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Opposite


짝사랑을 위한 지침서

봉고

짝사랑을 위한 지침서

 

 

 

 

저 사람 진짜 조용하다.

 

이재현의 첫인상이었다. 아닌가. 잘생겼다가 먼저였나. 그것도 아니면 예쁘다가 먼저였나. 사실 주연의 머릿속에서 그날의 기억은 엉망진창 뒤섞인 채 온통 흐릿했다.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니고 술자리가 길었던 것도 아닌데 하루가 통째로 블러 칠한 것 같았다. 그래도 군데군데 선명한 장면들이 남아 있다. 이를테면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오가는 대화를 따라 도르륵 눈알을 굴리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던 이재현. 대화를 주도하기보다는 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웃으며 분위기를 맞추던 이재현. 두 눈은 반달처럼 잔뜩 접어 웃으면서도 손으로는 부끄러운 듯 입을 가리던 이재현. 입을 가린 손가락 틈 사이로 와하학, 활기찬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그마저도 상대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한 배려 같아 보였다. 조용한 이재현, 수줍은 이재현, 얌전한 이재현. 그럼에도 열과 성을 다해 웃어주고 배려해주는 사람. 정신이 이상하게 아득한 와중에도 그런 정보들이 확신에 찬 볼드체로 머릿속에 입력됐다.

 

그래서였다. 이주연이 주저 없이 이재현에게로 향한 건. 저 사람을 챙겨주고 싶다는 과열된 오지랖이 발동했다. 다짜고짜 재현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 이번에 신입 기수예요. 학교 동아리는 처음이라 너무 설레요. 재현이형이라고 하셨죠? , 근데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그리고 그렇게 돌진한 결과,

 

"! 엉덩이.. , 그럼 의사 선생님이 엉덩이 한 쪽에 놓을게요, 이러냐????"

 

이주연은 그날의 모든 기억을 사기극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재현은 전혀 조용한 사람이 아니었고, 지금도 목소리가 복도 전체에 쩌렁쩌렁 울릴 만큼 우렁차며, 이 남다른 데시벨은 4층 동아리방으로 향하는 2층 계단에서부터 감지가 가능하다. 얼핏 들리는 단어들은 또 뭔데. 엉덩이랑 의사 선생님 얘기는 왜 나와. 주연이 한숨을 쉬었다. 무엇보다 이주연이 가장 크게 사기를 당한 점은...

 

"어이, 쭈연!!! 잘 왔다. , 엉덩이가 한 쪽이냐 두 쪽이냐?"

 

동방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던 재현이 몸을 번뜩 일으켜 주연을 향해 물었다(외쳤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아무튼 이재현은 조용하지 않으니까). 그 와중에도 눈을 빛내며 기대감에 가득 찬 모습이 마치 강아지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조건 한 쪽이지. 그치. 너 주사 맞을 때 생각해봐."

 

의기양양한 저 얼굴은 더더욱 귀여워서 엉덩이가 두쪽이라고 생각하는 제 신념을 꺾고 거짓말을 해주고 싶을 만큼,

 

"... 당연히 한 쪽이죠. 주사도 한 번만 맞잖아요."

", 들었지? 주연이도 한 쪽이래잖아!"

 

이주연이 이재현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용하지도, 수줍지도, 얌전하지도 않은데. 첫 눈에 반하게 만든 모든 포인트들이 거짓으로 판명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이주연의 짝사랑은 현재진행형이다. 말도 안 돼. 이주연은 이 순간에도 얼이 나갈 것 같았다. 소파 끝에 걸터앉은 제게 재현이 엉금엉금 기어와 허벅지를 마구마구 때리며 엉덩이에 주사 놓는 의사의 모습을 시연했다. 와하학, 와하학... 엉덩이가 한 쪽...

 

정신이 아득했다.

이주연은 진짜로, 아주 크게, 사기를 당했다.

 

 

 

짝사랑을 위한 지침서

 

 

 

이주연은 진심으로 고소를 준비 중이다.

첫 번 째 죄목은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사기죄이고, 두 번째는 이재현이 이주연의 인간관계를 망쳤다는 것이다.

 

"아니, 얘들아..."

"또 시작이다. , 술맛 떨어져."

"차라리 너 고딩 때 정글 갔던 얘기를 더 해. 그건 박수라도 쳐줄게."

