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와구치 제이의 우울.
공식 풀네임 sawaguchi 미노코토 L.J.
도쿄 시부야 시의 전용 라이브 하우스에서 공연하는 지하밴드의 일렉기타리스트다.
그는 얼마 전 밴드의 보컬이었던 여자친구 sakihada 김미숙 Y.U. 양과 헤어졌다. 제이의 일방적인 통보였다.
‘우리 그만 헤어졌으면 좋겠어요.
P.S. 사키하다 양에게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sakihada 양은 라인을 받자마자 개인적으로 운영하고 있던 트위터 계정에 트윗을 남겼다.
To. L.J.
정말 나빠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것 용서 못해
한국 남자들이란 다 그런 족속이야-?!
୧༼ಠ益ಠ╭∩╮༽
오전 4:33 □ ☆
그리고 라인 자기소개란에 적어둔 풀네임에 제이가 붙여준 미들네임 ‘김미숙’이 사라졌다.
트윗이 올라온 이후 지하 락밴드씬이 뒤집어졌다. 지하계의 아이돌 사키하다 양을 차버린 사와구치 엘제이. 황색언론에선 기타가방을 맨 채 스테이지를 나서는 엘제이의 모습을 확대하여 통크게 1면에 싣기도 했다. 지하세계 No.1 아이돌 사키, 일개 기타리스트에게 차이다?! 터진 플래시에 질끈 감은 눈이 압권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사키 양보다 인지도가 한참 떨어지는 비인기 멤버.
파파라치가 지하세계 일개 무명 기타리스트인 저의 사진을 찍어갈 줄이야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는 한동안 「동경사키사키뿅•진리연합」 이 보내온 혈서와 협박문에 시달려야 했다. 그중엔 혐한성이 짙은 문구도 종종 발견되었다. 너희 집으로 가라 조센징! 염산을 부어버리겠다! 칼로 찔러 죽이겠다! 그러나 엘제이는 빼곡한 우체통을 묵묵히 비워내며 담배 한 대 태운 불로 편지들을 불태우고 불장난이나 해댔다. 텅 빈 공터에 휘휘, 혈서들을 그을리며 (사실은 그저 혈서처럼 보이기 위해 제작한 특수용액인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침 적절한 사키의 노래 한 구절을 흥얼거렸다.
온몸의 세포들이 무감각해
극락왕생을 향한 아포토시스(細胞自殺)
아아 이제는 ‘히토리쟈나이’ 하고 싶어...
.
.
.
음악이 좋아서 시작한 일도 사실은 따분하다.
어느 순간부턴 타성에 젖은 얼굴로 지하 스테이지의 답답한 공기만 쳐다보며 줄을 튕겼다. 그럼 싸구려 조명들이 사키하다 양을 비추고 그 앞줄엔 팬스를 잡은 오타쿠들이 침을 튀기며 사키하다 양을 외친다. 사키 쨩! 콧치미테! 사키하다 양 특유의 비명 같은 고음. 기괴한 퍼포먼스를 할 수록 오타쿠들은 더 우짖는다. 그녀가 칼을 삼키며 허리를 꺾을 수록 우리는 서커스 유랑단이 된 것 같다. 사키가 저들을 이끌고 종교 하나를 만들면 아마도 그 소문의 알레프, 내지는 빛의 고리마냥 성장할 것이 분명했다.
광인 같은 돼지새끼들⋯ 나는 무의식 중에 생각하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하는 것이라곤 맨 뒤의 여성 관객들을 위해 입에 피크를 물고 이따금 얼굴을 찡그리고 독주할 때면 혀를 내밀어 섹시한 표정을 짓는 일. 그런데 며칠 전부터 벽에 기대 팔짱을 끼고 유독 이쪽을 주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검은 마스크를 입에만 걸친 사람이다.
행색만 보면 꼭 어딘가의 관계자 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혹시 대형 기획사에서 캐스팅을 위해 나왔나 은근히 기대하는 시선을 주었다. 아니면 매니저 형인가, 그렇다기엔 키도 훤칠했고, 답지 않게 공연 내내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사키 쨩의 노래에 맞추어 부르는 정신 나간 구호에도, 사키의 묘기에도, 나의 독주에도, 그는 같은 자리 같은 표정을 고수했다. 따분해보이기도 했고 집중하는 것 같기도 했다. 확실한 건 사키가 아닌, 며칠내내 줄곧 나를 향하는 시선.
싸구려 색깔의 조명이 그에게까지 가닿으면 나는 그의 얼굴을 더 명료하게 따져볼 수 있었다. 눈도 초롱하니 맑고, 눈썹은 얇지만 진해서 존재감 있다. 남성스럽기도 하고, 여성스럽기도 하고⋯ 그날은 무언가 좀 달랐을까.
그가 답답한 지하 공기에 찡그리며 마스크를 턱 끝까지 내렸다.
“⋯⋯⋯.”
일순 사키 양의 목소리가 느릿한 메아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역재생 되는 우리의 세 번째 곡 「undying 」.
흐르던 공기가 멈춘 것 같았다. 나는 그야말로 무중력의 상태에서 허공을 튕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음악이 끝날 때까지, 줄곧 테이프는 반대로 돌아가는 상태였다. 이상한 경험이었다.
