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Opposite


아담의 흉터

셍작

 

 

 

 

 

 

 

이재현은 낭만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오른쪽 갈빗대에 새겨진 암호 같은 네임이 마음에 들었다. 각진 선으로 시작돼 둥글게 마무리되는 모양이 선명한 흰색으로 빛나서 아주 예뻤다. 손가락 두 마디 크기에 위치는 딱 아담의 흉터였다. 갈빗대 쪽에 있는 네임을 이르는 별칭이었다. 첫 인류에게 짝이 생긴 흔적, 최초의 로맨스라나.

 

 

그러나 타고난 낭만에 취해 있던 것도 몇 년 전의 일이다. 연애질도 운명 운운도 지금 일상에서는 다 여유고 사치이기만 했다. 방송국 아나운서로 취뽀하자마자 눈물 쏙 빠지는 신입 교육, 이후에는 현장 투입에다 살떨리는 사회생활, 적응할 만하니 일하고 일하고 일하는 날들이었다. 오늘만 해도 깜깜한 새벽에 출근해 라디오뉴스 한 타임 이후에는 아침뉴스 문화코너, 그리고 다시 라디오뉴스 그 다음은 교양프로그램 더빙.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녹음 일과까지 마치자마자 피로가 급격히 몰려들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잠시 멍하니 앉아있는데 동기가 인사를 해왔다. 재현이 퀭한 눈으로 인사를 받아줬다.

 

 

그거 해 봤어요?”

 

 

그거라면 네이머즈 앱을 이르는 거였다.

 

 

네이머즈는 신체에 네임이 발현한 네이머들이 모여 자신의 운명을 찾는 앱이다. 매칭률이 나쁘지 않으며 네이머들 사이에 활발하게 활용되는 중이었다. 전문가 검증으로 조작이 아닌 네임이라고 증명받고서야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당신의 이름을 기다립니다. 네이머즈에서 운명을 완성하세요.]

 

 

처음 그 문구를 보자마자 재현은 침을 꼴깍 삼켰다. 며칠 눈이 벌게져서는 네이머들의 수많은 사연과 매칭리스트를 구경하느라 잠도 설쳤다. 앱에서는 정확한 네임을 밝히지 않고, 그 외의 요소와 취향에 따라 네이머들끼리 또다시 운명에 맡기는 시스템이었다.

 

 

. 재밌더라고요.”

구애인에게 본때를 보여줄 운명을 만나세요.”

 

 

마지막 연인과 헤어지고 제대로 연애한 적이 없었다. 운명에 대한 집착도 그때부터 놓았다. 지쳤던 탓이다.

 

 

재현이 희미하게 웃었다. 일찌감치 운명을 만나 결혼한 동기는 약지 안쪽에 네임이 있었다. 일부러 새긴 레터링 타투 같았다. 저 위치의 네임은 웨딩링이다. 재현은 그 손가락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는 했다. 운도 좋지.

 

 

네임은 불명확한 모습이라 전문적인 해독이 필요했다. 굴곡이 완만하거나 비비 꼬인 문양의 네임들도 있었다. 알아보든 모르는 채로 살든 자유였지만 대부분의 네이머들은 자신의 네임이 지닌 발음을 파악하고 있었다.

 

 

재현 또한 열여덟 살에 발현한 네임을 성인이 되자마자 기관에 문의해 해석해 놓았다. 발음하자면 지우이언. 그래서 재현이 데이트했던 사람들은 이름이 거의 비슷했다. 지언, 기원, 두영그런 이름이기만 하면 다른 요건 다 제쳐두고 상대에게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중에 한 놈은 그가 가진 이름 때문에 끌려서 제대로 만나다가, 결국 그놈의 네임때문에 지독하게 언쟁하고 헤어졌다. 그게 5년 전이었다. 밤낮 우느라 카메라 앞에 나가기 전에 부기를 빼는 데에 한동안 고생하던 게 아직도 어제 같다. 이미 어긋난, 운명도 아니었던 놈 그만 잊어야 되는데. 사실은 종종 지나간 그놈을 떠올리며 다리 사이를 위로하고는 했다. 그만한 식이 없기는 했다. 5년이 지나고도 미련스럽게, ‘과거라고 하면 그놈밖에 없었다.

 

 

네임 위에 커버업타투나 제거시술을 받을 생각도 없고, 여전히 네임의 운명을 믿고는 있었다. 다만 네임이 겹치지 않는 상대와 네임 이야기를 하면 좋은 관계가 깨지기 십상인 것을 몸소 깨닫고는, 네임을 철저하게 꼬박꼬박 숨기고 다녔다. 이것도 다 5년 전 이별이 계기였다.

 

 

입사 초기에야 정신없이 일하며 지내 놓고, 생활이 어느정도 안정되니 모른 척하던 외로움과 허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를 알아채고 최근 네이머즈 앱을 소개해준 게 눈앞의 동기였다. 호기심은 있으나 소개팅 어플이나 다름없어 보이기에 작위적이라는 거부감이 있었는데, 그런 재현을 동기가 설득한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네이머즈의 도움을 받아 운명의 상대일지도 모르는 이를 만나 보기로 했다. 얼굴도 모르고 정체도 모르고 오로지 운명에 맡겨 본다. 무모하고 대책없는 매칭이었다.

 

 

설마 아는 사람 나오려고.’

 

 

재현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거의 가린 상태였다. 안 그래도 얼굴이 어느정도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보니, 만약을 대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주변에서 알아봐도 난감할 테고.

 

 

사실 나서기까지 많이 망설였다. 요즘 꽤 잘나가는 T사 막내 아나운서인 미남 이재현이니, 만남이 제대로 성사되지 못하면 쓸데없는 소문의 꼬리를 다는 것밖에 되지 않을 테다. 부디 괜찮은 사람이 나오길 바라며 약속 장소로 갔다.

 

 

상대도 근처에 산다고 했다. 방송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재현이라, 미디어단지 끄트머리에 있는 벤치에서 보기로 했다. 낮에 사람이 몰리는 흡연구역이지만 늦은 오후부터는 한적한 곳이었다.

 

 

약속은 네 시 반이었고, 10분 일찍 도착했다. 벤치에 앉으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벤치 반대쪽 끝에 앉아 있던 이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

 

 

재현이 눈썹을 찌푸렸다가 그대로 굳었다.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이미 눈이 마주쳤기에 그를 피하지도 못했다. 상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재현을 보더니, 이내 알아봤는지 표정을 풀고 평화롭게 인사를 건넸다.

