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짧아졌다. 주연이 경성역에 도착했을 때 이미 사방은 어두웠다. 날이 쌀쌀했고 현해탄을 거쳐 부산에서 경성까지 쉼 없이 올라온 주연은 한계치의 피로를 느꼈다. 제대로 먹은 게 없었지만 식욕을 잠식한 피로감 덕택에 입맛을 잃었다. 역전 가판에서 물을 얻으려고 산 주먹밥을 양장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손난로처럼 따뜻하게 손을 덥히는 주먹밥을 만지작거리다 무심코 코밑을 훑자 고소한 냄새가 났다. 동경에서는 좀처럼 맡기 힘든 참기름 냄새였다. 주연은 자신이 경성으로 돌아왔음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기다리는 이가 늦는다. 경성역 근처를 구경하고 싶었지만 그의 덩치만 한 짐가방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가만히 시간을 흘려보냈다. 역 앞에서 자리 차지하고 있는 주연이 거슬린다는 듯 행인 몇이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의도성이 제법 있다고 느꼈다.
“.....”
조국은 덤덤하고 생활감이 넘쳤다. 동경에서는 곧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주연은 동경 아고타 무용단의 1급 무용수로 활약했다. 흉흉한 시기에 가장 좋은 먹잇감은 역시 조선인이라 정세가 진정될 때까지 잠시 고향에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는 단장의 권유를 알아들은 주연은 그날부로 관부연락선의 티켓을 끊었다. 티켓은 편도였다. 단장이 자신에게 퇴단해달라고 돌려 말한 것임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이! 브라더!”
포드 자동차 전조등이 주연에게 쏟아져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뒷좌석에서 빼꼼 나온 얼굴 실루엣이 주연에게 손을 흔들었다. 문을 열어주려는 운전기사보다 한발 빠르게 차에서 뛰어내린 그는 주연에게 성큼 걸어왔다. 피곤해서 눈이 가늘어지던 주연도 활짝 웃었다. 남자와 주연은 가벼운 핸드쉐이크를 하고 어깨를 부딪쳤다.
“승우, 오랜만이야.”
“그래 이게 얼마 만이야.”
주연의 짐은 자연스럽게 운전기사에게 들렸다. 포드 뒷좌석을 가득 채운 바람에 저는 어디에 타야 하나 주연이 눈을 굴리는 사이 승우가 그를 이끌었다.
“피곤하지? 술부터 한잔하자고.”
승우에게는 아랫사람을 부리는 이 특유의 거만함이 없었다. 운전기사에게 어서 가라고 손을 흔들고 주연과 경성역을 벗어났다. 피곤한 탓에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은 주연은 끌려가다시피 역 근처의 술집으로 들어갔다. 고된 여정이라고 일부러 낡고 편한 구두로 골라 신은 주연의 발밑이 쩍쩍 달라붙었다.
양관
주연은 승우와 동경에서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다. 죽마고우라기엔 서로 안 세월이 짧았지만 친분은 그에 버금갔다. 뒤숭숭한 시절의 동경 유학생은 삶의 범주가 엇비슷했으므로 입을 열었다 하면 공통된 관심사가 쏟아졌다. 승우가 주연보다 한 뼘쯤 작았으나 그들은 곧잘 쌍둥이로 불렸다. 외딴섬에서 정말 형제라도 되는 냥 서로를 의지했다.
“시간이 마땅치가 않네.”
민망하다는 듯 뺨을 긁적거리는 승우에게 의아한 낯을 띄우던 주연은 곧 그의 말을 이해했다. 술집은 가볍게 콕텔을 파는 주점이나 끽다점이 아니라 요정에 가까웠다. 조금 전 술을 가져온 여급이 자리가 없다며 그의 무릎 위에 앉으려 해서 주연은 혼비백산했다.
“제법 태가 나.”
미안해하는 승우가 싫어서 주연은 부러 익살스럽게 그를 골렸다. 저와 마찬가지로 한때 하는 일 없이 놀기만 하던 승우는 느닷없이 양조장을 물려받아 한량 생활을 청산하고 멀끔한 사업가가 되었다. 주름진 남방과 구두 뒤축을 구겨 신던 이승우는 어디 가고 반질반질 빛을 내는 타이 바와 손목에 걸린 금장 시계가 그를 어른처럼 보이게 꾸몄다.
“내가 뭘. 다 아버지 꺼지. 나야 작은 사장님이고.”
집에서 술을 담가 먹던 게 당연시되던 시절, 주세령이 공포되었다. 이제 양조장 이외에는 술을 만들 수도 없고 그나마 구색을 갖춘 양조장도 어마어마한 주세를 피할 길이 없어 족족 망했다. 승우 집안의 양조장만이 시대를 등에 업고 살아남았다.
“부럽구만. 부러워.”
주연은 혼잣말이라기엔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경성은 휴가차 온 거야? 놀러 오라고 사정을 했는데 죽어도 안 오더니…”
“어? 뭐, 뭐 그렇지.”
자신의 송장을 파묻어야 올 줄 알았다고 과장하는 승우에게 주연은 쓴웃음을 날렸다. 여즉 방황하는 주연은 어른 티를 내는 승우가 부럽다. 주연은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무용을 하고 있다.
“집에 한 번 올 거지? 아버지가 주연이 네 춤을 특히 좋아하셨잖아.”
“그럼. 어르신께도 인사드려야지. 어르신이 또 내가 소매 한 번 펄럭이면 아주 날아가셨지.”
장난스럽게 손끝을 휘젓는 주연에게 승우는 얼음에서 나온 물을 튕겼다. 술기운이 올라 어깨까지 들썩이는 주연은 막 생각났다는 듯 운을 뗐다.
“참, 어르신 요즘도 집에 가수를 부르시나?”
“어? 어어, 뭐 그렇지.”
승우 역시 떨떠름한 대답을 내놓았지만 알딸딸한 주연은 눈치채지 못했다. 경성 바닥에서 유명한 가수는 모두 양조장 어르신 집에서 구경할 수 있다는 풍문이 마냥 낭설은 아니다. 주연이 방학을 틈타 경성에 머물 때마다 승우의 집은 가수와 레코드 사에서 나온 직원들로 복작거렸다. 주연이 동경 아고타 무용단에 입단할 수 있었던 것도 예술에 조예가 깊은 어르신이 아는 이를 통해 추천서를 써줬기 때문이다. 무용을 반대하는 주연의 집안에서 알면 자신과 척을 질 일이지만 그가 경성에 돌아오기엔 아까운 인재라고 호탕하게 웃던 어르신이 기억난다.
