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Opposite


무한 우주에 순간의 빛일지라도

전시

 

 

 

 

 

새파란 하늘에 흰 직선이 그어졌다비행운인가생각이 스쳐 지나가다가 눈을 깜빡였다눈 깜짝 할 새 사라졌다.

먼지인가헛것인가이것도 아니면 유에포...인데

소리도 못 내고 혼자 턱만 쩍 벌렸다입만 뻐끔거렸다아무리 성적에 안 들어간다지만 모의고사였다어차피 수학이여서 다섯명 빼면 죄다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갱지에 그려진 동그라미들을 컴싸로 까맣게 채워넣었다종 땡 치자마자 등을 돌렸다.

 

"주연!"

"?"

"너 봤어?"

"?"

"아까 유에포 지나간 거 아니야?"

"아아."

 

흥분 최고조 상태로 말했는데 이주연 반응은 시큰둥했다.

 

"뭐야나 유에포 같은 거 봤다니까?"

"근데 오늘 급식 뭐지?"

"치킨이랑 볶음밥."

"역시 모의고사 치는 날이 잘 나오네."

 

이주연은 기지개를 한 번 피더니 모의고사 시험지를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황당함에 이주연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 질렀다.

 

"너 유에포 뭔지 몰라?”

"알지."

"근데?"

"유에포 맞겠지 그럼."

뭐 저런 관심 제로 얼굴이 다 있지나는 수학 시간 내내 기다렸는데이주연 놀라는 얼굴 보려고.

넌 이런 거에 관심없어?”

관심은 있지.”

찰나 떠오르는 며칠 전 정보시간에 몰래 한 이주연의 백문 백답.

이주연.”

?”

너 설마

하늘이 두 쪽 나도 믿는 것이 있다면?

네가 외계인이야?”

외계인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주연은...

"... 어떻게 알았어?"

이러네.

 

*

 

이주연이 외계인이라고야 뭔 개소리야ㅋㅋ 라고 하기에는 듣자마자 너무 설득력 있어서 당황스러웠다이주연이 자기 입으로 나는 서울 아산병원에서 태어났어 라고 하는 것보다 나는 안드로메다 성운의 dmqiqi2983호 별에서 태어났어 라고 하는 게 더 그럴싸했다.

 

이주연이 외계인 같은 이유

 

첫째이상한 소리를 자주 한다.

 

짝꿍은 운명 같은 거래이주연이 입학식 날 옆자리에서 한 말이다주연아우리 오늘 처음 만났는데 운명은 좀 과한 거 아닐까...? 말하려다가 참았다당연히 번호순이었다. 1학년 1 24번 이재현 25번 이주연.

이렇게 큰 우주에서 딱 우리 둘이 짝이 된 거잖아이주연은 방실방실 웃었지만 나는 얘네 집이 사이비인가 싶었다이주연은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 궁금하지도 않은 연설을 시작했다지구랑 달이랑 가깝다고 생각해 멀다고 생각해은근 엄청 엄청 떨어져있대거기 사이에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이 다 들어가고도 남는대생각보다 별들은 진짜 떨어져 있고 진짜 작은데 우주를 떠돌다가 충돌할 수 있다는 게 그러니까 어쩌다 그렇게 만나게 된다는 게 신기하지 않아?

... 목소리는 작은데 은근 말 개 많았다.

 

근데 자리를 두 번이나 바꿔도 우리는 짝꿍이었다세 번째쯤 됐을 때 담임선생님한테 항의도 좀 해봤는데 소용이 없었다어차피 너네 둘 키 차이도 종이 한 장 차이 아니니듣고 보니 맞아서 이주연이랑 세 달을 앉았다.

 

우린 어쩌다 등하교도 같이 했다얘기해보니 방향이 같아서 별 생각 없이 그렇게 됐다이주연은 유난히 꽃을 좋아했다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일종의 식물 채집이었던 것 같다이주연은 꽃을 보면 꼭 향기를 맡았다덕분에 봄철 목련부터 개나리에 진달래까지 별별 꽃을 다 보고 살았다꽃망울이 통통해지는 걸 보고 내일 꽃이 피겠다고 이주연은 자주 점쳤다이주연이 그렇게 말하면 자기 전에 한 번 생각이 났다내일 정말 꽃이 펴 있을까다음 날 그걸 확인해보면 정말 펴 있었다이주연이랑 민들레 홀씨도 불어봤다초등학교 1학년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떨어지는 벚꽃 잎 한 번 잡겠다고 같이 지각까지 했다쪽팔려서 왜 늦었냐는 말에 답도 못하다가 길을 잃었다고 변명했다씨알도 안 먹히고 혼났다.

 

이주연이랑 그렇게 같이 지내다 보니 이주연 없이는 심심했다이주연이 주번이어서 먼저 학교에 간 날엔 이주연 없이 등교를 하려니 은근 쓸쓸했다걔 말고는 아무도 주번이라고 특별히 일찍 오지도 않았고 대충 아침에 칠판이나 한 번 닦고 말았다이주연은 쓸데없이 모범적인 면이 있었다이어폰으로 노래를 크게 틀며 학교를 가도 재미없었다혼자 하는 등하교에서 제일 재밌는 점이 혼자 듣는 노래때문이었는데 이젠 이주연이 옆에서 쫑알대는 소리가 더 재밌었다아파트 단지를 막 나오려고 할 때 갑자기 이주연한테 전화가 왔다

왜 전화했어물으니 하는 말이

 

 

"재현아아파트 담벼락에 유채꽃 피었더라."

"..."

"되게 예뻐혹시 못 보고 나올까봐 전화했어."

 

이주연은 멋쩍게 웃었다그냥 그렇다고뚝 끊긴 전화를 잡고 있다가 삼 초 뒤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얘 진짜... 골때렸다.