잠시 무대 정비를 하는 동안 그가 사라졌다. 팬스 앞쪽으로 왔을까 고개를 내밀어도 어디에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유독 시선이 꽂혔던 것은 사육장 먹이통 앞에 모여든 것 같은 이들과 다른 분위기를 풍겨서였을까? 다시 그를 봐야만 연주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를 찾기 전에 노래는 시작되었고 또 다시 나의 시선은 허공을 헤매었다. 말을 붙여볼 생각도 추파를 던질 생각도 없었으면서.
그렇게 또 한 번의 영혼 없는 윙크. 빼꼼이는 혀. 사람들은 모두 광란의 춤을 추며 육신을 아득히 벗어난다. 사키는 선봉장이 되어 광인들을 이끌었고 조명에 비껴선 나는, 방금 전 남자의 오롯한 시선과 베일에 한 겹 둘러쌓인 듯한 신비로움을 더듬으며 줄을 튕겼다.
그러다 절정의 순간. 우리는 모두 함께 눈을 허옇게 치켜뜨고 말았다.
모두 다함께!
“사키피----쓰♡”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요. 사키는 역시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얼른 대기실을 나선다. 그녀와는 집 방향이 같았기 때문에 몇 분이 좀 지난 뒤 기타 가방을 매서 뒷문으로 나왔다.
누군가 내 손목을 잡아세웠다.
“제이! 저⋯ 싸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주 정중한 말투의 소년이 티셔츠와 마커팬을 내밀었다. 가끔 싸인을 요청하는 사람이 있기야 했지만, 대부분 여자 관객들이었다. ⋯싸인? 그가 되묻자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반짝였다.
팬서비스 차원으로 입으로 마커팬 뚜껑을 따고선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스스럼없이 휘갈겨 티셔츠를 내밀었다.
싸인을 확인한 소년이 미간을 좁혀 다시 티셔츠를 내밀었다.
“⋯これ何の字ですか.”
⋯무슨 글자예요?
ㅇ ㅣ ㅈ ㅜ ㅇ ㅕ ㄴ.
소년은 아마 본 적 없는 글자였을 테다.
“すごくカッコイイ文字.”
엄청 멋있는 글자.
나는 별 의미 없이 사키피스를 날리고 다시 몸을 틀었다. (그런데 사키피스란 게 중지를 올린 상태에서 엄지만 그럴 듯하게 펴는 것이라, 내가 손가락 욕설을 한 것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자 소년이 내 가죽자켓 끄트머리를 붙잡았다.
돌아보니 그 짧은 찰나에 열이 올랐는지, 소년의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어디 아픈가? 고개 숙여 안색을 확인하자 그가 돌연 염소 같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아까 물었던 피크⋯ 주실 수 있나요?”
“⋯⋯⋯?”
“가, 갖고 싶어요⋯”
스스로를 ‘아타시’ 라는 여성스러운 1인칭으로 부르고, 10대 남자애가 입기엔 조금 반사회적인 옷 스타일이었지만, 그저 순수한 팬심이라고 생각했다. 기타 가방 앞에서 피크를 꺼내는데, 소년이 나를 멈춰세웠다. 저⋯⋯
“이 뚜껑처럼요, 침이 좀 더 많이 묻은 걸로⋯”
머리가 굳었다.
“⋯뭐?”
난데없이 튀어나온 한국말에도 소년은 그저 얼굴을 붉히며 밭은 숨을 쉬어댔다.
여긴 차원이 다르게 음침한 사람들이 많다는 걸 잊어선 안 됐다.
그, 간직하고 싶어서요, 엘제이 상의 침이 묻은 피크⋯⋯
나는 마치 희롱이라도 당한 듯 어쩔 줄 모르고 입을 옴싹달싹하고 있었다.
“야, 일본 사람들은 왜 이렇게 다 변태 같은지 모르겠어.”
그때 환청 같이 어디선가 한국말이 들렸다. 마음의 소리인가? 그러나 낯선 목소리다.
소년의 뒤편에서 어떤 남자가 걸어왔다. 뒤집어 쓴 후드티, 검은 마스크.
스테이지 뒤편의 그 남자였다.
“あんた, ハニ現⋯?”
어, 하니겐⋯?
하니겐?
소년이 그를 알아보고 놀란 듯한 얼굴을 지었다. 하니겐이란 사람이 소년을 향해 쉿, 입가에 손을 올리더니 그만 가보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였다. 비즈니스 미소로 보이는 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소년은 하니겐이란 사람에게 눈을 때지 못한 채 골목을 벗어났다. 나는 그제야 온전히 하니겐을 마주할 수 있었다.
“⋯한국 사람이세요?”
“네.”
“이름이 하니겐?”
“나도 닉네임 같은 거. 사와구치 엘제이가 본명 아닌 것처럼.”
문득 그의 목에 징 달린 목걸이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남자들이 잘 하지 않는 드롭 귀걸이에 한쪽은 샤넬이다. 아마도 무대 의상 같은 옷 위에 후드를 입은 것 같았다.
내 시선이 한동안 목덜미 쪽을 향하자, 그가 민망한듯 목 쪽을 가라며 웃었다. 왜 그렇게 봐요. 여기서 이런 거 많이 하잖아요. 그렇기야 했다. 여긴 워낙 특이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그래도 하니겐은 제 옷차림을 꽤나 부끄러워 하는 것 같았다.
“⋯아까는 왜 사라졌어요?”
