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결혼 축하드려요.
평소답지 않게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식장이 너무 시끄러워서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걱정한 것도 잠시, 상대방의 당황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어? 어어. 예복을 입은 남자가 작게 몸을 떨었다.
“그, 오랜만이다. 올 줄은 몰랐는데.”
떨림을 모른척하며 주연이 선뜻 손을 내밀었다. 남자의 목에 달린 보타이가 한층 우스꽝스러웠다. 저런 꼴로 마주할 줄은 몰랐는데. 생각을 떨친 주연이 산뜻하게 웃어 보였다.
“와야죠, 저니까.”
기어코 신랑과 눈 맞춤까지 하고 나서야 주연은 만족스럽다는 듯 몸을 돌려 퇴장했다. 모델이라 그런지 수트핏이 신랑보다 뛰어났다. 멀찍이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재현이 작게 실소했다. 전남친 결혼식장에 와서 태연하게 악수까지 하는 애가 다 있네.
낯선 식장에서 아는 얼굴이라곤 이주연뿐이었는데 하는 짓이 초면이었다. 매사에 덤덤하게 굴어서 차분한 애인 줄 알았더니 의외네. 하긴 주연과 안 지는 그리 얼마 되지 않았으니, 이게 쟤의 진짜 얼굴일 수도 있겠다.
“그게 다야?”
“뭐가요.”
“X가 결혼한대서 깽판이라도 칠 줄 알았지.”
“신부는 뭔 죄예요.”
“뭐 그렇게 마음이 넓어? 부처님 납셨네.”
재현은 황당한 얼굴로 주연 뒤를 쫓았다. 홀 안에 앉을 자리가 없어 뒤에 서 있어야 했다. 하객도 많으면서 이렇게 작은 델 잡았냐. 여기가 예식장인지 시장통인지. 하객에게 치이다 못한 재현이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주연은 동조의 의미로 웃어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여느 하객처럼 자연스럽게. 식을 망치지도 않고, 그저 뒷자리에서 예식을 구경하는 것으로 주연은 제 몫을 다했다.
멀뚱히 주연의 옆얼굴을 쳐다보던 재현이 지루한지 하품을 꾹 참았다. 쓸데없이 주례가 너무 긴 탓이었다. 눈치 보던 재현이 슬쩍 주연의 팔꿈치를 잡아당겼다. 주연, 더 볼 거야? 아뇨. 볼 건 다 봤어요.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옛 애인을 쳐다본 주연이 씁쓸하게 대꾸했다. 이제 마지막이었다. 주연은 재현이 이끄는 대로 걸었다.
조금 일찍 나온 덕에 연회장은 제법 한산했다. 재현이 한껏 집중한 얼굴로 뷔페를 빠르게 돌았다. 코너를 한 바퀴 돌 때마다 음식이 수북이 쌓인 접시가 두 사람의 테이블에 놓였다. 따로 요청해야 제공하는 스테이크를 씹으며 재현이 감탄했다. 야 그래도 여기 밥은 맛있다. 센스가 아주 없는 건 아니네. 주연은 무언가 말하려다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전남친은 이런 데에 섬세한 타입이 아니니 아마 예비신부의 선택일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기 메뉴로만 꽉 찬 접시를 헤집으며 재현이 부지런히 턱을 움직였다. 돈 냈는데 밥이라도 잘 먹어야지. 그에 반해, 주연은 잔치국수를 먹는 둥 마는 둥했다. 몇 젓가락 집어먹다 내려놓자 재현이 혀를 끌끌 찼다. 고기 그릇을 주연 앞으로 밀어놓고 한다는 게 잔소리였다. 야 너 본전도 안 뽑고 자꾸 이런 식으로 굴 거야? 상황에 맞지 않는 계산적인 발언이라 엉뚱스러웠다. 그렇게 따지면 재현은 굳이 올 필요가 없는 건데.
“말 나온 김에 묻자. 너 축의금 얼마 했어.”
“비밀이에요. 그러는 형은요?”
“안 하려다가 그래도 난 처음 본 사람인데 예의가 좀 아닌 거 같아서. 밥값만 딱 했지.”
“그래서 얼마요.”
“3만 원?”
많이 넣은 것처럼 굴더니. 어이없다는 듯 주연이 뒷목을 어루만졌다. 여기 식대 인당 8만 원이랬는데. 언제 가져왔는지 재현은 짬뽕을 들이켜고 있었다. 와 이거 먹어봐. 불 맛 미쳤다. 자꾸 옆에서 저런 소리나 하고 있으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접시를 거의 다 비우고 나서야 배가 좀 찼는지, 재현은 음식에서 눈을 떼고 주연을 마주 보았다.
“야, 주연.”
“왜요.”
“X 결혼식에는 왜 오는 거야? 깽판 칠 것도 아니면서.”
끝나면 그게 다잖아. 난 이런 데 절대 안 올 거 같은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주연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이윽고 담담하게 뱉어낸 말은 절대 가볍지 않은 것들이었다.
“저는 이런 데 오면 꼭 눈을 보고 인사해요. 내가 왔다고, 그러니까 제대로 보라고. 그러면 상대방이 막 당황하거든요? 아까 봤죠. 진짜 웃긴데. 내가 혹시 지 게이인 거 소문이라도 낼까 봐, 아님 식 깽판 칠까 봐 무서워하는 거.”
“어 그거. 솔직히 좀 웃기더라고. 걘 뭐 애가 벌벌 떨던데. 네가 잡아먹기라도 한대?”
“그게 진짜 정떨어져요. 그걸 봐야 제대로 잊을 수 있을 것 같고.”