 

 

, 오랜만이야.”

 

 

차분한 태도와 시원하게 뻗은 이목구비는 이주연 그대로인데, 기억보다 인상이 물씬 익어 있었다. 스케줄이 있었다기에는 머리도 옷도 단정했다. 누가 봐도그럴 리가. 재현이 허둥지둥 튀어나오는대로 대답했다.

 

 

, 그래. , 진짜 이런 우연이. 여기서 다 만나냐. 제대했지?”

 

 

주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게 보였다.

 

 

제대한 거 어떻게 알았어?”

 

 

아차.

 

 

아니. . 우리나라 사람이면 다 알지.”

한참 됐어. 머리 다 길었잖아.”

그래. 그러네.”

 

 

재현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얘가 여기 왜 있지. T사 스케줄도 종종 있던 주연과 우연으로도 마주칠 일이 없었는데, 하필 왜 지금인 건지.

 

 

너 뭐 여기서 볼일 있어?”

누구 만나기로 해서. 형은?”

어 나도 뭐.”

 

 

그럴 수 있다. 주연은 연예인이고 미디어단지는 모든 방송인의 활동지고. 그런데도 불안이 엄습한다. 이렇게나 반기고 싶지 않은 운명일 리가.

 

 

같은 벤치에 멀찍이 거리를 두고 앉은 채로, 말 없이 시간이 지났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재현은 시간을 확인했다. 정각이었다. 어플을 켜고 메시지를 보냈다. 어디세요? 그리고 타이밍 좋게 주연이 핸드폰을 꺼내더니 바로 부지런하게 메시지를 보낸다. - 바로 재현의 알람이 울렸다. 저 도착했어요.

 

 

악법도 법이다. 악연도 인연이다.

 

 

재현이 이마를 짚고 오늘의 비운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래, 네가 키티쥬쥬님이니?”

. 뽀메왕왕님.”

너 운명 안 믿는다며.”

그랬지.”

 

 

주연이 손으로 자신의 갈비뼈 쪽을 툭툭 쳤다.

 

 

근데 운명의 선택을 받았네.”

 

 

네임의 운명운운하다가 멀어진 연인이 네임의 운명이 놓은 오작교에 서 있었다.

5년의 간극을 두고도 여전히 너는 나를 괴롭게 만든다.

 

 

 

 

 

 

 

 

 

 

#

 

 

 

 

 

 

 

 

 

 

두 사람이 할말 대신 선택한 건 술이었다. 한적한 이자카야에 들어가 룸 자리에 앉았다. 재현은 마스크를 벗고 모자를 고쳐 썼다. 숨졸이며 이 자리에 나왔던 게 창피해졌다.

 

 

마주앉았으나 서로 선뜻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재현은 당사자를 앞에 두고 오랜만에 옛날 생각에 빠졌다. 지금보다 더 앳되고 어리숙했던 주연의 얼굴, 그 위로 꿈틀대던 수많은 감정들이 절로 떠올랐다.

 

 

형 아직도 예쁘네.”

 

 

찔끔찔끔 물을 마시던 재현이 그대로 물을 뱉었다.

 

 

.”

원래 예쁘긴 했는데.”

웃길라고 나왔냐.”

 

 

그때는 아직 어려서 작은 자극에도 휘둘릴 때였는데도, 주연에게 유독 강하게 끌리는 게 다른 사람들과는 확실히 다르다고 느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네임이 없다고 했을 때 솔직히 실망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재현은 철썩같이 믿었다. 자신이 가진 네임에 부합하는 주연이고, 주연을 만나기 위해 존재하는 네임이라고. 그정도로 이주연을 좋아했다.

 

 

재현은 한시라도 빨리 취하고 싶어서 소주를 시켰다. 물 한 잔 마시고 바로 소주부터 넘겼다.

 

 

이주연은 나를 좋아했나? 그건 맞았을 거다. 그럼 이재현을 믿었나? 모르지. 이제 와서 무슨 의미인가 싶은데도 5년 묵었던 서운함이 대양 한가운데의 거대한 해일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나저나 쟤도 나름대로 민망하겠다. 몇 분 전까지 재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주연이 쪽팔릴 거라고.

 

 

운명은 안 믿어.’

 

 

단호하게 그런 말을 했으면서 결국 네이머가 되었으니까.

 

 

그러나 주연은 태연하게 재현의 앞에서 소주병을 기울였다. 오히려 여유로운 주연의 앞에서 재현이 민망해졌다. 혼자 붉으락푸르락 얼굴을 꿈틀거리다가 세 잔째 훌렁 입으로 털었다.

 

 

적당히 마셔. 형 내일 일찍 나가야 되잖아.”

니가 어떻게 알아 그걸.”

우리나라 사람이면 다 알걸.”

 

 

재현이 주연의 제대 소식을 알고 있듯, 주연도 재현이 매일 아침 생방송에 등장하는 것을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최근 아이돌 같은 외모로 이름을 알려서 엉뚱하게 아침뉴스 시청률이 상승하기도 했다.

 

 

넌 내일 스케줄 없어?”

시간 되니까 약속 잡았지.”

 

 

주연이 속한 아이돌 그룹은 이른 나이에 데뷔했다. 재계약 시점에 한창 나이이니 소속사를 옮겨 나간 멤버가 반이었다. 이때 주연은 재현과 헤어진 후 아이돌 치고 이른 나이에 입대했다.

 

 

모르고 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는 서로의 존재이기에, 재현 또한 주연의 재계약, 입대, 제대, 활동재개 소식을 알고 있었다. 사실 좀 찾아보긴 했지만. 별일 없이 지내는 게 다행이라고도 생각했고.

 

 

가끔 그리울 때도 있었지만 다시 만날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다. 네이머로서 정체성을 뒤흔들 정도로 뿌리 깊은 언쟁을 하며 헤어졌던지라, 주연과의 재회에 대한 기대도 없었다. 많은 것을 묻고 싶어졌다.

 

 

너 어떻게 네이머즈 회원이야?”

생겼어.”

언제?”

제대하고.”

 

 

재현은 얼른 술을 한 모금 홀짝였다.

 

 

네임. 뭐라고 써 있는데?”

몰라.”

안 알아 봤어?”

.”

앱 가입하려면 검증은 받았을 거 아니야.”

그게 다야. 궁금하지도 않고.”

