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이 ‘또’ 차였다.
이번엔 자주 가던 게이바 바텐더랑 눈 맞아서 섹스하는 걸 현장 검거했다.
Sorry, Jerry. 쏘리? 쏘오리? 지랄. 와중에 라임 하나는 또 죽여줬다. 쏘리, 제리. 죽여주네. 그러게. 죽여줄까, 이 새끼. 하하. 제정신이 아닌 머리는 의식의 흐름대로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이재현 인생사에서 꽤나 괄목할 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거 덕에 그랜드슬램 달성 성공했거든. 사기 치고 튀기, 어장 치기, 잠수 타기, 바람 피우기. 이래서 양키들은 함부로 만나면 안 돼. 인종차별 어쩌구 절대 지양하는 이재현 가치관 통 박살 나게 생겼다. 합법적인 동성애, 자유로운 연애! 물 건너온 김에 찐득한 아메리칸 러브를 꿈꿨는데 어째 만나는 놈들은 족족 소생 불가 폐기물들이었다.
좁디좁은 한인 사회에서 이쪽 부류의 소문이 어떤 꼬리를 달고 퍼지는지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일부러 동양인 없는 지역으로 고르고 골라 온 건데 결국 이 모양 이 꼴이다. 간절하게 알코올 땡기는 순간이었다. 어찌 되었건 이미 버스는 떠나갔고 환승은 글렀다. 그렇게 이재현 aka Jerry는 빛이 나는 솔로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절절히 바라던 알코올을 입에 댈 수는 없었다. 오늘은 월요일이었고, 내일은 화요일이었으며- 아니, 그랜드슬램 달성 후 비탄에 잠긴 이재현에게 고작 이런 이유가 통할 리는 없었다. 구구절절 되도 않는 사족 다 차치하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밤 9시가 넘었기 때문이었다.
이 뭣 같은 데서 개방적이고 뭣 같은 데서 보수적인 이상한 나라는 9시 이후에 알코올 판매 금지였다.
제기랄.
짭메리칸 러브
팍랫
낡아빠진 기숙사에 내던져진 운명은 기구하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재현은 정말 아무것도 없이 황량한 기숙사에서 허리띠 졸라매 생활비 충당하랴 폭탄 같은 과제 해치우랴 정신없이 살기 바빴다는 뜻이다. 그래, 젠장. 가난한 동양인 유학생 주제에 무슨 배짱으로 연애 따위를 하겠다고 지랄을 했을까. 이재현은 젖은 걸레로 테이블을 박박 닦으며 간단히 합리화를 마쳤다. 아메리칸 러브? 그거 이미 텄다. 이미 단호하게 선고한 불가능 판정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Hey, dude.”
재현의 등 뒤로 묵직한 무게가 실렸다. 대번 눈살을 찌푸린 재현이 자신의 어깨 위에 얹어진 팔을 쳐냈다. 어제 실연을 당해놓고 짤 없이 일하러 온 사람한테 고운 반응이 나오길 기대한 건 아니었던 Sean은 작게 킬킬거리며 재현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재현은 그를 무시한 채 하던 일을 계속했지만 테이블을 닦는 모양새에서 짜증이 묻어나는 건 구태여 숨기지 않았다. Sean은 그런 재현의 뒤를 설렁설렁 쫓아다니며 귀찮게 굴었다. 마침내 한계에 다다른 재현이 손에 들고 있던 걸레를 반쯤 내던지듯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를 돌아보고 나서야 언제 그랬냐는 양 가벼이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 얄미운 모습에 재현은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려 웃는 얼굴로 말했다.
“You know, I’m fucking feeling bad. So, please, shut, up.”
한 단어 한 단어를 짓씹듯이 뱉어낸 재현이 걸레를 들고 카운터로 돌아갔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재현을 따라온 Sean에게 재현이 다시 일갈하려는 찰나, Sean은 과장되게 몸을 움츠리는 척을 하더니 대뜸 티켓 한 장을 내밀었다.
“What is it?”
“A ticket for my club performance.”
동아리 공연? 24시간을 48시간으로 쪼개 살아도 시간이 부족해서 늘상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건축학도에게 동아리 활동이란 먼 나라 얘기였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일주일에 건축 프로젝트 하나씩 완성하는 강행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괴로운 건축학과 2학년 이재현은 애초에 동아리를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Sean이 무슨 동아리였더라. 잠시 기억을 더듬던 재현은 얘가 들어간 동아리만 다섯 개가 넘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빠른 포기를 택했다.
“What kinda?”
“Hey, just come and check.”
끝까지 무슨 동아리 공연인지 말해주지 않은 Sean은 일 열심히 하라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떴다. 재현은 자신의 손에 남겨진 티켓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검은색 유광 티켓에는 흰색 글씨로 제목, 장소와 시간 정도만 적혀 있었다. 오늘 밤 8시 유니언 홀. 재현은 손가락 끝으로 가운데에 유려한 필기체로 적힌 글씨를 훑었다. Fiesta de noche. 밤의 축제, 라.
