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Opposite


마마보이는 관심이 필요해 中

최감

원래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잖아.”

 

새까만 탄산음료가 반투명한 빨대를 타고 재현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짜고 기름진 감자튀김을 몇 개씩 집어먹는 동안에도 건너편에서는 아무 말이 없다. 너무 직설적이었나. 그래도 그런 말이 있는 걸 어떡해. 재현은 쩝쩝 소리를 내면서 눈을 들어 주연을 보았다. 반도 넘게 남은 햄버거를 손에 쥐고서 저를 빤히 응시하는 두 눈이 약간은 서늘한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한다. 그러자고 용돈 털어서 비싼 햄버거까지 사주는 거니까.

 

나는 우리 엄마가 진짜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어. 안 만나는 게 제일 좋긴 한데.”

…….”

솔직히 너도 아빠 말고 엄마랑 같이 살았으면 나처럼 생각했을걸.”

 

근데 얘는 아까부터 왜 말이 없어. 재현은 휴지에 번들거리는 손가락을 닦았다. 햄버거가 나오자마자 잘 먹겠습니다라고 예의 바르게 말한 이후로 먹는 행위에만 입을 쓰고 있는데, 그마저도 그리 복스럽게 먹는 편은 아니었다. 제가 듣기 불편할 수도 있는 소리를 늘어놓은 건 인정한다. 하지만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마땅했다. 입 꾹 다물고 있을 거면 문자 답장은 왜 하고 여기까지 왜 나왔대.

 

너는 뭐, 할 말 없어?”

 

참다못한 재현이 한마디 하자 주연이 느릿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할 말이 없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재현의 말을 듣고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중이었다. 몇 시까지 어디서 만나자는 재현의 문자에 알겠다고 답장할 때까지도 주연은 아빠의 연애를 믿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아빠는 연애를 숨길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숨기지 못했다. 일할 때를 제외하고는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만약 지금 연애를 하고 있다면 티가 나야 하는데, 바로 어젯밤만 떠올려봐도 지극히 평범했다.

 

그러니까 재현이 착각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바로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겠지. 주연은 손에 들린 햄버거를 얌전히 내려놓았다. 듣자 하니 엄마를 보통 아끼는 아들이 아니었다. 저를 찾아온 이유도 뚜렷하다. 엄마 남자 친구의 아들과 비밀리에 어울려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별을 종용하려는 것이다.

 

우리 아빠랑 연애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우연히 문자 내용 봤어. 내 이름 얘기하면서 나 먹으라고 과자도 사주고.”

과자?”

 

주연이 위쪽으로 눈을 굴렸다. 어떤 과자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건 아빠가 얼마 전에 해외 출장을 다녀오면서 사 온 것이었다. 캐리어에 한가득 있길래 왜 이렇게 많이 사 왔냐고 물었더니 선물용이라는 대답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만약 그 선물을 받는 친구에게 자식이 있다면 이름쯤은 알 만도 했다.

 

그게 다예요?”

그게 다냐고?”

그러니까 제 말은, 둘 다 부인 못 하는 확실한 증거가 있나 해서요. 예를 들면 애정 표현이 담긴 내용이라거나 같이 찍은 사진이라든지.”

 

주연이 생각하기에 재현이 내세우는 증거는 증거라고 지칭하기도 뭣했다. 그것도 모자라 제 말에 빠르게 흔들리는 눈이 이어질 대답을 대놓고 흘렸다.

 

시간이 없어서 다 보진 못했어. 그래도 딱 봐도 뭔가 있는 분위기던데. 최소 썸.”

형 여자 친구 몇 번 사귀어봤어요?”

?”

경험이 많아서 잘 아는가 해서요.”

 

주연의 질문에 재현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솔직해지자면 날 때부터 인물 좋다는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덕에 고백은 많이 받아봤다. 그런데 매번 사랑의 작대기가 빗나가는 바람에 연애는 딱 한 번 해봤다. 연애 많이 못 해본 게 이 나이에 이상하거나 부끄러울 건 없지만, 굳이 알리고 싶지도 않은 사실이었다. 특히 눈앞의 상대는 적어도 연애를 두 번 이상은 해봤을 거 같은 성숙한 중학생이니까.