 

 

주연이 턱을 괴고 재현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근데 운명 같이 형이 나왔잖아. 제대로 된 거 같긴 하네.”

네임 뭔지 모른다며. 너 운명도 안 믿는다며. 나랑 운명인지 어떻게 알아.”

 

 

나랑 운명. 그런 말을 꺼내 놓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난 그냥 딱 봐도 알겠던데. 소개 글만 보고도.”

뭐래. 다른 사람 나왔으면 번듯하게 데이트했을 거면서.”

형이라서 예쁘게 하고 나온건데.”

 

 

재현이 쿨럭쿨럭 기침을 해댔다.

 

 

너 엄청 뻔뻔하다. 몰랐다 내가.”

나도 몰랐어.”

무슨 한 마디도 안 져.”

형 나랑 다시 만나 보는 거 어때? 네임도 생겼는데.”

.”

그럼 데이트.”

 

 

재현은 한숨을 푹 내쉬고 술을 꼴딱 넘겼다. 냉큼 그러자고 답이 나갈까봐 그랬다. 안 그래도 취향인 데다 침대 위에서의 체력이야 익히 알고 있는 데다 5년 동안 잘 익어 수컷냄새 폴폴 나는 이놈에게서 눈을 떼기가 힘들어서.

 

 

반발심까지 얹은 복잡한 마음에 자꾸 술을 찾았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 그러다 아주 세지도 못할 정도로 마셔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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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자신의 침대 같은데 낯설다. 이 온도, 습도, 조명.

 

 

, 일어나.”

.”

 

 

재현이 이불을 쥔채로 몸을 빼다가 바닥을 굴렀다. 주연이 항복 자세로 두 손을 들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주연과 자신의 몸을 살펴본 재현이 소리부터 질렀다.

 

 

!! 너 왜 여깄어?!”

형이 운명적으로 데려왔어.”

아이씨.”

좀 억울하네. 근데 지금 세 시 반이야. 알람도 못 듣고 자길래 깨운 건데.”

 

 

시간을 듣자마자 재현이 바닥을 짚고 엉거주춤 일어났다. 눈을 벅벅 문지르며 세수를 하러 들어갔다. 그러다 거울을 보고 숨을 멈췄다.

 

 

구남친과 한 침대에서 일어나다니 미친 게 분명했다. 어제 그대로 뒤돌아 도망갔어야 하는데.

 

 

차라리 기억이 안 나면 좋으련만. 아니, 안 나면 공포였을 것이다. 볼래? 보여줄까? 직접 확인하는 게 어때? 뻔한 주연의 도발에 씩씩대며 그를 집으로 들였다. 주연이 과거에는 쳐다도 안 보던 재현의 네임을 손가락으로 쓸고 깨물고 핥고 빨아들인 기억도 생생하다.

 

 

거울로 비춰 보니 네임이 아주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멍에 가까운 키스마크가 진하게 새겨져 있었다. 씻는 내내 그 자리가 유독 욱신거렸다. 너무 오랜만에 수고한 엉덩도 쑤셔서 자괴감이 심했다.

 

 

재현이 씻고 나올 때까지 주연은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재현은 잠도 술도 깬 정신으로 주연을 마주하고는 힘이 쭉 빠졌다. 자신의 집인데 이 순간만큼은 편하지 않았다.

 

 

너 스케줄 없어?”

오후에. 데려다 줄까?”

택시 탈 거야. 알아서 가라.”

 

 

재현은 고개를 저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등 뒤 자신의 집이 낯설었다. 아니 익숙했다. 아니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주연은 재현의 집에 덩그러니 남았다. 침대 끝에 조심스럽게 누워 재현이 자고 있던 그대로 구겨진 시트와 이불 위를 손으로 쓸었다. 잠든 재현을 두고 밤새 잠을 못이뤘다. 다른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집을 보고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른다.

 

 

겨우 다시 닿은 인연이니만큼 징그럽도록 붙어 있을 예정이었다. 재현이 운명이라고 착각할 만큼.

 

 

이주연은 낭만을 박탈당한 사람이었다.

 

 

딱히 운명을 믿지 않은 건 아니었다. 네임 없이도 사람들은 잘만 자기 인연을 만나 살아가니까. 재현도 주연에게 똑같이 그런 대상이었다. 이를테면 연기학원에서 둘이 유독 발연기라 세트로 묶였던 것부터.

 

 

그런데 같은 운명, 네이머가 말하면 건방지게 들렸다. 그들이 네임을 지녔다는 이유로 운명의 키를 손에 쥔 주인공처럼 보였다. 주연은 재현이 가진 아담의 흉터를 목격하고는 머리가 차가워졌다. 사귀고 반 년 동안 잘도 숨긴 걸, 그가 특수연고를 안 바른 날 우연히 발견했다. 네임의 발음과 자신의 마음이 분명 주연이 네가 운명인 것 같다는 말에도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조만간 다 말하려고 했다는 재현을 이해하는 척 끄덕였었다.

 

 

껄끄러운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조금이라도 의견이 어긋나면 속으로 전전긍긍했다. 서로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재현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예민해졌다.

 

 

우리 운명인가 봐.’

 

 

먹고 싶은 메뉴가 같을 때, 좋아하는 노래가 같을 때, 히어로영화를 보며 똑같이 재미를 느꼈을 때, 고작 그런 것들마다 재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모든 게 운명이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주연은 속이 쓰렸다.

 

 

3년 연애의 종지부를 찍고도 마음을 접기 힘들어 재현에게 다시 연락했지만, 그새 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운명이라더니 매정하기 그지없었다. 둘이 노느라 연기학원 사람들과 친하게 지낸 것도 아니어서 연결점이 없었다. 그의 집앞에 진을 친 적도 있는데 나 싫다고 번호까지 바꾼 사람을 다시 만나 뭘하나 싶어서 차마 말을 걸지 못했다.

 

 

군대에 있을 때 재현이 아나운서가 된 것을 알았고, 제대 후 네임이 발현했다. 제멋대로인 기호를 봐도 뜻을 몰랐다. 그러나 주연은 네임 위를 손으로 덮고 화면 너머 재현을 보며 확신했다. 이건 확신의 이재현이다. 재현을 볼 때마다 네임이 간질거렸으니까. 네임을 숨겨야 했던 마음, 운명을 일상으로 녹여버리던 모든 말들이 그의 입장이 되고 나서야 이해가 갔다. 어리고 고집스러웠던 자신의 과거가 답답해졌다.