눈에 띄게 당황한 승우는 화제를 돌렸다.
“고향은, 고향은 언제 내려가려고? 그러잖아도 잘 빚은 술이 있어서 아버님 드리려고 따로 놔뒀는데.”
“고향? 글쎄. 내가 가면 반길 사람이나 있으려나.”
“…?”
“내가 내려갔다가 돌아오지 않거든 종로서에 신고를 넣어줘.”
“그게 무슨 말이야?”
“보나 마나 어디 묶여서 꼼짝없이 결혼 당하고 있을 테니까.”
주연과 승우는 호기롭게 웃었다. 술에 취한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제법 컸다. 주연은 오랜만에 숨통이 트인다. 이승우는 자꾸만 앞으로 가고 이주연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데 이제야 시간대가 맞는 느낌이다. 하지만 주연이 고향에 내려간다면 결혼과 가업 상속이 한 큐에 이뤄지리란 예상은 단순한 농이 아니다.
“잠깐, 잠깐만!”
주연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승우가 벌떡 일어났다. 어찌나 조심성 없었던지 술잔이 엎어지는 줄 알았다. 쓰러지기 전 술잔을 겨우 잡은 주연이 타박하는 눈으로 승우를 쳐다봤다. 이승우는 단장하는 오리처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후후, 손바닥에 숨결을 뱉어 술 냄새를 확인했다. 벗어놓은 자켓을 걸치고 술집 밖으로 뛰어나간다. 승우의 등이 꾸깃꾸깃했는데 주연이 털어줄 새도 없이 재빨랐다.
“이승우!”
주연 또한 뒤돌아 창밖에서 누군가와 조우하는 승우를 쳐다봤다. 웬 남자와 몇 마디 말을 나누고 있는 승우는 주체 못하고 몸을 들썩거렸다. 암만 낭랑 18세처럼 구는 쾌활함이 매력이라지만 친우의 구애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건 어쩐지 거북했다.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금방 흩어졌다. 주연은 남자의 얼굴이 보고 싶어 목을 뺐지만 승우의 몸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들어오는 승우의 뺨이 수줍게 붉었다. 마냥 술 탓은 아니다.
“애인?”
승우가 자리에도 앉기 전에 주연이 물었다. 승우는 머쓱하게 대답했다.
“아직 애인은 아니야.”
승우는 착잡한 뜸을 들였다. 주연은 그의 맘고생이 단지 저이가 제 죽마고우에게 넘어오지 않아서가 아니라고 단박에 꿰뚫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낀 주연이 느긋하게 말했다.
“뭐가 문제야? 정신 차린 것도 모자라서 애인까지 데려와 결혼하면 어르신이 얼마나 좋아하시겠어.”
의문을 표하는 주연에게 승우가 사실을 실토했다. 주연이라면 미덥다는 태도였다.
“이혼한 전력이 있어. 그런 사람과 사귀는 걸 아버지가 가만두겠어? 그보다…”
“그보다?”
“이재현이 양관 출신이라 더 안되겠지.”
허탈한 승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양관?
“피곤한 사람 더 붙들고 있기도 뭐 하니 그만 일어날까?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갈 거지?”
“아니아니, 지낼 곳을 이미 구했어.”
주연은 양관이 궁금했지만 급하게 화제를 돌리는 승우 때문에 더 이상 묻지 못했다.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저희 둘 사이에 비밀이 없던 이승우에게 숨기는 일이 생겼고 이는 그가 정말로 어른이 되었다는 걸 뜻했다. 주연의 입이 썼다.
승우는 경성에 하숙집을 얻은 주연에게 못내 섭섭했다. 마뜩잖은 하숙집 외관을 보고 자기 집에 노는 방이 많다며 주연을 거듭 설득했다. 집안의 원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어도 한 푼이 아쉬운 처지라 주연은 솔깃했지만 그래도 부모님과 함께 사는 승우의 집에 얹혀살 수는 없다.
승우가 경성역에서 주연과 함께 가로챈 주연의 짐은 내일 하숙집으로 보내준다고 했다. 주연의 자리가 생긴 포드에서 내렸을 때 시각은 이미 자정을 가리켰다. 늦은 밤에 하숙집 주인아주머니의 단잠을 깨워 죄송하다고 재차 사과했지만 정작 그녀의 흥미는 다른 곳에 있는 듯했다.
“그런데 총각, 타고 온 차가 양조장 작은 사장님 차 아닌가?”
벌써 사라지고 없는 휑한 골목을 끈질기게 쳐다보던 아주머니가 주연에게 물었다. 친우 사이라고 하자 아주머니의 얼굴이 급격하게 환해진다. 이승우가 경성에서 나름대로 평판을 잘 쌓아왔다는 생각이 들어 주연은 흐뭇했다.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대강 자신이 쓸 방만 소개받은 주연은 내일 아침에 마저 얘기하자며 방으로 돌아가는 아주머니를 불러 세웠다. 뭔 충동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아주머니 양관이 어디예요?”
“그건 왜?”
“처음 들어보는 지역이라서요.”
눕는 즉시 깊은 잠에 빠질 정도로 피곤하면서 주연은 집요하게 물었다. 뜨뜻미지근한 승우의 반응을 떠올렸을 때 아무래도 이쪽이 더 자신을 속 시원히 긁어주겠다는 인상을 받았다. 주연의 예상은 적중했다.
“지역이 아니야. 언덕배기 윗집 있지? 거기가 양관이야.”
주연에게서 얕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서양식 건물을 뜻하는 양관. 지역 유지 집안 출신의 주연은 경성이라곤 승우의 집 주변이나 시내 정도만 꿰고 있다. 아주머니가 가리킨 쪽은 턱 봐도 외졌다.
“가까이 가지 마. 그 집에는 저주가 걸렸어.”
“저주요?”
“그 집에 발을 들인 사람은 싹 다 죽어 나가는 저주.”
