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길었다.
미래가 불분명하다는 생각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보장된 미래랄게 없는 업계였지만 그동안 쉼 없이 달리느라 그런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어떤 순간부터는 노력에 대한 성과가 눈에 보일 만큼 진해져 머리 아픈 고민은 뒤로 미룰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떤 기로에 놓인 시점이었고, 팀원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푹 쉬며 재충전 시간을 갖자는 의견이 나왔다. 모두 합숙소에서 짐을 꾸려 저마다 본래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 쉬고 돌아와 가벼운 마음으로 같은 의미의 도장 찍자고, 그런 다짐 했더랬다.
방에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데뷔 이래 이렇게까지 송도에 오랜 시간 머무른 적 있었나. 연습생 때도 없었는데….
우리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다시 콘서트 하자. 다 같이 하자. 전원 다 같이. 흩어지기 전, 멤버들이 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조금 더 해보자.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욕심 내보자. 다인원 그룹이 한마음 한뜻이 되기도 쉽지 않은데 우리는 꼭 마음 맞춘 사람들처럼 더 큰 성공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수 차례 써 내려간 다짐을 듣고도 불안이 따랐다.
늘 함께하다가 긴 시간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어서일까. 원치 않게 컴백이 밀리면서 집에서 쉬는 기간이 조금 더 길어졌다. 예정보다 더 쉬니까 공백을 불안이 파고들었다.
머리가 차가운 아침엔 괜찮았지만 밤이 되면 또 슬그머니 그런 감정이 고개를 내밀었다.
누군가의 속내는 사실 그렇지 않은 거면 어쩌지. 나만 이런 마음이면 어쩌지. 우려가 가슴을 찔렀다.
고민이 많아서인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다롱이 붙잡고 쓰다듬다가 나가고 싶은 눈치길래 잔뜩 서운한 표정 한 번 짓고 방문을 열어 줬다. 토, 도도도……. 바닥에 찍히는 작은 발바닥 소리가 유유히 멀어진다.
우리는 어떻게 될까.
숙소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본가 잠자리가 꼭 친구 집에서 자는 것처럼 낯설었다. 다롱이까지 방 밖으로 보내고 어둠 속에서 오랜 시간 뒤척였다.
장시간 검은 천장만 보며 고요한 불안으로 시간 죽이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낮은 진동 소리에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누구지? 멤버? 누가 또 잠 못 이루고 있는가. 예상되는 몇 명 얼굴 떠올려 봤다.
꽤 깊은 생각으로 가고 있던 차에 반가움이 들어 얼른 액정 화면 들여다봤다.
……어?
그 화면에 뜬 이름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주 연.
송도를 초월한 마음
FORD
새벽 한 시.
예상치 못한 이름에 괜히 목이 탔다.
주연과는 오래 함께 살았지만 깊은 얘기를 많이 나눌 만큼 대단히 견고한 사이는 아니었다. 누구한테 속내 잘 털어놓는 편도 아니었고 털어놓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 굳이 멤버에게 감정을 옮겨 함께 힘들어하길 원치 않는 타입인 것 같았다.
서로가 어떤 고민하는지 잘 알고 있었으나 그걸 말로 하기엔 조금 간지럽고, 그저 묵묵히 옆에 있어 주는 게 더 큰 위로가 된다는 걸 알았다. 때로는 말보다 그저 존재하는 게 더 나으니까. 우리는 서로를 그런 식으로 지지하는 편이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분위기메이커를 자처하지만 정작 힘들 땐 둘 다 군말 없이 해내는 타입이었다. 불평불만 가져봤자 결국엔 각자가 이겨내야 할 산이라는 걸 깨닫는 연차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개인 스케줄도 워낙 많은 멤버라 가끔 혼자 불 꺼진 거실에 소리 없이 들어올 때면 말 몇 마디 주고받았다. 불 꺼진 고요함을 느끼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
‘주연, 고생했어.’
그에 다가와서 주먹이나 어깨 부딪히며 알아주는 게 고마운 듯 씨이익 웃었다. 역시 현재 형. 그런 말이 히읗 가득 담아 따라붙었다.
그리고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는 식이었다.
전화를 받기까지 꽤 오랜 시간 고민했다. 전화벨이 끊길 듯 끊기지 않고 끈질기게 울렸다.
깊은 속내를 털어놓은 적 없었고, 저 또한 어떤 고민이 생긴다고 해서 그를 붙잡고 푸념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이 전화는 좀 긴장이 되었다.
팀 하기 싫다고 하면 어떡하지? 무슨 중대한 고민을 털어놓으려는 걸까? 아니면, 혹시 딴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회유하려고?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아서 얼른 베란다 밖으로 뛰쳐나가 목을 가다듬고 전화 받았다.
응, 주연아.
대답하며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오래 입 다물고 있었더니 목이 잠겨 소리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아.
다시 뱉어보려는데 그 너머 주연이 먼저 말을 시작했다.
