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사주팔자의 문제인가. 아니면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기라도 한 것일까. 하루가 멀다 하고 이런 수모를 겪는 데에는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생전 관심도 없던 명리학이나 미신 같은 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보고 싶어지는 이유는, 재현이 지금 배신감과 분노와 서글픔과 허무함 따위의 갖가지 감정에 휩싸인 채 후문 근처의 고깃집에 버려져 있기 때문이다. 앞에 놓인 소맥 잔을 부술 듯이 노려보던 재현의 눈빛이 이윽고 실의에 잠겨 시무룩해진다. 차라리 잔뜩 퍼마시고 기절이나 했으면 좋으련만, 건강하기 짝이 없는 재현의 간은 오늘도 눈치 없이 알코올 분해효소를 활발히 분비하고 있었다.
“손.”
“...어?”
“아프겠는데요.”
맥락 없는 말이 테이블을 건너왔다. 알아듣지 못해 잠시 멍을 때리다가, 가볍게 까닥 움직인 상대방의 턱 끝이 향하는 방향을 보고 깨달았다. 재현에게는 불편하거나 초조할 때마다 손톱을 깨무는 습관이 있었다. 남들 앞에서 내보이기에 썩 자랑스러운 면모는 아니다. 그래서 재빨리 테이블 아래로 엉망이 된 손톱 끝을 감췄다. 곧바로 맞은편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애들 어디 갔어요?”
“나갔어. 좀 전에.”
“화장실?”
“집에 갔을걸.”
“형만 두고요?”
“그 새ㄲ.....걔들이 언제 그런 거 신경이나 썼냐.”
쌓인 게 많아서인지 말이 삐딱하게 나갔다. 맞은편의 주연이 또 피식 웃는다. 재현은 그 웃는 얼굴이 어쩐지 좀, 고깝다. 해사하게 접히는 기다란 눈과 위로 살짝 말린 입꼬리. 보편적으로는 호감을 살 법한 용모이나, 어딘지 모르게 속을 알 수 없는 느낌이 있다. 항시 느긋하고 여유로운 걸음걸이와 부드러운 저음, 언뜻 무심한 듯한 눈빛과 조곤조곤한 말투 또한 그랬다. 아직까지 주연에게 심적으로 상당한 거리감을 느끼고 있는 재현에게는 주연이 매사에 과하게 ‘폼’을 잡는 걸로 보였다. 아니, 그렇게 보고 싶다. 달마다 여자친구를 갈아치우고, 아닌 척하면서 저 잘난 거 제일 잘 알고 있을 타입. 어떤 메커니즘으로 발동하는 방어기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저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부류라는 생각에 그간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경계심이 풀어질 줄을 몰랐다.
“못 쓰겠네.”
“뭐를.”
“걔들이요.”
“뭐.....어쩌겠냐. 한참 좋을 때라는데.”
“오, 형 완전.”
입술을 꾹 말아 넣고 커다란 엄지를 척 세운 주연이 대뜸 잔을 든다.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재현도 못이기는 척 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옛다, 하고 부딪쳐줬다. 거기서 대충 털고 일어나 깔끔하게 인사하고 집으로 향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남자답다 속이 넓다 연거푸 추켜세워주는 말에 혹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한 시간 전 천하의 배은망덕한 것들이 저에게 그러했듯, 빈 테이블에 주연 혼자만 덜렁 남겨놓고 가기가 영 찜찜해서였다. 그렇게 놈들이 소주와 맥주 6대 4의 비율로 몰상식하게 말아놓은 소맥을 얼떨결에 홀랑 털어 마셨다.
술이 약한 편은 결코 아니었다. 갓 성인이 되었던 스무 살, 재수를 결심하기 전 처음으로 영접한 알코올의 쓴맛이 기대와는 달리 전혀 제 취향이 아니었다. 그래서 즐겨 마시지 않을 뿐이었다. 소주보다는 그나마 맥주가 낫다. 그마저도 오백 한 잔 넘어가면 배불러 한다. 그래서 주종이 소맥이 되었는데, 머리끝까지 취해본 경험은 끽해야 두어 번 정도다. 그런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 같았다. 어색하기도 하고 짜증 나기도 해서 생각 없이 술을 물처럼 들이부었다. 이쯤 되면 아무리 건강한 간이라도 한계를 느끼게 되어 있다. 재현이 만취할 정도가 되면 나머지는 이미 전멸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주사에 대해서는 여태 알려진 바가 없었다. 게다가 필름이 끊겨버렸으니 본인 또한 잘 모르고 있지만, 사실 재현에게는 셀프로 고해성사를 하는 주사가 있다.
“죄가 밉지 사람을 미워하며언.....안 되는데에.....그치마안.....”
그리고 가끔은 고해성사가 대나무숲으로 급하게 방향을 틀기도 한다.
“솔직히 나는, 어? 쫌, 그래...”
뭐가요. 뭐가 좀 그런데. 식어 빠진 감자튀김을 우적우적 씹으며 주연이 대강 맞장구를 쳐줬다. 누가 봐도 재현은 취했다. 얼굴은 귀까지 빨갛고 눈은 완전히 풀려 있다. 피식 웃으며 재현을 관찰하던 주연의 상체가 저도 모르게 앞으로 점점 기울었다. 뭐가 어떻다는 건지 다음 말이 얼른 나오질 않아서다.
“이 시발.....망할 놈의....게이 새끼들.......”
켁. 쿨럭. 삼키다 만 감자튀김이 목에 걸려 기침하던 주연이 재빨리 앞에 있던 맥주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다가도 사레가 들려 다시 기침을 하는 바람에 테이블 위로 맥주 몇 방울이 흩뿌려졌다. 제 몸 가누기조차 어려워 뒤늦게 그런 주연을 눈치챈 재현의 미간이 있는 대로 찌푸려졌다. 그러고는 잔뜩 한심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더러워...
황급히 티슈를 뽑아 테이블 위를 정리한 주연이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재현을 마주 보았다. 재현은 먹지도 않을 골뱅이 소면을 젓가락으로 열심히 헤집는 중이었다. 심통이 나서 댓 발이나 나와 있는데도 여전히 얇은 입술이 있는 대로 삐죽댔다. 문득 지나간 노래 한 소절이 재현의 뇌리를 스쳤다. 봄이 그렇게도 좋냐 멍청이들아, 몽땅 망해라. 사랑에 눈이 멀어 뵈는 게 없는 친구들을 보며 느낀 외로움과 허전함이 분노의 시발점인가, 라고, 제삼자가 보기엔 충분히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맞은편의 주연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또 한 번 피식 웃으며 재현의 오른손과 자꾸 부딪치는 물컵을 저만치 밀어놓았다.
“한창 좋을 때라면서요. 이해한다며.”
“웃기시네! 징글징글한 새끼들 존나 바퀴벌레가 따로 없고요?!! 토 나와....”
그러나 재현의 분노는 그런 것들과는 포인트가 조금 달랐다. 하필이면 OT때 만나 가장 친해진 동기 녀석들 중 둘이 서로 눈이 맞아 붙어먹었다. 사내놈들끼리 눈이 맞았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 삼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까지 앞뒤 꽉 막힌 인간은 아니라고 자부했다. 비록 실제로 보고 겪는 건 처음이지만, 그래서 조금 놀란 건 사실이지만 충분히 이해하고 응원해줄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 염치도 수치도 모르는 게이 커플은 언제부턴가 호의를 권리로 알고 재현을 연막으로 써먹기 시작했다. 만날 때는 셋인데 정신을 차려보면 늘 재현만 혼자 남아 있었다. 오늘도 별 시답잖은 일로 재현을 불러내 놓고 저들끼리 시시덕대더니, 느닷없이 개싸움을 벌이다가 별안간 다시 쪽쪽 대며 사라졌다. 그중 한 녀석인 정은우가 고등학교 때부터 알던 친구라며 소개해 준 주연은 정외과였다. 기실 재현은 늘 의아했다. 같은 과도, 동아리도 아닌 녀석이 무슨 재미를 보겠다고 정은우가 부르는 대로 꼬박꼬박 나타나 커피값이며 술값을 보태는 것인지. 꼬실 만한 여자애라도 하나 있었으면 모르겠는데.