 

네가 실제로 못 봐서 그래. 진짜 딱 보면 느낌이 와.”

 

재현이 유독 바삭바삭해 보이는 얇은 감자튀김을 집으며 두루뭉술하게 대꾸했다. 아까보다 자신감이 떨어진 목소리였다. 주연은 재현의 시선이 닿지 않는 틈을 타 소리 없이 웃었다. 누가 봐도 곱상하니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는 얼굴인데 경험은 별로 없는 모양이다.

 

아무튼, 너 나랑 앞으로 자주 봐야 해.”

알았어요.”

그리고 존댓말 쓰지 말고 반말 써. 어차피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 , .”

너 게임 좋아해?”

 

중학생 중에 게임 싫어하는 애가 몇이나 될까. 주연은 고민 없이 응, 하고 대꾸했다.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반짝거리는 눈에 하늘의 별들이 촘촘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피씨방은 재현의 두 번째 집이었다.

 

게임 뭐 하는데? ? 피파? 서든? 옵치?”

……

빨리 먹고 피방 가자. 잘 못해도 형이 캐리해줄게.”

 

주연이 무슨 게임을 즐겨 하든 집으로 갈 생각에 신이 난 재현이 콜라 컵 얼음 사이에 박힌 빨대를 뺨이 홀쭉해지도록 빨았다. 금방 드러난 바닥과 비스듬하게 닿은 빨대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 나이대 남자애들이 친해지는 방법에는 게임만큼 쉬운 게 없었다. 재현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 주연을 피씨방으로 이끌었다. 나란하게 앉아 대화를 나누며 게임을 하다 보면 꽤 친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주연이 게임을 썩 잘하진 못해 팀전을 할 때마다 머리 뚜껑이 열리는 순간이 빈번하게 찾아왔지만, 꾹 참다 보면 보상처럼 유의미한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재현이 파악한 주연은 첫째, 순했다. 아무리 화나는 상황에서도 크게 짜증을 부리는 법이 없었다. 물론 목소리 자체가 작은 편에 속해 화를 내도 딱히 위협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이성적인 타입 같았다.

 

둘째, 예스(yes)맨이었다. 입맛이 까다롭지 않아 무얼 먹으러 가자고 하든 군말 없이 따라왔고, 재현만 아는 곳에 가거나 게임을 할 때도 빼지 않았다. 어지간해서는 부정적인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나이 때문이라기엔 고작 한 살 차이였다.

 

셋째, 공부를 꽤 하는 편인 듯했다. 늘 메고 다니는 가방에는 문제집과 노트,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있었다. 문제집과 노트는 그렇다 쳐도 책을 읽는다는 게 주목할 만한 점이었다. 원래 책은 읽는 놈들만 읽었다. 재현은 일찍이 책과 담쌓은 쪽이었기 때문에 주연에게 박학다식한 면이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주연에 대한 인상이 점점 좋아지다 보니 재현은 엄마가 핸드폰을 붙잡고 있어도 예전만큼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았다. 듣기로는 사업가랬으니 돈도 많을 터. 아들과 성격이 비슷한 사람이라면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물론 주연과 형제가 되는 건 기분이 이상할 것 같긴 하지만 아직은 속단하기 이른 미래였다. 식 당일까지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결혼이라고 했다.

 

재현과 주연이 알고 지낸 지도 한 달째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재현의 경계심이 희미해질수록 대화 주제는 어른들의 비밀 연애에서 일상 소재로 옮겨갔다. 절친한 형 동생 사이라고 정의할 정도로 성격이 잘 맞진 않아도 크게 불편한 건 없었다. 어쨌거나 재현은 엄마가 주연의 아빠와 연애를 하는 한 주연의 옆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고 있었고, 주연은 이미 아빠한테서 연애를 하고 있지 않다는 답변을 듣기까지 했지만 여전히 재현의 착각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고로 평범한 만남이 이어지는 중이었다.

 

놀이공원 추로스가 진짜 맛있는 거 알지. 놀이공원 가면 꼭 먹어야 해.”