 

둘째생긴 게 좀 외계인 같다. (비하 발언이 아니다... 사실적시다...)

 

2-1. 이주연은 팔이 진짜 겁나 길다이주연이 기지개를 켜는 거 옆자리에서 직관했다가 깜짝 놀랐다한 번 의식하니까 진짜 팔 긴 것밖에 안 보였다이주연을 볼 때마다 기시감이 들었다뭐가 닮았는데... 뭘 엄청 닮았는데... 기억이 잘 안 났다그러다가 이주연이랑 시험 끝난 날 만화카페 가서 만화책 읽다가 깨달았다이주연은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이 생겼다에반게리온에 나온 캐릭터를 닮았다그것도 신지도 레이도 아닌... 초호기를 닮았다.

 

2-2. 이주연에게는 더듬이 같은 게 있는 것 같다진짜 머리에 있는 건 아니고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같이 있으니까 눈에 가끔 보였다이주연은 수염을 깎아도 바로 난다아침에는 매끈했는데 야자 끝나고 집 가는 길에 보면... 수염이 보통 그렇게 빨리 자라나나는 아직도 그게 믿기지가 않아서 볼 때마다 자꾸 내 인중을 매만지게 된다예전엔 그게 고양이 수염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까 외계인 같다.

 

2-3. 진짜 이상할 만큼 손이 크다.

얜 진짜 손이 크다아니 근데 진짜 겁나 크다그냥 눈앞에서 얘 손을 보면 와... 크다소리가 절로 나온다손이 아니라 부채다파라솔이다덕분에 이주연은 학기 초에 손 크기 많이 재고 다녔다이주연 앞에서는 반 전체가 고사리손이 됐다.

이주연의 손을 체감했던 건 얼마 전이었다등교 준비를 하다가 뉴스를 들었다오늘 밤에는 유성우가 떨어진다고 했다어차피 그때는 야자 중이어서 관심 밖이었다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이주연이 밥 먹으면서 슬쩍 물었다.

"오늘 유성우 떨어진대."

"뉴스에서 봤어."

"우리 야자째고 보러 갈래?"

"?"

고작 유성우 보겠다고 야자를 째자고 할 줄은 몰랐다왜애... 싫어시무룩하게 묻는 얼굴에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야자가 시작하고 눈치 살살 보다가 반쯤 불이 꺼진 복도를 살금살금 빠져나왔다어디서 또 이런 농땡이 장소를 찾았는지 학교 뒤 언덕에 올랐다언덕 중턱에 있는 나무 정자에 앉았다근처 중학교 양아치들이 담배피러 자주 온다는 곳인데 오늘은 운 좋게 양아치들이 없었다정자에 철푸덕 앉아 옆자리를 팡팡 쳤다이주연도 신발을 벗고 올라왔다무릎을 세우고 앉아 콧노래를 불렀다절로 몸이 좌우로 작게 흔들렸다정자 저편에 책가방을 던져놓고 이주연이랑 한참을 떠들었다왜 축구보다 농구가 더 좋은지맛도 없는 아메리카노를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얘기하다 보니 자꾸 궁금한 게 떠올랐다이주연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도 끄덕였다.

"우리는 진짜 쫌 다른 거 같아."

"그런가..."

"싫단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고."

"그러니까 더 재밌지 않아?"

이주연은 작게 웃었다.

"아 근데 뜬금없는 얘긴데."

너 발목도 되게 얇다..., 떨어지기 전에 이주연이 바짝 붙었다교복 바지 밑단 아래로 흘깃 보이던 발목이 잡혔다짧은 발목 양말 때문에 발목이 훤히 보이고 있었다이주연은 내 발목을 한 손에 잡았다나쁜 짓도 아닌데 얼굴에 열이 올랐다누구에게 발목이 잡혀본 적은 처음이라까딱거리던 발이 멈췄다이주연의 손가락이 발목을 꽉 잡아내는 걸 쳐다보다가 짧은 숨이 나왔다눈을 굴려 하늘을 보니 별이 떨어지고 있었다예쁘다는 생각보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 별똥별 떨어져."

"그렇네?"

이주연은 손을 떼고 하늘을 쳐다봤다밤하늘에는 별똥별이 몇 개씩 떨어졌다언덕이라 유난히 더 많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쏟아져 내리는 별똥별 앞에서 이주연은 소원을 빌었다뭐가 그렇게 간절한지 궁금할 정도로 두 눈을 꼭 감은 채 손을 꽉 움켜잡고 소원을 빌었다.

별이 떨어진다고 말한 건 나였는데도 소원을 비는 걸 까먹었다다른 생각에 온 정신이 팔려 있었다이주연의 손이 지나간 발목이 화끈거렸다.

언덕에서 내려오면서 이주연은 방방 뛰었다오늘 야자 째길 너무 잘한 것 같아이주연의 등에 달랑달랑 달린 책가방도 가벼워 보였다한달음에 언덕을 내려가니 벌써 야자가 끝날 시간이었다야자 째길 잘했다고그런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며칠 뒤 과학 시간에는 팔씨름 얘기가 나왔다지렛대의 원리를 배우다가 나온 말이 손목이 얇으면 팔씨름을 잘 못한다 뭐라나반에서 젤 나대는 애가야 근데 우리 반에서 이재현이 팔씨름 젤 잘하지 않냐말했다그렇게 교탁에서 팔씨름 토너먼트가 열렸다. 1등 상품은 아이스크림선생님이 제일 수업하기 싫은 거였다과학 선생님이 좀 한량 스타일이긴 했다공부하기 싫은 애들은 눈치껏 시계를 보면서 시간 계산을 했다이걸로 20분은 뻐기겠구나그게 계산된 애들은 그렇게 신난 것도 아니면서 짝짝짝 손뼉 치며 나를 교탁에 세웠다강제로 나가서 팔씨름을 했다.

