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Opposite


마마보이는 관심이 필요해 上

최감

 어떤 우연은 필연처럼 다가온다.

 

[이성진 :

재현이가 잘 먹었다니 다행이다.. 입맛에 안 맞으면 어쩌나 했는데]

 

그러니까 거실 소파에 팔자 좋게 누워 축구 경기를 시청하던 재현이 허기를 느끼고 부엌으로 들어갔다가 식탁에 있는 엄마의 핸드폰 화면에 뜬 문자를 보게 된 건 분명 우연이었지만, 그건 우연에서 그칠 거리가 아니었다. 이어지는 문자가 무방비한 재현에게 들이닥친 어떠한 감정에 무게를 실었다.

 

[만날 일 생기기 전에 미리 점수 따둬야지 ㅋㅋ]

 

아무래도 엄마한테 남자가 생긴 것 같다.

 

 

 

마마보이는 관심이 필요해

 

 

 

어떻게 엄마가 연애를 할 수 있을까? 재현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직 삼십 대인 데다 이혼을 한 지도 오 년이 넘었다지만, 분명 엄마는 둘이서 살 만한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갈 때 이런 말을 남겼었다.

 

재현아, 엄마는 재현이만 있으면 돼. 엄마랑 재현이랑 둘이서 행복하게 잘 살자. 알았지?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재현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아빠라는 남자는 언제부턴가 거나한 상태로 귀가할 때마다 폭력적으로 굴었다. 방에 들어가 있으라는 엄마의 말에 방문을 꼭 닫고 귀만 쫑긋 세우고 있으면 위협적인 말투에 무언가가 부딪히고 깨지는 소리가 줄을 지었다. 벌벌 떨다 지쳐 잠들 때까지 심장이 쿵쾅쿵쾅 뛰게 했으면서 다음 날이 되면 아빠는 원래 아는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엄마는 여전히 불안한 얼굴을 한 재현을 꼭 끌어안으며 소란스럽게 굴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왜 아빠가 아닌 엄마가 사과를 할까. 그건 어린 재현이 느끼기에도 몹시 이상한 전개였다.

 

이혼은 재현이 두 사람의 싸움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면서 구체화됐다. 그날도 혼자 방에 있었지만 평소와 다르게 문을 조금 열어두고 있었고, 키가 한 뼘 정도 차이 나는 엄마와 마주 보고 선 아빠의 손이 높게 들리는 걸 보자마자 뛰쳐나가 앞을 막아섰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엄마를 때리지 말라고 했다. 아빠 같은 건 필요 없다고도 했다. 존재 가치를 논하는 말에 반응한 아빠가 아들에게도 손찌검을 하려는 순간에 이웃의 신고를 받고 온 경찰이 초인종을 눌렀다. 대학생 때 돈 쓰는 게 취미인 사업가와 연애를 시작해 임신을 하고 부랴부랴 결혼식까지 올리느라 졸업장을 받지 못한 엄마는 결국 친정의 도움을 받아 이혼하고 재현을 키우며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그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본 아들은 그래서 더욱더 엄마를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 것이다. 재현이 엄마의 핸드폰에 자리 잡은 낯선 이름 석 자, 남자가 분명한 그 이름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서운함이었다. 언제는 나만 있으면 된다더니! 물론 걱정도 됐다. 세상 모든 남자가 아빠 같지는 않겠지만 보고 겪은 게 있으니 비슷한 부류의 사람일까 봐 우려됐다. 아빠도 분명 처음에는 다정한 남자였으니까. 저도 남자지만 남자는 쉬이 믿으면 발등 찍히기 좋은 종족이었다.

 

엄마에게 남자가 생긴 걸 알아차린 이후로 재현에게는 특별한 임무가 생겼다. 이성진이라는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는 것. 얼마나 만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엄마가 연애 사실을 밝히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보건대 직접 물어봐도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할 게 뻔했다. 고로 몰래 핸드폰을 뒤져보는 수밖에. 만약 정말 괜찮은 남자라면, 엄마를 평생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남자라면 눈 꼭 감고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가슴은 좀 많이 찢어지겠지만. 남루처럼 너덜거리겠지만 말이다.

