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Opposite


몰락의 동반

픽스

 

 

 

 

몰락의 동반

w. 픽스

 

 

신입생 시절, 등장부터 화려했던 이재현은 몰락도 화려했다. T대 꽃사슴이라는 다소 낯간지러운 수식어를 달고 있던 이재현은 한순간에 게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사람 많은 곳에서 화려하게도 몰락당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주연은 끔찍한 타이밍으로 그 몰락의 현장을 지나가는 바람에 재현의 화려한 몰락의 현장을 실시간으로 보고 말았다.

 

너 진짜 게이야?”

애들이 다 봤다던데, 너 종로에 있던 거.”

…….”

. 근데 게이가 왜 여자들이랑 하는 소개팅을 가.”

게이면 게이라고 진작 말을 하지 그랬냐. 그럼 우리도 너한테 소개팅 가자고 안 했을 거 아냐.”

아씨, 다음 주에 있을 소개팅은 어떻게 하지? 무용과 애들 이재현 때문에 나온다고 했는데.”

, 그러지 말고 너 게이인 거 아직 우리밖에 모르니까 그냥 다음 주까지만 비밀로 하자.”

 

병신들. 주연은 그 몰락의 현장을 지나며 생각했다. 이재현을 둘러싸고 헛소리해대는 동기들이 너무나 병신들 같았다. 강의실 들어서면 밤새 게임을 하느라 수면 부족이라며 냅다 엎어지던 이재현을 깨워서 소개팅 딱 한 번만 같이 나가 달라고 조르던 건 본인들이었으면서 이제 와선 이재현이 게이인 거 숨기고 소개팅 나간 것처럼 탓을 하고 있다. 더군다나 강의실도 아니고 오만 사람 다 지나다니는 학생관 1층 로비에서 떠들어댄 주제에 이재현이 게이인 걸 자기들만 안다고 하는 것도 병신 같았다. 하지만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건 폭격처럼 쏟아지는 무신경한 말들 사이에서 우두커니 인형처럼 앉아 반박 한마디 하지 않는 이재현이었다. 이재현은 꽃사슴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말 몇 마디 섞어보면 초딩이니 금쪽이니 하는 별명이 새롭게 탄생할 정도로 평소 자기 할 말은 다 하고 가끔은 억지도 부리는, 다소 시끄러운 성격이었는데 그런 이재현은 온데간데없는 것처럼 이 몰락의 현장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게 껄끄럽게 느껴졌다. 한데 주연이 그렇다고 한들 뭐 어쩌겠는가. 주연은 재현과 딱히 접점도 없었고 따지자면 저와 상관도 없는 일이니 신경 쓰지 말자고 생각하며 빠르게 그 현장을 벗어났다. 물론 그 침묵이 못내 마음에 걸려 결국은 한 번은 돌아보게 됐지만.

 

충격을 크게 받았나?’

 

유치한 인간들에게 둘러싸인 상태로 아무 대꾸 없이 의미 모를 미소만 짓고 침묵하고 있는 이재현의 얼굴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예뻤고, 그래서 괜히 더 답답해졌다. 그런데도 주연이 해줄 수 있는 건 없었기에 애써 신경 쓰지 않고 그 현장을 벗어났다.

 

침묵은 소문을 해소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본인이 잘못한 점이 없다면 더더욱. 당연한 논리를 재현은 모르는 것 같았다.

 

한 번 눈에 밟히기 시작하자 계속 밟혔다. 어쩌면 걷잡을 수없이 부풀려지는 소문이 주연의 귀에도 다 들리기 때문에 그럴지도 몰랐다. 게이바에 출입하는 것을 보았다던 시작은 강의실에서 남자랑 섹스하는 걸 목격한 사람이 있다는 단계를 거쳐 재현과 친한 선배들은 물론 몇몇 교수들과도 자고 다닌다는 소문까지 부풀려졌다. 주연은 재현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지만, 그 소문들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이라고 생각했다. 꽃사슴 같은 얼굴을 하고 여전히 유치한 농담을 하고 핸드폰 뒷면에 이상한 포켓몬스터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걸 보면서도 다들 어떻게 그런 저급한 상상을 하는지 주연은 의문이었다. 인간들이 정말 저질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그렇게 이재현이 없는 뒤에서는 이재현을 도마 위에 올려두고 입방아를 찧어대고 낄낄거렸으면서 이재현의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게임 이야기를 하고 은근슬쩍 소개팅을 제안했다. 재현은 순한 얼굴로 몰락했던 어느 날처럼 별 대꾸도 하지 않았고 그런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주연은 명치가 답답해졌다. 소문을 모르고 있는 건가? 그럼 가까운 누군가는 이런 소문이 있으니까 사실을 말하고 다들 헛소리 못 하게 해야 한다고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주변의 인간들도 다들 그 정도로 쓰레기인 건가? 이재현이 없는 저녁의 술집에서는 재현의 사생활을 부풀려 망상하며 씹어대던 인간들이 이재현 앞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척 태연하게 웃고 있는 낯짝을 볼 때면 저도 모르게 속이 거북해졌다. 주연은 자신이 언제부턴가 재현의 일에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원래 남의 일에 오지랖을 부리는 성격도 아니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폭발하는 성격도 아니었는데 재현의 일에는 왜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게 되는지 저도 모를 일이었다.

