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Opposite


양관 下

문희

 -오늘은 저녁을 먹고 들어갈게요.

 

기껏 점심시간에 짬을 내서 전화를 걸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시원찮다. 재현은 힘없이 알겠다고만 대답하고 이유를 묻지 않았다. 어디 아프냐고 물으려다 섭섭한 마음이 들어 주연 역시 전화를 끊어버렸다. 피아노 조율해놓은 걸 아직 모르나. 언급이 없어서 서운했다.

 

어르신에게 저녁 식사를 초대받았다. 경성에 돌아온 지 오래인데 밥 한번 먹지 못했다며 주연이 소개받으면 좋을 사람들과의 식사 자리가 있으니 꼭 함께하자고 첨언했다. 불편한 자리였지만 딱히 긴장하지 않는 주연은 다른 구석이 신경 쓰였다. 이전에 일본인 유한부인이 소개해준 일본인 조율사에게 단단히 한몫 털려서 새 구두를 사지 못했다. 첫 월급을 타면 구두부터 사겠다고 주연은 이를 갈았다. 새 하숙집을 구해야 한다는 고민은 어렴풋했다.

 

승우는요?”

양조장에 일이 생겨 못 온다는구나.”

 

집안의 마나님이자 승우의 어머니인 부인이 나와서 주연을 반겼다. 경직된 부인의 표정이 주연을 보자 잠시 풀어졌다. 간단한 안부를 나누고 부인은 도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런 날 어르신 옆에서 장단을 맞추기보다는 부엌에서 손님상을 준비하는 일이 제 몫이라고 생각하는 여자였다. 어르신의 집에 사용인은 차고 넘쳤다. 손수 살림을 돌보는 마나님이 대단한 한편 미련스럽다고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

 

사용인을 따라 응접실로 들어온 주연은 뜻밖의 면면을 마주하고 말이 튀었다. 미츠코시 오복점에서 만난 일본인 유한부인과 그녀의 피아니스트 딸이 주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개받으면 좋을 사람들이란 의미가 이거였나. 주연의 뱃속이 유쾌하지 못한 감정으로 들끓었다.

 

자네들 구면이라면서?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들끼리 앉지?”

 

어르신은 유한부인을 총독부 보안과장의 부인이라고 소개했다. 경성에 사는 일본인들이 다 그렇지만 유독 고깝던 태도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주연은 쿄코의 빈 옆자리에 앉았다. 어르신은 부족의 족장처럼 술잔을 들어 건배했다. 재현의 집밥이 생각나는 부담스러운 서양식을 먹었는데 쿄코는 식사할 때도 레이스 장갑을 벗지 않아 주연의 의문을 샀다.

 

어머니가 손을 항상 귀중히 여기라고 하셔서요.”

 

쿄코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주연은 조금 놀랐다. 유한부인보다 우리말이 더 수준급이다.

 

주연상도 그렇지 않나요?”

저야 이제 뭐

저는 주연상이 무용을 다시 했으면 좋겠어요. 동경으로 돌아온다면 정말 좋을 텐데.”

 

주연은 쿄코에게서 다른 느낌을 받았다. 어머니의 과잉보호로 자란 부잣집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꽤 적극적이고 서슴없다. 주연은 응접실을 둘러보는 척 유한부인의 동태를 살폈다.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주연과 쿄코를 번갈아 쳐다봤다. 주연은 급격하게 피곤했다.

 

불현듯 기운 없던 재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저녁은 먹었으려나. 약속이 있는 날 저녁 먹었냐고 물어보면 재현은 꼭 얼버무렸다. 주연이 없으니 대충 끼니를 때우는 듯했다. 자리가 일찍 파한다면 그때 재현이 잘 먹던 닭곰탕을 사갈까 싶었다.

 

우리 노래 좀 들을까?”

 

일찍 파하긴 글렀구만. 어르신이 의기양양하게 제안했다. 지루한 기색을 너무 티 냈나 싶은 주연은 쿄코에게 말을 걸었다. 워낙 할 말이 없어서 아무 말이나 했다.

 

전번에 조율사를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특별히 제 청으로만 움직이는 분이세요.”

어쩐지 조율이 수준급이었어요.”

 

거짓말을 하는 주연의 입이 말랐다. 또 습관처럼 이재현 생각이 났다. 가수를 데려왔는지 응접실 한 켠이 어수선해서 쿄코가 하는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주연이 갸웃거리자 쿄코가 주연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쿄코는 낮게 속삭였다.

 

고마우면 언제 한 번 콕텔을 사주세요.”

 

외간 남자랑 함부로 술을 마셔도 되나. 주연이 어리둥절한데 어디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노랫소리였다.

 

“.....”

“.....”

 

응접실 한 켠, 한 뼘쯤 높은 단상에 이재현이 있었다. 관념적으로, 실제로도 부글부글 끓는 주연의 뱃가죽이 얻어맞은 듯 뒤틀렸다. 재현은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주연과 어렵지 않게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이재현은 뭉개졌다. 땅바닥과 천장이 울렁거려서 주춤거리다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울고 싶었는데 의외로 눈물은 또 쉬이 나오지 않았다.

 

가만히 노래를 듣던 쿄코는 주연에게 몸을 기울였다. 뻣뻣하게 굳은 주연의 숨소리가 들뜬 건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이 조선인치고 노래를 제법 잘하네요.”

 

듣는 조선인 불편한 칭찬을 했지만 주연에게 들리지 않았다. 노래 한 곡이 끝날 때까지 재현은 필사적으로 주연이 있는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늦은 밤까지 재현은 돌아오지 않았다. 먼저 양관으로 돌아온 주연이 거실에서 재현을 기다렸다. 습관처럼 꼿꼿이 허리를 세우는 주연답지 않게 소파에 앉은 그는 한껏 몸을 웅크렸다. 참담한 심정을 느꼈지만 그럴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되물었다.