“여기 오니까 뭐가 제일 좋은 줄 알아? 별들이 정말 쏟아질 듯이 많이 보여….”
새벽 공기 잔뜩 묻은 이주연의 목소리. 말갛고 때 묻지 않은 한 톤 붕 뜬 목소리. 잔뜩 상기된 것처럼….
진짜 이주연 다운 문장이었다. 그의 말은 언제나 고루한 법 없이 확률을 절대적으로 벗어난다. 어떤 세계에 머물고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없고 시 같기도 한 문장이 귓가를 간지럽힌다.
조금 엉뚱한 시작에 무슨 답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입꼬리가 옅게 올랐다. 웃음이 났다. 어떤 안도감이 확 끼쳤다. 불변인 이주연에 대한.
침묵에도 주연의 말이 꿋꿋하게 이어졌다.
“……바람도 진짜 차갑고, 가만히 주변 소리 듣고 있으면 안정이 돼.”
…나는 그래서 가끔 숙소 앞에서 귀뚜라미가 울면 엄마 생각이 났어. 옛날에 엄마랑 집 앞에서 벌레를 관찰한 적이 있는데…….
…우리 집에 블루베리 나무를 심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 내 키가 진짜 블루베리 나무 보다 작았단 말이야. 엄마한테 물어봤어. “여기서 블루베리가 자란다고요?”, “그럼 몇 밤 자면 먹을 수 있어?”
엄마가, 주연이가 이 나무 보다 커지면 먹을 수 있다고 그랬는데…….
……오자마자 오랜만에 프메 보내려고 앨범을 막 뒤졌어. 근데 그때는 잘 몰랐는데….
끝 모르고 재잘재잘.
화수분처럼 계속 새로운 이야기들을 속닥거렸다. 가끔 잠이 오지 않을 때 틀어 놓는 세 시간짜리 ASMR처럼 단 한 번도 대답 명확하게 않는 전화 상대를 두고 혼자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적절한 대답을 더더욱 찾지 못하겠다.
이주연이 왜 이런 말을?
우리가 뜬금없이 전화해서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를 털어놓을 사이였나. 의문이 생겼지만 말을 끊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서 한참을 가만히 듣는다.
그의 이야기들이 잔잔한 위로가 된다.
주연아, 너 목소리가 엄청 좋다.
얘기를 끝마치면 그런 말 한 번 꼭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침을 삼킨다.
폭신폭신한 라디오는 이번엔 언제고 봤던 별에 관한 다큐멘터리에 대해 털어놓는다. BBC에서 그게 방영을 어-엄청 오래 했거든, 아. BBC가 다큐멘터리 명가라고 예전부터 유명했잖아, 그게 사람들이 켜 놓으면 잠이 잘 온다고 유명한 다큐였대. 근데 나는 그게 너무 재밌어서 잠이 안 오는 거야. 거기서 처음 별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고루하다고 생각 했을 법 한 얘기였다. 이주연의 관심사는 저와는 아주 달라서 그가 눈을 반짝이며 제게 또 물어온다면 몇 번 그러했듯이, 다음에 알아볼게. 방어적으로 답하고 말 것 같은 주제였다.
살면서 한 번도 흥미 갖지 않았던 관심사인데 지금은 무슨 이유인지 흥미가 생겨 잠이 싹 달아났다.
그 대목에서 확실히 알았다.
이주연이 저에게 걸려던 전화는 분명히 아니었다는 걸.
나 재현이 형인데? 그렇게 말하면 얼마나 웃길까. 놀려줄 생각에 조금 더 즐거워진다. 그의 반응 상상하니까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기 위해 이를 꽉 물었다.
이제 슬슬 그의 말을 끊고 사실에 대해 밝혀야겠다고 생각한다.
얘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누군지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대답도 안 하고 있는데 한 번 의심도 없이 계속 말을 하네. 너 나한테 전화 걸었길 망정이지 다른 사람한테 이랬으면 어쩌려고 했어?
실컷 웃고 난 다음엔 형 답게 경각심에 대한 충고도 한 마디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랬는데.
앞서 한 모든 얘기는 이 문장을 꺼내기 어려워 빙빙 돌려대던 말이었다는 걸 깨닫게 하는 주제가 나온다. 이주연의 말이 좀 더 느려지고 한숨처럼 긴 숨을 뱉는다. 그에 집중하고 있었더니 덩달아 호흡과 시선이 요동친다.
우리의 얘기.
우리 팀의 앞날에 대한 이야기.
“근데 나는 멤버들한테 티를 잘 내는 스타일이 아니잖아. 그래서 사실 불안함이 있지. 이걸 언젠가 극복해야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정말 닥쳐오니까 뭔가….”
“…….”
“다들 말은 좋다고 했지만 사실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어. 나는 팀적으로 좀 더 해보고 싶은 게 맞는데 이게 내 욕심인 거 같단 생각도 들고…….”
그렇다.