 

주연의 의문은 생각보다 금방 풀렸는데, 뜻밖에도 의문을 해소시켜 준 건 소문의 주인공인 재현이었다.

 

…….”

너 이름이.”

. 주연이요. 이주연.”

 

늘 그렇듯 느릿한 행동 덕에 수업 끝나고 한참 뒤 강의실을 나가는데 재현이 주연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문 앞을 떡하니 지키고 서 있었다. 순간 움찔하다 이 사람이 왜? 하는 생각에 섣불리 말도 못 꺼냈는데 머쓱한 것처럼 목덜미를 쓰다듬으면서 재현은 주연의 이름을 물어왔다.

같은 과인데 이름도 모르다니. 누군 본인 욕 먹는 거 신경 쓰여서 하루에 몇 번씩 속이 뒤집히는데.

잠깐 억울한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해 보면 서로 대화를 주고받거나 한 적도 없으니 이름을 모를 수도 있겠다 싶어 잠자코 있었다. 빈 강의실 열린 문을 경계선처럼 두고 백팔십 넘는 남성 둘은 멀뚱히 서 있었다. 주연은 기다리고 있었고 재현은 뭔가 할 말이 있는데 쉽지 않은 것처럼 우물쭈물 말을 한참 골랐다. , 그러니까, , 그게. 쉽사리 운을 떼지 못하는 것에도 주연은 차분하게 기다렸다. 이렇게까지 가까이서 마주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보니 왜 꽃사슴이니 하는 별명이 붙었는지 알겠다. 얼굴이 예뻤다. 눈이 반짝였고 속눈썹은 길었고 코는 높았다. 꽃미남이니 잘생겼니, 하는데 가까이서 보니 미인 같았다. 소문이 날이 갈수록 선정적으로 부풀려지는 건 저 얼굴도 한몫하는 걸까 싶은 생각까지 흘러가는데, 재현이 산통 깨는 소리를 뱉었다.

 

, 미안한데 나 좀 그만 쳐다봐주라.”

……. ?”

갑자기 황당한 소리라는 건 알겠는데. 몇 번 눈 마주친 적이 있어서 내가 영 잘못 짚은 건 아닌 것 같아서.”

 

기가 막혔다. 주변에 그렇게 대놓고 헛소리하는 놈들한테는 한마디도 하지 않더니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던 주연에게는 단도직입적으로 쳐다보지 말라고 잘도 말하는 게 어이가 없어서 괜한 오기가 생겼다.

 

쳐다본 적 있는 건 맞아요. 근데 왜 쳐다보지 말라는 건데요?”

너가 나 자주 쳐다본다고 애들이 너에 대해서 이상한 소리 해.”

나에 대해서 무슨 소리요.”

……. 나랑 묶어서 대충 안 좋은 소리.”

누가 그러는데요.”

누구 딱 꼬집어 한두 명이 아니야. 그냥 전체적으로 그러는 거지. 너도 들어본 적 있을 거 아냐.”

…….”

내 소문이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건 알겠는데 막상 엮여 봤자 좋은 소리는 아닐 거고,”

 

그러니까, 이재현은 지금까지 자기를 둘러싼 소문이 어느 지경에 와있는지 안다는 거였다. 상황이 계속 악화하는 걸 알면서도 아무 대응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두며 몰락의 현장에서 빠져나오지 않던 거다. 그런 와중에 주연과 자꾸 눈이 마주치는 까닭은 주연이 그저 자신의 소문에 호기심이 생겨서 관찰하느라 본 것이라고 단정 짓고 있는 거였다. 대체 사람을 뭐로 보고.