“되게 이상한 습관 있네. 상처받는 게 취미냐?”
저도 제가 이상한 거 알아요. 한두 번 온 게 아닌지 주연은 멀끔한 얼굴이었다. 웃으며 얘기했지만 눈에 작은 슬픔이 묻어 있었다. 우울한 분위기는 딱 질색인데. 그렇지만 재현은 섣불리 위로할 수 없었다. 저 마음이 어떨지 짐작조차 되지 않으니까.
“근데 너 이런 데 많이 와 봤어? 왜 이렇게 자연스러운데.”
“전남친 결혼식이요? 아, 지금까지 몇 명이더라. 한 서너 명은 돼요.”
“무슨 뽑기 운이 이래? 너 안목 심각하다. 그렇게 똥차만 만나는 것도 재주랬는데.”
“생긴 것만 보면 제가 나쁜 남자여야 맞는데. 세상이 너무 가혹해요.”
솔직히 반박할 수 없어서 재현은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이마를 까서 그런지 주연은 평소보다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위압감을 주는 얼굴로 한다는 게 전남친 결혼식장에서 청승 떠는 거라니. 뭐 얼마나 좋아했는데. 전혀 안 궁금했지만 장단을 맞춰줘야 할 것 같아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글쎄요. 제가 되게 예전부터 짝사랑했던 사람이라…사귄 지는 오래 안 됐는데.”
“그 사이에는?”
“다른 사람 만났죠. 저 연애 쉬어본 적 없어요.”
“얼씨구. 무슨 맛집 사장님처럼 말하네. 심지어 연중무휴세요?”
가만히 있어도 꼬이던데요. 주연이 다소 재수 없게 씩 웃었다. 그러다가도 입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근데…첫사랑이었어요.”
저 형이 처음이에요. 전 그때 학생이었고. 형 안 좋아했으면 제가 지금까지 남자 좋아했을 리도 없을 텐데. 작게 중얼거린 말을 용케 알아들은 재현이 욕을 짓씹었다. 신랑이 주연보다 네댓 살은 더 많았던 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럼 얘가 미성년자였다는 말인데.
“어린애를 따먹고 튀어?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형 잠깐만요. 제발 앉으세요.”
“야 가만있어 봐. 아무리 양심이 없어도 그렇지 미성년자를?”
“형 결과적으론 제가 따먹은 거예요…”
그리고 성인 돼서 만난 거라니까요. 주먹 쥔 재현의 손을 펴주며 주연이 작게 속삭였다. 갑자기 창피함이 몰려들었다. 아 그러냐. 재현이 금세 태도를 바꿔 수긍했다. 내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흥분했지. 두부같이 생긴 신랑을 떠올리다, 그가 주연보다도 작은 체구였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 옆에 선 이주연이라니. 좋게 쳐줘도 주연이 훨씬 연상처럼 보일 것이다. 잠깐 가늠해 봐도 웃긴 그림이라서 재현은 꺽꺽대며 웃었다. 야 아까 발언 철회할게.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치.
귀갓길, 한사코 괜찮다는 재현을 마다하고 주연은 재현의 집 앞까지 차를 몰았다.
“죄송해요. 아는 사람 하나도 없어서 재미없었죠.”
“아냐, 내가 가겠다고 한 건데 뭐.”
토요일의 오후가 저물고 있었다. 회사에 다녀본 적 없는 주연은 잘 몰랐지만, 직장인에게 휴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익히 들어왔다. 귀중한 시간을 반납하고 이런 데 따라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여러모로 재현에게 미안함이 앞섰다.
“정말 안 오셨어도 됐는데.”
“네 덕분에 좋은 구경 잘했어. 내가 살면서 본 것 중에 제일 웃긴 결혼식이었다니까. 아까 너도 봤어? 헬퍼 이모님이 계속 신랑 땀 닦아주는 거?”
“봤죠. 뭔 땀을 그렇게 흘리던지 한여름인 줄 알았잖아요.”
“웃음 참느라 혼났네. 그래도 같이 오니까 이런 것도 얘기하고 좋잖아. 웃긴 것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하긴 재현이 아니었다면 아닌 척해도 괜히 청승이나 떨고 왔을 테다. 예식장에 갔다 오는 길이면 늘 그랬듯이 우울하게 침대에 누워 있겠지. 그렇지만 오늘은 달랐다. 평소보다 더 많이 웃고, 미련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다 왔다. 주연의 인생에서 가장 길고 질긴 인연임에도 이번 이별은 그리 슬프지 않았다.
세팅한 머리가 불편했는지 재현이 제 앞머리를 사정없이 헝클어트렸다. 나 들어갈게. 너도 조심히 들어가.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팔랑팔랑 가벼웠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자니 볼이 씰룩였다. 제가 웃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주연은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하늘이 맑아서였는지, 아니면 기분이 좋아서였는지. 혹은 그 순간 재현이 귀여워 보여서인지 모르겠다. 마음속에 자리 잡은 작은 씨앗은 어느 순간 싹을 틔우고 무럭무럭 자라났다. 주연의 눈에 뻔히 보일 정도로 무성하게. 자각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주연은 눈에 은하수가 있는 것 같은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자고 일어나면 복슬복슬한 머리카락, 호탕한 웃음소리, 입술을 삐죽이던 버릇, 때론 질투 날 정도로 만인에게 다정한 성격까지. 한없이 평범하고 동시에 비이상적으로 특별한 그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그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던 상대와 사랑에 빠지고.
두 사람은 어느 평범한 연인이 되고.
또다시 남이 되고 만다.