 

재현은 거실에서 이성진이 사준 것으로 추정되는 외국 과자를 먹으며 기회를 노렸다. 불과 며칠 전 해외에 다녀온 친구가 선물로 줬다는 말만 듣고 먹었을 때는 더 사달라고 조르고 싶을 정도로 맛있었는데 이제는 이 과자가 그 남자라는 생각으로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었다. 엄마의 핸드폰을 훔쳐볼 수 있는 시간은 씻을 때와 잘 때뿐. 잘 때 몰래 방에 들어갔다가 깨버리면 그것대로 낭패이니 지금처럼 엄마가 씻으러 가기만을 기다리는 게 나았고, 현재 엄마는 그런 아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방에서 잠옷을 챙겨 나오고 있었다.

 

화장실 문이 닫히자마자 재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핸드폰은 화장대에 있었다. 크게 울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검은 화면을 건드리면 대부분의 중년이 그러하듯 잠금 설정이 되어있지 않아 특별한 절차 없이도 문자 애플리케이션에 접속할 수 있었다. 대화 목록에 이성진이라는 이름은 스크롤을 내리지 않아도 보였다. 다행히 읽지 않은 문자가 없어 수월하게 그간의 대화 내용을 훔쳐볼 수 있었다.

 

[이성진 : 집에는 잘 들어갔어? 데려다준다니까]

[~ 방금 들어왔어]

[주연이 기다릴 거 뻔히 알면서 뭘 데려다줘ㅋㅋ 마음만 받을게]

[이성진 : ㅋㅋ알았어 담에 보자]

[어디야?]

[이성진 : 거의 다 왔어~]

[이성진 : 오늘 시간 괜찮으면 볼래? 전화 돼?]

[재현이 과자 잘 먹더라]

[엄청 맛있나봐]

[벌써 반은 빈 거 같은데]

[이성진 : 재현이가 잘 먹었다니 다행이다.. 입맛에 안 맞으면 어쩌나 했는데]

[만날 일 생기기 전에 미리 점수 따둬야지 ㅋㅋ]

[그래도 아직 멀었음 ]

[나도 주연이한테서 점수 미리 따놓을까]

[이성진 : 걔는 만나기만 하면 바로 점수 딸 수 있을걸?]

 

문자는 대략 3개월 전부터 시작됐다. 이전의 기록을 삭제한 게 아니라면 그때 서로를 알게 되고 최근에 연애를 시작한 듯했다. 그리고 이성진에게는 주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딸이 있었다. 재현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상대의 자식 이름을 서슴없이 언급한다는 건 가볍게 만나는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나니 여간 심란한 게 아니었다. 좋은 사람이라면 인정해주겠다는 다짐이 급속도로 쪼그라들었다.

 

코를 한 번 훌쩍인 재현이 이성진의 프로필 사진을 눌렀다. 이성진으로 추정되는 중년 남성과 교복을 입은 잘생긴 남자애가 웃으며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남자애는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데 이성진과 많이 닮았다. 주연이는 딸이 아니라 아들인 모양이다. 이성진 아들이니까 이주연.

 

재현은 이성진의 프로필 사진을 캡쳐해 제 핸드폰으로 전송하고 기록을 지우려다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아들이 입은 교복이 낯이 익었다. 제가 다니는 고등학교 옆에 붙은 중학교 교복이었다. 뭐야, 형인 줄 알았는데 동생이잖아. 재현은 주연의 얼굴을 확대해 한참 들여다보았다. 어려 보이는 얼굴 때문에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도 중학생 대접을 받는 저와 다르게 주연은 교복만 벗으면 어른 대접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

 

성격도 별로 안 좋을 거 같은데. 근거 없는 뒷담화 후에는 문자 탐색을 관두고 사진 찾기에 나섰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이성진의 독사진은 물론이거니와 같이 찍은 사진이 단 한 장도 나오지 않았다. 사진 찍는 걸 안 좋아하는 건지 결정적인 증거를 안 남기려는 건지 뭔지. 그래도 건진 게 없지는 않았다. 재현은 엄마의 핸드폰을 원위치에 두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드러누워 다시 다정한 부자의 사진을 보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는 말을 곱씹었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 이주연을 만나야 했다.