 

 

아니, 얘들아, 단 두 마디 꺼냈을 뿐인데 철저히 무시 당했다. 원래도 했던 얘길 또 한다며 질린다는 반응이야 친구들에게 익숙했지만 이렇게 상처 되진 않았다. 친구라면 고로 인생에서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어 주고 속마음 들어주고 아무리 팔천번 째 똑같은 말을 해도 이해해줘야 되는 거 아니냐고. 취기가 오른 주연은 더더욱 우울해졌다. 그래, 연애 사업도 망하고 우정 사업도 망하고 그냥 고독사로 죽어야겠다. 내가 뭐 큰 거 바랬냐고. 구구절절 짝사랑 스토리 좀 들어주면 안 돼? 그냥 유튜브에서 이별 playlist 틀어놓는 셈 치고 흘려라도 들어달라고. 요즘 부쩍 쉽게 유치해지는 주연의 입이 댓 발 나왔다.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모습을 살피던 친구들이 쯧쯧 혀를 찼다.

 

"아니, 지금 한 달 째 내내 똑같은 얘기. 상대가 누군지라도 말해줘야 우리가 조언을 해주든 말든 할 거 아냐. 적어도 인스타 프로필 정도는 보여줄 수 있잖아."

"그게... 사정이 있다니까. 그냥 예쁜 사람. 예쁜 사람이라고 상상하면서 들으면 안 돼?"

"어떻게 예쁜데."

"사슴 눈망울인데... 코도 진짜 높고... 얼굴도 작고... 청순한데 가끔 좀 부었을 때는 귀엽고..."

", 우웩. 됐어. 걍 말하지 마."

 

아니, 그럼 뭐 어떡하라고.

 

"니는 연애가 처음도 아니면서 왜 이래?"

"그니까. 대체 여자가 얼마나 이쁘길래 이러냐?"

 

테이블 위로 툭툭 던져지는 친구들의 질문에 이주연은 입을 꾹 다문 채 심란해졌다. 대답이 불가한 이유로는 우선 '이쁜'은 맞는데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이주연 인생에 연애는 몰라도 짝사랑 만큼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이주연은 보기보다 관계에 능했다. 목소리가 작고 말수가 적을 뿐, 그게 숫기가 없다는 걸 뜻하진 않았다. 적재적소에 필요한 말을 할 줄 안다는 것, 주연은 언제나 양보다 질을 추구했고 선천적으로 힘을 주는 법은 물론 힘을 푸는 법 또한 몸에 익은 사람이었다. 사람 간의 관계에서 원하는 위치를 선점해보지 않은 적이 없다. 축구장에선 툭하면 깍두기 취급을 당하고 친구들이 저급한 농담을 나눌 땐 그저 허허실실 웃으며 거리를 두곤 했지만, 그럼에도 늘 반장을 했다. 공부를 제일 잘하지도 않았고 수업 시간 내내 똘망하게 눈 뜬 학생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담임 선생님의 총애를 받았다. 심지어 성령이 충만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권사님이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는 단 한 명의 청소년부 학생이었다. 무언갈 잘 해내며 자기 자신을 굳이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 느슨한 채로도 단단한 사람. 그 속의 선하고 건강한 신념이 투명하게 비쳐서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사람. 이주연은 말하자면 관계의 주도권을 쟁취했다기보다, 자연히 상위에 위치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그러니까 이런 이주연에게 짝사랑이라는 건 여러모로 낯설었다. 단지 마음의 짝대기가 일방향이라는 최초의 경험일 뿐 아니라 상대에게 어떻게 하면 억지로, 애를 써서, 고의적으로, 잘 보여야 하는지, 자신이 기울어진 관계의 '아랫사람'이 되어보는 경험. 이주연은 이재현의 사랑을 쟁취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갖고 싶었다. 그치만 약아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넋이 나간 주연의 옆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 . 이주연. 전화."

", 누구? 그 여성분?"

"아니. 재현이형? 이란다."

 

재현이형?

 

". ? 나 나가서 전화 좀 받고 올게."

"뭐야, 그 형 니네 동아리 선배 아냐? 왜 맨날 이시간에 전화해서 불러? 혹시 군기 잡냐?"

 

바보들아, 그런 거 아니거든. 주연이 한숨을 쉬면서도 헐레벌떡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쿵쾅쿵쾅 심장이 뛰었다. 발신자의 의도는 전혀 달콤한 게 아닐 거라는 걸 알면서도.

 

 

-

 

요 근래 늦은 시간 연락이 잦아졌다. 통화를 마치고 코트를 챙겨 술집을 나서는 주연을 보며 친구들이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다. 뭔가 오해한 것 같지만 어쨌든 안타까운 상황인 건 맞으니까. 11시가 넘어가는 시간, 술집 문을 열어젖히니 찬바람이 훅 끼쳤다. 술을 많이 마시진 않았지만 혹시라도 티가 날까 버스를 타는 대신 걸어가며 정신을 좀 차리기로 했다. 가방에 있던 향수도 꺼내 뿌렸다. 형은 향수 냄새 별로 안 좋아한댔으니까, 너무 과하진 않은 걸로.