 

재현이 얇은 종이 포장지에 난 절취선을 따라 추로스를 반으로 갈랐다. 한입 베어 무는데 방금 튀긴 걸 받아와서 그런지 더 맛있었다. 학교 근처 패스트푸드점에 추로스가 신메뉴로 나왔다며 같이 먹으러 가자는 주연의 문자에 나 오늘 친구들이랑 피방 가기로 했는데ㅜㅜ대신 ㅇㅋㅇㅋ를 보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주연이 먼저 어딜 가자고 연락해오는 경우는 잦지 않아서 긴 고민 끝에 택한 방향이었다. 어차피 주연과 만나도 피씨방은 갈 수 있으니까.

 

놀이공원 자체도 좋아해?”

좋아하지. 근데 나 빠르게 돌아가는 놀이기구는 잘 못 타.”

멀미 나서?”

.”

 

주연은 손가락에 묻은 설탕을 휴지에 문질러 닦으며 지난주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재현이 영화를 보러 가자길래 같이 버스를 탄 적이 있었다. 그날따라 앉을 자리가 없는 데다 차가 유독 덜컹거려 손잡이를 꽉 잡아야 했는데, 두 정거장 정도가 지나자 재현이 손잡이를 잡느라 올라간 팔에 머리를 기대다시피 하더니 달팽이관이 약해서 쉽게 멀미를 한다고 했다. 입술까지 깨물어가며 미간을 찡그리길래 자리가 나자마자 재현을 앉히고 창문을 열어 바람을 쐬게 했다. 돌아가는 길에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재현에게 고집을 부려 지하철을 탔다. 본인은 그런 상황이 익숙할지 몰라도 지켜보는 사람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신경이 쓰였다.

 

지금이 딱 놀러 가기 좋은 날씨인데.”

 

재현의 시선이 손에 들린 추로스에서 창밖으로 향했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저 새파란 하늘은 이번 주말까지 이어질 거라고 했다. 더 추워지기 전에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겨울이 다가오면 포근한 이불이 있는 침대 위에서 하루하루를 보낼 계획이었다.

 

주연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재현에게 눈을 돌렸다. 즐거운 생각에 빠진 듯 올라간 입꼬리와 긴 속눈썹 아래로 두툼한 애교살이 시선을 붙들었다. 저와 다르게 선이 부드러워서 그런 건진 몰라도 가끔 이렇게 얼굴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묘해졌다. 저렇게 생긴 사람과 아는 사이라는 게 신기했다. 재현이 착각의 늪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영영 모르는 사이로 남았을 가능성이 컸다. 그건 좀 아쉬운데. 주연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다 문득 떠오른 기억에 입을 열었다.

 

이번 주말에 갈래?”

놀이공원 가자고?”

아빠 아는 사람이 관계자라서 아빠한테 얘기하면 공짜로 표 구할 수 있어.”

 

주연이 바람난 엄마와 갈라서고 아빠와 가장 먼저 한 일은 놀이공원에 가는 것이었다. 아빠는 지인이 종일 이용권을 선물로 줬다며 하늘이 깜깜해질 때까지 드넓은 공원을 주연과 함께 돌아다녔다. 그날 퍼레이드 분장을 한 배우들과 찍은 사진은 거실 수납장에 둔 작은 액자 대열에 당당히 자리 잡았다. 그 즐거운 기억이 이제는 눈을 반짝이는 재현에게로 이어질 참이었다.

 

진짜? 대박, 너희 아빠 짱이다.”

토요일에 시간 괜찮은 거 맞지?”

무조건 가야지. 개장할 때 들어가서 퍼레이드까지 보고 오자.”

 

재현이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나 놀이공원 진짜 오랜만에 가는 거거든. 멀미약도 먹고 가야겠다. 날씨 어떤지 아침마다 확인해야지. 잔뜩 신이 난 목소리에 주연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덕분에 주말이 기다려졌다.

 

 

 

 

[형 우리 놀이공원 갈 때 교복 입자]

-[?]