그러나 시작과 끝은 붙어 있다는 말처럼, 그들의 사랑도 저물어가는 노을처럼 끝났다. 불이 붙은 것처럼 가속화된 사랑은 삼 년 남짓. 꼭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는 것처럼, 주연은 대개 이쯤에서 이별 통보를 받았다. 이번에는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나. 이마를 문지르며 주연이 다짐했다. 그는 이제 영원이라는 것을 믿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다시 현재.
재현은 전혀 생각지 못한 장소에서 주연을 만나게 된다.
-
옆집인데요.
쿵쿵. 조용히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재현이 귀를 갸웃했다. 아주 희미한 두드림이었다. 샤워기에서 물줄기가 시원스레 쏟아져 나왔다. 무시하던 찰나 연거푸 작은 소리가 이어졌다. 샤워기를 끄자 한층 분명하게 들렸다. 재빨리 수건으로 몸을 닦은 재현이 문밖으로 목소리를 키웠다. 누구신데요? 급하게 옷을 껴입느라 뒷말밖에 듣지 못했다.
“…옆집요.”
덩치 커다란 옆집 남자를 떠올렸다. 춥지도 않은지 맨날 반팔을 입고 다니는 남자. 돌처럼 단단한 근육이 마치 마동석을 떠올리게 했다. 옷을 입은 것처럼 양팔 가득 문신을 새겼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사람.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이것뿐이다. 이사 온 이후로 몇 년째 그와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는데 무슨 일이지. 그와 다툼의 여지가 있던가. 재현은 현관문까지 걷는 동안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층간 소음은 아닐 것이고. 담배라면 그가 더 많이 피우니 패스. 실내에서도 퍽하면 흡연하는 탓에, 오히려 재현 쪽에서 항의해도 할 말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택배가 올 일도 없었다.
금쪽같은 샤워시간을 방해받은 게 짜증 나서 눈을 반쯤 치켜뜬 채로 문을 열었다.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옆집이라고요?
어라, 분명 옆집 남자는 마동석처럼 근육 펌핑된 헬스 보이였는데. 별안간 눈앞에 나타난 긴 실루엣에 재현은 이게 꿈이 아닌지 눈을 몇 번 깜빡여야 했다.
“오랜만이에요.”
낯선 검은색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새로운 옆집 남자가 나긋하게 인사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오렌지빛 갈색 머리였으니, 흑발이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다. 황당함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차차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주연의 손에 들린 떡 접시.
“뭔데.”
“떡이요.”
“그니까 지금 이 상황 뭐냐고.”
“보면 몰라요? 옆집 이사 왔는데.”
주연이 친절하게 옆집을 가리켰다. 어쩐지 요즘 담배 냄새가 덜 난다 했더니. 헬스 보이가 금연이라도 한 건가 의아했으나 역시 아니었다. 어떻게 하필 얘가 옆집으로 이사 왔지?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 의문스러움에 눈을 가늘게 뜨자, 주연이 무죄를 주장하는 듯 옆집 문을 활짝 열었다. 그 앞에 가득 쌓인 주연의 짐을 보고 나니 의심이 반쯤 사그라졌다. 물건에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 형형색색 현란한 디자인의 옷은 모델이 아니고서야 절대 입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가 언제 이사 왔다고 반갑게 떡 돌리는 사이 됐니?”
“그래도 받아요. 일부러 떡집 가서 맞춘 건데.”
“나 시루떡 싫어해.”
“어쩔 수 없죠. 그게 클래식이잖아요.”
엉겁결에 일회용 접시를 받아보니 큼지막한 팥 덩이가 재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도 팥 시루떡 별로 안 좋아하면서. 촘촘하게 박힌 팥알을 바라보다 맥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얘가 언제부터 전통을 따지고, 규범을 지키고. 뭐 그런 애였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니 주연이 싱겁게 웃었다. 안 먹을 걸 쟤도 안다. 다 알면서 저러는 게 부아가 치밀었다.
“음식 남기면 벌 받아요.”
“나한테 벌주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니고?”
“이게 무슨 벌이에요. 건강에 좋은 건데.”
건강 챙기시라고요. 주연은 아무렇지 않게 재현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재현이 조금 굳었다.
그대로 음식물 쓰레기통에 처박아 두려고 했다. 식탁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앉아 저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 게 꼭 이주연 같아서. 그러나 귀에서 주연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재현은 저도 모르게 벽을 쳐다봤다. 초인종이 울린 이후로 자신도 모르게 줄곧 벽에 시선이 갔다. 그 옆에는 이제 이주연이 살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재현은 어쩐지 벽 너머의 이주연이 계속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고민하던 재현이 시루떡을 반으로 뚝 뗐다. 반절인데도 재현의 손바닥만 했다. 이웃사촌의 정이 얼마나 두터우신지, 참 크게도 썰어왔네. 재현은 차오르는 욕설을 억누르면서 천천히 팥 덩이를 씹었다. 물도 없이 한참을 씹고 있으니 목이 턱턱 막혔다. 뭉개지는 팥알들이 재현의 목구멍을 파고들었다. 그것들은 차곡차곡 쌓여 재현을 숨 막히게 했다.
컥컥. 결국 좁은 통로를 빠져나가지 못한 것들이 재현의 목에 걸렸다. 재현은 한참을 컥컥대다 화장실로 달려갔다. 힘겹게 변기를 붙잡고 토악질을 했다. 모조리 비워낸 것 같은데 어쩐지 불편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재현은 목을 가다듬다가, 이제는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뱃속 통증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파리한 안색으로 대충 옷을 걸쳐입고 현관문을 나섰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눈앞에 그림자가 졌다. 한참 택배 박스를 나르고 있던 주연이 눈을 홉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이 안 좋은데. 어디 아파요? 병원?”
