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밤중에 난데없는 소음으로 문밖이 시끄러웠다. 웬 소란이래. 찌푸린 얼굴로 재현이 현관문을 열었다. 멀리 찾을 필요 없이, 소음은 바로 옆집에서 났다. 주연이 도어락을 풀지 못하고 씨름하고 있던 것이다. 취한 주연이 비틀거렸다. 자꾸 헛손질하면서 비밀번호를 틀리는 바람에, 도어락이 삑삑대며 경고음을 냈다. 체중 관리한다고 술은 입에도 잘 대지 않는 녀석이라 만취한 모습은 처음 봤다.
“야, 주연. 정신 좀 차려봐.”
흐물흐물하게 늘어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주연은 말없이 웃기만 했고, 숨 쉴 때마다 진한 알코올 냄새가 훅 끼쳐 나왔다. 비밀번호 뭔데. 기껏 물어봐도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이대론 문밖에서 밤을 새우겠다 싶어 부축하다시피 주연을 끌고 제 집으로 들어왔다. 말랐어도 덩치가 있어서 무거웠다. 주연을 들쳐업고 어찌어찌 거실 소파에 눕혔다. 뜻밖의 밤 운동에 구슬땀이 송글하게 맺혔다.
“주연.”
“...”
“야, 주연아. 이주연.”
주연은 눈을 감은 채 쌕쌕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쟤 저러다 내일 속 버릴 텐데. 숙취해소제라도 사와야 하나. 한숨을 쉬던 재현이 급히 슬리퍼를 주워 신었다. 혹시 몰라서 1층 편의점까지 뛰어갔다가 왔는데 주연은 미동도 없이 그대로 누워 있었다. 잠들었나 싶어 팔을 살살 흔들었다. 억지로 깨우자 주연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재현을 올려다보았다.
“이거 마시고 자.”
정신이 돌아오지 않는지, 한동안 눈을 껌뻑대던 주연은 뭣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숙취해소제를 쥐여주자 순순히 들이켰다. 힘없는 몸이 다시 소파 위로 구겨졌다. 맛이 없는지 주연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 있었다.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을래?”
“네.”
검은색 비닐봉지를 뒤적거리던 재현이 아이스크림 하나를 주연에게 내밀었다. 왜인지 주연은 아이스크림 봉지를 멀뚱히 보기만 했다. 친히 봉투 껍질까지 까서 막대를 주연의 손에 쥐여주었다. 꼭 어린애한테 하듯이.
다 잠긴 목소리로 주연이 웅얼거렸다.
“왜 하필 메로나예요…”
너무 작은 목소리라서 재현은 되물어야 했다. 어? 영문을 모른 재현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대답을 들으려고 했던 건 아닌지 주연은 말없이 메로나를 물었다. 연두색 아이스크림이 그의 입술에 묻었다.
“너 입술에…”
휴지를 꺼내 주연의 입술을 닦아주려다 기시감에 멈칫했다.
분명 재현은 이 장면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아주 예전의 우리.
-
영업사원과 패션 모델. 같은 카테고리로 절대 묶일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었다. 어쩌면 살면서 마주치지 않을 것 같은 세계의 사람들. 재현은 지인의 생일파티에서 우연히 주연을 만났다. 재현의 친구가 패션 사업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지인이 많이 겹친 상황이었다.
주연의 첫인상은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워낙 많은 사람이 참석하기도 했거니와, 두 사람의 자리가 멀어서 제대로 얼굴 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파 속에서도 주연은 제일 튀었다. 정말 모델처럼 생겼네. 1차적인 감상을 내뱉었던 것만 떠오른다.
정작 파티 때는 교류가 없었는데, 술에 취한 친구들을 뒤치다꺼리하다가 친해졌다. 주연은 촬영 때문에, 재현은 전날 회식을 핑계로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그랬더니 살아남은 이가 고작 둘 뿐이었다. 이 새끼들이 위스키에 고량주에 줄줄이 독한 술만 들이붓더니만. 어쩌면 예상된 결과였다. 죄다 해롱거리고 있어서 힘겹게 사람들을 일으키고 택시 불러서 다 귀가시켰다. 주연과는 초면이었는데 같이 땀 뻘뻘 흘리다 보니 조금 친해지게 됐다.