그가 되묻듯 눈썹을 한 번 들어올렸다. 계속 보고 있었는데.
“아. 공기가 답답해서 잠깐. 끝날 때까지 여기서 담배 피우고 있었어요.”
거기 뒤에 있는 여자애들은 다 엘제이 보러 온 것 같던데.
“싸인 받으러 온 사람이 어째 나 밖에 없네?”
적당히 왜 나를요? 라고 물을 타이밍이었다. 왜 그렇게 광신도들의 공연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또 왜 그렇게 나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인지. 자아를 탈피한 해탈과 광분의 공간 속에서도 어떻게 고요한 눈으로, 나를.
그가 별 대수롭지 않게 얘기를 꺼냈다.
“그냥, 만나보고 싶었으니까. 나랑 비슷한 사람.”
비숫한 사람?
한국인이라면 일본에서 그리 멸종위기의 종족도 아니었을 텐데, 그가 느낀 우리의 공통분모가 무엇일지 쉽사리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물론 한국인이면서 여기까지 기어들어온 처지라면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의 세상이 일순 뒤로 감기 된 이유도, 설명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역시나 그 이유가 맞을 것이다.
⋯우와. 아무튼 좀 특이하단 생각을 짧은 감탄사에 감추었다. 그가 코웃음치듯 웃었다. 우와는 무슨 우와⋯
“그래서 내가 무슨 일 하는지 알겠어요?”
“⋯⋯가수?”
고개를 저었다. 그럼요? 눈으로 되묻자 그가 답했다. 아이돌이에요. 유명한 건 아니고...
“그래도 비슷한 거 맞지? 우리도 이런 공연장에서 공연해요. 우리도 매일 밤에 공연하고, 하이터치회 해서⋯”
나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또 다시 유명인과 있는 것을 황색언론 기자들에게 찍히면 곤란하다.
사키하다를 걷어찬 엘제이, 남자 아이돌과 열애 중인 동성애자?
라는 제목으로 온 세상에 뿌려진다면⋯
그래서 턱까지 내린 마스크를 멋대로 코 끝까지 올렸다. 하니겐의 후드 모자를 앞으로 당겨 얼굴을 가렸다. 나보다는 그가 우선이었다. 의지 없이 나와 가까워진 하니겐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얼른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 저번에 사진이 찍혀서⋯ 좀 예민해요.”
“아, 열애설? 봤어요.”
“그리고 아이돌인데 사진 찍히면 안 되시잖아요.”
“난 아직 아무도 몰라서 괜찮은데?”
“그래도⋯”
“가릴 거면 너를 가려야죠.”
그가 내 어깨 뒤에 매달려있던 후드 모자를 뒤집어 씌웠다. 안 그렇겠어요 제이. 골목 끝쪽을 곁눈질 하고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응. 하니겐은 여전히 나의 말대로 마스크를 콧등까지 눌러 쓴 채였다.
“암튼 나도 공연하는데, 제이가 와줬으면 해서.”
시종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던 그가 무언가를 꺼냈다. 손등에 하트 모양으로 구멍이 뚫린 가죽 글러브를 낀 채였다.
매그놀리아 보이즈 in 시부야 악수회 공연 번호표. 무려 1번이다.
놀란 척 눈을 떴다. 사실 들어본 적 없는 보이그룹이었다.
“오늘 공연 재밌었어요. 여긴 아주⋯ 파격적이야.”
그리고 코를 찡긋여 비즈니스 웃음을 지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사키 쨩의 공연은 한 번 본 사람들은 무릇 도망치기 마련이니까.
되도록이면 그의 초대에 지금 당장 확답을 주고 싶었지만 스케줄표는 머릿 속이 아닌 백스테이지 화이트보드에 있었다. 나는 참, 싸인 받으러 왔는데 종이랑 팬을 깜빡했네. 따위의 농담을 던지며 그가 웃었다.
기타가방에서 새 피크를 꺼내 보였다. 내 이름이 적힌 것이었다. 그 소년이 정상적인 팬이었다면 나는 이것을 건넬 생각이었다. 엄지 사이에서 조금 굴리다가 그에게 건넸다. 이거, 내 이름⋯
“오, 주연이?”
주연이구나, 이름. 피크를 명함처럼 내려다보며 그랬다. 네. 자연스럽게 나는 말을 높이고 있었다. 그래서 또 형. 하고 불렀다.
“1등으로 가면 좋은 거 있어요?”
“좋은 거? 좋은 거⋯”
나랑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엄청난 특전인 것처럼 말했다. 나는 좋은 게 좋은 건 줄 알아서 오오. 짧게 감탄했다. 그러자 비시시 웃으며 내 팔뚝을 툭 쳤다. 너 지금 나 놀리냐. 아니요, 전 늘 진지해요. 어느새 격식 없어진 대화에 뒤늦게 아닌 척을 했지만 겐은 그저 한 쪽 눈을 찡그렸다. 믿지 않는다는 것 같았다.
“너 안 와도 난 기다릴 거야.”
그래, 무대 위에서, 혼자. 쓸쓸하게⋯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이다. 혼자. 쓸쓸하게. 무대 위에서.
