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Opposite


큐피드

수풀

 

 

 

 

양아버지가 죽었다.

주연은 그날 어땠던가. 그저 양부의 음성이 귓전을 맴돌 뿐이었다. 주연아. 너는 너로 살아야 된다. 누군가를 죽이는 데도 살리는 데도 너를 써서는 안 돼. 오직 이주연이 되어야 해. 어린 주연은 그 말에 한 번도 고개를 끄덕인 적 없었다. 그저 늘씬한 눈을 껌뻑일 뿐이었다. 본디 주연의 눈깔은 늘 어딘가 애매했다. 곧 사르륵 휘어 사랑스러울 것 같기도, 완전히 날선 채로 사람 하나 죽일 것 같기도 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맹세코 주연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단 하나였다. 주연과 그의 성 씨는 달랐다. 성 씨가 같은 친부는 아버지 따위가 아니었다. 누구도 그를 두고 주연의 친부라 일컬을 수 없었다. 그 자는 주연이 열 살 무렵이 되기까지 늘 같은 말만을 되풀이했다. 네가 먼저 죽여야만 살 수 있다. 그 뜻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연에게는 학대와 같은 훈련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기어이 조직 반틈이 날아가는 날까지. 어린 생명의 기억이 만신창이가 되고 말 때까지. 양부가 완전한 주연의 아버지가 되는 날까지. 작다란 주연의 손에는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동물의 피일 때도 가짜 액체일 때도 있었다.

 

주연이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를 가진 날, 모든 것이 뒤엎어졌다. 주연은 양부의 손에 구해졌다. 양부가 조직을 엎은 이유가 주연뿐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당연하다는 듯 주연을 거두었다. 누군가를 죽여야만 살 수 있다던 말에서, 누구도 죽이지 말라는 말까지는 참 멀었다. 주연의 친부가 죽은 날 그 작은 얼굴에는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주연은 양부에게서 맹목적인 마음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친자식도 아닌 어린 놈이 끔찍하게 자라던 것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음에도 금세 사랑으로 품고 마는 것. 주연은 양부를 아버지로 둔 날 이래로 총칼을 쥔 적 없었다. 모든 것을 훨훨 잊었다. 어쩌면 당연한 삶이었다. 주연은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진심을 가진 적 없었다.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살다가. 주연은 다시, 반드시, 사람 하나를 죽여야 하는 눈을 갖고야 말았다. 양부를 죽이고 도망간 범인은 이 씨였다. 마지막으로 찍힌 씨씨티비 화면에서 이 씨는 환하게 웃었다. 이후 도주로에 위치한 씨씨티비 전부를 박살낸 자의 여유였다. 어떤 이의 미소를 먹고 주연은 그를 죽여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여전히 양부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주연아. 너는 너로 살아야 된다. 누구를 대신해서 죽이는 건 아무 쓸모가 없어. 주연이 다 자라는 동안 양부의 목소리는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쉽사리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 이윽고 완전히 혼자 남겨진 주연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을 잃고서 제가 어떻게 누군가를 죽이고자 않을 수 있나요. 이제 세상에는 주연을 막는 목소리 하나 없었다.

온 조직이 이 씨를 쫓는 데 혈안이 되었다. 주연 역시 양부가 죽은 스무 살부터 올해까지 내내 그 자를 잡아 족치기 위한 날만을 살아왔다. 몇 년인지 구태여 세지도 않았던 숱한 시간이었다. 꼭 사는 것이 칼날을 가는 것 같았다. 그 위를 걷는 것도 같았다. 맨발 아래서 피가 줄줄 흐르는지, 그 피가 어릴 때와 같이 짐승의 피인지 가짜 액체인지, 주연에게는 그 어떤 것도 구분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러던 어느 초여름날 주연은 이 씨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애석하게도 주연은 이 씨를 죽인 적 없었다. 모든 것이 아직이었다.

 

"뭐라고요?"

"음주운전이라고."

"……."

"심지어 가드레일 박고 혼자 뒤졌댄다. 감히."

"하."

 

주연의 커다란 주먹이 희게 질렸다. 이 씨의 개어이없는 사망 소식을 들은 것 역시 쿰쿰한 지하 3층 사격장에서였다. 어릴 때의 기억이 벌레 같이 불쾌하게 스멀스멀 올라왔다. 다시는 이곳에 올 줄 몰랐는데. 누가 나를 이곳에 데려왔는데 멋대로 죽긴 처죽어. 찝찝한 땀이 총기를 줄줄이 감쌌다. 총으로든 칼로든 목을 졸라서든 이 씨를 죽일 날만을 기다려왔는데 이 무슨. 주연은 총을 내려두고 자신을 둘러싼 안전벽 하나를 주먹으로 세게 갈겼다. 주연의 총명한 살기가 온 공간을 팽팽 메웠다.

믿을 수 없었다. 커다란 손가락이 키보드의 반복재생 버튼을 하염없이 눌렀다. 이 씨가 양부를 죽이고 도망가던 화면도 한 번 보고 말았는데. 주연은 이 씨의 차가 박살나고 불타는 모습을 몇 십 번이고 돌려봤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주연은 이미 양부가 지시한 삶을 저버린 지 오래였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삶이야말로 주연이 끝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그를 따를 수 있었다. 늘씬한 몸에 매달린 것이 너무도 많았다. 징그러운 추 투성이었다. 주연은 이 모든 것을 끝내고 부디 평범해지고 싶었다. 주연은 다시 형형한 눈빛으로 돌아와 소식을 전한 간부에게 어떤 이름 하나를 말했다.

 

"이재현."

"이재현? 그 아들내미?"

"이재현이 있잖아요.

"걔는 지 애비가 버린 지도 오래야."