 

제가 지금 형 소문이 흥미로워서 형을 자꾸 쳐다봤다고 생각해요?”

. 몰라, 사실 네가 그런 사람은 아닐 것 같긴 한데. 그건 그냥 내 감일 뿐이고 또 모르잖아.”

근데 형, 순서가 좀 잘못된 거 아닌가요.”

무슨 순서?”

저한테 형 쳐다보지말라고 단속하는 게 아니라, 형 두고 이상한 소리하는 그 새끼들을 먼저 단속하는 게 맞지 않냐고요.”

 

오해받는 것이 억울했던 걸까, 아니면 사람 마음을 전혀 몰라주는 게 억울했던 걸까. 어지간하면 비속어는 입에 올리지 않는데 저도 모르게 욱하고 말았다. 주연의 입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거친 단어에 재현이 잠시 멈칫했지만 더는 할 이야기가 없다는 것처럼 본론만 남기고 황급히 돌아섰다.

 

그 새. , 아무튼 그건 나랑 상관없으니까 무시할 수 있는데 너까지 이상한 소문 도는 건 신경 쓰여. 그니까. 앞으로는 조심 좀 해라.”

잠깐만요,”

간다!”

 

주연이 무어라 더 말을 잇기도 전에 손을 붕붕 흔들며 도망치듯 돌아서는 뒷모습을 허망하게 보던 주연은 자신이 재현의 일에 대해서 내내 왜 그렇게 과하게 신경이 쓰였는지 깨달았다.

 

저게 맞는 거잖아. 불편한 게 있으면 직접 말을 해야 하는 거잖아. 그렇게 무시하고 아무것도 안 들린다는 것처럼 구는 게 아니라 나에 대해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짚고 넘어가야 하는 거고 본인도 당연히 그렇게 살아오던 사람 아니냐고.

 

좀처럼 타인의 일로 감정이 들쑥날쑥하지 않던 주연이 답지 않게 씩씩대며 건물을 빠져나가다 문득 깨달았다. 지금까지 이재현이 그 상황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그 허무맹랑한 소문들이 재현 본인에게 그리 큰 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에 무시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다시 말하면 그 소문이 어떤 영향을 크게 끼친다면 그때는 아까 주연에게 말했던 것처럼 짚고 넘어갈 수 있단 뜻이다. 그동안의 재현을 이해하게 되자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대체 자신은 재현을 어떤 이미지로 보고 있었던 걸까? 친분까지 갈 필요도 없이 제대로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던 이재현에 대해서 뭘 안다고 곤란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재현이 자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대처하지 않는다고 신경 쓰고 마음 답답해했던 걸까. 저도 모르는 사이 재현에게 어떠한 이미지를 만들어놓았던 것 같았다. 언제부터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재현에 대해서 키 크고 얼굴 예뻐서 유명한 T대 인기인이자 나와 상관없는 같은 과 동기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던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애들이 너에 대해서 이상한 소리 해.’

나랑 상관없으니까 무시할 수 있는데 너까지 이상한 소문 도는 건 신경 쓰여.’

 

그동안의 의문이 풀리고 조금은 차분해진 마음으로 재현이 했던 말들을 곱씹자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자신을 둘러싼 악의적인 소문들은 본인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고 넘길 수 있었는데 주연이 연관되는 건 신경이 쓰인다는 말이 이상했다. 재현의 소문에 타인이 연관된 건 비단 주연뿐이 아니었다. 교수야 편히 말할 수 없는 상대니 그렇다 쳐도 주변의 친한 선배나 동기들도 재현과 연관되어 입방아에 오르곤 했는데도 지금까지 별다를 것 없이 잘 지내는 것을 보면 주연에게 했던 것처럼 따로 어떤 이야기를 한 것 같진 않았다. 다시 말해, 이재현이 이주연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였다.

 

근데 대체 왜?

