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고등학교 방송부는 매년 축제에서 10여분짜리 단편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찍어 상영한다. 올해엔 부장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모큐멘터리 코미디를 찍기로 했다. 2학년 아나운서인 재현이 모 시사프로그램의 모 진행자에서 모티브를 딴, 사건을 추적하고 중계하는 진행자 역할을 맡았다. 대본을 짜고 장소를 섭외하고 소품을 준비한 뒤 오늘 토요일이 첫 촬영이었다. 학교에 모여서 각자의 역할을 점검하고 이제 리허설과 촬영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기자 역할로 재현과 함께 등장해야 하는 다른 아나운서가 나타나지 않았다. 아까부터 몇 번이나 연락했는데 전화도 안 받고, 부원들은 찜찜했지만 기다릴 수 있는 데까지는 기다렸다. 근데도 안 오는 거다. 카메라 뒤에서 부글부글 끓던 부장이 내가 이 자식 잡아 온다며 뛰쳐나갔다. 10분이나 지났을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기다리던 부원들에게로 부장이 혼자 돌아왔다.
“교통사고 났다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아침에 오토바이에 부딪혀서 병원에 갔단다. 넘어지면서 팔이 부러졌다고. 수술하고 자느라 전화를 못 받았다며, 부상자는 먼저 연락해와서 그의 집으로 달려가던 부장의 발길을 돌리게 했다. 자긴 괜찮으니까 일정대로 진행하라는데, 아니 근데 당장 있어야 하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진행을 하나요. 주변을 둘러보던 부장의 눈이 노트북을 안고 기계들을 점검하던 1학년 엔지니어에게서 멈췄다. 주연이가 하자. 에? 주연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 피해자3이랑 슈퍼주인인데요.”
“그것도 해. 어차피 재현이 빼고 다 일인다역이잖아.”
“저 이거 계속 봐야 되는데.”
주연이 무릎 위에 얹고 있던 노트북을 소중히 끌어안았다. 곧바로 옆에 있는 부원에게 빼앗겼다. 주연은 주변의 재촉에 엉거주춤 일어섰다. 한쪽 구석에서 계속 대사를 외우던 재현이 다가왔다. 촬영 할 거야?
“해야지. 주연이가 기자 할 거야.”
“주연이? 어울리네.”
툭 뱉은 재현이 다시 대본을 들고 멀리 떨어졌다. 촬영 들어가면 불러.
“진짜 제가 해요?”
“하자. 주연이가 제일 낫지?”
부장이 주변에 동의를 구했다. 부원들은 앞다투어 고개를 끄덕였다. 주연이가 제일 화면빨 받게 생겼잖아. 절대 자기들이 준비도 안 한 긴 대사 당장 외워야 할까 봐 하는 말이 아니다. 대본 두 번만 읽고 리허설 하자. 여기다 컨닝페이퍼 써줄게, 그냥 카메라만 쳐다보면서 대놓고 읽어. 어차피 얼빵한 게 그 캐릭터에도 어울려. 부장과 차장이 번갈아 가며 얼빵한 1학년을 얼렀다.
주연은 머리를 긁으며 촬영을 준비하러 방송실로 들어갔다. 주는 셔츠로 갈아입고 얼굴에 뭣도 좀 바르고 나와서 테스트를 위해 카메라 앞에 섰다. 부장은 주연이 읽어야 할 대사 한 줄로 꽉 찬 아이패드를 들었다. 모니터에 담기는 단정하고 잘생긴 얼굴에 과장 섞인 감탄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도 잠시, 바른 자세로 서서 글을 읽던 주연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목이 길어지고 눈살이 찌푸려졌다.
“저 글씨가 안 보이는데요.”
안경 끼고 다니는 걸 못 봤는데 저기서 이 정도 글씨가 안 보인다고? 옆에서 지켜보던 재현이 물었다. 너 안경 없어? 안 가져왔어요. 렌즈는? 없어요. 부장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스트레스는 이제 슬슬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주연의 장비를 받아 안고 있던 1학년 부원이 벌떡 일어섰다. 제가 렌즈 사 올까요? 이주연 시력 몇인지 말해줘!
주연이 한쪽 구석에서 새로 사 온 렌즈를 착용하는 동안 재현은 외우고 또 외웠던 대본을 다시 점검했다. 다른 부원들은 서너 개의 역할로 잠깐씩 나오는 거라서 여유가 있지만 재현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의 캐릭터로 계속 등장해야 했다. 대사도 방금 주연이 떠맡은 기자 역할을 제외하면 재현의 것만 대사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슛 들어가기 직전까지 계속 외웠다. 근데 아무리 외워도 촬영이 시작되지 않았다. 저 멀리서 등을 수그리고 차장이 들어주는 거울에 얼굴을 붙이고 있는 주연이 돌아올 생각을 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쟤 도대체 뭐 하는데? 재현이 다가갔다. 야 주연아 너 대체… 어머나.
한쪽 눈이 빨갛게 충혈된 주연이 재현을 돌아봤다.
“형, 저 이거 못 끼겠어요.”
주연이 투명하고 얇은 플라스틱이 얹힌 손가락을 내밀었다. 우는소리를 한 번 해놓고 주연은 등 돌려 다시 시도했다. 그의 손가락에 비해 너무나 작고 연약해 보이는 렌즈를 찢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며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쑤셔 넣다가 이물감을 못 참고 포기하길 여러 번. 거울을 들어주던 차장이 먼 산을 보며, 주연아 그냥 대사를 외워라, 중얼거렸다. 어이가 없어서 넋 놓고 구경하다가 속이 터진 재현이 물었다.
“내가 해줄까?”
“네.”
앗 그냥 해 본 말인데… 주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렌즈를 내밀었다. 재현은 급한 대로 식염수로 손을 닦고 벌써 말라가는 일회용 렌즈를 받아서 적셨다. 이재현 니가 렌즈 끼워서 데려와. 차장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재현의 주머니에 거울을 쑤셔 넣고 장비 쪽으로 달려갔다. 렌즈 한 번도 안 써봤어? 이게 뭐라고 그렇게 헤매니. 재현은 혀를 차면서 헹궈낸 렌즈를 손가락 위에 올렸다.