 

어르신은 재현을 따로 소개하지 않았다. 이재현은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처럼 몇 곡 틀어졌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노래를 듣자던 어르신의 말 따라 노래만 불렀다. 그런 취급을 받는 재현이 싫어서 주연은 괴롭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한참을 웅크리고 있었을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발을 끌며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이 또한 재현답지 않다고 주연은 생각했다. 발걸음은 소파 옆에서 그쳤다. 피곤한 기색의 재현은 주연을 보고 꽤나 놀랐다. 그도 잠깐 휘적거리며 제 방으로 들어가기 바쁘다. 짙은 술 냄새가 났다. 얼마나 마셨는지 살짝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이제 오냐고 말을 꺼내기엔 때를 놓쳐서 주연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붉게 뺨이 달아오른 재현은 문고리를 붙잡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제가 노래 말고 다른 걸 팔고 왔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적막까지 삼킨 재현은 거실에 주연만 홀로 남겨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에 기댄 재현은 스르르 주저앉았다. 두 다리는 양관 근처에 왔을 때부터 후들거렸다. 혼자만의 공간에서만 뭉개질 수 있는 재현은 오늘 큰 사장님의 집에서 주연을 본 순간 뭉개지다 못해 으스러졌다. 재현이 적막을 삼키고 온 바람에 잠잠한 거실은 이제 주연의 기척까지 읽히지 않았다. 양관을 나간듯했다.

 

, 나는 뭘 기대했을까. 주연이 온 후로 재현은 평균치의 삶을 희망했다. 그리 생각하지 않겠지만 주연이 자신을 하찮은 부엌데기로 여겨도 좋았다. 같이 밥을 먹고 일상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생겼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또 무릎이 꺾인 재현은 절망한다. 평균치의 삶은 나에게만 이다지도 어려운 건지.

 

 

 

 

 

 

 

 

 

 

주연은 한밤중에 승우를 불러냈다. 이제 막 들어온 작은 사장님이 씻으러 들어갔다는 사용인에게 당장 나오라고 말을 전하라며 재촉했다. 작은 사장님의 친우는 평소 허허실실 사용인에게도 사근사근 굴어 평판이 좋았다. 분명 술에 취하지 않았는데 주연의 행동은 행패나 추태에 가까웠다. 사용인은 난감했다. 이러다 소란을 읽은 어르신이나 부인이 나오면 어쩌나 발을 구르는데 구세주처럼 승우가 등장했다.

 

“.....”

“.....”

 

응접실이라는 공간이 끔찍했다. 주연의 당황과 재현의 굴욕이 덕지덕지 묻어있던 응접실은 말끔히 정리되었으나 모양새를 바꾼 감정은 주연의 몸에 가혹하게 남아 있다.

 

경성에는 비밀이 없어.”

 

승우는 다 알고 왔다는 표정을 지었다. 씻다 말고 나왔어도 말간 승우의 얼굴을 보자니 꼭 고등학생 때가 떠올랐다.

 

오늘 저녁 식사에 재현씨가 다녀갔는데 그 자리에 주연이 너도 아버지가 초대했다고 들었어.”

 

차분해진 주연은 승우의 다음 말을 얌전히 기다렸다. 승우는 말을 고를 필요가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연습했던 말이라 맺힌 단어들이 술술 흘러나왔다.

 

양관의 저주에 대해 들어봤지. 우리 집안이 만든 저주야.”

그게 무슨

 

여기서 양관 얘기가 왜 나오냐고 물으려던 주연은 입을 다물었다. 승우의 가물가물한 눈빛이 꽤 오래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어. 정략혼으로 만나서 순종적인 우리 어머니와 다르게 그 여자는 나서서 노래를 부르고 자유연애도 하고 술도 그렇게 잘 마셨대.”

“.....”

아버지는 그 여자를 사랑했지만 감히 정략혼을 거스를 수 없었어. 그 여자에게 고백할 용기도 없었지.”

 

자조하며 웃는 승우에게서 자식은 부모의 싫은 모습만 닮는다며 서글프게 말하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 여자는 자유연애로 술도가 집안의 남자를 만나 아들을 낳았어.”

“.....”

맞아. 그게 이재현이야. 주연이 너도 알다시피 우리 어머니는 재미가 없어. 다른 집 사모님들은 그렇게 표독스럽고 못됐던데.”

 

승우의 어머니는 오늘 저녁에도 끝끝내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사교 모임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그녀는 남들과 어울리길 거부하며 혼자만의 벽을 치고 살아왔다.

 

양관은 그 여자의 시아버지가 그 여자를 위해서 지은 거야. 눈물겨운 며느리 사랑이지.”

“.....”

아버지에게 켜켜이 불행이 쌓일수록 화살은 그 여자에게로 향했어. 제일 먼저 술도가를 무너트렸어. 아버지에게 행복은 티끌도 없었지만 돈만큼은 충분했으니까.”

“.....”

그 여자의 시부모, 남편이 차례로 죽고 이재현을 키워야 했던 여자는 우리 집에 와서 노래를 불렀어.”

“.....”

아버지가 노래 말고 자신의 침실로 그 여자를 부른 날, 여자는 우리 집에 오지 않고 실종되었어. 얼마 지나지 않아 한강에서 건졌지. 그 여자를 잃어버린 아버지의 다음 타겟은 누구였을까.”

 

승우는 말을 끊고 숨을 골랐다. 격정이 쌓인 승우의 숨소리가 조금 거칠었다. 주연은 문장 한 마디, 단어 한 톨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로 초연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승우의 다음 말을 아는 주연은 괴로웠다. 승우 역시 고통스럽다는 목소리로 이름을 쥐어 짜낸다.

 

이재현.”

“.....”

피는 못 속인다고 제 어머니 닮아서 노래를 곧잘 하는 이재현 후원한다는 핑계로 아버지는 이재현을 양관에 가두고 그이 인생을 쥐락펴락했어. 아니, 하는 중이지.”

그러면 결혼은? 어르신이 결혼을 허락하셨어?”

 

목구멍을 긁고 나온 말이 힘겹고 아팠다. 주연은 빌었다. 이재현의 인생에서 한 단락만이라도 행복하던 순간이 있어 달라고. 주연의 절박한 바람을 승우는 손쉽게 깨부쉈다.

 

아버지는 이재현에게 풍객인 남편을 갖다 붙이고 피의 저주를 받았다는 양관 소문을 흘려서 이재현이 어떠한 일도 할 수 없게 만들었어. 그래야만 곤궁한 이재현에게 우리 집안만이 유일한 동아줄일 테니까.”

.”

주연아.”