 

 

 

 

재현이 올해 입학한 고등학교 옆에는 이름이 같은 중학교가 있었다. 너른 공터에 학교 두 개가 엇비슷한 시기에 들어선 건데, 운동장을 높은 울타리로 갈라둔 형태라서 의도가 없어도 옆 학교의 동태를 살펴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재현에게 마냥 희소식으로 다가온 건 아니었다.

 

일단 재현은 그 중학교 출신이 아니었다. 그냥 이 동네 사람이 아니었다. 뺑뺑이의 피해자라고나 할까. 도보로는 등교하기 힘든 학교로 배정되는 바람에 중학교에는 아는 동생이 없었다. 다시 말해 주연을 불러 내줄 수 있는 지인이 없다는 소리다. 물론 울타리 근처를 하염없이 서성거리다 운동장에 있는 주연을 우연히 발견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말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이라면 상대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할 수 있으니 쉽게 가려거든 중간 다리 역할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사실 재현에게는 지인의 지인이라는 키(key)가 있었다. 그게 영 내키지 않아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당장 내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게 혼인신고서 작성이니 빨리 움직여야 했다. 결국 재현은 1교시가 끝나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며 옆 반 교실 뒷문을 열었다. 그리고 맨 뒷자리에서 시시덕거리는 체육복 무리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곳에 절대로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 않았던 지인이 있었다.

 

, 송정원.”

그러니까 내가 그때 씨발…… ? 재현아. 나 보러 온 거야? 야야, 비켜봐.”

 

상스러운 욕설을 남발하다 재현을 발견한 송정원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단숨에 다가왔다. 재현은 그대로 송정원의 팔을 끌고 사람 없는 복도 끄트머리로 데려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제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지만 못 들은 척했다. 어차피 영양가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말들이었다.

 

보고 싶다고 문자 하지 그랬어. 물론 서프라이즈도 좋긴 한데.”

개소리 좀 적당히 하고.”

 

송정원에게서는 짙은 담배 냄새가 났다. 재현은 대놓고 코 앞으로 손부채질을 했다. 송정원이 그제야 멋쩍게 웃으며 옷을 펄럭거린다. 탈취제라도 뿌리고 나올 걸 그랬다고 말하는 저 입을 재현은 잔뜩 꼬집다 못해 비틀어주고 싶었다.

 

송정원은 한마디로 날라리였다. 지각과 결석은 예삿일이고 흡연에 음주가무를 즐기며 오토바이도 탔다. 폭력까지 행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교내에서 큰일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재현이 질색하는 부류인 건 맞았다. 그래도 같은 반이 아니니까 무시한다면 무시할 수도 있었는데, 문제는 송정원의 눈에 들었다는 데 있었다. 큰 덩치와 험악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작고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는 송정원은 고등학교 입학식 날 전 입학생이 모인 강당에서 홀로 반짝거리는 재현을 보고 마음이 동했다. 그날부터 친하게 지내자고 들이댔는데 재현도 보기와 다르게 한 성격 해서 2학기까지도 고전 중이었다.

 

재현은 등하굣길이나 복도를 지날 때 몰래 다가온 송정원이 어깨동무를 하는 게 그렇게나 싫었다. 수시로 제 반에 들어와 자리를 멋대로 빼앗아놓고 무릎에 앉으라고 할 때는 가운뎃손가락을 내미는 게 아니라 뺨을 세게 갈겨주고 싶었다. 사이즈가 맞지도 않는 체육복을 빌려달라고 떼쓸 때는 또 어떻고. 당장 떠오르는 게 이 정도일 뿐이지, 하여튼 간에 송정원은 생각만 해도 질리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꾹 참아야 했다.

 

네 동생 바로 옆 중학교 다니지.”

내 동생? 나 말고 내 동생한테 볼 일 있어? ?”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연재중 3학년 맞잖아.”