그즈음 얼굴에서 웃음기를 덜어낸 주연이 시선을 테이블 모서리쯤에 두고 물었다.
“형 호모포비아예요?”
“...어엉? 뭔? 포...?”
“호모포비아요. 게이 혐오하는 사람.”
재현의 눈동자가 대각선 위로 천천히 굴러갔다. 혐오? 혐오라......그건, 거기까진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하는 짓들이 괘씸하다 한들 걔들도 사람인데 그렇게까지 하는 건 좀 너무 박하고 인정머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없는 말을 지어내서 거창하게 하기는 또 싫었다.
“...좋아하진 않는 거 같은데.”
일반화의 오류라고 손가락질해도 상관없다. 태어나서 처음 본 게이들이 그게 다인데 수집할 표본이 달리 어디에 있었겠는가. 으음. 아니야. 게이들이 좀 유별난 것 같긴 해. 느닷없이 편협한 사고가 불쑥 몸집을 키웠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연애하는 녀석들은 있었다. 재현에게는 딱히 관심사가 아니었으나, 재현의 친구들은 늘 하나같이 필사적으로 여자친구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그런 녀석들도 김태영 정은우 이 진상들만큼 코앞에서 요란법석을 떨진 않았던 것 같다. 확실히, 게이가 좀 이상한 게 맞다.
“넌 게이 좋아해?”
“저요? 아니요?”
“그럼 호모...포....그거야?”
“아닐걸요.”
“뭐야 그게. 다 아니래.”
재현이 어깨를 좁히며 푸스스 웃었다. 취해서 그런가, 이주연과 단둘이 남겨져 있을 때마다 늘 본능적으로 앞세우곤 했던 경계심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 자꾸 웃음이 나고 실없어진다. 소면을 휘젓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맥주 한 모금을 더 마셨다. 그러다 맞은편의 주연과 눈이 마주친 순간 이유 없이 등골이 서늘해졌다.
“......”
반만 뜬 눈으로 저를 빤히 보고 있는 그 얼굴. 평소와 다를 것이라곤 없는데 묘하게 뭔가가 쎄-했다. 게이를 좋아하진 않고, 호모포비아도 아니라고 답한 건 저 역시 마찬가지면서 갑자기 이주연이 그렇게 대답한 건 너무나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논리가 마구잡이로 점프했다. 뭐가 이상하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는데, 그냥 촉이 그런데, 아무튼지 간에 이주연......
“너는....”
“네.”
“너도 게이야...?”
말로 뱉은 순간 냄비라도 들어 제 머리통을 내리치고 싶어졌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좆됐다. 괜히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절대로 대답을 들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 아니야, 됐어, 대답하지 마, 안 궁금해. 그렇게 말하며 두 손바닥을 펼쳐 만류하려고 했으나 술기운 탓에 뇌가 전달한 명령을 몸이 재깍재깍 수행해내지 못했다. 느리고 둔했다. 주먹 쥔 채 허벅지 위에 두고 있던 손을 미처 들어 올리기도 전에, 주연이 먼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고민 중이에요.”
...고민? 고민 중이라고? 게이냐고 물었는데, 맞다 아니다가 아니고 고민 중이라고...? 무슨 대답이 그래...? 제 입이 우스꽝스럽게 헤 벌어져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재현은 팔을 들다 만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형이 좋거든요.”
*
“알바비 받으면 바로 결제하게. 이게 낫냐?”
“이 가격대면 다 비슷한 거 아니야? 금방 망가져.”
“야 지금 있는 거는 중고라서 그렇다니깐. 사지 말라고? 너 허리 아프잖아.”
“어디서 나 생각해주는 척이야 시발 지 좋자고 사는 거면서. 콘돔은. 주문했어?”
“은우야 재현이 형 앞에서 그런 얘기까진 좀.....형 충격받을지도 모르잖아.”
“지랄. 매트리스는 되고 콘돔은 안 되냐? 우리 재현이 형 멘탈 그렇게 나약하지 않아.”
걍...존나 세상을 뜨고 싶다........라는 간절한 염원과 함께, 재현은 후드티 모자 아래 끈을 한계치까지 늘려 조이며 소파 안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가방 속 어딘가에 처박혀있는 귀마개를 꺼낼 기운도 의지도 없다. 늘 고데기로 칼같이 다려오던 머리카락도 제멋대로 꼬불거리며 모자 밖으로 기어 나와 그 존재감을 과시하는 중이다. 카페 알바생이 틀어놓은 과일차트 TOP100이 더 시끄러운지, 아니면 테이블 맞은편의 바퀴벌레들이 더 시끄러운지 가히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다. 다음 학기부터는 맹세코 저 새끼들이랑 시간표 안 짠다. 수강 신청 때 PC방도 같이 안 간다. 조용히 멀어질 거야. 니들이 눈치조차 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지만 확실하게. 근묵자흑이라고 했다. 이 게이 새끼들 옆에 계속 있다가는 무슨 이상한 물이 더 들지 모른다. 간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끝에 굳은 결심이 섰다. 까짓거 친구야 또 사귀면 되는 거고, 아니면 차라리 아싸로 살다 졸업하는 게 이보다는 낫겠지.
“간다. 끝나고 전화해 자기.”
“돈지랄 말랬어. 사지 마. 반품시켜버릴 거야.”
“우리 은우는 낯짝은 이쁘게 생겨가지고 말뽄새도 좀 이뻤으면 더 바랄 게 없겠는뎅.”
“난 니새끼가 지랄 좀 작작 했음 좋겠는뎅. 아 늦었다며! 빨랑 안 꺼져?!”
엉덩이를 걷어차이고도 좋다고 헤실거리던 태영이 재현에게 손을 흔들며 카페를 나섰다. 한 놈이 사라졌으니 이제 드디어 좀 조용해질 타이밍인가. 퉁퉁 부은 눈을 반쯤 감은 채 테이블 위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잡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그 상태로 허우적대며 휘젓고 있으려니 맞은편에서 은우의 무거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에휴. 어제 술 많이 마셨어? 꼬라지 진짜.....볼만하다.”
“......”
“이주연 안 되겠네. 적당히 하고 챙겨서 들어가랬더니 사람을 이 꼴로 만들었냐.”
불쑥 튀어나온 달갑지 않은 이름에 재현의 오른팔이 허공에서 정지했다. 필연적으로 아까보다 심기가 좀 더 불편해졌다. 걔가 뭔 보모도 아니고 누가 누굴 챙겨서 들어가냐. 니들이 뭔데 나를 걔한테 맡겨? 덕분에 어제 시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나 해?!
“야. 정은우.”
“엉?”
“너 이주연이랑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랬지.”
“그랬지? 왜?”
다분히 충동적으로 던진 질문이긴 했으나 물꼬를 트고 보니 이주연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졌다. 언제 봐도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지 않은가. 상체를 일으킨 재현이 테이블로 몸을 기울이며 목소리를 한껏 낮춰 물었다.