몇 명쯤 겨루니 손이 얼얼했다마지막으로 남은 게 이주연이었다반 애들이 웅성댔다야 그래도 이주연이 이기지 않겠냐손이 저렇게 큰데그거랑 그거랑은 별개야이재현 다 이기는 거 못 봤냐이번 건 좀 흥미로운지 다들 그런 소리를 했다다 들리거든이주연도 이런 건 싫은 눈치였다나도 이주연이랑은 싸우기가 싫었다.

억지로 손을 잡는데 느껴졌다이주연 손은 컸다커도 너무 컸다잡으니까 더 느껴졌다근데 이런 식으로 이주연이랑 손을 잡게 될 줄 몰랐다이주연이 손을 꽉 쥐면서 내 손을 감쌌다힘을 줘야 하는데 집중이 안 됐다나 지금 이주연이랑 손잡고 있네그 생각만 들었다손을 두어번 쥐다가 이주연을 흘끗 쳐다봤다이주연의 눈동자가 가까이 보였다너무 가까워민망해서 검지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정리했다눈을 잠깐 깜빡이다가 입술을 꾹꾹 눌렀다이게 뭐라고 입술까지 바짝 말라가는 것 같아 앞니로 입술을 두어번 깨물었다다시 고개를 들어 이주연을 봤다난 이주연의 그런 표정을 처음 봤다.

시작과 동시에 팔이 넘어갔다내가 이겼다.

교실은 떠들썩해졌다손목은 이재현이 더 얇은데 왜 이재현이 이겨요야 그거랑 그거랑 다른 거 아냐그건 걍 이론 아냐선생님은 교탁을 손바닥으로 쳤다조용하고 재현이는 나중에 매점 가서 아이스크림 하나 선생님 이름으로 올려 놔라그렇게 말하자마자 쉬는 시간 종이 쳤다점심시간이었다.

모두가 교실을 우르르 빠져나갔다우리도 그 인파에 휩쓸려 나갔다오늘 점심 뭐더라아침에 봤는데 까먹었다끝나고 매점 가서 아이스크림 먹자그래그냥 그런 얘기를 했다이주연이랑 말 없이 복도를 걸어가다가 문득 멈춰서서 말했다.

"..."

"?"

"너 왜 나 봐줬어?"

묻는다는 건 듣고 싶은 대답이 있다는 거구나말해놓고 깨달았다.

"나 너 봐준 거 아닌데."

"그럼 뭔데."

"그냥... 쳐다보다가."

뭐야이주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갔다나는 그때의 이주연과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넋 나간 얼굴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사물함을 열었는데 초콜릿이 있었다나는 빠르게 초콜릿에 붙어있는 쪽지를 확인했다번지수 잘못 찾은 초콜릿이었다.

25번 이주연 사물함에 넣을 걸 24번 이재현 사물함에 넣은 불쌍한 누나였다안녕나는 2학년 누구누구인데 저번에 급식실에서 너 보고 어쩌고저쩌고... 그 뒤는 못 읽었다짜증을 실어 가방에 꾸깃꾸깃 넣었으니까.

전 시간이 국어여서 난 너무 졸렸고 책상에 엎드려 자려 했다이주연은 아마 수학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앞 반 친구가 급하게 뛰어와서는 체육복을 구걸했다잠에 취해 가방을 가리키고 다시 엎드렸다구겨 넣은 체육복에서 초콜릿이 떨어졌다.

"너 이거 뭐냐너 초콜릿 받았냐?"

졸음이 확 가셨다.

","

"저번에 급식실에서 봤을 때... 뭐야 이거?"

"!"

데시벨 조정 잘못해서 괜히 온 교실의 관심이 쏠렸다목소리 깔고 정정하고 그냥 책상에 푹 엎드렸다나 개빡쳤음티 팍팍 내니까 빨리 관심은 꺼졌다이주연은 아니었다.

 

이주연의 말수가 눈에 띄게 적어졌다나도 딱히 유쾌한 기분은 아니어서 말을 걸지도 않았다그렇게 둘 다 이상할 만큼 조용한 채로 하루가 지났다집에 돌아가는 길에 이주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

"재현아너 걔랑 사귈 거야?"

"?"

"너한테 고백한 사람."

찔렸다.

"아니야..."

"..."

"...근데 이주연."

"?"

"넌 그런 편지 받으면 사귈 거야?"

이주연은 평소보다 빠르게 (여기서부터 빡쳤다대답했다.

"."

"?"

"?"

"누가 너한테 그런 거 보내면 사귈 거냐고 물었는데?"

"."

"?"

"?"

"왜 사겨?"

"왜 안돼?"

"너는 고등학생이 막 연애하고 그러고 다녀도 돼?"

나도 내가 뭔 소리를 하는지 파악을 못 했다.

"고등학생은 사랑도 못 해좋아하는 사람이 고백하면 사귀지."

이미 내 머리 속에선 그 2학년 누나랑 이주연이랑 매점에서 아이스크림 사 먹고 있었다한 대 얻어 맞은 사람처럼 걷다가 우뚝 섰다.

"너 대학 안 가무슨 사랑 타령이야."

"대학이랑 연애랑 무슨 상관이야."

"왜 상관없어."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이재현 너는 그럼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도 안 사귈 거야?"

"고등학교에서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생겨."

평소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생길 수도 있지."

"어쨌든 너도 대학 가서 만나우리 아직 학생이잖아."

상처받은 고양이 표정으로 한다는 말이

"그래서 이재현너는 좋아하는 사람 생겨도 안 사귈 거냐고."