 

 

* * *

 

 

재현은 나름대로 주연을 생각해서 주연이 이상한 소문에 연루되지 않도록 경고해준 것이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런 재현의 노력은 오히려 주연이 재현에게 본격적으로 집착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쳐다보지 말라고 했던 게 무색하게 주연은 아예 턱까지 괸 채로 대놓고 재현을 관찰하곤 했다. 덕분에 재현이 말했던 이상한 소문이 주연에게도 붙기 시작했다는 것 역시 체감할 수 있었다. 주연이 이상한 소문에 함께 연루되는 게 싫었으면 주연이 쳐다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보지 않으면 될 일이었는데 그게 잘 안되는지 재현은 한 번씩 꼭 시선으로 주연을 쫓았다. 당연히 눈이 마주칠 수밖에 없었고 그때마다 먼저 피하는 건 재현이었다. 한두 번이야 우연이라는 핑계를 댈 수 있었겠지만, 횟수가 잦아지니 주연과 재현이 아닌 주변 타인들까지도 둘 사이의 묘한 기류를 눈치채게 되었다. 재현만큼 화려하게 캠퍼스에서 이름을 날리고 다니는 건 아니었어도 주연 역시 에타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나름의 캠퍼스 유명인인데다 낯가림이 심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주변에 사람을 달고 다니는 재현과 달리 자신만의 바리게이트가 완벽하게 형성된 탓에 다른 사람과 잘 섞이지 않는 주연이라 흥미는 순식간에 불붙을 수밖에 없었다. 재현과 친밀해 보이는 교수, 선배, 동기들과 엮였을 때보다 주연에게 달라붙은 소문은 빠르게 상승하여 갔다.

재현을 관찰하는 동안 주연은 재현을 둘러싼 소문이 모두 거짓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교수나 선배 같은 아무 들과 뒹굴고 다니는 건 확실히 아니었지만, 소문의 시발점이었던 종로 목격담만큼은 진실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어쩌면 재현은 주연보다 먼저 주연을 신경 쓰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까지 마쳤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처럼 대놓고 재현을 관찰하기 이전에 재현은 이미 주연의 시선을 먼저 알아차렸고, 거기다 그 시선 때문에 주연이 자신과 같이 소문에 연루될 수 있음을 염려해 주연에게 경고해주지 않았던가. 주연이 재현을 자꾸 쳐다본 것에 대한 이유도 나름대로 추리를 마친 것인지 자조적인 어조로 덧붙였던 것까지 생각해보면, 아마도 재현이 주연에게 먼저 어떠한 관심이나 호감이 있었을 것 같다는 답이 나왔다. 단순히 같은 과 동기라서 친해지고 싶다는 유형의 관심이었다면 제아무리 낯가림이 심하다 해도 과 활동을 핑계 삼아 혹은 재현의 주변을 이루고 있는 지인 한 명쯤 뒤져서 편하게 아는 사이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지금껏 말 한마디 섞어본 적 없었던 것을 보면 그런 일반적인 관심, 호감이 아니란 소리다. 재현이 딱히 반박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 소문의 가장 첫 번째를 떠올려 본다. 종로에서 목격되었던 건 사실이었던 거다. 정확하게 말하면 종로의 게이 바 같은 곳. 그런 곳을 드나드는 것이 목격되었음에도 어떤 이유로 갔다 안 갔다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암묵적인 인정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재현은 소문대로 게이가 맞는다는 거다. 그것도 이주연에게 안 좋은 소리가 붙는 게 싫을 정도로 이주연에게 어떤 관심이 있는 게이. 더 나아가 짐작해보자면, 본인을 둘러싼 자극적인 소문이 흥미로울 뿐이고 소문의 대상에게 결코 좋은 감정은 없을 것이라고 자조적인 감정으로 마무리까지 지은 상태의 게이. 그랬구나, 이재현은 이주연한테 관심이 있는 게이였다.

 

 

이렇게 집요하게 관찰하는데도 안 오네?

 

의미 없이 펜만 엉성하게 휙휙 돌리면서 주연은 습관처럼 재현의 뒤통수를 보고 있었다. 재현은 눈치가 빠른 것 같았다. 그러니 다시 한번 쳐다보지 말라는 경고를 하러 가까이 오지 않는 거겠지. 주연이 집요하게 재현을 관찰하는 동안 나름의 어떤 결론을 추측해서 내렸다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절대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다. 전보다 시선이 마주치는 횟수도 줄었고 곱슬이라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를 만진다는 것이 아깝게 챙이 있는 모자를 쓰고 오는 날도 잦아졌다. 쳐다보지 말라던 걸 주연이 들어주지 않자 자신이 알아서 시선을 피하고 주연을 차단하며 소문의 무더기에서 건져내겠다는 것처럼 굴었다.