“Jerry, when do you clock-out?”
누가 봐도 더 남아서 도와달라는 의미로 퇴근 시간을 물어본 게 확실해 보이는 홀 매니저의 목소리에 재현은 들고 있던 티켓을 에이프런 주머니에 급히 집어넣었다. 어색하게 웃은 재현이 볼을 긁적였다. Well······ 평소였다면 돈이나 더 벌자는 마음으로 Sean의 동아리 공연쯤은 가볍게 무시했을 재현이지만 이상하게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이게 다 어제 그 개새끼한테 맞은 뒤통수가 얼얼해서 그런 거다. 잠시 말끝을 흐리며 고민하던 재현은 답했다.
“After an hour.”
지금 시간은 5시. 밖은 어슴푸레한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 * *
그냥 대충 품이 큰 후드티를 입고 나온 재현은 빳빳한 티켓의 모서리를 손끝으로 톡톡 건드리며 유니언 홀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남는 게 땅덩이라 그런지 몰라도 캠퍼스가 더럽게 큰 덕분에 기숙사에서 유니언 홀은 한참을 걸어야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동아리 공연이라는데 너무 후리하게 나왔나. 속으로 중얼거린 재현이 까만 핸드폰 화면을 보며 슥슥 머리를 정리했다. 다행히 재현은 자신이 얼마나 잘난 외양을 지녔는지 철저히 객관적으로 파악된 상태였으므로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자체적 판단을 내렸다.
11월의 위스콘신은 변덕스러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체감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으면서 오늘은 난데없이 20도 근처를 웃돌았다.
그래도 쌀쌀한 밤공기는 지금이 가을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알리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얼마 가지 않아 유니언 홀이 보였다. 그냥 공연이라길래 별생각 없이 왔는데 생각보다 꽤 규모가 있는 듯했다. 여러 동아리가 연합으로 개최한 건지 벌써부터 번쩍거리는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자 널따란 공터 중앙에 설치된 무대 장치가 보였다. 밤의 축제라는 테마에 걸맞게 곳곳에 보라색 네온사인이 번쩍였고 사람들은 저마다 지극히 미국스러운 파티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What the. 단순히 동아리 공연만 있는 게 아니라 이런 ‘파티’ 같은 곳이었다면 진즉 귀띔을 해줬어야 할 거 아냐. 간죽간살 다 뒈졌다. 재현은 후드티에 달린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유니언 홀 입구에서 티켓을 슥 내밀었다.
어차피 기분 전환이나 할 겸 공연만 보고 갈 생각이었으니 재현은 무대 근처로 걸어갔다. 이미 다른 팀이 공연 중인 건지 귓전을 시끄럽게 울리는 음악 소리는 정신을 쏙 빼놓을 만큼 커다랬다. 흥에 취한 사람들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뛰고 있었다. 추위를 넘어설 만큼 열기가 후끈했다. 재현은 흘끗 무대 위를 확인했다. 밴드부였다.
Sean이 밴드부에도 들어갔었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하도 여러 개를 하니까 기억이 정확하지 않았다. 두어 곡을 더 연주한 끝에 공연을 마친 무대 위 팀이 인사를 하고 내려갔다. 진행자로 추정되는 누군가가 올라와 다음 팀을 소개했다. 당연히 밴드부겠거니 했던 예상과는 달리 소개된 팀은 댄스 동아리였다. 가장 먼저 올라온 건 Sean이었다. 뭐야, 댄스 동아리였어? 답지 않게 빡세게 꾸민 모습이 퍽 웃겨 웃음을 터트린 재현이 그를 놀릴 양으로 핸드폰을 꺼내 비디오를 찍기 시작했다. 핸드폰 화면 속 Sean을 보며 터지는 웃음을 숨기지 않던 재현의 얼굴에서 일순 표정이 사라졌다. Sean의 옆에 있어서 비디오에 계속 같이 잡히는 누군가 때문이었다. 핸드폰 화면을 통해 무대를 보고 있던 재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무대를 두 눈으로 직접 바라봤다.
붉은빛이 도는 갈색 머리카락의 동양인.
어디에나 있다는 아시안을 찾기가 지독하게 힘든 밀워키에서 이런 식으로 만나리라곤 상상해본 적 없었다. 재현은 서서히 팔을 내렸다.
즐거운 듯 싱긋 올라간 입꼬리, 휘어지는 눈매 옆으로 흩어지는 찰나의 웃음. 금세 가운데로 자리를 옮기더니 언제 말랑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날카로운 얼굴로 쉬지 않고 움직이는 몸.
그냥, 반짝거렸다.
재현이 정신을 차린 건 모든 공연이 끝난 후였다. 순간 구름 위로 붕 떴다가 훅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여전히 무대에 올랐던 옷차림 그대로 내려온 Sean이 재현에게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얼떨떨한 상태였다.
“How was it?”
“···Cool.”
“Yeah, it was fucking cool!”