 

주연은 간부가 말하는 것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이재현의 이름만을 되뇌었다. 이재현. 이재현이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 이름만 발음했다. 결코 놓지 않겠다는 어떤 부적처럼. 이재현이 있다는 사실은 이주연에게 있어 행운 그 자체였다. 지금 주연이 찾아갈 수 있는 곳은 재현뿐이었다. 주연은 다른 의미로 맹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큐피드

수풀 씀

 

 

이름은 이재현. 이 씨의 외아들. 나이는 주연보다 한 살 많은 스물여섯. 장학금과 생활비에 매달리느라 아직도 대학에 다니는 중. 총도 칼도 웬만한 주먹도 안 쥐어본 평범한 시민. 대학에 다녀본 적 없는 주연은 계절학기라는 괴상한 단어에 반감을 보였다. 뭔 학기요? 계 절 학 기? 이름 하나 졸라 낭만적이네. 그에 대학에 다니다 조직에 들어온 끄나풀 몇몇이 신선한 개소리를 잘못 들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주연이 그들의 시선을 느끼고 뭐 씨팔, 대학 안 다녀본 새끼 처음 봐? 계절학기라는 단어를 보고 낭만적이라 느끼는 본인이 더 이상하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순전한 깡패 자식이었다.

 

낭만적으로 알아들은 그놈의 계절학기 안에 이 모든 살해 계획을 끝낼 참이었다. 아버지가 죽은 이후 주연은 자기 전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이 씨의 정보가 적힌 종잇장을 찢을 듯이 달달 외웠었다. 그리고 이제 눈을 감으면 주연이 그렇게 눈알에 박힐 만큼 노려봤던 이 씨의 얼굴이 이재현으로 휘릭 바뀌었다. 애비 얼굴을 빼다박은 탓에 나이 정도만 달라지는 느낌이었다. 조직원이 몰래 수십 장 찍어온 이재현의 잘생긴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잠든 날, 주연은 이상하게 잠을 설쳤다.

 

맨투맨에 적당히 딱 붙는 찢청을 입어 주니 꽤나 깡패 안 같고 대학생 같아졌다. 주연은 그런 자신의 모습에 일순 쪽팔림을 느끼다가도 살인하러 가는 복장 치고는 굉장히 산뜻하다 느끼며 미소를 가다듬었다. 길쭉한 눈매가 예쁘게 휘었다. 더운 날씨와 맞지 않게 선선한 눈웃음이 잘생긴 얼굴에 자리잡았다. 캠퍼스에 다 와서야 몰고 온 차가 상당히 튄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일은 덜 납작한 차를 몰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완연한 여름날이네요- 라디오에서 삼류소설 서두 같은 문장이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왔다. 주연은 괜시리 간지러워 귀를 벅벅 긁었다. 그래 이 더운 여름날 피차 번거롭지 않게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리라 다짐했다. 마음과 달리 다짐하자마자 속이 콱 막혀왔다. 주연은 우선 담배나 한 대 뽀려야겠다 생각하고 주변을 살폈다. 꽁초 하나 떨어져 있는 곳이 없어 그마저 쉽지 않았다. 적당히 건물 뒤 구석탱이로 걸어갔다. 라이터를 당기고 불씨를 한 번 빨자마자 누군가 뒤에서 저기요하고 불렀다. 주연이 담배를 문 채로 습관처럼 위협적인 얼굴로 뒤돌자 청순한 남자 하나가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들리던 목소리는 약간 꾀꼬리 같았던 것 같은데. 눈알에는 나름 어떤 맹수가 심어져 있는 듯했다. 하. 하하. 사진보다 낫네. 주연이 태연한 얼굴로 담배를 한 번 더 빨며 묻자 남자가 늘씬한 손가락으로 어디를 가리켰다. 그 린 캠 퍼 스. 남자의 손가락 끝에는 전부 영어면서 한글로 쓰여 있는 판때기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주연이 푸스스 웃으니 연기가 입에서 가득 새어나와 주연의 잘난 얼굴을 희게 가렸다. 주연의 시야에서 역시 어떤 얼굴 하나가 사라졌다가 금세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이 얼굴. 주연이 그토록 꿈에서 그렸던 눈코입이었다. 이재현은 내게 행운이 맞구나. 주연이 이 감각을 다시 느끼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

 

재현은 지루한 일상을 보내는 청년이었다. 수업 사이사이 학자금 대출을 불리지 않기 위해 머리를 감싸고 도서관에 처박혀 있다가 일과가 끝나자마자 고깃집으로 아르바이트하러 튀어갔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경영이에요? 워낙 과에 사람이 많긴 하니까. 새내기는 아닌 것 같은데. 제가 학교에 잘 안 붙어 있긴 하거든요. 조잘거리는 재현의 말들 중 친구가 별로 없다는 내용은 주연에게 다시 한 번 행운이었다. 재현이 어느날 죽어 사라져도 누구도 난리를 피우지 않을 테니까. 처음 마주친 날 재현은 주연의 담배를 꺼지기까지 옆에 있을 생각인지 사실은 지도 담배 하나 빨고 싶은 심산인지 쉽사리 떨어져 나가지를 않았다. 이러나 저러나 주연의 입장에서는 좋은 꼴이었다. 주연은 누구를 좀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재현은 아 여자친구? 하고 물어왔다. 주연은 대답없이 옅게 웃으며 담배나 한 번 더 빨았다. 대놓고 말을 훽 돌려 버렸다. 근데 그쪽 누구랑 참 닮았어요.

 

'제가 흔한 얼굴은 아닌데.'

'알아요. 그런 뜻은 아니고.'

 

그에 재현이 푸스스 웃었다. 방금 처음 봐 놓고서 알긴 뭘 알아요. 이번에는 재현이 말을 돌렸다. 마침 주연 역시 이 새끼는 당장 내 손에 뒤지고 싶어서 멀뚱히 서 있나 궁금하던 참이었다. 주연의 담뱃대가 빠르게 짧아지고 있었다. 연기가 다시 한 번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혹시 어릴 때 우회동 살았어요?'

'…가 본 적도 없는 것 같은데요.'

 

주연은 티나지 않게 침을 한 차례 삼키며 대답했다. 거짓말이었다. 우회동이라면 양부의 저택이 있는 곳이었다. 주연이 양부의 손에 넘겨진 뒤로 쭉 자라온 집이기도 했다. 그리고 주연은 양부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그곳을 떠났다. 중지와 엄지 사이에 담뱃대를 쥐고 검지로 불씨를 껐다. 손가락 끝이 약간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분명 이 씨의 쓰레기 같은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자랐다고 했는데… 이재현 입에서 우회동이 왜 나오는 일인지 알 수 없었다.