 

줄곧 응접실 테이블의 기하학적인 무늬를 눈으로 그리던 승우가 처음으로 주연과 시선을 마주쳤다. 주연은 기나긴 탈력감에 시달렸다. 뼛속까지 안다고 자부했던 친우가 어디에도 없었다. 승우가 한 번 더 주연을 불렀다.

 

주연아.”

.”

너와는 동경 유학 시절부터 알았지만 나는 이재현을 어렸을 적부터 봐왔어.”

 

네가 이래도 이재현을 받아들일 수 있겠냐는 경고로 읽혔다. 습하던 승우의 얼굴이 버석거렸다. 주연아.

 

나는 네가 이제 그만 양관에서 나왔으면 좋겠다.”

?”

하숙집, 아니 집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구해줄게. 양관에서 나와.”

“.....”

요즘 이재현이 아버지 몰래 자신을 받아줄 레코드사를 찾는다는 소문을 들었어. 소문이 아니겠지. 더 이상 이재현을 흔들지 마.”

 

재차 얼굴을 쓸어내리던 주연이 일순 손짓을 멈췄다. 주연도 모르는 일이다. 재현에 관해서 아는 게 뭔가 싶다.

 

경성 바닥에서 이재현을 아버지에게서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

“.....”

나는 그이가 불쌍해.”

 

승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응접실 의자가 지익, 바닥과 긁히는 소리를 만들었다. 출처는 할 말을 끝낸 승우가 아니라 주연이다. 다음을 예상한 승우가 단정하게 눈을 감았다.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주연은 위협적으로 주먹을 꾹 쥐었지만 차마 승우를 때리지 못했다. 대신 주연의 목소리가 볼썽사납게 떨렸다.

 

승우야. 너는 뭐 했어.”

“.....”

불쌍하다는 이재현이 어르신 집에 와서 억지로 노래 부를 때 너는 뭐 했냐고!”

 

덜덜 떠는 주연은 제 뺨을 훔쳤다.

 

승우야. 내 친우 승우야. 너 정말 작은 사장님이 되었구나.”

“.....”

네 아버지랑 똑같은 사람이 돼버리면 어떡해 승우야.”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런 주연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겠는 승우는 끝내 고개를 돌렸다.

 

 

 

 

 

 

 

 

 

 

늦은 밤 주연은 양관으로 달렸다.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사용인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는 주연을 모두 어리둥절하게 지켜봤다. 양관이 언덕 위에 있는 탓에 주연은 숨을 헐떡거렸고 다리가 자꾸 풀렸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을 때 무릎을 딛고 거칠게 호흡하던 주연은 휴식도 잠깐 다시 뛰었다.

 

저 멀리 불 꺼진 양관이 보였다. 아무리 경성이 변했다고 한들 양관은 홀로 이질적이다. 집주인을 닮아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다. 주연 또한 밤에 보면 께름칙하다고 생각하던 양관이 이제야 외로워 보였다.

 

으스스한 양관, 피의 저주를 받았다는 양관, 이재현이 있는 양관, 그곳이 낙원이 아니더라도 이제 주연에게는 상관없다.

 

재현의 방부터 찾아가려다 주연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재현이 거실에 있었다. 잠들지 못하고 거실 소파에 오도카니 앉아있다. 주연의 기척을 읽어놓고 재현은 요지부동이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주연에게서 좋은 향내가 아닌 바깥 냄새가 났다. 때 이르게 밤이슬 맞은 마당의 잔디를 헤치고 온 까닭이다. 축축하게 머금은 주연은 거침없이 재현의 뺨을 붙잡고 입술부터 맞췄다.

 

!!”

 

놀란 재현은 버둥거렸다. 손쉽게 제압한 주연이 입술을 핥으며 입안까지 머금고 싶어 했으나 그럴수록 재현은 입을 꽉 다물었다. 완곡한 거절을 비춰도 주연은 개의치 않고 입술을 핥고 빨았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몸이 앞선 적 있었나 기억나지 않았다. 술 한 방울 마시지 않은 머리가 어떻게 된듯했다. 거세게 싫은 소리를 내지르며 저항하던 재현이 차츰 얌전해졌다. 양손을 결박했던 주연은 한 손으로 재현의 뒷덜미를 잡고 다른 손으로 허리를 받쳤다. 소파에 무릎을 붙이고 조금 더 진득하게 입을 맞추는 주연에게 재현은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힘껏 밀치자 방심했던 주연이 나가떨어졌다.

 

숨을 몰아쉬는 재현은 헷갈렸다. 온종일 긴장했던 사람치고 한 꺼풀의 수마도 몰려오지 않아 차라리 밖에 나와 주연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순간이 꿈결인지 헷갈린다. 눈빛이 반짝하더니 재현은 가차 없이 주연의 뺨을 때렸다. 꿈결이 아니어서 서러웠다.

 

나를 대체 뭘로 보는 거야!!”

재현

오늘 거기서 나를 봤다고 너까지 날 그렇게 취급하는 거야!!!”

 

재현의 눈 주변이 붉었다. 노기와 분통으로 점철된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제발 남들에게 곁을 쉬이 내주지 말자고, 골백번 단념한 재현에게 술수를 부리듯 나타난 주연이었다. 이승우와 엮인 사람이라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고 스스로 주의를 시킨 보람도 없이 주연을 의식하고 그의 반응에 간절해지는 자신이 싫었다. 결국 이리 될 거였는데.

 

나는 그이가 불쌍해. 어렴풋이 승우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윽윽거리는 재현은 정말 불쌍하게 울었다. 여러 갈래로 흐르는 눈물이 가여워 닦아주려 하자 재현은 고개를 돌렸다.

 

나는 당신이 불쌍하지 않아.”

 

그 말에 재현이 주연을 쳐다봤다. 경련하듯 떨리는 입술을 아프게 씹었다. 불쌍하지 않다는 사람치고 주연은 꽤 재현을 애달프게 바라본다.

 

당신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치들이 불쌍하지.”

“.....”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당신은 안 들리겠지. 그러니까 오늘은 나가서 잘게요.”

 

몇 걸음만으로 거실을 가르고 들어온 주연은 또 시원스럽게 일어나 재현에게 등을 보였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주연을 보내면 영영 놓칠 것 같다는 안 좋은 상상을 했다. 재현은 금방이라도 나갈 태세인 주연의 셔츠를 붙잡았다. 의아하다는 듯 내려보는 주연에게

 

“.....”