 

이주연과 이재현은 마치 운명처럼 친한 선후배 사이가 됐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이 친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이주연이 신입으로 들어오자마자 축제 시즌이 코앞이었다. 동아리에서 제일 큰, 누가 봐도 힘 써야 할 것 같은 두 사람은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책상도 함께 옮기고 의자도 함께 옮기고 무거운 조리도구부터 술박스까지. 수고한 보상이라며 축제를 준비하는 이주 내내 동아리 회비로 공짜 밥을 얻어 먹었다. 동아리 회장 누나가 사주는 밥도, 제일 나이 많은 형이 사주는 밥도 늘 함께 얻어 먹으러 다녔다. 어느새 둘은 세트 취급을 받았다. 재현이랑 주연이 어딨어. 재현이랑 주연이 부르자. 재현이랑 주연이 보고 하라고 하자.

 

게다가 이주연은 애초부터 이재현에게 음심을 품고 있었으니, 둘 사이가 가까워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주연은 이재현의 말에 누구보다 크게 반응했고, 이재현은 그러면 더 신나서 와하학거렸고, 그렇게 제가 처음 봤던 이재현의 모습이 한겹 한겹 벗겨졌지만, 이주연은 어쩐지 그게 싫기보다는 좋았다. 조용한 게 아니라 그냥 낯을 가리는 거였구나. 솔직히 말해 조용하고 수줍은 얼굴로 입을 가리며 웃던 이재현의 모습보다도, 어느샌가 스르륵 경계심을 푼 채 제 앞에서는 송곳니까지 환히 드러내며 와하학 와하학 가감 없이 제 감정을 표현하는 모습이 더 순수하고 예뻤다. 매일 아침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로 등교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비니 안에 머리를 숨기던 이재현이 어느 날은 새벽에 질질 쓰레빠를 끌며 뽀글뽀글한 짜파게티 머리로 제 앞에 등장했을 때는 심장이 얼마나 뛰던지.

 

이재현은 이주연에게 확실히 마음의 문을 열었다. 둘은 누가 봐도 친한 사이다. 여기까지는 이주연이 제 생애에서 마주친 여느 어느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누구나 이주연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둘이 이제 늦은 시간에도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 번개를 하는 '가장' 친한 선후배가 됐다는 점이고, 이주연은 그 이상으로 '가장''가장'을 더한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기 때문에, 이 관계는 이주연이 지금껏 경험해본 적 없는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 니 걸어왔어? 학교 근처라며. 버스 타고 오지."

 

제 앞에 나타났다. 이 관계의 목줄을 쥔 사람. 목 빠져라 이뻐해달라 눈빛을 보내야 하는 사람. 근데 자기가 목줄을 쥐었다는 것도 모르는, 이재현.

 

"그냥 좀 산책도 할 겸 걸었어요."

"너 코 빨개. 빨리 닭 뜯으러 가자."

 

오늘 가장 친한 선배가 가장 친한 후배를 호출한 사유는 다름 아닌 치킨이었다. 우와, 맥 빠져.

 

"아니, 내가 그랬잖아. 원래 우리 동네에 좀 추워지면 오는 전기통닭 트럭이 있거든? 올해는 왜 안 오나 했는데 아까 편의점 가다가 딱 본 거 있지. 대박이지."

"그러게요. 진짜 대박이네요."

"형이 너 안 잊고 불렀따. 잘했지? 그치? 고맙지?"

", 진짜 대박이에요."

 

저 멀리 빛나는 전기통닭 트럭의 모습에 괜히 서러워 비슷한 단어들만 돌려막으며 대충 답하는데도 이재현은 그냥 들떠 보였다. 형은 진짜 치킨을 좋아하는구나... 근데 그렇게 좋아하는 치킨을 보고 내 생각을 해서 나한테 전화했구나... 어떻게든 행복회로를 돌리려고 애썼다.

 

"근데 이 시간에 달려오다니 주연이 너도 진짜 나 못지않다. 치킨이 그렇게 좋냐?"

 

행복회로 작동 오류. 바로 불행해졌다. 이주연은 사실 치킨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심지어 야식은 절대로 안 먹는다. 밤 열한 시 반에 전기통닭? 그것도 소스 잔뜩 찍어서? 이주연의 루틴에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형이 전기통, 하자마자 뛰쳐나왔잖아요."

 

일부러 과장되게 마라톤 선수 같은 포즈를 취하며 말했다. 와하학, 이재현이 또 제 등을 퍽퍽 치며 웃었다. 그래, 이 웃음을 보면 됐다. 이주연은 그냥 이 기울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제 진심을 숨기고 억지로, 애를 써서, 고의적으로 행동하기를 결심했다.