술기운이 넉넉하게 오른 주연은 슬슬 눈이 감기는데 어쩐지 신난 아주머니의 표정 때문에 섣불리 방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시작할 모양인지 아주머니는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주연을 위협했다.
“동경 유학생이라 못 들은 모양이구만? 그 집 할아버지가 술도가를 했어. 술 빚는 솜씨가 좋아서 경성 바닥에 양관을 지을 정도로 금세 큰돈을 모았지. 근데 소문에는 양관을 짓다 인부 여럿이 죽었는데 장례도 제대로 안 치러주고 그 위로 집을 올렸대.”
“.....”
“그때부터 저주가 시작된 거야.”
저주라는 말맛이 주는 기묘한 느낌에 주연은 등골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마나님은 이유 없이 병 걸려 죽고 할아버지도 별안간 시름시름 앓더니 마나님 쫓아갔지. 줄초상이 거기서 끝나면 다행이었게?”
흐리멍덩한 주연의 눈매가 또렷해졌다. 하숙집 주인아주머니는 타고난 호사가였다. 주연의 흥미를 끌고 한 박자 숨을 골랐다.
“양관에 아들 부부도 같이 살았는데 팽팽 놀던 한량 아들이 사업에 대해 뭘 알겠어? 쫄딱 망하고 자살했지. 그게 누구 좋은 일인 줄도 모르고. 쯧. 양조장 큰 사장님이 망한 술도가 인수하고 바깥사람이던 미망인만 단단히 한몫 챙겼어. 근데 말야. 소문에는 큰 사장님이랑 양관집 미망인이랑…”
청자를 자처하던 주연은 차마 거기까진 들어줄 수 없어 큼큼, 헛기침했다. 그제야 주연이 누구 차를 타고 왔는지 생각난 아주머니는 잠시 딴청을 부렸다.
“아무튼 이런저런 소문이 있었는데 글쎄 미망인이 실종된 거야. 그 집 아들이 그렇게 찾아다녔는데… 결국 한강에서 시체로 건졌어.”
“그러면 이혼했다는 아들이…?”
주연은 승우가 아직 애인은 아니라던 이를 떠올렸다. 단순하게 이혼이 문제가 아니라고 주연은 혀를 내둘렀다. 이승우는 어쩔 생각인지… 주연의 시름이 깊어지는데 아주머니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혼? 그걸 이혼이라고 할 수 있나? 남편이 그 집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죽었어. 목이 부러져서 그 자리에서 죽었대.”
“예?”
“아무튼 총각, 양관 근처에도 가지 마.”
다시 한번 주연을 단도리 친 아주머니는 어깨를 두드리며 방으로 돌아갔다. 황량하게 남겨진 주연만 상념이 길었다. 평생에 걸쳐 불운과 저주의 형용사가 따라붙는 그이를 승우와 응원해 줘야 할까? 냉정하게 생각하면 안 될 일이다. 친우를 위해서라도 어르신이 노발대발하기 전에 제 선에서 승우를 타일러야 한다고 주연은 다짐했다.
눕자마자 곯아떨어진 주연은 그날 밤 으스스한 꿈을 꿨다. 주인아주머니의 기담괴설 탓이다. 승우가 뺨을 붉혔던 양관집 아들이 주연의 배 위에 올라타 무얼 원망하는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주연이 제멋대로 상상한 얼굴은 꽤나 곱고 예뻤다. 그가 서러이 흘리던 눈물은 곧 붉은 피로 변하고 옴짝달싹할 수 없는 가위에 눌린 주연이 경악에 가득 찬 소리를 내질렀다.
“앟! 앟!”
안타깝게도 내지르다 만 비명으로 돌아왔지만 말이다. 주연은 얼굴로 떨어지는 핏방울을 거부하면서 온몸에 힘을 주고 흔들었다. 하찮은 비명을 지르면서 끔찍한 가위에서 풀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주연이 홀린 사람처럼 얼굴을 더듬었다. 거봐, 핏방울 같은 게 있을 리가… 얼굴을 훔치는 주연의 손이 이상하게 축축했다.
“앟!!!”
축축한 주연의 머리 꼭대기로 물이 쏟아졌다. 하숙집 천장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그러게 그 하숙집 처음부터 별로였다니까.
잠을 설쳐 퀭한 인상의 주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동경에 발이 묶여 있어 직접 매물을 보지 않고 아는 사람 통해서 구한 하숙집이었다. 날이 밝자, 주연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터져버린 수도 배관 말고도 낡은 집 특유의 문제가 속속들이 보였다.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졸졸 흐르고 주인아주머니가 옮겨주겠다는 방은 벽지 곳곳에 곰팡이가 피었다. 주연은 당연한 일을 선심 쓰듯 말하는 아주머니의 태도에 불쾌했다. 역시 마음이 불편하더라도 승우의 집에 머물며 천천히 하숙집을 구해야 했나 뒤늦게 후회했다.
“아무튼 미안하지만 내 짐은 새 하숙집 구하는 대로 가져갈게.”
-짐도 여기 있겠다 주연이 네가 몸만 오면 될 일인데.
후회는 후회고 승우의 집에 얹혀 살기는 불편한지라 주연은 못 들은 척했다. 끽다점의 여주인이 승우와 통화하는 주연을 자꾸 힐끔거렸다. 모닝커피 마시러 잠시 들렀을 뿐인데 전화를 오래 빌리고 있어 그렇다고 오해한 주연은 사과하는 뜻의 눈웃음을 지었다. 여주인의 뺨이 붉어졌다.
-봐둔 데는 있어?
“지금부터 보러 다녀야지.”
대책 없는 주연의 대책이 참으로 그 다워서 수화기 너머의 승우가 큭큭 웃었다. 그러다 아, 하고 박 터지는 소리를 낸다.
-집 구할 때까지만 양관에서 지내는 게 어때?
“…양관?”
-아무래도 아는 이의 아는 집에 머물면서 새 하숙집을 찾는 쪽이 내 마음에도 편할 거 같아서 그래.
“괜찮으려나.”
주연은 통화 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난밤 양관을 둘러싼 께름칙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무엇보다 승우가 마음에 두고 있는 이가 사는 집에 들어가는 게 어쩐지… 구미호 앞에 피칠갑하고 누워있는 꼴이었다.