한 달이 훌쩍 넘어가는 시간 동안 재현의 소문을 듣고, 재현을 관찰해서 내린 여러 가지 가설과 결론 중에 가장 확실한 건 재현은 주연과 다른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피도 안 섞인 남인데 당연한 거 아니냐 할 수도 있지만 그 점을 주연이 깨달을수록 주연은 뭔가 한계치가 임박한 느낌이었다. 자신에게 처한 상황이 말도 안 되더라도 어떻게 할 수 없고 딱히 큰 피해가 아니면 내버려 두겠다는 점이나 멋대로 생각해서 안 될 거야라는 비관적인 결론을 내리고 시도도 하지 않는 점이 주연과 달랐다. 차라리 같은 성격이었더라면 안 그랬을까, 재현이 먼저 알아서 꼬리 내리고 포기해버리자 주연은 오기가 생겼다. 얌전한 성격은 좀처럼 펄떡대지 않았지만, 가끔 이상한 기준으로 버튼이 눌리면 걷잡을 수 없게 튀었다. 턱밖에 안 보일 정도로 모자를 푹 눌러쓰고 강의 시작할 시간에 딱 맞춰 뒤통수 관찰도 못 하게 맨 뒷자리를 차지하는 재현의 의도적인 행동이 주연의 버튼을 눌렀다. 밀어내면 코앞까지 더 성큼 다가가고 아니라고 부정하면 맞는다고 인정하게끔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 툭 건드려졌다. 이상한 소문? 너랑 묶이면 좋을 게 없다고? 그거 말하러 올 때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묶였다는 걸 모르겠냐고. 의도적으로 피하는 재현의 행동에 속에 열이 올라 뒤를 확 돌아보니 주연을 보고 있었던 건지 급하게 고개를 푹 숙이며 시선을 또 피하는 게 보이자 더 열받는다. 강의 시간 내내 교수를 뚫어버릴 듯 노려보면서 주연은 재현을 인식하기 시작한 후로 제게도 달리기 시작한 소문의 꼬리표들을 떠올려봤다. 이재현이랑 이주연이랑 잤다더라. 이 정도 소문은 별것도 아니었다. 다른 과에 썸녀가 있던 이주연을 이재현이 꼬셔서 한 번 하고 찼는데 이주연이 코 꿰어서 쫓아다닌다더라, ? 이주연이랑 이재현 썸타는 사이라던데? 경박하게 울렁대는 소문들은 이미 온라인까지 넘어 들어서 주연의 친구는 킬킬대며 주연에게 에타 게시물 하나를 캡처해 너 왜 우리한텐 커밍아웃 안 함?ㅋㅋㅋㅋ같은 놀림거리까지 제공해주고 있었는데 이재현은 아무것도 모르고 제가 그냥 선 그으면 잘라낼 수 있는 줄 아는 게 어이없었다. 주연은 재현과 달랐다. 적당한 거리 유지해 주며 얌전히 굴었는데 돌아오는 게 본격적인 대화가 아니라 제멋대로 결론 내리고 혼자 피하는 것이라면 더 이상의 거리 유지는 해줄 의사가 없었다. 내가 다치는 게 싫어서 내가 보이는 관심도 모른 체 한다는 게 말이 돼? 기꺼이 소문을 사실로 만들어주겠노라 다짐했다. 몰락의 동반자 그거 기꺼이 해주겠다고.

강의 시간 내내 이를 바득 갈고 있던 주연은 교수가 슬슬 수업을 마칠 낌새를 보이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섰다. 교재를 챙기며 앞자리에 앉은 학생과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던 교수가 잠깐 주연을 보는 게 느껴졌지만 내내 화장실이라도 참은 사람처럼 뒤도 안 보고 짐을 챙겼다. 대체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던 주연이었기에 이런 돌발 상황은 모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덩달아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이재현의 걱정을 증폭시키기에도 충분했고. 빠르게 소지품을 챙기는 주연의 모습에 재현은 괜히 초조하고 불안해져 저도 모르게 다리가 달달 떨렸다. 이주연이 혹여나 저한테 오진 않겠지? 그 전에 먼저 강의실 밖으로 튀어야 하는데. 수업도 다 끝난 마당에 그냥 튀어도 될 법한데 아쉽게도 재현은 주연처럼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수업이 끝났다고 교수가 강의실을 벗어난 후에 자신도 강의실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다소 FM 적인 성격이라 잠자코 주연의 돌발행동이 자신에게 어떤 불똥이 튀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초조한 재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아마도 알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지만- 빠르게 가방을 챙긴 주연은 강의실의 모든 시선이 저에게 따라붙는 것도 무시하고 성큼성큼 재현에게로 다가왔다. 오지 마, 오지 마 제발!

