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품점에서 나온 후로는 본격적으로 놀이공원을 누볐다. 인기 놀이기구 줄을 서느라 다리가 아프면 등을 맞붙인 채로 번갈아 가며 몸에서 힘을 뺐다. 바람을 가르는 사람들의 비명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묻었다. 허기가 지면 이번 만남을 주선한 추로스를 사 먹고 얼굴보다 한참 큰 알록달록한 솜사탕도 나눠 먹었다. 인형 탈을 쓴 사람들이 보이면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해가 지기 시작할 즈음에는 잠시 벤치에 나란히 앉아 불그스름한 하늘을 구경했다. 누구랄 것 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야속하게 여겼으나 보란 듯이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저 바투 앉아 맞닿아버린 팔을 뗄지 말지 고민만 주야장천 하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온기를 공유했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걷는 중에는 손등이 스쳐 핸드폰을 옮겨 잡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접촉을 가볍게 여길 타이밍을 누구나 너무나도 쉽게 놓쳤다.
야간 퍼레이드는 화려하디화려했고, 느리게 돌아가는 관람차의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공원은 반짝거리는 대도시의 축소판 같았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날씨도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집까지의 거리와 극악의 버스 배차 시간을 고려해 폐장 시간보다 조금 일찍 놀이공원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어깨를 움츠리고 팔을 비벼가며 체온을 조절했다. 옷을 껴입긴 했어도 노출된 피부를 덮치는 찬바람 때문에 소름이 돋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와, 진짜 개추워. 너 괜찮아?”
“…그럭저럭?”
“구라 까네. 너 참는 거 다 보여.”
재현이 주연의 목에 선 핏대를 보며 킥킥 웃었다. 어설프게 센 척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버스 몇 분 뒤에 도착한대?”
“버스가…… 잠깐만.”
코를 훌쩍인 주연이 주머니에 둔 핸드폰을 꺼냈다. 뻣뻣해진 손으로 버스 위치를 확인하려는데 상단에 문자 메시지가 떴다. 아빠였다.
[아들 아직 놀고 있어?]
[아빠 그 근처에 약속이 생겨서 갔다가 방금 헤어졌는데 같이 간 친구도 괜찮으면 아빠가 집까지 태워줄게]
[밤 되니까 많이 추운데 밖에 오래 있으면 감기 걸려]
[10분 정도면 도착할 거 같은데]
주연은 줄줄이 이어지는 말풍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근처에서 약속이 있었다는 말은 왠지 거짓말 같았다. 여전히 여자 친구와 같이 갔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지. 잠시나마 추위를 잊게 하는 연락이었다.
“몇 분 남았어? 와, 사람 엄청 많다.”
어느새 시야에 들어오는 버스 정류장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재현이 앉을 자리가 없을까 봐 걱정하는 동안 주연은 자판에 손가락을 올릴 듯 말 듯 굴며 생각에 잠겼다. 일단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이십 분 가까이 기다려야 했고, 재현의 걱정대로 앉아서 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하지만 아빠를 부른다면 좀 더 빠르고 편하게 갈 수 있었다. 그뿐일까, 재현을 착각의 늪에서 구출하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마침 근처인 이유가 찝찝하긴 하지만.
“아직도 검색 중이야?”
“형.”
“응?”
“괜찮으면 우리 아빠 차 탈래? 근처에 있다고, 형도 데려다준대.”
부지런히 앞으로 나아가던 재현의 얇고 긴 다리가 우뚝 섰다. 정말이지 귀를 의심케 하는 제안이었다. 제 얼굴을 알 확률이 매우 높은 엄마 남자 친구의 차를 탄다는 건 축구 경기의 자책골과도 같았다. 심지어 아들과 단둘이 종일 놀았다. 이건 우연으로 보기 어려운 조합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분명했다. 주연도 모를 리 없었다. 아무리 아빠의 연애에 확신이 없다지만 이건 좀.