 

-

 

이럴 거면 학교에 잠입할 필요까지는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현이 주연에게 필요 이상으로 경계를 두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여러 번 물어왔다. 진짜 우회동 살았던 적 없어요? 꼭 그것이 너를 만나는 이유라도 되는 듯이. 그럴 때마다 주연은 자신이 재현에 대해 정말 잘 알고 있는 것이 맞나 되짚어야 했다.

 

'너에게는 절대로 이런 일 시키지 않을 거다.' 일 하나를 치고 정확히는 사람을 우르르 죽이고 들어올 때마다 양부는 총칼이나 피 묻은 손을 닦으며 주연에게 뇌까리곤 했었다. 실제로 주연은 양부에게 거두어진 이후로 그러한, 그러니까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한 생각도 연습도 동작도 갖춘 적 없었다. 어릴 때 심어진 잔혹한 것들은 물리적으로 잊힌 지 오래였다. 해서 주연에게는 재차 많은 연습이 필요했던 거다. 나는 사람을 죽이고 싶어. 너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해. 여전히 칼로 생생한 피부의 모형을 가를 때마다 손이 큰 폭으로 떨리기도 했다. 아. 다시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계절학기 존나 힘들지 않냐. 하반기 취준은 또 언제 준비해."

 

찡찡거리는 재현의 손에는 총칼 대신 전공 교재나 들려 있을 뿐이었다. 주연은 대학생이 되고 싶었던 적 없었다. 그러니 부러운 마음은 아니었다. 다만 이건 많이 역겨웠다. 내가 사람 죽일 생각하고 산 동안 너는 천진하게 먹고 살 궁리나 했구나 싶은 것이.

 

"매번 느끼지만 주연이 너 차 진짜 많다."

"제 건 아니에요."

"아아. 나도 얼른 취업해야지. 그럼 부모님 차?"

 

재현의 낯에 궁금한 빛이 한 차례 돌았다. 어느새 가족 이야기까지 할 참이 되었던가. 하긴 이렇게 빨리 말 놓고 형동생하게 될 줄도 몰랐지. 종업원이 시킨 지 10분도 안 된 초밥을 들고와 테이블에 세팅해주었다. 재현과 이런 이야기를 나눌수록… 예상이야 했지만 생각보다 더 매스꺼운 감정이 치솟았다. 재현의 가족이 사람 같지도 않던 이 씨뿐이라는 사실은 개중 다행이었다. 재현의 입에서 주연의 가족을 묻는 말이 나올 것까진 예상 못했는데. 주연은 괘념치 않고 다소 불친절하게 대답했다. "아뇨. 죽었어요." 친절히 말할 내용도 아니었다.

 

"아. 미안."

"아뇨. 뭘."

 

주연은 정말로 괜찮다는 얼굴을 하고자 입꼬리 끝에 온힘을 다해야 했다. 재현이 그보다 좀더 빠르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나도 상 치른 지 얼마 안 됐거든. 좋은 분이셨어. 우리 아버지.

 

"아."

 

아버지. 좋은 분. 이 씨. 어느 것 하나 이어지지 않는 것들에 대해 토기가 치밀었다. 주연은 저도 모르게 물컵을 세게 내려두었다. 컵에는 남은 물이 얼마 없었음에도 테이블에 물방울이 잔뜩 튀었다. 재현은 그런 주연의 힘을 눈치 채지 못하고 냅킨이나 건넸다.

 

"네. 저도요."

 

주연은 좋은 사람이었다는 니 애비 때문에 내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을 내뱉지 않기 위해 테이블 아래로 주먹이 하얘질 만큼 힘을 주었다. 테이블 위 초밥은 하나도 줄지 않았다. 이따 수업 다 끝나고 같이 술 마실까? 재현은 주연과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은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이 씨가 워낙 재현에게서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재현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를 알아내기까지는 한계가 있었다. 버려진 채로 살았다는 말이 맞는 듯했지만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자식이라고 그 새끼도 이재현을 안전하게 꽁꽁 숨긴 거라면? 그렇다면 더더욱 정당하게 재현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여러 모로 오늘 갖게 될 술자리 같은 것은 주연에게 있어 땡큐였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을 즈음 주연은 자신도 수업에 갔다온 척 하고자 교재나 아이패드를 차 시트에 뒤적거려 놓았다. 얼마 안 있고서 차 유리문을 가볍게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재현이었다. 주연은 상체를 조수석쪽으로 쭈욱 뻗어 문을 열어주었다. 차체 안은 금세 주연의 향수 냄새와 재현의 체취로 뒤섞였다.

 

"자주 가는 데 있어?"

"저, 학교 쪽은 잘 안 다녀서."

"그럼 너 편한 데로 가자."

 

주연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차를 몰아 캠퍼스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일부러 우회동 쪽을 건들 참이었다. 술자리에서 재현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지도 모른다는 추측에서였다. 역 몇 개를 지나 죽은 양부의 저택에서 최대한 가까운 대로를 선택했다. 실제로는 역에서 한참 먼 저택촌에 있는 집이었기 때문에 코앞을 지날 수는 없었지만. 주연은 핸들 쥔 손의 힘을 풀었다 쥐었다 하며 몇 번씩 재현 쪽을 힐긋거렸다. 저택촌에서 크게 멀지 않은 가게 앞에 곧 차를 세웠다. 이런 분위기 괜찮아요? 형이 저번에 우회동 얘기 몇 번 하길래.

 

"응. 나도 여긴 오랜만이네. 잘 기억도 안 나."

 

주연은 근처에 차를 세우고 대충 한산해 보이는 술집을 찾아 들어갔다. 재현이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테이블이 몇 개 없는 좌식 이자카야였다. 오 나 이런 좋은 술집 처음 와. 프라이빗한 술집 분위기를 따라 한껏 낮춘 재현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주연은 종업원이 안내하는 자리에 먼저 앉았다. 가게 규모가 크지는 않았던 터라 장신 둘이 마주보고 앉으니 무릎 끝이 닿을 것도 같았다. 주연은 자리를 약간 뒤로 옮기며 술을 차차 골랐다. 재현은 이런 곳 잘 모른다며 다 좋다고 했다. 술이 나올 동안에는 그래도 이제 기말만 남았다며 무구한 미소를 보였다. 주연은 기말고사 따위가 궁금한 게 아니었다. 술이 나오자마자 재현에게 잔을 따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돌아가신 지는 오래 됐어요?"