“이리 와 봐.”
한 손으로 주연의 얼굴을 잡아 고정하고 엄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둘의 시선이 훌쩍 가까워졌다. 살면서 누구 얼굴을 이렇게 가깝게 마주한 적은 처음이다. 재현은 숨을 참고 집중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아잇, 가만있어. 눈 감지 말아봐! 주연은 자꾸 반사적으로 피했다. 남의 눈동자에 손가락을 들이대긴 처음인 재현도 처음엔 긴장해서 떨었다. 아, 할 수 있어요. 아, 괜찮아요. 나중에는 말만 잘하면서 계속 목을 뒤로 빼는 후배의 턱을 우격다짐으로 잡아당겼다. 도망가려는 얼굴을 잡고 감기려는 눈꺼풀을 잡아당기며 실랑이하다가 가까스로 까만 눈동자 위에 투명한 플라스틱을 얹었다. 됐나?
“됐다.”
“아, 진짜다.”
“반대쪽.”
주연이 고개를 조금 돌려 다시 얼굴을 들이댔다. 역시 실랑이는 있었지만 이번에는 방금 전보다 조금 빨리 넣었다. 주연이 눈을 여러 번 깜빡거리더니 재현이 꺼내든 거울에 제 눈을 비춰봤다. 눈 아프지, 인공 눈물 줄까? 재현의 물음에 주연은 괜찮다고 했다. 그래 그것도 또 네 눈에 넣으려면 한세월이겠구나. 잘 생각했다.
“됐으면 가자.”
“고마워요, 형.”
뭐 하느라 그렇게 오래 걸렸냐, 여기서 보고 너네 뽀뽀 하는 줄 알았다. 촬영장에 돌아가니 여유를 찾은 부장이 장난을 쳤다. 재현은 마지막으로 확인한 대본을 그에게 집어던지고 카메라 앞에 섰다. 주연은 카메라 렌즈 옆에 붙여둔 컨닝페이퍼를 능청스레 읽었다. 화면빨도 정말 잘 받았다. 부장은 급하게 주연을 뽑은 자신의 안목에 매우 감탄했다.
2주차 토요일. 야외촬영을 나가기 전 방송실에서 부원들이 모이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재현은 소리 내어 대사를 연습하면서 물품들을 들고 나가기 쉽게 정리했다. 일찍 나와서 모인 엔지니어들은 장비를 만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부원들은 잡일을 하면서 틈틈이 자기들이 출연할 분량을 체크했다. 1차 편집 영상을 저장한 주연도 자신의 촬영분을 확인하기 위해 대본집을 한 번 보고 덮었다. 피해자3은 대사가 한 줄이다. 뒤돌아보며 두려운 표정으로 “뭐야!”, 그리고 죽는다. 주연은 가방에서 작은 플라스틱 통을 꺼냈다. 지난주에 렌즈를 써보니까 편해서 오늘도 가지고 왔다.
방송실 구석에서 거울을 붙잡고 씨름하다 지친 주연은 뒤를 돌아봤다. 각자 할 일에 바쁜 부원들. 한쪽에서 반사판을 접고 있는 재현에게 다가갔다.
“형.”
“엉?”
“저 이거 또 해주면 안 돼요?”
재현이 고개를 들었다. 주연이 내민 것을 보더니 혀를 찼다.
“야 이제 혼자 해야지, 뭘 또 해 달래.”
말은 그렇게 하면서 재현은 나가서 손부터 씻고 왔다. 책상에 편하게 걸터앉은 주연이 눈을 부릅뜨고 재현을 봤다. 지금 그러지 말고 렌즈 넣을 때나 눈 감지 마. 재현이 웃으면서 주연의 턱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 끝을 주연의 얼굴 위에 올려 자세를 고정하고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렌즈를 넣어주면서 말했다.
“근데 이렇게 남이 해주는 게 더 무섭지 않냐.”
“무섭진 않은데, 혼자 하면 눈이 자꾸 감기더라고요.”
“그게 무서운 거 아니야?”
“아닌데요.”
한 번 해봤다고 주연은 렌즈를 넣을 때도 눈을 똑바로 뜨고 재현과 시선을 맞추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약간의 움찔거림과 재현의 구박은 있었지만. 집중한 재현의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주연은 그것을 보다가 눈을 올려 뜨라고 또 한 소리 들었다. 눈동자를 들어 올리면 재현의 눈에 시선이 닿았다. 재현은 제 일을 하느라 이쪽을 마주 보지 않았다. 됐다! 재현의 목소리와 함께 코앞에 있던 얼굴이 멀어졌다. 깜빡, 깜빡. 한 꺼풀 코팅된 주연의 눈동자가 반질반질해졌다.
“근데 형 울었어요?”
“잉? 아니?”
“아.”
고마워요, 형. 주연은 재현이 정리하던 소품들을 같이 정리하고 기계 앞으로 돌아갔다.
그날은 부장이 지각을 했다. 돌아가는 카메라 앞에서 재현은 비상구 포즈로 누워있는 피해자3에게 다가가 그의 목에 손을 갖다 댔다. 이 남자는 이미 사망했습니다. 팔딱거리는 맥박을 느끼면서 카메라를 향해 침통하게 말하는 재현. 컷, 부장의 목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일어나 앉은 주연이 제 목덜미를 마구 문질렀다.
“아 형! 간지러워요!”
“내가 뭘 어쨌다고.”
재현은 어이없어하다가 타박 들은 김에 진짜 간지러움이 무엇인지 알려주고자 주연의 옆구리를 공략했다. 으악! 몸을 비튼 주연이 이리저리 피하다가 재현의 손을 모아 손목을 그러쥐고 등을 부르르 떨었다. 양손이 붙잡혔는데도 재현이 포기하지 않고 들썩거리자 벌떡 일어나 저 멀리 도망쳤다. 재현이 그를 뒤쫓아갔다. 뭐 하는 거야. 그들을 보며 무감하게 중얼거리는 차장 옆에서 부장은 정신없이 다음 씬을 준비했다. 촬영 후에는 다 같이 지각맨이 쏜 아이스크림을 먹고 헤어졌다.