마지막 택시를 보내고 지친 표정으로 각자 담뱃갑을 집어들었다. 둘이 약속이나 한 듯 나란히 담벼락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다. 그냥 걔네 다 버리고 집에 갈 걸 그랬어. 새벽에 이게 뭐하는 짓이니. 재현의 넋두리를 들으며 주연은 연신 웃었다. 일찌감치 나이를 트고 나자 친밀감은 배로 올랐다. 자연스럽게 번호를 교환하고 말을 텄다. 이후로도 몇 번 술자리에서 주연을 마주쳤다.
담배 피우러 갔다가 둘만 남았을 때였다. 스몰토크를 하다가 주연이 내일 결혼식에 간다는 걸 알게 됐다.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안 친한 사람 결혼식이야?”
“아뇨, 그건 아니고. 제 전남친이거든요.”
모델 업계에 동성애자가 그렇게 많다더니. 처음엔 재현도 당황했으나 제 친구를 통해 왕왕 듣던 얘기라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재현은 이제 전남친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그냥 그러려니 하는 단계까지 왔다.
묵묵히 담배만 피우던 재현이 이내 시간과 장소를 되물었다.
“왜요?”
“너 내일 같이 갈 사람은 있어?”
“아뇨.”
“그럼 나랑 가자.”
형이 왜요. 이렇게 묻는 것 같은 얼굴이라 재현은 서둘러 덧붙였다.
“간만에 뷔페 먹으러 가고 싶어서 그래. 겸사겸사 네 전남친 얼굴도 구경하고.”
시덥잖은 이유였지만 재현이 너무 자연스럽게 얘기하는 바람에, 주연은 저도 모르게 수긍하고 말았다.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재현은 약속을 지켰다. 나중에 지인들과 여행을 갔을 때에야, 재현에게서 그날의 이유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시간 되는 사람들끼리 여름 여행을 가자고 말이 나온 참이었다. 장소는 대학생 엠티의 꽃인 가평 대성리. 다들 우리가 대학생이냐, 나이가 몇인데 대성리냐 했지만 가격 싸고 넓은 숙소 찾기에는 이만한 데가 없었다. 일정이 촉박해서 그나마 남은 숙소로 예약했더니, 좁은 골목길을 굽이굽이 한참 들어가야 할 정도로 외진 곳이었다.
마트에서 사온 고기 구워먹고 1차로 술판을 벌였다. 초장부터 달려서 그런지 반절 이상이 거나하게 취해있었다. 2차 때 먹을 과자랑 술이 부족해서 심부름할 사람을 정하기로 했다. 촬영 때문에 술을 마시는 둥 마는 둥 했던 주연이 제가 가겠다며 손을 들었다. 마침 산책이 하고 싶기도 했고.
혼자 가도 되는데, 재현이 담배 피우고 온다며 따라나왔다. 길은 어둡고 편의점은 멀었다. 편의점에서 과자랑 술을 산 후, 재현이 슬쩍 메로나 두 개를 끼워 넣었다. 우리 고생했으니까 이건 심부름 값이라고 하자. 각자 아이스크림 챙기고 나머지 손에는 짐을 들었다. 봉투가 너무 무거워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좀 걷다 보니 벤치가 나와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궁둥이를 붙였다. 쉴 겸 이거 먹고 가자. 금방 녹겠다. 멍하니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수다를 떨었다. 옛날엔 공기 맑아서 별 잘 보였는데, 이제 여기도 잘 안 보이네. 이런 얘기나 하면서.
“며칠 전에 창현이 형한테 연락 왔었어요.”
“그게 누군데.”
“그때 그 신랑이요.”
“미친 새끼네. 뭐래?”
“미안하다고요. 또 뭐라더라. 보고 싶댔나…”
“개소리하네 진짜. 결혼하자마자 이혼당하고 싶대?”
“그러니까요.”
메로나를 우물거리던 주연이 살풋 웃었다. 마치 오래된 사이처럼, 제가 하고 싶은 말만 쏙쏙 골라 하는 재현이 신기했다. 제 마음을 어떻게 알고.