이주연은 정말 누구한테 이런 말 잘 털어놓지 않는 사람이어서. 그의 마음의 방을 멋대로 열고 들어가 깊은 비밀을 꺼내 보는 것 같단 느낌이 든다. 내가 이렇게 깊게 들어도 되나? 멤버에겐 할 수 없는 얘기라 제 절친한 친구 붙잡고 털어놓는 걸 텐데. 내가 이걸….
놀리려던 생각은 없어지고 다시 입이 다물어졌다. 머릿속에서 꺼낸 것과 다를 바 없는 생각들이 그의 입을 통해 나오고 있다. 저 또한 매일 밤 침대에 누워 몇 십번이고 했던 걱정들. 한 번도 불안과 고민을 제대로 털어놓은 적 없던 그에게 들어서인지, 마음이 일렁인다.
동생에게 마음이 쓰여서? 팀 내 형으로서 무언가 해주지 못 했다는 생각 때문에?
아니 그보다 이주연도 나랑 같은 생각이었다고?
결국 타이밍을 놓치고 무언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한마디도 못 얹고 있는데, 끊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지 주연이 화면을 뒤늦게 발견한 소리를 낸다.
“어? 현재 형? 뭐야, 나 형한테 전화했어?”
“어? 어. 야 주연아, 너 나한테 걸었어!”
“……진짜? 뭐야!”
“뭐긴 뭐야 인마!”
진짷? 뭐얗.
주연의 당황한 얼굴은 보고 있지 않아도 제 눈에 보이는 것 같다. 푸하학, 웃음이 터졌다.
“야. 주연아. 너 계속 말해서 중간에 끊고 설명하기가 애매했어. 들어서 미안해.”
“아, 아니에요.”
“누구한테 걸려던 거 잘 못 걸었어?”
끅끅.
“아니 형 이름 위에 ‘재한’이라는 내 친구.”
“미치겠다.”
웃는 소리 가득한 문장을 서로에게 전한다.
“우는 거 아니죠.”
“아 진짜 웃기다 이주연. 레전드.”
“그니까.”
“잘못 누른 거라고?”
“응.”
“아니 내가 대답 한 번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아무 의심도 없이 계속 떠들어. 너 이렇게 말 많은지 처음 알았어.”
“아, 친구가 말수가 원래 없어. 그냥 평소처럼 잘 듣나 보다 하고 나도 할 말 했지.”
“배 아파.”
정말 한참을. 둘 다 눈물이 그렁할 만큼 웃었다. 잠깐의 정적에 어색함이 덮치길 우려하는 사람들처럼 정말 치열하게 한 시도 오디오 비우지 않고 떠들었다.
응, 알았어. 너 잘 있지? 네. 형은? 나도 잘 있지. 그래 회사에서 봐. 이제 2주 있으면 보겠네. 으응. 들어가. 응 형도. 잘 자. 오냐. 감기 조심하고. 너도.
통화를 끝내자 다시금 고요함이 찾아왔다. 미친 듯이 웃다가 한 순간 적막해져서 인지 조금 씁쓸한 기분까지 든다.
캄캄한 천장을 응시한다. 눈을 괜히 꿈뻑, 꿈뻑.
흙바닥 이따금 발로 툭, 툭 긁으며 조곤조곤 떠드는 주연의 목소리가 생경했다.
불안과 열망, 욕심인지 열정인지.
고집인지.
그 목소리가 파도처럼 덮쳤다. 자꾸만 제 가슴에 일렁였다. 이불을 막 뒤척였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누군가의 여린 모습 발견하면 그때부터는 그 사람에게 한없이 마음이 쓰인다. 이주연은 단단하고 심지가 굳어서 굳이 제 바운더리에 넣지 않아도 알아서 해내는 동생이었다. 근데 속내를 듣게 된 지금은. 자꾸. 이주연의 연약한 점들이 마음을 찔러서.
통화를 끝내고 계속 주연을 신경 쓰다 잠들어서인지 꿈에서도 그가 나왔다.
──────────
팀원 모두 들어있는 단톡방 알림이 웅웅 울린다. 평소에도 단톡방에서 말을 많이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별 대수롭지 않게 알림 넘기려다가, ‘이주연’이란 글자가 발화자로 등장하면 저도 모르게 화면을 누른다. 주연은 유튜브에서 보던 웃긴 영상 링크를 공유하며 같이 웃길 종용 했는데 대부분은 제 취향이 아니거나 이미 본 것들이라 조금 식상하게 느껴지는 영상이었다.
주연이 그걸 올리고 나면 멤버들이 연이어 ‘ㅋㅋ이미 봤음.’, ‘웃기다.’ 같은 류의 반응을 보이고는 했다.
그런 걸 그냥 웃고 잘 넘기는 편이었지만 이주연을 신경 쓰고부터는 어쩐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서.
「이주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개웃김」
세 개의 메시지를 남겼다.
주연이 한참 후에 제 답장 발견했는지, ‘역시 브로~ㅋㅋ.’ 답한 걸 보고 나서야 마음이 편안해져서 휴대폰 내려놓고 잠이 들었다.
웃음이 났다.
