 가봤냐. . 사실 나도. 나중에 등산가요, 그럼. 어 막걸리도 마시고. 형 자전거 타는 거 좋아하면 서울숲도 좋은데. 가봤어? ..... ...

 

남산 가봤어요?”

완전 어릴 때였을 걸.”

그쵸. 되게 유명한데 갈 일이 없었어요.”

아 그렇지. 근데 야경 되게 이쁘대.” 

그래요? 여기서 가깝지 않나…”

 

즉흥적인 성격이나 새로운 곳을 찾아다니는 모험심은 둘의 공통점이었다. 술집을 나와 알딸딸한 술기운과 서울살이의 감흥을 동력으로 남산순환버스를 타는 곳까지 걸었다. 남자 둘이 남산 가는 게 웃길 법도 한데 진지하게 길을 찾아갔다.

 

버스에 올라타서는 소풍 가는 애들처럼 들떴다. 창밖에 이마를 대고 케이블카 지나가는 걸 구경했다. 저 케이블 끊어지면 어떡하냐? 죽겠죠.. 창가 자리의 재현이 충격 먹은 표정으로 돌아보자 주연의 얼굴이 너무 가깝다. 눈을 피하지도 않는다. 그러자 이재현의 상태가 끊어진 케이블카가 된다.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이내 주연의 시선이 빗겨간다. , 오늘 보름달 떴다. 보름달이라도 뜬 게 운이 좋았다. 버스는 커브길을 끝도 없이 빙글빙글 돌았다. 

 

옛날 옛적부터 서울의 명소라는 고리타분한 유명세와 달리 전혀 녹슬지 않은 장소였다. 빈 팔각정과 하늘과 연결된 타워가 운치 있었다. 야경은 올라올 때의 기대감을 완전히 충족시켜 재현이 감탄했다. 드문드문한 사람들과, 살에 닿는 적당한 쌀쌀함, 밤하늘 별보다 많은 서울의 불빛들. 그 모든 것이 장소를 대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적적하게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난간 앞에 섰다. 펼져친 전경이 그림 같다. 내려다보자 높은 곳이 주는 두려움과 경이로움이 공존한다. 하아. 절로 깊은 날숨을 뱉게 만들었다.

 

한참 대화를 꺼둔 채 감상했다. 나른해질 무렵 주연의 손가락이 손톱만큼 작은 빌딩을 가리킨다. 우리 회사 저기있다. 그럼에도 재현은 살짝 드러난 손목의 화상이 신경 쓰인다.

 

너 그거 아직도 치료 안 했네.”

뭘요?”

화상.”

.. 이거 놔두면 나아요.”

바보야.”

 

주연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재현은 딴청 피우며 크로스백에서 슬그머니 무언갈 꺼냈다. 을지로 약국에서 주연 몰래 산 메디폼이었다. 붙여. 흉져. 도저히 가족도 연인도 아닌데 덩치 큰 남자끼리 이런 걸 챙겨주는 게 낯간지러워 바로 꺼내주지 못했다. 사심이 듬뿍 들어간 게 제발 저리지만 가방은 한결 가벼워졌다.

 

어 이렇게 갑자기주연은 이벤트라도 받은 사람처럼 입이 찢어졌다. 와 고마워요... 재현이 어떤 심정으로 건네는지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평안한 손길로 받아든다.

 

형 진짜 좋은 사람 같아요.”

 

그리곤 메디폼 붙인 제 손목을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고작 메디폼 가지구 뭘 또 그렇게. 난간에 기댄 재현이 입속 살을 깨문다. 어둑한 허공 노려봤다. 아름다운 경치가 비참했다.

 

어렸을 때 아빠가 그랬는데. 어른 되면 생각보다 좋은 사람 만나기 쉽지 않대요...”

“.....”

조건 없이 따뜻한.. 주변에 그런 사람이 생기면 천운이라고, 꼭 잡으래요.”

 

밤이 자꾸자꾸 깊어졌다. 이러다간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회 싫어하는데 싫다고 말도 안 하고. 바쁜데 내 일도 도와주고. 이런 사소한 것까지 챙겨주고...”