여기 있어요.”

“.....”

나만 놓고 가지 말아요.”

 

아주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단잠을 잤다. 어렴풋하게 잠에서 깼을 때 눈앞이 희뿌예서 여러 번 눈을 깜빡여야 했다. 재현은 살짝 몸이 답답하다고 느꼈는데 그럴 만했다. 주연이 저를 옭아매고 있었다. 이불 아래 다리끼리도 얽혀서 재현은 불편한 소리를 냈다. 일평생 혼자 독차지한 시간이 더 길었던 침대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 허리를 감싼 주연의 팔을 떼어내려다 재현은 잠자코 내버려 뒀다.

 

포근했다. 햇볕에 말린 이불보다 더. 이불보다 낫다는 취급을 받은 걸 주연이 알면 섭섭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재현이 할 수 있는 최상급의 칭찬이다. 주연은 밤새 재현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가 토닥거려주면 신기하게 세상 시름이 달아났다. 눈썹, , 콧잔등, 인중, 입술을 차례로 어루만지는 재현에게 주연 역시 편안했다. 두 사람 모두 잠들고 나서도 어떠한 손길이 자신에게 머무는 기분을 느꼈다.

 

침대에서 더 뭉개고 싶었지만 슬슬 일어나야만 했다. 주연이 더 자도록 재현은 조심스럽게 몸만 빠져나왔다. 당연히 깊게 잠들었다는 생각에 주연을 등진 재현은 잠옷을 갈아입었다. 재현은 잠옷을 정리하려다 말똥말똥한 눈을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어느새 모로 누운 주연이 씨익 웃었다.

 

어딜 보세요?”

 

새침하게 말이 나왔다. 재현도 스스로 약간 깍쟁이 같았다고 금방 후회했다. 주연은 장난이 묻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천장을 보는 중입니다. 여긴 제 방이랑 벽지가 다른가 해서.”

눈동자가 천장에 있지 않은데요?”

제가 약간 사팔뜨기라서

 

주연은 끝까지 능청스럽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재현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잠에서 깬 척을 할 수 있나 재고 있었다. 재현이 침대를 빠져나가기에 슬쩍 실눈을 떴다가 곧고 고운 나신을 보고 적잖이 당황했다.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정염이 들끓는 주연의 속내도 모르고 재현은 잊기 전에 챙긴다는 몸짓으로 옷장에서 선물상자를 꺼냈다. 눈을 비비는 주연에게 내밀었다. 자기 거냐고 손가락질하는 주연에게 재현은 끄덕였다.

 

구두가 들어 있었다.

 

첫 출근 선물로 산 거였는데 너무 늦었죠.”

 

멋쩍게 제 쪽으로 당기는 선물상자를 주연은 도로 뺏어왔다. 그러잖아도 새로 사야지 벼르고 있었는데 재현이 보기에도 제 구두가 형편없었나 주연은 조금 부끄러웠다.

 

고마워요. 그런데

?”

신발을 선물하면 애인이 도망간다는데.”

애인?”

 

재현은 의아한 얼굴로 쳐다봤다. 재현의 반응에 되레 주연이 의아해졌다. 못마땅한 듯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면 우리가 애인 사이가 아닌가요?”

 

정중하게 묻는 말에 장난기가 배었다. 주연은 일부러 너무하다는 투로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쩔쩔매는 재현이 애인, 애인, 하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어 번 말을 곱씹었다. 어색해서 제 입술을 더듬는 재현에게 주연은 입을 맞췄다. 밤새 서로 쓰다듬으면서 열심히 사용한 건 손뿐만이 아니라 하룻밤 사이에 입맞춤이 꽤 능숙했다. 입술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도망가는 재현을 쫓아가며 주연이 입을 맞췄다.

 

, 발은 춤추는 데나 쓰는 줄 알았다.

 

 

 

 

 

 

 

 

 

 

정말 내가 마당에 손대도 괜찮아요?”

 

부엌에서 나오는 재현이 끄덕거렸다. 인제 와서 안 된다고 하면 사놓은 묘목들을 다 버릴 셈인가. 재현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연은 장갑을 끼고 나섰다. 며칠 전 묘목을 들고 들어오는 주연에게 날도 추워지는데 무슨 나무를 심냐고 말하려다 말았다. 주연이 먼저 글쎄 농원 사장님이 가을에 무슨 나무를 심냐고 타박하시는 거 있죠, 하고 툴툴거렸기 때문이다. 몇 날 며칠을 걸쳐 양관 한 켠에 묘목이 일렬종대로 줄을 지었다.

 

주연은 쉬는 날이 되어서야 소매를 걷어붙였다. 도와주겠다는 재현을 만류하면서 이따가 마당에서 티타임을 갖자고 청했다. 부엌에서 커피와 간식을 챙기던 재현은 목을 빼고 마당을 살폈다. 요령 없이 세워진 묘목은 심어졌다기보다는 땅에 꽂혔다는 감상을 준다. 불붙으면 잘 타겠다.

 

어때요?”

, 가지런하네요.”

그게 끝?”

 

요즘 기분으로는 주연이 양관 마당에 말뚝을 꽂아놓는다고 해도 좋았다. 얼추 마당을 정리하고 안 쓰는 식탁보를 펼쳤다. 건장한 남자 둘이 소꿉장난하는 모양새여서 좀 웃기다고 생각했다. 재현은 혀가 저리도록 달게 꿀을 묻힌 떡과 커피를 가져왔다. 커피는 주연이 좋아했다. 몇 번 끽다점에 같이 가기도 했는데 주연은 까맣게 탄 콩을 사 와서 직접 갈아먹기도 했다. 커피가 향긋하다는 주연의 감상평을 해치고 싶지 않아 재현도 따라 먹기는 하지만 영 취향은 아니다.

 

커피를 어디서 처음 먹었어요?”

동경에서?”

누구랑?”

승우.”

 

주연은 슬쩍 재현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재현은 승우에게 불편한 감정이 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불편하고 어색한 감정이 새끼를 쳐서 이승우가 원망스럽거나 때려죽이고 싶다거나 하진 않았다. 언젠가는 주연과 재현, 두 사람이 풀어야 할 응어리였으나 일단 묻어두기로 했다. 조급해하지 않기로 한 무언의 약속이 있다.