──────────
엄마와 쇼핑을 하고 와서 거실 소파에 길게 몸을 늘어뜨렸다. 무심코 돌리던 채널은 한 음악방송 채널에서 멈춘다. 가수들이 익숙하다 했더니 제 그룹이 활동하던 시기의 재방송이었는지 이내 너무도 익숙한 팀 무대가 나온다.
주연이 멋있네.
저 보다 걔를 더….
또 한참 들여다봤다.
──────────
왜 이주연이 이렇게까지 신경 쓰이는가.
근본적인 물음에 도달한다. 얘를 왜 이렇게까지 의식하고 있는 거지? 암만 소외되는 멤버 못 보고, 힘들어하는 멤버 가만히 못 두는 성미라지만 다롱이랑 산책하면서까지 이주연 얼굴이 떠오를 일이냐고요.
통화 이후로는 자꾸만 주연의 덤덤하고 말간 목소리가 제 귓가에 들렸다.
그래서….
그래서 내린 결론은….
한 번 가야겠다고.
멤버 누구는 갔다더라, 전해 듣기만 했지 단 한 번도 엄두 내지 않았던 곳에 방문해서 이주연이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는지 두 눈으로 봐야만 마음이 평온해질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
이른 아침이었다.
주연이 받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전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는지 부스스한 음성으로 말했다.
으응, 형.
“주연.”
“무슨 일 있어?”
“…….”
“왜에?”
“…나 광주 터미널에 내리면 네가 딱 데리러 나오냐?”
대체 무슨 소리인지 파악하는 듯한 5초간의 정적.
그 정적이 그의 황당하고 곤란하다는 심정을 내포하고 있는 듯했다. 이 형이 여길 왜 와. 이재현이 간다고 한 적도 없었고 갈 거란 예상도 한 적이 없을 테니까.
“……형 온다고?”
“응. 가도 돼?”
“…당연히 되죠. 와.”
“데리러 나올 거야?”
“응. 엄마 차 끌고 갈게.”
“대박 황송하네. 이제 운전 좀 늘었어?”
“…그때보다는.”
주연이 운전하는 차 타본 멤버들이 그룹 채팅방에서 이주연 운전 신이다, 그렇게 놀리던 일 떠올리며 물었다. 주연의 답 듣고 한 차례 웃고는 모자 눌러 쓴 채 집을 나선다.
간다.
──────────
대체 왜 버스에 올랐을까.
심지어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어떤 동질감과 연민? 무언가 안쓰러움을 느끼는 심정이라기엔 오버스러운 감정이 저를 버스에 오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꼭 가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송도에서 초월까지 바로 가는 버스가 당연히 없어서, 버스를 두 번 환승해야 한다고 했더니 통화하는 동안 이것저것 검색해 본 모양이었다. 형. 그 M6405를 타면 양재꽃시장에서 내릴 수 있대요. 거기서 또 갈아타야 되거든. 그러면 그냥 건너서 서 있어. 내가 거기로 갈게.
어? 거기까지 온다고?
웅.
차 끌고 거기까지 온다고? 너무 멀리까지 오는데? 괜찮겠어?
응. 어차피 운전하면 그게 그거예요.
.
얼결에 이주연을 기다렸다. 차가 조금 막힌다기에 계속 막연히 서 있기가 뭣해서 안으로 걸었다. 꽃 시장 안에 들어가 주연의 집에 사 갈만한 꽃이 없을까 서성였다. 빈손으로 가기 좀 그랬는데 잘 됐다. 어버이날 선물했던 꽃다발을 생각해서 7만원 어치 달라고 했더니 도매가랑 차이가 상당한지 진짜 가슴팍 한 아름 만발한 거대한 다발이 안겨졌다.
그걸 들고 이주연을 기다렸다. 조금 후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고, “어엉, 나 지금 입구에 노란 꽃다발 안고 서 있어.” “꽃다발?” “으응.” 나도 이렇게 거대할 줄은 몰랐거든.
남자가 꽃 끌어안고 있어서인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민망함을 견디며 후드 뒤집어쓰고 목도리에 푹 파묻혀 있으려니, 잠시 후 새까만 SUV 차량이 앞에 서고 운전석 창문이 지이잉 내려온다.
“형!”
이주연이 용케 차를 몰고 저를 찾아냈다. 얼른 그 차량에 몸을 싣는다. 와, 이 겨울에 꽃이 있어? 향기 엄청 좋다. 이건 수입산인가 봐. 어머니 꽃 좋아하시겠지? 너무 내 취향으로 샀나. 엄-청 좋아하실걸. 우리 집에 식물 진짜 많아요. 그래? 다행이다. 아버님 선물을 안 사서 좀 그렇긴 한데. 형. 빈손으로 와도 돼. 뭐, 어디 인사드리러 가는 것도 아니고. 푸하!
…생각보다 도란도란 끊임없이 떠들었다.