아직 공연의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아니면 애초에 재현이 무어라 대답하든 상관이 없었던 건지 신이 난 Sean은 자기 좋을 대로 무대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재현은 그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무의식적으로 무대 주변을 눈으로 훑었다. 그러다가 재현의 시야에 붉게 빛나는 갈색 머리카락이 스친 순간.
“한국인, 맞죠?”
무대를 잡아먹을 것처럼 사납게 굴었던 이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에 괴리감이 느껴질 만큼 무해한 목소리였다. 호의로 가득 찬 눈을 마주하니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먼저 말을 걸어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연고지 하나 없는 곳에 혼자 떨어져 은근한 인종차별이나 편견 따위와 쉬지 않고 맞부닥치며 살아나가려면 필연적으로 기대치가 낮아진다.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작금의 좆같음을 타개할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현저히 희망을 품지 않게 된다. 그편이 정신 건강에 이롭거든. 그래서 상대가 썩 좋지 않은 놈이라는 걸 알면서도 인스턴트식 연애만 해대는 거다. 일상에 쉬지 않고 자극을 줘서 지독한 현실을 잊어보려고. 빚지고는 못 사는 이재현 성격상 마냥 좋은 사람 만나 죄책감 느끼느니 쓰레기 짓에 당하는 역할 자처하는 쪽이 훨씬 속 편했으니까. 연애를 하기 위해 연애를 했다. 미디어에서 떠들어대는 예쁘고 아름다운 사랑놀이 같은 거 하기엔 이재현이 처한 현실이 팍팍했다. 그래도 꿈을 꾸는 건 돈이 드는 일이 아니었으니 상상해보긴 했다. 진짜 영화 같은 아메리칸 하이틴 로코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되어보는 허황된 이야기.
그리고 어쩌면 지금이 그 우스운 삼류 드라마의 서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제의 충격이 덜 가셨기 때문일까.
“네, 한국인이에요.”
“오늘 와주셔서 감사해요. 아마 절대 안 올 거니까 기대하지 말라고 했는데, 제가 Sean한테 계속 부탁했거든요. 초대해달라고.”
“저를요?”
“어, 여기서 한국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궁금하기도 했고·····”
시카고 옆에 있는 밀워키는 바람이 강했다. 그러고 보니 내일 태풍 주의보가 떴던가. 불어닥치는 바람에 이재현이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가 스르륵 뒤로 넘어갔다. 여기로 오는 길에 나름 정리한다고 정리했던 머리카락이 바람을 따라 흐트러졌다. 성큼. 눈앞의 남자와 거리가 좁혀졌다. 후드가 벗겨지며 드러난 재현의 귓가 옆으로 웃음기 섞인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도 게이거든요.
* * *
이주연. 어제 봤던 걔의 이름이었다. 한 살 어린 컴퓨터공학과 1학년이란다. 미대도 아니고 공대도 아닌 그사이 어디쯤 위치한 건축학도 이재현에겐 낯익으면서도 낯선 학과였다. 재현은 어제 기숙사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스튜디오에서 밤새 그렸으나 언제나 그렇듯 아침에 보니 처참한 상태의 도면을 지우다 말고 생각에 잠겼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대뜸 이쪽인 걸 밝힌 걸까.
물론 여기서는 어느 정도 친분 있다 싶으면 쉽게 밝히는 정체성이라곤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본투비 한국인 아니던가. 미국 기준으로 본의 아니게 벽장 게이 행이 된 이재현에겐 어제 자신의 귀가 잘못된 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볼 만한 일이었다. 이재현은 다소 즉흥적인 편이었으나 자기방어 기제가 후천적으로 강해진 사람이었다. 연애가 필요하니 쓰레기랑 연애를 하면서도 애초에 마음을 전부 주지 않았다. 언제라도 도망칠 자리 봐 놓고 여차하면 그곳으로 훌쩍 떠났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명목상 애인이라는 새끼가 딴놈이랑 섹스하는 걸 직접 본 건 상당한 충격이긴 했다만.
그래서 이재현은 이주연이 어려웠다. 어려워서 싫었다. 싫은데 자꾸 생각나니까 더 싫었다. 고작 같은 한국인이라는 거 말고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호의부터 쏟아내는 시선을 마주하기 벅찼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사랑은 지독한 불안을 먹고 자라난다.
- 형 바빠요?
- 저랑 저녁 먹어주면 안 돼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재현의 생각은 문자가 왔음을 알리는 핸드폰의 진동에 의해 멈췄다. 그러나 문자 내용을 확인한 재현은 더더욱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말았다. 난데없이 미국에 내던져진 뒤 반강제적으로 터득한 건 난생 처음 보는 인간이랑 대화하는 능력이었다. 흔히들 얘기하는 스몰 토크, 그 말이다. 사실 영양가는 하나도 없었다. 다음날 되면 대화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누구를 만났는지 누구랑 대화를 나눴는지도 잊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재현은 어제 주연과의 만남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했다. 자꾸 그 애를 곱씹고 앉아 있는 꼴을 보아하니 그른 것 같긴 하지만 최소한의 방어선 정도는 세워두고 있었단 뜻이다. 여기서 한국인을 다 만나다니, 하하- 하면서 어영부영 번호까지 교환하긴 했으나 진짜 연락이 오리라 예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정말로 문자를 보낼 줄이야. 손에 계속 쥐고 있느라 뜨끈해진 지우개를 내려놓은 재현이 답장을 보냈다.