“걔도 남자 좋아하냐?”
형이 좋거든요. 그런 폭탄 같은 발언을 던져놓고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었다. 할 말도 잃고 중심도 잃어 하마터면 의자 옆으로 고꾸라질 뻔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더랬다. 그 뒤로는 기억이 드문드문하다. 집에 가겠다고 일어서는 재현을 주연이 부축하려 들었고, 뿌리치며 가게 밖으로 나왔을 땐 추웠다. 그제야 외투를 가게 안에 놓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택시는 주연이 잡았고, 그 택시를 혼자 타고 집 앞에 도착했을 땐 자정이 가까워져 있었다. 무릎 위에 곱게 덮여있던 코트는 제 것이 아니었다.
“글쎄. 그런 거 물어본 적은 없는데. 왜? 남자 좋아한대?”
“...아니. 그냥. 너랑 예전부터 친했다니까 궁금해서.”
“웃겨. 게이는 게이랑만 노냐? 그렇게 안 봤는데 사고방식 존나 고루하다 형.”
“아니 뭔 또 얘기가 그렇게 흘러가냐 그런 게 아니고오...”
난감해진 재현이 모자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재현이 그러거나 말거나 은우는 손에 쥔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액정을 바쁘게 톡톡 두들겼다. 그러다가 별안간 시선을 허공으로 돌리더니 뭔가를 생각하는 양 진지한 얼굴을 했다.
“남자 만나는 거 본 적은 없어. 여자친구는 몇 번 있었던 거 같은데 오래 만나는 애는 없었던 거 같고.”
“그럼 이성애자인가?”
“모르지? 김태영도 나 만나기 전에는 여자만 만나봤다 그랬으니깐. 그냥 남자를 만날 기회가 없었던 양성애자일 수도 있고?”
양성애자라니. 그건 또.....미처 고려해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인데. 머릿속이 복잡해진 재현이 저도 모르게 또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이미 밤새 물어뜯은 흔적으로 열 손가락 끝이 다 처참했다. 그 꼴을 본 은우가 질색하며 다시 액정으로 눈을 돌렸다.
“근데 갑자기 그런 게 왜 궁금한데?”
심드렁한 은우의 질문에 재현은 또 할 말을 잃었다. 글쎄. 인제 와서 난데없이 이런 게 왜 궁금할까. 그것은. 왜냐하면. 그러니까. 안 그래도 매사에 의뭉스럽기 짝이 없던 이주연 이 자식이 평범하게 잘살고 있던 사람한테 괜히 쓸데없는 소릴 해서 잔뜩 헷갈리게 만들었기 때문이지. 좋아한다고? 니가? 나를? 갑자기? 왜? 뭐 때문에? 어딜 보고?
“그....김태영은 있잖어.”
“엉.”
“너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대?”
뱉고 보니 번지수가 좀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태영의 생각인데 김태영한테 들었어야지. 그러나 답이 충분치 않으면 김태영한테 가서 다시 물어보면 될 일이다. 정은우를 만나기 전엔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다면서, 김태영은 대체 무슨 계기로 어떻게 정은우를 좋아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 걸까.
“전에는 남자 새끼들 보고 그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어.”
“나랑은 뽀뽀해도 안 이상하겠다 싶었대.”
뽀뽀, 라. 그렇지. 아무래도 우정의 단계를 넘어 그 이상의 감정으로 간다면 스킨쉽에 대한 욕구가 빠질 수 없는 노릇이지.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좋아한다고 손만 잡고 놀진 않는다던데. 아니 그럼 이주연도? 나를? 나랑? 날 보고? 그런걸? 하고 싶어? 한다고?
“근데 형 오늘 진짜 이상하다. 원래 이런 거 별로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심심해? 연애하고 싶어?”
“아니......걍......있어.......그런 게 있다......”
괜히 물어봤다. 가뜩이나 복잡하던 머릿속이 더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오늘 밤도 잠들긴 글렀구만. 다시 모자 속으로 얼굴을 숨긴 채 드러눕는 재현을 보고 은우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
[옷 가져가ㄹ]
...아니, 아니.
[니 옷 나한테 ㅇ]
아니, 이것도 아니고.
[야 이주연 너 왜]
아 씨 이것도 아닌데.
털퍼덕. 체념하듯 침대 위에 대자로 뻗어버린 재현의 안색이 초췌하다. 고작 한 줄짜리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느라 무려 30분이 흘렀다. 번호는 진작 주고받았지만, 태영이나 은우를 통하지 않고 주연에게 직접 연락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서인지 채팅창에 남아 있는 흔적은 간결하고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형 어디에요? / 후문 / 은우랑 있어요? / ㅇㅇ.........
“아오오오오, 씨.”
핸드폰을 저만치 내팽개치곤 옆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래 아니겠지. 개인적으로 연락한 적도 거의 없고 둘만 만난 적도 없고, 걔가 나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 좋아해. 무슨. 재현은 어떻게든 그런 쪽, 그러니까 아닌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싶었다. 양쪽 다 술이 좀 들어갔었고, 지들 애정 전선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파렴치한 게이 놈들 얘기를 하다 보니까 얼떨결에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나온 게 아닐까.
“....으음.....”
얼떨결에? 남녀 사이에야 적당히 호감 좀 있고 술 좀 들어가면 얼마든지 그런 사고가 날 수 있다지만, 얘는 남자고 나도 남잔데? 아무리 취했다고 한들 그런 말을 남자한테 얼떨결에 실수로 할 수가 있어? 실수가 아니면 진심이야?.......돌고 돌아서 다시 원점이다.
“하아......”
멍한 시선이 침대 맞은편 벽에 닿았다. 한가운데 주연의 코트가 걸려 있다. 택시 안에서부터 생각한 거지만, 도대체 향수를 얼마나 뿌린 건지 그 위력이 어마어마하다. 이제는 방문을 열기만 해도 코끝에서 이주연의 향수 냄새가 진동할 정도다. 저거 빨리 다시 돌려줘 버려야 하는데.
“......”
도로 핸드폰을 집어 들어 액정을 본다. 돌려주려면 어떻게든 상대방에게 시간과 장소를 일러줘야 했다. 얇은 티셔츠 따위도 아니고 부피가 큰 코트다. 그걸 학교까지 가져가서 우연히 마주칠 때까지 계속 들고 다닐 순 없는 노릇이었다. 생각만 해도 번거롭고 귀찮았다. 아니 근데 이주연 얘는 왜 코트 돌려달란 말을 안 하지?
드르륵.
액정을 쳐다보며 고민하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전화가 걸려왔다. 깜짝이야.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진동에 화들짝 놀란 재현이 얼른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발신인은 은우였다.
[형 가평 가자!]
통화 버튼을 오른쪽으로 밀고 핸드폰을 귀에 대자마자 건너편에서 은우가 소리쳤다. 가평 가평, 형 가펴엉!
“...웬 가평?”
[왜 전에 말한 적 있잖어 김태영네 외삼촌 펜션. 스키장 오픈하면 성수기라 자리 없대. 놀 거면 지금 가야 돼.]
[삼촌이 바비큐 해 먹으라고 고기도 다 주신대, 형.]
[가자. 갈 거지?]
느닷없는 제안이었으나 나쁘지 않아 보였다. 기말까진 아직 시간이 있고, 가뜩이나 머리도 복잡한데 바람 한 번 쐬고 오는 셈 치면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삼촌네 펜션이라니까 돈도 얼마 안 들 거고...?
“언제 갈 건데?”