 

.”

…….”

얘기 좀 하죠.”

 

마음속으로 처절하게 빌었던 것이 깡그리 무너졌다. 보란 듯 재현의 앞까지 냅다 걸어온 주연은 재현이 도망도 못 가게 재현의 손목을 꽉 붙잡고 대뜸 말을 걸었다. 재현은 본인이 앉아있는 강의실 바닥만 지하까지 푹 꺼지는 것만 같았다. 수십 개의 시선이 주연과 재현을 주시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재현 본인을 둘러싼 수많은 말도 안 되는 소문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게이인 건 사실이고 그날 종로 게이 바에 갔던 것도 사실이니 딱히 다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교수부터 고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내던 선배들도 섹스 파트너 탈바꿈되어버린 것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런 허무맹랑한 헛소리를 일일이 반박하고 다닐 필요는 딱히 못 느꼈다. 얼토당토않는 소문의 주인공이 되는 건 무슨 박복한 팔자를 타고났는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달렸던 일이었고 덕분에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다. 모든 건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사그라든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다들 재현이 진짜 게이인지 섹스 파트너가 있는지의 진실 여부는 관심 없을 것이었다. 그냥 지금 당장 도마 위에 올려놓고 씹고 뜯고 떠들 대상이면 상관없었던 거겠지. 씹을 대상은 잘나고 인기 있었으면 더 극적일 거였고 거기에 게이’ ‘섹스 파트너같은 자극적인 소문이면 더 즐거울 테니까. 재현의 아웃팅을 두고 누군가는 인싸 이재현의 화려한 몰락이라는 유치찬란한 타이틀 붙이며 비웃었지만, 그것도 그러려니 했다. 애초에 저한테 붙여둔 별명을 봐라, 꽃사슴이래잖냐.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그 몰락의 현장을 지켜보던 이주연이 문제였다. 주연은 재현, 아니 딱히 재현뿐 아니라 제 친구들이 아닌 대다수의 타인에게 큰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재현은 입학 당시부터 주연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물론 얼굴 때문에. 그렇다고 해도 애초에 생활 반경 내에서는 딱히 어떤 인연을 만들 생각은 없었기에 그냥 눈 호강 정도로만 생각하고 말았고 그 몰락의 현장을 주연이 지켜봤던 것에도 아, 민망하게 됐네 정도에 그쳤는데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주연이 자꾸 자신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었다. 저 잘생기고 남한테 관심 없는 애가 나를 자꾸 보네? 하는 정도의 감상이었으니까. 이런 식의 아웃팅이나 누구 한 명 실시간으로 좆되는 현장을 지켜보는 것에 별 면역력이 없어 보여서 나름대로 충격으로 남아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하루 이틀 길면 일주일 정도 신기하게 보다 말겠지 정도였는데 주연은 집요했다. 집요한 시선이 따르는 것을 의식하게 되는 것도 문제였다. 그냥 잘생긴 눈요깃감 헤테로 정도로 생각했던 감상이 자꾸만 주책맞게 설레려고 했다. 뭔가 불편한 게 있는 것 같은 시선으로 가끔은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며 깊은 사색에 빠진 것처럼 재현에게 시선을 고정하는데 시선만으로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가끔 들 정도였다. 이래도 되나? 사실 이상한 취향이 있었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시선이 끈덕지게 제게 붙어있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혹시 이주연도 게이였을까? 소문 때문에 뭔가 동질감 같은 걸 느꼈을까, . 생활 반경에서 수작은 안 부리려고 했는데 그 정도 인물이면.

 

, 이재현이 게이라는 게 존나 신기하긴 한가 봐.”

그니까. 라이벌 한 명 줄었다 이런 느낌일지도.”

에이씨, 저렇게 생긴 얼굴로 살아본 적이 없어서 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네.”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할 말 있는 사람처럼 들러붙는 시선 때문에 재현은 가끔 저와 주연 단둘만이 남겨진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곤 했는데 옆에서 주연을 언급하기 시작한 저급한 입방아를 듣고 단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이재현아, 답지 않게 뭘 혼자 설레고 있냐. 저런 애가 뭐 지가 게이라서 날 보고 있었겠냐고. 딱 호기심이나 불쾌감 그 정도였겠지. 금세 자조적인 결론에 치달아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작 이주연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저 혼자 놀림이라도 당한 것만 같았다. 모르는 사이 이주연의 시선이 제게 꽤 깊게 침투했었나 보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 아냐?”