“...약국.”
“체했어요?”
기력이 빠져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했다. 고개만 주억거리고 있으니 주연이 재현의 팔을 붙들고 제 집으로 이끌었다.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차마 뿌리치지도 못했다.
“집에 약 없어요?”
“알약밖에 없어. 목 아파서 못 삼켜.”
없어지지 않는 이물감에 억지로 토했더니 무언가에 긁힌 것처럼 목이 아팠다. 물약이라도 사다 줄까요? 상태가 퍽 안 좋아 보였는지 주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덧붙였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그 얼굴이, 아무렇지 않게 저를 걱정하고 있어서 재현은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너도 참 여전하구나.
몰려드는 옛 기억에 재현은 한층 피로해졌다. 아니. 손을 휘휘 내저은 재현이 한숨을 쉬었다. 나 잠깐만 있다 갈게. 힘이 없다. 제 집 안방처럼 이주연의 소파에 늘어져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있는데 뭔가 왔다갔다하는 발소리가 났다. 잠시 뒤 서늘한 손이 재현의 팔뚝을 살살 흔들었다.
“너 설마…아니지.”
“저 완전 실력잔데. 믿어도 된다니까요.”
“혹시 네 목표가 나 암살하는 거 아니고?”
금장 스테인리스 채혈기를 본 재현의 낯이 한층 희게 질렸다. 주연은 익숙한 손길로 란셋을 알코올 스왑으로 닦았다. 침 받침대에 란셋을 꽂아 고정하고 외경캡을 돌려 끼우는 솜씨가 제법 자연스러웠다. 인상을 찌푸리던 재현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암묵적인 의사 표현에 주연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재현의 등을 두드렸다. 커다란 손이 등을 두드리는 게 제법 시원했다. 재현의 반응을 살피던 주연이 슬그머니 다른 한 손으로 채혈기를 집었다. 등에서 어깨로, 팔로 이어지는 구간을 쓱쓱 문지르곤 엄지손가락을 꽉 쥐었다.
“살살해. 아프지 않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재현의 엄지손톱 아랫부분을 란셋으로 톡 찔렀다. 야 너 말하면서 찌르는 게 어딨어. 재현이 미약하게 투정을 부렸다. 검은 피가 방울처럼 맺혔다. 그렇다고 신호를 줄 순 없잖아요. 휴지로 손가락을 동여맨 주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받아쳤다. 이내 부엌 찬장을 한참 뒤지더니 어디선가 액체형 소화제를 꺼내 왔다.
“이거라도 마셔요. 산 지 얼마 안 된 거예요.”
“아까 손 땄잖아.”
“그건 민간요법이고요. 검증된 건 아니잖아요.”
“맛없어서 싫은데…”
아파서 그런지 자꾸 투정을 부리게 됐다. 옆에서 주연이 도끼눈을 뜨고 있어서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소화제를 꿀꺽 삼켰다. 알았어, 마시면 되잖아 그까짓 거. 빈 유리병을 눈앞에 내밀자 그제야 믿는다는 듯이 주연의 얼굴이 풀어졌다. 이전에 하도 꼼수를 많이 부려서 그런지 이 정도로 확인시켜줘야 믿곤 했다.
“뭐 의사라도 만나냐? 아님 한의사?”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요.”
“너 원래 이런 거 안 들고 다니잖아.”
“옛날에 만나본 적은 있죠.”
“이야…그거 다 내 덕인 거 알지.”
“형이 뭐요.”
“똥차 가니까 벤츠 왔잖아.”
“그럼 형이 똥차예요?”
주연은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입이 산 걸 보니 견딜 만하냐는 눈빛을 무시한 채 재현은 실없이 주절댔다.
“솔직히 부정하진 않을게.”
“뭐 그다지...잠깐 만났던 게 다예요.”
그리고 이거랑은 전혀 상관없는데. 동영이 형한테 받은 거예요. 맥빠진 얼굴로 재현이 수긍했다. 아 동영이. 걔라면 그러고도 남지. 출처가 재현의 지인이라 궁금증이 사라졌다. 누워있으니 좀 나아진 것 같아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주연이 더 있다가 가라며 뭘 내밀었다. 영문도 모르고 컵을 받았다. 손에 닿는 감촉이 따뜻했다.
이게 뭐냐고 눈짓하자 주연이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매실 액기스 받은 게 남아서요. 물에 섞었는데 아마 별로 뜨겁진 않을 거예요. 그래도 좀 식혀서 마셔요.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재현은 물끄러미 매실차만 쳐다보았다.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기가 힘들었다. 이를테면 주연의 눈을 본다든지. 그랬다가 금방 무너져 내릴까 봐, 재현은 잠자코 찻잔에 입술을 묻었다.
손 줘 봐요. 주연은 재현의 손바닥을 가져다가 꾹꾹 눌렀다. 여기가 협곡혈이라는 건데요. 지압해주면 급체에 효과가 좋대요. 엄지와 검지 사이에 움푹 들어간 곳을 부드럽게 누르는 손길은 낯설었지만 조근조근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그 익숙한 다정함에, 흡사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동요하는 게 들킬세라 불퉁한 목소리를 지어냈다.
“왜 이렇게 잘 알아. 급체 잘하는 애인이라도 생겼냐.”
“저 솔론데요.”
“웬일이래. 연애 쉬어본 적 없다는 연중무휴 사장님께서.”