"좀? 사고였어. 트럭 사고."

"……."

"트럭 모셨거든."

 

트럭이요? 주연은 어이없는 기미를 간신히 참고 되물었다. 재현은 선량한 시민인 줄 알고 있는 제 아비에 대해 줄줄 이야기를 텄다. 일용직이셨어. 지방 출장 많이 다니셨고. 주로 6톤 8톤 화물 트럭 몰았다고 들었어. 주연은 낮은 술잔으로 제 작은 얼굴이 가려지지 않는 것이 짜증날 정도였다. 비릿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것도 모른 채로 재현은 술을 몇 잔 연달아 마시더니 주연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주연이 너는 안 힘들었어?

 

"힘들었죠. 존나."

"……."

"살해 당했거든요. 하필."

"아."

 

미안. 재현이 낮 때처럼 다시 한 번 사과했다. 하필이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겉돌았다. 이번만큼은 차마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을 수 없었다. 재현이 이 씨를 소소하게 존경하며 평화롭게 캠퍼스나 나돌 동안 내 아버지는 네 아비가 칼질한 바람에 죽임을 당했고. 나는 네 아비 죽이려고 다시금 손에 숱한 피를 묻혔고. 내가 이렇게 살지 않기 위해 얼마나 죽을 힘을 다했는데. 주연은 술김에라도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재현의 앞에서 절대 취할 수 없는 이유였다. 당장 저 곧은 목을 졸라 죽일 수도 있었다.

 

"근데 전에 우회동 살았어요?"

"아. 산 건 아니었고. 어릴 때 몇 번 왔던 것 같아."

 

자세히 기억은 안 나는데. 아빠가 데리고 왔던 것 같기도… 아빠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부자인 사람이라고 했거든. 그 집 정원이 자꾸 생각나. 거기 내 또래인 애도 있었던 것 같아. 근데 걔는 항상 나를 못 봤어. 아니면 내가 걔를 못 보거나. 나는 걸리면 안 되는 쥐새끼처럼 왔다갔다 했달까. 아빠도 아저씨도 나를 숨기려고 했어. 갈 때마다 어떤 아저씨만 엄청 잠깐씩 만나고 헤어졌어. 아빠가 엄청 찾아가던 돈 많은 아저씨. 이상하게 잘 따르고 싶었어. 아빠는 안 해주는 말들을 해주셨거든. 주연은 이번만큼은 숨 터뜨리기를 참을 수 없었다. 양부까지 만났단 말인가? 이 씨를 그렇게 판 동안에도 알 수 없던 사실이었다. 그때부터 주연은 이상하게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어. 근데 잘 안 됐어."

"……."

"나는 걔가 부러웠어. 정원도. 아저씨도. 우회동도."

 

주연은 재현이 말하는 그렇게, 가 무슨 뜻인지 잘 감이 오질 않았다. 재현은 잔뜩 오른 취기에도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이후 직접적으로 들려오는 재현의 하소연에 역시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집에 들어오지 않는 부친뿐인 삶. 돈과 관련된 것이라면 늘 허덕일 수밖에 없던 시절. 친구 사귈 시간도 없던 좁은 틈들. 어떤 길라잡이도 없이 알아서 헤쳐 나가야 했던 인생. 그럼에도 이미 현실에서 사라진 그 정원 외에는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던 단단한 마음. 보통 사람이 들으면 조금 축축해질 수 있는 내용일까? 다만 지금의 주연이 듣기에는 우스울 만큼 평범하기 그지 없었다.

 

"아직도 내가 너한테 왜 말을 건 건지 모르겠어."

 

왜요. 형이 먼저 말 걸어준 게 저한테 얼마나 영광이었는데. 주연에게 있어 행운이기 그지없던 순간을 되새기며 재현은 낮게 웃었다. 고개를 떨구며 웃는 눈이 보기 좋게 사르륵 접혔다. 주연은 그 꼬리를 한 번 붙잡았다.

 

"왜 저한테 말 걸었는데요?"

"닮아서."

"……."

"…닮았어."

 

'그쪽 누구랑 참 닮았어요.' 주연은 둘이 처음 마주친 날 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속내가 참 멀고 멀었다. 나는 너한테서 살기 비슷한 걸 찾았는데 넌 뭐야? 이것만이 건네질 리 없는 주연의 진심이었다. 재현이 늘씬한 손을 뻗어 주연의 얼굴을 느리게 한 차례 쥐었다. 처음엔 서늘했다가 곧 미지근해졌다가 이윽고 뜨뜻해졌다. 양뺨에 어떤 촉감이 쉬이 멀어지지 않고 고스란히 머물렀다. 술냄새는 그보다 한 공기 느렸다. 주연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대로 제 목을 꺾을까 봐 경계했을 법한 자세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주연은 술이 잔뜩 들어간 재현의 손을 억지로 풀어낼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하찮은 몸부림처럼 보일 뿐이었다.

주연은 어떤 생각으로 귀결되는 지금 순간에 역정이 났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는지, 이것이야말로 몸부림이 아닌지, 말이다. 필요 이상으로 양부가 되지 말라던 사람으로 자라 버렸다는 자책을 했다. 한 사람의 절반도 못 죽여본 놈이 누굴 죽이겠다고… 단순한 자조에서 한참 벗어난 지금의 처지가 무엇과 닮은 감정인지 주연은 알 수 없었다.