동생은 방학 기간이라 친구들이랑 유럽 여행 갔다는 얘기부터 시작해서, 멤버들이 놀러 왔을 때는 어디를 데리고 갔었는지. 이쪽으로 쭉 가면 졸업한 초등학교가 나오고 저쪽으로 가면 유명한 쌀국숫집이 있다는 얘기. 분위기 좋은 카페는 어디에 있고 아버지의 지인분이 하는 캠핑장에서 얼마 전 고기를 구워 먹었다는 얘기.
가족과 사이가 돈독하고 사랑이 많은 집이었다. 저 또한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을 중시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말이 달갑게 들렸다. 아 진짜? 근데 방금 지나온 데도 좋은 거 같아. 글램핑장? 응, 다음에 가족들이랑 같이 와봐야겠다.
둘이 있으면 묘하게 어색하려나. 잠깐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가는 동안 말이 끊이지 않아서 집까지 가는 시간이 찰나처럼 느껴졌다.
집에 도착해서는 주연의 어머니에게 그 거대한 꽃다발 안겨드리느라 분위기가 풀어졌다. 어머. 재현아, 고마워. 꽃 선물 너무 좋아해.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그의 부모님과 앉아 밥을 먹었다.
입맛에 맞아? 네. 엄청 맛있어요. 잘 먹네에.
밥을 먹고 난 뒤엔 주연네 집 강아지와 한참을 놀았다. 제 몸에서 다롱이 냄새가 나는지 자꾸만 코를 박고 비비적거리는데 몸집이 작고 얌전한 강아지를 끊임없이 쓰다듬었다.
주택 마당에는 거대한 나무가 드리웠다. 그 밑에 평상과 캠핑용 테이블, 의자가 멋들어지게 놓여 있었다. 거기 앉아 아버님이 핸드드립으로 내려주시는 원두커피를 마셨다. 무릎에 강아지를 올려두고 주연과 그의 아버지와 셋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눴다.
──────────
오래 있었다고 생각지 않았는데 저녁 밥상이 차려지고 있었다. 마당에서 고기 구워 먹을 건데 해가 지면 너무 추우니까 조금 이른 저녁을 먹자고 하셨다. 얼른 주방으로 가서 여러 주방 집기들 나르고 있으려니 어머니가 등 몇 번 두드려 주셨다. 재현아, 너 엄청 자상한 타입이구나. 기특해라. 우리 아들 하면 좋겠다. 그럴까요, 어머니 아들 할까요? 답하며 아랫니 드러내 웃었다.
아버님이 구워주시는 고기를 받아먹으며 앉아있을 수만 없어서 집게를 들고 그 옆으로 가 같이 구우려고 폼 잡았더니 극구 다시금 앉히셨다. 원래 고기 굽는 거 좋아해요. 대답하며 몇 번 더 해보려다가 제지당하자 포기하고 앉아 열심히 고기를 먹었다. 이주연이 그런 재현을 바라보며, 재현이 형 고기 잘 꾸워. 우리끼리 있으면 형이 다 구워 줘! 그걸 되게 자랑하듯이 말을 해서 또 웃었다. 이주연도 집에 있으면 초등학생처럼 말할 때 있구나.
“재현이 소주 좀 마시나?”
“아, 네. 살짝 마십니다.”
그 미묘한 대답에 웃으셨다. 아버님이 따라주시는 소주에 냉큼 일어나서 잔 받았더니, 편하게 마시자고 웃으셨다. 모두의 잔에 소주가 들어찼다.
그거 그냥 한 컵 꼴깍 넘겼는데, 인상 구겨지는 걸 보셨는지 맥주를 들이밀며 물으셨다. “섞어줄까?”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네.”
──────────
왜 그렇게 주는 족족 받아먹었는지 모르겠지만, 추운 곳에서 고기와 함께 목으로 넘기니 몸이 뜨끈해지는 느낌이 좋아서 그랬던 것 같다.
다 같이 일어나 평상 위를 대충 정리했다. 얼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이주연이 뒤에서 상완을 툭, 잡았다.
“…왜?”
“별 보러 갈래?”
술이 적당히 들어가서인지 행동이 느려졌다. 고개를 천천히 돌려 묻자, 걔가 별 보러 가자는 소리를 했다.
이주연은 전화 잘못 걸었을 때도 본가에 오면 별이 쏟아질 듯 잘 보여서 좋다는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그의 설명만으로도 그려지던 그 하늘이 궁금하긴 했었다.
어디로?
그가 턱짓으로 집 위를 가리켰다. 아버님이 들어가려고 하다 말고 보고 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옥상에 올랐다.
주연의 아버지가 옥상으로 아들의 두터운 플리스 재킷을 던져 주셨다. 고기 먹으면서 이미 어머니에 의해 시골 할머니가 아끼는 강아지처럼 담요 줄줄 둘러주신 터라 충분했지만, 진짜 춥긴 했으므로 또 받아서 껴입었다.
이 집 방문객들에게 익숙한 코스인지 몰라도, 평상 위를 비추고 있던 랜턴을 내리자 완전히 암흑이 되어 밤하늘의 진가가 드러났다.