 

내가 해본 것 중 좋은 건 보통 승우랑 같이 했어요.”

그렇구나.”

이제는 재현이랑 해야지.”

재현이?”

 

승우와 동갑이니 저보다 한 살 어리다는 건 애저녁에 알았지만 굳이 형 대접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때는 주연에게 벽을 치고 어려워하자고 마음먹었으니까. 형 대접을 받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건방진 건 싫다. 주연은 얄밉게 샐쭉 웃으면서 재현의 시선을 피했다.

 

갑자기 마당에 나무 심을 생각은 왜 했어요?”

 

뜨거운 커피를 훌훌 털어 마신 주연은 재현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아래에서 올려다봐도 참 잘생긴 얼굴이다. 주연은 재현의 물음에 마당이 너무 삭막해서 귀신 나올 것 같다고 속으로만 진실을 알렸다.

 

그냥. 봄에 꽃이 피는 걸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아서.”

예쁘겠다.”

 

저게 꽃나무였냐고 뒤늦게 알아차린 재현은 주연을 내려보다 눈이 가늘어졌다. 주연은 실실 웃으면서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주연만이 가진 분위기는 색달랐다. 지역 유지 집안 출신이라 그런지 그 나이 또래답지 않게 진중하고 어른스럽다가도 이럴 때 보면 짓궂게 웃는 얼굴이 앳되었다.

 

당신이 더.”

 

입술을 뻐끔거리는 주연에게 그 말만큼은 하지 말라고 눈으로 경고하지 않았느냐고 재현은 타박했다. 계속 말하려는 주연의 입술을 가로막다가 손이 붙잡혔다. 재현은 주연의 커다란 손에 깍지를 끼웠다. 주연을 이루는 것 중 단단한 손이 특히 좋았다. 고생 한 번 안 해봤을 손은 무용을 한 탓인지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였다. 재현은 손금을 긁어보고 넓적한 손톱을 문질렀다.

 

골똘하게 손을 살피는 재현은 주연과 눈이 마주쳤다. 또 근사하게 웃는 주연을 오래 쳐다보지 못하고 재현이 먼저 눈을 피했다. 주연은 부끄러워 그런 거라고 여겼지만 재현은 돌연 깨달아버렸다.

 

죽은 남편과 결혼할 마음이 생긴 건 재현이 졸렬하고 구차해서다. 타고난 한량이 스스로 꾸민 너그러움과 여유를 훔치고 싶었다. 그와 결혼한다면 재현은 양관의 저주에서 벗어나 남편의 세계로 종속되리라 믿었다. 그렇게 남편의 요행을 빌려다 치장했는데 재현은 그걸 행복이라고 불렀다.

 

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괜찮아요?”

 

늘 주변에 사람이 많은 주연이 양관 마당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더러 강아지 닮았다고 손가락질이나 하고 있어도 괜찮은지 물었다. 그러자 주연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쉬는 날이니까 이렇게 시간을 보내야죠.”

 

, 이번엔 주연이 이재현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주연을 제 불운으로 치장시킬 순 없다. 재현은 입이 썼다. 한참 전에 넘긴 커피 탓을 해본다.

 

 

 

 

 

 

 

 

 

 

고향에 있는 부모님에게 연락이 왔다. 친척의 결혼식에 자리를 지키라고. 착실하게 살고 있으니 돈을 보내달라는 편지는 줄곧 무시하면서 장남 노릇을 바란다. 우리 부모님 아들로 살기 녹록지 않다고 주연은 혀를 찼다. 경성에 재현을 놔두고 내려가기 싫었지만 수금 차원에서 다녀오기로 했다. 같이 가겠느냐고 넌지시 재현에게 물었을 때 그는 손을 내저었다. 주연 역시 재현이 넙죽 따라오리라 예상하지 않고 해본 말이었다. 그렇지만 거절하면서 겁에 질린 얼굴을 하는 재현은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

 

주연이 떠나는 날, 재현은 그에게 가면서 먹으라고 도시락을 싸줬다. 경성이 아닐 뿐 주연의 고향은 멀지 않은 데라 과장을 조금 보태면 느지막이 먹은 점심이 소화되기도 전에 마을 어귀에 도착할 수 있다. 양관을 벗어나 본 적 없는 재현은 주연의 고향이 얼마나 멀리 떨어진 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주연은 마음이 쓰렸다.

 

, 가기 싫다.”

 

투정 부리는 주연의 등을 밀었다. 재현은 가서 부모님께 인사 잘하고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고 주연을 단속했다. 주연이 어린아이인 냥 굴었다. 조금 있으면 친우와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할 기세였다. 혹여 그의 부모님이 제 아들 잘 못 먹고 다닌다고 생각할까 봐 살이 내렸는지 확인하려 재현은 주연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주연은 꼭 부부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생각을 고치지 않았다.

 

너무 걱정 마요. 금방 와요.”

그래도

여보. 다녀올게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낯부끄러워하는 재현에게 입을 꾹 맞췄다. 재현은 집을 나서는 주연을 오래도록 배웅했다. 간지러운 낌새를 느낀 주연이 뒤돌아볼 때마다 재현은 끈질기게 손을 흔들었다. 요즘 유행하는 신파극의 여주인공처럼 주연은 왔던 길을 거슬러 뛰어 올라가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어서 참았다.

 

고향의 분위기는 잔치가 있는 마을답지 않게 흉흉했다. 한 다리 건너면 어렵지 않게 모두 구면이 되는 마을 사람들은 오랜만에 얼굴을 비춘 주연에게 반가운 한편 어딘가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다. 눈빛의 주체를 오해한 주연은 부러워서 그런 줄 알았다. 뒷말은 부러울수록 많은 법이니까. 친척이 결혼하는 상대는 이름난 집안의 여식이라고 했다.

 

주연아. 아버지한테 인사부터 드려.”

 

오자마자 등짝부터 맞을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주연을 보자 어쩔 줄 몰라 했다. 마치 속으로만 감내했던 감정이 바깥으로 터진 듯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주연은 웃음기를 지웠다. 끽해야 결혼하라거나 가업을 물려받으라는 잔소리일 줄 알았다.