- 커먼스 갈 건데
스멀스멀 고개를 들려는 감정의 싹을 즈려 밟은 재현은 핸드폰과 지갑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돈도 시간도 없고 해야 할 과제만 많은 그가 택할 수 있는 저녁 메뉴는 언제나와 같이 학식이었다.
- 좋아요
재현은 하얀 화면에 떠오른 까만 글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캠퍼스 내에 학식당만 3곳이었고, 재현이 주로 커먼스를 택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건축 스튜디오와 제일 가깝고 가장 저렴하기 때문이었다. 재현은 문자에 답을 하는 대신 핸드폰을 겉옷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하여간 이재현은 이주연이 싫었다. 그 애는 세상 모든 게 쉬운 것처럼 보였다.
“원래 저녁 이렇게 늦게 먹어요?”
“그냥 작업하다가 배고프면 와서 먹는 거라··· 그때그때 달라.”
“작업이요?”
“어어, 건축 프로젝트. 보통 스튜디오에서 밤새거든.”
“프로젝트는 매주 하는 거예요?”
“엉, 도면이랑 결과물이랑 제출하고 교수님께 피드백 받고. 지금도 도면 그리다가 온 거야.”
컴공이 건축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잘 모르는 분야라 썩 재미없는 주제일 텐데도 불구하고 이주연은 꽤 진심으로 흥미를 보이는 듯했다. 처음엔 오늘 지나면 잊어버릴 스몰 토크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 피상적으로 답했던 재현도 이것저것 궁금해하며 말을 붙이는 주연의 모습에 나름 성실히 대화를 이어갔다. 재현은 포크로 에그 스크램블을 뒤적이며 무심한 척 말을 건넸다.
“너는 왜 지금 먹는데?”
“아, 연습이 늦게 끝났어요. 풋볼 팀이라서요.”
주연의 답을 들은 재현은 적잖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동양인이 미국 대학 풋볼 팀에 들어갔다고? 미국이 풋볼에 얼마나 열광하는지, 특히 NFL 다음으로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다는 대학 풋볼 리그에 관한 이야기를 익히 들어왔던 재현은 반응하는 것도 잊은 채 주연을 바라봤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멋쩍게 웃음을 터트린 주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운이 좋았어요.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팀에 속해 있었거든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인 재현이 포크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역시 다른 세상에 사는 놈이다. 여전히 이곳에 완전히 섞여들지 못하면서 겉돌고 있는 이재현과 달랐다. 재현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나도 번듯한 정상 궤도 속에서 나고 자랐더라면 저랬을까. 아니다. 이런 류의 상상은 부질없는 일이다. 어차피 일어나지도 않을 일 아닌가. 이 뭣 같은 세상은 항상 이재현에게만 지독하게 차가우니까.
“그래, 다음에 경기 하면 말해. 보러 갈게.”
적당히 담백하고 적당히 선 긋는 어투로 말한 재현이 싱긋 웃으며 일어났다. 이대로 있다가 자신의 민낯을 들킬 것 같았다. 이 알량한 자존심마저도 뺏기면 이재현에겐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같이 가요, 저도 다 먹었어요.”
아직 접시를 반도 비우지 않았으면서 이주연은 이재현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어라 말을 하려던 재현은 달싹이는 입술을 꾹 다물고 말없이 앞장섰다.
밀워키의 11월 날씨가 얼마나 최악인지 말했던가. 재현은 한숨을 삼키며 멀거니 하늘을 올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더니 난데없이 비가 내렸다. 불행 중 다행은 빗줄기가 그다지 굵지 않다는 점이었다. 비록 흠뻑 젖기야 하겠지만 이 정도면 스튜디오까지 뛰어갔을 때 최소한 물에 빠진 생쥐 꼴까지 되지는 않을 터였다.
“우산 가져왔어요?”
“그럴 리가······ 넌?”
“저도요.”
추적추적 쏟아지는 빗소리가 공백을 메웠다. 아이러니하게도 편안한 침묵이었다. 재현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발치에 고이는 웅덩이에 일그러진 파장이 쉬지 않고 퍼졌다.
“형.”
이재현은 여전히 이주연이 싫었다.
“제 방에 들렀다가 갈래요?”
근데 좋은 것 같기도 했다.
“우산 가지고 가요. 여기서 가까워요.”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척을 해 주고 싶을 만큼은.
- 그래.
* * *
재현은 주연이 건넨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털어내며 주위를 둘러봤다. 아파트 형식의 기숙사는 보통 4인 1실로 운영됐는데, 이주연 말에 의하면 룸메이트가 기숙사 신청을 해놓고 이번 학기 휴학을 하는 바람에 혼자 살게 되었다고 했다.