재현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려고 하자 주연이 선수를 쳤다. 원성을 잠재우려거든 꼭 해야 하는 말이었다.
“아빠한테 만나는 사람 있냐고 물어봤는데 없대.”
“…뭐?”
“일단 나는 아빠 말 믿거든. 그러니까 나 믿고 타면 안 돼? 아빠가 버스보다 먼저 도착할 거야. 그리고 형 지금 춥잖아. 감기 걸려.”
평소와 다르게 빠르고 또박또박한 말투가 재현으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했다. 눈마저 크고 또렷하게 뜨여 있어 기세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아빠한테 물어본 걸 왜 이제 말해. 재현은 그렇게 대꾸하려다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주연의 말이 사실이라고 쳐도 썸 타는 관계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으로서는 일 초라도 빨리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고 싶었고, 이렇게 된 이상 직접 부딪혀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분명 엄마는 이해해줄 것이었다.
“알았어.”
“…진짜?”
“그럼 진짜지 가짜냐. 어우, 추워. 빨리 오시라 그래.”
“알았어. 고마워, 형.”
고마워할 게 없는데 대체 뭐가 고맙다고. 재현이 혼잣말을 하며 아빠에게 전화를 거는 주연을 곁눈질했다. 어, 아빠. 빨리 올 수 있어? 어어, 그쪽에서 기다릴게. 빨리 와. 추워해. 무뚝뚝하면서도 마냥 차갑지는 않은 목소리가 잔잔하게 이어졌다. 실은 다정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주연은 원래 그런 애니까. 기대고 싶은 다정함을 가진 애니까.
“일단 정류장 쪽에서 기다리자. 금방 오겠대.”
가로등이 비추는 정류장을 가리킨 손이 곧 일자로 떨어졌다. 재현은 그 움직임을 따라 눈을 굴리다 입 안쪽의 여린 살을 조금 아프게 씹으며 주연의 옆으로 한 발짝 이동했다. 그리고 옆구리와 팔 사이에 난 틈을 한쪽 손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덩굴처럼 밀착했다. 찰나의 큰 떨림과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 작게 중얼댔다.
“추워.”
주연의 귀에나 겨우 닿을 목소리는 매서운 바람에 속절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몸만큼은 그 무엇보다 굳건하게 맞닿아 있었다. 주연은 팔짱에 이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재현을 내려다보며 느리게 혀를 굴렸다. 짙은 색채를 머금은 머리칼이,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이, 코에 난 작은 점이, 꾹 다물린 얇은 입술이 어떤 감정을 마구 들끓게 했다. 당장 말리지 않으면 사고가 날 거란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렇지만 이 순간에서만큼은 예외가 되고 싶었다.
“많이 추워?”
“응, 존나 추워서 입 돌아갈 거 같아. 이러고 저기까지 가자. 닿는 부분은 좀 따뜻하다.”
주연은 일부러 대꾸하지 않고 재현을 매달고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런 날씨에는 특권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추위’라는 보편적인 이유로 사고를 단순하게 만들어 관심을 떨어뜨릴 수 있는 특권. 교복 차림의 남자애 두 명이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마냥 붙어 있어도 다들 힐긋 보고 말았다. 어차피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 느끼는 추위였다.
주연의 눈에 익은 승용차는 정말로 십 분 안에 도착했다. 아빠 왔다. 주연의 한쪽 팔을 꼭 끌어안고 꾸벅꾸벅 졸던 재현이 파드득 떨며 머리를 번쩍 들었다. 그에 맞춰 검은 외체차가 두 사람 앞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재현은 그제야 주연에게서 떨어지며 작게 와, 소리를 냈다. 그에게 외제차는, 특히 검은색 외제차는 성공한 사업가의 표본이었다.
주연이 뒷문을 열었고, 재현이 주연의 등을 떠밀어 먼저 차에 태웠다. 몸을 싣자마자 느껴지는 온기가 이렇게나 반가울 수 없었다.