-괜찮지 그럼!
주연이 뭘 생각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승우는 옳다구나 시간 약속부터 잡았다.
양관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했다. 경성 시내는 한강 이남보다 지대가 높았지만 개중에서도 높이 위치한 까닭에 양관은 시내 정경을 내려다보았다. 쾌청한 날에는 저 멀리 한강이 보였다. 재현의 친조부가 세대를 건너다보고 지은 집이었다. 노부부 내외가 늙어 죽고 아스러질 집이 아니라 어린 친손주가 주인이 될 집이라고 자부했다.
한때 노부부가 마당에서 누룩을 주무르면 2층에 있는 재현의 방까지 쿰쿰한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가만히 누워있는 재현의 귓가에 아버지의 피아노 연주 소리와 어머니의 가냘픈 노랫소리가 섞여 들렸다. 또 한때는 근사한 표정의 남편이 저를 위해 지은 노래라며 재현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모두 한때였다.
“작은 사장님께 얘기 들었어요. 동경에서 같이 수학하던 친우분이시라고.”
“예? 예.”
주연의 머쓱한 상상을 꾸짖듯 양관은 꽤 넓었다. 집주인과 생활 공간이 겹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소문과 달리 으스스한 느낌은 없었다. 재현 혼자 사는 집이라 그런지 삭막하긴 했지만. 그보다 주연은 ‘작은 사장님’이라는 호칭이 귀에 들어왔다. 연애결혼을 생각하는 승우와 달리 재현에게서 승우에 대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이주연입니다. 동경 무용단에 있었어요.”
주연이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머뭇거리던 재현의 손이 크고 남자다운 손과 얽혔다. 생긴 것만치 손도 부드럽구나, 주연은 의도 없는 생각을 했다.
“저는 이재현이고, 음… 그래요.”
말을 고르다 멈추는 걸 보아하니 딱히 하는 일은 없는가 보다. 그렇다면 남편과도 사별한 재현이 무슨 돈으로 이리 크고 넓은 양관을 유지하는지 주연은 문득 궁금했다. 술도가도 망했다면서 물려받은 재산이 있으려나. 재현은 작은 사장님의 소개로 온 분인데 어찌 방값을 받겠냐며 주연이 이전 하숙집에서 받아온 돈도 거절했다. 어딘가 종업원의 태도와 닮아있어 주연은 승우의 연애가 한참 멀었다고 그를 딱하게 여겼다.
고향집보다는 못하다만 양관은 주연의 마음에 쏙 들었다. 삭막하다는 건 다른 말로 차분하고 조용하다는 뜻과 통했다. 또 양관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낭만이 서려 있었다. 그게 뭐냐고 묻는다면 글쎄…
“뭔가 집이… 따뜻하네요.”
주연이 쓸 만큼의 공간만 설명하던 재현이 뒤돌아 그를 쳐다봤다. 극 대본이라면 (별 뚱딴지같은 말을 들었다는 듯이) 정도의 해설이 붙었을 표정이었다. 양관을 이리 긍정적으로 칭해주는 이가 너무 오랜만이라 재현은 얼떨떨했다. 자신을 놀리는 건가. 동경에서 무용을 했다더니만 정신 나간 예술가의 감수성인가 헷갈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주연의 감상은 진심이었다. 양관을 둘러볼수록 집을 지은 이가 가족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보였다. 다만 2층에 있는 방을 쓰게 된 주연이 계단을 오르는 동안 여기가 재현의 남편이 굴러떨어져 죽었다는 계단인가 싶어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래된 집이에요. 그동안 제가 쓰는 공간만치만 쓸고 닦아서 여긴 사람 손을 탄 지 오래됐어요. 치운다고 치웠는데 불편하시면 말씀하세요.”
느긋한 말투와 달리 재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무래도 집주인이 제일 불편해하는 듯했다. 주연이 조금 더 활짝 웃었다. 잘생긴 얼굴을 활용할 줄 아는 그는 어색한 분위기를 곧잘 웃음으로 풀었다.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이 사람 요령이 없다. 일생을 음침한 소문과 불운 속에 파묻혀 있어 그런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마음에 든다고 재현을 안심시키려던 주연은 그가 무얼 말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정말 괜찮습니다.”
재현의 추측대로, 타고나길 예민하고 기민한 주연은 탐미에도 일가견이 있다. 역시 아름다운 건 조금 멀찍이 떨어져 있을 때 가장 잘 보이는 법이다.
이래서 이승우가 저를 양관으로 밀어 넣었구만. 승우는 신새벽부터 주연에게 아침을 함께 하자며 양관으로 찾아왔다. 근처에 아침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집이 있다고. 안 먹어 버릇해서 아침에 입맛이 없는 주연과 거푸 거절하는 재현을 혼자 아침 먹기 뭐하지 않냐고 채근하여 끌고 갔다. 종착지는 시내의 닭곰탕집이었다.
“어떻게 잠은 좀 잤나?”
“응?”
주연의 대답이 느렸다. 승우에게 아는 체하며 주인이 직접 꺼내준 수저를 들여다보던 참이었다. 닭곰탕이 얼마나 기가 막혔으면 쇠 수저가 다 닳아서 광택을 잃었다. 주연이 느리게 고개를 들다 재현과 눈이 마주친다. 티를 낼 수 없지만 그 역시 주연의 숙면이 궁금했다.
“응. 오랜만에 달게 잤어.”
경성역 바닥에서 노숙했어도 곯아떨어졌겠다만 부러 재현을 의식한 말이다. 재현이 안심하는 얼굴로 끄덕거렸다. 길게 대화할 새도 없이 세 사람 앞에 식사가 나왔다. 주연은 이제 경성에도 이른 아침부터 바깥 음식을 사 먹으러 나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고 또 그들이 뚝배기에서 펄펄 끓는 닭곰탕을 뜨겁지도 않은지 허겁지겁 먹고 있어 다시 놀랐다. 그러나 주연 또한 닭곰탕을 한 수저 떴을 때 그들과 같은 꼴이 되지 않으려 무진장 애썼다.
“맛있지? 맛있죠?”