 

이재현이 데려온 전기통닭 트럭은 트럭이라기보다 포장마차에 가까웠다. 우동이나 짜장면 같은 것도 함께 파는 것 같았다. 형 다른 것도 먹을래요? 묻는데도 결연하게 아니 오늘은 치킨에만 집중한다, 하는 얼굴이 귀여웠다. 후드 사이로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얼핏 보였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곧이어 따끈따끈 김을 내뿜는 치킨이 나왔다. 우와, 형 저 전기통닭은 처음 먹어요. , 너는 치킨 좋아한다면서 이것도 한 번 안 먹어봤냐. (왜냐하면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니까...) 이재현은 익숙한 듯 나무젓가락을 뜯어 치킨을 먹기 좋게 해부하기 시작했다. 기다려봐. 형이 다 해주께. 입이 살짝 튀어나온 집중한 얼굴, 이보다 믿음직스러울 수 없었다. 주연이 너는 퍽퍽살 좋아하잖아. 이거, 이거, 너 다 머거. 서툰 젓가락질로 주연이 좋아할 만한 부위를 골라다가 앞으로 놔줬다. 제 앞에 삐뚤빼뚤 투박하게 놓인 퍽퍽살들을 보며 주연은 다시금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이주연이 이재현을 고소하고 싶은 또 다른 사유는 바로 이 다정함이다.

 

마냥 다정하게 퍼주기만 하면 느끼하고 질릴 텐데, 이재현은 그런 시시한 부류가 아니다. 섬세하게 필요한 걸 원하는 때에 채워줘서 마음을 찡하게 만들다가도, 감동이 차오를 만 하면 예상치 못하게 시원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장난을 쳤다. 완벽하거나 딱딱하기는커녕 오히려 허술하고 어리숙한데도 그 다정함에는 흠이 없었다. 7세 유아 같은 엑스자 젓가락질로도 퍽퍽살을 다 골라주는 이재현. 롤하는 초딩처럼 야 내가 짱이지 형이 짱이지 하면서도 눈을 찌푸리고 있으면 햇빛을 가려주고 진이 빠져 있으면 커피를 물려주는 이재현. 이거 완전 한국인이면 껌뻑 죽는 엽떡에 허니콤보, 불닭볶음면에 콘치즈, 편의점 마크정식 뭐 그런 거다. 느끼할 만 하면 매콤하고 너무 맵다 싶으면 달콤하고 달면서도 짭조름하고.

 

그러니 토종한국인 이주연이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는 건 전적으로 이재현의 과실 100퍼센트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식의 다정함은 자꾸만 이주연에게 그 이상을 기대하게 만든다는 데서 형량이 추가된다. 누구한테나 이런다는 거 아는데, 원래 이런 사람인 거 아는데. 그래도 단 둘이 있는 순간 만큼은 왠지 제가 특별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심란한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앞에서 이재현은 치킨 뜯기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었다. 와앙, 얼굴을 한껏 꾸기며 일부러 과장되게 쩝쩝거리는 장난기 가득한 모습조차도 청순하고 귀여워 보이는 내가 미친 거겠지. 주연이 부러 시선을 거두고 퍽퍽살을 뒤적거렸다. 쭈여나 이거 봐봐 나 유튜브에서 닭다리 발굴 배웠다. 저 형은 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

 

 

사랑하면 누구나 최악이 되나? 그럼 짝사랑은? 더더욱 최악이 되나? 아주 바닥까지 곤두박질치나?

 

주연은 이 모든 상황이 거짓말 같았다. '짝사랑할 때 사람은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가'를 주제로 진행되는 임상시험에 원치 않게 초대된 느낌이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시나리오를 이렇게 짠 것처럼.

 

이주연은 엊그제 이재현에게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앓아누웠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열이 펄펄 나서 이불 밖으로 기어나갈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요새 날씨가 급격히 쌀쌀해지긴 했는데, 타고나길 튼튼한 몸과 면역력에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버린 데는 이재현이 큰 역할을 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동아리 회의라면 빠짐없이 출석하던 이재현이 그날은 안 보였다. 재현이형 왜 안 와요? 관심 없는 척 은근히 던진 질문이 불씨가 됐다. 걔 요즘 연애하느라 바빠. 맞아, 이재현 연애하는 거 같더라?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의 말이 수군수군 겹겹이 얹히니 가짜라고 믿고 싶어도 꽤나 진실 쪽으로 무게가 실렸다. 에이, 설마. 빠르게 뛰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며 황급히 핸드폰을 켰다.