“토요일마다 너네 보는 거 지겨워.”
“마찬가지거든.”
3주차 토요일. 이제 좀 모여 논다는 기분이 가시고 진정한 노동의 느낌이 든다. 부원들은 빠른 효율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잦은 엔지는 전과 다르게 놀림이 아닌 비난을 받았고 찍고 있는 씬이 끝나기 전에 다음 씬이 준비됐다. 그런데 왜 찍어도 찍어도 끝이 없지? 우리 처음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아무튼 촬영은 진행되어갔다. 거의 매 장면에 출연하는 재현은 쉴 틈이 없었다. 그래도 시작부터 다들 노동자의 자세로 임해선지 오늘은 많이 진행됐다. 저녁 시간 전까지 부지런히 찍고 목표치를 훌쩍 넘겼다.
촬영이 끝나고 다 같이 방송실로 돌아와 정리하는 동안 재현은 스튜디오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자기 몫의 정리를 마치고 피곤에 지친 부원들은 하나둘씩 소리 없이 사라졌다. 주연은 다른 엔지니어들과 러프컷 분량을 나누고 가려다가 다들 집에 가는데 스튜디오 안에 여전히 엎드려있는 재현을 발견했다. 그는 주연이 바로 옆으로 와도 꿈쩍하지 않았다. 테이블에 걸터앉아서 미동 없는 뒤통수를 내려다보다가 어깨를 쥐어 꾹꾹 눌렀다.
“뭐야... 주연이야? 아우 죽겠다.”
“형 피곤하죠?”
“엉. 그래도 난 이제 거의 다 끝났는데 너넨 이제 시작이네.”
뭉친 어깨를 주물러주는 동안 도드라진 어깨뼈와 쇄골이 주연의 한 손에 잡혀 만져졌다. 재현은 가만히 누워 마사지를 받고 있다가 곧 일어나 앉았다. 주연이 손을 거뒀다. 아이고오. 재현이 팔을 앞뒤로 돌리며 근육을 이완시켰다. 그래도 그거 만져줬다고 풀리네. 고마웡. 나른해진 재현은 발음이 동그래졌다.
“너 집에 안 가?”
“가야죠.”
“가자.”
저 멀리 팽개쳐진 가방을 찾아 주워 들던 재현이 말했다.
“오늘은 렌즈 껴달라고 안 했네?”
“해도 돼요?”
“니 앞에선 무슨 말을 못하겠다… 근데 진짜? 지금 껴서 뭐하게?”
“애들이랑 밥 먹고 놀러 갈 건데 잘 보이면 편하잖아요.”
“그럼 아까 하지, 일 할 땐 안 끼고 이 자식…”
재현은 가방을 도로 내려놓고 주연이 내미는 플라스틱 케이스를 받아서 뜯었다. 주연을 테이블에 걸터앉히고 그 앞에 바짝 붙어 섰다. 자연스레 최적의 각이 나왔다. 그때 스튜디오 밖에서 2학년 엔지니어가 둘을 재촉했다. 야 문 잠그게 빨리 나와. 재현이 외쳤다. 내가 잠그고 갈게 먼저가.
“근데 너네 뭐하냐?”
엔지니어가 스튜디오 안으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재현이 돌아보며 렌즈를 흔들었다. 얘 이것 좀 끼워주게.
“그걸 니가 왜 해줘?”
“얘 혼자 렌즈 못 낀대.”
“주연아 실화냐.”
“허허헝.”
선배와 눈이 마주친 주연이 머쓱해 하며 웃었다. 엔지니어가 밖으로 나가며 외쳤다. 그럼 난 간다. 문단속 잘 하고 가! 조용해진 방송실에서 재현은 전보다 더 재빠른 솜씨로 주연의 얼굴을 잡고 렌즈를 쏙쏙 집어넣었다. 주연의 눈동자도 제법 여유가 생겨 재현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눈을 내리깔지도 않았다.
“너 근데 이러고 뺄 땐 어떻게 빼냐? 빼는 건 안 무서워?”
“그냥… 이러고 평생 살 순 없다는 생각으로…”
재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넣을 때도 그렇게 하면 되잖아. 넣을 땐 잘 안 돼요. 주연이 허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단속을 하고 나와서 함께 교문을 지나 쭉 걸었다.
“근데 형은 안구건조증 없죠?”
“갑자기?”
“가까이서 볼 때마다요, 눈이 엄청 촉촉해 보여서요. 반짝거리고.”
“엥.”
“형 눈 조명 안 쏴도 되게 반짝여요. 은하수처럼.”
“으잉.”
“왜요?”
“오글거려서.”
“그런가?”
주연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 한 번 으쓱 털고 말았다. 은근히 뻔뻔하단 말이야. 방송 체질인데 아나운서를 시킬걸. 말한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혼자 민망해진 재현은 얼른 다른 생각들을 했다. 갈림길에서 헤어져 주연은 시내로 나가고 재현은 집으로 갔다. 집에 들어와 씻던 재현은 거울에 비친 제 눈을 유심히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재현의 교실에 아는 얼굴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마침 뒷문을 향한 채 책상에 앉아서 떠들던 재현이 제일 먼저 봤다. 주연아! 3층엔 웬일이야? 자기가 찾아와 놓고 한 박자 늦게 재현을 발견한 주연이 씩 웃었다. 형 보러 왔어요. 책상에서 뛰어 내려간 재현이 복도로 나갔다.
“왜? 방송부 뭔 일 있어?”
“아니요. 그건 아니고…”
주연이 손안에 쥐고 있던 렌즈 케이스를 흔들며 웃었다. 재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와, 설마 했는데.