어쨌든 조명은 무대를 향한다. 또 가수ー혹은 아이돌은 공연이 진행되는 그 순간만큼엔 관객의 정신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 (정말이다, 사키 쨩에게 말 그대로 ‘세뇌’된 사람들을 보면.) 소년이 알아본 것처럼 하니겐 그는 팬도 많은 것 같았다. 그가 매단 온갖 화려한 장신구에 조명이 가닿아 산발하는 빛줄기. 혹은 그 자체로도 빛나는 아이돌.
무엇보다 이런 그를 혼자 두기란 어려운 일이다.
스테이지 위에서 혼자 남아 고작 나를 기다릴 하니겐을 상상했다. 그렇게 쓸쓸한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다.
“우리 또 봐요.”
나를 기다리겠다는 겐은 별 미련없이 뒤를 돌아 쿨하게 한 손을 흔들었다. 그가 멋대로 놓았다 쥐는 말씨에 우리 사이는 좁혔다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지금은 멀어진다. 물리적인 거리와 함께 멀어진다⋯ 그가 골목을 빠져나가 오른쪽으로 꺾을 동안 나는 가방줄 한 쪽을 잡고 그 뒤통수를 이유 없이 응망하고 있었다. 나는 왼쪽으로 가야 했다. 가야 했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 앞에 멈춰선 것 같은 시간이 비로소 내 살결을 쓸고 흘러가는 것 같은 이 간지러운 감촉.
하니겐을 보았다.
그것은 내 인생 첫 번째 허무이자 축복이었다.
히토리쟈나이
クラブ バカ•なるぢあ
클럽 바카날리아.
전용 공연장의 스테이지 뒤엔 앙리 마티스의 ‘춤’ 그림이 크게 걸려져 있다.
주연이 기억하길, 사키는 밴드를 결성하기 전 그리스•로마 신화에 한창 빠져있었다고 들었다. 바카날리아는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를 모시는 신도들이 열었던 종교 의식이자 광란의 축제였다. 클럽 이름을 바카날리아로 지은 이상, 사키는 정말 자기 자신을 디오니소스 신 쯤으로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주연의 포지션은 일렉기타이자 사키를 지키는 왼쪽 날개의 천사였다. 쥬, 욘. 숫자 10과 4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ten四, 1004. 참으로 기발할 수가 없다. 주연은 마침 한국말로도 1004가 천사, 그러니까 ‘텐시’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사키는 꼭 일종의 계시를 받은 것 같다며 좋아했다. 오른쪽 날개를 맡은 베이스 마츠다 형은 주연보다 계급이 더 낮은 천사였다. 구구절절한 설정들은 주연은 이미 잊은지 오래였지만, 마츠다 상은 잊을 만하면 그놈의 ‘계급’ 타령으로 투정을 부렸다.
“제이 넌 나보다 계급도 높잖아, 사키가 너무했다고!”
드러머 다이라 상은 산신령처럼 수염이 길어서, 천사를 위협하는 악마 포지션이었다. 주연은 이런 설정에 질겁하여 달관한 지 오래지만, 가끔 그 계급들은 유의미해졌다. 공연을 할 땐 정말 사키가 신이었고 다이라가 악마였다. 관객들은 신도였고 스토리 라인에 맞는 노래를 부른다. 언다잉은, 불멸의 사키하라를 찬양하는 노래였다.
메탈릭한 날개 모양으로 생긴 주연의 일렉기타는 천사의 날개 역할을 대신 하고 있었다. 통칭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 이것도 물론 주연이 지은 것이 아니다. 오른쪽 날개인 마츠다 상의 기타 이름은 ‘데자이아’(desire). 좀 더 깊게 파고 들자면, 계급이 높은 천사에겐 재앙, 낮은 천사에겐 소망을 연주하게 해서⋯⋯ 때론 ten四가 ten死가 되어, 열 가지의 죽음(죄악)을⋯⋯
어쨌든 그런 갖가지 설정들이 있었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이 세계관에 기반한 노래들은 정말 수요가 생겼다.
궁극적으로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의 억압과 굴레, 질곡, 고통에서 벗어나 쾌락에서 함께 되자는 메세지였다. 눈깔을 허옇게 뜨고 제정신이 아닌 짓을 자행하는 것도 전부 그런 이유였다. 락 클럽과 함께 와인바를 운영하는 것도 전부 그녀가 음주가무를 사랑해서이다. 그럼 정말 극락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음주가무를 통한 정신의 해방, 육신의 쾌락.
난해하지만 분명한 메세지 때문인지 팬들 중에는 회사원도 많았고, 젊은 정치인들도 몰래 한 번쯤은 서커스를 보러 오는 것처럼 온다는 소문도 돌았다. 메인그룹이자 그룹의 정체성인 사키하다는 사실 도쿄대를 목표로 공부를 하다 미쳐버린 나머지 음악에 손을 댔다는 찌라시가 돌았다. 주연은 그 소문의 실체에 대하여 정확히 아는 것이 없었지만, 확실한 건 사귈 땐 그저 여느 여자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는 점이다.