“와……. 미쳤다.”
여기는 가로등이 없어요.
왜?
주변에 논이 많잖아요. 벼가 밤낮을 구분해야 잘 자라는데, 가로등이 켜져 있으면 계속 낮인 줄 알고 웃자란대요.
헐, 그래서 이렇게 깜깜하구나.
응. 그래서 별이 잘 보이는 거예요. 저거 봐. 카시오페이아. 저게, 북극성.
와 진짜 대박. 나 이런 거 진짜, 처음 봐.
……아름답죠. 나는 그래서 이 동네가 진짜 좋아요.
진짜. 멋있다. 와.
이주연도 옆에서 쉬지 않고 계속 홀짝홀짝 마셨으니까 취기가 올랐을 거다. 목덜미 뻐근할 만큼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런 제 반응을 관찰하려는 듯 이주연의 시선이 자꾸만 얼굴에 와서 닿는 게 느껴졌다. 우와. 우와. 계속 그런 소리를 하니까 옆에서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렸다.
형이랑 이러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왜.
여기 올 거란 생각을 못 했어.
한 번 오고 싶었어. 다른 애들은 왔었잖아.
그치, 근데 형이 올 거란 생각은 못 해서…….
……그냥, 계속 생각났어. 너랑 전화 끊고. 이주연 고민 많구나 하고. 너랑 그런 얘기 해본 적이 별로 없었잖아?
맞지. 형도 나한테 그런 얘기를 안 하잖아요.
응. 내가 먼저 좀 할 걸.
형 나 지금 너무 감동인데.
왜 그렇게 생각났는지 모르겠어. 근데, 전화 끊고 그 생각 계속하다가 자니까 꿈에 네가 나오더라.
그래?
응.
……우리 꿈에서 뭐 했어?
온통 캄캄한 어둠이었다.
하늘에 존재하는 달과 별들만이 우리를 비췄다. 그 아래서 눈이 마주쳤다.
꿈에서 뭐했어? 묻는 이주연의 목소리가 좋았다. 어? 뭘 했냐고?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어야 하는데 갑자기 시선을 돌려 마주 보는 바람에 분위기가 묘해졌다.
어떠한 성적인 뜻도 내포하지 않았다는 걸 아는데 갑자기 묵직한 뭔가가 올라와 가슴이 뜨거워졌다.
뭐지.
눈이 마주치고 고요해지자 둘 다 입에 호선 그리며 웃었다.
야, 왤케 느끼하게 말해.
형은요, 지금 눈이 엄청 반짝였는데.
아.
…….
숯불 냄새와 요란하게 둘린 화려한 패턴의 담요. 무드라고는 하나도 없는 장소에서, 나는 왜 이주연이 잘생겼다고 생각했을까.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
방에 이불을 펴고 누웠다.
“거실에서 넓게 자라고 하고 싶은데 좀 추울 거 같아, 재현아. 주연이 방에서 오붓하게 자.”
“네에, 좋아요. 안녕히 주무세요.”
이주연의 방이 엄청 크지는 않은데 추운 건 싫었으므로 냉큼 좋다고 해버렸다. 일단 자보고 불편하면 거실로 나가면 되니까.
나란히 누웠다.
주연의 어릴 때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천장은 온통 야광별 스티커가 빼곡하다.
“이햐, 이주연 별 지인짜 좋아하네.”
“아 저거? 저거는 초등학생 때 붙인 거예요.”
“그때도 별 얘기만 한 5분 하드만.”
“아. 근데 형, 나 그때 좀 감동했다.”
“왜?”
“형이 내가 알아차리기 전까지 다 들어줬잖아.”
“야, 나 원래 사람 말 잘 들어!”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알아. 그냥.”
“웅.”
“…자. 많이 마셔서 졸리다.”
.
“자?”
“아니,”
“나 형이 와줘서 좋아.”
“다행이네.”
“형이 왜 왔는지 알아요. 고마워.”
“나 너 되게 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 보면 또 아닌 거 같아.”
“나처럼 빠른 사람이 없는데.”
“말하면서도 웃기지.”
“응.”
.
고기 먹으면서 덜덜덜 떨던 게 안쓰럽게 보였는지 보일러 온도가 절절 끓을 만큼 높게 올랐다.
계속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다가 잠들었는데, 꿈에서 불지옥 용암에 목욕하다 말고 깨어나 덮고 있던 이불 위로 기어 올라갔다. 갈증이 났다. 몸을 여러 번 뒤척였다. 이리저리 특히 더 뜨거운 지점을 피해 달아나다가 이주연과 살이 닿았는데, 그의 피부가 그나마 시원해서 거기 찰싹 발을 대고 안착했다. 깊이 잠들었는지 곤히 눈을 감고 있었다.
얘는 매일 여기서 자서 이게 괜찮은 건가?