“안녕, 많이 춥지. 재밌게 놀았어?”
주연의 아빠가 다정하게 물으며 뒤편으로 머리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재현은 인사부터 건네고 눈을 맞추었다. 그 순간 사진에서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품은 얼굴에 의아해하는 표정이 스치는 게 보였다. 그는 그 찰나의 반응을 해석했다. 엄마가 내 사진을 보여줬구나.
“히터 좀 올려줘.”
“안전벨트는 다 했어? 우리 친구는 이름이 어떻게 돼?”
아들의 요청에 군말 없이 히터 온도를 높인 아빠가 중립에 둔 기어를 바꾸고 부드럽게 액셀을 밟았다. 무빙워크에 서 있는 것처럼 잔잔하게 이동했다. 재현은 주연을 따라 안전띠를 매며 입술을 씹었다. 다짜고짜 왜 모르는 척하냐고 묻긴 뭣하고, 일단은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이재현이요.”
“재현이. 학교가 어디야?”
“연재고등학교 다녀요.”
“아, 주연이 학교 옆에 붙은 학교라서 아는구나.”
아빠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감탄사를 흘렸다. 하지만 재현은 그마저도 연기라고 생각했고, 주연은 허벅다리 위로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아빠의 머릿속도, 재현의 머릿속도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니 함부로 끼어들어선 안 됐다.
자연스레 대화가 끊긴 차 안은 고요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들만이 어색한 정적을 깨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아빠는 말을 거는 대신 도착할 때까지 눈을 붙이라며 실내등을 껐고 재현은 어떻게 엄마를 언급해야 할지 고민하는 중이었으며 주연은 깜깜한 하늘에 뜬 별과 인공위성을 구분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다 문득 아빠가 재현의 집 주소를 물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지만 몇십 분간은 같은 방향으로 부지런히 달려야 해 일단 입을 다물었다.
주연의 생각은 곧 재현에게로 옮겨갔다. 그러고 보니 집 주소를 알려준 적이 없었다. 주연도 대략적인 위치만 알았다. 그런데도 차는 검은 도로를 무작정 달리고 있었다. 움직이기 전에 주소부터 먼저 파악해야 하는 거 아닌가. 같은 동네에 사는 것도 아닌데. 재현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어쩌면 이미 주소를 아는 걸지도 모른다.
“아저씨.”
“응?”
“저 아직 말 안 했는데요.”
“뭘?”
집 주소요. 그렇게 말하려는데 손에 들린 핸드폰이 크고 길게 진동했다. 엄마의 전화였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혔다. 재현이 당황해하자 주연이 입 모양으로 물었다. 왜? 화면 근처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손이 이내 말보다 행동으로 이유를 알려주었다. 화면 상단에 ‘엄마♥♥’가 떠 있었다. 애교 넘치는 아들의 저명에 주연은 하마터면 소리 내 웃을 뻔했다. 남다르게 화목한 모자였다.
재현이 수신을 주저하는 동안 뚜렷한 진동 소리가 좁은 공간에 울렸다. 운전석까지 닿지 않을 리 없었다.
“왜, 전화 왔어?”
“아…….”
“괜찮아. 받아.”
라디오가 꺼졌다. 거절하면 상황이 이상해졌다. 에이씨. 재현은 침을 꿀꺽 삼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어디야? 오고 있어?
위치를 물어오는 목소리가 수화기 밖으로 흘러나갔다. 통화 볼륨을 높게 설정해둔 탓이었다. 재현은 뒤통수가 붙어있는 운전석을 곁눈질하고 침착하게 대꾸했다.
“가는 길이야.”
―뭐 타고 오는데? 버스?
“어……”
“재현아, 스피커로 돌려볼래?”