SiBUYA karakiri StaGe ☆
밤거리 사이에서 힘없이 깜빡이는 네온사인 하나를 찾았다. 그 옆에는 인기가 다 지난 도쿄 바니보이즈의 사진이 붙여져 있었다. 지하 아이돌의 전용 공연장인 듯 싶었다. 계단 아래에서 둥둥거리는 음악소리를 들으니 공연은 이미 시작한 뒤였다. 주연은 계단 위에서 몇 분정도 멍을 때리며 고민하다 결국 계단을 내려갔다. 입장순서는 1번이었는데 제일 늦게 도착하고 말았다. 사실은 고질적인 무기력함 때문이었다. 샤워를 하고 옷을 입는데에만 몇 시간이 걸린 것 같다. 괜히 거울 앞에서 눈 밑을 늘여뜨리고 피어싱 박아넣은 혀를 낼름였다. 다음에는 배꼽 즈음에 뚫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다가, 결국 머리도 감았으면서 모자를 뒤집어쓰고 집을 나섰다. 1등으로 도착하기엔 이미 한참 늦어버린 뒤였다. 그래도 하니겐이 챙겨준 티켓은 손에 꼭 쥔 채였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문을 열고 들어서니 실체없이 둥둥거리던 음악소리가 눈 앞에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경광봉 같은 응원봉이 환각처럼 일렁였고, 무대를 향해 휘둘렀다. 주연은 무대 쪽으로 가까이 가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벽 쪽으로 몸을 피신했다.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간헐적으로 귀를 찔러댔다. 들어왔던 것은 늘 굵직한 남자들의 주파수였기 때문에, 주연은 저도 모르게 한 쪽 귀를 가리고 찡그렸다. 익숙하지 않은 주파수는 그의 청각 시스템을 괴롭게 했다. 그리고 혹시 몰라 쓰고 온 마스크를 코 끝까지 올려 무장했다.
바카날리아와는 다르게 이곳은 눈높이가 어긋나는 구조였다. 높은 무대 위엔 호스트바 정장을 입은 남자 아이돌들이 군무 아닌 군무를 추고 있었다. 주연은 그가 그랬던 것처럼 벽에 기대 팔짱을 끼고 무언가를 따져보듯 무대를 주시했다. 하니겐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군무용 노래가 끝나자 스테프로 보이는 사람들이 무대를 정리하고 멤버들에게 물과 땀을 닦을 휴지를 나눠주었다. 멤버들이 물품을 받을 때마다 허리를 꾸벅꾸벅 숙여가며 인사하는 것이 조금은 유난스럽다고 생각한다. 외형은 JD(여자 대학생)을 노린 대학 근처 호스트바에서 볼 법한 깻잎머리부터 애니메이션 주인공 같은 화려한 염색까지 다양했지만, 몇 명은 170cm도 되지 않아보였다. 말투는 글쎄, 보통 갸루 누나들과 다니는 양키 남자들 같았다. 문득 하니겐은 이런 싸구려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직 그를 잘 알지도 못하지만, 풍기는 아우라, 그 자체가.
“마지막으로는, 아, 모두들 오늘 기대했지? 오늘은 우리 하니겐의 솔로 무대야. 오늘은 이 녀석이 좀 특별한 걸 준비했다고 하네.”
“에ー 기대돼? 기대돼?”
주황색 머리 멤버 한 명이 앞서 바람을 잡자 팬들은 동시에 에ー 에에ー 거리기 시작했다. 질색을 하는 것인지 환호를 하는 것인지, 여자들의 리액션은 늘 두 개 이상의 뜻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이따 악수회 때 보자! 바이바이! 무대 위 멤버들이 퇴장하자 팬들은 이번엔 아쉬워서 에ー 에에ー 거린다. 주연은 여전히 이런 주파수가 익숙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흩어졌던 핀조명이 무대 가운데에 모이고, 스탠딩 마이크가 세워진다.
그리고 하니겐이 등장했다. 공연장의 공기가 조금 달라진다. 어제와는 다르게 그저 평범한 검은 셔츠 한 장에 딱 달라붙는 청바지 차림이다. 여전히 귀에 주렁주렁 매단 귀걸이와는 대비된다. 그는 마이크를 맞추는 동안 아래로 쭉쭉 펴기만 한 것 같은 갈색 머리를 여러 번 털고 쓸어넘겼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눈썹이 드러나고 이목구비가 훤해졌다. 매끈한 혀로 입술을 몇 번 축이더니 마이크를 잡았다.
주연은 벽에서 등을 때고 천천히 무리 속으로 향했다. 그가 짤막하게 입을 땠다. 하니겐 입니다. 무대가 어두워지며 가라오케 같은 조명이 무대 바닥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그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하자, 사람들은 일제히 웃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혀 웃을 만한 노래가 아니었다. 발라드였고, 심지어 그는 적당히 감정을 잡고 있는 상태였다. 웃음소리와 개인멘트에도 그는 당황하거나 놀란 기색도 없었다. 노래 실력이 말짱 꽝이거나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듣기 좋은 미성이었다. 방금 전 온갖 싼티나는 애드리브와 안무가 난무하는 공연과는 분명 달랐다. 군중 속에서 홀로 당황한 주연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여자들만의 코드가 있는지 골몰했지만, 이내 터져나온 개인 멘트에 주연은 탄식할 수 밖에 없었다.
에에ー 발음 바보 같아ー
그랬다. 사람들은 하니겐의 투박한 일본어 발음을 갖고 놀리는 것이었다.
그의 노래를 진심으로 감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서로를 돌아보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이래서야 유치한 이지메와 다를 바가 없었다.
주위를 노려보던 주연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지금 그를 올려다보며,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두 눈을 감고 노래하는 그의 노래를 진심으로 듣는 것 밖에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여기 단 한 명이라도 있다고.