승우는 주연과 재현을 번갈아 쳐다보며 재차 물었다. 사이좋게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국물에 밥을 말았다. 똑같이 쌀이 주식이어도 동경에서는 맛볼 수 없던 맛이다. 게다가 반찬을 더 달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차림표의 가격을 가리키는 쩨쩨함도 없다. 잘 먹는 주연을 짧게 지켜본 재현은 맛을 기억하려는 듯 국물과 밥알을 여러 번 씹었다. 동경 유학생이라 걱정한 주연의 입맛이 까탈스럽지 않아 다행이었다.
가볍게 커피를 마시고 들어가자는 승우의 제안은 안타깝게도 불발되었다. 작은 사장님을 찾는 전화에 승우가 먼저 질척거리는 발걸음을 끌고 사라졌다. 주연은 커피를 마시고 싶긴 했지만 단둘이서 끽다점에 앉아있는 그림은 확실히 이상해서 재현과 양관으로 돌아갔다.
경성에 와서 밥 다운 밥을 먹은 건 처음이라 뚝배기를 싹싹 비운 탓인가, 배가 부른 주연의 숨이 가빴다. 그와 달리 재현의 발걸음은 어딘가 산뜻하기까지 했다. 저 사람 외로웠구나. 주연은 재현이 지금 들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앞서 걷던 재현이 뒤를 돌아 주연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가볍게 커피를 마시자는 말, 재밌지 않나요? 무겁게 마시는 커피도 있나?”
재현은 승우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정말 재밌어서 키득거리기까지 했다. 주연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저이는 눈치가 없는 건가, 없는 척을 하는 건가. 배부르게 아침 식사를 한 바람에 혹여 거절당할까 봐 말을 꾸민 승우의 노력이 무색했다. 결혼한 적이 있다지만 틀림없이 남편과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 없으리라.
“승우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재현의 낯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져서 주연은 자신이 뭘 실수했나, 멈칫거렸다. 기분과 함께 들떴던 재현의 어깨가 축 가라앉았다.
“그냥, 그냥 알게 됐어요.”
시시한 대답이 돌아왔다. 재현이 나름 걸음을 맞춰주고 있던 모양인지 주연을 내버려 두고 서둘러 양관으로 걸어갔다. 조금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사이가 도로 뒷걸음질 쳤다.
“엏!”
재현의 빠른 걸음을 뒤쫓아가던 주연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양관의 마당은 잔디밭 가운데 자잘한 돌로 사람이 지나갈 길을 내었다. 자신을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은 줄 알았는데 주연의 작은 탄성에 화들짝 놀란 재현이 뛰어왔다.
“괜찮으세요? 걸을 수 있겠어요? 업어드릴까요?”
건장한 성인 남성이 무르팍 좀 깨졌다고 재현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못 걷겠다고 하면 저를 업고 2층까지 올려다 줄 기세였다. 혼비백산해서 가만히 있질 못하는 재현 때문에 주연은 일어날 타이밍도 놓쳤다. 어설프게 한쪽 무릎을 굽히고 주저앉은 주연이 진정하라는 뜻으로 재현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낯선 손길에 재현은 조금 움츠러들었다. 이제야 잠잠해졌다.
“저는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아…”
느리게 말하는 주연 탓에 재현은 뒤늦게 제 호들갑이 부끄러웠다. 업어주겠다더니 주연을 또 마당에 내팽개치고 앞서 걸었다. 놀란 재현은 두 다리가 흐물거려서 넘어지지 않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했다.
주연이 쩔뚝거리며 양관으로 돌아왔을 때 놀랍게도 재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고와 반창고를 찾느라 집안을 들쑤셨더니 재현의 숨소리가 약간 거칠었다. 주연은 말없이 재현이 주는 걸 건네받았다.
“께름칙하면 얼마든지 나가셔도 됩니다.”
말맛이 사나웠다. 주연의 얼굴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고작 넘어졌을 뿐인데 저를 쫓아내고야 말겠다는 재현의 결의가 읽혀서 당황스럽다. 마치 자신이 양관에 흠집을 내려고 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느지막이 일어난 주연이 계단을 내려왔다. 경성으로 돌아온 후 그에게 여유가 늘었다. 동경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만 해도 주연은 제일 먼저 여유, 너그러움, 느긋함 따위를 지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주연이라는 인간을 가장 잘 수식할 수 있는 성질이었다.
“…?”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출처는 부엌에 있는 재현이었다. 재현이 부르는 노래는 단정하고 고상한 정악이 아니라 대중가요였다. 꽤 듣기 좋아서 주연은 계단에 앉아 기다렸다. 자신이 등장해서 재현의 흥을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제 넘어져서 멍든 무릎을 문지르면서 재현의 노래를 들었다.
그러다 문득 재현의 결혼생활이 궁금해졌다. 사고로 남편과 사별했으니 애틋함이 남아 있을 만도 한데 양관에는 그의 흔적이 없다. 그 흔한 가족사진조차 없다. 오래전이라 슬픔이 흐려졌을까? 그렇다기에는 재현은 너무 젊다. 아이도 없어 보이고… 주연은 재현이 아이를 낳았다면 그 아이를 업고 양관 마당을 걸었을 상상을 했다. 칭얼거리는 아이를 업고 달래주기에 너른 마당은 훌륭했으므로.
“주연씨 여기서 뭐 하세요?”
주연의 상상이 얼마나 진득했으면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멈춘 줄도 몰랐다. 마당에 장을 푸러 가는 재현과 마주쳤다. 차마 당신의 노래를 훔쳐 듣고 있었다고 주연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고 일어났더니 조금 어지러워서…”
잠시 앉아있는 중이라고 주절주절 변명하는 주연에게 재현은 아량이 잔뜩 묻은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몸이 허약한가 보다.
“쉬었다가 아침 드세요.”
“네? 네…”
주연은 기어가는 목소리로 머리를 싸맸다.
아침을 먹은 주연은 양관을 나섰다. 시내의 끽다점에서 친우들과 약속이 있다. 초행이라 길을 헤매다 들어온 주연에게 친우들은 동경물 먹더니 팔다리가 더 길어졌다고 그를 놀렸다. 주연이 한창 풍운아로 살며 연애와 잡설에 관심이 많던 시절에 사귄 친우들이라 흥미로운 얘기가 마구 쏟아졌다. 주연은 앉은 자리에서 경성에 돌고 있는 뜬소문을 모조리 접수했다.