신호에 걸린 차가 멈춤과 동시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재현이 눈에 띄게 몸을 움찔 떨었다. 저의를 알 수 없어 머뭇거리니 괜찮다며 웃어주기까지 한다. 엄마 잠시만. 뾰족한 수가 없어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어, 누나. 나야. 성진이.”
―…이성진?
친밀한 사람을 대하듯 가벼운 말투에 이어 놀란 기색이 다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재현과 주연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보았다.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네가 왜 재현이랑 같이 있어? 너 뭐냐?
“주연이가 오늘 아는 형이랑 놀이공원에 간댔는데 그 친구가 알고 보니 재현인 거 있지? 지금 내 차로 이동하고 있어. 마침 그 근처에서 약속이 있었거든.”
―아 진짜?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래? 그건 그렇고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거야?
“당연하지. 그러고 보니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안 물어봤네. 주소가 어떻게 돼?”
내비게이션에 새로운 주소를 등록한 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현은 조심해서 오라는 엄마의 말에 건성으로 대꾸하고 통화를 끊었다. 머릿속이 전화를 받기 전보다 복잡해졌다. 통화 내용만으로는 사귀는 사이도, 썸 타는 사이도 아닌 거 같았다. 차라리 친한 친구 쪽이 더 가까워 보였다. 결국 주연의 추측이 얼추 맞은 셈이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엄마에게 남자 친구가 없는 건 환영할 사실이지만 그동안 켜켜이 쌓아온 의심을 떠올려보면 히터보다 더 뜨겁게 열이 올랐다.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주연이 괜찮냐며 물어보려는 찰나에 아빠가 상황을 설명했다.
“얼굴 보자마자 수미 누나 아들인 거 알았는데 바로 알은체하기가 좀 그랬어. 놀랐으면 아저씨가 사과할게. 주연이랑 아는 사이일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모를 만도 하지. 그건 우연이 아니니까. 재현은 볼을 손바닥으로 벅벅 문질렀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시작해보는 게 좋을 듯했다.
“우리 엄마랑은 어떻게 알아요?”
“대학 선후배야. 비슷한 시기에 각자 결혼하면서 자연스럽게 연락 끊겼는데 몇 달 전에 우연히 마주쳤어. 그때부터 가끔 만나서 밥도 먹고 그래. 옆자리 빈 사람들끼리.”
질문에 대한 답변이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거짓말은 낄 틈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직 확신하긴 이르다. 함께 젊은 시절을 보내다 긴 시간이 흘러 혼자가 된 두 사람 사이엔 정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지.
“우리 엄마 안 좋아해요?”
“좋아하지? 좋은 사람이잖아.”
이번에도 대답이 빨랐고, 그 속에서 재현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거다.
“그런데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다 진지하게 만나봐야 하는 건 아니니까.”
“…….”
“혹시 아저씨가 엄마 남자 친구인 줄 알았어? 그래서 그랬구나.”
아빠가 차에 탄 내내 경계 태세이던 재현을 그제야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완벽한 상황 종료였다. 재현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딴전을 부렸다. 아저씨 정도면 엄마 남자 친구여도 괜찮을 거 같긴 한데요. 그런 말이 목구멍을 타고 오르기도 했는데, 저를 보고 있는 주연을 발견한 순간 입이 풀칠을 한 것처럼 바싹 붙었다. 롤러코스터의 가장 높은 지점에서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처럼 심장이 철렁였다.
“엄마는 든든하겠다. 이렇게 엄마 위하는 아들 있어서.”
평소라면 뿌듯한 기분을 느꼈을 말도 지금은 크게 와닿지 않았다. 재현은 부끄럽다는 듯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차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붉어진 귀를 어둠이 가려준 덕분에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주연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다만 그 모습을 오래 시야에 담았다. 꼭 뭔갈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한산한 도로를 부지런히 달린 차는 재현의 집에 먼저 당도했다. 몇 분 전에 연락을 받고 나온 엄마 앞으로 차가 서자마자 재현이 안전띠를 풀었다. 주연은 고개를 기울여 차창 너머의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재현과 똑 닮은 얼굴이었다.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자유이용권도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래, 주연이랑 또 가고 싶으면 아저씨한테 말해. 갈 때 아저씨 데려가도 좋고.”