“내가 잘못했다. 내가 처음에 버릇을 잘못 들였다.”
“하하, 죄송해요.”
“너네 반 애들은 안 해줘?”
“걔네를 어떻게 믿어요.”
주연이 단박에 잘라냈다. 그럼 난 믿을 수 있다는 소리? 복도 한 구석으로 주연을 끌고 간 재현이 렌즈를 꺼내며 웃었다. 형은 당연히 믿죠. 형을 저보다 더 믿죠. 주연이 장단을 맞췄다. 재현이 빈손으로 주연의 턱을 잡아 당겼다. 이리 와 봐. 고개 좀 숙여봐. 아니야, 얼굴은 똑바로 들어. 마주 보고 서서 하려니까 각이 안 나와서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야 했다. 가까이 잡아당긴 얼굴을 고정시켜놓고 한 쪽 렌즈를 떨구듯 넣었다. 이제 주연은 움찔거리지도 않고 눈도 안 감고 잘 참는다. 코앞의 까만 눈동자가 깜빡이지 않고 재현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복도 천장에 켜있는 형광등이 신경 쓰였다. 혹시 내 눈 지금도 너무 반짝이는 거 아닌가. 재현은 잠깐 멈칫 했다가 손을 계속 움직였다.
“이재현 뭐하냐.”
“키스하는 줄.”
지나가던 녀석들이 한마디씩 던지고 갔다. 재현은 다른 쪽 렌즈를 뜯으면서 그들을 향해 발길질 하는 시늉을 했다. 렌즈 두 쪽이 다 들어간 눈이 깜빡이고 곧 초점을 잡았다. 이제 진짜 혼자 해도 잘 할 것 같은데. 주연의 눈동자는 움찔거리지도 않고 내도록 재현을 보고 있었다. 재현에게로 기울어있던 등을 펴고 제대로 선 주연이 빈 케이스를 돌려받았다.
“고마워요, 형.”
“엉. 가.”
고개를 까딱 숙인 주연이 긴 다리를 움직여 계단으로 사라졌다. 재현도 교실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주연이 형, 하며 계단을 도로 올라왔다. 또 왜? 가까이 온 주연이 주머니를 부시럭거리다가 무언가를 꺼내서 재현에게 내밀었다. 방금 전에 재현이 모아서 들려준, 써버린 일회용 렌즈 껍데기였다. 재현이 멍하게 쳐다보자 아니! 하고 재빨리 주머니에 쑤셔 넣더니 반대쪽 주머니에서 캐러멜 세 개를 꺼냈다.
“일당이야?”
“흐흐, 네.”
“고마워.”
웃으며 다시 꾸벅. 돌아가는 주연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교실로 들어왔다. 떠들던 친구들이 재현을 맞이했다.
“이재현 나가서 뭐한 거냐?”
“봤냐? 쟤 렌즈 끼워준 건데.”
“존나 게인줄 알았어, 미친놈아.”
“재현아 형은 편견 없다. 형은 재현이 응원한다.”
“뭐래… 미친 새끼들이.”
“근데 그거 뭐냐? 나도.”
눈썰미 좋은 한 명이 재현이 손에 쥔 것을 발견하자 좀비들이 앞다투어 손을 내밀었다. 슬쩍 뒷걸음질 친 재현은 그 자리에서 세 개를 다 까서 제 입에 홀랑 넣어버렸다. 보기보다 큰 덩어리들이 작은 입 안에 가득 차 볼이 볼록하게 튀어나왔다. 쏟아지는 야유를 무시하고 꿋꿋하게 혼자 다 먹었다.
4주차 토요일 마지막 촬영. 저번 주에 많이 일해 둬서 오늘은 마무리로 조금만 더 찍으면 됐다. 오늘을 기점으로 다른 사람들은 좀 편해지고 편집팀은 무한 편집 지옥이 시작된다. 오늘은 첫 촬영 날 사고를 당했던 2학년 아나운서가 깁스한 팔을 하고 구경 와서 즉석에서 대본을 고쳐 그를 끼워 넣었다. 그는 다친 팔을 안고 겁에 질려 도망가는 피해자4가 되기로 했다. 피해자4도 비명 한 마디인 대사를 외치고 죽는다. 깁스에 모래 들어가도 되냐? 해맑은 부상자가 아무도 답을 모르는 질문을 허공에 던졌다. 뭐 얼마나 리얼하게 죽고 싶은 건데… 주연이 떠맡았던 기자도 한 번 더 등장해야 했다. 3주간의 시간은 어디에 썼는지 주연은 오늘도 컨닝페이퍼를 써달라고 했다. 주연이 부장에게 그 말을 하는 동안 조금 떨어져 있던 재현은 그가 곧 렌즈를 들고 제게 올 것을 예감했다. 조용히 일어나서 손을 씻고 돌아왔다. 촬영팀이 준비를 하는 동안 제 옆으로 슬쩍 다가온 주연을 보고 재현은 혼자 웃었다. 주연은 영문도 모르고 따라 웃으며 렌즈통을 내밀었다.
“혀엉.”
참 나, 이제 애교까지. 재현은 렌즈를 받고 제 앞의 자리를 툭툭 쳤다. 앞에 앉은 주연이 눈을 말똥말똥 동그랗게 떴다. 왜 자꾸 귀여운 척을 하지. 재현이 웃으며 렌즈를 손에 올렸다. 재현은 요령이 생겼다. 이제 얼굴을 잡을 필요도 없이 눈꺼풀만 살짝 올려서 주인 닮아 조금 느린 눈이 반응하기 전에 쏙 넣어버렸다.
“형 이제 진짜 기술자 같아요.”
“이런 기술 있어서 뭐하냐. 렌즈 대신 껴주는 그런 알바 있나? …있으면 좀 하고 싶네.”
재현이 나머지 렌즈를 꺼내며 농담했다. 주연은 거기에 대고 또 잠시 생각하다가 그건 좀, 하고 진지한 대답을 했다. 그러는 동안 재현은 나머지 한쪽 눈에도 번개같이 렌즈를 올렸다. 뒤늦게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주연이 감탄했다.