"갑자기 우리가 왜 싸워?"

 

그러니까 셋째,

"내가 너 좋아하니까."

"?"

"난 너랑 사귀고 싶어."

"..."

"나는 너 좋아한다고진짜... 엄청 많이..."

이주연은 남잔데... 나를 진짜 좋아한다.

 

보통의 인간 남자라면 여자를 좋아하지 않나걔는 남잔데 나를 너무 좋아한다결국 이주연이랑 왜 사귀냐고나도 모르겠다. (나도 슬슬 이상해지는 것 같다이주연이 멋있냐고아니사귀면서 느꼈는데 이주연은 졸라 허접하다.

이주연은 진짜 같이 다니면 속 답답해서 죽는다같이 안 다녀본 사람은 모른다이주연이랑 사귀면서 아량이 진짜 넓어졌다이주연은 4교시에 잠자다가도 늦게 일어나고 늦게 급식실 가고 체육복도 느리게 갈아입고 야자 끝나고 가방도 느리게 싼다예전엔 급식도 1빠로 먹고 1빠로 나와서 축구 했는데 요샌 급식도 꼴찌로 먹는다저번에는 이주연이 늦게 일어나서 식당에 늦게 갔더니 돈까스가 다 떨어졌다수요일인데도 이주연이랑 계란국에 밥 말아 먹었다우리가 불쌍해 보였는지 옆자리에 본 적도 없는 애가 돈까스 몇 조각 줬다근데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 건 그 후춧가루랑 파 몇 쪼가리 들어간 계란국이 너무 맛있었다는 거다이주연이랑 둘이 급식 판에 얼굴 박고 왜 이렇게 맛 있지말하며 킥킥 거리면서 먹었다.

우리는 체육복도 꼴찌로 갈아입는다이주연을 재촉해봤는데 체육관 가보니까 이주연 바지를 거꾸로 입고 있었다그때 이후로는 재촉도 안 한다못하겠다.

이주연은 책가방도 느리게 싼다야자 끝나면 일분일초가 소중한데나는 그래도 착한 애인이라 그거 다 기다려준다어차피 집에 들고 가봤자 다음날 그대로 학교에 들고 오면서 뭐 그렇게 집에 가져갈 게 많은 지 가방이 돌덩이였다게다가 하나하나 집어 넣는 속도는 속이 터진다그래도 좋은 건 있었다다 나가고 불 꺼진 복도 걷고 있으면 우리밖에 없었다.

그 날은 정말 아무도 없었다우리 반 불을 끄고 나와서 걸어가는 데 인기척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계단을 내려가기 직전에 이주연이 날 부르더니 갑자기 얼굴을 잡았다볼에 뭐가 닿았다미쳤어소리를 빽 질렀는데 적반하장이었다자기가 입술 부벼놓고 "누가 보면 어떡해..." 이런다괘씸했다계단을 몇 개 내려가다가 억울함에 이주연을 돌려 세웠다가만히 있어 봐이주연은 도둑맞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얼굴에 영혼이 싹 빠진 얼굴이었다

이주연은 그러니까 졸라 허접한데... 졸라 귀엽다.

 

우린 며칠 전이 백일이었다뭘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작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일탈은 야자째고 노래방 가기였는데 오늘 야자 감독이 제일 무서운 쌤이어서 계획이 깡그리 취소됐다저녁 시간에 나가서 문방구에 들러 편지지나 서로 골랐다야자 시간에 편지 쓰기소박해도 너무 소박한 백 일이었다우리 진짜 수능 끝나면 기념일마다 놀러 다니자그렇게 말하면서 놀이공원 관람차 그려진 편지지나 골랐다.

 

오랜만에 쓰는 편지였다편지는 부모님 생신 제외하면 잘 쓰지도 않아서 쓰면서도 걱정을 했다내가 지금 쓰고 있는 게 맞는 걸까고민하면서 편지를 써 내려갔다안녕나 네 애인 재현이애인낯간지러워박박 지웠다나 네 남자친구 재현이헐 이상해안녕 나 재현이도입부만 두 번을 적었다내용을 고민하면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할 말은 많은데 꾸며서 적기가 어려웠다결국 그냥 내가 느낀 대로만 적었다적고 보니 너무 솔직해서 다 지워버릴까 고민했다괜히 편지 쓰자고 했나 싶었다.

이주연은 수학 문제 푸는 것 처럼 한참을 고민하면서 한 문장씩 적었다다 쓰니 심심해서 의자 뒤로 빼면서 이주연 걸 쓱 훔쳐봤다내 거보다 훨씬 길었다어쩌지난 이미 다 적어서 봉투에까지 넣어놨다.

"다 썼어."

이주연은 다 쓰는데 한 시간이나 걸렸다.

"근데 나 진짜 못 썼는데..."

편지를 교환하자마자 냉큼 봉투를 열어서 읽었다집 가서 읽으라는 이주연 말은 무시했다. '짝꿍은 운명 같은 거라고 했잖아.' ... 첫 문장 읽자마자 쪽팔렸다얘는 편지도 문학처럼 적었다이주연은 아직 봉투를 열고 있었다주연우리 집에 가서 읽자내 편지를 꺼내는 손을 저지했다이주연은 눈을 꿈뻑거렸다너도 내 꺼 읽었잖아그래 그건 맞지그치만... 이주연 편지에 비하면 내 껀 진짜 심각하게 유치했다한숨을 푹 쉬고 이주연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이주연다운 편지였다어떻게 이렇게 감성적이지한 줄 씩 읽어 내려갈 때마다 도대체 이런 편지는 어떻게 쓰는 건지 궁금해졌다가 내 편지는 정말 망했다는 걸 깨달았다.