덧붙인 말은 웃자고 하는 소리겠지. 재현은 예의상 알겠다고 대꾸하고 주연과 눈을 맞추었다. 잘 가. 주연이 묵묵히 손을 흔들었다. 심심하지만 딱히 덧붙일 것도 없었다. 둘만의 놀이공원에서는 그렇게나 웃고 떠들었는데 말이다. 어른이 끼면 생략할 게 많아졌다. 굳이 알려주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재현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틴팅된 조수석 창문이 스르륵 열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웃는 얼굴이 불쑥 나타난다.
“주연이 안녕.”
“안녕하세요.”
“아빠보다 더 잘생겼네?”
“감사합니다.”
주연이 웃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어른들의 칭찬은 익숙했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진위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기분 따라 용돈이 따라올 때도 있었다. 물론 오늘은 그런 걸 기대하기보다는 정류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엄마에게 바짝 붙어 서 있는 재현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고 싶었다. 곧 시선을 눈치채고 닿아오는 눈을 주연은 피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먼저 달아나버린다. 아쉬움이 남았다.
“잠깐 들어왔다 가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지? 다음에 내가 정식으로 초대할 테니까 주연이랑 같이 와.”
“나야 좋지. 나중에 시간 맞춰보자.”
두루뭉술한 약속을 끝으로 접견실의 가림막 같던 창문이 스스륵 닫혔다. 바퀴가 구르기 시작하면 주연의 고개도 뒤편으로 돌아갔다. 엄마 손을 잡고 걸음을 떼는 내내 차 뒤꽁무니를 힐긋거리는 재현이 보였다. 점점 빠르게 멀어졌다. 주연은 재현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정면을 보고 앉았다. 그리고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응?”
“진짜 재현이 형 엄마랑 잘될 일은 없는 거지.”
아빠가 반사적으로 실소를 터뜨렸다. 주연은 따라 웃지 않았다. 아빠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제겐 중요한 문제였다.
“왜, 너도 아빠 지키고 싶어?”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사람이랑 형제가 되면 안 되는 거잖아. 주연은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꾹 삼키고 분해했다. 차가 방지턱을 부드럽게 넘어갔다.
※
십여 년 만에 만난 대학 선후배의 문자 내용에서 시작된 의심이 완벽한 오해로 판명됨에 따라 재현에겐 주연을 불러낼 명분이 사라졌다. 넷이 모이는 자리를 만들기로 약속한 어른들은 제게 주어진 일들을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는 듯했다. 어쩌면 그날 밤을 새까맣게 잊은 걸지도 모른다. 주고받은 문자가 퍽 다정해 보였어도 두 사람은 친구일 뿐이니 말이다.
물론 재현과 주연의 만남이 그날 이후로 종지부를 찍은 건 아니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문자를 종종 주고받았고 운동장에 있는 시간이 겹치면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남의 눈에 띄지 않을 인사를 건넸다. 학원이 끝나고 친구들과 버스를 타러 갈 때 마주치는 일도 생겼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재현도 주연도 그 정도의 만남과 소통만으로는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제는 주연이 명분을 만들 차례였다.
다시 돌아온 주말의 이른 오후. 주연은 재현을 피씨방으로 불러 두 시간 동안 게임을 한 후 건너편 건물에 있는 만화 카페로 데려갔다. 둘 다 만화광은 아니지만 요즘 만화 카페는 만화책만 읽는 공간이 아니었다. 피씨방처럼 음식을 시켜 먹을 수 있는 건 기본에, 곳곳에 푹신한 매트가 깔려있고 커튼을 쳐 사생활을 보호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그렇다 보니 만화책이 주목적이 아닌 경우도 적지 않았다. 괜히 인터넷에 ‘만화 카페’를 치면 ‘데이트’라는 단어가 딸려오는 게 아니었다.