“형 진짜 빨라요.”
“이렇게 편하게 해주지 말고 직접 넣는 법을 가르쳤어야 되는데.”
“그니까요. 이제 형이 계속 해줘야겠다.”
“뭐야, 싫어.”
“사탕 줄게요.”
“겨우 사탕?”
“그럼… 어떻게 해야, 난 대체 어떻게 해야 형(의 손)을 가질 수 있죠?”
“어리석은 사람, 겨우 사탕으로 나의 마음을… 아 못하겠다. 아으!”
먼저 포기한 재현이 부르르 떨며 온몸을 긁어댔다. 주연은 빙그레 웃으며 몸부림치는 재현을 바라봤다. 앉은 자리에서 팔딱거리던 재현이 가늘게 뜬 눈으로 주연을 보며 물었다. 너 뻔뻔하단 말 좀 듣지. 주연이 끄덕였다. 몇 번 들어봤어요. 그 대답마저 뻔뻔하다. 연기 시켜야 된다니까, 내 역할 얘한테 줄 걸. 중얼거리는 재현을 보던 주연이 말했다.
“그럼 형은…”
“응? 나 뭐?”
“…아니에요.”
왜, 뭔데에, 궁금하게 말을 하다 말아. 재현이 재촉해봤지만 주연은 더 말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노닥거리고 있는데 촬영 준비가 다 됐다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달려간 둘은 카메라 앞에 섰다. 뭐 하느라 계속 부르는데도 안 오냐고 부장이 잔소리를 했다. 여러 번 불렀나? 한 번 부르고 바로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부장 옆에 앉아있던 부상자가 물었다. 근데 아까 쟤네 뭐 한 거야? 차장이 설명했다. 재현이가 주연이 렌즈 끼워준 거야, 주연이가 혼자 못 낀대. 설명을 들은 그가 약간 이해가 안 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난 또.”
“키스하는 줄 알았지?”
“저 새끼 또 저 지랄이네.”
재현은 부장을 째려보다가 제 옆에 있는 애를 힐끗 봤다. 주연은 앞에서 뭐라 떠들든 말든, 컨닝페이퍼를 읽으면서 대사를 입에 붙이는 데에 여념 없었다. 근데 본 애들마다 왜 하나같이 하는 말들이… 나만 좀 그런가. 얘는 아무렇지 않은가? 집중력이 흐트러진 재현은 대사 칠 타이밍을 놓쳐 연달아 엔지를 내고 말았다. 쏟아지는 야유 속에 주연만이 편을 들어줬다. 재현이형 분량도 제일 많은데 엔지 낼 수도 있지, 봐줘요. 부장이 키스한 사이는 역시 다르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쫓아 나가려는 재현을 주연이 간신히 붙들었다. 차장이 이제 장난 그만 치고 빨리 찍자고 소리친 다음 촬영이 이어졌다.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에 방송실에 가면 편집 담당들이 돌아가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편집좀비는 언제 가든 거기 있었다. 재현은 점심 방송을 하러 갔다가 콘솔 앞에 앉은 주연을 만났다. 재현이 방송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주연은 그 자세 그대로 손만 조금씩 움직이면서 영상을 보고 있었다. 스튜디오에서 나온 재현이 그 등 뒤에 서서 구경했다. 재현과 함께 방송을 마친 부장도 옆에 섰다.
“주연이 밥은 먹었어?”
“예, 이거 하고요.”
“언제 하고 먹어? 먹고 해. 너 점심시간 끝날 때까지 여기 있을 거잖아.”
그 말에 화면에서 눈을 뗀 주연이 등을 뒤로 젖히고 손으로 눈을 감쌌다.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다가 아, 하더니 재현을 향해 말했다. 형 저 렌즈 좀 끼워주세요. 안보여서 싱크 맞추기가 너무 어려워요. 재현이 부장을 힐끔 보고 으응, 건성으로 대답했다. 부장은 방금 주연이 멈춘 화면을 앞뒤로 돌려가며 뭔가를 확인 중이었다. 가방을 뒤져 렌즈를 꺼낸 주연이 재현에게 내밀었다. 재현은 다시 부장을 힐끔 보고 주연을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갔다. 주연이 끌려나 자리에서 일어서자 부장은 아예 그 자리에 앉았다. 재현은 예전에 주연이 혼자 씨름하던 거울 앞에서 렌즈 포장을 깠다.
“근데 너 눈 피곤한데 이거 괜찮을까?”
“그렇긴 한데, 안보이니까 너무 답답해서 잠깐만 쓰려고요. 안경 가져왔어야 되는데 까먹어서.”
“안경 있는데 평소에 왜 안 써?”
“귀찮아서 가끔씩만 써요.”
재현은 한 쪽 렌즈를 들고 뒤를 힐끗 돌아봤다. 부장은 좀 전의 주연처럼 화면에 코를 박고 있다. 주연은 가만히 재현을 보며 기다렸다. 재현은 빠르게 주연의 오른쪽 눈동자 위에 렌즈를 올리고 손을 뗐다. 나머지 한 쪽 렌즈를 손에 올리고 고개를 든 재현이 저를 빤히 보는 주연의 시선을 느끼고 물었다.
“왜?”
“…아니에요.”
재현은 이번에도 손쉽게 렌즈를 넣어줬다. 넣자마자 돌아본 뒤에는 여전히 화면에 집중한 채 움직이지 않는 부장의 뒤통수. 한 발짝 떨어져서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는 재현에게 주연이 말했다.
“고마워요. 형.”
“오냐.”