“근데 형은 왜 결혼식 같이 가겠다고 한 거예요? 저희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러게.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멋쩍게 웃던 재현이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너 혼자 가면 외로울까 봐.”
그 모습이, 문득 결혼식장의 재현과 겹쳐 보였다. 같이 오니까 이런 구경도 하고 재밌다고 웃지. 너 혼자 왔으면 못 봤을 거잖아. 어딘가 울컥한 기분에 주연은 남은 아이스크림을 꾸역꾸역 삼켰다. 이런 사람을 사랑했다면 좋았을 텐데.
“혹시 나 너무 오지랖 넓었니?”
“아뇨. 저도 형이 와서 좋았어요.”
“그래. 근데 표정은 왜 그러냐.”
“아무래도 제 안목에 문제 있는 거 같아서요. 쓰레기 똥차 같은 놈만 골라 사귀는 것도 재주라면서요.”
“그러니까 좀 좋은 사람을 만나.”
“그게 어떤 사람인데요.”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지, 재현은 잠시 침묵하며 할 말을 골랐다. 어쩐지 조바심이 났다. 알면 알수록 주연은 이 남자가 궁금해졌다.
“형 같은 사람은 어때요?”
“나? 글쎄. 나도 차인 적 많은데.”
“형이요? 의외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도 재현은 달리 제지하지 않았다. 되려 주연의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손으로 닦아주는 것이다. 형은 너무 다정한 것 같아요. 참지 못하고 주연이 얘기했다.
“그래서 차이나 봐.”
“왜요, 저 같으면 업고 다닐 텐데.”
“겪어 보면 또 다르다니까.”
그럼 형이랑 만나도 돼요? 어둠 속에서 주연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재현은 조금 난감한 얼굴로 뒷목을 주물렀다. 남자 만나본 적은 없는데. 고민하다 뱉은 것치곤 내용이 모호했다.
“크게 다를까요?”
주연은 순진한 얼굴로 되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재현이 작게 실소했다. 저는 그런 게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요. 아이스크림 막대를 만지작거리던 주연이 멋쩍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주연이라고 남자만 만나 온 것은 아니었다. 턱에 손을 대고 곰곰이 생각하던 주연은 어느 순간,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형이 고민하는 게 단순히 성별 때문인 거예요?”
“보통은 그게 제일 크지 않냐?”
“그거 말고는 저랑 사귈 수 있다는 것처럼 들려서요.”
저여서 고민한 줄 알았거든요. 그게 아니라면 됐어요. 재현이 머뭇거리자 주연은 한층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자 이상한 용기가 생겼다. 왠지 이래도 밀어내지 않을 것 같아서.
툭. 벤치 아래에 짐을 내려놓은 주연이 은근슬쩍 재현 옆으로 몸을 옮겼다. 형. 나지막한 목소리에 재현이 무방비하게 고개를 돌렸다. 재현의 고개가 꺾이는 순간, 주연은 그의 뒷목에 손을 둘렀다. 재현을 제 쪽으로 당기자 두 사람의 거리가 한 뼘 더 가까워졌다.
메로나 향이 묻은 가벼운 입맞춤. 입술을 떼자마자 재현이 당혹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넌 사귀기도 전에 키스부터 해? 호기롭게 입을 맞춰놓고 정작 주연은 수줍은 얼굴이었다. 키스해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잖아요.
얼렁뚱땅 시작된 입맞춤 끝에, 두 사람은 결국 손을 맞잡고 펜션으로 돌아왔다.
이게 재현이 기억하는 이야기였다.
바라보는 것도 청춘인 것 같았던 시절, 그때의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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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모두 같은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 한동안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 꾸역꾸역 남은 메로나를 해치운 주연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저 가볼게요. 여전히 목소리에 취기가 묻어 있었다. 결국 소파에 주연을 도로 눕힌 재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뭘 간다고 그래. 옆집에서 사고 났다는 소식 듣기 싫으니까 그냥 잠자코 있어.”
“십 분만 있을게요.”