 

 

제대하자마자 바로 재현에게 찾아가보고 싶었지만 아직 밤톨 같은 머리가 쑥스러워서 참았다. 슬슬 활동재개를 했지만 자신이 T사 보도국에 발 들일 일도 없어서 우연을 가장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다 건너 알던 친분으로 재현의 동기와 말을 트게 되었다. 이재현 아나운서에게 관심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자 재현의 동기는 재현에 대해 아는 내용을 술술 불었다. 재현이 구남친이라며 자신의 이야기를 슬쩍 한 것도 알게 됐고, 네이머즈에 가입했다는 것도 알았다. 조건이 맞아 보이는 매칭 상대들을 급하게 수락하고, 약속 장소에 숨었다가 바로 퇴짜 놓기를 반복했다. 몇 번의 허탕 끝에 재현이 약속장소에 나와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자신이 가진 네임만 보면 이재현밖에 안 떠오르는데 이게 운명이 아니면 무엇일까. 지저분하게 얽혀서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것도 운명 아니야? 주연은 빈 이불을 재현인 것처럼 끌어안았다. 이미 한 번 놓친 운명이었다. 두 번은 용납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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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한 날이다. 5년 전 헤어진 연인과 아침에 같은 집에서 눈떴는데 스케줄도 겹친다. 재현은 피곤해서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

 

 

너 왜 여깄어.”

오늘 스케줄.”

.”

 

 

재현이 기가 막혀 입을 벌린 채 할말을 잃었다. 주연은 재현의 머리부터 이목구비를 가만가만 뜯어보더니 슬쩍 미소지었다.

 

 

형 예쁘다. 화면보다 백만배 정도.”

…….”

침대에서는 천만배 정도.”

미친!”

 

 

재현이 어버버하는 새에 주연이 재현의 말랑한 귓불을 만지작거리고 떨어졌다. 뒤늦게 재현의 귀끝이 달아올랐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역사교양프로그램 녹화였다. 영화PD, 사학과 교수, 심리학자, 그리고 연예계 감초들이 패널로 나온다. 아이돌 게스트가 흔한 경우는 아니어서 주연의 등장이 뜬금없다고 할 수 있었는데, 그는 은은히 서글하게 굴어 분위기에 잘 녹아들었다.

 

 

제가 영화도 역사물 사건물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나오고 싶다고 직접 요청해서 나왔어요.”

 

 

프로그램에 예쁜 말만 하니 자막으로도 꽃이 날릴 게 뻔했다. 재현은 다른 패널들과 같이 기특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느라 입술에 경련이 날 것만 같았다.

 

 

쉬는 시간에는 시선을 피하다가, 끝나고서는 말을 붙이는 주연을 피할 타이밍을 놓쳤다. 자연스럽게 졸졸 따라나왔다. 무시하고 사무실까지 가는데도 포기를 않았다. 주연을 알아본 직원들이나 방문자들이 흘긋거리며 지나갔다. 기어코 사무실 앞까지 와서는 주연이 재현의 팔을 잡아세웠다.

 

 

집에 가지?”

…….”

밥먹자.”

.”

밥 싫어? 그러면 면 먹을까? 커피?”

. 매니저 기다리겠다.”

매니저형 갔어.”

갔다고?”

 

 

일부러 이러는구나. 재현은 심정적으로도 빚지는 걸 싫어해서 상대의 억지에 대충 맞춰 주는 편이었다. 알면서도 이용하지 않던 주연이었고, 이제는 아니까 이용하는 주연이고. 재현은 이마를 짚었다. 5년이면 감정이고 미련이고 억지로라도 가라앉을 시간 아닌가. 왜 이렇게까지 굴지?

 

 

악감정 같은 게 있는 건 아니다. 재회가 당황스러웠을 뿐. 이제 보니 과거에 대해서는 주연이 아니라 자신이 민망해하고 있었다. 과거보다 입장을 내세우는 심정이 무뎌진 것이지, 바뀌지 않은 건 자신인데, 떡하니 운명의 주인공이 되어 운명론을 펼치는 주연 때문에 아주 혼란스러워졌다.

 

 

바빠. 나 간다.”

 

 

재현이 도망치듯 발걸음을 서둘렀다. 주연은 양보한다는듯 한 보 물러났다. 24시간 만의 후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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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하게 이상한 날이다. 5년 전 헤어진 연인과 하루에 세 번 만날 수가 있나.

 

 

, 재현이 형이네.”

 

 

저 어색한 인사가 정점이다.

 

 

이번에는 헬스장이었다. 재현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주연을 쳐다봤다.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아니 큰 목소리 내는 일이 없는 애가 이게 무슨 짓인지.

 

 

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지? 우리 끝나고 밥이나 먹을래?”

바빠.”

운동 온다고 바빴구나. 어쩐지 몸 관리 열심히 한 거 같던데.”

 

 

주연의 눈이 재현의 가슴과 배를 훑었다. 재현이 씩씩대며 팔로 가슴과 배를 가렸다.

 

 

주연아 꺼져라.”

형 내일 오프잖아. 쉬는 날 집에만 있는다며.”

그건 또 어떻게.”

대한민국 사람이면 다 안다니까.”

 

 

매일이 다른 주연과 달리 자신의 스케줄이야 뻔하긴 했다. 그와 별개로, 어젯밤에 주연에게 어디까지 말했는지까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 게 공포였다. 금세 머릿속이 침실로 변하기에 헛기침을 하며 회피했다.

 

 

과거에 보통 장난을 치는 건 자신이고 주연은 장단을 맞추거나 받아주는 정도였다. 주연은 짜증나거나 동의하지 않으면 별 반응이 없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영 반대로 굴고 있었다.

 

 

재현은 예정보다 빨리 운동을 끝내고 헬스장에서 나왔다. 모자를 눌러쓰고 걸음을 서두르는데 주연의 발소리가 계속 이어붙었다.

 

 

같이 가.”

하아.”

 

 

주연에게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닌데 길게 한숨이 나왔다. 자꾸 그에게 휘말리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해서 그랬다. 재현이 인상을 찡그렸다.

 

 

너 여기 알고 왔지?”