주연을 방송실에 두고 부장과 함께 교실로 올라갔다. 편집좀비들은 보통 급식을 버리고 점심시간 내내 방송실에 있다. 그래서 먹을 것을 가져가 먹으면서 하던데 아까 주연의 주변엔 뭘 먹은 흔적이 없었다. 재현은 옆에서 걷는 애의 눈치를 봤다. 지금 매점 가겠다 하면 따라오겠지. 부장의 반응이 미리 부담스러웠다. 재현의 코앞에서 계단을 오르던 부장이 갑자기 멈추더니 주연에게 빵이라도 사다 줘야겠다고 했다. 걔 아무것도 안 먹은 것 같지? 매점 같이 갈래? 재현은 할 일이 있다고 거절하고 교실로 돌아왔다. 내가 먼저 생각했는데. 자리에 앉아서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주연의 눈은 그가 제 눈을 표현한 것과는 다르게 굴곡 없이 새카맣다. 그런 눈으로 빤히 보면 재현은 어쩐지 시선을 마주치기가 어렵고 목덜미 같은 곳이 간지러워졌다. …내가 먼저 사다 주겠다고 할 걸. 재현은 끝까지 부장에게 그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1차 편집 완성본 점검상영. 미디어실에 모여 앉은 부원들 중간중간 눈 밑이 거뭇해진 자가 있으면 그들이 엔지니어들이다. 어제 밤을 샌 부장이 불을 끄고 영상을 재생한 뒤 크게 하품을 했다. 영상이 시작되고 얼마 후, 구석에 앉아있던 주연이 제 주머니를 더듬더니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어쩐지 그걸 다 보고 있던 재현은 곧 스크린 속에서 움직이는 제 모습을 보다가 다시 문가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앉아있던 재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따라 걷다가 가까이 있는 화장실을 슬쩍 들여다봤다. 주연이 세면대 앞에 서 있었다. 허리를 숙이고 거울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있다.
“너 뭐해?”
갑자기 튀어나온 목소리에 놀란 주연이 들썩였다. 그의 손 위에 있던 렌즈가 세면대 어딘가로 굴러떨어졌다. 어! 주연이 세면대를 더듬거렸다. 같이 놀란 재현이 들어와 똑같이 세면대 위에 코를 박았다. 재현이 렌즈를 겨우 구해냈다. 주연은 렌즈를 헹구면서 한숨을 쉬었다.
“와, 잃어버리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다시 거울에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지켜보던 재현이 물었다.
“내가 해줄까?”
“괜찮아요.”
“…왜?”
슬쩍 웃는 주연의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제가 해보려고요.”
언제까지 형 귀찮게 할 수도 없고. 제가 매번 장난삼아 하던 말들을 똑같이 외우는 주연의 옆에서 재현은 그러냐 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다른 1학년 부원이 화장실에 들어왔다. 세면대에 나란히 선 둘을 보고 왜 여기 있으세요? 묻고는 대답도 안 듣고 사이에 끼어들어 세수를 해댔다. 얘도 어제 밤 샜나 봐. 그 기세에 재현은 뒤로 살짝 밀려났다. 세수를 마친 부원이 여전히 고군분투 중인 주연을 보고 도와줄까, 물었다. 그러자 이주연이 말하길.
“응. 해주라.”
재현은 멍청히 서서 점점 가까워지는 둘을 바라봤다. 그곳에 심어놓은 나무처럼 가만히 있던 재현이 갑자기 성큼 다가가 세면대 앞에 섰다. 재현에게 밀린 1학년 둘은 한쪽 구석에 붙었다. 재현은 손을 씻으며 세면대 위에 가지런히 까놓은 일회용 렌즈 두 개를 봤다. 두 개의 렌즈 중 하나는 주연과 마주 선 후배의 손가락 위에 올라가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케이스에 담겨 있었다. 손을 씻고 물기를 털어내던 재현은 팔을 휘두르다 세면대 위에 있는 것들을 쳐서 바닥에 떨어뜨렸다.
“어!”
“어!”
“어!”
바닥에 떨어져 뒤집어진 케이스에서 보존액이고 렌즈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화다닥 쪼그리고 앉은 셋이 렌즈를 찾았다. 없다. 재현과 주연이 거의 바닥에 얼굴을 붙일 기세로 찾았지만 안 나왔다. 수챗구멍으로 들어갔나 봐. 부원이 말했다. 한참 있다 포기한 주연이 일어섰다. 재현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괜찮아요.”
주연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부원이 여전히 제 검지에 올라있는 렌즈를 내밀었다. 이건 어떻게 할까? 주연은 그걸 가져가 빈 렌즈 케이스와 함께 쓰레기통에 버렸다. 재현은 앞서나가는 주연의 교복 끄트머리를 살짝 잡아당겼다. 진짜 미안해. 주연은 다시 괜찮다고 했다. 진짜 괜찮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더 할 말도 없었다. 셋이 미디어실로 돌아왔을 때 영상은 이미 끝났고 부원들은 대체로 만족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다듬으면 될 것 같아. 이번 주에 추가촬영 한 번만 더 하자. 부장이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정도면 매우 순조로운 진행이다. 축제가 곧이었다.
추가촬영을 위해 필요한 몇 명만 학교에 모였다. 편집과 그때그때 필요한 영상만 잠깐씩 더 찍어 이어 붙이는 동시 작업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다른 파트와 다르게 엔지니어들은 거의 다 나와 있었다. 재현은 할 일 없는 애들과 놀다가 부르면 가서 몇 씬을 찍고 돌아와서 또 노닥거리기를 반복했다. 촬영하러 만나서 이렇게 여유로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사공이 많은 편집 쪽은 자기들끼리 웃다 싸우기를 반복했다. 재현은 그 한 쪽에 껴있는 주연을 봤다. 오늘 주연은 안경을 쓰고 왔다. 주연은 얼마 전부터 종종 안경을 꼈다. 주로 방송실에서 썩어가고 있을 때에 썼는데 그때가 아니면 주연을 볼 일이 별로 없어서 재현이 보는 건 거의 다 그 모습이었다. 안경, 캡모자, 후드를 뒤집어쓴 모습이 교복만 입고 있을 때보다 묘하게 형 같았다. 몇 주째 아빠 정장을 빌려 입고 있는 재현 본인보다 더 성숙해 보이는 건 이상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모여서 막 완성된 임시 2차 편집본을 훑어보고 헤어졌다. 편집을 더 하고 부원이 전부 모였을 때 다시 틀고 또 피드백을 받을 것이다. 더 일하기 싫어서 다들 좋은 말만 할 것 같지만. 다함께 집에 가다가 길이 갈라질 때마다 하나둘씩 헤어졌다. 재현도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 모두에게 손을 흔들었는데 주연이 재현의 옆에 섰다. 너희 집 이쪽이야? 재현의 물음에 주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애들이 멀어지고 횡단보도 불이 바뀌어 둘은 길을 건넜다. 재현은 할 말이 없어 걷기만 했다. 주연도 마찬가지였다. 침묵이 좀 견디기 힘들어졌을 때 물었다.