아 진짜 좀…재현이 머리를 헤집으며 신경질을 냈다. 자고 가, 잠만. 평소에 취해본 적 없는 주연이 무슨 사고를 칠까 봐 걱정된 나머지 화가 들끓었다. 취한 와중에도 주연은 재현을 곁눈질하며 종알댔다. 형 화났어요? 화내지 마세요…식탁 의자에 걸터앉은 재현이 눈자위를 꾹꾹 눌러댔다. 화 안 났어. 너 때문 아니야.
그럼 말구요. 졸린지 주연은 급격히 하품해댔다. 이후 거실이 조용해지자 재현이 의자를 뒤로 끌었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거실 중앙으로 발을 움직였다. 주연은 잠에 곯아떨어져 익숙한 숨소리를 냈다. 잠든 주연의 앞에서, 재현은 허리를 굽혀 그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주연에게 쏘아붙였지만 실은 제가 비겁했다. 헤어짐을 결심하기까지 수많은 이유가 있었건만, 재현은 구차하게 방패막을 썼다. 네가 남자라서 싫어. 그 말이면 모든 게 통용되니까 그랬다. 모르고 만난 것도 아니면서, 이제 와서 왜 그래요. 주연이 이런 말을 했더라면 미련없이 뒤를 돌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연이 보인 반응이라곤 멋쩍게 이마를 몇 번 문지르는 것뿐. 그럼 뭐…고추라도 뗄까요? 고민 끝에 한다는 말이 이런 거였다. 듣는 사람이 더 황당한 얘기를 지껄이길래 눈물이 나오려다가도 쏙 들어갔다. 그 덕분인지 우스꽝스러운 마지막은 아니었다.
예전엔 얼굴 보기도 힘들더니. 이제는 정말 제 앞에 주연이 있다. 손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손을 뻗어볼까 하다가 관뒀다. 이토록 가까이에서 얼굴을 본 건 헤어질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사귈 때는 미처 몰랐다. 어느 한 쪽이 외국에 사는 것도 아닌데, 졸지에 롱디로 전락하게 될 줄은. 주연은 해외 출장이 잦았다. 입국할 때마다 형 생각나서 샀다며 재현에게 각종 기념품을 안겼다. 처음에는 좋았으나 금세 시들해졌다. 해외 각국의 기념품이 쌓여 재현의 방은 어지럽게 변했다. 해외에 있으니 연락이 잘 안 됐고, 영상통화는 할 때마다 버벅였다.
형 제 말 들려요?
야 또 끊긴다. 파리 와이파이는 왤케 후지냐?
그래도 낭만이 있잖아요.
낭만은 개뿔…숙소는 괜찮아? 지낼만해?
여기 완전 좋아요. 봐봐요, 좀 멀긴 한데 에펠탑도 보이죠.
테라스 너머에 손톱만큼 비치는 에펠탑을 보고도 주연은 해맑게 웃었다. 불현듯, 재현은 화면 너머의 주연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졌다.
그땐 너를 손에 쥐면, 네가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주연은 자유를 꿈꿨으니까. 언제라도 제 품을 떠나 자유롭게 날아가 버릴 것 같아서 재현은 두려움에 전전긍긍해야 했다. 동양 남성 모델을 구하는 에이전시가 주연에게 러브콜을 보낸 것도, 그게 주연에게 더 좋은 기회라는 것도 알았다. 저 때문에 계속 한국을 왔다갔다하느라 주연이 고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것도 알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거기서 돌아오지 말라고 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재현은 말하지 못했다. 보고 싶어서.
이대로 주연의 날개를 꺾고, 움직이지 못하게 다리를 쥐고 있을 것 같아 두려웠다. 그의 커리어를 무너뜨리는 게 내가 될까 봐.
왜 오늘따라 말이 없어요?
회사에서 말 많이 해서 지겨워. 네 얘기 해줘. 듣고 싶다.
언젠가부터 재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하면 봇물 터지듯 투정을 부리고 싶어질까 봐 참았다. 우리의 사이가 끝을 달리고 있을 때부턴 그게 일상이 됐다. 재현은 건성으로 대꾸하고 단답으로 일관했다.
주연아, 너 기다리는 거 나도 너무 힘들어. 그냥 네가 좋아서, 그거 하나로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거야. 저도 모르게 이런 속마음을 말해버릴지도 몰라서.