그러게. 이재현 너 뭐 돈이라도 떼어먹었냐.”

, 아님 혹시 둘이?”

그런 거 아냐. 나 쟤 잘 몰라.”

같은 관데 모르긴 뭘 몰라. . 이재현이 이렇게 부정하는 거 보니까 뭐 있는 거 같은데?”

 

병신들, 진짜. 짜증스레 욕이 튀어나올 뻔한 걸 간신히 꾹 참고 과에 사람이 좀 많냐!” 버럭 질렀더니 그제야 재현에게서 화제를 거두었지만, 재현은 그때 알았다. 자신이 못 참고 반박한 덕분에 이제 아무것도 모르고 저와 상관도 없는 주연은 재현과 한데 묶여 저급한 입방아에 찧어질 것이다.

주연의 시선을 받는 사이 재현은 저도 모르게 주연에게 제 마음을 많이 내어줬던 것인지 점점 불어나는 소문이 처음으로 괴로웠다. 아무 사이 아니라고 했음에도 이미 뒤에서 주연은 재현의 원나잇 상대부터 섹스 파트너는 물론 재현과 막장 드라마 한 편 찍는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이 소문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연은 여전히 재현을 쳐다보는 시선을 거두지도 않았다. 뭔가 불만이 있는 건지 할 말이 있는 건지 처음보다 더 사연 깊어진 시선이라 재현은 평소 하던 것처럼 흘러가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사람이 기껏 충고하면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일부러 사람들 없는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나름대로 걱정에서 비롯된 충고를 해줬건만 주연에게는 씨알도 맥이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오히려 도화선에 불을 붙이기라도 한 것처럼 아예 대놓고 재현을 관찰해댔다. 전에는 할 말이 있는데 못 해서 힐끔대는 분위기였다면 이제는 아예 재현이 뭘 하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지켜보겠다는 것처럼 턱까지 괴고 뻔뻔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당연히 재현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주연의 시선을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재현을 눈으로 좇는 이주연. 누가 봐도 뭔가 있어 보이는 주연과 재현의 관계가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재현의 뒤도 아니고 옆에서 떡하니 둘이 무슨 사이인지를 추궁하고 추리하는 이야기를 해대는 게 괴로웠다. 한편으로는 자꾸만 기대되는 제 마음도 괴로웠다. 소문이 흥미로워 단순히 날 관찰할 수도 있겠지만 계속 그랬다간 너도 분명히 도마 위에 오르게 될 거다. 알아듣게 알려줬음에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재현을 관찰해대는 것에 어쩌면 그냥 단순한 호기심에서 자길 쳐다보는 게 아닌 것 같다는 헛된 기대가 자꾸만 부풀었다. 재현은 체념하고 싶었다. 모름지기 모든 기대를 하지 않으면 실망도 하지 않게 된다. 이주연은 게이가 아니었고 애초에 그 시선이 어떤 호감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호기심 딱 거기 까지겠지. 어쩌면 너도 화려한 몰락이니 뭐니 하면서 누구 하나 짓밟히는 게 그냥 신기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쳐다보지 말라고 했던 말은 싹 씹고 대놓고 쳐다보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처럼 결코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주연의 마음이 뭔지 몰랐다. 한 번 더 경고를 해야 하나? 너 지금 너 뒤에서 무슨 말이 도는 줄 아냐고 줄줄 읊어줘야 집요하게 보던 시선을 좀 거둘까. 거기까지 생각하다 재현은 이내 포기했다. 처음 다가가 경고했을 때와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그때는 주연이 어떤 반응을 보여도 그냥 김이 좀 빠지는 수준이었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경멸하는 시선이라도 느낀다면 마음이 괴로울 것 같았다.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그편이 상처를 안 받지 않을까. 도망치는 것을 선택한 재현은 주연이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면 제가 차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놓고 피하는 걸 느끼면 본인도 알아서 그만두겠지, 그만 쳐다보겠지 정도로 생각했다. 이렇게 집요한 구석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형은 전에도 그러더니 남의 말을 진짜 안 듣네요.”

. 저기. 강의실 나가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

저기, 가 아니고 이주연이라니까요. 그리고 강의실 나가면 형 또 도망갈 거잖아요.”