“너 집 어딘데?”
“형은요?”
“나 ㅁㅁ아파트.”
“저도 그쪽이요.”
그리고 다시 걸었다. 재현의 집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주연이 입을 열었다. 형 근데요.
“그때 왜 그랬어요?”
“뭐가?”
“그때 왜 내 렌즈 쳐서 떨어뜨렸어요?”
재현은 잠깐 뻐끔거리다가 곧 말했다. 수차례 방송 사고에 단련된 메인 아나운서는 임기응변에 능했다.
“아니 그때 봤잖아. 실수로… 아이, 내가 그 생각을 못했네. 새로 사줄게.”
“형은 다 잘하는데 거짓말은 잘 못하네요.”
거짓말 아닌데. 재현은 방금 전보다 훨씬 자신 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걸음을 빨리했다. 다리 길이로는 지지 않는 주연이 뒤처지는 기색도 없이 따라왔다. 이제 집은 코앞에 왔는데 주연은 계속 말을 걸어왔다. 형 근데요.
“제가 렌즈 끼는 거 싫어서 그랬어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리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
“아니면 다른 애가 저 렌즈 끼워주는 게 싫었어요?”
“무슨, 무슨…”
재현이 금붕어처럼 연달아 뻐끔댔다. 주연은 이제 숨기지도 않고 길을 막아섰다. 안경 너머의 눈이 까맣게 빛났다.
“그럼 형이 계속 해주면 되잖아요.”
“…그건…”
“그건?”
“그거는, 그건… 그건 이상하잖아.”
“뭐가요?”
“이상하게 보잖아… 다들.”
주연은 이제 길을 막고만 있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재현은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뒤로 담장과 화단이 느껴졌다. 잘못하면 발을 헛디뎌 넘어질 것 같다. 성큼 다가온 주연이 손가락으로만 살며시 재현의 손목을 잡았다. 도망가던 주연의 턱을 잡아채던 재현의 것에 비해 한없이 부드러운 구속이었다. 재현은 거기에 묶여 꼼짝하지 못했다. 커다래진 재현의 눈동자에 비친 주연이 점점 커졌다. 처음 렌즈를 끼워줄 때보다 서로의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주연은 긴장으로 벌어져 짧은 호흡을 반복하는 재현의 입술을 내려 봤다. 쪽. 순간 재현의 입술에 말랑한 것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붉어진 볼을 안경 너머로 감춘 주연이 말했다.
“이거보단 안 이상하잖아요.”
…어. 재현이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멍하게 초점이 사라진 눈이 마주쳤다. 재현의 눈에 빛이 돌아오고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 잡혀있는 손목을 뿌리치고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주연은 천천히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떨리는 주먹을 꼭 쥐었다가 곧 그 자리에 주저앉아 고개를 떨궜다.
사흘 동안 무슨 정신으로 학교를 다녔는지 모르겠다. 재현은 2층을 거칠 때마다 축지법 쓰듯 계단을 뛰어 다녔다. 방송실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팔 부러진 애가 점심 방송 하루만 대타 해 달랬는데 그것도 거절한 냉혈한이 되면서까지 피했다. 하지만 오늘은 피할 수 없는 날이다. 방송부 전원이 모여서 최종편집본을 보고 학생회에 넘겨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같이 가자는 차장에게 끌려오느라 미디어실에 조금 일찍 도착한 재현은 불안하게 다리를 떨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문이 닫히고 불이 꺼졌다. 부장이 영상을 재생시켰다. 그럼 애들 다 왔다는 소리야? 이주연도 여기 있다는 말이야? 재현은 돌아보면 큰일 나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다.
영상이 끝나고 모두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똑같은 장면을 하도 봐서 이제 뭐가 웃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냥 우리가 무조건 잘했어. 이제 더 이상 추가 작업은 없어. 그냥 없어. 이제 홍보하고 축제 기간에 상영만 잘 하면 된다. 자화자찬 끝에 해산했다. 재현은 뒷정리해야 하니까 저리 꺼지라는 차장에게 매달려 버티다가 제일 마지막에 나왔다. 끝까지 뒤돌아보지 않고 나갈 때도 앞문으로 나갔다. 아무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종례가 끝나고 주연은 방송실에 들어와 불을 켰다. 오늘 마감 당번이라서 집에 가기 전에 이상 없는지 확인하고 문단속을 하고 가야 했다. 한쪽에 가방을 내려놓은 주연은 스튜디오 안을 둘러보고 기기들을 확인했다. 이상한 거 없고 콘센트도 다 내려가 있고 별거 없다. 가방을 가지러 돌아왔다가 넓은 통창 너머의 스튜디오 안을 힐끗 봤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하아, 한숨을 쉬었다. 의자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 쥐었다. 카메라 앞 데스크. 그곳에 자주 앉는 누군가가 떠오르고 그러면 주말에 제가 한 미친 짓이 따라왔다.