하루하루 네 비행기 시간을 확인하는 것도, 지금 거기는 몇 시인지 찾아보는 것도. 자는 새에 연락이 왔을까 확인하는 것도. 그 모든 게 지겨웠다. 매 순간 휴대폰을 열어보면서 주연을 걱정했다. 네가 보고 싶어서 매일 고민한다. 저 비행기를 타고 가면 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돈만 많았어도 이따위 회사 때려치우고 맨날 너 보러 갔을 텐데. 너 좋아하는 해외에서 같이 살자고 할 수 있을 텐데. 근데 그만한 돈이 없었다.
참 이상한 일이지. 주연이 외로울까 봐 결혼식장도 같이 가 놓고는, 재현은 정작 이제 와서 외로움을 느꼈다.
할 말이 없던 게 아니라,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힘들다고, 위로가 필요하다고, 사랑받고 싶다고.
주연이 주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사랑받고 싶었다.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퇴근하고 같이 밥을 먹고, 주말에 영화를 보고. 상대방이 필요로 할 때 나타나고, 내가 힘들 때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랑. 평범한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 그런 흔한 사랑. 그러나 우리는 하지 못하는 것.
그새 우리는 나이를 먹었다. 어느 시점부터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결혼을 하기 시작했다. 남은 사람이 손가락에 꼽을 만큼 줄어들었다. 결혼식에 가는 게 일상이 될 무렵, 돌이켜보니 많은 사람이 제 곁을 우르르 떠났다. 나 빼고 모든 사람이 결혼하는 것처럼. 재현은 혼자가 된 기분을 느꼈다. 요즘은 다들 결혼을 일찍 하네. 투덜거려봐도 주연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봤자 이주연은 저보다 한 살밖에 안 어린데.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주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델은 열에 여섯은 동성애자고, 둘은 폴리아모리고, 하나는 섹파일 거라고. 남은 한 명만이 정상일 거라고 했다. 당연히 과장이겠지만 주연도 그 여섯에 해당하니 더 할 말이 없어졌다.
힘든 순간은 매번 있었고, 지치기도 참 많이 지쳤다. 그렇지만 함부로 끝을 내지는 못했다. 그게 전부는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재현은 문득, 주연을 그만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너를 잃게 될까 봐 무서워.
그게 두려워서, 너를 많이 사랑하고 싶지가 않아.
동시에 그것이, 주연을 그만큼이나 사랑한다는 고백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재현은 비겁하게 도망쳤다. 저도 모르게 그 사랑에 잠식할까 봐 불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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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근래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주연이 불시에 재현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파에도 얇은 겉옷만 걸치고 있는 건 여전했다.
“형 저 다음 달에 파리로 떠나요.”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하냐?”
“출국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소원 하나만 들어줘요. 형만 들어줄 수 있어요.”
맡겨 놓은 듯 뻔뻔한 태도였다. 한동안 잠잠했으니 이제 주연이 떠날 때도 됐다 싶건만, 괜스레 발이 굳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뭔데.”
“우리 마지막으로 데이트해요. 크리스마스에.”
크리스마스? 재현이 잠시 망설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주연이 열심히 졸라댔다. 정말 마지막이에요. 저 언제 다시 한국 들어올지 모른단 말이에요. 딱 하루만요. 아니, 반나절이어도 돼요.
“왜 하필 크리스마스인데?”
“새해에는 못 보니까요.”
씩씩하게 웃는 주연을 보고 있으니, 정말로 이게 마지막이구나 싶었다.
그해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인파에 쏠려 길거리를 걷고, 추위를 피하려 장갑을 한 쪽씩 나눠 꼈다. 주연이 미리 예약한 한우 오마카세를 먹고, 값비싼 와인도 홀짝였다. 어느 데이트와 다를 것 없는 시간이었다.
술잔을 비우며 주연이 힐끗 재현을 쳐다보았다. 연락 안 해요? 여자친구한테 뭐라고 하고 나왔어요? 크리스마스에 안 만난다고 하면 싫어했을 텐데. 알면서 그러는 건지 정곡을 찔렀다. 재현이 무덤덤하게 답했다.