 

다 틀렸다. 목소리를 낮출 생각도 없다는 것처럼, 아예 다른 사람들도 다 들으라는 것처럼 말하는 주연 덕분에 강의실 안은 침묵 아래로 술렁였다. 주연의 말로 인해 이미 주연과 재현이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 모두가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주연에 대해서 잘 모른다, 아무 사이 아니라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만치서 이 상황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겠다는 것 같은 시선들이 느껴진다.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벌써 아찔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그래도 주연과 자신은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주변 눈치를 보던 재현이 잡힌 손목을 빼내려 팔을 슬쩍 비틀어보지만, 주연은 놔줄 생각도 없다는 것처럼 힘을 꽉 주고 놓지 않는다. 거기까지였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주연은 오늘 아예 날이라도 잡은 사람처럼 입을 놀렸다.

 

형 근데 손목이 왜 이렇게 얇아요.”

뭐라는거야. 그만 떠들어.”

제가 손이 좀 크긴 한데 그래도 형 손목도 너무 얇은데요.”

. 주연아.”

 

교수는 강의실을 벗어난 지 오래였건만 여전히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강의실은 조용했다. 주연과 재현의 일에 관심이 없는 학생들은 강의실에 출렁이는 묘한 분위기를 개의치 않고 벗어났고 다른 학생들은 느릿한 손으로 소지품을 챙기면서 온 신경을 주연과 재현에게로 쏟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든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재현은 주연만큼은 더 이상 도마 위에 오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사정을 하듯 나지막이 주연의 이름을 부르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어물쩍대는 시선으로 책상 모서리만 훑어보던 재현이 대답 없는 주연을 향해 슬그머니 시선을 옮기자 눈이 딱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길 기다렸단 것처럼 주연은 재현을 몰아세웠다.

 

뭐가 그렇게 겁나요.”

내가?”

나 때문에 그래요?”

…….”

난 괜찮은데 뭘 그렇게 걱정해요.”

아니, 뭐가 괜찮은데.”

 

남의 속도 모르면서 주연은 태평해 보였고 재현은 주연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괜찮긴 대체 뭐가 괜찮은데. 뒤에서 지금 네가 무슨 소릴 듣고 있는지 아느냐고. 안 들어도 될 소리를 듣고 있는데. 성질대로 다 쏟아내지 못하는 답답함에 입술만 깨물고 불퉁한 표정이 지어지는데 주연은 쐐기를 박았다.

 

이상한 소문 같이 난다면서요? 여기 있는 사람들도 막 뒤에서 씹겠죠?”

…….”

이미 그러고 있죠? 나도 다 아는데, 나도 형처럼 상관없어요.”

너는 상관이 없으면 안 되지.”

왜요? 난 형한테 관심 있어서 별로 상관없어요.”

 

망했다. 주연의 직구 같은 말에 주변의 시선이 한꺼번에 확 쏠리는 게 느껴졌다. 더 이상 소문은 소문으로 남지 않게 되었다. 뭔가 일을 낼 것 같더라니. 모든 상황을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어진 재현은 다 포기한 것처럼 한숨을 쉬면서 쓰고 있던 모자를 확 벗어버렸다.

 

너 이제 다 망했다.”

형은 진작 망했잖아요.”

어쭈, 놀리냐?”

같이 망하는 게 좀 더 낫지 않아요?”

뭐래.”

형도 나한테 관심 있잖아요.”

…….”

뒤에서 씹는 놈들이 병신들인 거지, 소문 좀 나면 어때요.”

 

주연의 말이 찔리긴 했던 것인지 강의실을 여전히 지키고 있던 많은 인원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재현의 비어있는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면서도 주연은 재현의 손목을 여전히 쥔 채로 놓지 않았다. 손목을 꽉 쥐고 있는 주연의 큼지막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재현은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 재현은 다 체념하고 받아들인 상태로 덤덤히 고백했다.

 

맞아, 나도 너한테 관심 있어.”

그쵸, 알고 있었죠.”

…….”

소문 많던데 뭘 사실로 만들어볼까요.”

. 너도 정말 제 정신은 아니구나.”

 

그래, 본인이 괜찮다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하겠어. 몰락의 동반자가 되어 버린 주연과 재현은 나란히 손을 잡은 채로 어느덧 텅 비어버린 강의실을 지키고 있었다. 집요하게 쫓아오던 시선들도, 허무맹랑하고 저급한 소문도 존재하지 않는 조용한 강의실에서 한참 이어지던 침묵을 주연이 깼다. 아무래도 원나잇 소문은 억울하니까 썸녀 있던 저를 형이 꼬신 걸로 할까옇. ……. 미친놈.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