 

이상진 아들 이주연은 3학년일 테고 송정원 동생도 3학년이니까. 언젠가 송정원이 동생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그때 그 흘려들은 정보가 기적적으로 떠올라 시의적절하게 쓰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맞긴 하지. 맞긴 한데 왜……

네 동생 연락처 좀 알려줘.”

 

재현의 당당한 요구에 송정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 미간을 좁히며 다소 건조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재현은 180cm를 가뿐히 넘는 송정원을 시야에 담느라 높게 뜨인 두 눈에 힘을 가득 실었다. 여기서 밀리면 이주연에 관한 정보를 얻기가 어려워졌다. 쉬운 길을 놔두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싫은데?”

 

침묵 끝에 송정원이 삐딱하게 대꾸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전개다. 재현은 곧장 준비해둔 여러 말 중 하나를 혀에 올렸다. 다소 거만해 보이는 자세도 유지했다.

 

그럼 네가 동생한테 연락 좀 해줘. 이주연이라는 남자애 찾는다고.”

이주연? 걔가 뭔데 찾아?”

거기까진 알 거 없고, 빨리 연락 좀 해봐. 나 급해. 얼른.”

 

재현이 빌려준 돈을 수납하러 온 사람처럼 재촉했다. 송정원은 그런 재현을 빤히 내려다보며 한참 말이 없다가 갈라진 턱을 매만지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가만히 있어 봐.”

, , .”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냐.”

 

그럼 그렇지. 이것도 예상 시나리오에 있었다. 재현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원하는 게 뭔데. 참고로 술이나 담배 절대 안 할 거고 네 오토바이도 절대 안 탈 거야. 네 친구들이랑도 안 놀아.”

그럼 이번 주말에 우리 집 놀러 와.”

내 몸에 손대는 것도 안 돼. 그러면 네 손 잘라버릴 거야. 그냥 하는 말 아닌 거 알지?”

 

재현의 으름장에는 오랫동안 쌓아온 다짐이 녹아 있었다. 모이기만 하면 서열을 따지는 게 자연스러운 남자들 사이에서 앳된 얼굴과 작은 키는 누구나 한 번쯤 무시하고 싶어 하는 요소였다. 성격마저 순진하고 소심하다면 그만큼 부려먹기 좋은 존재가 또 없었다. 다행히 날 때부터 당차고 굳세었던 재현은 어떤 상황에서든 살아남기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송정원 같은 놈들 앞에선 무조건 세게 나가야 했다. 만에 하나 한 대 맞아도 바로 바닥에 드러누워 눈 꼭 감을 생각으로. 뻐팅기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물론 송정원은 재현의 위협을 강아지의 앙칼진 짖음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래도 애정을 담아 손까지 떨어가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재현은 눈치채지 못할 사실이었다.

 

, 이재현이랑 친해지기 어렵다 어려워. 알겠으니까 우리 집은 오는 거다? 동생한테는 지금 바로 연락할게. 됐지?”

이 자리에서 다 해결하고 들어가. 빨리 문자 해.”

문자는 뭔 문자야. 전화하면 받겠지.”

수업 중인 거 아니야?”

빨리 연락해달라며?”

 

그거야 그렇긴 한데. 재현이 목을 긁적이는 사이 핸드폰을 꺼내든 송정원이 화면을 몇 번 건드리고 귀에 붙였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쉬는 시간은 일치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지만, 수업 시간이라고 해서 모든 학생이 전화를 받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걸 송정원의 동생이 증명했다.

 

, 너희 학교에 이주연이라고 있냐? 아니, 남자애라던데. 어어.”

 

송정원이 재현이 알려준 정보를 동생에게 넘겼다. 재현은 귀를 쫑긋 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송정원이 핸드폰을 귀에서 살짝 떼어내더니 재현과 눈을 맞추었다.

 

“2학기 시작할 때 자기 반으로 전학 온 애 이름이 이주연이라는데?”

 

제대로 걸렸다. 재현이 쾌재를 부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잘생겼냐고 물어봐. 고등학생 같냐고도.”