“아…”
진짜 개미친놈으로 보고 있겠지. 엊그제 미디어실에서 뒤 한 번 안 돌아보던 재현이 떠올랐다. 미디어실 들어서자마자 재현의 뒤통수를 찾았다. 행여 눈에 띌까 조용히 구석에 구겨져 앉은 주제에 재현이 돌아보지 않으니 나중엔 오기가 생겨 그의 뒤통수만 봤다. 돌아보면 난감했겠지만 안 돌아보니까 약이 올랐다. 학교에서 방송부 일이 아니면 애초에 마주칠 일이 없다는 게 오늘까지의 주연에게는 기댈 구석이었다. 의도가 섞인 외면이라는 걸 확인하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됐다. 차라리 화라도 냈으면. 저도 재현의 반응이 무서워 피한 주제에 그가 다른 무엇도 아닌 무시를 택했다는 것이 괴롭다.
끼익.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주연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 떠올리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문 사이로 얼굴만 쏙 내민 재현이 안에 혼자 있는 주연을 확인하고 들어오더니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주연이 수그리고 있던 등을 펴고 앉았다. 등이 선득해지고 평소엔 나지도 않던 땀이 척추를 따라 흘렀다. 가까이 온 재현이 바로 옆에 앉았다. 주연은 저도 모르게 스윽 몸을 뒤로 뺐다.
“혼자 뭐해?”
“당번이라서요.”
글쿠나. 재현은 손끝을 뜯으며 중얼거렸다. 형은요? 형은 여기 왜 왔어요? 오늘 내가 당번인 거 공지 보고 다 알았을 텐데 왜 왔어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주연은 내리 깐 속눈썹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재현이 여전히 제 손을 괴롭히면서 물었다.
“오늘은 안경 안 썼네.”
“…네.”
“잘 안 보이겠네.”
“…네.”
“렌즈도 없어?”
“있어요.”
“…내가 끼워줄까?”
재현이 슬쩍 눈을 올려 떴다. 눈이 마주치고 동상처럼 굳어있던 주연이 세차게 끄덕였다.
“네. 네. 해주세요.”
“줘 봐.”
주연이 달려가 가방을 뒤졌다. 렌즈는 없다. 당연하다. 앞으로 다시는 쓸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면대에서 재현이 쳐버린 그게 가지고 있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안 샀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는데 사서 하나라도 가지고 다니지, 등신! 의미 없이 가방을 털던 주연이 벌떡 일어섰다. 재현의 놀란 눈이 따라왔다. 문가로 달려간 주연이 말했다.
“형, 잠깐만요. 잠깐만 기다려주면 안 돼요?”
“왜?”
“렌즈 가져올게요.”
“지금 없어? 없으면 됐…”
“금방 가져올게요.”
“으응…”
“진짜 잠깐이면 돼요.”
“알았어.”
“어디 가면 안 돼요.”
주연은 문을 열고 사라졌다. 재현은 그대로 등받이에 기대 늘어졌다. 아까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다 끌어다 쓴 용기를 새로 충전할 힘이 없었다. 재현은 반쯤 드러누워 액체처럼 흐물거렸다. 조금 있다가 급하게 달려오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벌떡 일어난 재현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쾅! 큰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주연은 안에 재현이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 자리에서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휴우. 겨우 호흡을 가라앉힌 다음 아까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재현이 포장도 안 뜯겨 있는 직사각형 상자를 보고 물었다.
“어디까지 다녀왔어?”
“반에, 사물함…”
재현은 주연이 서둘러 주머니에 쑤셔넣는 영수증을 힐끗 보고 포장을 뜯었다. 렌즈를 꺼내 손 위에 올린 다음, 저를 빤히 보고 있는 주연과 눈이 마주쳤다. 머뭇거리던 재현이 손을 뻗었다. 뺨에 닿은 손가락 끝이 전 같지 않게 떨렸다. 눈을 봐야 눈에 넣을 텐데, 눈을 보기가… 재현은 애매하게 주연의 속눈썹을 보면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이 다가오자 재현의 눈만 따라다니던 주연의 눈이 감기려고 했다. 잘 하더니 잠깐 안 꼈다고 그새 또.
“가만있어 봐.”
얼굴을 잡은 손이 힘을 주고 움찔거리는 눈에 겨우 렌즈를 올렸다. 주연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무의식적으로 비비려는 손을 잡아 내리고 다른 쪽 눈에도 렌즈를 넣어줬다. 주연은 처음 렌즈를 낄 때처럼 눈을 깜빡이면서 이물감에 적응했다. 기다리던 재현이 물었다. 괜찮아?
“네.”
“응.”
“고마워요.”
“응.”
“…”
어색하고, 모든 게 선명했다. 재현은 다시 제 손톱 끝으로 시선을 돌리고 물었다. 동그래진 발음.
“그러엄… 오늘은 일당 없어?”
아? 주연이 급히 주머니를 뒤졌다. 쓰다 만 휴지 같은 것밖에 안 나오는데. 당황한 얼굴을 지켜보던 재현이 처음 렌즈를 끼워줄 때처럼 주연의 뺨을 붙잡았다. 고정시켜 놓은 얼굴에 재현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촉. 입술이 번개처럼 닿았다 떨어졌다. 목 아래에서부터 점점 붉게 물들어 올라오는 하얀 피부가 주연의 또렷한 시야 안에 잡혔다. 동공만 이리저리 흔들며 굳어있는 주연을 기다리다 못이긴 재현이 벌떡 일어섰다. 화들짝 깨어난 주연이 손목을 잡아 주저앉혔다. 다가가자 눈을 질끈 감는 재현이 보였다. 코가 먼저 닿았다. 입술을 맞댄 채 가만히 있었다. 재현이 숨을 참는 게 느껴졌다. 주연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기울어지고 제 입술로 재현의 입술을 만지듯이 움직이자마자 퍽 하고 뒤로 밀쳐졌다. 마주친 재현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우주에 시선을 빼앗겼을 때 재현의 두 손이 단단한 턱을 감싸 쥐고 끌어당겼다. 근데요 형.
“저는 거짓말 잘해요.”
“진짜?”
“저 이제 렌즈 혼자 낄 수 있어요.”
그것 봐, 진작 연기를 시켰어야 했는데. 재현이 웃음을 흘렸다. 다시 코가 먼저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