그다음부턴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태영과 재현은 금요일 2, 3교시 수업이 끝이었고 은우는 공강이었다. 금요일에 출발해 2박 3일을 놀다 오기로 하고 마트를 거의 털어버릴 기세로 장을 봤다. 이거 다 먹을 수나 있냐...? 재현이 의아해하며 물었으나 이미 지나치게 흥이 올라 있는 은우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모자란 것보단 남는 게 나아. 담어 담어, 일단 담어.
“헐...야 이거 그냥 펜션이 아니잖어...”
사내놈들 셋이 마음껏 놀다 가라고 내주셨다기에 마당 딸린 원룸 형태의 자그마한 숙소를 상상했었다. 그러나 차에서 내리자마자 눈앞에 보인 것은 무려 독채 풀빌라였다. 은우 또한 재현과 같은 생각을 했었는지, 그러잖아도 큰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영복 가져오는 건데!”
“그럴 줄 알아가지구 다 챙겨 왔지.”
신이 난 은우가 먼저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차 트렁크에 싣고 온 짐을 나눠 들고 들어가면서 흘깃 훔쳐본 태영의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었다. 은우의 열렬한 반응이 못내 뿌듯한 모양이었다. 아, 이거 또 내가 눈치 없이 커플들 사이에 끼어든 꼴인가. 그러나 재현은 곧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꿨다. 애초에 둘만 놀러 오고 싶었으면 나한테 같이 가자는 말도 안 했겠지. 주말 동안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실컷 놀고 머릿속을 깨끗하게 비운 다음 돌아가서 학업에 매진하면 된다. 아니, 그 전에 일단 코트부터 돌려주고.
*
“에취. 킁.”
“거봐. 너무 오래 있었다니까 너.”
전날 저녁때까지 풀에서 나올 생각을 않더니만, 결국 감기에 걸렸는지 은우가 재채기를 해대기 시작했다. 핀잔하며 안으로 들어간 태영이 담요를 가지고 나와 은우의 상체에 칭칭 감았다. 패딩 점퍼에다 담요까지 두르고 있으니 누에고치가 따로 없었다. 그걸로도 썩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태영은 제가 쓰고 있던 비니를 벗어 은우의 머리에 덮어씌웠다. 그러고는 재현이 열심히 구워놓은 불판 위의 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어 은우의 입 앞에 가져다 대령했다. 아기 새마냥 입을 벌려 넙죽 받아먹는 은우의 태도가 자연스러웠다. 눈꼴사납고 꼴값이 따로 없고 비위가 상해 속이 좀 울렁거렸지만 그래도 나름 평화로웠다. 밤공기도 맑고 술맛도 좋고 경치도 끝내주고, 이만하면 더할 나위 없는 휴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바퀴벌레들과 함께 있으면 언제나 그랬듯,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아, 정은우 하여간 말하는 거 하고는 진짜. 야. 알지? 니 성격 존나 이상한 거?”
“지금 자기소개 하냐? 성격 이상한 걸로 너를 누가 이겨.”
“꼬라지 부리지 말고 걍 인정을 좀 해. 오죽하면 이주연이 내 편을 들었겠냐.”
“걔가 언제 니 편을 들어 존나 착각도 자유세요 김태영씨. 꿈꾸셨어요?”
두통이 밀려온다. 이 새끼들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새끼들이지. 이 좋은 데까지 와서도 이러고 싶을까. 고기고 나발이고 그냥 다 집어던지고 도망가고 싶다. 역시 이것들 사이에 끼는 게 아니었는데, 시발. 집게를 든 손으로 옆머리를 꾹꾹 누르던 재현이 대충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주연이랑은 어떻게 친해졌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으르렁대던 바퀴벌레들의 시선이 재현에게로 옮겨왔다. 다행히도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일단은 어떻게든 두 녀석을 닥치게 만들기 위해 던진 질문이기는 한데, 사실 정말로 궁금하기도 했다. 재현이 보기에 은우와 주연은 하나부터 열까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런 두 사람이 어떻게, 왜 친해졌는지도 궁금하고, 이주연이 어떤 애인지도 궁금하고, 다 궁금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 도착해 먹고 마시고 떠드는 동안에도 내내 이주연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생각을 안 하려고 온 건데 아무 할 일 없이 놀고만 있자니 오히려 그 빈틈을 타고 생각이 두 배, 세 배로 늘었다. 이주연은 왜 내가 좋다고 했을까.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일까. 그렇게 말해놓고 대체 나한테서 무슨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걸까.
“음...웃겨서?”
은우의 목소리가 옆길로 새려던 재현의 정신머리를 붙들었다. 순간 제가 뭘 물어봤었는지 헷갈렸다. 은우의 대답이 그만큼 의외였다.
“...걔가? 웃기다고?”
“어. 애가 생긴 거랑 다르게 좀 허술한 데가 있어가지고. 말하다가 흥분하면 삑사리도 자주 나고.”
지금 다른 사람 아니고 이주연 얘기하는 거 맞나? 의아해하며 은우를 보는데 옆에서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태영이 눈에 들어왔다. 태영도 은우의 말에 공감하고 있단 소리다. 재현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인데, 저와 비슷한 시기에 주연을 알게 됐을 태영은 ‘웃긴 이주연’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냐. 몰랐네. 걍 좀 점잖은 스타일인 줄.”
그나마도 좋게 말해서 ‘점잖은 스타일’이다.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재현은 주연이 ‘너무 무게 잡는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본래의 이주연이 아니었다면, 그냥 아직 덜 친해서 모르는 건가.
“에이, 그야 형이 있으니ㄲ.....”
“어이쿠, 주둥이에 웬 모기가-”
태영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뭔가 말하려는 찰나, 은우가 잽싸게 담요 안에서 팔을 빼 손끝으로 태영의 입술을 찰싹, 찰싹 때리기 시작했다. 소리가 어찌나 찰진지 듣기만 해도 미간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였다. 아읍, 왜애, 아브븝, 아파악!!! 태영이 비명을 지르며 은우의 손을 피해 고개를 이리저리 내뺐다. 그러느라 태영이 앉아있던 의자가 뒤로 나자빠질 듯 기우뚱거렸다.
“하...11월에 무슨 모기가 있다고 그래 자기야.”
“11월에 모기가, 충분히, 있을 수 있지 왜 없어. 지구온난화에 따른 이상 기후 몰라? 하여간 먹고 자고 싸는 거 말고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통 관심이 없어요. 그러고도 니가 지성인이야?”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는지 불판의 연기가 모조리 재현에게로 향했다. 뿌옇게 흐려진 얼굴 앞을 손으로 휘휘 내저으며 두툼한 삼겹살을 막 뒤집을 때였다. 태영이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뭔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아! 올 때 감기약 하나만 사다 달라고 하면 되겠네. 핸드폰 어딨냐. 전화해보자. 어디쯤 왔나.”
“...누가 와?”
올 때? 감기약? 태영의 영문 모를 말에 의아해진 재현이 물었다.
“아, 맞다. 형한텐 얘기 안 했었나? 지금 주연이 오고 있어.”
은우가 덩달아 일어나 부산스럽게 핸드폰을 찾으며 답했다. 이주연이 온단다. 너무나 태연하고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하는 바람에 재현은 하마터면 아, 그렇구나 니들이 나한텐 얘길 안 했지만 그냥 이주연도 여기로 올 거고 그게 별일 아니구나, 하고 수긍할 뻔했다. 이주연이? 지금? 여길? 온다고? 나한텐 한마디 언질도 없이? 시발, 그건 별일 아닌 게 아닌데?!
“하...”