“너무 안 쉬었더니 이젠 좀 쉴 때가 됐어요.”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재현은 자신이 원인인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먼저 이별을 고한 게 재현이었으니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주연은 재현의 손을 주무르기나 했다. 혼자 사는데 아프면 안 되니까 만발의 준비는 해 둬야죠. 제 몸에 무신경하던 주연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일 년이라는 시간이 꽤 길긴 했나 보다. 주연의 말은 꼭 쓸쓸한 방처럼 외로워 보였다. 마치 평생 혼자 살겠다는 것처럼.
분명 다디단 매실차가 목을 타고 넘어갔는데도 전혀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재현의 신경은 아까부터 온통 다른 데에 집중돼 있었다. 닫혔던 입술이 열리고, 잇새로 재현은 후회될 말을 꺼냈다.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솔직하게 대답해줘.”
“전 원래 거짓말 안 해요.”
“그래 그럼. 너 여기 왜 이사 왔어?”
“왜겠어요.”
“정말 나 때문이야?”
주연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순진무구한 얼굴에 숨이 턱 막혔다. 내가 딴 데 갔으면 어쩌려고 대뜸 이사를 와? 대책 없이 무모한 행동은 주연의 수많은 속성 중 하나였다. 쏘아붙이는 말에도 주연은 표정 한 번 바꾸지 않았다. 제 풀이 죽은 재현이 속삭였다.
“우리 이러면 안 돼.”
“왜요, 형 여자친구 때문에?”
내내 무표정을 고수하던 주연이 처음으로 눈을 치켜떴다. 재현은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어떻게 알았냐.”
“저는 다 알죠.”
아까 재현의 집에 들어갔을 때, 말하지 않았지만 눈치챌 수 있었다. 집안에 밴 은은한 여자 향수 냄새. 절대 재현이 제 돈 주고 사지 않았을 디퓨저, 선인장 따위를 보았을 때. 그리고 부엌 한편에 놓인 리본 달린 머리끈을 보곤 확신했다.
아니, 사실은 그전부터 알고 있었다. 재현이 모르는 시간 동안, 주연은 오래도록 건물 앞에 서서 그를 기다렸으니까. 그의 퇴근 시간에 맞춰 발걸음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마저도 먼발치에서 재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게 전부였지만.
처음에는 말을 걸 용기가 없어서였다. 재현에게 끝이란 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섣불리 다가설 수 없었다. 손끝을 코트 주머니 속에 찔러넣고 한참을 고민했다. 입김이 부는 겨울이 되도록 내내. 그러다가 못 견딘 주연이 걸음을 내디뎠을 때, 재현의 옆자리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저 혼자 보기에도 아까운 사람이니 남들 눈에 어떠했을지 안 봐도 뻔했다. 어느 날, 재현의 팔짱을 낀 누군가가 함께 건물을 들어가는 걸 보았다. 때마침 비가 오는 날이었다. 우산을 든 채로 주연은 망부석처럼 굳었다. 이런 것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전남친의 결혼식에 간 게 몇 번인데. 그 정도의 배짱이라면 이쯤은 가볍게 넘겨야 맞았다.
그러나 주연은 더없는 상실감을 맛봤다. 우산을 든 손에 힘이 빠져서, 내리는 비를 속수무책으로 맞았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재현이라는 특수성이 제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는 것을. 수백, 수천 번을 고민해봐도 결국 이 얼굴 하나가 보고 싶어서 무모한 짓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주연은 마음속으로 묵묵히 이 말을 삼켰다.
“그래도 아직 결혼은 안 했네요.”
“하게 될지 네가 어떻게 알아.”
“아직 이사 안 갔잖아요. 결혼하면 이런 데서 안 산다며.”
아주 오래전에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난 자리에서였나. 만약 결혼하면 신축 아파트에서 살고 싶다던 재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방 3개에 화장실 2개, 놀이터가 크게 있는 대단지에 살 거라고 했다. 안방, 드레스룸, 그리고 남은 방 하나는 아이 방으로 준다고 했던…그때 두 사람은 초면이었지만 그럼에도 재현이 참 가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재현은 제가 언제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한편으로는 서글펐다. 처음부터 자신과 어울릴 수 없는 미래였던 셈이다. 그 안에 제 자리는 있을 수가 없어서, 주연은 서서히 가라앉는 마음을 모른 척하기가 어려워졌다.
“아무것도 안 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요.”
재현이 왜 제게 이유를 물어봤는지 안다. 여타 주연의 X들처럼, 주연의 돌발 행동을 두려워하는 것일 테지. 헤어지고도 새 여친 사귀고 잘만 살았는데 갑자기 전남친이 나타난다면 누가 좋다고 하겠는가. 그 당황한 눈동자에 분명 정이 떨어지고도 남았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감정은 그대로였다.
“그럼 왜 왔는데.”
꾸미는 건 할 줄 몰라서, 그저 솔직하게 얘기했다.
“그냥. 보고 싶어서 왔어요.”
마음이 말랐는지 더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재현에게 했던 고백 중 가장 날것이고, 구차한데다 멋도 없지만 그 무엇보다 진심이었다. 주연에겐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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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처럼, 주연은 착실하게 재현의 출퇴근에 맞춰 움직였다. 간혹 운이 좋으면 퇴근한 재현과 같은 엘리베이터에 탈 수 있었다. 혹은 흡연구역에서 마주치거나 분리수거장에서 만나기도 했다. 그런 상황이 한두 번 지나고 나자 재현도 고개를 갸웃했다. 요즘 얼굴 자주 보네? 그러게요, 이렇게 만나는 것도 운명인데. 주연은 되려 살갑게 말을 붙여왔다. 한쪽의 철저한 노력으로 만들어진 우연임을 숨긴 채.