마지막 줄까지 읽고 이주연을 돌아봤다부르려다가 말이 쏙 들어갔다마주친 이주연의 눈동자가 촉촉했다.

"네가 나를 이렇게 좋아해 주는 줄 몰랐어."

이주연은 내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한번 보면 됐지 왜 자꾸 봐... 민망해서 몸이 꼬였다편지를 뺏으려고 했는데 실패했다이주연은 내 말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 읽었다.

"재현이 넌 항상 진심만 말하니까..."

이주연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그러니까 나도 이주연이 좋다솔직히 너무 좋아서 어쩌나 싶다.

 

*

 

수학시간에 본 유에포는 금방 잊혀졌다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오늘은 사상 초유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어쩌면 인생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달력에 빨갛게 동그라미를 칠하면서 나는 모의고사가 아닌 다른 일정을 생각했다저번엔 뽀뽀했으니까오늘은 어쩌면... 어쩌면 ...

모의고사가 끝나고 이주연이랑 과학실로 갔다과학 선생님이 이주연에게 열쇠를 맡긴 탓에 우린 과학실에서 가끔 야자도 쨌다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었다이주연은 천체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이주연은 실망이 컸다말만 천체 동아리지 동아리 시간에 SF영화 틀어주는 개꿀동아리였다고등학교 동아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포스터에 있는 천체 망원경 사진을 보고 진짜 망원경 쓸 수 있는 줄 알고 들어갔다.

우리는 어바웃타임을 보기로 했다이주연이 그게 재밌다고 했는데나는 아직 안 봤다이주연이 먼저 모의고사 끝나고 과학실에서 보자고 했다너희 집에서 보면 되려나이주연은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말했다우리 집 가려면 꽤 멀어얼마나 걸리는데? 230만 광년... 저 뻔뻔함을 보니 진짜 외계인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그냥 과학실에서 보자끄덕끄덕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누구 집에 가기는 좀 그랬다갔다가 사고 칠 것 같았다그래도 문 닫힌 모든 곳들은 다 긴장이 됐다이주연은 아무 생각 없어 보였다나만 긴장한 건가어제는 자기 전에 갑자기 걱정됐다영화에 야한 장면 있는 거 아냐식겁해서 '어바웃타임 부모님이랑' '어바웃타임 이상한 장면' '어바웃타임 야한 장면차례대로 검색했다야한 장면 검색했는데 성인 인증 하라고 떴다왠지 억울했다인터넷에는 없다고 하던데 제발 이상한 장면이 없길 기도했다과학실에 들어가려니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저번에 앉았던 과학실 의자는 푹신했는데 오늘따라 딱딱하게 느껴졌다대체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될까노트북으로 영화를 찾았다노트북 팬 돌아가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느껴졌다밖에는 모의고사 날이라 일찍 마쳐 운동장이 소란스러웠다아무도 우리가 과학실에 있는 줄은 몰랐다여기서 무슨 짓을 해도 들킬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영화를 보면서도 자꾸 이주연을 쳐다보게 됐다침을 꼴깍 삼켰다아무 것도 안 했는데 긴장이 됐다어차피 이주연도 이런 생각 하는 거 아니야할 거면 내가 하는 게 낫지 않을까솔직히 좀 궁금하기도 했다대체 무슨 느낌이길래 사람들이 그렇게 환장하지?

이주연도 지금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나 혼자 오바떠는 거 아닌가읽히지도 않는 자막을 계속 읽었다.

 

이상하단 걸 느낀 점은 그러고 십 분 넘게 지나서였다정신을 차려보니 언젠가부터 자막이 안 나왔다알아 듣지도 못하는 영어만 줄줄 나오고 있었다이주연도 나도 영어는 젬병이었다이주연은 심지어 영어 듣기 3번 틀려서 선생님한테 혼났는데이거 껐다 켜야 하는 거 아니야말하려고 돌아봤다가 알았다화면을 본 건지 나를 보고 있던 건지 알 수 없던 이주연이눈을 흘끔대다가 정통으로 눈을 마주쳤다.

 

정적이 느껴졌다마치 우리에게 시간이 주어진 것 같았다지금 과학실 복도에 누가 지나가든 모를 거다뒤통수를 받히는 손이 올라왔다지금이 무슨 계절인지도 모르게 열이 올라서 공기가 뜨거웠다.

상상해본 적 없던 느낌이었다몸이 붕 뜨는 것 같았다숨은 어떻게 쉬지그걸 몰라서 숨이 찼다입술을 떼려고 등을 뒤로 뺐는데 이주연이 따라왔다떼내려고 했는데 이주연이 손으로 등을 받쳤다느끼기 전에 따라가기에도 벅찼다얼굴을 찡그리며 서툴게 따라갔다.

이건 달아오르는 게 아니었다끓어오르는 거 였다손을 어디에 둘지 모르겠어서 헤맸다내 한쪽 팔을 잡고 이주연이 자기 목에 걸었다근데 이거 너무 가깝지 않아이주연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입술이 물고 물리는 와중에 더 야한 상상을 했다오늘 당장 거사를 치르고 싶지는 않았다마음의 준비도 안 됐다목에 걸린 팔을 빼고 이주연의 한쪽 어깨를 잡았다교복 와이셔츠를 구겨 잡고 다른 쪽 손을 허우적댔다눈을 감고 있으니 보일리 없었다더듬거리다 어딘가를 잘못 짚었다.

"미안."

급하게 손을 떼는 와중에 나는 확신했다.

 

이주연은... 외계인이 맞다.

... 사람 몸에 저런 게 어떻게 들어가어떻게 저걸 몸에 넣어그게 된다고미친 거 아니야그건 섹스가 아니지극기 훈련이지아니... 근데 왜 당연히 내가 그쪽이지...