내가 여기 왔다고.
계속해서 무언의 신호를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돌고래끼리의 언어처럼 주파수라도 쏴야할 것 같았다.
우리가 같은 종족이라면, 우리가 비슷한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을 알아봐야 했다.
첫 번째 곡이 그렇게 끝이 났다. 하니겐은 별다른 멘트 없이 스탠딩 마이크 아래에 놓인 물로 목을 축이더니 두 번째 곡을 시작했다.
센치한 피아노 소리와 적당한 기타 선율이 들렸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남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 적이 있나요
또 다시 예상치 못한 한국말이 들렸다. 한국 노래였다.
끝나면 모두들 떠나버리고
객석에는 정적만이 남아있죠
노래할 땐 줄곧 지그시 감고 있던 두 눈꺼풀이, 천천히 막이 올라가듯 열린다. 그리고 단 한 번의 미동도 혼란도 없이 곧바로 시선은 군중 속의 주연을 찾아낸다. 후광을 매단 그가 이쪽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벙긋였다. 옆을 매운 관객들은 그저 시부야 교차로를 지나며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같았고, 이 퀘퀘한 지하는 그저 하니겐과 나 이주연. 둘만이 존재하는 세계 같았다.
돌아가는 조명은 고개를 치켜든 주연의 얼굴까지 천천히 적시고 지나간다. 주연은 그것이 꼭 미지의 블랙홀에서 스며나온 쓸쓸함, 고독, 외로움 따위 것들이 제 몸을 쓸고 지나간 것만 같았다고 생각했다.
눈이 마주친 하니겐은, 오직 주연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공연이 모두 끝난 뒤엔 곧바로 악수회가 진행됐다. 팬 매니저가 팬들을 일렬로 줄을 세우게 시켰고, 주연은 1번 표를 들고서도 아무렇게나 인파에 낑겨 줄을 섰다. 멤버들 역시 무대 위로 다시 올라와 섰다. 유독 톡 튀어나온 것 같은 하니겐은 제일 끝에 있었다. 그와 악수하려면 먼저 저 양아치 남자들과 손을 잡아야 했다.
주연은 괜히 땀 베인 손바닥을 바지에 미리 문질렀다. 아무리 둘러봐도 남자 팬은 주연 혼자였다. 양키들이 어떤 반응을 할지 주시하다가도 팬들과 반갑게 인사하는 하니겐을 보았다. 개중 몇 명은 그를 그저 지나치기도 했는데, 그럼 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뻘줌하게 내민 손을 말아쥐었다. 분명 노래를 할 때 귀담아 듣지 않았던 옆사람과도 즐거운 듯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주연의 순서가 돌아왔다. 에, 보기 드문 형님이잖아? 첫 번째로 선 멤버가 남자인 것을 보고 방정 맞게 형님, 형님 거리자 주연은 모자 아래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미간을 일자로 당겼다.
“형님 향수 냄새 좋네, 어떤 거 써?”
“비밀.”
“엑?!”
악수하지 않은 채 그대로 두 번째 남자로 넘어갔다.
“있지 형님은 누구 오시야? 우리 팬 중에 남자는 거의 처음...”
“알 바 없잖아.”
“뭐야 무섭네 이 형님, 컨셉이야?”
세 번째 남자는 주연을 알아본 듯 고개를 조금 숙여 얼굴을 확인하려고 들었다.
“저기 근데, 혹시...”
“No.”
“에? 질문도 아직 안 했는데?”
“Sorry.”
질문에는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여놓으며 주연은 그렇게 악수 한 번 하지 않은 채 하니겐이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웃음을 참듯 입술을 앙 다물고 있던 그가 주연의 어깨를 툭 밀쳤다. 아니 너 뭐해? 복화술로 중얼거려도 주연이 태연하게 주머니 속에서 마커팬을 꺼냈다.
“싸인해주세요. 팬이에요.”
그리고 손바닥을 펼쳐 내밀었다. 마주친 눈에 장난끼가 애굣살처럼 봉긋 솟아있다.
하니겐의 손은 능숙하게 움직였지만, 살짝 웃어보이는 시선은 줄곧 주연에게 향해있었다.
‘고마워.’
그가 입술을 벙긋이며, 한 번 웃었다.
손바닥을 펴고 있던 주연이 그의 팔목을 잡아 그대로 끌어당겼다. 놀란 시선들이 이쪽을 향했다. 주연이 귓가에 속삭였다.
‘콘비니 앞에서 봐요. 세븐일레븐.’
팬은 스킨십 금지입니다! 금지입니다! 팬 매니저가 혈안이 되어서 달려오는 걸 하니겐이 간신히 막는다. 괜찮아요, 아는 사람이라서. 괜찮다니까. 블랙리스트? 스즈키 정말 이럴 거야? 방금 저 애⋯ 겐이 주변을 둘러보다 속삭이자 옆에 있던 타 멤버들도 모두 유유히 사라지는 주연의 뒷모습을 궁금한듯 바라본다. 겐, 남자 팬도 있었네? 옆 멤버가 빈정거리는 소리엔 그저 닥쳐 원펀맨. 웃으며 일갈했을 뿐이다. 주연은 화살 같은 팬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등에 꽂은 채 그대로 공연장을 나섰다.
그러나 모두는 알았어야 했다.