잘생…… 좀 생겼냐는데? 걔 노안이야? , 그럼 걔 맞는가 보다.”

걔 번호 좀 달라고 해봐.”

데리고 나와봐, 점심시간에.”

.”

 

뭐라는 거야. 재현은 주먹에 준 힘을 풀며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연락처를 알아내 단둘이 은밀하게 만나려던 계획이 말 한마디로 완벽하게 틀어지고 있었다.

 

내 친구가 걔한테 볼일이 있다길래. 일단 밥 먹고 운동장으로 데리고 나와. 교문 나갈 것도 없이 울타리 앞에서 보면 되지 뭐. 나도 같이 나가려고. 어어, 나중에 연락해라.”

 

재현이 차가운 시선을 보내거나 말거나 태연하게 대화를 매듭지은 송정원이 뿌듯한 얼굴로 통화가 종료된 화면을 들이밀었다.

 

됐지?”

번호를 달라니까 왜 굳이 일을 키워?”

궁금하잖아, 걔가 대체 얼마나 잘생겼길래 네가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하는지. 나도 얼굴 좀 보려고.”

잘생겨서 만나려는 게 아니라…… 됐다, .”

오늘 밥 같이 먹고 나가자. 정현이가 연락하겠대.”

 

이걸 고마워해야 해, 말아야 해. 분명 덕분에 일이 쉽게 풀린 건 맞는데 다시 뒤엉킨 느낌이 들었다. 재현은 송정원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대충 머리를 끄덕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주연은 전학 첫날부터 반 친구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다 자란 놈보단 덜 자란 놈이 압도적으로 많은 공간에서 주연의 성숙한 외양은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자칫하면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지만 겉보기와 다르게 말랑한 말투와 유순한 성격이 적군을 물리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뿐일까, 외향적이기까지 해서 어울리기도 금방 어울렸다. 다시 말해 옆 고등학교에 친형이 있다는 송정현과도 그럭저럭 친밀한 관계라는 뜻이었다.

 

주연은 송정현과 함께 점심을 먹고 시끌벅적한 운동장으로 나왔다. 송정현 친형의 친구가 왜 저를 찾는지는 송정현조차 몰라 알 수 없지만, 한 번 만나주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저기 있다.”

 

털레털레 걷는 주연 옆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송정현이 어딘가를 손가락질했다. 주연은 곧장 그리로 눈을 옮겼다. 울타리 건너편에 서 있는 고등학생 두 명이 보였다. 거리가 멀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한 명은 저보다 키가 작아 보였고 다른 한 명은 저보다 키가 커 보였다. 키 큰 남자가 머리 위로 손을 흔들었다. 송정현이 그 손짓을 따라 하는 걸 보니 그 남자가 친형이었다. 주연의 시선이 자연히 키 작은 남자에게 꽂혔다. 그리고 그건 주연을 발견한 재현도 마찬가지였다.

 

좀 생기긴 했네.”

 

송정원이 제 동생 옆에 있는 주연을 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재현은 대꾸하는 대신 침을 꼴깍 삼켰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사진에서 본 얼굴이 선명해졌다. 이성진의 아들 이주연.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데도 몰랐다는 게 거짓말 같았다. 사진이 실물을 못 담아냈다.

 

안녕하세요.”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가까이 다가온 송정현이 재현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재현은 손을 흔들어 화답하고 팔꿈치로 송정원의 옆구리를 툭 쳤다.

 

너 이제 가.”

가라고?”

빨리 가. 형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왜 나한테는 고맙다고 안 해? 나 때문에 만난 건데?”

그래서 너네 집 가기로 했잖아. 아니면 그냥 고맙다고 하고 안 갈래.”

치사하게 진짜…… , 가달란다.”

 

송정원이 씩씩거리며 송정현을 데리고 멀어졌다. 표정을 읽거나 대화를 조금도 엿들을 수 없는 거리가 된 후에야 재현은 경계를 늦추고 주연에게로 눈을 굴렸다. 그전부터 재현을 얼굴을 빤히 보고 있던 주연이 갑작스레 맞닿은 시선에 몸을 흠칫 떨었다. 저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것도 어려 보이는 건데 눈이 꼭 사슴처럼 예쁘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일단 내 이름은 이거고, 혹시 나 누군지 알아?”