 

착잡한 표정의 아버지는 인사받을 생각은 않고 주연에게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이재현과 관련된 편지일까. 주연이 예상할 수 있는 범주는 그 정도였는데 편지에는 뜻밖의 내용이 담겨있었다. 아버지는 오래전에 끊은 담배를 방 안에서 피웠다.

 

분명 방법이 있을 게다. 너무 심려치 말거라.”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얼굴이 더 어수선했다. 편지에는 요청이 들어 있었다.

 

시대는 전쟁을 목전에 뒀다. 만주와 중국 본토를 옮겨 다니며 전선 위문 공연을 계획 중이니 주연에게 위문공연단의 단장이 되어달라는 청이었다. 말이 좋아 요청이지 강제나 다름없다.

 

문간을 넘지 못하고 맴돌던 어머니는 울음을 터트렸다. 크게 울지 못하고 울음을 집어삼키는 어머니의 모습이 이상하게 재현과 겹쳐 보였다. 그냥 이 순간 재현이 생각났는데 좋은 구실을 갖다 붙인 것일지도. 주연은 생각에 잠겼다.

 

 

 

 

 

 

 

 

 

 

주연이 고향에 간 지 열흘째인데 연락이 없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만난 부모님, 고향 친구들과 해후를 푸느라 그런 줄 알았다. 그래도 이렇게 뜸할 일인가. 재현의 걱정이 쌓였다.

 

“.....”

 

혼자 살았던 집이 이렇게 쓸쓸했나 재현은 주연의 빈자리를 느끼고 몸서리쳤다. 외로움을 참지 못하고 거실에 나와 주연을 기다렸다. 세운 무릎에 이마를 기대고 느린 한숨을 쉰다. 나의 의심은 나를 가리킨다. 주연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다고 스스로 위안했다. 그럴 만하다고 주연을 대변했다. 가끔 사람은 그른 선택을 하기도 하니까. 주연이 제자리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늦은 밤 대문의 차임벨이 눌렸다. 다급하게 뛰어나가는 재현 앞에 승우가 서 있었다.

 

아버지가 식사에 초대하셨어요.”

“.....”

 

누군 줄 알고 기대했던 재현의 낯빛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이 밤에요? 떠오르는 말을 참았다. 적의를 드러낼 뻔해서 어금니를 물었지만 이미 승우는 알아차렸다. 큰 사장님은 와서 노래 부르란 뜻을 줄곧 승우를 통해 이렇게 전했다.

 

응접실에서 노래가 끝나면 큰 사장님은 재현을 따로 불러 억지로 술을 마시게 했다. 어쩌면 할아버지의 술도가가 모든 비극의 씨앗이라 생각하는 재현은 병적으로 술을 싫어하고 또 못 마셨다. 남편이 술에 절여져 죽은 이후 불신은 더욱 심해졌다. 큰 사장님은 그런 재현에게 어머니와 다르다고 말하면서 술을 권했다. 우습게도 술이 조금씩 늘었다.

 

, 그게

 

재현의 말끝이 볼품없게 떨렸다. 마지막으로 본 큰 사장님은 조금 달랐다. 응접실에서 주연과 재현이 마주친 날, 그간 술 마시는 재현을 빤히 살피기만 하던 큰 사장님은 처음으로 재현의 뺨을 어루만졌다. 좀처럼 술잔의 수위가 줄지 않고 넋을 놓은 재현을 불렀다. 재현은 그가 제게서 어머니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필연적으로 느꼈다. 그날은 그 선에서 끝났지만 큰 사장님의 손길에 분명 색정이 담겨 있었다.

 

재현은 부러 기침했다. 목을 긁어 쇳소리를 만들었다.

 

감기에 걸렸어요. 오늘 하루만 어떻게

 

오늘은 어떠한 사달이 나리란 걸 직감했다. 염치없게 주연이 보고 싶었다. 꾀를 내는 재현에게 승우는 설핏 웃었다. 노골적인 비웃음이 섞여 불쾌했다.

 

이주연 때문에?”

“.....”

재현씨

?”

주연이는 경성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아니,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재현씨 곁이 아닐 거예요.”

 

승우는 못마땅하게 혀를 굴렸다. 뭉뚱그린 말을 재현이 알아들어도, 알아듣지 못해도 화가 날 것 같았다. 마음이 이리저리 나부꼈다. 분명한 건 가장 좋아하는 친우와 곁을 내어주고 싶던 이에게 자신은 지금 악역을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왜 머무르지 못하고 달라져야 하는지 승우는 서글펐다.

 

지금 주연이는 입장이 난처해요.”

, 왜요?”

주연이는요

 

재현은 승우에게서 전선 위문 공연 얘기를 듣게 되었다. 할 말을 잃은 재현은 끔찍한 혐오감에 휩싸인다. 생사와 엮인 주연이 고작 자신 때문에 고향에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빈약한 투정을 했던 일이 역겨웠다.

 

어떡해요? 주연씨 어떡해요? 작은, 아니지 사장님이 어떻게 도와줄 수 없는 일이에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애원하는 재현에게 승우는 고개를 저었다. 술은 사치품이고 원료는 곡식이다. 여태 시대를 등에 업고 살아남았다지만 이제 승우의 양조장도 위태위태했다. 승우는 입안에서 혀와 함께 굴러다니는 말을 꺼냈다.

 

그런데 총독부 보안과장의 부인이 주연이를 사위 삼고 싶다는 얘기를 흘렸대요.”

“.....”

보안과장 딸 쿄코상과 결혼한다면 주연이는 위문 공연 따위 가지 않아도 되겠죠.”

 

재현은 그날 응접실에서 주연과 나란히 앉은 일본인 여자를 기억해냈다. 서로 몸을 낮춰 대화하는 이상적인 남녀의 그림에 재현이 인정하기 싫은 마음을 붙잡고 혼란스러워하던 날이기도 했다. 승우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주연이 부모님 성격에 일본인 며느리 마뜩잖겠지만 어쩌겠어요. 아들이 전쟁터를 돌아다니는 것보다 낫겠죠.”

“.....”

아버지에게는 재현씨가 독감에 걸렸다고 전할게요.”