 

 

주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기가 막혔다. 징그럽게도 쫓아다닌다. 아니 쫓아다닌 게 맞나? 이렇게 갑자기 하루 종일?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루 꼬박 우연을 가장한 등장에 끌려다녔는데 계속 그럴 수는 없었다. 지치기는 했다. 결국 재현은 도망치듯 달려서 택시를 잡았다. 정말 별짓을 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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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라디오 스케줄은 디제이 개인사정으로 긴급한 대타 자리였다. 재현은 이틀 진행을 맡았고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낮에 숨 좀 돌리고 바로 라디오 생방송 부스로 찾아갔다. 조금만 버티자 아자자. 눈썹에 힘을 잔뜩 주고 성큼성큼 걸었다.

 

 

그러다 복도 앞에 서성이는 놈을 마주쳤다. 재현이 또 의심 가득한 눈으로 주연을 빤히 쳐다봤다. 주연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너 왜 또 여깄어?”

내가 묻고 싶은데.”

 

 

주연이 시큰둥하게 맞받아쳤다. 그도 그럴 게, 원래 해당 라디오 진행자가 재현이 아니어서였다. 5년 다음은 일주일 만의 재회였다. 주연이 중얼중얼 말했다.

 

 

우연인가 봐.”

.”

 

 

사귈 때도 이렇게 뻔뻔한 줄은 몰랐는데.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차분한 데다 뻔뻔한 것도 귀여운 면이기만 했는데, 연예계 생활이 길어져서인지 나이가 들어서인지 귀엽게만 보이지가 않을 정도였다.

 

 

과거는 과거고 일은 해야 했다. 재현은 경련이라도 날 것 같은 입술을 당겨올려 여기저기 인사를 하고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주연은 게스트 투입 시간보다도 한시간 일찍 도착한지라 밖에서 대기했다. 그리고 빤히 재현을 들여다봤다. 그 시선을 알고 있는 재현은 고개를 숙인 채로 자꾸 뒷목을 쓸었다.

 

 

부담스럽게.’

 

 

온 신경이 밖으로 쏠렸다. 주연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현장인데, 주연과 둘만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재현은 자꾸 긴장돼서, 평소라면 느긋하게 노래나 광고도 따라하고 대본도 숙지했을 시간에 읽히지도 않는 대본에 코를 박고 있었다. 시간이 되어 주연이 부스에 들어왔다. 화면이 송출되고 있기에 간단히 인사하는 모습을 억지로 보였다. 역시 아이돌이라서인지 방긋 잘 웃는 주연이 신기했다.

 

 

오늘 특별한 분이 와주셨어요. 댓가이즈 주연씨 어서오세요.”

 

 

 

 

그를 간단히 소개하는데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벌컥벌컥 뛰었다.

 

 

아름다운 디제이님과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아름다운하하. 과장이 너무 심하신데요.”

제가 거짓말을 잘 못해요.”

하하하. 예에,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재현이 대충 웃어넘기고 간단하게 주연의 근황 소식을 나눴다. 제대하고 가족들과 지내면서 쉬는 시간을 가지다가, 감사하게도 불러주시는 자리에 응하다 보니 얼굴 비출 기회가 이어지고 있다는 답이었다. 이미 재현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재계약과 입대 문제로 주연의 그룹은 유닛이나 개인스케줄로 돌아가고 있었다. 궁금한 점을 저도 모르게 파고들어 물어보려다가 정신을 차리고 끊었다. 그렇게 형식적인 소개 시간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코너가 진행되었다.

 

 

이주재님께서 사연을 보내주셨어요. 연인과 네임, 때문에 갈등이 생겼다고 하시는데요. 무슨 일인지 들어볼게요.”

 

 

가벼운 음악이 흐르고, 사연을 지문으로 만든 대본을 연기할 차례였다. 재현이 침을 삼키고 목소리를 높여 오바해서 연기를 시작했다.

 

 

주연이 너 이게 뭐야?”

. 봤어?”

이거 네임이지! 너 네임 없다며. 왜 숨겼어?”

아니이네이머들 다 그러잖아. 네임을 어떻게 덜컥 보여줘.”

내 이름 아니니까 숨긴 거 아니야?”

정말 뜨끔했습니다. 그 말이 맞았거든요. 제가 가진 네임은 애인의 이름과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람이 운명 같기만 하고, 사랑하고 있어요. 아무튼 네임이 있는 걸 들킨 후로 애인과 조금 어색해졌습니다. 저는 계속 잘 지내고 싶은데 어떡하면 좋을까요?”

 

 

재현은 입안이 썼다. 자꾸 감상에 젖으려고 했다. 남의 이야기인데 하필이면 상황이 좀 그랬다. 네임을 숨기다 들킨 것, 다른 점이라면 자신의 네임은 주연의 이름이 맞는 것 같았지만. 네임에 대한 생각 자체가 다른 게 주연과의 문제였다. 그에게 네임이 생긴 지금은, 그런 과거가 장벽이었고.

 

 

재현이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연씨 연기를 잘하시네요.”

그쵸? 제가 좀 해요.”

하하하. 약간 자신감 있는 타입이시네요.”

잘 아시면서. 제가 연기 좀 하는 거요.”

? 아아.”

저희 연기가 이게 처음이 아니잖아요.”

 

 

무슨 꿍꿍이지. 재현이 당황해서 이실직고했다.

 

 

그렇죠. 저희가 옛날에 잠깐 연기 수업을 같이 들은 적이 있어요.”

저도 디제이님도 너무 못해서 친해졌죠.”

. 친해졌. 그때 주연씨랑 재밌었던 추억들이 있어요. 그것도 벌써 옛날 일이에요.”

옛날이죠.”

 

 

두 사람이 친분이 있었냐는 반응이 실시간으로 올라왔다. 재현은 터져나오는 한숨을 겨우 참으며 아주 잠깐, 그때를 추억했다. 발연기 벗어나겠다는 핑계로 둘이 연습하다가 눈 맞고 입술 맞고 배까지 맞았었다.

 

 

온통 불편한 얘기 뿐이었다. 과거와 과거 이야기. 그래도 당장 생방송 주제인 네임이야기를 피해갈 수 없었다.

 

 

네임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철학이 다른 거라서 얘기하기가 쉽지 않네요. 주연 씨는 이 사연자 분 상황 어떻게 생각하세요?”

숨기는 행동이 사연자분께는 배려일 수도 있지만, 상대가 배신감을 느끼기에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 그럴 수 있죠. 어쨌든 자연스럽지 않은 결정이니까?”

. 디제이님 생각도 궁금해요.”

저는, 네임을 떠나서 무언가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면 만나기가 힘든 것 같아요. 그러면 운명이 아닌 게 아닐까요?”

냉정한 면이 있으시네요.”