“이제 이주연이 경성에 돌아왔으니 나는 안타깝게도 경성의 두 번째 미남이 되었군.”
앞으로 여자 꼬시긴 글렀다고 푸념하는 한 친우에게 무리의 야유가 쏟아졌다. 너는 뒤에서 두 번째라고 친절한 해설이 따라붙는다. 용모에 관해서라면 뻔뻔한 구석이 있는 주연이 맞는 말이라고 뻗대서 야유의 꼬리가 한층 길어졌다.
대화의 주제는 금세 휙휙 바뀌었다. 함께 무용을 했고 아직도 음악을 하는 예술인 친구들이라 아는 것도 많고 입이 가벼웠다. 모던보이로서의 자부심이 넘쳐 허세를 자랑하다 주연이 동경에 도는 흉흉한 소문을 전해줄 때는 침울한 침묵에 휩싸였다.
“그래서 양관에서 지낸다고?”
이승우가 속한 무리는 아니었으나 그와 접점이 있는 친우가 주연에게 물었다. 주연은 잠시 뜸을 들였다. 말을 골라 대답하지 않으면 재현과 양관에 대한 추문에 새로운 근거를 적립해주기 십상이었다. 새 하숙집을 구하기 전에 승우의 소개로 잠시 지내고 있다고 입장 정리를 마쳤는데 역시 주연은 조금 느렸다.
“양관에 아직도 이재현 혼자 살아?”
반쯤 떨어진 주연의 입이 도로 다물렸다. 느닷없이 재현의 이야기가 나왔다.
“이재현 노래 참 잘했는데.”
주연은 정말 노래 잘하더라고, 오늘 아침에 그 행운을 누렸다고 말할 뻔했다. 대신 심드렁한 말투로 되물었다.
“이재현이 노래를 했어?”
궁금한 마음을 숨길 수 없는 말끝이 기이하게 높았지만 다행히 알아차리는 친우는 없었다. 너도나도 이재현에 대해 할 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중구난방 터지는 친우들의 말을 정리하면 이러했다.
이재현은 한때 사교계를 주름잡던 가수였으나 남편과 결혼 후 대중가요를 그만뒀단다. 결혼 후에도 레코드사들이 수없이 그에게 접촉해 봤지만 재현의 남편이 단칼에 거절했다고. 주연은 오늘 아침에 들은 재현의 노래를 떠올렸다. 수줍은 재현을 생각하면 어디 나서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남편은 뭐 하는 사람이었는데?”
주연의 물음에 다른 친우가 살을 보탰다.
“작곡가였어. 같이 작업하는 여가수마다 염문을 뿌리는 풍객이었지.”
“내가 듣기론 양관 어른들 돌아가시고 아예 양관에서 정부를 끼고 살았다는데.”
“그래서 왜 그런 소문도 있잖아.”
친우의 말소리가 급격하게 낮아졌다. 주연도 몸을 기울여 그의 말에 집중했다.
“이재현이 남편을 밀어 죽인 거 아니냐고.”
저 같아도 그럴 만했다고 끄덕이는 친우들 틈에서 주연은 뱃속이 부글거렸다. 멍든 무릎이 욱신거렸다. 다 큰 사내가 넘어져도 어쩔 줄 몰라 하던 이재현은 누굴 해칠 성정이 안된다고 반박하고 싶었다. 방법이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재현은 소문에 둘러싸여 사는구나. 약간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주연은 승우를 의식해서 금방 하숙집을 구할 생각이었으나 경성에 돌아온 며칠은 꽤 바빴다. 저도 모르는 사이 쌓아 올린 친목이 이렇게나 많았던지 친우들에게 끊임없이 불려 나갔다. 오늘도 늦게까지 브랜디 풍 잡주를 뱃속에 쏟아붓고 돌아온 주연은 갈증을 느꼈다.
부엌에 미등이 켜져 있어 재현이 있는 줄 알았는데 저녁상만 오도카니 차려져 있었다.
“아.”
낮게 탄식한 주연은 양관에서의 저녁을 며칠째 거르는 중인지 셈해봤다. 일단 다섯 손가락을 다 썼다. 혹시나 해서 국그릇을 만졌는데 미지근했다. 주연의 손목시계는 자정을 가리켰다.
딱히 식욕을 못 느끼며 살았다. 주연이 지역 유지 집안 출신으로 의식주에 어려움이 없는 집에서 자랐고 본격적으로 무용을 시작하면서는 자기관리라는 숙명 아래에 배고픔을 잊었다. 그런데 제 입에 한 술 떠 넣자고 이 늦은 밤까지 몇 번이고 상을 차리고 국을 데웠을 재현을 떠올리면 설명하기 어려운 허기를 느꼈다.
이재현은 나를 기다렸을까. 부엌과 가까운 재현의 방은 밑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도 없이 깜깜했다. 얕은 한숨을 쉰 주연이 제 얼굴을 문지르면서 2층으로 올라갔다.
“…?”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주연의 방과 가까워질수록 피아노 소리 역시 선명해졌다. 주연의 방은 손님 방 용도에 충실하여 침대와 책상, 작은 옷장이 전부였다. 피아노는커녕 그 흔한 전축조차 구경도 못했다. 으슥하고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외람된 상상이지만 자연스럽게 양관의 저주가 떠올랐다.
봄이 오면 하얗게 핀 꽃 들녘으로 당신과 나 단둘이 봄 맞으러 가야지
출처는 주연의 건넛방이었다. 방문은 닫혀있지만 불이 켜져 있었고 피아노 연주와 함께 재현의 나지막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정한 당신을 가만히 안으면 마음엔 온통 봄이 봄이 흐드러지고 들녘은 활짝 피어나네
재현은 주연의 귀가를 몰랐다. 평소 굼뜨고 느려서 고향에서는 닭 한 마리도 못 잡겠다고 어머니의 불평을 곧잘 들었으나 주연의 느린 인기척이 오늘만큼 도움이 된 순간이 없다. 조율이 안 됐는지 음이 나가는 건반을 미련스럽게 재차 누르는 재현의 연주를 듣고 주연은 낮게 웃었다.