어쨌거나 주연과 재현은 만화 카페에 입성해 두 시간짜리 요금을 지불했다. 일찍이 도착한 손님들은 커튼 달린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한 자리가 남아 있었다. 재현이 먼저 주연을 그리로 끌었다. 뒤따라 들어온 커플이 자리를 탐낼 것 같아 선점에 나선 것이었다. 실제로 아쉬워하며 돌아서는 모습에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아늑해서 잠자기 딱 좋은데.”
“그래서 그냥 자러 오는 사람도 꽤 있대. 별로 안 비싸니까.”
“어쩐지 아까 누가 코 고는 소리 들은 거 같아.”
가져온 책들을 모서리에 밀어둔 재현이 눈을 좌우로 굴렸다. 사실 남자 둘이서 나란히 다리를 쭉 뻗고 눕기에는 좁은 공간이었다. 둘 중 하나만 눕든가, 팔을 꼭 붙이고 같이 눕든가. 일단 재현은 눕고 싶었다.
“나 누워도 돼?”
“어, 누워.”
“너는?”
“나는 앉아서 보면 돼.”
주연이 한쪽 벽면에 등을 밀착하고 가부좌를 틀었다. 들어와 앉은 순간부터 같이 눕지는 못하겠다 싶었다. 주연의 배려 덕분에 재현은 낮은 천장을 보고 누워 가장 위쪽에 있는 만화책을 집었다. 재현의 팔과 주연의 무릎이 닿을 듯 말 듯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눈만 굴리면 서로를 올려다보고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 사실은 타인의 시선이 차단된 좁은 공간에서 유독 간지럽게 다가왔다. 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책을 하나씩 집어 든 순간부터 대화는 사라지고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한참 이어졌다. 눈도 바삐 움직였다. 가장자리 쪽의 그림과 대사를 훑다 보면 꼭 종이 바깥까지 시선이 튀었다. 만화에 집중한 얼굴을 빠르게 훔쳐보고 다시 종이 안으로 달아났다. 눈이 마주칠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곁눈질을 멈추지 못했다. 일종의 눈치 게임이었다. 동시에 같은 행동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고야 마는.
이쪽이나 저쪽이나 예상하지 못한 긴장감은 아니었다. 여느 친구들과 다르게 만날 때마다 마른침을 삼키고 목덜미를 매만지게 되는데 이런 좁은 공간에 단둘이 있는 게 편할 리 없었다. 정확히 무어라고 정의 내리기에는 멋쩍은 자극이 이미 몇 차례 오갔다. 다만 그걸 티 내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일단 피하고 볼 수밖에. 하지만 한계가 찾아오면, 그건 어쩌지 못했다.
재현은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대신 측면으로 시야를 넓혔다. 딱딱한 벽에 상체를 꼿꼿하게 기대고 앉아 열독 중인 주연이 보였다. 힐긋댈 때마다 어김없이 그 모양이었다. 쟤는 허리도 안 아픈가. 걱정을 핑계로 차분한 얼굴을 뜯어보았다. 저와 다른 느낌으로 뻗은 선들이 오늘따라 생소하게 다가왔다. 만져보고 싶다. 주연의 눈이 책의 궤도를 이탈한 건 재현이 그런 생각을 했을 때였다.