 

[형 오늘 동아리 회의 왜 안 왔어요?] 1

[저한테 말도 없이 ㅠㅠ] 1

 

그날 회의 주제가 뭐였는지 대체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다. 마지막에 대충 또 주연이랑 재현이가 그거 하자~ 라고 결론이 난 것 같은데 모르겠고, 이주연의 신경은 온통 사라지지 않는 1에 쏠려 있었다. 원래 이렇게까지 답장이 늦는 사람이 아닌데. 애초에 쭈연(공식 세트)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회의에 빠질 사람이 아닌데. 답장은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주연이 집 가는 버스에 올라 탔을 때 왔다.

 

[누구랑 같이 있느라 못 봤네]

[말한다는 걸 까먹었다 쏘링]

 

누구랑? 같이? 얼마나 재밌는? 시간을 보냈길래 못? 봤지? 말하는 걸 까먹을?만큼? 쏘리도 아니고 쏘링?은 또 뭐지? 평소엔 ㅠㅠ나 이모티콘도 잘 쓰던 사람이 오늘따라 아무것도 없이 무미건조하고. 방금 전까지도 온 마음을 다해 거짓 루머라고 땅땅 결론 내려놨던 '그 소식'이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요즘 맨날 나랑 만나놓고. 전기통닭도 나랑 먹고 황금올리브도 나랑 먹고 동근이숯불두마리치킨 신메뉴도 나랑 먹었으면서. 나는 그냥 친한 동생, 치킨 메이트 그 정도였나. 아무 사이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치킨 약속이 잡히고 메뉴가 변경될 때마다 기대하는 마음이 커졌던 건 사실이다. 그래도 혼자 설레할 여지 정도는 남겨두지. 이럴 필요까진 없었잖아. 집 가는 버스, 주연은 실수로 임창정 노래를 틀었다. 그리고 실수로 창밖을 바라봤고, 실수로 학교 바로 근처 이재현이 사는 오피스텔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실수로 울었다. 청승도 이런 청승이 따로 없었다.

 

거기서 끝일 줄 알았는데, 이주연은 더더욱 최악의 상태가 되고 말았다. 마음이 서러워서 몸까지 서러운 건지, 아니면 몸이 서러워서 마음도 서러운 건지, 전후 관계를 파악하기 힘들 만큼 머리가 뜨거웠다. 근래에 이렇게 아파본 적이 있었나 싶게 아팠다. 이 순간에도 생각나는 건 오직 단 한 사람. 주연은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마지막 정신줄만은 꽉 잡으려고 노력했다. 이재현한테 연락하는 짓만은 절대 하지 않을 거다. 이미 지금도 짝사랑할 때 하면 안 되는 행동 모음.zip을 거의 도장 깨기 하고 있는데, 이 이상으로 추해질 순 없다.

 

1. 별것도 아닌 행동에 의미부여 하지 않기.

2. 김칫국 마시며 썸타는 사이라고 오해하지 않기.

3. 혼자 사귀었다가 혼자 헤어지는 행동 하지 않기.

4. 짝사랑하는 게 뭐라도 되는 양 자기한테 떨어질 몫의 감정을 상대에게 맡겨놓은 것처럼 굴지 않기.

 

여기에 5번 애인도 아닌데 아프다는 핑계로 전화 걸어서 부르지 않기, 까지 추가 되면 정말 최악의 하남자 종합선물세트 완성하는 거다. 침착하자, 이주연. 원래의 주연이라면 어떤가. 아픈 것 쯤 혼자서 당연히 이겨낸다. 쓰러질 것처럼 아플 때마다 유난을 떠는 쪽은 이주연 본인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인들이었다. 저 자신에게 배당된 감정과 상황들은 스스로 처리하는 것, 남에게 손 벌리거나 의지하지 않는 것, 그거 이주연이 한평생 제일 잘하는 거였는데. 이주연은 짝사랑이라는 걸 시작한 후로 자신의 모습을 전부 부정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의지와 다르게 카톡 채팅창을 누르는 모습까지도......

 

[형 저 몸이 진짜 안 좋아요.] 1

[웬만하면 걱정 끼치고 싶지 않은데...] 1

[죽 좀 사다주시면 안 될까요] 1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화면을 끄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미쳤다, 이주연. 제정신이 아니다. 뭐에 씐 게 분명하다. 가오 같은 거 굳이 챙기면서 산 적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가오가 상한다는 그 느낌이 뭔지 너무나도 생생히 알 것 같았다. 관계의 줄다리기에서 이렇게나 약자가 될 수도 있다니, 이런 패배감을 느낄 수 있다니. 금세 진동이 울렸다. 방금 던져놓은 핸드폰을 다시 주워 왔다. 이번엔 1이 빠르게 사라졌다. 이재현이 집으로 온다.