[교복 입고 놀면 더 재밌을 거 같아]

[교복 입었는데 학교 안 가고 놀이공원 가는 거잖아]

[약간 일탈하는 느낌?]

-[ㅋㅋㅋㅋㅋ 알았어~]

-[(이모티콘)]

 

왜인지 자판을 두드리는 얼굴이 그려지는 답장 아래로 우쭐거리는 흰 곰 이모티콘이 도착했다. 주연은 못 말린다는 듯이 웃으며 천장을 보고 누운 몸을 옆으로 돌렸다. 게임에서 이겼을 때 짓는 표정이랑 되게 비슷한데. 다시 들여다봐도 감상은 같았다. 귀여워.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벌써 내일이 토요일이었다. 가져갈 것들을 챙기고 드레스 코드까지 정했으니 늦잠만 자지 않으면 완벽했다. 주연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거실로 나갔다. 아빠가 소파에 앉아 배구 경기를 보고 있었다. 친구와 놀이공원에 가게 됐다는 아들의 말에 어김없이 입장권을 구해준 아빠는 재밌게 놀고 오라며 용돈까지 넉넉하게 쥐여 주었다. 덕분에 모든 게 순조로웠다. 아빠와 놀이공원에 갔을 때만큼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연은 부엌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조용히 뒷정리를 하고 들어가려는데 아빠가 발목을 잡았다.

 

아들, 내일 몇 시에 나가?”

…… 여덟 시 반 정도에?”

다 놀고 나올 때 아빠가 데리러 갈까? 늦게까지 있을 거라며.”

 

주연이 대답 대신 눈을 굴렸다. 아빠가 데리러 온다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재현이 단칼에 거절할 것 같았다. 엄마 남자 친구와의 선 만남이라니. 저부터 재현에게 한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 얘기를 듣자마자 질겁하는 재현을 상상해본 주연의 몸이 작게 떨렸다.

 

아냐, 괜찮아. 어차피 열 시에 문 닫아서 그 전에 나올 거거든.”

그래도 집까지 한 시간 반에서 넉넉하게 두 시간은 잡아야 하잖아. 그럼 거의 열두 시인데 너무 늦는 거 아니야?”

 

아빠가 운전기사를 자처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다. 한창 바쁠 땐 몇 주간 집을 비우기도 하니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은 게 하나뿐인 아들을 향한 아빠의 마음이라고 했다. 주연도 아빠의 노력이 싫진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사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존재했다.

 

졸다 보면 금방 도착해. 그리고 지하철이나 버스 끊길 시간도 아닌데 뭐.”

 

자정을 넘겨서까지도 운행하는 게 지하철이고 버스였다. 더군다나 아무리 늦게 나와도 자정 전에는 집에 도착했다. 나이를 걸고 넘어지기에는 다소 성숙한 외모라는 걸 주연은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다. 재현이라면 또 모를까.

 

아들.”

 

학교가 집 근처인 저와 다르게 지하철로 네 정거장 거리라는 재현은 같이 가려는 놀이공원과 좀 더 가까웠다. 가는 길에는 좀 더 늦게 타고 돌아가는 길에는 좀 더 일찍 내린다는 뜻이었다. 하늘이 어두워져도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혼자 가기 무서워한다면 집 앞까지 같이 가줄 의향도 있었다.

 

여자 친구 생겼어?”

?”

 

불쑥 치고 들어오는 물음에 주연이 티 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라는 이유로 심장이 정직하게 철렁거렸다. 아빠도 여자 친구가 있냐는 말을 듣고서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니? 아는 형이랑 가는 건데?”

 

한층 크고 높아진 목소리와 약간은 경직된 얼굴이 억울한 심정을 호소했다. 그게 더 의심스럽다는 걸 주연은 알지 못했다. 눈앞의 불을 끄는 데 급급해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저번에 얘기했을 때는 친구랑 간다고 하지 않았어?”

…… 아는 형이나 친구나 비슷한 거니까. 어차피 한 살밖에 차이 안 나.”

그래? 그렇구나.”