“춥죠. 마셔요.”
“엉··· 고맙다.”
주연은 소파에 앉아 있는 재현에게 머그잔을 건넸다. 뜨끈한 머그잔을 받아든 재현은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했다. 뜨겁게 덥힌 애플 사이더였다. 들고 있던 수건을 머리 위에 대충 얹은 재현이 컵을 홀짝였다. 고개를 뒤로 젖히자 얹혀 있던 수건이 뒤로 미끄러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재현이 수건을 바로잡기 전에 주연이 먼저 수건을 잡아챘다. 주연은 수건을 든 조심스러운 손길로 재현의 머리카락을 살살 흩트렸다. 거세진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연을 제지하지 않은 채 별말 없이 컵을 비우던 재현이 별안간 입을 열었다.
“야, 너 사과해.”
“미안해요.”
“···왜 사과하는데?”
“형이 사과하라고 하는 거면 제 잘못일 테니까요.”
한 치의 고민도 없는 즉답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게 싫었다. 자존심 뻗대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재현에겐 죽도록 어려운 말이 이주연에겐 더없이 쉽게 나왔다. 제가 시켜놓은 주제에 기분이 가라앉은 재현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이번에 정적을 깬 건 이주연이었다. 어느새 다 마른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던 재현이 고개를 돌려 이주연을 쳐다봤다.
“제 방 가깝다고 거짓말했잖아요.”
진심으로 뉘우치는 듯한 주연의 모습이 어이없다는 듯 보던 재현은 결국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 골 때리는 새끼. 얘가 이렇게 구니까 이런 놈을 싫어하는 이재현이 꼭 나쁜 새끼처럼 느껴진다는 점이 짜증 났다. 근데 또 그래서 좋았다. 재현은 한결 가벼워진 말투로 대꾸했다.
“어, 이번만 용서해줄게.”
“앞으로 잘할게요.”
“두 번은 없다. 다음엔 안 봐줄 거야.”
비가 그쳤다. 그러나 여전히 흐리멍덩한 색감을 자랑하는 하늘을 흘끗 보던 재현이 겉옷을 챙겨 들며 툭 말을 던졌다.
“나 프로젝트 마무리하러 스튜디오 갈 건데,”
“······?”
“구경하러 따라오던가.”
이주연은 재현의 말을 이해하려 애쓰는 듯 반쯤 입을 벌린 채 그를 바라봤다. 그새 겉옷을 다 꿰입은 재현이 무심하게 말했다. 싫음 말고.
“아니요, 좋아해요. 아니, 좋아요. 가요. 갈 거예요.”
횡설수설 말을 쏟아내는 이주연을 뒤로한 이재현은 제방인 양 알아서 기숙사 문을 열고 나섰다. 어어, 형! 같이 가요! 잠깐만요! 저 준비 다 됐어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퍽 다급했다. 이주연 같은 애를 동요하게 만드는 사람이 본인이라는 점이 애석하게도 만족스러웠다. 물웅덩이를 자박이는 발걸음은 하나가 아닌 두 사람의 것이었다.
* * *
도면을 붙잡고 있느라 내내 수그렸던 몸을 일으키자 절로 곡소리가 나왔다. 찌뿌둥한 어깨를 돌리며 일어난 재현은 캐비닛으로 향했다. 캐비닛 근처에 쌓인 합판과 카드보드지를 대충 발로 밀어 치워냈다. 뻐근한 목덜미를 손으로 주무르며 캐비닛을 열자 한창 세일할 때 쟁여놓은 고카페인 음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 좋은 점 하나. 고카페인 음료 브랜드가 존나 많다. 어제는 뱅, 오늘은 락스타, 내일은 킥스타. 단명하기 딱이고 아주 좋네. 손에 잡히는 대로 캔을 꺼내든 재현은 한 손으로 캔을 따며 캐비닛 문을 닫았다.
“···뭐냐?”
손에 들린 캔이 생과일 주스 병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재현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생명수를 뺏어간 이주연을 쳐다봤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한두 번 반복되는 것도 아니고, 처음에야 재현의 기분을 살피며 살랑거리는 얼굴로 그를 구슬리던 이주연은 이제 눈치를 보는 척도 하지 않은 채 뻔뻔하게 생글거릴 뿐이었다. 제 얼굴이 이재현에게 아주 잘 먹힌다는 걸 진작 터득한 탓이다.
“형 건강 챙기기?”
“나는 건강은 됐고 학점 챙기기나 하련다. 좋은 말로 할 때 다시 내놔, 빨랑.”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한 재현은 지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자 방금까지만 해도 웃고 있던 녀석이 대뜸 싸하게 얼굴을 굳히더니 성큼 재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설령 재현이 캔을 뺏어갈까 좁히지 않던 거리를 단숨에 없애버렸다. 주연의 손이 재현의 이마를 짚었다. 이번에 거리를 벌린 건 재현이었다. 금세 따라붙을 줄 알았던 주연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허공 언저리에 위치한 손을 어색하게 내리며 걱정 어린 시선으로 재현을 바라봤다. 재현은 그 눈빛에 마음 한구석이 섬찟해졌다.