 

승우는 다 안다는 눈빛으로 재현을 훑었다. 순식간에 까발려진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번에도 같은 핑계는 어려울 거예요.”

 

승우를 배웅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가 있을 때는 제대로 벌어지지 않던 입술이 볼썽사납게 뭉개졌다.

 

이건 양관의 저주다. 아니, 양관에 사는 이재현의 저주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는 저주였다. 재현은 현관에 쓰러지듯 엎어져 울었다. 목적지 없는 원망과 분노를 동력으로 하여금 바닥을 두드려가며 울었다.

 

“.....”

 

전력이 바닥난 재현은 현관 앞에 드러누웠다. 양관은 죽어야 떠날 수 있다. 정신이 혼미했다. 양관에 머물렀던 이들은 결국 죽음으로써 여길 벗어났다고 결말 하나를 찾았다. 이 삶 속에서 이재현에게는 퇴로가 없다.

 

마음을 굳힌 재현이 누워서 현관 신발장을 쳐다보는데 그의 눈꼬리 끝에서 눈물이 삐죽 흘렀다.

 

 

 

 

 

 

 

 

 

 

재현씨 뭐해요?”

 

승우를 전송하지 않아 미처 잠그지 못한 현관문이 열렸다. 재현은 그 새로 들어오는 주연을 홀린 듯이 쳐다봤다. 재현이 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하고 경성에 돌아온 주연은 현관 앞 소란에 적잖이 당황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웅크리고 있는 재현이 어디 아픈 줄 알았다. 발에 익지 않아 벗겨지지 않는 구두 뒤축을 아깝게 밟았다.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재현은 으어으어, 볼썽사납게 울며 주연에게 팔을 뻗는다. 주연은 예측할 수 없는 행동에 얼굴을 찡그리는 대신 재현을 부둥켜안았다. 흐느끼는 어깨를 토닥였다.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조금 진정된 재현은 여전히 울먹거렸다. 품에서 떼어내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재현은 단단하게 주연의 등을 붙잡았다.

 

옷도, 가방도 다 두고 갔는데요.”

구두가 없잖아요.”

 

재현은 주연의 구두를 내려다봤다. 주연의 첫 출근 겸 피아노를 조율해준 답례로 선물한 새 구두였다. 주연은 어쩐 일인지 재현이 사준 구두를 좀처럼 신지 않았다. 그 역시 재현이 아침마다 무슨 구두를 신었는지 확인하는 절차가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시선을 따라 주연의 고개가 떨어졌다. 한숨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게요. 구두를 두고 갔으면 돌아오지 않을 수 있었는데요.”

 

그렇게 말하는 주연의 표정이 쓸쓸해서 마음이 철렁했다. 단단히 상처받은 기색의 재현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주연이 후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연을 끌어안았던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구두를 볼 때마다 생각나서, 보고 싶어서 왔어요.”

 

허망한 표정과 달리 주연은 재현에게 진하게 키스했다. 말과 행동이 다르다고 해야 할지, 같다고 해야 할지 재현은 헷갈렸다. 주연의 의중을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뺨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을 엄지로 닦아낸 주연은 재현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시선이 마주쳤는데 주연에게서 대단한 결심이 느껴졌다.

 

재현씨. 시간이 없어요. 여길 떠나요. 우리.”

?”

지금 당장 양관을 떠나야 해요.”

 

믿기 힘들었다. 오늘따라 울음 끝이 길어서 훌쩍거리는 재현은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눈빛으로 주연을 재촉했다. 이재현의 인생에서 감히 양관을 떠날 수 있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장 떠날 준비를 하려는 듯 몸을 들썩이는 주연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재현의 목소리는 애원조였다.

 

그럴 수 없어요. 나는, 나는 떠날 수 없어요. 나는 주연씨가 어떤 선택을 해도 괜찮아요. 그게 주연씨가 사는 길이라면 기꺼이 따를게요. 나는 정말 괜찮아요.”

“.....”

그 일본인과 결혼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래야만, 그래야만 주연씨가 사는 거잖아요. 나는 정말

언제까지 괜찮을 건데요! 어디까지 괜찮은데요!”

 

주연이 언성을 높이는 일은 흔치 않았다. 놀란 재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는데 주연은 찬찬히 그를 설득했다.

 

내가 결혼해도 괜찮아요? 그럼 양관 앞에 신혼집을 차리는 건? 당신 보는 앞에서 아들딸 낳고 잘 살아도 괜찮아요? 당신은 마음에도 없는 사람들 앞에서 부르고 싶지 않은 노래 부르면서 살아도 괜찮고? 정말로? 아무도 반겨주는 사람 없는 빈집에 술 취해서 들어와도 괜찮아요? 언제까지 이승우 집에서!”

흐으

나는 안 괜찮아요. 나는 그렇게 살기 싫어서 떠나자고 하는 거예요. 잘 생각해 봐요. ?”

 

조용히 흐느끼는 재현과 달리 주연은 볼 안쪽의 살을 아프게 씹어 눈물을 참았다. 자신은 어떤 각오로 고향을 도망치듯 떠나왔는데 그 맘을 몰라주는 재현이 야속하다. 또 그가 얼마나 긴 세월에 거쳐 양관 밖으로 벗어날 수 없는 천치가 되었는지 실감했다. 두 사람에게 허락된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주연은 초조한데 재현은 천천히 숨을 고른다.

 

우리가, 우리가 양관을 떠난 사실이 알려지면 나도 죽고 주연씨도 죽어요.”

 

그러면서도 붙잡은 주연의 셔츠 자락은 놓지 않았다. 어쩌자는 건지 스스로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 재현의 얼굴에 미약한 짜증이 서렸다. 자신이 싫고 질렸다. 그때 주연은 붙잡힌 손을 단호하게 떼어냈다. 얼떨떨한 재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 두 번 죽을 생각은 못 해요?”

 

주연은 재현이 신발장에서 찾아냈고 끝내 행하지 못하고 떨어트린 끈을 내려다봤다. 원망하는 눈빛이 서늘했다. 그도 잠깐 주연은 다시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요.”

“.....”

?”

 

머뭇거리던 재현이 주연의 손을 절박하게 붙잡았다. 이제부터 괜찮지 않을 연습을 할 차례였다.