“헤어졌어.”
“...왜요?”
“너 때문은 아니야. 좀 됐어.”
“왜 헤어져요. 좋다더니.”
“그냥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대리 기사님이 오려면 멀어서, 근처 공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공원 구석에는 늦게 떨어진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감자칩처럼 바삭거리는 소리가 났다. 걸음이 빠른 재현은 언제나 주연보다 한발 앞서 있었다. 주연은 재현의 뒤에서 느릿느릿하게 걸었다. 낙엽을 밟을 때마다 주연 특유의 발자국 소리가 났다. 앞으로 다신 저 소리를 듣지 못하겠구나. 생각하니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차창에 기대어 어지럽게 스쳐 지나가는 불빛을 마주했다. 주연과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주차장에 도착하고, 대리 기사님이 떠난 후에도 둘은 시트에 기대 있었다.
“이제 집에 가야죠.”
침묵 끝에 주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 가야지. 미적미적 안전벨트를 풀다 시선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이 부딪혔다. 입맞춤이 더 진해지기 전에, 주연이 재현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해피뉴이어.”
“아직 새해도 아닌데.”
“앞으로는 말 못할 테니까요.”
웅얼대듯 발음하는 해피뉴이어. 주연의 그 목소리를 다시 못 듣는다고 생각하니 눈가가 시큰해졌다.
“...왜 붙잡지도 않아?”
“쉽게 헤어지자고 하는 사람 아니잖아요. 그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고민했을지 알아요.”
“근데 묻지도 않아? 정말 이대로 끝이야?”
“다시 붙잡을 수는 있죠. 근데 그러면 그 마음이 안 없어져요? 형이 이별을 생각했을 만큼 힘들었던 게, 다시 만난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이미 마음을 한 번 먹었는데 어떻게 그게 잊혀져요.”
형이 원했던 걸 저는 채워줄 수 없어요. 죄송해요, 형이 뭘 원했던 건진 모르겠지만 전 변하지 못했어요.
“저는 계속 예전의 이주연이에요.”
“알아.”
나도 그때랑 달라진 게 없으니까. 재현이 뻑뻑한 눈을 감으며 되뇌었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 전, 현관문 앞에서 주연이 재현을 불러세웠다.
“새해에는 여자친구한테 다시 연락해요.”
“신경 꺼.”
“형도 외롭잖아요.”
그 말은, 앞으로 제 옆에 주연이 없다는 걸 더욱 실감하게 했다. 다음날 오후까지 낮잠을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 저녁 늦게 밖으로 나섰다. 밤하늘에 작은 불빛이 반짝였다.
주연이 탔을 법한 비행기가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별안간 주룩 눈물이 흘렀다.
“넌 뭐가 그렇게 쉬워?”
오는 것도, 가는 것도.
널 사랑하게 했다가 제멋대로 끝내버리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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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여자친구한테 연락하라는 주연의 말이 계속해서 귓가에 울렸다. 연락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텔레파시라도 통한 것처럼 혜지에게 연락이 왔다.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고, 정확한 발음으로 해피뉴이어를 외쳤다. 그때와는 달리.
“다시 만나자는 건 아니야.”
“알아, 오빠도 외로워서 그런 거잖아.”
혜지가 싱긋 웃으며 소주잔을 홀짝였다. 근데 오빠. 꼭 결혼을 해야 하는 거면 그냥 나랑 하자. 어린 게 못하는 소리가 없다고 타박하자 혜지가 부루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랑 하자니까.
“다시 만나자는 것도 아닌데 뭔 결혼.”
“아 왜 그런 거 있잖아. 부모 친척 등등 결혼하라는 잔소리 듣기는 싫고, 그렇다고 혼자 살자니 외롭고. 같이 있으면 적당히 재밌으면서도 집안일도 웬만큼 하고, 돈도 적당히 벌고, 인성도 쓸만한 룸메이트 있으면 좋겠다 이거지.”
“너무 날로 먹는 거 아니냐?”
“근데 이왕이면 나를 어느 정도는 사랑해줬으면 좋겠거든.”