나의 바닥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하는 이가 건네는 애정이 무섭도록 달콤해서 위험했다. 선악과보다 더. 최소한 선악과는 먹어도 죽지는 않지 않나.
이재현은 알았다.
이주연의 애정을 먹으면 이재현은 말라 뒈질 거라는 걸.
끝내 이주연의 눈을 피한 이재현이 손사래를 치며 대꾸했다.
“야, 됐어. 나 안 아파.”
“형 얼굴이 너무 하얘요.”
“어, 나 원래 하얘. 그게 내 매력 포인트야.”
“그쵸, 그건 맞지만 걱정되니까요······.”
“어?”
“네?”
이 멍청한 대화는 뭘까. 장르가 이렇게 예고도 없이 휙휙 바뀌어도 되는 거냐고. 결국 대화를 포기한 건 재현이었다. 너 좋을 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재현은 슬리퍼를 직직 끌며 아까까지 앉아 있던 자리로 향했다. 퍽 뿌듯한 얼굴을 한 주연은 손에 쥔 캔을 잊지 않고 죄다 버리곤 재현을 따라 걸었다. 도면 앞에 앉은 재현은 벗어뒀던 안경을 다시 쓰고 검은 잉크 펜을 쥐었다. 주연은 익숙한 듯 옆에 방치된 의자를 하나 끌어다가 냉큼 재현의 옆에 앉았다. 그런 주연을 흘끗 쳐다보고선 자를 대고 검은 선을 그리기 시작한 재현이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은 어떻게 들어왔는데?”
“Sean이 출입증 줬어요. 스튜디오 오갈 때 쓰라구.”
“···여기가 네 집이냐? 그만 좀 드나들어, 건축도 아니면서.”
“월세 얼만지 알아볼까 봐요. 어때요, 같이 살래요?”
“싫은데.”
하, 젠장. 웃을 뻔했다. 재현은 일부러 더 무뚝뚝하게 대꾸하면서 입 안쪽 살을 잘근 씹었다. 하여간 이재현이 아무리 불퉁하게 말해도 꼬박꼬박 거기에 대꾸하는 놈이 이주연이었다. 그래서 더 짜증 났다. 이재현이 그 어떤 영양가 없는 말을 내뱉어도 좋다고 옆에서 맞장구치는 놈이라서 같이 있으면 내가 뭐라도 된 것 같다가도 자신과 다른 세상에 있는 놈을 보면 문득 치미는 저열한 열등감이 재현을 괴롭혔다.
“혀엉, 저 청소 잘해요. 설거지도 잘해요. 취미는 형 챙기기, 특기는 형 따라다니기. 요즘 관심사는 이재현.”
“너 뭐 하냐?”
“룸메 어필이요.”
자기소개서라도 만들려는 양 줄줄 읊는 모양새가 가관이었다. 게다가 형 소리는 어디에다가 떼어먹고 이름을 불러. 재현은 헛웃음을 지으며 펜을 내려놓고 이주연을 쳐다봤다. 세상 무해하게 샐쭉 휘어지는 눈웃음을 가득 단 얼굴이 보인다.
“야, 나 한국에서 쫓겨나서 여기 온 거야.”
그래서였다. 괜히 심술궂게 화제를 돌린 건. 양산형 신데렐라 스토리에서도 더는 안 써먹을 만큼 고전적인 신파로 점철된 인생이 이재현이 사는 현실이란 걸 티 내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묻고 싶었다. 내가 이런 새끼라도 너는 날 좋아할 수 있냐고.
“엄마 돌아가시고 처음 본 아저씨가 그러더라. 자기가 내 아버지란 사람인데 돈 줄 테니까 뒷말 나오기 전에 미국 좀 가 있으래. 다른 건 자기가 알아서 하겠대. 씨발, 진짜 웃기지 않냐. 엄마랑 같이 살던 집도 그 인간이 처분했더라. 이제는 그 인간이 한국에 오라고 해도 못 가. 왜냐면 돌아갈 곳이 없어졌거든.”
나의 바닥은 너의 최저치를 거뜬히 웃도는데.
“근데 욕도 못 해. 그 인간이 가란다고 진짜 간 건 나잖아. 그래서 돈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 뭣 같은 합리화를 했어. 여기서 더 웃긴 건 뭔지 알아?”
“······.”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대미를 장식한다.
“엄마한테 집 지어주겠다고 한 약속은 지키겠다고 건축 붙잡고 궁상떠는 나 같은 새끼야.”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했던가. 아니다. 틀렸다. 고통은 나누면 배가 된다. 물먹은 솜처럼 그 끝을 모르고 몸집을 불리다가 끝내 파멸을 선사한다. 그러니 이 좆같은 시궁창을 구르는 건 나 하나로도 족하다.