이주연 생각을 안 하려고 이주연을 피해서 여길 왔는데 이 망할 자식들이 나한테는 한번을 물어보지도 않고.......까지 생각이 미쳐 순간 욱했던 재현은 아슬아슬한 선에서 가까스로 다시 정신을 차렸다. 태영과 은우는 그날 주연과 재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게다가 노는 자리에 누구 하나 더 부른다고 해서 그게 딱히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재현에게 누굴 부르고 말지에 대해 일일이 허락을 구할 입장은 더더욱 아니다. 상대가 이주연만 아니었다면,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누가 됐든 재현 역시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터였다. 아니 그래도 미리 말은 해줄 수 있었잖아 그럼 내가 안 왔지.......혼자서 내적 급발진을 일으켰다가 간신히 잠재운 재현이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우는 벌써 태영의 핸드폰으로 주연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어엉? 다 왔어? 벌써?”
은우의 대꾸가 끝나기 무섭게 앞마당으로 차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운전석에서 내린 주연이 트렁크로 성큼성큼 걸어가 뭔가를 잔뜩 꺼내 들고 곧장 데크로 걸어왔다. 맥주 상자와 묵직한 비닐봉지였다. 마른안주와 과자, 컵라면, 숙취해소제 따위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차 있었어? 전화하면 삼촌이 역으로 데리러 가주신다고 했는데.”
“엄마 차 빌렸어. 와, 진짜 좋다 여기.”
“나 라면 먹을래!”
은우와 태영이 머리를 맞대고 비닐봉지 안을 뒤적이는 동안, 주연이 테이블을 빙 돌아 불판 앞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들자마자 어쩔 수 없이 눈이 마주쳤다. 여느 때처럼 살짝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재현의 옆에 와서 선 주연이 들뜬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와, 고기 진짜 좋다. 형 주세요. 제가 할게요.”
“아냐. 됐어. 거의 다 구웠어. 앉아.”
결국은 재현이 먼저 눈을 돌렸다. 사실 얘도 그때 엄청나게 취했던 게 아닐까. 날 부축해서 택시에 태운 것도 실은 한 가닥 남은 정신력으로 간신히 해낸 일이고, 집에 가자마자 바로 필름이 끊겨서 나한테 무슨 소릴 했는지 기억 못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가 잠깐 재현의 뇌리를 스쳤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을 걸 수가 있겠어?
“그날 잘 들어가셨어요?”
...있나 보다. 얘는 그게 되나 보네. 당황한 탓에 부지런히 움직이던 집게가 불판 위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
“앟, 형. 이쪽 탔어요.”
반쯤 넋 나가 굳어있는 재현의 손등을 주연의 손바닥이 부드럽게 감싸며 미끄러졌다. 더운 감촉에 놀라 움찔하기도 전에 어느새 집게가 주연의 손으로 넘어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재현을 한 뼘 정도 밀치고 그 자리에 들어선 주연이 고기를 뒤집기 시작했다. 손등에 묻은 온기가 순식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홧홧하게 데웠다. 아, 저렇게 여러 번 뒤집으면 육즙 다 빠지는데. 머리에 과부하가 걸린 나머지 재현은 당장 그런 생각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이주연 아직도 재현이 형한테 존댓말 해?”
컵라면에 물을 부어 들고나오던 은우가 뜻밖이라는 듯 물었다. 그제야 재현도 주연이 여태 제게 반말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영과 은우는 이미 OT 첫날부터 제게 말을 놨었다. 주연과 대화를 길게 나눠본 적이 없어서일까. 조금 전까지는 저를 대하는 동갑내기 셋의 차이를 딱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재현은 곁눈으로 옆을 힐끗 보았다. 커다란 손으로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는 주연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뭐 그냥...”
“말 편하게 해. 난 상관없어.”
주연의 시선이 옆얼굴로 와 닿는 게 느껴졌다. 그 자리가 간지러워 손끝으로 벅벅 문지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재현은 꾹 참고 내내 앞만 보았다.
*
“내가! 그때! 얼마나! 어?! 쪽이! 팔렸냐면!”
“어엉,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내가 죽일 놈이야. 됐지?”
“넌 진짜.......너어는.....정은우우...........”
“알았어 나도 사랑ㅎ....아이 씨 미친놈아 쫌, 주둥이 아무 때나 들이대지 말라고!”
태영은 인사불성으로 취해 은우에게 엉겨 붙으며 주정을 부리는 중이었고, 나머지 셋은 비교적 멀쩡했다. 제 뺨으로 돌진하는 태영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밀어낸 은우가 씩씩거리며 일어나 재현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혼자 남은 태영은 낑낑거리다 곧 담요를 끌어안고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와. 이걸 다 먹었네.”
빈 병이 끝도 없이 늘어선 테이블 위를 보며 은우가 중얼거렸다. 해가 빨리 지는 계절이어선지, 꽤 오랫동안 먹고 마시고 한 것 같은데도 아직 밤 10시가 채 되지 않았다. 의자에 드러눕듯 느슨하게 앉은 셋의 시선이 일제히 새카만 하늘 위로 향했다. 펜션 건물 몇 채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방이 어두웠다. 그래서일까. 서울에서는 볼 수 없었던 별 무리가 금방이라도 발치로 쏟아져 내릴 것처럼 반짝거렸다.
“이쁘다.”
“그러게.”
은우가 피워 문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술기운에 나른해진 셋의 팔다리가 자유분방하게 늘어진다. 재현은 앉은 채로 눈만 돌려 양옆의 은우와 주연을 한 번씩 훔쳐보았다. 취기와 낯선 장소가 주는 들뜸 탓인지, 주연이 오고 나서도 우려했던 것만큼 불편하거나 껄끄럽진 않았다. 제 고개가 아예 한쪽으로 돌아가 고정되었다는 것도, 어느새 주연의 옆얼굴에 시선이 붙들렸다는 사실도 모른 채, 재현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혼자 끙끙대고 있을 때보다는, 차라리 그 원흉을 눈앞에 둔 지금의 머릿속이 훨씬 덜 복잡하다-라고. 그리고 다음 순간, 갑자기 제 쪽으로 얼굴을 돌린 주연과 눈이 마주쳤다.
“......”
취하지 않았더라면 남다른 반사신경으로 재빨리 고개를 원위치시킬 수 있었을 테다. 그러나 둔해진 몸이 때를 놓쳤다. 재현은 눈 한번 깜빡이지 못하고 맞닿은 주연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았다. 쿵. 하면 안 되는 짓이라도 하다 들킨 것처럼 가슴이 내려앉았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귀에 들릴 것 같다.
“...으어어? 억....”
우당탕. 타이밍 좋게 졸다 깨서 버둥거리던 태영이 앉은 채 뒤로 넘어갔다. 셋의 시선이 모조리 태영에게 가 박힌다. 넘어진 의자 다리를 붙들고 어리둥절해하는 태영을 보며 은우가 단전에서부터 깊은 한숨을 끌어올렸다.
“어이그 어이그, 저 등신.”
구시렁거리며 몸을 일으킨 은우가 터벅터벅 걸어가 태영의 팔을 붙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익숙한 자세로 태영을 부축했다. 아 다리에 힘줘! 내던져버리기 전에! 타박하는 말소리가 쩌렁쩌렁하다. 현관문을 연 은우가 안쪽으로 태영을 떠밀었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재우려는 모양이었다. 퍽, 퍽. 태영이 등짝을 얻어맞는 소리가 닫히기 직전의 현관문 사이로 새어 나왔다.