 

 

 

 

 

 

 

 

 

 

승우가 그 소식을 들은 건 아침나절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기력을 포기하는 승우는 무기력하게 부엌으로 걸었다. 새벽부터 바쁜 어머니야 그렇다 치고 식사 자리에 아버지가 없어 의아하다. 사용인은 승우 몫의 뚝배기 뚜껑을 열었다. 계란찜이 넘치도록 끓었다. 상석에는 아예 식사가 차려져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머, 작은 사장님 소식 못 들으셨어요?”

 

사용인의 말맛이 튀었다. 말이나 사건이 남의 입을 빌려 발설되는 일은 다소 즐겁고 들뜨는 법이다. 승우는 슬쩍 다른 사용인들의 용태를 살폈는데 하나같이 쑥덕거리고 있었다.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무슨 소식?”

양관에 큰불이 났대요.”

“.....”

큰 사장님도 놀라서 가셨어요. 어찌나 큰불이었는지 우리도 창문을 못 열고 있어요.”

 

발설을 선택받은 어린 사용인 하나가 조잘거렸다. 승우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계속 말하고 싶어 했다.

 

그래?”

작은 사장님 친우분이 양관에 살지 않으셔요? 그 왜 훤칠하고 잘생긴

그 친구는 고향에 갔어.”

 

승우가 사용인의 말을 가로챘다. 부드러운 계란찜을 씹는 일조차 입이 깔깔해서 승우는 물만 마셨다.

 

그렇군요. 그렇담 다행이네요.”

?”

한목숨이라도 살았으니 다행이죠.”

“.....”

어찌나 큰불이었는지 아무것도 못 건졌다는데요. 그 집에 살던 이도 틀림없이 죽었을 거라고

 

어린 사용인은 이 집안의 부엌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승우와 재현의 접점을 알 리 없다. 우습게도 아는 사용인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작은 사장님은 작은 사장님일 뿐이라 큰 사장님 없다고 풀어진 사용인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저들끼리 모여 풍문을 뭉쳤다.

 

이건 양관의 저주라고, 기어이 한 집안의 대를 끊어놨다고.

 

일장연설을 들어줄 필요가 없는 승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끄는 소리에 수군거림이 멎었다. 승우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차린 사람처럼 사용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붙잡았다.

 

식사 안 하세요?”

아버지도 안 계시고 입맛이 별로 없네.”

 

승우는 부엌에서 나갔다. 무기력한 걸음으로 슬리퍼가 직, , 바닥과 마찰했다. 승우가 사라지자 부엌은 원래 그들이 주인이었다는 냥 사용인들은 머리를 맞댔다. 한참 낮춘 목소리로 그래도 양관집 아들과 안면이 있는 사이인데 너무 아무렇지 않다고 구설을 나눈다.

 

“.....”

 

방으로 돌아가던 승우는 걸음을 멈췄다. 사용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서가 아니다. 방으로 가는 복도에 서서 하늘을 쳐다봤다. 이 시간이면 늘 환기를 목적으로 열어두던 창문이 꼭꼭 잠겼다. 양관에서의 대화재로 재가 덮여 희뿌연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모두의 눈을 가리고 양관이 사라졌다. 승우는 손목시계를 매만졌다. 습관이 되어 일어나면 손목시계부터 걸쳤다.

 

지금쯤이면 어디까지 갔으려나.

 

 

 

 

 

 

 

 

 

 

물을 좀 얻을 수 있을까요?”

그럼요.”

 

중년의 여인은 물을 얻으러 온 남자에게 흔쾌히 물을 따라준다. 당장 물을 마실 줄 알았는데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말하느라 흘러내린 머플러로 얼굴을 가렸다.

 

안사람이 배를 처음 타서 멀미가 심하네요.”

 

남자는 멀끔한 낯으로 샐쭉 웃었다. 고맙다며 여인에게 꾸벅 고개까지 숙여 인사했다. 여인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남자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남자다운 손에 들린 컵이 꼭 애들 소꿉장난처럼 보였다. 쏟지 않으려 조심히 걸어가는 폼이 기특하다.

 

엄마 뭘 봐?”

남편 복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없다더니

 

여인이 중얼거렸다. 어려서부터 명리학을 공부하던 할아버지에게 사주가 악독하다는 말을 곧잘 들었다. 그녀는 아들인 줄 알고 태어난 딸이었기에 할아버지의 헛소리를 쌀벌레 방귀 뀌는 소리로 넘겼다. 하지만 어째 영짐가방 지킬 생각 않고 퍼질러 자는 남편과 조금 전 남자에게 따라줬던 물병에 입을 대고 마시는 아들이 한심했다. 양껏 물을 마신 아들은 킁킁거렸다.

 

어디서 탄내 나지 않아?”

석탄 태우는 냄새겠지. 넌 그런 것도 몰라?”

 

여인이 아찔한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선체 한 켠에서 남자는 동그랗게 몸을 웅크리고 있다. 속이 울렁거려 게워내고 싶은데 먹은 게 없어 헛구역질만 했다. 남자가 골골대는 동안 그와 동행한 남자는 어디 가고 없다. 분명 뭘 가져오겠다고 한 것 같았는데 의식이 희미해서 금방 잊어버렸다. 그때 저 멀리서 남자가 다가온다. 큰 손으로 가리고 있어 손에 들린 게 뭔지 모르겠다.

 

남자는 웅크리고 있는 남자에게 조금씩 물을 흘려 먹었다. 맹물이 달게 느껴진다. 약간 정신을 차린 남자는 일부러 물을 남겼다. 컵을 들고 있는 남자에게 남은 물을 마셔달라고 재촉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물을 나눠 마셨다.

 

남자는 맨손으로 끙끙 앓는 남자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문질러 닦는다. 하나도 찝찝하지 않았다. 남자의 몸이 흔들려 더 멀미하지 않도록 그를 꼭 껴안았다. 멀리서 보면 그들은 한 몸처럼 보였다. 남자는 멀미로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도 남자의 큼지막한 손을 붙잡고 속삭였다. 물을 좀 마셨다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 이제 뭐하고 살죠?”

 

근심이 묻은 남자의 목소리와 다르게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서로의 손이 단단하게 얽혔다.

 

글쎄요. 나는 춤을 추고 당신은 노래를 불러요.”

 

당신만의 노래를.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