이재현은 버석하게 메마른 눈으로 이주연을 응시했다. 누가 봐도 부촌에서 나고 자라 돈 걱정 따위 해본 적일랑 없고 큰 고민 없이 유학을 결정했을 이주연. 세상이 제시하는 선택지 하나하나의 무게에 짓눌려 숨이 턱턱 막히는 이재현과 달리 세상이 쉬운 이주연. 이재현은 여전히 이주연이 어려웠지만. 그가 자신과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는 잘 알았다. 그게 이재현이 이주연을 싫어하는 이유이자 재현이 지닌 마지막 자존심의 한 자락이었으므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좋아해요.”
그러나 모든 시나리오에서 최악을 예상했던 이재현이 단 한 가지 간과한 부분이 있다면 그건 아직 이재현은 이주연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형도 저 좀 좋아해 주면 안 돼요?”
숨이 막혔다. 허공을 부유하던 두 발이 땅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이렇게 황홀하고도 섬뜩한 소속감을 선물한다.
“너 지금 동정이랑 착각하는 거야.”
그러니 밀어내야 한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열등감이 우리의 감정을 좀먹어 버리기 전에.
“······아야, 그게 거절보다 더 아프다.”
맥 빠진 얼굴로 힘없이 중얼거린 이주연이 애써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이 감정이 착각일 리 없다. 이재현은 이주연의 여름이고 겨울이었다.
* * *
처음엔 궁금했다. 이 외딴곳에 저 말고도 한국인이 또 있다는 사실에 흥미가 돋았을 뿐이었다. 가벼운 호기심이 전부였다. 그래서 쉽게 잊었다. 어깨를 툭 친 친구가 어딘가를 눈짓할 때까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Hey, there!”
훈련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커먼스 근처 널따랗게 펼쳐진 잔디밭 부근이었다. 주연은 친구의 시선 끝을 따라간 곳에 한국인이 서 있는 걸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그러고 보니 한국인이 하나 더 있댔지. 주연은 친구의 등을 아프지 않게 치며 장난스레 대꾸했다.
“I don’t know all Koreans. Are you a racist?”
친구는 기겁하며 부정하더니 네가 다른 한국인이 궁금하다고 하지 않았냐며 툴툴거렸다. 물론 그랬던 기억이 전혀 없는 주연은 찬찬히 과거 대화를 되짚어봐야 했다. 그러는 사이 주연과 그 사람의 거리가 서서히 좁아졌다.
“···사아랑이, 지나가면-”
주연은 생각을 멈췄다. 귀를 스쳐 지나가는 나지막한 허밍. 주연은 다급히 뒤를 돌아봤다. 이미 저만치 가고 있는 그 사람이 그제야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하얀색 캡 모자, 바람에 잘게 흔들리는 하얀 이어폰 줄과 하얀 셔츠 자락. 착각일까. 언뜻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온통 하얘서 눈이 시렸다. 그림자가 길었다.
그날부터 이주연은 저도 모르게 눈으로 그 사람의 자취를 쫓았다.
“오늘도 무표정이네······.”
그 사람은 좀체 웃는 법이 없었다. 고작해야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 것 말고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보지 못했다. 무언가가 그려진 얇은 종이들을 잔뜩 들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거나 뭐가 그리 바쁜지 무표정으로 걸음을 재촉하기 바빴다. 사실 그마저도 자주 보기 어려웠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캠퍼스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국제학생회부터 풋볼 팀까지 온갖 곳 종횡무진 불려 다니는 이주연은 그 사람이 더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자신과 같은 한국인이라서, 그다음엔 자신과 다른 사람이라서. 이제는 그 사람의 사소한 습관까지 눈에 익었다. 가령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면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고, 오른쪽 다리를 떨고, 다소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긴다는 것들. 한동안 고집하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어느새 스트로베리 아사히로 바뀌어 있다든가 하는 것들.
아, 웃는 얼굴 보고 싶다.
감정의 자각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그냥 여느 날과 다름없이 평범하게 흘러가는 하루였다. 다만 이재현을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마저도 종종 있는 일이라 그렇게 유의미한 오차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냥 알았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쳐다본 하늘은 먹빛으로 물들고 있었고 이주연은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다.
“Huh? Are you Korean?”
친구의 아집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들어간 댄스 동아리에서 그의 유일한 친구나 마찬가지인 Sean을 만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이주연이 그간 봐온 그 사람은 이따금씩 공허한 표정을 짓곤 했는데, 그 잠깐의 공백 속에 주연이 느낀 건 그 사람은 다른 이를 돌아볼 마음의 여유조차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다가가지 않았다. 그 사람은 자신을 알지도 못하는데, 같은 한국인이라는 변변찮은 핑계 하나 들고 찾아가기엔 이주연은 생각보다 그 사람을 많이 좋아했다. 섣불리 그 사람의 생활을 들쑤시고 싶지 않을 만큼. 그래서 나름 숨기려 애썼지만, 이미 이름을 찾은 감정은 자꾸만 밖으로 새어 나왔다. 주연이 말하지도 않았는데 Sean이 눈치챈 건 절대 의도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주연보다 더 신이 난 듯한 Sean은 너는 이제껏 Jerry가 만난 사람들과는 다르게 좋은 사람이니까 Jerry도 좋아할 거라며 자신만 믿어보라 호언장담을 했다.