“.....”

재밌고.. 정도 많고...”

“.....”

괜히 내가 그때 형을 천사라고 썼던 게 아닌,”

 

주연아.”

 

재현은 끝내 버틸 수 없어졌다. 이름은 처음 불러봤다. 혼자서만 되뇌었던 이름이 벼랑 끝에 몰리고서야 가장 최악의 순간을 골라 입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와르르 둑이 무너졌다. 그거 그냥.... 갈비뼈가 아프도록 박동하는 심장을 가누며 억지로 말을 이었다. 

 

너 좋아해서 그런 거야.”

 

엎질러버렸다. 무섭도록 차가운 고백이다. 난간 위의 주먹을 꽉 쥐었다.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볼품없이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짜내기 시작했다.

 

조건 없이 잘해주는 거 아냐. 그냥.. 모르겠다. 눈 뜰때부터 감을 때까지 니 생각을 하는데. 근데 심지어 꿈에도 나와. 잠에서 깨면 아쉬워서 억지로 다시 잠들어. 꿈이 이어질까봐.... 그날 왜 안아줬냐. 내가 자존심 다 버리고 우리집 끌고갔는데. 그냥 그렇게 하룻밤 실수하고 싶어서. 그러면 어차피 나도 그렇고 다 똑같은 놈들인 거 아니까. 근데 넌 왜 거기서 사람을 안아줘. 오래오래 보자느니 그딴 소리를 왜 하냐고. 차라리 더럽다고 도망가지. 다신 연락도 하지말지. 씨발 왜 사람을 오기 생기게 하냐? 왜 이렇게 포기를 못 하게 만들어..!

 

너한테만 그런다는 거. 내가 늘 취해서 말하니까 장난인 줄 알았지.”

“.....”

생각해봐. 그런 소리를 내가 맨정신에 할 수 있겠는지.”

 

봇물 터지듯 쏟아냈다. 오늘도 그냥 아무것도 아닌 날 중 하루가 될 줄 알았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다 망했다. 어쩌면 오늘 이후로는 다시는 볼 수 없을 주연이 시야에서 사라질 듯이 희미해진다. 

 

좋은 사람?”

“…..”

개나 줘.”

 

나 너무 괴로워. 앞으로 너 안 볼래. 갑자기 이런 말해서 미안하다.

 

어떤 몸짓조차 없는 주연을 두고 뒤돌았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아득한 내리막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걸었다.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가파른 경사 때문에 발에 충격이 가해진다. 그 충격이 가슴을 저민다. 터덜터덜. 앞으로 쏠리는 몸을 바로잡느라 눈물을 참을 여력까진 없었다.

 

그건 혼자 좋아하다 혼자 이별한 내가 슬퍼서가 아니었다. 분했다. 끝까지 이주연은 어떤 사랑을 했고 어떤 이별을 했는지 모르고 끝나서. 그걸 물어볼 용기도 없고 이젠 기회도 사라져. 친구로 잘 지낼 수 있었는데 인내심 없이 어그러뜨린 게 허무해서. 내 마음 하나 컨트롤 못하는 내가 한심해서. 하지만 시간을 돌린대도 똑같이 친구를 포기할 만큼 이주연을 좋아해서.

 

메디폼을 좀 더 멋있게 주지 못한 게 후회돼서. 주연이 언젠가 직접 만들어 준다던 차돌된장찌개를 못 먹게 돼서. 오붓한 관악산 등산도 이젠 다 허상이라서.

 

계단을 수없이 내려갈 동안 열 받는 게 너무도 많이 생각났다. 단언컨대 재현이 했던 연애에서 겪은 모든 소모를 다 합쳐도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이렇게 원한 적은 없다. 이렇게 치열한 적 없다. 이렇게 좌절한 적도 없었다.

 

재현은 도로가 나타나자마자 먼저 보이는 택시에 올라탔다. 그 후, 택시가 떠나고 없는 길 위를 주연이 뒤늦게 숨가쁘게 뛰어 내려왔다.

 

이정표 없는 갈림길에서는 엇갈리기 마련이었다. 사랑이란 게 원래 죄다 독학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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