 

꾀병은 아닌 터라 그 잠깐 사이에도 이주연은 얕게 잠이 들었다. 초인종 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켜서 거울 속 모습을 살폈다. 수염이라도 좀 깎을 걸. 함께 늦은 시간까지 회의를 하거나 술을 마실 때마다 거뭇해진 제 얼굴을 보며 아저씨라고 놀리던 이재현이 떠올랐다. 아씨, 몰라. 현관문 앞에는 미운 이재현이 볼캡을 눌러쓴 예쁜 얼굴로 서 있었다. 손에 든 종이백이 묵직해 보였다.

 

", 뭐 이렇게 많이 사 왔어요."

", 너 진짜 아픈가보다. 문 열자마자 열 확 끼치는 거 봐."

"죄송해요. 형 제가 부탁할 사람이 형밖에 안 떠올라서... 감기 옮으니까 그냥 주고 가셔도 돼요. 진짜 감사해요. 제가 다음에..."

"뭐래. 비키세요, 아저씨. 저 그렇게 정 없는 사람 아닙니다아."

"아니, 가까이 오지 말..."

 

말을 제대로 마칠 틈도 주지 않고 재현이 무단으로 침입해왔다. 장난처럼 퍽, 제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데 몸에 힘이 없긴 한지 그 정도에도 휘청거렸다. 재현이형 힘 짱 쎄. 짱 멋있어. 재현이 종이백에서 꺼낸 것들을 차곡차곡 식탁 위에 올려두는데, 새로운 게 등장할 때마다 감동이 차올라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죽만 해도 몇 종류는 되는 것 같았고 김치를 잘 먹는 주연을 위해 김치 반찬만 따로 더 받아온 것 같았다. 약봉투도 보이는 것 같고... 이러면 내가 어떻게 안 좋아하냐고.

 

"아니, . 저 일주일 동안 죽만 먹어요? 왜 이렇게 많이 사 왔어요?"

 

제가 뱉어놓고도 음절 사이사이에 히읗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뻘쭘했다. 좋아하는 거 너무 티 나나.

 

"한 끼에 두 통 씩 먹어, 인마. 아플 땐 그래야 빨리 낫는 거야."

"꼭 그럴게요."

"말로만?"

"?"

"지금 내 앞에서 일단 한 통 뜯자."

 

주연의 의사와 상관 없이 특전복죽 하나가 식탁에 놓였다. 장조림, 김치, 동치미에 수저까지 풀세트로. 나 혹시 지금 꿈꾸나. 몽롱한 정신의 주연이 자리에 앉았다. 마주 본 자리에는 이재현이 있었다. 가뜩이나 몸이 뜨거운데 귀까지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형도 같이 드실래요?"

"아픈 애 거 뺏어 먹는 취미 없따. 너 다 먹어. 그거 먹는 거 보고 갈 거야."

 

그럼 천천히 먹어야겠다... 주연이 평소보다 느릿하게 숟가락을 들었다. 갓 포장해 와서 뜨끈한 죽이 식도를 넘어갈 때마다 머리는 점점 개운해지는 것 같은데 마음 깊숙한 데서 튀어나올 것 같은 질문은 도저히 삼킬 수가 없었다. 지금 물어봐도 그냥 아파서 제정신 아닌 놈의 주정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형 근데 진짜 여자친구 생기셨어요?"

"?"

"... 동아리 선배들이 그러길래요... 그럼 바쁘실 거 같아서."

"..."

"음이요?"

"그렇다고 하면 안 그래도 아픈 주연이가 너무 슬퍼할 거 같은데."

"?"

 

정적이 돌았다.

 

"... 제가 왜요..."

 

말까지 더듬었다. 최악.

 

"아님 말고."

 

씨익 웃는 이재현.

상황을 파악하는 데 십오 초 정도 걸렸다.

주연은 지금껏 삼킨 모든 걸 뱉어낼 뻔했다.

 

"아니... 어떻게 알았어요?"

"주연이 너는... 진짜 다아아아아 티가 나."

 

얼굴 전체가 벌게지는 게 느껴졌다. 언제부터? 순간 제가 세상에서 제일 멍청할 얼굴로 이재현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일단 눈앞에 놓인 특전복죽으로 시선을 도망치듯 옮겼다. 황급히 숟가락질을 하기에도 우습고, 멍하니 앉아 있기도 우습고, 주연이 허둥지둥하는 사이에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재현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쩐지 얼굴에는 아직도 장난기가 가득한 것 같기도 하고.

 

", 가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 주연이 편하게 먹으라고."

 

아씨, 그냥 망했다.

신발 신는 이재현 옆에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얌전히 서 있었다. 그냥 아무 행동도 하지 말자. 가만히 있자, 자연스럽게. 외투까지 고쳐 입은 재현이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 오늘 죽 너무 감사해요. 조심히 가세요. 말하려는 찰나에,

 

", 그리고 여자친구 같은 거 없다."