 

아빠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주연은 침을 꿀꺽 삼키고 아빠의 눈치를 살폈다. 대놓고 계속 의심하는 것보다 저런 반응이 더 찝찝했다. 애매한 느낌의 수긍이 곧 수면 아래의 의심이었다. 꼭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짜 여자 친구 아니라니까.”

알았어. 믿을 테니까 혹시 마음 바뀌면 아빠한테 연락해. 어린애들끼리 밤에 돌아다니면 걱정되잖아.”

 

주연은 아빠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눕자마자 핸드폰부터 건드렸다. 재현이 추가로 보낸 문자는 없었다. 대화가 그렇게 끝났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주연은 픽 실소를 흘리고 눈꺼풀을 떨어뜨렸다. 아직 열 시도 되지 않았지만 얼른 잠들고 싶었다.

 

 

 

 

약속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온 재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근처 약국으로 가 멀미약을 사 먹는 것이었다. 버스를 타고 오래 이동해야 하는 데다 둘이서 놀러 가는 만큼 주연 혼자 정신 사나운 놀이기구들을 타게 하는 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약을 먹고 삼십 분 정도 지나면 효능이 나타나니 놀이공원에 도착할 즈음에는 어지럼증을 잘 느끼지 못하는 몸이 될 수 있었다. 사실 긴 줄에 합류할 주연을 혼자 기다릴 자신이 없기도 했다.

 

주연의 제안대로 입고 나온 교복은 확실히 눈에 띄었다. 예전에는 토요일에도 학교에 갔다는데 이제는 그러질 않아 거리에서 교복을 입은 건 저뿐이었다. 재현은 조금 부끄럽지만 꾹 참아보기로 했다. 주연의 문자를 받고 검색해보니 실제로 주말에 교복을 입고 놀이공원에 가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대부분 어른에 커플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곳에서만큼은 어깨를 빳빳하게 펴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재현은 지하철을 타고 제집 근처 정류장으로 온 주연과 놀이공원으로 한 번에 가는 버스를 탔다. 다행히 처음부터 앉을 자리가 있어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약 기운이 제대로 돌지 않은 재현이 얼마 못 가 멀미를 했고, 주연이 너른 어깨를 빌려주었다. 갈 길이 머니 도착할 때 깨워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재현이 별수 없이 그대로 까무룩 잠들어버리면 주연은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머리가 흘러내리지 않게 손으로 보호막을 쳤다. 그 버스 안에서 유일하게 교복을 입은 중학생과 고등학생은 승객들의 시선을 받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환상의 나라로 향했다.

 

주말의 놀이공원은 개장에 맞춰 가도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친구부터 가족, 연인까지 다양한 관계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저마다 즐거운 에너지를 뿜으며 넓은 공간을 누볐다. 그 속에는 교복 차림도 꽤 많았다. 주연은 롤러코스터의 긴 줄에 합류해 대기하는 동안 진지하게 놀이기구 위치가 인쇄된 팸플릿을 살펴보는 재현을 카메라에 담았다. 버스에서 골골거릴 땐 언제고, 놀이공원에 들어가자마자 약빨이 제대로 돈다며 자신만만해하던 얼굴을 떠올리면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재현이 왜 그렇게 웃냐고 물어봐도 별거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정확히 어디라곤 말 못 하지만 속에서 가려운 느낌이 퍼져 입꼬리가 자꾸만 꿈틀거렸다.

 

사람이 원체 많다 보니 놀이기구를 몇 개 타지도 않았는데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조금이라도 더 놀고 늦게 점심을 먹을지 남들처럼 밥부터 먹고 놀지 고민하다 에너지를 많이 소비한 탓에 배부터 채우기로 했다. 계산은 주연이 했다. 엄마 카드를 꺼내는 재현의 손을 만류하고 고집을 부린 결과였다. 입장권을 구해준 대가로 점심을 사려고 했던 재현으로서는 결국 큰돈 쓸 거리를 찾아 나서야 했다. 이를테면.

 

기념품점 구경할래?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사줄게.”

 

가격이 팝콘처럼 튀겨진 기념품이라든지. 재현은 주연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기념품점으로 들어갔다. 수많은 상품이 진열된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건 뭐니 뭐니 해도 동물 머리띠였다. 당장 가게 밖만 둘러봐도 머리띠를 쓰지 않은 사람보다 쓰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월등히 많았다.