 

-

 

재현은 주연에 대해 어떠한 경계도 갖지 않았다. 주연은 약간 허탈하기까지 했다. 이런 순순한 놈일 줄 알았으면 굳이 캠퍼스에서 만날 필요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에 닿았다. 그런데 만남을 거듭할수록 재현이 약간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둘이 만나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상경관 앞 흡연구역을 끼고 돌아 주연이 늘 주차하는 칸에서였다. 먼저 기다리는 건 재현일 때가 잦았는데 요즘따라 재현이 조금 늦거나 아주 뜸해졌다. 그럴 때마다 주연은 조금씩 더 초조해졌다. 운전대를 두들기는 손가락의 리듬이 빨라지기도 했다. 어쩌다 먼저 온 날에도 재현은 주연의 눈을 못 마주치기 일쑤였다. 주연이 무슨 일 있는 거냐며 소통의 방법을 꼭 이것밖에 모르는 짐승처럼 시선을 들이밀 때면 재현의 만면은 꼭 서서히 붉어졌다. 재현이 자신에 대해 알아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스스로 가장 잘 알면서도 주연은 불쑥 불안해지곤 했다.

 

재현이 그렇게 저주하던 기말고사가 곧 끝날 터였다. 아르바이트하는 곳을 아무렇지 않게 찾아가는 것보다 학교에서 맞닥뜨리는 것이 수월하겠지 생각은 하면서도 어쩐지 몸을 움직이는 일이 어려웠다.

 

우회동 정원을 떠올렸다. 양부가 죽은 날 나와서 한 번도 돌아가지 않은 곳. 재현이 봤다던 또래 아이는 분명 주연 자신일 것이다. 재현의 말마따나 주연은 재현을 본 적 없었다. 고작 재현이 제 존재를 희미하게나마 기억한다는 사실 하나로 혼란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제 손 안에 있던 개새끼의 모가지가 뜨겁게 일렁이는 느낌을 받았을 뿐이다.

나 아직 살아 있다고. 너는 나를 못 죽였다고.

이 짓을 그만두기 위해서는 그를 죽여야 마땅했다. 그러려면 재현을 계속해서 찾아가야 했다. 주연은 살기로 점철된 제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한 지 오래였다. 이것 역시 하나의 맹목적인 덩어리였다. 달리 누구에게도 배운 적 없는.

 

일주일만에 재현을 만나러 가는 길은 꼭 새로웠다. 죽여야겠다, 라는 생각에서 죽일 수 있을까, 하는 겁으로 마음이 옮겨간 탓이었다. 잔뜩 흔들거리는 속내와 달리 한구석에서는 잔뜩 단단해지는 심지가 있었다.

 

"하이."

"어,"

"……."

"이제 곧 끝나는데. 계절학기."

"알아요."

"…안 오는 줄 알았어."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네. 내가 여기 올수록 당신 죽을 날 받아놓는다는 뜻인데.

주연은 저도 모르게 볼 안쪽을 질겅거렸다. 이 캠퍼스에서는 지나가는 누구도 재현에게 아는 체하지 않았다. 주연의 새하얀 벤틀리나 쳐다볼 뿐이었다. 아니면 잘생긴 놈 둘이 나란히 서 있는 꼴이 신기해서라든지. 주연은 역시나 학교가 딱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이곳에서 재현은 유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동안 재현은 주연의 얼굴을 외울 것처럼 바라보았다. 영영 보지 못할 사람을 기억하는 행동처럼 보였다. 주연은 그에 걸맞는 대답을 기계처럼 뱉어주었다.

 

"저는 형한테 계속 가요."

"……."

"걱정마요."

 

이재현 네가 죽을 때까지 갈 거니까 걱정 말라고요.

 

"그래. 계속 와줘."

"……."

"나도 그게 좋아."

"……."

"좋을 것 같아."

 

재현의 낯빛이 또 상경관 앞에서 늦게 오던 사람처럼 묘해졌다. 주연은 제 마음처럼 비틀린 공간을 맴도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재현은 알려준 적 없는 제 번호로 아무렇지 않게 연락하는 주연에게 무엇도 캐묻지 않았다. 한참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알면서도 발을 돌리지 못하는 사람처럼. 형 일어났어요? 형 오늘은 뭐해요. 어제 주연은 재현이 아르바이트하는 가게에 아무렇게나 찾아갔다. 재현은 캠퍼스에서 만난 것처럼 또 예사롭게 굴곤 했다. 왔어? 되려 뻔뻔하기까지 했다. 그럼 주연은 더 이상하게 나갔다. 이런 방식으로 재현을 무너뜨릴 생각은 없었는데. 재현이 제 앞에서 멍하게 구는 꼴이 보기 좋았다. 정신 나간 놈처럼. 혹은 사랑에 빠진 놈처럼.

 

재현을 실제로 만난 뒤로는 꿈에 재현이 나온 적 없었는데 요즘은 이 고운 얼굴을 마주치곤 했다. 꿈에서조차 탐스러운 모가지를 그러잡기가 참 어려웠다. 그곳에서는 주연이 찾아가지 않아도 재현이 주연의 앞에 나타났다. 함께 비포장도로를 걷는 것만 같았다. 덜컹. 덜컹.

 

"오늘은 어디 가게?"

"그냥 형 데려다주려고요."

"우리집 알아?"

"알죠."

"……."

"……."

"그래. 그럼 출발해."

 

지금도. 재현은 이 섬뜩하기 짝이 없는 대화에서 도망가지 않았다. 꼭 주연에게 숨통을 훤히 내놓은 사람처럼.

 

한편 재현은 이제야 주연이 얼마나 갑자기 제 인생에 끼어들었는지 실감이 났다. 아르바이트 장소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집에 도착하기까지 재현은 정말로 어떤 방향도 일러주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주연은 어떤 원룸촌까지 그저 잠잠히 차를 몰았다. 차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딸깍 딸깍 비상등 소리만이 차체를 메웠다. 그러다 재현이 주연에게 뱉은 말은 들어갔다 갈 거냐는 말이었다. 주연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인가, 하고 생각했다.

재현은 엘레베이터 없는 4층 집에 도착하기까지도 주연에게 뒤통수를 훤히 보인 상태였다. 현관에 들어서자 차를 메우던 재현의 체향이 주연을 가득 덮쳤다. 그에 주연은 처음으로 재현과 있으면서 섬찟한 감각을 느껴야 했다. 원룸이라 집이 작아, 하며 재현은 널부러져 있던 옷가지를 스멀스멀 치웠다. 재현이 자리를 만들어주었음에도 주연은 어디 앉지 않고 그저 멀뚱히 서 있었다. 정수리가 천장과 점점 가까워지는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렇게 서 있을 거야?"