 

이와중에도 기분 좋으면, 나 정말 미친 건가. 헛웃음이 터졌다. 현관문 틈새로 찬바람이 불어왔지만 몸의 열기가 도무지 내려가지 않았다.

 

 

-

 

 

이주연은 이재현을 짝사랑한다.

이게 아니지.

 

이주연은 이재현을 짝사랑한다.

이주연은 이재현을 몰래 짝사랑한다고 믿었다.

 

언제부터?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됐을 때 이재현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내가 징그럽고 싫었을까. 근데 이주연이 아는 이재현은 그렇게 못된 사람은 아니다. 그럼 그냥 불쌍했을까. 워낙 정이 많고 따뜻한 사람이니까 그래서 더 잘해줬을까. 명료하게 정돈되지 않은 물음표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부유했다. 왜인지 모르게 미안했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게 괜히 억울했고, 이 순간에도 억울해하는 저 자신이 싫었고, 어엿한 성인이면서 제 감정 하나 제대로 감추지 못한 게 한심했다. 이재현과 함께하는 사소한 순간마다 커다랗게 부풀었던 기대감들이 응어리져 가슴 한켠을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후련하기도 했다. 이재현은 이주연이 자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다. 알고도 참아줬다. 지금쯤 그만해야 된다. 더 이상 이재현을 괴롭히고 싶진 않다.

 

제대로 시작해보지도 않은 채 끝내버리기, 이런 건 이주연 인생에 없었다. 시원하게 제 속내를 고백하고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고 제 감정이라면 또박또박 표현하고 남들에게 재단 당하는 것에도 두려움이 없었지만, 이번만은 많은 게 달랐다. 보통 짝사랑도 아니고 남성과 남성이라는 변수까지 개입된 특이상황인데다가, 무엇보다 이주연은 이재현이 너무, 그것도 너무너무 좋기 때문이다. 이주연은 이재현 때문에 처음 마주하는 제 모습이 너무 많았다. 그동안 제가 여유 넘치고 기고만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게까지 크고 조심스러운 마음을 품어본 적이 없어서였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그래서였다. 짝사랑할 때 하면 안 되는 행동 모음 6, 사귄 적도 없고 고로 헤어진 적도 없는데 구남친처럼 술 취해서 전화하기, 를 실행해버리고 만 건. 사유는 그냥 너무 좋아서.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는데, 애석하게도 제 앞에는 이재현이 앉아 있었다. 하필이면 장소도 전기통닭 파는 포장마차. 분명 혼자 소주잔 꺾으며 지난 인생을 반추하고 반성하다가 테이블에 머리 박는 게 시작이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심장은 쿵쿵 뛰고 온몸은 뜨겁고 머리는 핑핑 돌고 이재현이 있다. 모든 게 다 구리다.

 

"혀엉..."

"그랴. 불렀으면 뭔 말이라도 좀 해봐라."

 

 

이재현은 꽤 오랜 시간 제 앞에 앉아서 제가 사람다운 말을 꺼내기를 기다려준 것 같았다. 날씨가 쌀쌀해서 코끝이 빨갰다. 미친 이주연, 최악 중에 최악. 얼른 어른스러운 말을 꺼내자

 

 

", 있잖아요."

"."

"제가 착각한 거 같아요. 저 형 안 좋아하는 거 같아요."

", 그럼 지금까지는 좋아했구나~"

 

뇌 한쪽 유일하게 정상적인 사고 기능을 하고 있는 아주 작은 면적에서 이건 아니라고, 관두라고 시그널을 보내왔지만 도무지 주체가 되지 않았다. 이주연과 찌질함, 이런 단어 조합이 가능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찌질하다, 찌질하다, 그 단어를 한 번 되새기자 더 찌질한 말들이 참을 새도 없이 튀어나왔다.

 

"형 그리고 저 진짜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 있는데요."

". . 좋아한다고?"

"아닌데요."

"그럼, 혹시 사랑한다고오??"

"아니라고요."

 

실실 웃는 이재현, 짜증 나.

 

 

"동아리방에서 조용히 좀 해주세요. 형 목소리 복도에 다 들려요."

 

왜 답이 없지. 혹시 한 방 먹였나.

 

"형 웃을 때도 너무 크게 웃어요."

 

이재현이 오묘한 표정을 짓는다. 지금 저 표정에 담긴 의미를 똑똑하게 해독하기엔 이주연 체내에 알콜 농도가 너무 높다.

 

"근데요, 형 진짜 크게 웃어서... 송곳니가 다 보여."

"참나. 어쩌라고."

"여기. 여기 볼에 주름 같은 것도 생겨요. 그거 진짜 귀여운데..."

", 그래서 어쩌라고."