흡연구역에 들어오는 주연을 마주하자 재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를 조금 비켜주었다. 눈인사만 나눈 채 말없이 담배만 피웠다. 하고 싶은 말은 많으면서 서로 곁눈질만 하는 게 웃겼다. 주연을 흘깃 쳐다보던 재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꽁초를 비벼 끄면서 한 번, 뒤로 돌아서면서 또 한 번. 발걸음을 떼려다 결국 도로 되돌아오며 한 번.
“너 내가 여자친구랑 있으면 어떡하려고 그러냐.”
“왜요, 제가 형 게이라고 소문낼 것 같아요? 저 그 정도로 인성 나쁘진 않은데.”
“아니 그 말이 아니잖아.”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재현이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주연은 반문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가끔 재현은 주연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했다. 재현을 빤히 쳐다보며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여자친구를 걱정하는 건지, 혹은 나를 걱정하는 건지. 주연은 당연히 후자이길 바랐지만 그럴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형도 저 신경 쓰여서 안 데려왔잖아요.”
“꼭 그거 때문만은 아니거든?”
“알았어요, 그럼 주말에 데려와요. 저도 주말엔 집에 안 들어올 테니까.”
마음이 비뚤어서 그런지, 자신 때문에 집에 여친도 못 데려오고 있다는 불평처럼 들렸다. 주연은 더욱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재현은 굳이 대거리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할 말 끝났으면 가죠? 날카로운 음성에 재현이 굳게 닫힌 입술을 열었다.
“근데 너 요즘 해외 안 나가냐. 한국에 오래 있네.”
“요즘 국내 촬영이 트렌드여서요.”
아 그러냐. 재현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수긍했다. 해외 로케가 트렌드가 아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재현을 속이기는 쉬웠다. 혼자 있고 싶다는 티를 팍팍 내자 재현이 먼저 발을 돌렸다.
이대로 엘리베이터를 타면 재현과 마주할까 봐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며 시간을 벌었다. 일부러 천천히 담배꽁초를 끄고, 산책을 핑계로 어기적거리며 길거리를 걸었다. 밤하늘에 작게, 불빛이 반짝이며 지나갔다.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며 주연이 추억에 젖었다.
패션 모델은 해외 출장이 잦았다. 브랜드 룩북, 광고 영상, 남성 매거진 촬영을 위해 숱하게 해외를 돌아다녔고 출장지는 매번 바뀌곤 했다. 어느 날은 밀라노였다가, 또 다른 날은 파리였고, 그다음 달에는 영국이었다가 또 독일이기도 했다. 재현과 만나고 있을 때에도 주연은 밥 먹듯이 비행기에 오르내렸다.
남들은 향수병에 시달린다고 불평하기도 했지만 주연은 만족했다. 비행기를 타는 게 좋았고, 새로운 나라에서 다른 풍경을 보는 게 좋았으니까. 그는 자유를 동경했다. 자유로워지고 싶었고, 마음만 먹으면 어디로든 훨훨 날아가고 싶었다. 그 무렵, 주연은 하고 싶은 게 많은 청춘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러나 재현을 잃은 지금, 주연은 어쩐지 그 모든 것에 시들해졌다. 그토록 꿈꿨던 이상과 자유가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사막 한가운데에 추락한 것처럼 갈피를 잃고 우왕좌왕하던 주연의 발길이 닿은 건 바로 여기였다. 건물로 돌아온 주연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마치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처럼 엘리베이터가 서서히 고층으로 내달렸다. 층이 바뀔 때마다 주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도달해 주연을 토해냈다. 만신창이가 된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힘없이 소파에 널브러져 한 남자를 생각했다. 이제는 단순히 옆집 남자가 된 제 옛사랑에 대해.
재현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우리가 헤어진 진짜 이유가 뭔지. 재현은 매사에 솔직한 사람이었는데, 오롯이 이별할 때만 비겁하게 거짓말을 했다. 만약 재현이 뻔한 얘기를 했더라면 주연은 이토록 미련하게 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왜요?
네가 남자라서 싫어.
아이러니하게도 재현은 슬픈 얼굴로 중얼거렸다. 꼭 다른 이유가 있는 것처럼. 만약 네가 너무 질려서라든지, 하다못해 우린 너무 안 맞아서라든지. 흔한 말로 이별을 고했다면 주연은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전에도 늘 그래 왔으니까.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재현이 정말 이사라도 가버리면, 너 같은 건 보기 싫다고 영영 떠나버린다면 끝일 테니까. 이웃사촌임을 핑계로 재현을 볼 명분마저 빼앗아버리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것이 두려워 주연은 어느 순간부터 여권을 들지 못했다. 해외를 나가지 못하니 그 대신 평소엔 그리 선호하지 않던 지방 촬영을 도맡아 했다. 아주 간단한 촬영이어도 괜찮았다. 무언가를 요청해본 적 없던 에이전시에 어려운 부탁을 했다. 새벽에 나가는 건 상관없는데 퇴근은 무조건 6시에 해야 한다고. 당연히 코웃음 섞인 답변을 들었다. 너 무슨 패션 업계가 나인투식스도 아니고. 공무원이니, 6시에 칼퇴하게? 그래도 주연은 고집을 부렸다.
한동안 그의 시간에 맞춰 살 수밖에 없었다. 출근할 때마다 주연은 차창 밖으로 잿빛 새벽을 마주했다. 매일 똑같은 일상, 비좁고 어두운 도심, 지친 사람들의 얼굴. 그 모습이 싫어서 해외로 자주 뛰쳐나갔던 건데 이제는 아무렇지 않았다. 재현 하나만 볼 수 있다면 그것쯤은 견딜 만했다.
주연은 더 이상 자유를 동경하지 않게 됐다.