피식. 그리고 절레절레. 재현이 손에 들고 있던 맥주캔을 입으로 가져다 대며 웃었다. 허구한 날 저렇게 구박이나 당하면서도 은우를 볼 때마다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태영이 신기해서다. 그러다가 또 옆얼굴이 간질간질한 것 같아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연이 웃는 낯으로 제 쪽을 빤히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다.
“안 그래 보여도 은우가 태영이 더 좋아해요, 아니-”
“......”
“좋아해.”
이번엔 손도 닿지 않았는데 온몸에 열이 확 오른다. 그저 존댓말을 반말로 정정하기 위해 덧붙인 말임을 알면서, 아는데, 순간 괜히 움찔하고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는 걸 주연이 알면 안 될 것 같았다. 왜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어으, 야. 너무 배불러서 숨차다. 나 좀 걸을 건데.”
테이블에 맥주캔을 턱, 하니 올려놓고 일어섰다. 얼굴이 빨개진 거야 취해서 그렇다고 우기면 그만이고, 어쩌면 어두워서 별로 티가 안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버벅대거나 헛소리하게 되는 건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어섰는데, 재현은 언제나처럼 또 같은 딜레마에 빠졌다. 둘은 아마 들어가서 저대로 잘 것 같은데, 얘만 여기 혼자 두고 가기에는 좀, 너무 인정머리 없는 것 같고 찜찜하고 마음에 걸리고 그런.
“같이 갈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연이 따라 일어났다. 데크를 딱 몇 발짝 벗어났을 뿐인데 코앞도 안 보일 것처럼 어두웠다. 괜히 걷는다고 했나. 그냥 안으로 들어갈까. 그렇게 고민하며 몇 걸음 가다 보니 다행히도 낮은 조도에 금세 적응한 눈이 길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잘그락, 잘그락. 발밑으로 자갈 밟히는 소리가 났다. 확실히 서울보다는 차가운 공기였지만 걸을 만은 했다. 뽀얗게 입김을 뿜으며 앞서가다가 힐끔 대각선 뒤쪽을 보았다. 재현이 밟고 지나간 돌조각을 주연도 반쯤 밟았다. 잘그락, 잘그락.
“은우랑 제일 친해?”
계속 말없이 걷기만 할 수는 없어서 재현이 먼저 입을 뗐다. 어느새 자갈밭은 끝나가고 저만치 앞에 포장된 좁은 길이 보였다. 차를 타고 들어올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 도로 양옆으로는 밭과, 밭과, 단층 주택과 또 밭이 있었다.
“뭐 그냥, 친하지.”
진짜 궁금해서라기보다 그냥 대화를 시작할 요량으로 꺼낸 말이었다. 전공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르고, 둘 사이에 공통분모라고는 은우와 태영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연의 대답이 좀 애매하다. 그냥 친하다고? 은우는 지랑 제일 친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확 일러버릴까? 재현은 그런 유치한 생각을 하면서 걸었다. 자박자박.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을 다섯 개쯤 지나쳤다. 어떤 대문 앞에선 개가 짖고, 비닐하우스 끄트머리에 늘어진 나일론 그물 따위가 펄럭거리며 둘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금방 대화가 끊겨 어색해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 얘길 하다가 금세 저 얘기로 넘어갔다. 시답잖은 소릴 했다가 실없이 웃길 반복했다. 나쁘지 않았다. 그날, 주연이 제게 좋다고 말한 것 때문에 괜히 혼자 지나치게 심각해졌던 것 같다. 정작 주연은 그렇게까지 진지한 마음으로 한 말이 아닐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아직도 그거 가지고 오해하는 애들이 쫌 있더라. 싸가지 없다고.”
“은우가 말하는 게 좀 그럴 때가 있지. 근데 형도 알겠지만 걔 진짜 여려. 정도 많고.”
“그런 거 같어.”
“태영이는 좀 무던하고.”
“그것도 맞고.”
“둘이 잘 맞는 거 같아. 오히려 너무 똑같으면 좀, 부대낀다 그래야 되나.”
“크크. 지금 완전 부대끼고 있는 거 아니야? 맨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
“어.....그니까 그냥, 그런 거 있잖아. 걔네 그러는 게 나름대로는...뭐랄까.....”
“알어, 알어. 걍 웃자고 한 소리지. 그런 말도 있잖냐. 원래 자기랑 반대되는 사람한테 끌린다고.”
“...그치.”
“그렇다니깐.”
“그런 게 있지.”
“어엉.”
“형은?”
“...엉?”
나? 나 뭐? 아무 생각 없이 맞장구치다가 느닷없는 방향 전환에 당황했다. 뭘 묻는 건지 제대로 못 알아들었다. 얼굴에 물음표를 잔뜩 담고 쳐다보자 주연이 픽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뭐냐.”
“말이 헛나왔어.”
“아 뭔데에.”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봤으나 주연은 계속 웃기만 했다. 끝끝내 말해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재현도 포기하고 다시 앞을 보았다.
술도 거의 다 깼고, 슬슬 좀 추운 것도 같았다. 그런데도 무작정 좀 더 걷고 싶었다. 주연도 돌아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겹치는 게 별로 없어서 할 말도 더는 없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대화가 끊기질 않았다. 길이 끝나지만 않는다면 이대로 수다 떨면서 서울까지 걸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
“긍까. 어디 가서 전공 얘기하면 다 그 소리부터 하잖어. 기자 되게? 아나운서 하게?”
“하핳. 그치 그치. 나도 나중에 정치할 거냔 얘기 맨날 들, 어엏.”
주연의 커다란 몸이 느닷없이 휘청거렸다. 놀란 재현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주연의 팔을 붙들었다. 그러면서 주연이 밟았던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돌도 없고, 어디 하나 파인 곳도 없는 평평한 아스팔트였다.
“괜찮아? 안 삐었어?”
“...어어, 그냥 헛디뎠어. 괜찮아.”
주연이 머쓱한 얼굴로 답했다. 절뚝거리지 않는 걸 봐서는 정말로 그냥 헛디딘 것 같았다. 그제야 재현도 붙들고 있던 주연의 팔을 놓았다. 아, 이게 신발이, 꽉 묶으면 좀 커가지고, 아 계속 그러네. 멋쩍어서인지 그야말로 아무 말이나 주절주절 늘어놓는 주연 때문에 재현은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고 몰래 웃음을 참아야 했다. 창피했나. 발 좀 꼬일 수도 있지. 그게 뭐라고 고장 나서 삐걱거리는 게 좀, 귀여웠다. 생긴 거랑 다르게 허술하다는 은우의 말이 이제야 이해되기 시작한다. 이런 애를 왜 그렇게 삐딱하게 봤지. 그냥 착하고 웃긴 애 같은데.
“근데 우리 어디까지 왔냐. 깜깜해서 길도 안 보인다.”
“그러게. 형 안 추워? 돌아갈까?”
정작 추워 보이는 건 주연이다. 아까부터 자꾸 어깨를 부르르 떠는 것 같았는데 곧 죽어도 춥다는 말은 안 했다. 입고 있는 코트가 좀 얇아 보였다. 재현의 방 벽에 걸려 있는 코트가 훨씬 도톰했다. 당장 그게 없어서 이걸 입었나. 재현은 궁금해졌다.
“너 코트.”
“어?”
“그날 나 줬잖아. 택시 탈 때.”
“...아.”
그러고 끝이다. 기억하네, 라든지. 어떻게 했냐, 라든지. 언제 돌려줄 거냐, 라든지. 그런 말이 돌아오질 않는다. 자박자박. 발소리만 들려오고 적막하다. 결국 재현이 먼저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 줄까?”
“...어?”