몇십 분만에 기어코 성사된 눈맞춤은 침묵을 몰고 왔다. 서로 다른 모양의 눈이 다른 극의 자석처럼 맞붙고 입이 꾹 다물렸다. 바로 옆 공간에서 킥킥대는 소리가 넘어오는데도 점점 빨라지는 맥박이 귀를 점령해 관심을 옮길 수가 없었다. 재현은 만화책을 쥔 손에 땀이 차는 것을 느꼈고 주연은 요금에 포함돼 나온 음료를 두고 갈증을 느꼈다. 경험이 화려하지 않은 소년들이라지만, 심지어 같은 남자는 처음이라지만 지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재현은 축축해지기 일보 직전인 책을 머리맡에 두고 상체를 일으켰다. 주연의 눈이 그 움직임을 따라갔다. 맞은편 벽에 기대어 무릎을 가지런히 모아 앉더니 목을 한 번 가다듬고 단전을 피운다. 그 와중에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렸다. 무릎을 감싼 손도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꼼지락거렸다. 주연은 그 어수선한 움직임들을 집요하게 응시하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벽에서 등을 떼어내고 무릎으로 바닥을 짚었다. 순식간에 얼굴 간의 거리가 코끝이 닿을 듯 말 듯 하게 좁혀졌다. 서로의 눈동자에 갇힌 욕망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누군가의 목을 타고 침이 빠르게 넘어갔다.
재현이 먼저 눈꺼풀을 내렸고 주연이 얼굴을 틀면서 전진했다. 힘이 어설프게 빠진 입술들이 정직하게 맞닿았다. 푹신한 감촉에 온기를 뛰어넘는 열기가 순식간에 온몸을 휘감았다. 전기가 통하는 것 같기도 했다. 고작 입을 맞댄 것뿐인데 그랬다. 입구 근처에서 발소리가 나고 커튼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장소를 망각하고 더 나아갔을지도 몰랐다.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눈을 번쩍 뜬 재현이 저도 모르게 주연의 어깨를 세게 밀어냈다. 그 결과로 발소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큰 소리가 울리고서야 놀란 토끼 눈을 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얼얼한 뒤통수를 부여잡은 주연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일그러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엔 머리가 지잉 울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통증을 떨쳐내느라 눈을 꼭 감고 있어 재현이 옆으로 바싹 붙어와도 알아챌 겨를이 없었다.
“야, 괜찮아? 진짜 미안. 내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닌 거 알지.”
“…싫으면 싫다고 말로 해주면 되는데.”
잔뜩 풀 죽은 목소리를 들은 주연이 부러 장난스레 말했다. 하지만 재현에겐 이미 진담과 농담을 감별해낼 능력이 일시적으로 사라져버렸으니, 일단 동그란 머리를 끌어안다시피 해 뒤통수를 살살 어루만지며 해명에 나섰다.
“싫은 게 아니라아. 갑자기 밖에서 소리가 나니까아.”
치즈 스틱처럼 주욱 늘어나는 말꼬리가 주연의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아픔이 가시는 것도 같았다. 주연은 품속에서 마음껏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뒤통수 좀 박은 게 별건가.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도 가까이서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형.”
“아직 많이 아파? 혹 난 거 아니야?”
“나 숨 막혀.”
“숨? 어어, 미안 미안.”
재현이 급히 몸을 물렀다. 걱정되는 마음에 얼굴을 살펴보려는데 순식간에 다가온 얼굴이 쪽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어느새 허리에 감긴 팔에 힘이 실리는 게 느껴졌다. 재현은 잠시 할 말을 잃고 천진하게 웃는 주연을 시야에 담았다. 문득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정말 주연이 엄마 남자 친구의 아들이었더라면 웃는 얼굴이 이렇게나 예쁜 줄 알고도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상상만 해도 간담이 서늘했다.
“주연아.”
“응?”
“너희 아빠한테 우리 엄마 절대 좋아하지 말라 그래. 진짜 안 어울린다고.”
퉁명스레 말끝을 맺은 재현이 주연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자 주연이 빙그레 웃으며 가까워지는 얼굴을 마중했다. 그때 그 시절, 끝내 맞닿지 못하고 영영 사라져버린 어떤 마음을 아들들은 알 필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