 

주연, 너 머리띠 하나 할래? 이거 써봐.”

 

재현이 눈앞에 있는 여우 머리띠를 집었다. 고민 없이 잡은 것치곤 주연과 꽤 어울릴 것 같았다. 주연은 순순히 머리띠를 받아 썼다. 제대로 쓴 건지 몰라 거울을 보려는데 재현의 손이 먼저 다가와 귀에 걸린 머리칼을 정리해주었다. 뾰족한 주황색 귀가 예상한 대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냥 네 거네.”

잘 어울려?”

. 그거 하고 다녀, 형이 사줄게.”

이거 얼마……

사준다고 하면 그냥 받아.”

 

재현이 조금은 뾰족하게 대꾸하는 바람에 주연도 가격표를 확인하는 과정을 생략했다. 대신 구경 중인 재현에게 곰 머리띠를 내밀었다. 반달 모양의 갈색 귀가 퍽 귀여웠다.

 

형은 이거.”

이거 쓰라고? 이거 곰 아니야?”

 

많고 많은 동물 중에 왜 하필 곰이람. 재현은 덩치가 크고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곰을 떠올리며 머리띠를 썼다. 예상한 대로 아기곰 같은 귀여운 자태에 주연이 눈꼬리를 잔뜩 휘며 웃음을 터뜨렸다.

 

, 형이랑 너무 잘 어울리는데? 귀엽다. 거울 봐봐.”

 

주연이 재현의 팔을 잡아 거울 앞으로 당겼다. 어린 곰과 여우가 비추어졌다. 재현은 머리 위로 생긴 귀를 만지작대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것 같긴 했다. 그렇지만 저를 대놓고 귀여워하는 주연의 반응은 좀 간지러웠다. 그래도 내가 형인데.

 

바로 옆 거울 앞에서는 교복을 입은 성인 커플이 머리띠를 쓴 채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주연은 그들을 곁눈질하고 재현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놀이공원까지 왔는데 아직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

 

우리도 거울 사진 찍을래?”

어어, 그래.”

 

재현이 거울 방향으로 카메라를 켰고 주연은 얼굴 간의 거리를 조금 좁혔다. 잘 나오는 것 같은 각도를 찾고 촬영 버튼을 여러 번 누르는 동안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것부터 시작해 엄지를 세우거나 브이(V)자를 만들고 익살스러운 표정도 지어보았다. 둘만의 사진이 저장 공간에 차곡차곡 쌓였다.

 

사진 촬영이 끝나자마자 재현은 머리띠를 벗고 둥그런 모양의 귀를 빤히 바라보았다. 주연이 어울린대서 쓰긴 썼는데, 사실은 목이 간지러울 정도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근데 나 곰 안 닮았거든?”

 

그리고 그건 주연도 인정하는 바였다. 강아지라면 또 모를까, 포메라니안 같은.

 

그럼 뭐 닮은 거 같은데?”

 

주연의 물음에 재현이 빠르게 눈을 굴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슴 머리띠가 시야에 들어왔다.

 

사슴?”

 

재현은 냉큼 머리띠를 집어 쓰고 주연을 보았다. 높게 솟은 뿔과 재현의 얼굴을 번갈아 본 주연이 긍정적으로 호응했다.

 

맞네. 형 눈망울이 사슴 같잖아.”

 

뭐라는 거야. 재현이 단박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눈이 예쁘다는 소리는 차고 넘치게 들어봤지만 주연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왜인지 열이 확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못 볼 꼴을 보이게 될 것 같아 서둘러 머리띠를 벗자 영문을 모르는 주연이 머리 위로 물음표를 그렸다.

 

? 별로야?”

그냥…… 그냥 이거 할래. 사슴은 뿔이 너무 커. 다 쳐다볼 거 같아.”

 

재현은 아까 내려놓은 곰 머리띠를 쥐었다. 그와 동시에 저를 귀여워하던 주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아. 뜻 모를 한숨이 짧게 터져 나왔다.


2022