“월요일 시간표 어떻게 돼? 공강 있어?”
“어....5교시.”
“잘됐다 나 56교신데. 그때 줄게.”
“아, 어. 고마워.”
“니꺼 돌려주는 건데 뭘 고맙냐. 약속 있어? 없으면 점심 같이 먹을래?”
주연의 시선이 또 옆얼굴에 닿는다. 간지럽다. 벅벅 긁고 싶어 미칠 지경이지만 참는다.
“있어도 없게 만들어야지.”
“푸핰. 뭐야 그게.”
“내가 살게.”
“오. 그럼 또 사양 안 하지 나는.”
낮은 웃음소리가 재현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탓에 이제는 옆얼굴뿐 아니라 귀부터 발끝까지 다 간지러운 것만 같다. 추위를 핑계로 물 묻은 강아지처럼 온몸을 한번 부르르 털었다. 그래도 자꾸만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은 끝내 입가에서 털어내질 못했다.
*
갔던 길을 되돌아와 데크에 앉아서 맥주 한 캔, 그리고 안으로 들어와서 두 캔을 더 마시고 목이 아파서 더는 말할 수가 없을 때까지 떠들다가 새벽 세 시쯤에나 잠이 들었다. 퇴실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으므로 넷 다 점심때까지 정신 놓고 늘어져 잤다. 그러고는 대낮에야 느적느적 일어나 컵라면으로 해장을 했다.
“아, 집에 가기 싫다.”
거실 바닥에 대자로 뻗어 누운 은우가 칭얼거렸다. 감기 기운은 그새 떨어져 나가고 없는지 잘 잔 얼굴이 보송보송했다.
그래도 이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어째선지 올 때보다 무거워진 배낭을 메고, 별생각 없이 셋이 타고 왔던 차 옆으로 걸어갔다. 손을 뻗어 막 뒷좌석 문을 열려던 참이었다. 등 뒤에서 태영이 재현을 불러 세웠다.
“형. 주연이랑 같이 가.”
“어?”
“어차피 방향 다 같은데. 혼자 가라 그러면 좀...그렇잖아.”
태영의 말에 몸을 돌려 뒤쪽을 보았다. 주연이 이제 막 운전석에 올라타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서울까지 못 해도 두 시간은 운전해야 한다. 반드시 태영의 차에 타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올 때도 혼자였던 주연을 또 혼자 가라고 보내는 건 좀 정 없어 보이긴 했다. 재현은 수긍하며 발을 돌렸다. 졸음운전 하지 말라고 옆에서 말이나 걸어주며 가면 될 것 같았다. 시동을 걸던 주연이 제 차로 다가오는 재현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차창을 내렸다.
“어? 형 여기 타게?”
“엉. 나 김태영한테 쫓겨났어. 좀 태워주라.”
“아앟.”
곧바로 찰칵, 하고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수석 문을 열고 차 안으로 상체를 들이밀자마자 시원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냄새가 났다. 주연의 코트에서 나던 향수 냄새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왜 쫓겨났어.”
“둘만 오붓하게 가시겠다고 좀 빠져달래. 재수 없지.”
“가방 이리 줘.”
재현에게서 배낭을 건네받은 주연이 가운데로 몸을 틀었다. 그러고는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팔을 뻗어 배낭을 뒷좌석에 눕혔다. 가까워진 주연의 목덜미에서 향수 냄새가 더 진하게 났다. 킁킁. 재현의 코끝이 저도 모르게 냄새를 따라갔다. 그러다 주연과 눈이 마주쳤다.
“...왜? 뭐? 이상한 냄새 나?”
“아니? 좋아서. 너 향수 뭐 쓰냐?”
“나? 그냥 이것저것-”
듣기 좋으라고 대강 둘러댄 말은 아니었다. 평소 짙은 향수 냄새라면 머리 아프다며 질색을 하는 편이었지만, 이상하게 주연의 향수 냄새에는 별로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연의 입에서 재현은 난생처음 들어보는 향수 브랜드가 줄줄이 나열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앞차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른 자세를 고쳐 앉은 주연이 뒤따라 차를 출발시켰다. 조심해서 가, 내일 보자! 차창 밖으로 팔을 내민 은우가 소리쳤다. 곧 차 두 대가 좁은 아스팔트 길에 일렬로 들어섰다.
“그럼 뿌리는 게 맨날 달라?”
“꽂히면 한동안은 계속 같은 거 쓰기도 하고. 그때그때 다르지. 형은?”
“난 솔직히 향수 잘 몰라가지고. 거의 안 써봤어.”
“그런 거 같더라.”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재현이 제 팔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전날 불판 앞에 오래 서 있었던 탓에 고기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차가운 겨울 공기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옆을 흘깃 돌아본 주연이 그런 재현을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뭐해.”
“아니, 그냥.”
“됐어. 형은 안 뿌려도 맨날 좋은 냄새 나.”
“......”
“섬유유연제 냄샌가?”
어정쩡하게 들려있던 재현의 팔이 천천히 내려갔다. 별말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갑자기 귀 끝이 뜨거워지는 느낌이다.
“아 맞다. 형 야상도 우리 집에 있어.”
“어?”
“그날 입었던 거 있잖아.”
“아....”
“형 보내고 나서 가게 다시 들어가 보니까 거기 있더라. 챙겨왔지.”
재현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아예 잃어버렸다고만 생각했지, 주연이 그걸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따 우리 집 먼저 들르자. 옷 가져가.”
“...지금? 너네 집에?”
“내일 줄까 했는데 그럼 수업 끝날 때까지 계속 들고 다녀야 되잖아. 무겁게.”
...그게 무거워 봤자 얼마나 무겁다고? 게다가 코트를 받아서 들고 다녀야 하는 건 저도 매한가지 아닌가? 자기 코트도 좀 이따가 우리 집 도착하면 갖고 내려오란 소린가? 그럼 내일 점심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던 와중 무심코 시야에 들어온 주연의 옆얼굴이 좀, 이상했다. 언뜻 보면 무표정인데 뭐랄까, 입 주변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게, 턱을 부자연스럽게 꽉 물고.......어라. 주연의 귀 끝도 빨갛다. 누가 뒤통수를 톡 치기라도 한 것처럼 재현은 불현듯 깨달았다. 아, 얘 또 고장 났네. 그냥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하는 거구나 지금.
“......”
어디서부터 고장 난 걸까. 섬유유연제 냄새부터? 아니면 코를 들이댔을 때부터? 그것도 아니면, 그냥 이 차에 탔을 때부터? 한 번 의식하고 나니 차 안의 공기가 걷잡을 수 없이 어색해졌다. 당장 차창을 내려 찬 바람을 쐬고 싶을 만큼 목덜미가 더웠다. 다른 때였으면 대충 핑계를 만들어 자리를 피하면 될 일이지만 지금은 차 안이다. 도망갈 곳도 없다.
“심심해? 음악 틀어줄까?”
“...어? 아니...뭐, 맘대로 해.”
정적만 흐르게 두는 것보다는 아무 소음이라도 있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러나 첫 곡을 듣기 전까지도 우여곡절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블루투스를 연결하려다가 거치대에 있던 핸드폰이 떨어지고, 신호가 걸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커다란 덩치를 이리저리 구겨가며 간신히 줍더니 무슨 이유에선지 스피커와 통 연결이 되지 않았다. 아 이게, 올 때는 잘 됐었는데, 앟, 알았다, 형 잠깐만. 그 부산스러움을 지켜보며 음악이 나오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없어진 재현은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드디어 이름 모를 곡의 전주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순간, 뿌듯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주연이 너무 웃겨서 재현은 하는 수 없이 입술을 꽉 깨물고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
그 뒤로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저와는 전혀 다른 취향의 음악과 동선 한 번 겹친 적 없는 여행지, 과목명조차 생소한 타과 수업 이야기를 재현은 지루해하지 않고 들었다. 지난밤처럼 끝도 없이 떠들 수 있겠다 싶었는데 차창 옆으로 익숙한 건물들이 지나갔다. 벌써 학교 근처였다. 차가 속도를 줄이며 낯익은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섰다.