이 끓는 바닥에서 피부가 시원한 게 신기해서 주연의 팔을 만졌다. 말랑말랑. 촉감놀이 하는 애처럼 만지작거리다가 그래도 미동이 없어서 아예 몸 가까이 붙였다. 주연의 긴 팔에 찰싹 달라붙어서 의지하며 눈을 감았다. 그제야 좀 시원해서 잠이 오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 만지작만지작.
아. 자는 애를 너무 주물렀나. 뒤늦게 좀 겸연쩍은 마음이 들어서 얼른 뒤돌아 누웠는데, 자는 줄 알았던 이주연이 뒤로 몸을 가까이 스윽 붙였다.
“더워서? 나가게?”
“…안 잤어?”
“누가 자꾸 주물러서.”
“아.”
미안. 그렇게 말하며 좀 더 떨어지려고 했는데 이주연이 뒤에서 긴 팔을 감아왔다.
“시원하면 만지면서 자. 나가면 감기 걸린다.”
귓가에 또렷이 박히는 목소리에 잠이 확 달아났다. 뭐뭐뭐라는거야. 속으로는 대체 무슨 낯간지러운 소리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침착한 그의 톤 때문인지 제 반응이 오바하는 것처럼 느껴져 아무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가만히 안겨 있는 모양새가 됐다. 그때부터는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낯간지러운 느낌에 그 살이 더는 차갑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밀치고 방 밖으로 나갈 수 있음에도 어쩐지 밖으로 나설 수가 없어서, 그 민망하게 겹쳐 누운 상태로 그냥 수긍하는 사람처럼 눈 감아버렸다.
잠이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심장박동 조용히 느끼고 있으려니 조금 진정이 됐다. 차분해지니까 닿아있는 이주연의 살이 다시 시원하게 느껴져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
술도 많이 먹었고 별이 쏟아질 듯 빼곡한 하늘을 봤다. 취기 오른 채 평소라면 이주연과 말하지 못했을 낯간지럽고 진솔한 얘기를 제법 많이 했다.
바닥은 절절 끓었다.
새벽, 참다못해 일어나 나가려는 저를 뒤에서 끌어안고 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그런 이주연을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누워 엉긴 채 다시 잠들었다.
타임라인처럼 어제 상황을 복기하며 머릿속을 정리해 봐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
어제 고기를 먹었던 캠핑 의자에 앉아 따뜻한 패딩에 파묻혀 커피를 마셨다.
그렇게 혼자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으려니 마당에 저 혼자 있다고 가보라고 하신 건지, 등 떠밀린 듯한 이주연이 한쪽 눈은 아직 뜨지도 못하고 기지개를 켜며 밖으로 나왔다.
“어우, 형. 안 추워?”
“아직까진 시원해.”
털 달린 크록스 신은 그가 성큼성큼 와서 제 옆에 놓인 캠핑용 의자에 앉았다. 밤새 너무 따끈따끈하게 식빵처럼 장판 바닥에 구워졌기 때문에 조금 차가운 바람이 좋았다.
“나 몇 시에 나가지? 어제 해주신 게 많아서 점심은 내가 사드리고 싶은데.”
“뭐 벌써 가요. 좀 더 있다 가.”
“뭘 더 있어.”
“왜. 카페랑 바비큐장 가보자.”
“……그르까?”
“응.”
일어나면 좀 민망해질 수도 있겠는데? 그런 걱정 했었다. 이주연이 별것도 아니라는 듯 붙잡으니까 고민하던 일들은 별것 아닌 일이 되어버렸다. 그냥…. 그럴까. 하루 더 있어 볼까. 그런 생각이 든다.
“근데, 너 어제 좀 취했었어?”
“아니?”
취한 게 아니었다는 말에 누군가 알콜스왑으로 제 뇌를 박박 닦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든 상황에 ‘취중’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는데 이주연의 한 마디가 그 전제를 말끔히 지웠다.
“그래?”
“응. 딱 기분 좋게 마신 거 같아. 형은 취했었어?”
나는 취했던 걸까. 맨정신이었던 걸까.
혼자 미치도록 고민했는데. 무언가가 상대에 의해 순조롭게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아니.”
아니. 나는 안 취했던 거 같아.
안 취했어.
──────────
분위기 좋은 카페가 많이 생겼어요. 여기 저번에 한 번 엄마랑 왔었는데 커피가 맛있더라고.
헤이즐넛 맛 나?
응.
쪼롭, 쪼로롭.
커피 맛있다고 데려왔는데 시즌 메뉴로 적혀있는 “딸기라떼” 글자를 보고 냉큼 그걸 시켜버렸다. 이주연 먹는 걸 보니까 뒤늦게 그 커피가 맛있어 보여 얼른 입 내밀었다. 주연이 잔을 기울여 제가 빨대 물 수 있도록 해준다.
이주연의 이런 다정한 면은 예전부터 존재했던 것인데 우리 사이에 ‘어떤 기류’가 들어차면서 새삼 조금 간지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걸 느끼자마자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아서 냅다 핸드폰 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주연이 자연스레 제가 빨았던 빨대를 가져가 입에 문다.