그런가요? 그만큼 양쪽 다 입장이 있는 거니까, 대화가 많이 필요한 부분 같아요.”

 

 

우리는 그러지 못했기에 서로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재현은 머리가 차가워졌다. 주연의 눈이 식어 있었다. 잊지 마, 이거 방송이야좀 우려스럽게 바라보자 주연이 바로 표정을 풀었다. 누그러지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굳은 시선으로 재현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저는 운명도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노력이요.”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을 마주치는데 그중에서 특별하게 다가오는 느낌을 찾고 받아들이는 거잖아요.”

그렇죠.”

잘 돼야 운명이라고 할 수도 있고요. 노력해서 쟁취한 운명과 사랑이면 더 견고하고 뜻깊을 것 같아요.”

아하.”

진짜 운명이라면 노력도 해보시고, 시행착오도 겪어 보시면 좋겠어요. 용기 내서 끝까지 대화해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진심을 전하면 상대도 알아주지 않을까요?”

 

 

네가 하고 싶은 말이 이거였나. 재현은 진행도 잊고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주연의 눈짓에 다시 숨을 들이켰다. 밥먹듯 생방송이 일상인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다음 사연 가볼게요.”

 

 

정신을 차리고 겨우 다음 순서를 진행했다. 식은땀이 다 나고 손이 저리기까지 해서 허벅지에 몇 번이나 문질러 닦았다.

 

 

음악과 광고가 나가는 시간에 공식 계정에 올릴 사진을 찍었다. 주연이 재현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았다. 재현이 화드득 떨었지만 실시간으로 나가고 있는 장면이라 주연을 밀어내지는 못했다. 화면 구석에 잡힌 두 사람 모습에 잘 어울린다는 반응이 실시간으로 터져나갔다.

 

 

기다릴게.”

 

 

주연은 재현의 대답도 안 듣고 그렇게 전하고 나갔다. 재현이 마무리하고 나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방송이 끝나고 나오는 재현에게 작가가 신기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분 친한지 몰랐어요. 어쩜 오늘 운명 같이 만나셨네요. 아나운서님 연기 배우셨어요?”

옛날에요. 진로 정하기 전에.”

배우 해도 잘 어울리셨을 것 같아요. 워낙 잘생기셔서.”

 

 

맞다고 맞장구치는 이들에게 꾸벅꾸벅 인사하고 나오는데 문 앞에 주연이 서 있었다. 친하다고 말했는데 쌩하니 가버리는 것도 이상할 거라 나란히 같이 나와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둘 다 방송인이기도 하지만 장신의 남자 둘이 나란히 걸어가니 시선이 쏠렸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재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도 부스 안에 갇혀 감시당하는 기분이었다.

 

 

너 때문에 열 배로 힘들었다.”

술 살게.”

 

 

방송에서는 기싸움이라도 하듯 굴던 녀석이 베시시 웃는 모습에 침이 꿀꺽 넘어가고 말았다.

 

 

재현은 주연을 밀어내기를 포기했다. 매몰차게 보내버리면 더 찝찝할 것 같았다. 아니 사실 다 핑계이기도 하다. 주연과 미적지근하게 부딪치는 이 시간이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 휘둘려야겠다고 결심만 몇 번을 했는데, 그렇게 또 다시 한 테이블을 두고 술을 붓고 있었다.

 

 

같은 주제로, 그것도 답도 없는 두 사람 과거의 관계로 5년 만에 부딪치자니 마음이 불편해 죽겠다. 주연을 만날 때 혼자 네임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지녔었는데, 이제는 쌍방 운명인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불신과 마찰로 최후의 최후를 갱신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시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그에게 돌리지도 못하는 모든 상황에 또다른 죄책감이 들었다. 주연은 새로운 국면을 제시하는데 아직도 과거에 붙잡혀 있는 건 혼자인 것 같았다.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자 용기가 생겼다. 동시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재현이 빈잔을 쾅 놓고 입에 담은 술을 쓰읍, 삼켰다. 검지로 주연의 이마를 꽁 밀었다. 고개가 뒤로 밀려난 주연이 다시 고개를 가져와 재현의 손가락을 콱 물었다. 아프게 문 건 아닌데 손끝에 혀가 닿는 느낌에 재현이 식겁하며 손을 뺐다.

 

 

이주연 너 뭐 나한테 복수하려고 나타났어?”

복수라니.”

너한테 못할 말 한 거 사실이잖아. 네임 숨기고, 왜 나를 이해 못하냐고 떼쓰고. 그래서 이제 너도 네임 생겼다고 내가 틀렸다고 알려주려는 거잖아. 나 죄책감으로 말라죽으라고. 아니야?”

 

 

온통 추측인데도 확신하는 말투였다. 주연은 당황했다. 이 만남이 재현에게 그렇게 느껴질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아니야.”

거짓말. 그러지 않고서야 나를 이렇게 괴롭힐 수 없지.”

내가, 괴롭혔어?”

 

 

주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상처 받은 게 분명했다.

 

 

그럼 아니야?”

형이 너무 좋아서 그랬어. 다시 만나고 싶어서 온 거고.”

…….”

형이 운명을 좋아하니까.”

 

 

주연은 무서운 온도로 재현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어린 날 엉망진창 대사를 읊다가 입술을 부대던 것보다 더 뜨겁고 무거웠다. 재현은 머리가 아파 미간을 문질렀다.

 

 

그럼 연락을 하지. 5년이나 있었는데 그걸 안 하고 이제 와서 왜 이래.”

이미 그건5년 전에 했어.”

…….”

번호 바꿨잖아.”

 

 

재현은 가슴이 싸해졌다. 너무 견디기 힘들어서 헤어지고 세 달 정도 버티다가 본격적으로 취준할 때 번호를 바꿔 버렸다. 타이밍 하고는.

 

 

조금만 빨리 하지.”

 

 

저도 모르게 원망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재현이 입술을 깨물고 주연은 답이 없었다.

 

 

…….”

…….”

 

 

네임이 없을 때의 주연이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느꼈을 비참함을, 너무 늦게 알았다. 재현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우리 어렸잖아. 무지했고, 너무 좋아했고.

 

 

주연은 눈썹을 찡그리고 입술을 물었다. 여태 뻔뻔하게 굴던 얼굴이 서서히 구겨졌다. 잠시 망설인 주연이 고개를 숙여 이마를 받쳤다. 엉뚱하게도 핏줄 돋은 커다란 손이 멋있어서 재현이 침을 삼켰다. 취했네 취했어.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드디어 주연이 조용조용히 네임을 발음했다.