“여기 살아? 자취해?”
“어. 다 왔어. 잠깐만.”
차가 멈춰 선 곳은 원룸 건물 앞이었다. 시동도 끄지 않고 안전벨트부터 푼 주연이 운전석 문을 열며 재현을 돌아보았다.
“여기서 기다려. 금방 가지고 올게.”
원래 충동적으로 뭔가를 자주 결정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요 며칠 사이 전에 없던 객기가 아무 때나 불쑥 튀어나오곤 하는 걸 느낀다. 재빨리 안전벨트를 푼 재현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런 다음 주연보다 먼저 차에서 내려섰다.
“아니야. 같이 가자. 나 화장실 좀 가게.”
“어? 아...”
한쪽 발만 길바닥에 내린 채로 주연이 잠시 얼었다. 데굴데굴,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재현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여기야? 이 건물 맞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앞서 들어가는 재현을 보고서야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시동을 끄는 주연이다. 어어, 어, 3층! 뒤늦게 건물 안으로 달려 들어온 주연이 계단을 두세 칸씩 뛰어올라 재현을 앞질렀다. 3층까지는 금방이었다. 길지 않은 복도 양쪽으로 현관문 다섯 개가 엇갈리게 마주 보고 있었다. 그중 맨 안쪽 문 앞까지 걸어간 주연이 도어락 커버를 위로 밀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열린 문 안쪽으로 막 따라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문을 도로 닫고 돌아선 주연 때문에 하마터면 정면으로 이마를 들이받을 뻔했다.
“...! 깜짝이야. 왜?”
너무 놀란 나머지 롤러코스터가 하강할 때처럼 가슴이 한 번 쑤욱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점점 속도를 붙이며 쿵쿵, 빠르게 뛰었다. 그런 상태로 몇 초쯤 지나고 나니까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놈의 심장이 놀라서 뛰는 건지, 아니면 이주연이 너무 코앞에 있어서 뛰는 건지.
“그.....여기 잠깐만 있어. 부르면 들어와.”
“왜?”
“방이.......좀 치우고 부를게.”
“푸흡. 뭘 치워. 됐어. 내 방이 더 할걸.”
“아니 그래도....”
“나 화장실 급하다니깐? 안 비키면 확 뽀뽀해버린다?”
“아...형 진짜 제발.....”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거짓말 좀 보태서 제 것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주연의 울대뼈가 위아래로 요동치고 있었다. 재현은 눈을 들어 바쁘게 깜빡이는 주연의 속눈썹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버티고 있을 작정인지 궁금해졌다.
“주연.”
“응.”
“방 치운다며.”
“...응.”
“근데 왜 이러고 있어.”
또 꿀꺽. 긴장으로 힘이 잔뜩 들어간 주연의 입술이 눈앞에서 애처롭게 움찔거린다. 뽀뽀해버린다는 협박은 농담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은우가 했던 말이 재현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얘한테 뽀뽀해도 별로 안 이상할 것 같으면, 그러면, 나도 김태영이랑 정은우처럼 남자를 좋아할 수 있는 건가. 이주연도 날 좋아한다는데, 나도 이주연을 좋아할 수 있으면, 그럼 그게 뭐야. 너도 게이 나도 게이 에브리바디 게이, 그런 거야? 뭐 이딴 세계관이 다 있어?
“....몰라. 너무 가까운가 봐.”
“......”
“떨려서 다리가 안 움직....”
꾸욱. 무드도 뭣도 없이 오리처럼 입술을 쭉 내밀고 도장 찍듯 꾹 밀어 눌렀다. 콩, 하고 주연의 뒤통수가 현관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5초쯤 가만히 있다가 먼저 고개를 뒤로 물렸다. 큰일 났다. 하나도 안 이상하다. 눈치를 보아하니 주연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재현의 입술 위로 곧장 내리꽂히는 눈빛이 심상찮게 흐리멍덩하다. 역시, 둘 다 게이들이랑 어울리는 바람에 결국 이상한 물이 들어버린 게 분명했다.
에라, 모르겠다. 재현은 눈을 있는 대로 꾹 내리감고 주연의 입술로 다시 돌진했다.
*
같은 시각, 태영과 은우의 차 안.
“갈 길이 멀다. 응. 갈 길이 멀어.”
“다 왔는데? 네비 봐. 3키로 남았어.”
“...누가 지금 그거 얘기하냐. 이주연이랑 재현이 형 말하는 거잖어.”
두 시간 내내 차창 밖을 내다보며 한숨만 푹푹 내쉬던 은우다. 둘이서 일주일 내내 머리를 맞대고 고안해낸 가평행이건만 결과가 영 시원치 않았다. 이럴 때는 잔소리 폭격이 쏟아지기 전에 도망부터 쳐야 한다는 사실을 태영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장소가 장소인 만큼 여의치가 않다. 결국엔 재현의 앞에서 태영이 흘린 의도적 말실수는 물론, 둘만 차에 같이 태워 보낸 것까지 줄줄이 엮어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다.
“그니까 괜히 나대다가 초 치지 말고 가만히나 있으라고. 재현이 형 눈치 되게 빠르단 말이야.”
“아니 나도 답답하니까 그러지. 놔두면 뭐가 되긴 하겠냐? 눈치 빠른 게 뭔 소용이야 이주연이 아무것도 안 하는데.”
사실이 그랬다. 그래서 은우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자칫 어설프게 티를 냈다간 재현이 지레 겁부터 먹고 선을 그을까 봐 조심스러운 한편, 그렇게라도 들켜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결말을 보고 싶기도 했다. 1학기 초인 3월부터니까 벌써 8개월째다. 주연이 제 입으로 누굴 좋아한다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은우는 유독 재현의 앞에서만 저답지 않게 구는 주연을 보고 일찌감치 그 속내를 알아채 버렸다. 그러나 인제 와서는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든다. 알고 있다고 속 시원히 밝히지도 못하면서 매일같이 복장만 터진다. 그러느라 실시간으로 수명이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우리 주연이 생긴 건 걸어 다니는 페로몬 덩어리 그 자첸데. 하는 짓은 왜 그 모양이지?”
“...걸어...다니는....뭐...?”
“재현이 형만 있으면 애가 왜케 삐걱거리는지 모르겠다니깐. 어쩔 때는 보는 내가 다 민망하고 막.”
“...그건 그렇지.”
“친해지면 이주연만큼 웃긴 애가 또 없는데.”
“재현이 형은 웃긴 게 취향이 아닐 수도 있잖어.”
“근가. 아닌데. 형 웃긴 사람 진짜 좋아하는데.”
“웃긴 여자는 좋은데 웃긴 남자라서 안 되는 거 아냐?”
결론이 그쪽으로 흐르면 그야말로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은우가 보기에도 재현은 남자와 연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살면서 단 1%도 고려해보지 않았을 순도 105%의 헤테로였다. 저와 태영의 관계를 이해한다고 해서 타고난 성적 취향까지 바뀔 리는 없었다. 침울해진 은우가 차창에 옆머리를 쿵, 박으며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하.....우리 주연이 진짜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