 

교복에 달린 명함을 가리킨 재현이 바로 떠보기 작업에 돌입했다. 만약 저처럼 아빠의 핸드폰을 훔쳐본 적이 있다면 제 이름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게 티도 날 테고. 하지만 주연은 반만 뜬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댈 뿐이었다. 왜 부른 건지도 모르는데 누군지 아냐니. 이름 석 자도 방금 알았다. 이재현.

 

아뇨. 모르겠어요.”

몰라?”

.”

 

주연은 결백했고 재현은 곤란했다. 적어도 주연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럼 연애하는 것도 모르는 건가. 저도 우연히 알았으니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착하자, 침착해. 재현은 목을 가다듬고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네 아빠 성함 이성진 맞지?”

어떻게 아세요?”

한부모가족이라서 아빠랑 너랑 둘이 살고.”

…….”

사이도 되게 좋잖아. 사진도 같이 찍고 그걸로 카톡 프로필도 하고.”

 

주연은 막힘없이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아빠의 문자 애플리케이션 프로필 사진을 떠올렸다. 재현의 말대로였다. 초등학교 졸업식 후 엄마와 이혼한 아빠는 늘 저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란 듯이 프로필에 올렸다. 재현이 그 사진을 보려거든 핸드폰 번호를 알아야 하는데, 국내외를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사업가와 눈앞의 고등학생의 접점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이상한 상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상념에 빠진 주연이 입을 꾹 다물어버리자 전반적으로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얼굴이 재현의 시야에 찼다. 주연의 머릿속을 읽을 수 없는 재현에겐 꽤 위협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이러니까 꼭 스토커 같잖아. 아무래도 괜한 생각을 하게 만든 것 같아 조급해졌다.

 

그니까 내가 이걸 어떻게 아냐면, 너희 아빠랑 우리 엄마랑 연애하거든.”

?”

사귄다고. 우리 엄마도 이혼했어.”

 

주연의 초점이 잠시간 흐려졌다. 이건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이유였다.

 

아빠한테 뭐 들은 거 없어?”

전혀요.”

 

주연이 미간까지 찌푸려가며 대답했다. 아빠가 저 몰래 연애라니. 분명 말이 되지 않는 소리인데 재현이 확신에 차 있어 대놓고 아니라고 하기도 뭣했다. 왠지 초 치는 거 같기도 하고.

 

우리 엄마가 어린 나이에 나 낳고 키우느라 진짜 고생 많이 하셨거든.”

…….”

오늘 학교 끝나고 시간 돼? 일단 번호 좀 알려주라.”

 

재현은 핸드폰을 꺼내 숫자 키패드 화면을 켰다. 주연이 아무것도 모른대도 상관없었다. 이제부터 알아가면 될 일이니까. 몇 번 어울리다 보면 이주연과 이성진이 어떤 사람들인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었다.

 

,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너희 아빠한테는 나 만났다는 얘기 하지 말고. 무슨 뜻인지 알지?”

알았어요.”

 

주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핸드폰 번호를 불렀다. 따로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좀 궁금하긴 했다. 열한 번째 자리까지 차근차근 내뱉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일었다. 내 번호야, 저장해. 재현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 확인하는 수고를 덜어주었다.

 

그럼 오늘 시간 되는 거지?”

학교 끝나고는 바로 학원 가야 해서 그 이후로는 괜찮아요.”

그래? 끝나면 몇 시인데?”

저녁 먹을 즈음…… 근데 야자 안 해요?”

자율이라서 안 해도 돼. 같이 저녁 먹으면 되겠다, 형이 사 줄게.”

 

이번 달 용돈 아껴 쓰길 잘했다. 재현은 연장자답다고 생각하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만 가보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다. 꾸벅 고개인사를 하고 등을 돌린 주연이 몇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다가 울타리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마찬가지로 멀어지고 있는 재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속에서 뜻 모를 파동이 일었다.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