이주연도 얼굴이 벌게져서는 뒤로 돌아 옷을 정리했다나는 벌써 사색이었다.

 

영화 내용도 몰랐다어디서부터 안 본 건지도 모르겠다분명 아까는 메리랑 팀이랑 싸우다가 찐따같은 팀이 엉엉 울고 있었는데 갑자기 얘네도 길바닥에서 키스하고 있었다왜 하필 이딴 장면이야노트북도 바로 덮었다이주연은 아직도 열 오른 얼굴로 눈을 못 마주쳤다위로 쳐다봤다가 나 쳐다봤다가 난리였다하필이면 원인 제공한 건 내 쪽이라서 할 말도 없었다.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깜빡였다.

"재현아... 너 전화 와."

살았다누나였다눈물날만큼 고마웠다누나가 도움이 되기도 하는구나냉큼 받았다목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이재현 너 어디야?

"?"

-엄마가 찾는데오늘 모의고사라며.

"친구랑 놀다 갈 거야."

-아아그래.

"근데 엄마가 왜 찾는데?"

-오늘 대청소 하는데 네 방 너무 더럽다고 버릴 거 안 버릴 거 구분하래.

"... 저녁 먹기 전엔 갈게."

-그래.

 

전화를 끊자 이주연이 말을 걸었다.

"부모님이 찾으셔?"

"근데 지금 안 가도 돼."

아아... 이주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과학실에 남겨진 정적에 둘 다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민망함에 괜히 죄 없는 입술만 물어 뜯었다너무 조용해서 시계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마저 크게 들렸다다시 영화를 트려고 하다가,

 

아 잠깐만.

노트북 닫히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았다.

"나 지금 당장 집에 가야 해."

"왜 그래?"

몸에 피가 쫙 빠지는 느낌이 이런 걸까.

"책상 위에 네가 준 편지 놔두고 왔어..."

 

*

 

숨이 턱 끝까지 찼다노트북도 가방에 막 집어넣고 나왔다얼굴이 하얘져서 나가는 나를 이주연이 붙잡았다재현아 너 가방 열렸어가방을 앞으로 돌려서 급하게 지퍼를 올렸다이럴 때는 꼭 지퍼도 말을 안 듣는다이주연은 옆 에서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했다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야 되는데 그런걸 말해 줄 여유도 없었다말이라도 그렇게 해야 하는데 당장 눈앞에 초토화된 집만 상상됐다.

 

과학실에서 1층까지 한걸음에 달려서 내려갔다계단도 두 개씩 껑충껑충 내려갔다횡단보도를 막 가르며 달려갔다목에서 피 맛이 나는 것 같았다아무리 그래도 엄마가 그걸 다 읽을까이주연이 썼던 편지 내용을 돌이켜봤다어젯밤에도 자기 전에 읽었다한 줄 한 줄이 부정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매일 본 게 잘못이었나정말 닳을까 봐 아껴보겠다고 하루에 딱 한 번 씩만 읽었는데최소한 오늘 나오기 전에 서랍에라도 넣어 두고 나올걸그러다가 또 생각하게 됐다그럼 이주연이 적어준 편지는 어디에 둬야 되지편지를 놓아두기에 집은 너무 작았고 비밀은 너무 컸다그럼 이주연의 편지는 영원히 서랍 속에 있어야 되는 걸까매일 밤 닳을까봐 아껴보던 그 문장들이 전부.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청소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엄마가 나를 불렀는데도 대답할 겨를도 하나 없었다저 부름이 무슨 부름일지는 모르겠다내 방문을 열었다책상 위에 편지는 그대로였다가슴을 쓸어내렸다서랍을 열어 가장 안쪽에 편지를 집어 넣었다급하게 넣어버리다가 편지가 구겨졌다무거웠던 마음이 그제야 가벼워졌다침대에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엄마는 내 방문을 노크하더니 들어왔다오늘 늦게 온다며엄마의 말에 대답할 힘도 없어서 침을 꼴깍 삼키고 고개를 저었다내 방은 내가 치울게얘기하고 메고 있던 가방을 침대 아래에 내려놓았다괜히 일찍 왔나아까 전까지 죽기 살기로 뛰어놓고 안심이 되니 이런 생각이나 했다

 

"그래너 일찍 온 김에 화장실도 좀 청소해모의고사는 잘 봤어?"

또 성적 얘기였다.

"그냥 그렇지 뭐..."

"저녁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잘 모르겠는데..."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고."

의미없는 감탄사 뒤의 말이 보통 본론이다.

"근데 주연이가 누구니?"

"..."

"여자친구야?"

대꾸를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엄마는 씩 웃었다.

"다 컸네 다 컸어."

 

대답도 안 듣고 엄마는 웃으면서 문을 닫았다엄마가 방문을 닫자마자 심장 소리가 방을 채웠다심장이 목에서 뛰는 듯 아찔했다.

 

다시 서랍에서 편지를 꺼내 봤다주연편지 봉투 뒷면에 적힌 이름이 선명했다주연이라는 이름이 여자 같나그렇게 보니 그럴 만 했다변명하기도 힘들게 편지 봉투에 하트가 덕지덕지다이주연이 그 큰 손으로 붙여놓은 반짝이 하트 스티커에 빨간 펜으로 가득 그려놓은 하트들이 몇 개인지 셀 수도 없었다그려진 하트들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서랍 속에 편지를 넣으려다가 편지를 살펴봤다아까 막 집어 넣으며 편지가 반으로 접혀있었다아쉬움이 한숨처럼 나왔다종이에 남은 자국은 다릴 수가 없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받은 사랑의 형태였다가족 외에 나를 이렇게까지 사랑해주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는데너무 낯설어서 신기했다어떻게 남을 이렇게까지 좋아해줄 수 있어백날 사랑을 쏟아부어도 고작 세상에 나 한명 딱 나 하나만 아주 행복해질 뿐인데그런 말을 적어주려고 최선의 말을 고민하던 모습이 선명했다.