무엇보다 사랑을 꿈꾸게 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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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평온한 주말 아침, 재현은 난데없이 울린 초인종에 단잠에서 깨어났다. 연락 없이 들이닥친 연인의 모습에 난감한 얼굴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오빠 요즘엔 왜 집에 오라는 말을 안 해? 혜지의 투정에, 어질러진 집안을 가리키며 애써 말꼬리를 돌렸다. 집안 꼬라지가 이런데 어떻게 오라고 그래. 어린 연인은 여전히 샐쭉한 표정이었다. 뾰로퉁한 볼에 짧게 입술을 맞추고 웃어 보였다. 내가 뭐 또 잘못했어?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으실까아.
혜지는 여러 부분에서 주연과 정반대인 사람이었다. 주연에게 익숙해진 재현은 그 새로움이 좋았고, 혜지가 특별하다 여겼다. 주연에 대한 감정이 정리되기도 전에 새로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재현은 이 미묘한 양가감정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둘 중에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설렘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것인지, 과거의 사랑을 추억하고 싶은 것인지.
혜지와는 꽤 오랜만의 재회였다. 그전까지는 아무렇지 않게 혜지를 제 집에 들였으나, 주연이 이사 온 이후로는 초대하기가 영 꺼림칙했다. 이왕 들어온 걸 나가자고 할 수는 없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선을 맞췄다. 눈이 마주치자 익숙한 수순처럼 입술이 포개졌다. 재현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사이렌이 울렸다. 혜지를 끌어안고 안방으로 들어가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옷을 벗으면서. 계속해서 다음 단계로 이어갈수록, 더 큰 소리로.
삐그덕거리는 침대 위로 작은 비명이 새어나왔다. 대개 높은 옥타브였고 이따금 남자의 목소리가 섞이기도 했다. 재현은 되도록 숨죽이려 노력했다. 한바탕의 정사 끝에, 현관문이 닫힌 후에도 오래도록. 머리가 어지러워서 숨을 크게 쉬기가 어려웠다. 하얀 벽이 저를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재현은 벽 너머로 무슨 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자각했다. 익숙하고 낮은 음성. 열에 젖은 목소리가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반복적이고 선정적인 소음에 재현의 얼굴이 목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 중에 제 이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누가 머리 위에 얼음을 부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무 바로 들어갔다가 어떤 몰골을 마주하게 될지 몰라서 재현은 조금 망설였다. 혹여나 주연이 헐벗고 나오기라도 할까 봐. 현재까지의 기억으로 봤을 때, 이주연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안절부절하지 못하던 재현이 결국 약간의 텀을 두고 옆집 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이 없던 문은 뒤늦게 열렸다. 다행히 주연은 드로즈를 입은 채로 재현을 맞이했다. 어딘가 묘하게 상기된 얼굴이 좀전의 행위를 상기시켜 주는 듯했다.
“뭐 하자는 건데.”
“왜요, 제가 제 집에서 즐기는 것도 안 돼요? 누구처럼 애인 불러서 하는 것도 아닌데.”
주연이 삐딱한 얼굴로 재현을 응시했다. 옆집 안방과 제 집 벽면이 닿아있는 구조라 소음에 취약하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 잘 아는 사실이었다. 재현과 사귈 시절, 옆집 헬스보이 때문에 곤욕을 치른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는 넘치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밤마다 요란하게 자신을 위로하곤 했는데, 그 소리가 벽을 타고 재현의 집까지 넘어오는 게 문제였다. 물론 덕분에 불붙어서 주연과 좋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다만 헤어진 마당에 그때 기억을 상기하는 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주연은 되려 뻔뻔한 얼굴로 책임을 전가했다.
“저한테 고마워해야죠. 그래도 나름 형 생각해서 여자친구 간 다음에 한 건데.”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주연이.”
“뭐?”
“이거 아니고. 주연이요.”
물기 어린 얼굴로 주연이 속삭였다. 재현은 그 얼굴에 대고 뭐라 하기가 미안해져서 금세 꼬리를 내렸다.
“어 그래, 주연아. 형 생각해줘서 퍽이나 고맙다.”
“여기 방음 안 되는 거 형이 제일 잘 알면서. 저 들으라고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 내 방 놔두고 뭐 모텔이라도 가리?”
“여자친구 집에나 가든가.”
“그럴까?”
“아니다. 그냥 형 집으로 오라 그래요. 저 모르는 데서 행복하면 더 재수 없으니까.”
주연은 이상한 데에서 질투심을 내비쳤다. 어이가 없었는지, 재현이 황당한 얼굴로 미간을 문질렀다.
“야, 너 내 이름이나 부르지 마. 이게 어디서 건방지게 형 소리도 안 붙이고.”
“그건 왜요? 꼬우면 형도 혼자 할 때 제 이름 부르던가요.”
“미쳤나 봐 얘가.”
“그때 아니면 형 이름을 언제 불러봐요.”
이제는 부를 수도 없는 사인데.
우울함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였다. 언뜻 보이는 주연의 아픔을 마주할 때마다 재현은 그만 목이 막히고 말았다. 그동안의 슬픔, 그리움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와서.
“자꾸 이러면 안 돼.”
“왜요, 헤어졌으니까?”
“너도 알잖아.”
“그게 묻고 싶었어요. 저희 왜 헤어진 거예요?”
제가 남자라서, 그런 이유는 어차피 형한테 핑계인 거 알아요. 그런 걸로 끝낼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게 정말 문제였다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겠지.
“그냥…우리가 거기까지라서.”
“어디가 끝인지 형이 어떻게 알아요. 가보지도 않고.”