 

사랑에 단단히 콩깍지가 씐 사람의 주정을 듣다 못한 재현이 피식 웃었다. 이주연은 그렇게 주절거려놓고도 아직 후련하지 않다는 듯 뚱한 얼굴이었다. 원래도 눈을 반만 뜨고 다니는 게, 힘까지 풀려서 완전 고양이 같아져가지고. 입술은 댓 발 나오고. , , 더 할 말 있어? 달래듯이 묻자 1초 만에 반응이 온다.

 

"형 그리고 못생겼어요."

". 그런 소리 자주 들어."

"? ? 진짜요? 어떤 새끼들이요? 눈이 삐었나?"

"방금 너 새끼가 그랬잖아요."

"... 죄송해요, . 취소할게요. 거짓말이에요. 진짜 너무 예뻐요. 잘생겼어요."

"그 소리도 자주 들어."

"어떤 새끼들이요."

 

마시마로 같은 눈을 해놓고선 눈빛만 그렇게 살벌해지면 다냐고. 재현은 헛웃음이 나왔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제가 너무 좋아서 안달인 걸 숨길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숨기는 법을 모르는 건지 헷갈리게 굴던 이 연하남을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았다. , 짝사랑 처음이구나. 나 진짜 좋아하는구나. 재현이 한동안 말이 없자 그새 분위기를 살피다가 더더욱 이유 없이 우울해진 주연이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채 물었다.

 

", 저 이러는 거 진짜 추하죠..."

"아니? 귀여워."

"저 원래 진짜 안 이러는데..."

"그니까. 주연이 다른 사람들 앞에선 멋있는데 내 앞에선 귀엽고. 유치하고. 바보 같고."

", 혀어엉..."

 

재현의 입으로 객관화해서 들으니 주연은 제가 재현 앞에서만 유독 제정신이 아니라는 점이 미칠 것처럼 억울했다. , 제가요, 나름 초월읍에서 제일 의젓한 어린이 출신이거든요. 저희 증조할아버지가 저처럼 어른스러운 손자는 첨이라고 그랬어요. 제가 동네 동생들 태권도 띠도 다 매줬는데...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절대 아닌데, 마음 같아서는 구구절절 이력서에 교수님 추천서까지 받아다가 제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은 처음인데, 억지로, 애를 써서, 고의적으로라도 마음을 사고 싶었던 건 처음인데. 얕은 수를 쓰며 이리저리 저 자신을 꾸며내기에는 재현에 대한 마음이 지나치게 깊은 탓에 모든 게 다 망해버렸다고, 이주연은 생각했다.

 

"주연아."

 

그렇게 진지하게 부르지 마요, . 주연은 덜컥 겁이 났다. 좋아하지 말라고 하면 어쩌지, 너 진짜 우습고 유치하다고, 말도 걸지 말라고 하면 어쩌지.

 

", 안 변할 수 있냐?"

"... ?"

"계속 지금처럼 바보 같을 수 있냐고."

"아니 그러니까, ? 왜요?"

"그럼 한번 생각해보고."

 

미래지향적인 어투에 주연은 어안이 벙벙한 동시에 술이 확 깨서 정신이 말똥했다. 이재현의 말뜻을 이해하려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니까, 관두라는 것도 아니고 멍청한 모습을 바꾸라는 것도 아니고,

 

"지금처럼 계속 나 좋아할 수 있냐고, 바보야."

 

그냥 계속 바보여도 된다니.

 

짝사랑을 앓는 동안 이주연의 모습은 분명히 볼품없었다. 솔직한 적도 없었고 느긋하지도 못했다. 혼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좋아했다가, 사소한 행동에 쓸데없는 의미를 부여해 이재현을 미워한 적도 있다. 그래도 그게 그냥 이재현이라는 사람을 만나 어쩔 수 없이 일어난 화학반응이라면, 그리고 이렇게 바보 같은 모습이 그저 사랑에 빠진 거라면. 지금은 짝사랑에 마침표를 찍을 만한 적절한 타이밍인가. 그제야 주연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퍼졌다.

 

짝사랑은 지금껏 번지르르하게 포장돼 있던 자신의 모습이 한겹 한겹 초라하게 벗겨지는 과정, 그런 모습을 속속들이 들켜버린 뒤에도 사랑해달라고 우기는 뻔뻔한 요구. 이주연은 이 순간 이재현 덕분에 저 자신이 덜 부끄러웠다. 덜 미웠고, 덜 낯설었다. 웃음이 자꾸 비집고 나왔다.

 

"좋냐?"

 

푸핫, 재현도 웃음을 터뜨렸다. 얄밉고도 귀여운 얼굴이었다. 이주연은 한껏 바보가 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언젠가 이재현도 제 앞에서 가장 바보 같을 수 있기를, 그런 이상한 바램을 품었다. 바보 같게도.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