 

어바웃 타임을 다시 보려다가 껐다볼 맛이 안 났다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별그대를 다시 봤다인터스텔라도 봤다보다가 보다가 개구리 중사 케로로까지 갔다.

외계인을 다룬 것들은 왜 이렇게 다 슬퍼 보이지아무리 웃긴 척 해도 슬퍼 보였다다른 세계의 두 명이 만난다는 이야기는 행복하기가 힘들었다둘이 영원히 헤어지든지 한 명이 모두 포기하고 다른 세계로 넘어가든지그 사이에 피 철철 흘리는 건 예사고 총 맞고 차에 치이고 우주선 타고 폭삭 늙어버렸다외계인과 지구인의 사랑은 왜 이렇게 힘들까곱씹다가 깨달았다.

 

애초에 지구인이라는 말부터 이상하니까지구인은 외계인을 상정한다지구에 사는 사람은 지구를 생각하지 않는다땅의 눈높이에서는 지구가 보이지 않는다보이지 않으면 언급되지 않는다.

 그래서 남들이 고작 국적에 대해 떠들 때 나는 세계에 대해 떠들어야 한다그러니까 범주가 다른 사랑을 한다는 것.

모두에게 들키지 말아야 할 비밀이 있다는 기분을 처음 알았다당연한 게 그렇게 힘들어야만 할까비밀이 많은 사람들은 슬플 수 밖에 없었다숨길수록 억울했다난 그냥 태어난 건데너를 사랑하려고 태어났을 뿐인데.

주연아내가 지금 이해받고 싶은 것처럼 너도 그냥 이해받고 싶어답을 알 것 같아서 물을 수 없는 질문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

 

어바웃 타임 이어서 볼래점심 먹던 이주연이 먼저 물었다언제오늘 야자 때어제 보다가 말았잖아내가 끝까지 보길 꼭 원했나 보다나는 그냥 알겠다고 했다.

야자 시간에 과학실이 있는 지하층은 지나가는 사람 없이 참 조용했다과학실 불까지 끄니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았다어제 어디까지 봤었는지 가물가물했지만 대충 시간을 넘겨서 틀었다보다 보니까 어제 봤던 장면이었다그래도 그냥 내버려 뒀다이주연이 너무 집중하고 있었다그렇게 어제 봤던 내용을 십 분 넘게 다시 보고서야 새로운 장면이 나왔다.

 

결혼식이었다그게 일반적인 결혼식은 아니었다햇살이 쨍쨍해야 할 야외 결혼식에 비는 물폭탄처럼 쏟아지고 우산을 쓴 하객들이 피로연 장소까지 뛰어갔고 여자 주인공은 빨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보다보니 그런 물음이 문득 튀어나왔다.

 

"주연."

"?"

"너네 별이랑 여기랑 멀어?"

"멀지."

"너네 별 눈으로 볼 수 있어?"

"망원경으로 보면?"

"그럼 너네 별에서는 남자끼리도 결혼할 수 있어?"

"."

"결혼식도 열어?"

"우리 부모님 다 초대하면 되겠다."

 

이주연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다시 턱을 괴고 영화를 봤다결혼식은 끝나 있었다그렇게 엉망진창인 결혼식에도 다들 웃고 있었다난 모든 웃음을 뺏긴 사람처럼 말했다.

 

"나 부탁 있어."

"?"

"나 납치 좀 해줘."

"..."

"너네 별 가서 살래."

 

고작 사귄다고 눈치 안 보고 살고 싶어내신이고 모의고사고 다 때려치고 학교에서 손도 못 잡는 것도 그만하고 싶어사람 없는 곳 몰래몰래 찾아서 하는 일탈이 고작 손잡고 뽀뽀하는 거라는 게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아너네 별에 가면 대학도 없겠지우리가 사귄다고 뭐라고 할 사람도 없겠지그런 곳에 가서 그냥 너랑 좋아한다는 말 하고 살고 싶다아무데서나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말하고 싶어좋아한다고 보고 싶었다고 어젯 밤 꿈에 네가 나왔다고 너한테 주려고 자기 전에 편지도 썼다고 금요일에 집에 가기 싫었다고 주말 없이 매일 학교 오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고그냥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 눈치 좀 안 보고 하고 싶어.

 

뚝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을 손바닥으로 닦아냈다아 쪽팔려이주연이 깜짝 놀라서 영화를 껐다정적이 찾아왔다아무리 불편한 정적에도 얘기할 수 없는 마음들이었다.

무엇보다도 네가 사랑으로 써준 편지를 도대체 어디에 두어야 하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아무에게도 자랑 못할 구절들이 내 서랍 속에서 울고 있는 것 같아평생을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나는 너랑 진짜 오래 보고 싶어."

"..."

"나 너 진짜 좋아해..."

"..."

"우리가 너무 일찍 만난 걸까?"

"...."

"난 너랑 평생 만나고 싶은데."

"..."

"이렇게 결혼도 하고 싶은데."

 

손이 잡혀서 말이 끊겼다고개를 올려다봤다가 눈물이 쏙 들어갔다.

"울지마 재현아..."

이주연은 눈물길이 줄줄 나고 있었다사람이 저렇게 수도꼭지 열리듯 우는 건 처음 봤다깜짝 놀라서 이주연 목을 끌어안았다뚝 해 뚝왜 이렇게 울어 응이주연은 목이 콱 막혀 목을 몇 번이나 가다듬었다이주연의 어깨가 솟아오르다가 내리기를 반복했다이주연이 먼저 입을 뗐다.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그런 말 하지마..."