이주연은 두 가지를 깨달았다.
하나, 그 사람의 이름은 Jerry였다. 아마 이곳에서 오직 저만 온전히 부를 수 있을 그의 한국 이름을 알고 싶어졌다.
둘, 연애를 했단다. 아니, 하고 있단다. 그 사람이.
그래서 이주연은 배알도 없고 속도 없는 놈처럼 굴기로 했다. 이 관계의 추는 한참 전부터 이재현에게로 기울어져 있었고 주연은 기꺼이 밑지는 게임을 시작했다. 이주연은 이미 패자였기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가 재현을 보며 간절히 소망한 것은 단 하나였다.
웃으면 좋겠어요. 근데 그게 나 때문이었으면 해요.
그러므로 재현의 날 선 화두에 주연이 답할 수 있는 건 애초부터 정해져 있었다.
“좋아해요. 그러니까··· 형도 저 좀 좋아해 주면 안 돼요?”
* * *
“Damn, what the heck! Are you fucking crazy?”
귀찮다는 듯 대꾸도 포기한 재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합판을 커팅기에 올려놓기를 반복했다. 결국 무어라 중얼거리며 씩씩대던 Sean이 커팅기의 전원을 꺼버리고 나서야 재현은 그를 쳐다봤다. 재현도 스스로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거지 같은지 잘 알고 있었다. 며칠 밤을 새웠으니 당장 무덤에서 걸어 나온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피죽도 못 얻어먹은 꼴이었다. 고카페인을 혈관에 다이렉트로 때려 부었으니 이런 몰골인 게 당연했다. 말리는 이가 사라진 재현은 요 며칠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굴어댔다.
“What's wrong with you all of a sudden? You've been dating so well!”
“You won't know.”
“No cap, it was the first time you brought someone else to the studio!”
그간 연애를 잘만 해댔으면서 갑자기 왜 이러냐는 말에도 무표정을 유지하던 재현이었지만 건축 스튜디오에 다른 사람을 데려온 건 처음이었다는 말에는 결국 얼굴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입안이 썼다. 거의 발악하듯이 걔가 싫다고 했으면서 마음을 참 많이도 내어줬구나 싶었다. 재현은 전원이 꺼진 커팅기를 멀거니 바라봤다. 잘리다 만 합판이 커팅기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쪼개질 듯 달랑거리며 위태로웠으나 용케 갈라지지 않았다.
재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건 정말 질색이었다. 나보고 어쩌라고. 나는 할 만큼 했어. 이미 충분히 좆같이 구르면서 살고 있잖아. 겉옷을 집어 든 재현이 바람을 쐬고 오겠다는 짤막한 통보만 남긴 채 밖으로 나섰다. 사위가 어두웠다. 지금이 몇 시더라. 시간 감각은 뒈진 지 오래였다.
“···형.”
한창 시즌 중이라 그런가. 남색 경기복을 채 갈아입지도 못하고 바로 뛰어온 듯한 모양새였다. 누가 연락해서 왔는지가 불 보듯 뻔했다. 재현은 여전히 그쪽을 쳐다보지 않은 상태에서 웅얼거리듯 말했다.
“왜 왔냐.”
“왜 그러고 있어요.”
“나 같은 거 걱정하지 말지.”
지극히 무감정한 재현의 말에도 주연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저 수많은 말 중 해야 할 말과 하고 싶은 말을 가려내며 재현에게 할 수 있는 말을 골라냈다.
“······다시는 저 같은 거 좋아해 달라고 안 할게요. 아무 일 없던 척할게요. 그러니까,”
“나 같은 거랑 너는 달라. 나 좇겠다고 너까지 시궁창 처박히려고 하는 거 보고 싶지도 않고.”
“···형.”
이주연의 당황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한 음절이었다. 재현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그 애 앞에 가 섰다.
“그래서 나는 네가 싫어.”
11월의 위스콘신은 변덕스러웠다.
“근데 또 좋아해.”
어제까지만 해도 체감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으면서 오늘은 난데없이 20도 근처를 웃돌았다.
“아마 나는 안 변할 거야. 원래 이렇게 생겨 먹었고 평생을 이렇게 살았어. 그냥 이게 나야. 그러니까··· 안 돼.”
말을 마친 재현이 주연을 가만히 쳐다봤다. 둘 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재현이 고개를 숙였다. 밤이 길어진 11월에 때맞춰 놀러 나온 이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진다. 귀가 먹먹했다.
“차라리 네가 나한테 쓰레기처럼 굴었으면, 씨바알··· 내가 너를 이렇게 안 좋아했을 거 아니야. 나는 전부를 못 주는 새낀데 왜 다 주고 싶게 만들어, 왜······”
“······미안해요. 다 제 잘못이에요. 제발, 울지 마요, 형···”
아무리 사랑해도 죽지 않는 꿈을 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