"뭐."

"그럼 나 씻을게."

 

재현은 상의를 아무렇게나 벗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재현의 집에 혼자 남겨질 일이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주연은 자연스럽게 집을 살피기 시작했다. 딱 대학생스러운 맨투맨 몇 벌. 언제 샀는지 모를 중저가 브랜드 운동화 박스 한두 개. 구석에 슈퍼싱글 침대 하나. 단출하기 그지없는 이 집 역시 재현이 당장 사라지더라도 모를 것처럼 보였다.

느리게 굴려지던 주연의 시선이 서랍장 한 구석에서 단숨에 멎었다. 익숙한 정원의 배경에서 찍은 어린 재현과 양부의 모습이었다. 두 눈으로 맞닥뜨리니 이야기만 들었던 때와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주연은 저도 모르게 온몸에 힘을 바짝 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너는 나를 언제부터 본 거냐고. 내가 기억하는 그때의 나는 끔찍하기만 한데.

 

 

 

 

-

 

'아저씨!'

 

오래되고 비싼 원목바닥이 나직한 소리를 내었다. 양부는 평소에 잘 보이지 않는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재현의 웃는 얼굴을 반겼다. 한 차례 꽈악 안아주기까지 했다. 주연이 쿨쿨 자고 있을 저택 가장 안쪽 방을 힐긋거리기도 했다. 저번인가 저저번에는 재현이 주연을 본 것도 같아서 더욱이 주연을 깊숙이 숨겨둔 참이었다. 그런 양부의 시선을 이 씨가 짐승처럼 쫓았다. 양부는 그것을 훤히 알고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휘휘 돌렸다. 이 씨가 주연의 친부를 얼마나 따랐는지 알고 있었다. 한사코 끊어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또 하나의 죽음이 파생될 것이 뻔한 관계였다.

양부는 거슬러야 하는 운명에 매달리듯 두 아이에게 지겹도록 말했다. 너는 너로 살아야 해. 누구의 삶에도 누구의 죽음에도 관계되어서는 안 돼.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주연은 지겹다는 듯 우지끈 울상을 지었다. 다른 한편에서 재현은 환히 웃으며 네에- 천진한 대답을 뱉었다. 재현이 밥 한 끼를 먹고 감귤주스까지 마시고 떠날 때마다 양부는 재현의 눈가에 대고 말했다. 아저씨가 우리 재현이 오래 봐줄게. 재현은 어른이 되도록 그가 말한 삶이 무엇인지 느낄 수 없었다. 내가 나로 살기 위해서는 필요한 게 너무도 많았던 탓이다. 누구도 재현을 돌봐주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아버지를 좋은 어른으로 기억하는 것은 기적과도 같았다. 스스로 누구에게도 버려지지 않았다는 자기위로나 가짜승리감을 위해서였던가. 나로 살기 전에 일단 살아남아야 했다. 의아한 입금자명으로부터 입금되는 금액은 손도 대지 않은 채로 그렇게 재현은 켜켜이 살아왔다.

 

맹세하건대 주연을 만나기 전까지 우회동 정원은 완전히 잊은 채로 살았다. 서랍장 위에 둔 사진도 그저 형식적인 것이었다. 이 장면이 나의 추억이 맞는지 아닌지도 분간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기 한참 전부터 연락이 끊긴 우회동 아저씨도 죽었는지 살았는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언젠가 강렬히 마주친 듯한 주연의 얼굴을 눈에 가득 채웠다고 해서 삶에 대한 의지가 피어오르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이 아무것도 없는 인생에 무작정 나타난 존재가 처음이어서였나. 어릴 때 그 집 가는 날을 기다렸던 것처럼 어떤 순간을 자꾸 기다렸다. 그런 집과 정원을 처음 마주했던 때처럼. 대문 손잡이를 잡았던 조막만한 손이 이렇게 길쭉해진 이후에도 그 촉감을 잊을 수 없는 것처럼.

 

이주연의 눈에는 이재현 밖에 없었다.

 

우리 또래에 한 대도 갖기 힘든 금액대의 차를 여럿 몰고 와도. 알려준 적도 없는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와도. 오늘처럼 제 집을 알아서 찾아버려도. 이 모든 일들이 무섭고 갑작스러워도. 우회동 정원으로부터의 착각이 전부 덮어버리는 듯했다. 나는 너를 만난 적 있으니까. 네가 나를 찾아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그렇게 상상하고 말았다.

 

이재현은, 이주연과 기억을 분간하고 싶지 않았다.

 

네 눈 속에 유일하게 있는 나를 전부 다 주고만 싶었다.

 

-

 

"술은 못 마실 것 같네. 알바하고 왔더니 피곤해서."

"네. 저도 운전해야 되니까."

"……."

"그냥 자도 돼요. 자는 거 보고 곧 나갈게요."

 

그럴 거면 여기까지 왜 왔어, 그렇게 보고 있는데 어뜨케 자냐, 해놓고도 재현은 금세 잠들 사람처럼 눈을 가물가물거렸다. 그런 재현을 내려다보는 주연의 눈 역시 느리게 깜빡였다. 재현의 가슴팍은 지루한 하루의 피로를 증명이라도 하듯 느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주연의 시선 역시 그를 따라 움직였다. 재현이 눈을 완전히 감았다. 이후 주연의 눈길은 재현의 목덜미에 박힌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지금이다. 주연의 긴 다리가 낮은 1인용 침대 아래로 느리게 접혔다. 커다란 손이 침대 위쪽을 향해 움직였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기 직전이었다. 잠든 것이 분명한 재현의 입술이 누군가를 불렀다. "…주연, 이주연." 동시에 주연은 누군가 제 고개를 억지로 거세게 돌린 것처럼, 오른편 오래된 사진 속 재현과 눈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서 다시 한 번 지금, 지금이다, 하는 신호가 번쩍거렸다. 그러나 좀전과 달랐다. 이번에는, 무엇에 대한 신호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침내 주연은 내려앉았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빠르게 일어섰다. 거칠고 부산스러운 인기척에 재현이 스르륵 눈을 떴다. 재현은 잠이 덜 깬 듯 주연에게 손을 뻗어왔다. 두 손이 맞잡기 직전의 순간에 주연이 도망치듯 뒷걸음질쳤다. 닿지 않았어도 주연은 재현의 체온을 명백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일렁이는 속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지금까지의 어떤 때보다 사나운 목소리로 재현에게 물었다. 주연이 좀전에 느낀 것은 단 하나였다.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 어쩌면 맨처음부터 어두컴컴하게 자리잡고 있던 것.