 

 

무슨이으, 히우이으지이? 그런 거래.”

 

 

본인이 발음하면서도 영 이해가 안 되는지 주연이 고개를 저었다. 곰곰이 생각에 빠졌던 재현이 자꾸만 음, 거리며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나도 알아. 형 이름 아닌 거 같아. 근데 어떡해? 아무리 생각해도 나한테는 운명이 형인데. 이럴 거면 차라리 네임이 없는 게 나았지. 같잖은 희망 같은 거 생겨가지고는.”

 

 

네임이 지닌 어려운 발음을 정리해보면 볼수록 주연은 실망했다. 아무리 발음이 모호하다지만 이재현은 아닌 것 같았다.

 

 

실망시켜서 미안해.”

 

 

네임이 없었을 때 못했던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네임이 있어도 해야 하는 말이었다. 재현은 주연의 축 쳐진 모습이 사랑스럽고 안쓰러웠다.

 

 

. 지금 그게 할 말이야?”

그럼 어떡해. 사실인데.”

나 다시 만나고 싶었다며. 5년 전에도 이번에도. 근데 니가 네임 가지고도 우리가 운명이 아닌 거 같다고 그러면 난네임 여부 떠나서 모든 게 다 운명이라고 했던 나는 뭐가 되는데 이새끼야.”

…….”

그게 지금 할 말이냐고.”

 

 

답없이 생각에 빠진 주연을 보고 재현의 눈시울과 코끝이 빨개졌다. 구겨졌던 주연의 얼굴이 완전한 울상이 되었다. 참다 못한 재현이 주연의 멱살을 잡아당겨 그대로 입술을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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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결에 들었다. , 미안. 미안해. 근데미안해. 5년 밀린 사과에 대충 응응, 대답해 놓고, 끌어안는 품이 좋아서 꽉 마주안고 다시 잠들었다. 완전히 잠들 때까지 가벼운 입맞춤이 오갔다. 재현은 주연의 흉통에 손을 얹고 네임이 있는 곳을 엄지로 살살 쓸었다. 서로가 가진 아담의 흉터, 그 존재만으로도 벅찬 느낌이 있었다.

 

 

다음 날 재현이 눈을 떴을 때는 혼자였다. 오늘은 깨워 주지 않은 구남친 때문에 마음이 헛헛했다. 아무리 일정이 없다지만. 숙취로 무거운 머리를 퍽퍽 쳤다. 겨우 두 밤 헤집어놓고 간 주연 때문에 집이 낯설고 허전해졌다. 아담의 흉터가 욱신거린다. 아문 흉터에 5년 만에 다시 진통이 찾아올 수 있구나. 그때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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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타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네임을 가진 사람, 네이머라고 부르죠.]

[네임의 위치는 저마다 다르지만 분포는 대부분이 상체, 몸통인 것으로 보고됩니다. 특히 흉통 부위에 있는 네임을 아담의 흉터라고도 부릅니다. 창세기에서는 신이 아담의 갈빗대를 빼내 그의 짝인 이브를 만들었다고 하죠. 그때 아담에게 남은 흉터가 바로 운명의 네임이라는 설이 전해지기도 합니다.]

[네임은 과연 실질적으로 인간 관계에 효력이 있는 걸까요?]

[생체 반응으로는 별다른 효력이 없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통계로 치면 네이머끼리의 혼인 성사율이 상당합니다. 이혼률도 유의미하게 적고, 행복지수 또한 높습니다.]

[서로가 찾아낸 운명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심리적인 역치가 낮은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네임이 오히려 연인 관계의 신뢰에 방해가 된다는 입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네임의 운명, 마음먹기에 따른 것일까요? 정말 타고난 낭만인 걸까요?]

 

 

다큐 더빙 일정은 재현에게 아주 고역이었다. 하필 네임에 대한 다큐라니. 무슨 운명처럼, 또 네임이라니. 주연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 이렇게 네임에 대해 접할 일이 없었는데 말이다.

 

 

공영방송이다 보니 네임에 대해서는 늘상 애매하게 다루고는 하기에 귀로 흘렸었는데, 직접 입으로 읊다 보니 자꾸만 모순의 굴레에 빠졌다. 그 모든 방향은 주연을 향해 있었다.

 

 

또 이주연.’

 

 

그렇게 뻘나게 쫓아다니더니 사흘 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만 생각하려는 자체도 생각이라서, 머릿속에 자리잡은 주연을 떨치기가 힘들었다.

 

 

지겹고 지리한 운명론을 다시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 현실이 버거우면서도 반가웠다. 어쩐지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줄기차게 다가오는 주연과 부딪치며 까끌했던 마음이 마모되었나 보다. 주연에게 먼저 손을 한 번 내밀어도 될 것 같았다. 퇴근하면서 전화라도 해보려고 폰을 꺼냈다.

 

 

.”

 

 

주연의 번호가 없었다.

 

 

성질이 머리 끝까지 뻗쳤다가 금세 우울감에 잠겼다. 틈도 없이 주연이 계속 나타나서 이것조차 몰랐다. 번호도 없구나. 알아내려면야 알아낼 수 있겠지만, 스스로가 한심해져서 모든 의욕을 잃었다. 주연이 보러 안 오면 못 보는 상황이면서, 나는 무슨 건방을 떤 거지. 울컥해서 목구멍이 아팠다. 네임이 새겨진 갈빗대가 아픈 것 같았다. 주연에게 마음을 구할 자격도 없었다.

 

 

네이머즈 앱으로 메시지를 보낼까, 그런 생각까지 다다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포기했다. 그건 또 무슨 짓인가 싶어서. 재현은 그 자리에서 네이머즈 앱을 삭제했다.

 

 

통유리인 방송국 건물이 우중충하게 비를 맞고 있었다. 바깥을 뒤덮은 어두운 색채를 보기만 해도 몸이 으슬했다.

 

 

집으로 들어가면 내내 우울할 것 같았다. 바로 떠오르는 장소가 있어 차를 끌고 나섰다.

 

 

옆동네 주택가에 있는 카페였다. 커다란 정원이 있는 하얀 건물은 늘 고요한 편이었다. 날씨가 이 모양이니 별로 뷰가 좋지는 않을 것 같지만 쉬기에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을 것이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하필 지금 내가 억지로 이곳에 찾아온 이런 우연도 네가 말하는, 노력하는 운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는 척해야 하는 건지 모르는 척해야 하는 건지 헷갈렸다. 이 넓고 많은 자리 중에 멀리에서도 기다렸다는듯이 그곳에 앉아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친다는 게.