“그럴 거면 지금부터 남친 새로 찾아.”
“아니? 조건이 달라서 안 돼.”
“뭐가 다른데.”
“그냥. 사랑해서 결혼하는 건…더 사랑해주길 바라게 되잖아. 그게 싫어.”
그래서 마음은 적당히만 있었으면 좋겠어. 혜지가 취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혜지는 재현과 상당 부분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동질감이 일었다. 때때로 꼭 저를 보는 것만 같아서.
이듬해 가을, 재현은 웨딩마치를 올렸다.
혜지의 말마따나 두 사람은 그럭저럭 잘 맞는 한 쌍이었다. 더 사랑해주길 바라지 않으니 부딪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갑작스러운 결혼 준비에 정신없이 바쁘다 보니 주연을 생각하는 일도 자연스레 줄었다. 아주 가끔, 잊고 살던 기억이 떠오를 때에야 생각이 났다.
그렇게 살던 중에, 재현은 TV에서 우연히 주연과 닮은 사람을 보게 됐다. 채널을 다시 뒤로 넘기자 그 얼굴은 더욱 선명하게 나타났다. 닮은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주연이었다. 그새 주연은 이런저런 예능에도 나올 만큼 셀럽이 되어 있었다. 패션 잡지 촬영 때문에 인터뷰한 영상인지, 인터뷰어가 주연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수많은 질문 속에서 그 문장이 나왔을 때, 재현은 TV 음량을 조금 키웠다. 첫사랑에 대한 질문이었다.
“남자에게 첫사랑은 무덤까지 가져갈 만큼 잊지 못하는 사람이라는데, 주연씨한테도 그런 첫사랑이 있었나요?”
곤란하다는 듯 주연이 살풋 웃었다. 아 이런 거 소속사에서 얘기하지 말랬는데.
“있었죠 저도. 근데 이미 결혼하셨더라고요.”
아주 오래전에, 함께 결혼식을 가서 봤던 신랑 얼굴을 떠올렸다. 주연의 첫사랑. 두부같이 생긴, 주연을 보자마자 벌벌 떨던 게 겁쟁이 같아 보이던 남자.
“어머, 가슴 아픈 짝사랑이네요.”
말과는 달리 잔뜩 신이 난 목소리의 인터뷰어가 캐물었다.
“그분과는 계속 연락하시나요?”
“아뇨. 근데 결혼식장은 갔었어요. 인사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다 왔지만.”
“그럼 그분은 주연씨가 왔다는 것도 모르세요?”
“아마 제가 왔던 것도 모를 거예요. 연락도 안 했어 가지고. 근데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분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제가 정말 좋아했거든요.”
이후로도 인터뷰어가 질문한 게 많았는데 하나도 들리지가 않았다. 재현은 굳은 것처럼 멈춰 섰다. 분명 주연이 X와 인사한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허나 주연은 다른 상황을 얘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재현은 허겁지겁 서재로 달려가 결혼식 DVD 영상을 찾았다. 결혼하고 한 번도 본 적 없던 영상이었다. 배속으로 보다가 한구석에 누가 봐도 모델 같은 사람이 서 있는 걸 발견했다. 블랙 수트를 차려입은 주연이 구석에서 서성였다. 재현의 자리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먼발치에서 재현을 쳐다만 보던 주연이 포토부스 옆에 멈췄다. 방명록에 뭔가를 끼적인 후, 발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예식장을 빠져나갔다.
주연은 X의 결혼식 때 분명, 눈을 보고 인사한다고 그랬다. 자신이 온 걸 제대로 보여주려고. 상대방이 당황한 모습을 봐야 제대로 잊을 수 있을 것 같다면서. 그러나 주연은 재현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밤새 서재를 뒤져 방명록을 찾아냈다. 수많은 글자 중에, 신원 불명의 문구를 찾아냈다. 귀퉁이에 작게 썼지만 단번에 그것이 주연의 글씨임을 알았다. 단 두 줄 뿐인 주연의 인사를 보고 재현은 며칠 동안 서글피 울었다.
이제 저 문을 열고 원하는 세상으로 걸어나가요.
앞으로도 영원히, 해피뉴이어.
X의 결혼식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