 

"형 나 좋아해요?"

"……."

"형 나 사랑해요?"

 

왜냐는 물음은 뒤따르지 않았다. 이유 따위 궁금하지 않았다. 너 지금 나를 사랑하느냐고. 이것만이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알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주연의 속을 전부 읽기라도 한 듯 재현은 곧장 죄스러운 얼굴을 했다. 부정하지도 않은 채로 그저 죄인이기를 자처했다. 미안. 미안해. 미안하기는 뭐가 미안해요. 이재현 네 인생에 갑자기 뛰어든 게 난데. 형. 살의란 그런 거예요. 나도 이게 처음인데 확실히 알겠어요. 눈에 뵈는 것도 없는 채로 불나방처럼 달려들게 돼요. 나는 형이 아무것도 몰라서. 그래서 형을 죽일 수 있고. 그래서 형이 역겨워요. 누구를 죽여야 살 수 있다는 말이 틀린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 내 인생이 딱 그래요. 주연이 아직 뱉지 못할 말들의 사선에서 재현이 기어이 무너져내렸다.

 

"너를 보면,"

"……."

"나 밖에 생각이 안 나서 그랬어."

 

네가 아무것도 없이 찾아온 거 알아. 뭔지 몰라도 목적이 나 하나뿐이라는 것만 알아. 이재현 단 하나. 나는 그렇게,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고 했잖아. 이재현은 이재현으로. 여태 그게 안 됐어. 그동안 내 인생에 매달려 있는 게 너무 많았어. 혼자 밖에 없는데도 그랬어. 내 인생에는 나뿐인데 알바에 등록금에 월세에 외로움에 새벽에 걱정에 장례식에 이딴 것들만 줄줄이. 그런데 이제서야. 네가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도 너를 만나고서야 나 밖에 안 남는 거야. 내가 이걸 어떻게 무시해. 어떻게.

 

"……."

 

철저한 고백의 순간이었다. 주연은 눈앞의 재현이 미치도록 한심하다는 마음에 쌍욕이 절로 튀어나갈 뻔했다. 이제는 지겨운 양부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너는 너로 살라는 말. 이재현이 이룬 것. 그리고 남겨진 이주연의 처지. 너는 되고, 나는 되지 못한 것.

 

"사랑해요."

 

이건 고백이 아니었다.

 

"사랑하라고요."

"……."

"그렇게 사랑해봐요."

 

살의가 한 꺼풀 뒤집어드는 순간이었다. 한 꺼풀이라는 것이 더 폭발하는 방향인지 사르륵 접어드는 지점인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쉬워서, 였다. 재현을 망가뜨리는 방법이 너무 쉬웠다. 이윽고 주연은 허망하기까지 했다.

네가 사랑한다는 나랑 똑같이 만들어줄게. 내가 잔뜩 매달린 인생을 선사해줄게. 어떤 마음이 잦아들기 위해서는 다른 것에 잡아먹혀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주연은 애써 모르는 척했다. 다만 뒤돌아 재현을 떠나는 게 너무도 쉬웠다.

 

-

 

잠시나마 안 찾아갔던 때가 있기나 했었냐는 듯, 주연은 재현에게 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곳이 학교이든 아니든간에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습관처럼 재현이 일하는 곳에 드나들었다. 차 타고 고작 10분 거리를 데려다주고자 매일 같이 찾아갔다. 그날 이후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주연은 세상에 존재하는 이 씨의 정보를 뒤집어엎듯 전부 수집하던 때처럼 돌아갔다. 재현이 우회동을 드나들었던 게 진짜인지. 양부와는 얼마 동안 무슨 관계였는지. 재현으로부터 사랑받는 제 삶을 무용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주연은 온힘을 다해야 했다. 이내 먼저 어떤 말을 꺼낸 쪽은 재현이었다.

 

"이제 그만 와도 돼."

"제가 오고 싶어서 오는 거예요."

"이게 더 심판 받는 기분이거든."

"무슨,"

"그만할 테니까."

"……."

"너도 그만해."

 

허기가 졌다. 죽이는 짓 대신 사랑 받기를 택한 거였다. 누구 마음대로,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주연은 재현의 등을 짓누를 수만 있다면 이 짓거리 평생도 가능했다. 내가 여기 안 오면 어디를 가요.

 

"나 그만 사랑하게요?"

"……."

 

재현이 대답하지 않았다. 숨 막히는 침묵이 꼭 '사랑해'라는 달콤한 고백처럼 들렸다. 비릿한 웃음이 주연의 얄쌍한 입술에서 새어나왔다. 형 나 계속 사랑할 거구나? 다행이다. 형이 나 그만 사랑하면 나는 갈 데도 없어요. 더이상 죽일 사람도 없어서예요. 뒤처지는 심정이었다. 이주연은 고꾸라졌고 이재현은 이루었어. 이딴 사랑이래도 재현은 양부의 말을 홀랑 들은 셈이었다. 나 사랑하는 동안에 형 밖에 생각 안 난다면서요. 그럼 나는. 나는 형을 죽이기로 한 다음에도, 살리기로 한 다음에도, 형 밖에 생각 안 나는데, 이주연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데, 나는 앞으로 뭘 지키며 살아요? 주연은 모든 것에 참패한 기분을 느꼈다. 그 중심에는 재현의 사랑이 보란 듯이 서 있었다.

 

"사랑해요."

"……."

 

주연은 매일 사랑하라는 말을 뱉고 헤어졌다. 사랑을 받아야 했다. 죽이고 싶은 마음 대신이었다. 이게 아니면 주연에게는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를 않았다.