 

 

재현은 바로 아이스초코 한 잔을 시켰다. 그대로 기다려 음료를 받고, 망설이지도 않고 그 자리로 찾아갔다. 몇 없는 손님 중에, 두 사람을 알아보고 숙덕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도 퇴근하고 바로 왔다지만 애초에 세팅 다 된 상태로 떡하니 앉아 있는 주연이라, 쟤도 참 대책없다 싶었다. 그게 어쩐지 귀여워 보였다.

 

 

여기 있었네.”

. 여기 좋아해서 자주 오는데.”

이렇게 만나니까 신기하다. 운명처럼.”

 

 

주연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래, 당연하다. 주연이 먼저 알던 카페였고 세상이 우리를 모를 때부터 자주 찾던 곳이었으니. 5년 동안 망하지 않은 카페에도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오히려 그동안 안 마주친 게 이상할 정도로 각자가 자주 찾아온 장소임을 서로는 모르고 있었다.

 

 

앉아도 되지?”

 

 

주연이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가 끄덕였다. 앞으로 몇 번을 운명처럼 마주칠지 모르는데 매번 회피하며 도망다닐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주연을 그렇게 잘라내고 싶지 않은 마음인 것도 문제였다. 왜 이러지. 미련스럽게 마음이 기울었다곤 해도 이래도 되는지 아직 헷갈리고 모르겠는데.

 

 

너의 노력이란 것을 왜 자꾸 돌아보게 되는 건지.

 

 

재현은 코가 찡하도록 단 아이스초코를 빨아들였다. 눈이 시큰해서 입을 못 떼고 있으니 주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있잖아.”

.”

우리 헤어지자고 한 적은 없는 거 알아?”

…….”

 

 

그러고 보니 그렇다. 네임 자체에 대한 철학으로 충돌한 이후로는 서로 끝이구나 생각하고, 그대로 연락을 안 하며 서서히 헤어진 게 다였다.

 

 

네임 발현이 나한테는 형한테 다시 찾아갈 자격이 생긴 거 같았어.”

왜 그런 생각을 해.”

그래서 혹시 하고, 우연, 그거 내가 만들고 만들어서, 억지로 계속 보러 갔어. 근데 형도 나빠. 왜 다 받아줘?”

…….”

나 이제 더 털어낼 것도 없어. 네임도 운명이 아니고 마주친 것도 운명이 아니야. 말하고 보니까 최악이네.”

…….”

이게 다 싫으면헤어지자고 말해줘.”

이제 와서?”

이제라도.”

 

 

단호한 주연의 앞에서 머릿속이 백지가 됐다. 차마 입이 안 떨어졌다. 벌써 5년 전에 끝난 인연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끝이었다는 말이 이제 와서도 안 나왔다. 그렇다고 아직 안 끝난 인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재현이 말없이 있기만 하자 웃으며 주연이 완전히 표정을 굳혔다. 그는 반 남은 커피잔을 그대로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를 챙겨들고 잠시 재현을 내려다보다가 완전히 돌아설 때까지, 재현은 그대로 시선을 내리고 앉아있기만 했다. 주연의 걸음이 멀어졌다.

 

 

최근, 그리고 오늘까지도 온 하루의 무게중심이 완전히 주연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멀어지는 그의 존재가 빈자리를 확실히 선고하자, 외로움이 온몸을 관통해 미치도록 사무쳤다.

 

 

재현은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갔다.

 

 

빗줄기가 세찼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자꾸만 눈이 뜨겁고 숨이 차올랐다. 앞서 저 멀리에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 주연을 보자 울컥하고 볼이 뜨거워졌다.

 

 

잡아 돌릴 여유도 없었다. 재현은 얼른 달려가 뒤에서 주연을 끌어안았다. 주연이 걸음을 멈추고 얌전히 등을 내줬다. 불안정하게 호흡하는 재현이 등을 통해 전부 느껴졌다. 늘 정갈하고 호탕하고 단호하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전화, 하고 싶었는데. 번호를 모르더라. 그런데 꼭 보고 싶어서 만나러 왔더니 진짜 네가 있었어.”

…….”

그런데, 나여도 괜찮아?”

…….”

그 운명을 나로 끼워맞춰도 괜찮냐고.”

계속 형한테 끼워맞춰 왔어. 억지스러워도.”

 

 

주연이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재현이 주연의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그럼 나도 할래. 지금 생각났는데, 나 태명이 현재였어. 이으, 히우, 무슨 그거. 나 맞는 거 같아.”

.”

다른 사람 찾아도 없을걸. 네가 가진 건 내 운명이니까. 5년 만에 찾아도 나밖에 없잖아. 그렇지?”

 

 

주연이 뒤돌아서 재현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재현 나름대로, 주연이 지녔다는 네임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었다. 태명이 진짜 현재였든 아니었든 상관 없었다. 주연이 떨리는 입술을 늘여 웃었다. 이게 재현의 노력일 것이었다.

 

 

맞아. 운명이야.”

 

 

당신에게 이 운명을 강요하고 싶다. 끝난 적 없는 마음이기에.

 

 

주연이 웃고 있어서 재현도 웃었다. 주연이 엄지로 재현의 속눈썹에 맺혀 떨어지는 빗방울을 훔쳤다. 재현은 추위에 질려가는 주연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손가락에 부서지는 숨이 다 사랑스러웠다. 네임을 가지고도 의심하고 밀어내고 긴 시간을 돌아야 했던 준비. 주연이 허리를 감싸오자 재현이 주연의 목에 팔을 감았다. 드디어 아담의 흉터를 지닌 가슴이 맞닿았다. 익숙한 자세로 맞물리는 포옹이 반가웠다. 빗줄기가 파고드는 것은 아랑곳 않고, 뜨겁게 닿은 입술 새로 서로의 호흡을 삼켰다.

 

 

사랑이 그렇게 쉬울 리 없었다. 아담의 흉터는 반쪽의 숙제이기에 균형이 필요하다. 주연이 불균형을 의심하여 노력을 기울이는 동안 재현은 신뢰에 무게를 더했다. 서로가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던 길이 결국 하나의 궤도가 되었기에, 미숙한 우리가 잘못 헤맨 게 아니다. 운명은 그런 것이었다.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