“알고 있었잖아. 그게 끝인 거.”
“아뇨.”
“아니, 너 알고 있었어. 일부러 모른척한 거지. 내 말이 틀려?”
재현의 말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다. 형만 그렇게 생각한 거라고. 반대의 말을 꺼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갈라진 입술이 바짝 말랐다. 혀로 입술을 축이며 생각을 갈무리했다. 분명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막상 기억을 꺼내보니 텅 빈 상자뿐이었다. 주연은 다시금 기억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다가 오래전에 파묻은 진심 하나를 발견했다.
우리는 지금 위태로운 걸까.
이별 직전에 주연이 써놓은 마음이었다. 그걸 보자마자 제가 외면했던 기억과 직면했다. 두 사람은 낙화하기 전처럼 버석하게 말라 있었다. 재현은 말이 없었고 주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대화 주제를 짜냈다. 예전 같았으면 시답지 않은 것까지 낄낄댔을 텐데, 재현은 묻는 말에도 잘 대답하지 않았다. 회사 일은 어때요? 물어도 피곤한 목소리만 돌아왔을 뿐이다. 그냥 늘 똑같지 뭐.
재현의 얘기는 다른 사람의 입을 타고, 한 바퀴를 돌아서야 주연에게 전달됐다. 소소한 이야깃거리는 그냥 넘길 수 있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재현이 아팠다는 얘기나 이직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는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힘이 쭉 빠졌다. 곁에 내가 있잖아. 왜 그런 걸 나한테 말하지 않아? 사랑하는 만큼 속상했다. 자신이 못 미더운 건가 싶어 무력감이 몰려들었다. 허탈함, 답답함, 우울함, 외로움…
모든 징조가 권태기를 가리키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것의 끝을 이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끝에 다다르고 싶지 않았던 주연은, 나쁜 기억을 통째로 묻어버렸다. 끝인 걸 누구보다 먼저 알고 있었으면서.
“그게 다예요? 제가 보고 싶지는 않았어요?”
“어.”
난 끝난 데에 미련 안 가져.
재현이 매몰차게 덧붙였다. 주연이 아는 모습 그대로.
“너야말로 그렇게 보고 싶었으면, 왜 이제 와서 그래?”
“형한테 끝이 뭔지 아니까. 그래서 다가갈 수가 없었어요. 형을 너무 잘 알아서. 근데 차라리 그냥 모를 걸 그랬어. 그랬으면 망설이지 않았겠죠.”
바보같이 아무것도 못 하고 형을 놓치고만 있잖아요.
“나는…형을 이해해 보려고 했어요. 형이 헤어지자고 한 거니까. 보고 싶어도 참고, 또 참고. 그렇게 계속 참았는데. 참아도 그게 안 돼요. 형을 잊는 게.”
“그래도 해야지, 주연아.”
심호흡한 재현이 어렵게 입을 뗐다. 최대한 무덤덤한 얼굴로 주연을 쳐다보려 애썼다. 날카로운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원망하길 바라며.
“모르겠어? 우리 이제 남이야. 너 연애 처음 해보는 거 아니잖아. 헤어지면 당연히 힘들지. 안 힘들 거라 생각했어?”
“왜 그렇게 나쁘게 얘기해요? 좋게 얘기해 줄 수도 있잖아요.”
“앞으로는 나약하게 굴지 마. 형은 너 투정 받아줄 만큼 한가한 사람 아니야.”
반응이 없어서 쳐다보니 주연의 시선은 낮게 깔려 있었다. 고개를 숙인 주연이 무어라 웅얼거렸다. 속삭이듯 말하느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뭐라고? 되묻자 주연이 대뜸 고개를 퍽 들어 올렸다.
“형은 뭐가 그렇게 쉬워요?”
억울하다는 눈빛이 오래도록 머물렀다. 재현이 사랑했던 그때 그 시절, 어리고 순수한 그 눈동자였다.
“우리 헤어진 지 일 년도 채 안 됐어요. 헤어졌다고 바로 기억까지 리셋되는 거 아니잖아요. 보고 싶게 만들어 놓고 그렇게 떠나 버리면, 그럼 남겨진 나는 어떡해요? 잊는 방법이라도 좀 알려주지.”
말하다가 감정이 확 올라왔는지 주연의 눈가가 벌겋게 익었다.
“저는 그냥 모든 게 다 어렵고, 이해가 안 되고. 잊는 건 더 안 되는데 저보고 뭘 더 어쩌라는 거예요. 헤어지자고만 하면 다예요? 나도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필요한데.”
“그래서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데. 너 이러는 거 다 받아주라고?”
“뭐 어떻게 해달라는 건 아니에요…”
재현이 차갑게 말할 때마다 주연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풀죽은 얼굴로 주연이 자꾸만 시선을 내렸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목소리가 점차 사그라졌다.
“형이 그때 그랬잖아요. 상처받는 게 취미냐고.”
예전에는 그저 농담으로 여겼는데, 지금 와서는 그게 사실 같기도 했다. 나는 왜 이런 사랑만 하는 걸까. 상처받고, 아픔에 힘겨워하면서도 좀처럼 끝낼 수가 없는 외사랑을.
“보고 싶어서 왔어요, 그뿐이에요. 알아서 잘 떨어져 나갈 테니까, 그냥…너무 뭐라고만 하지 말아주세요.”
다시 만나게 된다면, 재현에게 하고픈 말은 따로 있었다. 가장 먼저 그 말부터 할걸. 모든 순서가 엉키는 바람에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사실은 이 말을 제일 먼저 하고 싶었는데..
더는 기다릴 수가 없을 만큼, 너무 보고 싶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