 

주연은 우회동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방치된 적 없이 남의 손을 타 훌륭하게 가꾸어진 일본식 정원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앉아 있었다. 주연은 재현을 본 적 없는 곳. 재현은 주연을 본 적 있는 곳. 이곳에서 우리가 배운 것들. 그리고 지금을 떠올렸다. 같은 곳을 출처 삼아 너와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주연은 홀로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간 듯한 감각에 시달려야 했다. 불현듯 이 집에 사는 자신을 부러워했다던 재현의 말이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주연은 그 누구보다 재현이 부러웠다.

 

"…아."

 

재현에게 사랑을 들었을 때보다 더욱 비참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차라리 사랑을 하고 말지. 너를 닮고 싶다니. 평생 뒤를 쫓겠다는 마음에서 다시는 찾아가지 말아야지 다짐하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

 

하루이틀이 모여 몇 주를 넘기기까지는 참 쉬웠다. 재현을 찾아가기 전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도무지 기억나지를 않았다.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삶 전에 무엇이 있었던가. 양부와 살았던 시간이 전부 바래진 것만 같았다. 총칼도 쥘 필요없어진 상황에서 주연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기가 졌다.

 

그래서 고치지 못한 습관처럼 재현의 뒤를 밟았다. 재현은 주연이 사라지기 전과 크게 다를 것 없이 지냈다. 하루에 알바 두 개. 끼니 때우느라 편의점 방문. 푸른 새벽에 도서관 열람실 드나들기. 주연은 재현을 떠나기 전과 완전히 다른 경로를 밟았다. 하루종일 재현을 따라다니기. 중간에 차에서 내려 담배 몇 대를 연달아 피우기. 종국에는 우회동으로 돌아오기.

 

어느덧 재현 밖에 남지 않은 일과가 불쾌했다. 어느날은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재현의 사랑은 주연의 상상 밖이었다.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밟을 수 없는 몇 만 분의 일 짜리 이국의 땅 같았다. 어떻게 세상에 자신 밖에 남지 않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를 사랑한다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형 밖에 없어요? 정말로 재현을 쫓아가 자신에게도 그런 삶을 알려달라 멱살이라도 쥐고 싶은 심정이었다.

 

재현을 따라갈 때에는 일부러 눈에 띄지 않는 차를 탔다. 다시 캠퍼스에 드나들 줄은 몰랐는데. 가을학기가 개강한 지 2주쯤 되어갔다. 이번이 막학기랬나. 유예인지 뭔지를 할 수도 있다고 했었지. 주연은 좀전에 재현이 들어간 도서관 건물 옆구리 입구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언제까지 이 짓거리를 하고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핸들에 매끈한 이마를 쿵쿵 박았다.

그때 핸들이 아닌 차창에서 또 한 번 쿵쿵 소리가 들렸다. 주연이 느리게 고개를 들어 소리의 출처를 바라보았다. …이재현. 주연은 저도 모르게 재현의 이름 세 글자를 발음했다. 언젠가 잠에서 덜 깬 재현이 제 이름을 내뱉었던 것처럼. 재현은 주연이 창문을 내릴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운전석 앞에 멀뚱히 서 있었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있을 것만 같아서, 주연은 창문을 내리는 대신 조수석 문을 딸깍 열었다. 재현이 차체를 반 바퀴 돌아 주연의 옆자리에 앉았다. 습관이야? 이런 식으로 태워주는 거.

 

"언제부터 알았어요?"

"계속 올 거라며."

 

그거 알아? 이주연 너 나 떠난 적 없어. 처음 일주일 안 나타났을 때도. 지금도. 너는 나한테 계속 오고 있어.

 

"그건…."

 

당신을 죽이려 했을 때나 한 말이고요.

 

재현은 알 리 없는 주연의 속을 무시하고 제 말이나 이어갔다. 주연은 조금 어지럽기까지 했다. 재현은 왜 이렇게까지 제 사랑을… 확신하는가.

 

"주연아."

"……."

"너 왜 나 사랑해?"

 

'왜 나 사랑해요?'

 

이어서 재현이 확신하는 것은 자신의 사랑뿐이 아니었다. 건방지고 가소로웠다. 그래서 주연은 웃었다. 주연의 말은 맞았지만 재현의 말은 틀린 것이었다. 누가 누굴… 재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연의 말을 자른 채 제 말만 이어나갔다.

 

"이재현 밖에 없잖아."

"……."

"지금 너한테 이재현 밖에 안 남았잖아."

 

그에 주연은 재현으로부터 실패를 선고받는 듯했다. 이주연과 이재현이 완전히 같아졌다는 잔혹동화를 듣는 것 같기도 했다. 결국 이주연은 이주연만 남기는 데 실패했다고. 이주연에게 남은 건 이재현 밖에 없다고. 그런데 이건 꼭… 이주연과 이재현이 같아졌다는 결말 같기도 했다. 주연은 이제서야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죽이고 싶은 마음이든. 닮고 싶은 마음이든. 모든 것에서 말이다. 분명 겪은 적 있는 익숙한 순간이었다. 누군가 나를 구하고 있어.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어. 이 사람을 따라 살면 돼.

 

"형이 온 거예요."

"응."

"나는, 진짜, 안 오려고 했어."

 

그에 재현은 다시금 생각했다. 이주연이 이재현을 찾아오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자신이 우회동에 간 시간들이 죄다 거짓환상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제는 그 기억 없이도 주연을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마지막이라는 결심으로 주연에게 또 물었다. 이주연 너 정말 우회동 산 적 없어? 주연은 끝까지 거짓부렁이나 씨부리고 싶었다. 더러운 나의 모든 것을 주지 않겠다는 마지막 발악이기도 했다.

 

이주연의 이재현은 결코 그곳에서 시작되지 않았다고.

 

"산 적 없어요."

 

덜컹. 덜컹. 비로소 어떤 시간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생애가 세워지는 지점이었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정말로 산 적 없는 곳에서. 이제야 살 것 같은 마음으로.

 

"나한테 남은 게, 형 말대로 이재현 밖에 없어서,"

"……."

"그런데 이게 나라서,"

 

그래서. 이주연은 이재현을 사랑한다고. 완전히 겹쳐진 우리를 보라고. 이게 나의 사랑이라고. 이것만이 주연이 할 수 있는, 제 앞에 놓인 사랑스러운 유산에 매달리는 방식이었다.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