한참 연주하던 재현의 기척이 잠잠해지자 주연은 얼른 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명백한 회피여서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했다. 주연이라면 아무래도 피아노를 잘 친다는 둥, 노래가 좋다는 둥 너스레를 떠는 쪽이었으니까.
“.....”
방문 밖 역시 이상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기척이 들려야 하는데 잠잠했다. 피아노가 있는 방에서 나온 재현은 아직 주연이 돌아오지 않았나 불 꺼진 방을 한참 쳐다보다 내려갔다.
“어제 안 들어오신 줄 알았어요.”
“네?”
아침상에서 눈치를 보던 재현이 슬그머니 운을 뗐다. 맑은 콩나물국을 뒤적거리는 주연은 딴생각을 하느라 느린 반응을 보였다. 그간 아침상의 국이 뭐였는지 떠올리는 중이다. 어제는 뭇국, 그저께는 황탯국… 죄다 속풀이 용이어서 주연은 부끄러웠다.
“좀 늦게 들어왔어요. 앞으로 늦으면 연락할게요.”
“아니에요. 번거롭게.”
“연락할게요.”
“…네.”
단호한 주연의 말에 재현은 하는 수없이 끄덕였다.
“참, 앞으로 점심은 차리실 필요 없어요.”
“…?”
주연의 밤 외출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주연은 조금 멋쩍다는 얼굴로 덧붙였다.
“시내에 있는 고등보통학교로 출근하게 되었어요.”
“와, 잘됐네요.”
연신 축하하며 기뻐하는 재현에게서 정돈된 흥분을 느꼈다. 볕에 잘 말린 수건처럼 산뜻하고 순백하다. 이렇게 의도 없이 투명한 사람은 오랜만이라 주연은 재현을 오래 쳐다봤다. 제게 머무는 시선이 의아한 재현이 턱을 문질렀다.
“그러면 저녁은 와서 드실 거죠?”
처음에는 저녁도 먹고 오라는 눈치인 줄 알았다. 서운해도 되는 순간이라 원체 얄궂게 올라간 주연의 입꼬리가 시무룩하게 처지려는데 주연은 어딘가 기대에 찬 재현의 표정을 읽었다. 제자리를 찾은 입꼬리가 근사하게 올라갔다.
“네.”
재현은 웃으며 대답하는 주연에게 안도했다. 그러면 점심 식비를 아껴 성대한 저녁을 차려주겠다고 혼자만의 다짐을 했다. 재현이 한숨 돌리는 사이 주연은 꼭 부부 같다고 생각하다가 서둘러 생각을 고쳤다. 첫 월급을 받는 대로 새 하숙집부터 구해야겠다.
“제가 없으니 마음껏 노래 부르고 피아노를 연주하세요.”
“…?”
재현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어색한 침묵을 참지 못하고 아무 말이나 지껄인 결과였다. 한 번 뒤집힌 주연의 눈치는 도로 돌아오지 못하고 침몰하는 배처럼 빠르게 가라앉았다.
“실은 어제 저 없을 때 피아노 연주하시는 걸 들었어요.”
“.....”
“저 때문에 재현씨의 취미 생활을 방해받은 거 아니에요? 제가 있어도 괜찮아요.”
“그게 무슨…”
“재현씨 노래를 듣는 게 좋아요. 가끔 부엌에서 흥얼거리는 노래를 들으려고 일부러 계단에서 기다린 적도 있는데 모르셨죠?”
눈에 띄게 당황한 재현이 가만히 입술을 뻐끔거렸다. 주연은 뒤늦게 재현이 눈에 들어왔다. 칭찬에 어떻게 대꾸할지 몰라 인색한 게 아니라 재현은 약간 겁에 질린 사람처럼 보였다.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주연은 갸웃거렸다.
“그런,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흔치 않게 재현이 단호한 얼굴과 매서운 말투로 말했다. 흔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런 재현은 처음 봤다. 실수가 가늠되지 않는 주연만 얼떨떨한데 재현은 아침상에서 먼저 일어났다. 느린 식사를 기다려주는 쪽은 늘 재현이었기 때문에 주연은 퍽 당황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딱히 할 일이 없던 주연은 찬바람 부는 이재현 때문에 없는 약속을 만들어서라도 나가야 하나 고민했다. 불편한 감정을 머금은 가슴이 불편해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산책하러 가야겠다고 일어났을 때 양관으로 손님이 찾아왔다.
“이승우?”
마침 잘 만났다고 주연의 얼굴이 피는데 승우는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오늘은 재현씨에게 볼일이 있어서 왔어.”
승우를 맞이하러 현관까지 나온 재현이 굳었다. 가타부타 설명이 없는 말을 이해한 재현은 준비하고 오겠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주연은 승우를 따라 양관 밖으로 걸어갔다. 저 모르는 사이에 약속이 있었나. 데이트… 라기에는 두 사람을 둘러싼 분위기가 경직됐다. 흡사 청혼 직전의 긴장감과 비슷한? 이번에는 주연의 표정이 굳었다.
“점점 어르신을 닮아가네?”
“…?”
주연은 기분을 환기하려 시답잖은 말을 꺼냈다. 마당에서 뒷짐을 지고 걷는 폼이 정말 승우의 아버지와 닮았다고 느꼈다. 강박에 가깝게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어르신은 언제나 꼿꼿했다. 승우는 머쓱하게 웃었다.
“자식은 부모의 싫은 모습만 닮는다던데.”
“응?”
“아니야.”
혼잣말과 비슷한 승우의 읊조림을 주연은 듣지 못했다. 찌뿌드드한 어깨를 굴리면서 걷는 주연은 넌지시 물었다.
“재현씨 말이야. 가수로 키워보는 건 어때?”
“뭐?”
“결혼 전에 유명한 가수였다며.”
앞서 걷는 승우의 걸음이 멈췄다. 승우는 지금이 느껍다는 모양새로 크게 한숨을 쉬었다. 뒤돌아 주연을 똑바로 쳐다본다.
“그런 말 하지 마.”
승우는 재현과 똑같은 말을 했다. 허, 황당한 주연의 실소가 터졌다. 어쩜 그렇게 똑같은 반응으로 자신에게 벽을 치냐고 서운한 마음이 생겼다. 주연이 뭐라 입을 떼려는데 단정하게 치장한 재현이 뛰어나왔다.