“맛없어?”
“아니. 맛있어.”
쳐다보지도 않고 그렇게 답한 채 휴대폰에 시선을 박았다. 의미 없이 연락처 창과 단톡방 같은 곳들을 들락날락 거리며 분주하게 손 놀렸다.
여기까지 오게 한 힘은 뭐였을까. 우리 사이에 맴돌았던 수많은 침묵들은?
이주연과 단둘이 남게 되면, 우리는 꼭 어색함에 잡아먹히지 않으려는 사람들처럼 필사적으로 말을 얹고는 했다. 둘이 있는 분위기는 언제나 묘했고 견디기 어려웠으며 저를 흔드는 기분이라 조금 벅차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지금처럼 되기를 고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이게 우리가 바라던 수순이었나?
이주연과 마주 봤다가 다시금 시선을 내렸다. 애꿎은 딸기 라떼를 스트로우로 열심히 저었다.
…왜 나는 초월읍까지 왔을까.
좋다고 느끼는 감정과는 별개로 마음 한편은 심란함이 들어찼다. 도무지 정의 내리지 못하고 여전히 미궁 속인 건 얼굴을 보면 정리 될 줄 알았던 감정들이, 더 복잡해지는 느낌이어서.
그런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이주연은 되게 의연하게 굴었다. 얘는 평소엔 되게 많은 생각을 하고 사는 것처럼 보여도 제가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일엔 화끈한 구석이 있었다. 지금도 별 생각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툭툭 정의 내려 버려서. 그에 맞춰 저도 깊게 생각 하고 싶지 않아진다.
형. 형이 와서 좋아. 형이 나를 생각해줘서 좋아.
.
“오늘은 거실에서 잘까? 어제 너무 더웠지.”
“그럴까.”
“아니면 나 만지면서 자.”
“……그럴까.”
똑같은 대답 하면서 두 번째엔 얼굴이 좀 붉어졌다.
나도 내가 여기 와서 좋아. 너를 보러 와서 좋아.
──────────
멤버들이 북적였다. 오래 쉬고 와서 낸 앨범이니만큼 더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다. 무대 의상으로 갈아입고 대기실에 앉아 저마다 몸을 푸는 멤버들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거울 쪽에서 메이크업을 받고 비어있는 대기실 안쪽 방으로 들어가 SNS에 올릴 사진을 여러 번 촬영했다.
그 때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형. 입술 발랐어?”
“아직, 도시락 아직 안 먹어서.”
주연이 들어온다. 그가 말과 동시에 문을 닫는다. 달칵. 문이 잠기는 소리.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려서 황급히 사진 찍던 휴대폰을 내리고 그와 마주 섰다. 꼭 들어맞는 눈높이.
주연이 얼굴을 가까이 한다.
입술을 붙였다, 떼어낸다.
“야.”
“혼내지 마. 나 어제부터 참았어.”
야, 한마디 했을 뿐인데 선수 쳐서 방어막을 친다. 참나, 너털웃음 지으며 그의 의상이 망가지지 않도록 허리를 쑥 끌어왔다.
“그냥 부른 건데. 쫄?”
“아.”
그에 주연의 표정이 사르르 무너진다. 웃던 얼굴이 고개를 비틀어 다가온다. 콧대가 부딪히고 입을 맞추었다.
내 마음은 송도를 초월해 이곳, 상암동까지 왔다.
+)
이주연, 또 스파이더맨 빤스 입고 왔어? 내놔, 내놔. 그거 내가 버린다. 진짜.
숙소가 달라지고 마땅히 같이 누울 공간이 없어서 몇 번 숙소 근처에 방을 잡고 만났다.
그 놈의 애착 속옷을 만날 때 마다 입고 나오기에 빼앗으려 들었더니, 원래 특별한 날에 입는 거라고 돌려받으려 쫓아오는 게 웃겼다.
아. 알았어. 알았어.
침대에 엉겨 누워서 한참을 웃었다. 둘 다 몸이 눅진해져서 더 이상 붙어먹을 힘은 없고, 나른했다.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깊은 잠을 자기엔 너무 아까웠고… 고민하다가 주연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사진첩 구경은 너무 자주 해서 무심코 그 연락처 한번 스윽, 스윽. 손가락으로 스크롤 내려가며 구경했다.
여전히 바뀌지 않은 저장명.
「이재현 형」
“아, 좀 다정하게 바꿔어!”
“왜, 형도 나 이주연이잖아.”
“그건 그렇지.”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야, 너 근데.”
“응.”
“예전에 전화 잘못 걸었을 때 내 밑에, 뭔, 재한인가 누구한테 전화 걸려다가 잘못 걸었다고 하지 않았냐?”
“……형 기억력 왜 이렇게 좋아?”
“재한이가 내 위, 아래가 아닌데? 이게 왜 잘못 눌려?”
…….
“형.”
“엉.”
“사실.”
“……나 그런 친구 없어.”
.
.
.
뭐야?
야.
야, 이주연!
송도를 초월한 마음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