모두가 비켜서는 와중에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는 사와구치 엘제이는 아무리 후벼파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안드로이드에 가까웠음을.
한적한 세븐일레븐에서 먹을 것으로 봉지를 가득 채워 계산했다. 주연은 편의점을 나와 협소하게 마련된 자전거 주차장에서 쪼그려앉아 안절부절 담배 한 대를 피고 있었다. 저 멀리서 볼캡을 눌러쓴 건장한 남자가 슬그머니 걸어왔다. 주연. 그를 부르는 소리에 주연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담배를 꺼트린다. 아무말 없이 곧바로 봉지를 쥐여주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번갈아 쳐다봤다. 이게 뭐야? 공연 끝나면 배고프잖아요. 새벽이고. 봉지 안을 뒤적이던 겐이 아아. 하며 볼을 한 번 들썩였다. 고맙다. 가벼운 인사와 함께 마주서있던 겐은 주연의 옆에 나란히 서며 쪼그려앉았다.
잠시 정적이 들어찼다. 근데 있잖아.
“공연은 어땠어? 좀 늦게 왔더라.”
주연은 제 담배 케이스에서 한 개비를 꺼내 건넸다. 군말 없이 받아든다. 탁탁,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새로 꺼낸 제 것에도 불을 붙였다. 찬 공기에 빨개진 코 끝이 담뱃불에 슬슬 녹는다.
“짜증났어요.”
“뭐?”
“사람들이 비웃는 게요.”
주연은 부박한 웃음소리와 째지는 주파수를 상기했다. 공연이 끝나고 공연장이 생명을 잃은 무無로 돌아가면 사라질 것들, 흩어지는 연기만큼 허무한 것들이었지만, 그를 조롱하고 멸시하던 순간은 어째서인지 자신의 일마냥 불쾌하다.
“노래 부를 때 웃고, 발음 이상하다고 놀리고.”
“그걸 귀엽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
“악수도 안 하고, 무시하고.”
“뭐 그거는 다른 애들도 당했어서 괜찮아.”
“⋯⋯⋯.”
주연이 그를 한 번 돌아봤다. 눈이 반쯤 감긴 것이 꼭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이었다. 자신이 당했다면 그 자리에서 담판을 지었을 것이라 그저 상상만 한다. 근데 너 블랙리스트 오를 뻔 해서, 그냥 그 엘제이라고 말했어. 괜찮지? 주연은 그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벌어진 일에 호들갑을 떨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그가 엘제이가 누구냐고 되묻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근데요.”
“응.”
“형은 형이 맞아요?”
“나 몇 살이냐고?”
“네.”
“스물셋.”
이변은 없었다. 직감적으로 느낀 형은 역시 형이었다. 그렇게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것처럼 대하는 그가 어색하지도 않았거니와, 좋은 사람인 척 가식을 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형.”
주연이 잠시 정적을 만들더니, 벌겋게 튼 손으로 이어커프 매단 귀부터ー머리칼이 살짝 내려온 뒷목까지 머쓱하게 주무르다 말했다.
“나 형 이름이 뭔지 몰라요.”
“내 이름? 알잖아. 하니겐.”
“그거 말고.”
“하니겐이면 됐잖아. 겐 상. 나 원래 겐이라고 불려.”
⋯⋯⋯.
아 알았어.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을 두 번씩이나 받자 그가 멋쩍게 웃으며 투정 부리듯 어깨를 가볍게 툭 밀었다.
“음. 현재의 반대.”
“과거?”
“뭐라는 거야⋯”
그가 피식 웃었다. 다시 생각해봐.
“현재의 반대면 과거인데.”
“왜 그렇게 반대야. 미래도 반대가 될 수 있는데.”
“그렇네.”
주연이 골몰했다. 주연의 매커니즘에 따르면 현재의 반대는 과거였고, 미래의 반대는 과거였다. 과거의 반대는 미래였다. 현재의 반대편에 서있는 것은 미래가 아닌 과거 같았다. 그거야 미래의 과거는 현재, 현재의 미래는 또 다른 현재였으니⋯⋯
엎치락 뒤치락 하는 상관관계에서 수수께끼 같은 그의 이름은 의외로 쉽게 도출됐다.
“⋯재현.”
“재현?”
“맞죠. 맞췄다.”
마침내 그의 가슴팍에 명료한 이름표가 붙여진다. 재현이었다. 주연은 그에게 하니겐이란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 멋대로 정한다. 응. 맞아. 이재현.
“근데 여기선 아무도 그렇게 안 불러.”
재현은 마치 제 이름을 사어死語를 대하는 것처럼 굴었다.
아, 그래서 겐자이. 겐이구나. 주연은 뒤늦게 깨닫는다. 싸인에서 ‘겐’ 자만 강조하듯 한자로 쓴 이유 역시.
“아뇨. 난 한국 사람이니까 형도 한국 이름으로 불려야지.”
“그런가?”
“굳이 아닌 이름으로 부를 필요 없잖아요.”
한적한 편의점에 누군가 오가며 삐로리로리, 울릴 때마다 재현의 시선은 경계하듯 그쪽을 향하다가 다시 아스팔트 바닥으로 향한다. 바닥에 담뱃물을 지지던 재현이 문득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래서 넌 왜 여자친구한테 김미숙이라고 붙여줬어?”