“제가 좀 늦었죠?”
“괜찮습니다. 차를 가지고 왔어요.”
다음에 보자는 승우와 달리 재현은 주연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운전기사도 없이 승우가 직접 몰고 온 포드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두 사람을 실은 포드 뒤꽁무니를 보는 주연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여인이라면 이 야릇하고 쎄한 감정을 ‘촉’이라고 불렀겠지만 안타깝게도 주연에게는 그런 걸 눈치챌 눈치가 없었다.
주연은 새 구두가 필요했다. 발에 익었다는 핑계로 동경에서부터 함께한 구두를 신고 첫 출근을 할 순 없었다.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낡은 구두가 못 견디게 신경 쓰였다. 겉치장은 느린 주연이 손에 꼽게 남들보다 빨리할 수 있는 행위였다.
“주연상 아닌가요?”
미츠코시 오복점에서 구두를 고르는 주연에게 누군가 아는 척을 했다. 마침 마음에 쏙 드는 구두를 발견했는데 예산을 훌쩍 넘겨 고민에 빠진 찰나였다. 슬로 모션처럼 고개가 돌아가는 주연의 앞에 웬 모녀가 서 있다. 척 봐도 일본인이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기모노 차림의 유한부인은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녀의 딸로 보이는 모던걸이 제 어머니 등 뒤에서 주연을 힐끔거렸다. 레이스 장갑 끝을 만지작거리며 딴청을 부렸지만 주연에 대한 호기심은 감출 수 없다.
“아고타 무용단에 있었지요?”
“아.”
“큰 팬이었어요. 퇴단 소식을 듣고 얼마나 섭섭했던지.”
부인은 서툰 우리말로 떠듬거렸다. 주연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과시에 가까웠다. 아량, 선처와 비슷한 태도였다. 사람을 사귈 때 재고 따지는 편은 결코 아니었으나 눈앞의 일본인 모녀가 주연에게 손해를 끼칠 인물은 아니라는 생각에 주연의 말맛은 따뜻했다. 감사를 표하고 근황을 궁금해하는 부인에게 필요한 말로만 설명했다.
“…그렇군요. 아, 여기는 내 딸 쿄코에요.”
부인은 분신처럼 딸을 데리고 다니지만 딸에게 사람을 가려 소개했다. 부인이 가진 모종의 기준에 통과한 주연에게 기꺼이 제 딸을 소개해준다는 건방을 떤다. 양장 차림의 쿄코가 수줍게 튀어나와 주연과 인사했다. 그녀는 예의상 눈을 마주치려는 주연을 자꾸 피했다.
“쿄코는 피아니스트인데 연주회가 있어서 구두를 사러 왔어요.”
부인은 이것도 인연이니 주연에게도 초대권을 주겠다고 말했다. 연주회에 딱히 취미는 없지만 성의를 거절할 수 없는 주연은 난감한 내색을 숨기고 조용히 웃었다. 그러다 피아니스트란 말에 주연은 재현의 피아노를 떠올렸다. 조율이 되지 않아 음이 나가는 건반. 구두에 둘러싸인 주연은 짧은 상념을 끝마쳤다.
“실례지만 부인.”
“왜 그러시죠?”
부인이 아닌 쿄코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이었지만 한눈에도 과잉보호가 느껴지는 애틋한 모녀에게 무례를 저지를 수 없다. 대신 주연은 쿄코를 잠시 쳐다봤다.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귀가 붉었지만 정작 못 본 사람은 주연이었다.
“혹시 잘 아는 조율사가 계신가요?”
그 조율사가 양관의 피아노를 조율해주려나 모르겠지만.
이른 아침 주연이 양관을 나섰다. 새로 샀다는 양장을 입고 마당을 가로지르던 주연은 자꾸 땅을 쳐다봤는데 재현은 그가 낡은 구두를 부끄러워하는 중이란 걸 몰랐다. 출근하다 말고 멈춰 선 주연이 현관 밖까지 나온 재현에게 손을 흔들었다. 재현은 저도 모르게 따라 고분고분 손을 흔들어줬다. 만족스러운 주연이 뒤를 돌았다.
“.....”
주연을 배웅하고 돌아온 재현은 낯설고 어지러운 감정에 사로잡혔다. 남편이 죽은 후 승우가 아닌 남자와 식사를 하고 심지어 집에 들여 배웅까지 해주는 모양새가 기이하게 느껴졌다. 이게 맞나? 이래도 되나? 끊임없이 헷갈리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재현은 답을 찾을 비교군이 없다.
허전한 손을 내려다본 재현은 2층 계단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잡념을 떨치기엔 피아노만 한 게 없다. 계단을 올라온 재현은 피아노 방이 아닌 주연의 방 앞에서 시간을 끌었다. 문고리를 잡았다. 듣자 하니 하숙집에서는 사생활을 이유로 방 열쇠를 준다고 해서 주연에게도 열쇠를 줬다. 잠겼으려나 싶은 방문은 손쉽게 열렸다.
따로 손볼 데가 없는 정돈된 방이다. 재현은 숨을 흡, 하고 들이마셨다. 주연에게서 자주 나는 향내를 맡았다. 주연에게 둘러싸인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어서 재현은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재현은 허공에 손을 흔들어 가볍게 풀고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세월의 더께가 쌓여 노쇠한 피아노는 웬일로 생경하게 호흡했다.
“…?”
평소와 다른 느낌에도 연주를 멈추지 않던 재현은 놀라서 엉덩이가 튀었다. 까무러칠 뻔했다. 소리가 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습관처럼 누르는 피아노 건반에서 놀랍게도 음계를 내뿜었다. 재현이 피아노 덮개를 열어보는데 쪽지가 들어 있었다.
[재현씨는 재현씨만의 노래를 부르세요.]
숨이 덜컥 막힌 재현은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어느새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한때 간절했지만 이젠 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너무 그립지만 감히 그리워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나만의 노래를 부를 수 없어요. 재현은 서럽게 울었다. 비굴한 현실을 일깨우러 나타난 이주연이란 현현을 원망했다.
피아노 덮개를 닫고 2층에서 바삐 내려오는 재현이 지나간 자리마다 곯은 내를 풍겼다. 억지로 맞붙인 상처에서 나는 냄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