"네가 뭘 잘못했어아니 왜 네가 울어!"

"내가 어제 키스해서 그래...?"

이주연의 입을 급하게 틀어막았다손바닥 아래에서는 못 나온 이주연의 말들이 웅웅댔다.

"내가 다 잘못했어울지마 재현아진짜 미안해앞으로는 안 그럴게앞으로는 뽀뽀만 할게내가 진짜 열심히 참아볼게내가 너무 못했어나는 처음이었는데진짜 잘해보려고 했는데 만족이 안 됐으면 미안하라는 대로 해볼게아니면 내가 너한테... 서서... 그래근데 이건 진짜 어떻게 못하겠어미안... 그냥 너랑 손만 잡아도 그렇게 되는데... 이것도 너무 미안해아니면 내가 외계인이라고 뻥쳐서 그래아니면 부모님께 편지 진짜 들켰어?"

"그만 말해그냥 갑자기 걱정돼서 운 거야왜 울어!"

"혹시 우리 오늘 헤어져?"

"우리가 왜 헤어져?!"

깜짝 놀라서 의자에서 펄쩍 뛸 뻔 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오늘 아침부터 얼굴도 굳어서 인사도 안 해주고... 내가 웃기려고 노력했는데 매번 웃어주다가 이번엔 한 번도 안 웃어주고... 네가 우니까 나도 너무 놀라서..."

"아니야그런거 아니야근데 대체 언제 나를 웃기려고 했어잠시만."

"?"

"그니까... 너 외계인인 거 뻥이라고?"

이주연은 빨개진 눈망울에 물이 잔잔히 가득 찬 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

"설마."

"..."

"진짜 믿은 거 아니지?"

 

맥이 탁 풀렸다쪼그라들어 있던 온 몸의 근육에 힘이 빠졌다허탈한 웃음이 났다몇 번 코웃음을 치다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겨우 삼켰다눈앞의 이주연을 보니까 그렇게 화낼 수가 없었다이주연은 파라솔만한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참나."

교복 와이셔츠의 긴 팔을 빼서 소매로 이주연의 눈물을 닦았다이주연의 속눈썹 아래로 나오는 눈물이 뜨거웠다내가 살다 살다 사람을 울려보는 구나사람을 울리면 이런 기분이구나생각보다 어이없는 느낌이었다이주연은 아직도 놀란 건지 어깨가 가엾게 떨리고 있었다어깨를 잡고 손으로 쓸었다그래도 여전히 슬픈 얼굴이었다내가 더 가까이 필요하다는 거구나이주연을 끌어안아 등을 토닥였다너 또 그딴 장난 치면 진짜 가만 안 둬이주연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거렸다나는 뺏긴 웃음을 느리게 되찾으며 이주연의 등을 오래 쓸었다그래도 너무 먼 곳에서 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결혼해도 가족들은 보고 살아야지.

 

*

 

오늘도 꼴찌로 나갔다과학실 문을 잠그고 운동장으로 나왔다새까만 하늘에 별이 총총 박혀있었다벌써 밤이었다핸드폰을 확인하니 부모님이 차로 데리러 온다는 문자를 보냈다나 오늘 아빠가 데리러 온대이주연도 오늘은 어머니가 데리러 오신다고 했다신발로 운동장 모래를 끌며 걸어갔다이주연을 따라가니 어머니가 계셨다안녕하세요... 이주연 뒤에 숨어서 인사했다흘끔흘끔 쳐다봤다진짜 주연이랑 닮으셨다고 생각했다이주연은 손 흔들며 인사했다.

 

아빠가 정문에 차를 세워 놨다는 연락을 했다내일 봐인사하고는 돌아서 정문으로 갔다아빠 차에 올라타서는 가방을 벗어서 끌어안았다오늘 공부는 잘 했어으응... 대답하며 야자 좀 작작 째야지 생각했다다음 모의고사가 언제지남은 날짜를 계산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익숙한 형태였다저번에 봤던 그 흰색 직선이었다저거어두울 때 보니 정체가 보였다그건 유에포가 아니었다별똥별이었다꼬리가 엄청 기다란 별똥별에 불과했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 같다이주연이 진짜 외계인이면 좋겠다이주연 별에 가서 다른 외계인도 만나고 싶다몇 만 광년이 걸리더라도 가고 싶었다이렇게 가고 싶은 이유는 하나였다걔네 별에서는 평생을 기약할 수 있다잖아결혼도 할 수 있다잖아

하지만 걔는 절대 외계인이 아니다내가 그날 본 건 유에포도 아니었고속에 있는 것도 이주연도 이주연 부모님도 아니다

 

내가 이주연을 외계인이라고 믿어버린 이유는 어쩌면 단 하나였다이주연은 특별했으니까내 인생에 이렇게 특별했던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다를수록 각별해지고 자꾸 알아내고 싶은 최초의 사람이라는 게다른 별에서 온 건 아닐까 믿게 될 정도로 특별했던 존재.

 

여전히 농구보다는 축구가 더 재밌고 아메리카노보다는 스무디가 더 좋지만그래도 나와 다른 너의 세계가 궁금해너의 그 별난 세계가 여전히 궁금하고 더 알고 싶어.

이주연이 외계인이든 외계인이 아니든 우리는 아직 우리를 얘기할 수 없겠지만 서로가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만 생각하자그러니까 세상 어느 별도 겁나지 않는다는 걸나도 너와 같은 외계인이 되기로 결심한 것만큼이 마음에 최선을 다 할 거니까그렇게 되었으니까무한 우주에 순간의 빛일지라도.

 

 

 

 

 

제목 참조https://www.yna.co.kr/view/PYH20211021235300013?input=1196m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