사키하다 김미숙 유키.
그의 전 여자친구는 정말이지 이목을 집중시키는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마이너 밴드씬에서 알아주는 밴드의 보컬 이름의 미들네임이 ‘김미숙’ 이었다. 그것도 키무•미수쿠ー따위가 아닌, 한국어 정자로 ‘김미숙’이었다.
사실 ‘김미숙’은 재현이 주연을 찾을 수 있었던 실마리였다. 이 음습한 지하 어딘가에 같은 한국인이 있다는 일종의 주파수였던 것이다. 나잇대에 맞는 이름이 아닌 다소 연륜 있는 어감에, 재현은 분명 그것이 ‘일본인’ 사키하다 양을 놀리기 위한 미들네임이라고 생각했다. 지하세계 밴드 멤버끼리는 서로 미들네임을 지어주는 문화가 있었으니까.
“아, 울 엄마 이름.”
“뭐?!”
그런데 이주연은 전혀 다른 얘기를 꺼내고 말았다.
“사키가 미들네임 정할 때, 나 보고 제일 좋아하는 걸로 이름 붙여달랬어요. 이치고, 오렌지, 우사기, 딸기 케이크, 뭐 그런 걸로. 근데 난 엄마가 1등이라. 그냥 김미숙. 그래서 김미숙.”
사키는 좀 단순해서 한국말이면 다 멋있는 줄 알았어요.
붙이는 사족에 재현은 과연 더 단순한 사람은 누구인가 저울질 해본다. 40대 여성 같은 이름을 아무 검토 없이 미들네임으로 단 사람이나, 엄마가 좋다고 해서 여자친구에게 엄마 이름을 붙인 사람이나. 그들이 왜 사귀게 되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그거 어머님 허락은 받았어?”
“아뇨. 지금은 못 만나서.”
내 미들네임, 그니까 미노코토는 한자 붙여서 身のこと 라는데, 뭔 철학인진 잘 모르겠고. 그래서 그냥요. 그렇게 됐어요.
“이젠 없는 이름이라.”
주연은 더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재현도 더이상 없는 이름에 대하여 묻지 않았다. 이름에 관한 얘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둘은 주연이 건넨 봉지에서 미지근한 맥주 두 캔을 까 짧게 건배를 하곤 그로부턴 한참을 정적 속에 숨을 쉬었다. 새벽공기가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아늑한 밤의 요람을 벗어나 동이 트고 있었다.
파파라치 생각은 나지 않았다. 재현은 제 어깨에 속절없이 기댄 주연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주연. 다음엔 우리 어디서 볼까.”
“⋯다음?”
“이렇게 보고 말 거였어?”
졸음에 반쯤 잠긴 그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닌데⋯
“공연 끝나면 여기서 기다릴게요.”
“정말?”
진실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밥도 먹고⋯ 사케도 먹어요. 가라오케도 가요. 그리고.
“우리 집도 가요.”
“너희 집?”
“맛있는 거 해줄게요. 요리 할 줄 알아요? 난 좀 할 수 있는데. 김치볶음밥.”
주연의 말 빠르기가 미세하게 빨라졌다. 재현이 작게 웃으며 너 집에 김치는 있냐. 물으니 주연은 그제서야 정체 모를 검은 봉지만 나뒹구는 텅 빈 냉장고를 생각한다. 아. 하는 낮은 탄식 뒤에,
“김장⋯ 할까요?”
재현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아 뭔 김장이야. 얘 진짜 이상해. 왜, 이제 겨울이니까⋯ 되도 않는 사족에 재현은 주연의 허리를 잡고 크게 웃었다. 주연의 정갈한 뒷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졸려서 아무 말 하는 거지? 얼른 들어가. 주연은 그저 장단에 맞춰 머쓱하게 웃었다. 사실은 김장을 하는 방법도 몰랐으면서.
재현은 먼저 일어나 또 다시 이 새벽이 아무 의미 없었다는 듯 미련없이 등을 보인다. 한 걸음에 쫓아가 손목을 붙잡아 세웠다.
“⋯⋯왜?”
“또⋯”
또 봐요 형.
그는 말없이 웃으며, 그렇게 먼저 골목을 앞질렀다.
나는 오른쪽으로 향해야 했다. 그는 또다시 왼쪽으로 사라진다. 새벽의 칼바람에도 가슴이 충만해진 것은, 드디어 이곳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았다는 기쁨이다. 마음을 의지할 듬직한 형이 생긴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뿐이던가?
그가 돌아서니, 무언가 일종의 거부를 당한듯 마음 한 켠이 거칠게 트는 것 같았다. 아직은 해석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은 또다시 허무로 들어찬다.
주연은 재현의 발자국을 밟다 종국엔 다른 길로 돌아섰다. 배가 고팠다. 갑자기 극심한 허기가 들어찼다. 주연은 구부정한 허리로 다리근육을 움직였다. 삐거덕. 삐거덕. 기름칠 되지 않은 관절들이 느껴진다. 집으로 향하면서는 짧은 꿈을 꾼 것 같은 전희를 느꼈다.
작은 노랫말이 아제 막 동이 트는 시부야 거리를 울린다.
온몸의 세포들이 무감각해
극락왕생을 향한 아포토시스(細胞自殺)
아아 이제는 ‘히토리쟈나이’ 하고 싶어⋯
히토리쟈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